춘곡 정탁 묘(경기 기념물 173호)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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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은 왕릉과 묘지 안내를 하다보니 새로운 묘를 찾을 기회가 없었다가 번개 답사로 파주 권역의 광나루 미답 묘지만을 골라서 찐기님의 안내로 많은 곳을 다녀 왔습니다. 실제로 가 보니 안내가 없으면 찾기가 힘든 곳이 많았습니다. 찐기님이 찾기 어려운 곳을 두 번씩이나 가서 찾기도 하고, 못 찾기도 한 곳을 모두 가 볼 수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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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차 공간에 차를 세우고 좌측으로 돌아서 올라가야 합니다. |
▲ 정탁 선생의 묘역 전경 |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인 정탁(鄭擢, 1363~1423)의 묘이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축은(築隱), 호는 춘곡(春谷) 이다. 정탁은 1382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춘추관 수찬, 사헌규정, 좌정언, 호조좌랑, 병조좌랑을 거쳐 광흥창사 등을 역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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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분 좌우를 석축으로 쌓고 좌우가 앞으로 튀어 나왔습니다. 주변에 있는 황희정승 묘의 봉분 앞 부분과 비슷합니다. |
병조좌랑때 척불(斥佛)한 죄로 극형을 받게 된 김초(金貂)를 정몽주와 함께 구해 냈다. 1392년 이성계를 도와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고 사헌지평, 교주강릉도안렴부사(交州江陵道按廉副使)를 거쳐 대장군으로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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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인석과 좌측 석축 안쪽 모습 |
1396년 중추원 우승지로 있을 때 전년부터 조선과 명나라의 현안문제로 대두된 표전문제(表箋問題)의 찬표인(撰表人)으로 명나라에 가서 해명하고 돌아와 좌승지를 거쳐 1398년 중추원부사가 되었다. 1398년 청성군(淸城君)에 봉하여 졌다. 제1차 왕자의 난때 방원을 도와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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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석과 묘비 그리고 누측 석축 안쪽 모습 |
이어 첨서중추원사, 춘추관대학사, 정당문학을 거쳐 지의정부사, 삼사우사를 지냈다. 1411년 의정부참찬사가 되고 이듬해 정조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에 진봉 되었다. 그 다음 1421년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우의정에 올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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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역 좌우 측면에서 바라 본 모습입니다. |
묘역은 전형적인 고려 시대 양식을 따랐으며 봉분 전면 양쪽을 길게 늘여 호석을 쌓았다. 봉분 가운데 상석과 상석의 우측 아래에 비석을 세웠으며 양쪽으로 문인석을 각각 세웠다. - 파주시청 홈페이지 내용 발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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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역 정면과 후경 모습입니다. |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홈페이지 2006년 4월 10일자 보도 내용 일부 발췌
파주시 월롱면 덕은리 경기도 기념물 제173호인 정탁(鄭擢·1363∼1423)의 묘는 지난해 10월경 수난을 당했다. 봉분 뒤편이 지름 70cm, 깊이 1.5m가량 크기로 파헤쳐져 있었다. 석회층이 뚫리지는 않았지만 부장품 일부가 도난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묘는 직사각형 모양으로 고려 말 무덤 양식을 잘 보여 주는 문화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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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곡 정탁 묘역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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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표 ↑ 위의 중간 부분에 춘곡 정탁 묘역이 있습니다.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월롱면 덕은리 산 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