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KBS 대하드라마 부활 소식을 처음 접한 것은 2021년 1월 14일자 스포츠서울을 통해서다. “KBS도 5년 만에 대하사극 부활을 예고했다. 2016년 KBS1에서 방송한 ‘장영실’ 이후 끊겼던 명맥을 다시 이어가겠다”는 내용의 기사가 그것이다. 알고 보니 KBS가 수신료 인상안을 이사회에 상정했는데, 거기에 대하드라마 제작도 들어 있었다.
양승동 사장이 수신료 인상 필요성을 밝히면서 직접 언급한 대하드라마 제작은 5월초 윤곽을 드러냈다. 요컨대 “KBS는 … 조선 태종 시기를 배경으로 한 32부작 대하사극을 선보인다. 이는 최근 대하사극에 대한 시청자의 요구가 다시 생기기 시작하고, KBS도 수신료 인상을 주장하면서 공영방송의 역할을 강화해야 하는 상황이라 대하사극의 부활을 결정하게된 것”(스포츠서울, 2021.5.10.)이다.
대하드라마 부활은, 이를테면 공영방송인 KBS가 대규모 정통 사극을 통해 수신료 가치를 보여줘야 한다는 지적에 부응한 셈이라 할 수 있다. 근데 2016년 1월 2일 첫 전파를 탄 ‘장영실’은 3월 26일 종영했다. KBS가 직접 제작⋅방송한 대하드라마 ‘장영실’은 왕이나 세자가 아닌 신하를 내세운 24부작 드라마다.
‘KBS 대하드라마’를 표방했지만, 일단 24부작이란 점에서 보통의 미니시리즈 같다는 인상이 더 강했던 ‘장영실’로 기억한다. 같은 해 MBC창사55주년 특별기획 ‘옥중화’(2016.4.30.~11.6)가 당초 50부작에서 1회 늘어난 51부작으로 7개월 가까이 방송된 것과 비교해봐도 24부작짜리 대하드라마는 좀 그렇다.
아무튼 ‘장영실’의 후속 대하드라마는 2017년 1월 방송 예정 ‘정약용’으로 알려졌었다. 대하사극 ‘정약용’이 엎어졌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2016년 9월초였다. 연정훈이 타이틀 롤을 맡고, 12부까지 대본이 나오고, 출연진의 대본 리딩까지 잡혀있던 ‘정약용’의 제작 무산 소식이었다. 앞으로 TV에서 정통 대하사극을 볼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소식이기에 충격이 컸다.
이후 간혹 대작이란 이름으로 ‘아스달연대기’ㆍ‘미스터 션샤인’ㆍ‘지리산’ 이라든가 시대극 ‘이몽’ㆍ‘녹두꽃’등이 전파를 탔지만, KBS 대하드라마 없이 그렇게 5년 넘게 흘러갔다. 마침내 2021년 12월 11일 밤 KBS 대하드라마 ‘태종 이방원’이 첫 방송을 시작했다. 5년 만에 대하드라마 부활 소식이 알려졌고, 5년 11개월, 그러니까 약 6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이전에 했던 방송사 직접 제작이 아닌 KBS 대하드라마 최초의 외주 작품으로 알려진 ‘태종 이방원’은 시청률 8.7%(닐슨코리아 전국기준. 이하 같음.)로 출발했다. ‘역사저널 그 날’과 ‘다큐멘터리 3일’ 등 자사 다른 프로그램에서 밤 9시 40분 방송 운운하며 노골적 홍보를 한 것 치곤 썩 높은 관심의 시청자 반응은 아닌 첫 회 시청률이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론 무난한 출발로 보이지만, 이는 ‘장영실’ 첫 방송 시청률 11.6%보다 못한 수치이기도 하다. 제8회에서야‘태종 이방원’은 두 자릿 수 시청률로 올라섰다. 최고 시청률은 11.7%(28회), 최저는 6.7%(6회)다. 최종회 시청률은 11.5%다. 24회 내내 두 자릿 수를 유지하며 평균 시청률 11.6%를 기록한 ‘장영실’보다 못한 ‘태종 이방원’이다.
일단 때 아닌 악재가 발목을 잡은 형국이라 할 수 있다. 제7회 방송에서 이성계(김영철) 낙마 사고 장면이 있는데, 와이어로 쓰러뜨린 그 말이 촬영 1주일 후 죽은 게 알려지면서 동물학대 논란이 불거졌다. 드라마 폐지 청와대 국민청원까지 제기되는 등 여론의 뭇매를 맞은‘태종 이방원’은사과와 함께 결국 결방(1.22~2.13)에 들어갔다.
‘태종 이방원’은 그 외 베이징 동계올림픽 폐막식 중계 등으로 인해 6주 만인 2월 26일 방송을 재개할 수 있었다. 그 여파 때문인지 제8회부터 두 자릿 수로 올라 12회까지 유지하던 시청률은, 그러나 재개한 제13회에서8.0%로 곤두박질쳤다. 이쯤되면 KBS 관계자들로선 ‘우리가 왜 대하드라마를 다시 한다고 나섰지’ 하는 줄탄식이 나올 법하다.
