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가좌동 독서모임 안내 ]
-.일 시: 8월 30일(수) 오전 10시30분~12시
(31일(목)=> 30일(수) 모임날짜로 변경되었습니다.)
-.모임장소: 열방선교교회 (토기장이의 집)
* 읽을 추천책: "칭의와 성화" 김세윤 지음/ 두란노
(참조:구원이란 무엇인가?)
“칭의와 성화” 김세윤/두란노 요약 결론
1) 칭의론에 대한 학계의 토론
칭의론, 곧 율법의 행위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그리고 우리의 믿음으로만 우리가 '의인이라 칭함 받음' (곧 무죄 선언되고 의견의 신분을 얻음)의 교리는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구원론적으로 선포하는 데 사용한 한 중심적 범주로서, 16세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그것이 재발견됨으로써 유럽에서 하나의 종교적 혁명을 일으켰고, 유럽과 북미주 그리고 점차 전 세계에 걸쳐 개신교적 영성과 문화를 낳았습니다. 그리하여 그것은 개신교의 표징 교리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법정적 의미로만 이해됨으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성을 잘 드러내 믿는 자에게 구원에 대한 확신(assurance)을 주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윤리에 대해 소홀하게 하는 단점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옛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에 여러 단계들이 있다는 '구원의 서정론'을 펼치면서,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 그리고 소명으로 시작되는 구원을 얻게 된 믿는 자는 먼저 '칭의'를 받고, 그 이후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사는 '성화'의 단계를 거쳐, 최후의 심판에서 칭의가 확인되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된다(영화)고 가르침으로써, 칭의 된 그리스도인은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원의 서정론'은 사도 바울이 '성화'라는 말을 '칭의'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믿음과 세례 때의 구원의 시작점에도 적용하고, 최후의 심판 때 있을 구원의 완성점에도 적용한다는 사실, 그리고 '칭의'와 '성화'는 동의어들로서, 법정적 그림 언어인 '칭의'가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죄를 '하나님의 법을 거스름(transgression)'으로 보고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는 것으로 볼 때 적용하는 구원론적 언어인 반면, 제의적 그림 언어인 '성화'는 죄를 '세상에 오염됨, 더러워짐(defilement)'으로 보고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볼 때 적용하는 구원론적 언어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입니다.
더구나 '구원의 서정론'은 '칭의'와 '성화'를 구조적으로 구분되는 구원의 두 단계들로 설정하며 동시에 예정론/성도의 견인론도 함께 가르치는 교리이기에, 많은 목사들이 개신교의 표징으로 보는 '칭의론'을 강조하되 예정론/성도의 견인으로 뒷받침해 강조하다 보니, 자연히 '성화론'은 유명무실하게 되는 역효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법정적 의미로만 이해된 칭의론이 윤리, 곧 의로운 삶이 없는 칭의론, 심지어 의로운 삶을 방해하는 칭의론으로 변질되자, 19세기 말부터 슈바이처(Schweitzer) 같은 개신교 신학자들에 의해서도 그 구원론의 한계성이 많이 지적되어 온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19세기 말부터 성경학자들이 성경에서 '의'라는 개념은 근본적으로 관계론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서, 바울의 칭의론도 법정적 의미로만 해석할 것이 아니라 관계론적 의미로도, 즉 '무죄 선언받음'의 뜻으로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됨'의 뜻으로도 해석해야 함을 점차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대표적으로 1960년대 케제만(Koeman)은 "칭의를 주권의 전이 (Lordship transfer)로 이해해야 한다. 즉, 하나님이 우리 죄인들을 사탄의 나라에서 구속하여 자신의 나라로 회복시킴. 그리하여 우리 피조물들이 이제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살게 함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이후 1970년대 말에 나온 샌더스(Sanders)의 유대교에 대한 새 연구에 근거하여 던(Dants), 라이트(Wright) 등에 의해 전개된 '바울신학에 대해 새 관점을 갖기 운동'이 칭의론을 이방인들이 모세의 언약/율법 체계에 들어옴이 없이, 즉 유대교로 개종함이 없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교리로, 즉 주로 교회론적으로 해석하여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30여 년간의 '새 관점'에 대한 논쟁은 그것의 주창자들인 던(Dunn)과 라이트(Wright)로 하여금 자신들이 칭의론의 법정적 의미를 경시하고 선교적, 교회론적 의미만을 강조한 것을 반성하게 하고, 다른 한편 그것의 비판자들로 하여금 '새 관점'이 공헌한 점들, 특히 바울이 칭의론을 전개하는 선교적 맥락에 대한 더 실제적인 이해를 인정하게 하였습니다. 그 논쟁은 우리로 하여금 바울의 칭의론도 근본적으로 유대교와 비슷하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진입함'과 그 관계 속에 '머무름'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그러나 그 구조가 칭의 된 자가 성령의 도움으로 그 관계 속에 '머무름'을 하게 되며 결국 최후의 심판 때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로 칭의의 완성을 받는다는 삼위일체적 은혜의 구조로 변형되어 나타난다는 사실을 더 깊이 이해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 논쟁은 결과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칭의론에 대한 더 풍부한 이해를 얻게 했습니다.
