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인 2007 가을호 한편의 시
부활의 알레고리적 상징, 달팽이
-이동호의 「달팽이」를 읽고
정진경, 시인
인간의 심리 속에는 죽어서도 쾌락을 추구하려는 죽음의 욕동이 내재되어 있다. 온갖 형태로 난무하고 있는 종교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영생을 갈망하는 사후 세계에 대한 내세관은 인간의 끈질긴 욕망이라 하겠다. 이러한 역설적 심리 속에 생성된 죽고 싶다는 말은 결국 살고 싶다는 절규이다. 이러한 심리적 측면을 잘 보여주는 시가 이동호의「달팽이」라 할 수 있다.
이동호 시인은 이러한 역설적 심리적 과정을 ‘달팽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전달한다. 어떤 대상을 예술적 사실로 제시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을 현실적 사실로부터 끄집어내야 하는데, 죽고 싶을 만큼의 현실적 고통이 ‘현실적 사실’이라면 달팽이는 이를 은유하는 예술적 이미지로서 시를 읽는 이의 가슴에 울림과 상상력의 파장을 느끼게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또한 대상의 실존적 의미와 정서들을 확대시키고 작품 전체의 유기성을 강화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달팽이’라는 단순한 객관적 상관물이 이러한 측면으로 확산 될 수 있는 것은 시 이미지가 주는 상상력 때문이다. 이러한 상상력과 원형 이미지들은 신비적 아우라를 형성하는데, 바슐라르에 의하면 신비로운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은 그것의 형태가 아니라 그것의 형성이라고 한다. 이는 곧 이 시를 통해 뿜어내는 달팽이의 아우라는 대상의 형상에서가 아니라 이를 차용하게된 시인의 의식적 작용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 속을 강타하던 어느 날
‘죽어 무엇으로 환생할까’ 고민하다 달팽이가 되고싶다 생각했다
타원형의 지구볼을 어깨에 짊어지고 공전시키면
하루에도 수십 번 해가 바뀌고 뒷걸음질치면 달이 뜨고 몸통을 흔들면 세상이 두서없이 뒤죽 박죽
섞여 버릴 것 같은, 혹은
보물상자를 짊어지고 태어난 고귀한 출생
전생을 밝힐 숨겨둔 열쇠를 하나 찾으면 단번에 이 지독한 현실을 벗을,
이 힘든 생 차라리 둥글게 말아 이고 다니고 싶어요
보따리를 풀어놓을 어느 별자리에선가
허리 주욱 펼 수 있도록
-「달팽이」전문-
이동호 시인은 짧은 시 한 편 속에서 전생과 이생, 후생을 동일선상에 두고 있다. 이 말은 인간은 죽는다고 죽은 것이 아니며, 순환적인 시간의 구도 속에서 전생과 이생과 후생을 옮겨다니면서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시간만이 영원히 지속하는 게 아니라 생명 또한 시간과 함께 지속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영생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보편적인 욕망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존재론적 상상력은 보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개인마다 다른 경험적 삶의 개체성에 좌우되지 않는 독자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환생의 도구로 차용된 달팽이 이미지는 사물의 본질이 가지는 질료적 상상력과 오랜 역사의 누적으로 인해서 형성된 원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달팽이를 매개로 하는 시인의 몽상 속에는 본원적 자아가 내재되어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은 연체 동물인 달팽이로 환생하고 싶어 한다. 생각없이 읽으면, 뇌가 없는 하등 동물로 환생하여 현실적 고통을 잊으려는 듯 보인다. 그러나 “죽고 싶다”는 말 옆에 병치된 “환생”이라는 말을 읽는 순간, 시인의 본원적 자아 속에 꿈틀거리고 있는 죽음의 욕동이 강하게 감지된다. 시인은 죽고 싶다는 말로 생을 단칼에 내리치고 싶어 하지만 죽음의 욕동은 사후 세계에 대한 몽상으로 그를 이끌고 간다. 환생의 대상으로서 ‘달팽이’를 선택하면서 시인의 의식은 구체화되어 간다. 존재의 순환을 통하여 영생을 얻으려고 하는 환생은 불교적 윤회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카롤링거 왕조 시대까지만 해도 달팽이 껍질은 묘 속에 넣는 물건이었다고 한다. 쥐르지스 발트제티스는 이를 “인간이 재생하게 될 무덤의 알레고리임을 환기”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시에서 또한 달팽이 이미지는 부활의 알레고리적 상징으로 쓰여진다. 달팽이는 물질적 대상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내밀한 의식과 연결이 되어 있는, 시인의 꿈꾸는 시간이자 공간으로서 존재한다.