아니, SBS ‘조선구마사’처럼 폐지되지 않고 완주한 것에 대해 안도하고 감사해야 하나. IHQ와 드라마 제작사 빅토리콘텐츠도 100부작 대하사극 ‘조선왕비열전’(가제)을 제작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위키백과에 따르면 ‘태종 이방원’ 후속작은 ‘고려 거란 전쟁’이란 것외 방송 시점이 미정이다. 혹 예고되지 않은 건 그와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태종 이방원’은 1388년 이성계의 위화도회군부터 1422년 태종 이방원(주상욱)의 죽음까지 역사를 다룬 대하드라마다. 위의 논란들과 별도로 5년 만에 돌아오는 대하드라마 주인공이 하필 이방원인지 하는 데에 의문이 생긴다. 결국 쿠데타로 이루어진 조선 건국에 대한 정당성 내지 미화를 담보하는 대하드라마가 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안고 있는 게 아닌가 해서다.
특히 이방원의 조선 3대 임금 태종되기 과정과 되고나서 자행한 원경왕후 민씨(박진희)를 비롯한 처남들 척살 등 왕권 튼실하게 하기에 대한 미화는 공영방송 대하드라마에서 그렇게 대놓고 해도 되는 것인지 의아할 지경이다. 그게 전무후무한 성군 세종(김민기) 만들기를 위한 희생적 피 묻히기였다 해도 그런 생각은 떠나지 않는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왕위를 극구 사양하고 정몽주(최종환)를 끝까지 살리려고 하는 이성계 미화가 아니다. 그게 역사적 사실이라 해도 멀쩡히 살아있는 임금을 유배 보내는 등 군사쿠데타 미화임은 분명해 보이지만, 권력을 위해 천륜마저 저버린 이방원의 거사가 정당화되고 있다는 점이 가장 심각한 문제다.
멀쩡히 살아있는 임금 아버지를 힘으로 겁박하여 왕위를 찬탈한 이방원은 이성계의 위화도회군보다 더 나쁜, ‘역사의 죄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위화도회군은 백성을 위한다는 명분이라도 내세울 수 있었지만, 이방원의 개국공신 정도전(이광기) 죽이기 등 ‘왕자의난’은 그냥 역적질에 다름 아니어서다.
물론 드라마는 처음부터 내내 태종 스스로 ‘내가 죄인’이라 자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태상왕 이성계에게 부복한 채 잘못했다며 울먹이기도 한다. 특히 세종이 자신의 장인에게 없는 죄를 뒤집어 씌워 사사(賜死)시키는 그런 태종을 이해할 날은 오지 않을 것이라 ‘씹는’ 장면에선 상대적으로 태종의 온갖 죄를 포함한 위악(僞惡) 행위가 콘트라스트되는 느낌도 있다.
‘태종 이방원’을 보며 새삼 깨닫는 것은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점이다. 혁혁한 전공에 빛나는 무장 이성계가 우유부단한 성격인데다가 신덕왕후(예지원)에 빠지거나 휘둘려 방석(김진성)을 세자로 세우는 잘못이 화근이었음도 알 수 있다. 결국 출발 초기부터 망조를 보인 셈인데, 그 조선왕조가 500년이나 지속되었음은 일견 불가사의한 일이다.
제작진이 “실록의 기록을 단순히 재현하는 드라마가 아닌, 실록의 기록 그 너머에 있는 행간의 의미들을 흥미로운 이야기로 구성해 시청자에게 보여준다는 계획”(스포츠서울, 2021.12.17.)을 밝힌 바 있지만, 너무 앞서 나간 극적 상상력 전개에선 그나마 정통 대하사극의 질을 떨어뜨린 게 아닌가 하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원경왕후 묘사가 그 한가운데에 있다. 가령 명에 사신 갔다오는 이방원을 마중나가 덥썩 안기거나(12회), ‘왕자의난’때 갑옷까지 입고 출정(16회)하는 장면이 그렇다. 그 하이라이트는 상왕이 된 태종의 원경왕후에 대한 사랑 고백이다. 대략 “진정으로 부인을 사랑하오. 그것만은 변함 없었다”(32회)는 고백인데, 원경왕후 및 그 일가에 한 짓과 대비 너무 웃기는 멘트 아닌가?
한편 대하드라마 ‘태종 이방원’도 현대물에서 드러나곤 하는 배우들의 발음상 오류를 피해가지 못했다. “밤나스로(밤낮으로→밤나즈로)”(4회), “서로의 민나시(민낯이→민나치) 다 드러났습니다”(9회), “궁궐 창꼬(창고)”(14회), “여기서 깨끄치(깨끗이→깨끄시)”(15회), “내가 자네에게 진 비슨(빚은→비즌)”(26회) 등이다.
여러 명 배우들의 잘못된 발음인 걸 감안하면 대본상 문제로 보인다. 하긴 ‘밤나스로’의 주인공 김영철은 그가 진행을 맡고 있는 ‘동네 한바퀴’에서도 가끔 발음상 오류를 드러내곤 한다. 누누이 지적해온 사극에서의 ‘아버님’ 호칭은 또 다른 문제다. ‘아버님’은 자신의 죽은 아버지를 일컫는 호칭이다. 친구 또는 남이나 자신의 시아버지를 높여 부를 때도 쓴다.
그러니까 살아있는 자신의 아버지를 ‘아버님’이라 부르는 건 멀쩡한 부친을 죽인 셈이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살아있는 자신의 아버지를 ‘아버님’이라 부르는 것은 사극이 저지르는 대표적 잘못이다. 이는 시청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약 6년 만에 돌아온 대하드라마에서조차 예전 잘못이 답습되고 있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늘, 건안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