2)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과 바울의 칭의의 복음
이러한 학계의 토론들은 저로 하여금 로마서 1장 서론에 나오는 복음에 대한 두 개의 정의들, 즉 1:3~4에 나오는 기독론적 정의와 1:16~17에 나오는 구원론적 정의의 하나 됨을 새롭게 깨닫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다윗의 씨'(곧 메시아), 예수로 태어나게 하시고, 그를 대속의 제사로 바쳐지게 하신 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시어 자신의 우편에 높이시고 자신의 통치를 상속받아 대행하는 아들로 선포하셨다. 즉, 만유의 주로 선포하셨다"는 예루살렘 교회의 복음(롬 1:3~4)에는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하나님 노릇 해 주심,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하여 주심이 계시된다. 그러므로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힘이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이 복음을 믿는 자는 의인이 된다. 즉,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이 된다" 1:16~17),
여기에 필자가 꽤 오랫동안 연구하여 오던 주제, 즉 바울의 예수 전승 사용에서 얻은 통찰이 덧붙여졌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사탄의 나라를 멸망시키신다"라는 묵시적 큰 틀을 유지하시되, 그것의 인간론적 적용, 즉 그리하여 죄인들과 병자들을 사탄의 죄와 죽음의 통치로부터 구출하여 자신의 '잔치' 곧 영생에 참여하게 하신다"라는 메시지에 집중하였듯이, 바울도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탄을 근본적으로 꺾으셨다. 지금 그의 잔여 세력을 소탕해 가신다. 장차 완전히 멸망시키실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통치를 완전히 실현하실 것이다"라는 묵시적 틀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복음'(롬 1:3-4: 8:31~39; 고전 15:23~28: 빌 2:6~11 등)을 선포하되, 그것의 인간론적 적용, 즉 "죄인들을 의인이 되게 하신다. 즉, 사탄의 죄와 죽음의 통치로부터 구출하여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로, 즉 자신의 통치 아래로, 즉 자신의 통치를 대행하는 자신의 아들의 나라에로 이전시키신다"에 집중한다는 것(롬 1:16~17: 5:6~8: 8:3~4; 갈 4:4~5, 빌 3:20-21;골 1:13~14 등)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본서의 한 논지가 형성된 것입니다. “바울의 칭의의 복음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의 구원론적 표현이다."
그러므로 칭의론을 단지 법정적 의미로만 해석하여 '무죄 선언'이라고만 하든지, 기껏해야 (우리가 사실은 의인이 아닌데,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를) ‘의인이라 칭함/인정함’이라는 법적 허구(legal fiction)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의인의 신분을 얻음'을 관계론적으로 제대로 해석하여 실제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들어감/서게 됨, 즉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이전됨 또는 회복됨의 뜻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칭의'는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함'입니다. 그러기에 '칭의’는 ‘성화', 곧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되기 (고전 1.2: 롬 1:7; 7:14; 15:25, 31 ; 16:1; 고후 11:1 9:1; 빌1:1; 살전4:7 등)’ 동의어인 것입니다.
바울의 칭의의 복음을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의 구원론적 표현’으로 이해하고, 칭의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 되기’로 이해하면, 우리는 자연히 우리가 믿음/세례 때 받은 칭의를 하나님 나라에로 '들어감'('진입')으로 이해하고, 종말에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석 앞에서 완성될 칭의를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함께 생각하면서, 칭의 된 자의 현재의 삶을 하나님 나라에 서 있음'(또는 '머무률'), 즉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기,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기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면 칭의의 세 단계들, 즉 과거, 현재, 미래가 통합되어 이해되는 것이고, 우리가 믿음/세례 때 받은 칭의, 곧 하나님 나라에로 ‘들어감’ (구원의 서술 - indicative)은 우리의 구원의 완성이 종말까지 유보된 상황 속에서 당연히 현재 계속 하나님 나라에 ‘서 있음’, 즉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요구(윤리적 명령 - imperative)를 내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됩니다.
바울의 ‘성화’라는 언어 사용도 똑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세례 때 '성화' 된 사람, 즉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된 사람(‘성도’)은 이제 날로 ‘성화’되어 가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합니다(롬 6:15~23; 고전 3:17: 6:1~11, 19: 7:34; 고후 1:12; 살 2:12; 3:12-13; 5:23도 참조). 그러니까 '칭의' 뒤에 '성화'의 단계가 있는 것이 아니고, '칭의'나 '성화'나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과거)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기(현재)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언어 사용법과는 다르지만 구태여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의 언어를 고집한다면 '성화'는 '창의'의 현재 단계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이렇게 칭의의 세 단계들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기,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참여하기의 뜻으로 이해할 때, 칭의를 '성화'와 근본적으로 구분하는 '구원의 서정론'이 가져오는 역효과를 극복하고, 믿음/세례 때 얻는 칭의(과거)를 의로운 삶(칭의의 현재)과 통합하여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법정적 의미로만 이해하는 칭의론이 의로운 삶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방해하는 칭의론이 되기 쉬운 데 반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칭의론은 의로운 삶을 요구하고 가능하게 하는 올바른 칭의론이 되는 것입니다.