먼저 꿈꾸는 시간으로서 은유된 달팽이 속에는 현실을 부정하려는 시인의 정신이 들어 있다. 이러한 의식은 “타원형의 지구볼을 어깨에 짊어지고 공전시키면//하루에도 수십 번 해가 바뀌고 뒷걸음질치면 달이 뜨고 몸통을 흔들면 세상이 두서없이 뒤죽 박죽//섞여 버”리고자 하는 시간을 해체하고자 하는 의지로 표출된다. 시간을 해체하고자 하는 의지는 제도적 틀 속에 갇혀 있는 역사적 시간을 부정하는 것이다. 시인은 시간을 영위하는 주체가 우주적 질서나 세상이 아니라 자신이 되길 원한다. 생명적 존재가 주체가 되어 시간을 움직이고 세상을 움직이는 꿈을 꾼다. 이러한 해체적 시간의식의 이면에는 “지독한 현실”을 탈피하고자 하는 현세의 부정의식이 들어 있다. 부정의식은 인간을 웅크리게 하고 안식처를 갈망하게 한다.
달팽이가 가지고 있는 질료적인 상상력은 이러한 사실들을 확인하게 해준다. 시인은 “전생을 밝힐 숨겨둔 열쇠를 하나 찾으면 단번에 이 지독한 현실을 벗을,//이 힘든 생 차라리 둥글게 말아 이고 다니고 싶”다고 한다. 달팽이 이미지에서 느끼는 공간성은 나선형 형상의 딱딱함이다. 나선형의 딱딱한 껍질을 등에 진 시인의 자의식은 둥글게 말려 있다. 이러한 형상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본원적 자아인 요나콤플렉스이다. 요나콤플렉스란 우리들이 어머니 태반 속에 있을 때에 우리들의 무의식 속에 형성된 이미지로서, 우리들이 어떤 공간에 감싸이듯이 들어 있을 때에 안온함과 평화로움을 느끼는 것이라고 한다. 바슐라느는 집, 서랍, 상자, 장롱, 새집, 조개껍질, 구석 등 내밀한 공간의 이미지들과 그 변양태들은 이와 관련되어서야 해석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달팽이집은 시인이 또 다른 후생을 잉태하고자 하는 의지로 표출된 알레고리적 상징이다. 또한 “보따리를 풀어놓을 어느 별자리에선가//허리 주욱 펼 수 있”기를 갈망하는 모태로서의 공간이다. 이런 논리로 말하자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생 또한 후생을 위한 모태라 할 수 있다.
달팽이는 몸을 한 번 비꼴 때마다 나선형 층계의 계단 하나씩 만든다. 그것은 나아가고 성장하기 위한 달팽이만의 삶의 방식이다. 우리들의 삶 또한 결코 수직적이거나 수평적이지는 않다. 사유가 발달된 인간의 의식구조는 실존의 문제들을 끊임없이 퍼올리는 두레박이다. 현실적 고통들로 인한 두레박질의 반복은 생이 달팽이집처럼 나선형으로 돌아가는 행위임을 인식하게 한다. 바슐라르의 말처럼 집은 인간의 사상과 추억과 꿈을 한 데 통합하는 가장 큰 힘이다. 집이 없다면 인간의 존재는 산산히 흩어져 버린다. 집은 인간에게 육체이자 영혼이며, 인간 존재의 최초의 세계이다. 몽상 가운데서도 집은 언제나 커다란 요람이다.
이동호 시인은 후생의 요람으로 달팽이집을 선택했다. 그 속에 웅크리고 앉아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희망과 고통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생명을 키워나가기 위해서는 꿈틀거리면서 견고해지는 달팽이식 도약이 필연적이다. 몽상 속에서 끊임없이 자라는 존재론적 상상력은 현세적 고통을 잊게 하는 명약이기는 하지만, 생명이 자라고 있는 한, 존재는 안락할 수 없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정진경; 2000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알타미라 벽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