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서원 광명실의 봄
전에 동쪽 강변으로 갔을 때 강 바위 모래 위에 알수없는 짐승의 발자국과 배설물이 여러곳에 보였다. 주민들은 수달의 흔적이라 했다. 나는 수달이 있고도 남을 만한 곳이라 여겼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수달이야기는 쓰지 말까 생각하다가 공개하기로 했다. 5년 전 이 일대에 엄청난 은어 떼의 출현이 있었는데 그때 몰지각한 사람들의 난리법석을 생각하면 쉬쉬하고 감추어버릴 일만도 아닌 것 같다. 그야말로 ‘물 반, 은어 반’이라 했는데, 지금 그 은어들은 어디에 있는가? 안동댐을 회귀하는 그 은어는 ‘육봉은어’라 하여 연구의 대상이었으나 지금은 약에 쓸 정도도 보이지 않는다. 은어의 소멸에 대해 사람들은 저마다 상류지역의 오염을 그 주범으로 지목한다. 나도 공감한다. 폐광으로 많이 정화되었지만 아직 곳곳에 물고기를 괴롭히는 시설이 적지 않게 도사리고 있는 듯하다.
나는 이곳 강물을 10여 년간 지켜보았는데 한번은 아이들이 다슬기를 잡아왔다. 놀라 나가보니 과연 강바닥에 다슬기가 있었다. 그런데 그 이후 또 없어졌다. 얼마 후 또 잡아왔고, 최근에는 전에 없던 꺽지가 대량으로 서식한다. 꺽지, 다슬기의 출몰과 존재여부가 1급, 2급수를 측정하는 거울이라 하니 지금 이곳의 강물은 이 사이를 오고가고 있음에 틀림없다. 한편으로 은어의 소멸에 대해서는 그때 전기 배터리의 과다사용도 원인의 하나는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당시 ‘은어낚시매니아’인 일본인 가또가 왔는데, 그는 청량산은어를 두고 ‘세계적’이라 했다. 일본에는 은어낚시 매니아만 수천 명이라 했고, 잘 관리하여 그들이 알게 되면 엄청난 부가가치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지리산의 반달곰 서식을 공개하고 ‘왜 보호해야 하는가’를 설명함이 감추고 숨기는 것보다 효과적일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이다. 설악산 반달곰도 그렇게 했으면 지금 수렴동 계곡을 지나는 수많은 등산객 중에 일년에 한 두 명은 등산 도중 경이로운 조우를 가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잠시 그런 생각에 잠겨 걷는데 갑자기 지축을 흔드는 무한괘도의 굉음이 들려온다. 이 산중에 웬 일인가 했더니 곧 수 십대의 지프차가 열을 지어 험한 강변을 따라 내려온다. 최근 출몰하는 이른바 ‘오프로드차량’들이었다. 가송리-단천리 구간 협곡은 이들 동호인들에는 최상의 코스였고, 나 또한 한두 번 이들을 만난 바 있다. 나는 처음 그들이 이 자본주의시대의 선택받은 귀족들이 아닐까 했는데, 뜻밖에도 내 이웃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갑남을녀들이어서 무척 놀랐다. 바야흐로 우리는 지금 개국 이래 최고의 태평성대에 살고 있으며, 그 모습들은 거침없는 문명의 전진이고 장관이었다. 또한 인간광기의 현장이기도 했다.
2. 올미재, 장구목, 농암종택, 월명담, 고산정, 공주당 오프로드차량들의 위태위태한 도강을 지켜보며 매내 상류로 올라오면 왼쪽 산허리 지역이 ‘삽재’이고, 그 앞 강 건너 개괄지는 ‘맹개’라는 곳이다. 이 사이에 큰 강 돌이 몰려있는 소沼가 보인다. 강 가운데 우뚝한 바위가 ‘경암景巖’이 아닐까 추측된다. 문헌으로는 그렇게 추정되나 단정할 근거는 없다.