3)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칭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칭의가 우리의 선행이나 지혜를 통해 얻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며, 그러므로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믿음/세례 때 얻은 칭의도 하나님이 그의 아들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진 은혜의 구원을 덕 입게 하시되, 그것을 선포하는 복음을 그의 영으로 우리의 마음을 깨우치고 움직여서 믿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덕 입게 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또한 종말에 최후의 심판 때 완성될 우리의 칭의의 완성도 그의 아들의 중보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 우리가 의인, 곧 하나님(의 아들)의 통치를 받는 사람으로 사는 것도 그의 영의 깨우쳐 주심과 힘 주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진리를 가르치면서 함께 강조하는 것은 은혜로 의인 되어 의인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성령의 은혜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지, ‘육신’의 요구를 좇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롬 8장, 갈 5~6장). '육신'의 요구를 좇아 사는 것은 사탄의 죄와 죽음의 통치를 받는 삶이므로, 그러한 삶으로부터 구속을 받아 칭의된, 곧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이 된, 우리는 하나님의 영의 깨우쳐 주심과 힘 주심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의 통치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실존에서 윤리적 선택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사탄의 죄와 죽음의 통치에 순종하라는 '육신'의 요구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법' / '그리스도의 법' (고전 9:21; 갈 6:2 등), 곧 이중 사랑 계명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라, 또는 그 통치를 대행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순종하라는 성령의 요구를 따라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믿음/세례 때 칭의 된, 즉 하나님(의 아들)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이 된 우리는 '의의 열매'를 맺어 가는 의인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같은 말을 '성화'의 언어로 말한다면, 믿음/세례 때 '성도'가 된, 즉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들이 된 우리는 날로 더욱 거룩해지는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4) 최후의 심판과 칭의의 완성, 예정과 성도의 견인, 그리고 탈락의 가능성
종말에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 때 우리의 칭의가 완성되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신적 생명, 즉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때 우리가 지금, 즉 칭의의 현재 단계에서 성령의 은혜를 얼마나 믿음으로 덕입어 하나님의 통치 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순종하여 얼마나 의를 이루었는가, 하나님 나라 실현에 있어 각자 맡은 역할을 어떻게 감당하였는가가 심판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결국 우리의 행위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최후의 심판에서 성령의 도움을 덕 입어 이룬 '의의 열매들'과 '육신'을 좇아 삶으로써 얻은 '육신의 열매들'의 혼합투성이로 판명이 날 것입니다.
바울은 의를 완벽하게, 즉 '책망할 것이 없게' 이루지 못한 자들이라도 하나님의 예정의 의지에 의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로 구원을 확실히 얻으리라고 강조하여, 우리로 하여금 안도하게 하는 동시에 복음을 '헛되이 믿고', '육신'을 좇는 삶을 살아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고 엄중히 경고합니다.
예정론/성도의 견인론은 우리의 구원이 시작부터 완성까지 철저히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임을 말하는 교리로서, 그것에 의해 뒷받침되는 칭의론은 칭의의 현재(옛 '구원의 서정'의 언어로 말하자면 '성화' ) 단계에서 '육신'을 좇아 살지 않고 성령을 좇아 살려는 사람에게 구원의 확신과 안도를 주는 것이지, 그런 삶의 기본자세를 저버리고 방종하는 사람에게까지 구원의 확신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정론/성도의 견인에 호소하며 윤리적 방종을 허락하거나 조장하는 칭의론을 가르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5) 맺는 말 칭의론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칭의의 복음을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의 구원론적 표현으로 이해하고, 칭의를 하나님의, 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칭의의 전 과정을 통합하여 이해할 수 있고, 특히 '은혜로만/믿음으로만'의 구원과 윤리적 요구의 통합을 옳게 할 수 있다는 논지를 전개했습니다.
여러 독자들에게는 이 논지가 생소하게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신학과 신앙의 근본 원리로 삼는 개혁 신학의 후예들, 곧 장로교인들에게는 그들의 신론 또는 기독론을 구원론과 잘 통합하도록, 그리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주권에 더 잘 순종해서 살도록 도울 것입니다.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실제적인 순종을 강조하는 아르미니우스 신학의 후예들, 즉 감리교인들, 성결교인들 등에게도 그들의 (옛 '구원의 서정'의 언어로 말하자면) '성화'의 삶에 대한 동기를 강화시켜 줄 것입니다. 우리가 신학과 신앙의 어떤 면을 특별히 강조하는 전통에 속하는, 우리 모두가 칭의론은 결국 하나님의, 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믿음의 순종'(롬 1:5; 16:26)을 하는 것을 골자로 함을 잊지 않음으로써, 의로운 삶을 무시하거나 방해하는 그릇된 칭의론이 아니라, 그것을 요구하고 가능하게 하는 올바른 칭의론을 믿고 선포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