소는 ‘한속담寒粟潭’이라 한다. 모두 퇴계가 명명했다. 퇴계의 ‘한속담’ 시 에 “맑은 걸음걸음 가는 곳 모두 선경이고, 괴석 큰 소나무 푸른 물가 가득하다”고 읊고 있다. 전에 삽재에는 물고기와 산짐승 등을 잡는데는 입신의 경지에 들어간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가 물고기, 뱀을 잡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그는 ‘잡는다’고 하지 않고 그냥 ‘줍는다’고 했다. 그에게 이들 생물들은 사냥의 대상이 아니라 습득의 대상이었다. 맹개에는 지난해 단무지 무를 심어 적지 않은 돈을 번 사람이 있었다고 했는데, 올해는 수해로 어떤지 모르겠다. 아마 큰 손해가 났으리라 생각된다.
청량산 아래 낙동강 절벽뒤로 고산정 경암, 한속담을 지나 숲길을 헤치고 상류로 올라오면 문득 하늘을 찌르는 수직단애가 나타나고 물길이 90도로 급박하게 우측으로 하회를 이루며, 병풍 같은 단애와 은빛 백사장이 펼쳐진 상상할 수 없는 멋진 지역이 등장한다. 수태극水太極, 산태극山太極의 모습은 진정 이런 곳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여기서부터 가송리이고 이곳은 ‘올미재’라는 곳이다. 서편 강변의 까마득한 수직단애는 천연기념물인 ‘오학(烏鶴:먹황새)’이 서식하여 ‘학소대’로 명명되고 있다. 1969년, 사냥꾼에 의해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오학이 몇 해를 수절하다 그해 떠나갔다. 지금 절벽 위에는 오학의 화신인지 왜가리가 날고, 그 아래는 ‘天然記念物 第七十二號, 烏鶴繁殖地, 大韓民國’이라는 표석만이 잡초 속에 쓸쓸하다. 여기서는 조금 쉬어가기 바란다. 장소는 학소대 아래 강 바위 위다. 바위는 네 개인데 물위에 친구처럼 모여있다. 가운데 것은 다듬은 것처럼 정교하다. 네 명이 카드나 고스톱을 치고 두 명 정도 훈수를 하면 꼭 알맞다. 잡기가 아니라도, 여기서는 백운지 방향과 올미재 방향을 동시에 조망할 수 있으며, 물의 흐름 때문인지 문득 세속이 강 저편에서 남의 일처럼 무심하게 흘러 가버리는 것 같다. 이 바위에서 상류지역을 천천히 좌우로 스크린 해보면 남쪽으로 수평단애가 한 눈에 보인다. ‘선성14곡’ 가운데 제5곡으로, 그 이름이 ‘벽력암霹靂巖’이라 했다. 선성14곡은 그 연유가 모두 기록되어 있는데, 공교롭게도 이 5곡은 별다른 설명이 없다. 『선성지』에는 “벽력암 : 그 아래 깊이를 알 수 없는 소가 있음”, 이렇게만 적혀있다. 연유를 아는 사람 또한 없다. ‘대륙사진관’의 윤종호 사장은 그것은 이제까지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라 했다. 윤사장은 필자가 이 곳으로 귀거래했기에 농弄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이 곳 백사장에서도 잠시 쉬어가기 바란다.
그런데 이 벽력암 단애 위에는 놀랍게도 84세의 김태기 노인 내외분이 병든 딸과 같이 살고 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벽은 얇아 문풍지 바람이 사나왔다. 밥상은 아주 조촐했다. 토종벌통이 몇 있으나 꿀 수확은 대단한 것 같지 않다. 농사도 묵 밭이 대부분이다. 기적의 인생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몇 번 찾아갔고, 말씀을 나누고 꿀도 여러 번 얻어먹었다. 언젠가는 기념사진도 한 장 찍었다. 그런데 현상을 해보고 적이 놀랐다. 내외분의 모습이 마치 신선처럼 느껴졌다. 신선이 있다면 아마 그런 모습이 아닌지 모르겠다. 내외분은 당신들이 겪어온 많은 인생사를 예기했다. 내외분은 고난의 전근대사를 살아온 바로 우리들의 아버지 어머니였다. 노인은 벽력암에 대해서도 2번을 말했는데, 각기 다른 날 다른 말로 했다. 하나는 절벽의 돌이 떨어지는 소리가 벼락치듯 하여 ‘벼락소’라 했고, 하나는 강원도의 뗏목들이 여기에 오면 벼락치는 소리를 하며 절벽에 부딪치어 그런 이름을 얻었다고 했다. 신선의 말씀이기에 이치에 합당했다. 나는 그 동안 ‘장구목’이라 불리는 이 곳에서 너무나 인상적인 많은 장면들을 목격했다. 어느 겨울, 온 산에 눈이 하얗게 덮인 숲 속에서 홀로 나무를 자르는 노인의 모습과, 어느 가을, 집 앞 수천 평의 묵 밭에 핀 들국화의 노란 물결과, 토종벌통이 놓여있는 ‘돌고개’라는 절묘한 단애 위의 전망대 등등....한때는 그런 모습들에 흥분하여 안동KBS의 김시묘 P. D에게 “6시 내 고향 같은 프로에 왜 그런 노인을 방송하지 않느냐”고 했는데, 이제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과거 올미재에는 매내와 함께 한지韓紙가 생산되었다. 할머니들은 그 때의 생산과정과 애환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밭 언덕 여기저기에 모진 생명력을 지닌 닥나무 몇 그루가 자라고 있다. 나는 10여 년 전, 이 닥나무들을 어루만지며 올미재의 경에 취해 이 곳으로 귀거래했다. 당시 벅찬 그 감격을 가눌 수 없어서 쓴 부끄러운 글이 『안동문학』22호에 실린 바 있다. 이 가송리와 올미재의 아름다움은 그 글로써 대신하고자 한다.
농암종택 긍구당 지금 올미재에는 ‘농암선생생가복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몇 채의 관련건물들이 이건되고 있다. 이 사업은 원천리의 ‘이육사생가복원’, ‘기념관건립’과 그 성격이 비슷하다. 모두 안동댐으로 인해 원형과 터전을 잃어버렸다. 농암종택은 수몰되었고, 육사생가는 안타까운 고난의 여정을 걷고 있다. 경제시대에 문화유적은 그렇게 몰각되어 갔다. 그러던 것이 최근 문화가 경제임을 깨닫게 되어, 경북북부의 이른바 ‘유교문화권개발사업’이 시작되어 이들 유적들도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농암과 육사는 각각 ‘문화관광부의 문화인물’로 선정될 만큼 한국문학사에 뚜렷이 자리 매김 되어있다. 지난해에 농암 관련의 몇 가지 추모행사가 있었고, 행사 가운데는 가송리 입구에 ‘시비건립’이 있었다. 빗돌 전면에는 ‘어부단가 5장’이, 뒷면에는 연보가 새겨졌다. 그 2장은 이러하다.
굽어보면 천길 파란 물, 돌아보니 겹겹 푸른 산 열 길 티끌 세상에 얼나마 가려 있었던가 강호에 달 밝아 오니 더욱 무심하여라
농암은 휴머니즘이 가득한 청백리의 목민관으로 대효자大孝子이며 대시인이었다. 농암은 정계를 깨끗이 은퇴하여 퇴계로 하여금 “지금 사람들은 이러한 은퇴가 있는지 알지도 못합니다”라는 말을 들었으며, 구전 김중청(苟全 金中淸)으로부터는 “수 천년 역사 이래 우리 농암선생이야말로 천백만 명 가운데 단 한 분뿐이다”라는 찬사를 받았다. 농암의 담백한 생애는 선조 때의 명신 기천 홍명하(沂川 洪命夏)로부터 “평생을 농암으로 법을 삼았다”는 말을 듣게 했고, 명종으로부터는 “천하대로天下大老요 당세원구當世元龜”라는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그런 생애가 문학을 낳았다. 농암의 경로와 효 정신은 ‘속 애일당구로회續愛日堂九老會’의 이름으로 500여 년을 이어오는 농암종택의 아름다운 전통이 되었다. ‘애일당구로회’는 퇴계도 참석했다. 퇴계는 처음 “내 나이 70 미만이고 이미 회원도 아홉뿐이니 감히 어찌 참석 하겠습니까” 했다. 여러 노인들이 중국의 사마광의 고사를 들어 청하니 “내가 참석한다면 끝자리로 하겠습니다. 집의 형님이 참가하고 계시니 당연히 그러합니다” 했다. ‘어부가’는 경산 이한진(京山 李漢鎭)의 ‘속어부사’, 병와 이형상(甁窩 李衡祥)의 ‘창보사’ 등에 이어 드디어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로 이어졌다. 고산은 ‘어부사시사’의 서문에서 “어부사를 읊으면 갑자기 강에 바람이 일고 바다에는 비가 와서 사람으로 하여금 표표하여 유세독립의 정서가 일어나게 했다”고 하고, “이런 까닭으로 농암 선생께서 좋아하셨으며 퇴계 선생께서도 탄상해 마지 않으셨다”고 했다. 안동지역에서는 17세기 학사 김응조(鶴沙 金應祖), 18세기 창설재 권두경(蒼雪齋 權斗經), 19세기 고계 이휘영(古溪 李彙寧) 등의 문집 기록에 “분강汾江에서 농암의 어부가를 다 함께 불렀다”고 하여, 학술적 계승이 아닌 현장연출로서의 수백 년 동안의 집단적 전승이 있었음을 밝혀놓았다. 고계는 퇴계10대 종손으로 ‘애일당구로회’에 참석하여 적은 소회에 다음과 같이 기록을 남겼다. “안동의 옛 풍속이 나이는 숭상하나 관직은 숭상하지 않은 까닭으로, 수십 인의 촌 노인(布衣老?)들과 애일당 산간을 나와 탁영담으로 올라와 작은 배를 타고 흘러 내려가다가 농암 아래에서 배를 묶어두고 술을 한잔씩 돌리고 어부가 3장을 노래했다. 높은 갓과 백발들의 그림자가 산수에 비치고 음식 또한 마른고기, 젓갈, 국수, 밥으로, 불과 5그릇도 안되니 그야말로 진솔회라 할 수 있다. 주인도 없고 나그네도 없다. 스스로 술을 먹고 안주를 먹었다. 날이 저물어 해가 떨어지고 달이 마루에 떠오르나, 이미 취하고 또 취하여 모두들 돌아감을 잊었더라...”
퇴계는 분강에서 ‘어부가’ 창작을 돕고 발문을 썼으며, 농암과 더불어 ‘강과 달과 배와 술과 시가 있는 풍경’을 연출했다. 청량산으로 들어가는 길에 찾아온 신재(愼齋 周世鵬)는 따뜻한 대접을 받고 춤을 추고 농암이 지은 노래를 불렀다. 신재는 ‘감격으로 목이 메인다’고 했다. 퇴계와 신재의 기록 일부를 소개한다.
“오직 우리 농암 이선생은 나이 70이 넘어 벼슬을 버리고 분강汾江으로 염퇴恬退했다. 나라에서 여러 번 불러도 나아가지 않고, 부귀를 뜬구름처럼 여기며 아회雅懷를 물외物外에 붙였다. 때로 조각배를 저으며 물안개 낀 강 위에서 즐겁게 읊조리거나, 낚시바위 위를 배회하며 물새와 고기를 벗하여 망기지락(忘機知樂)했으니, 그 강호지락江湖之樂에 있어서 진眞을 얻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 선생은 이미 그 진락眞樂을 얻은 것이다.” 퇴계의 ‘書漁父歌後’
“용수고개를 넘어 온혜를 지나 진사 오언의를 보고 드디어 분천으로 가서 농암을 뵈오니 공이 문밖에 나와 마중을 하고 안으로 들어가 바둑을 두었다. 이어 식사와 술을 내어 오도록 하고 대비에겐 거문고를 퉁기고 소비에겐 아쟁을 연주하게 하니 혹은 ‘귀거래사’, ‘귀전원부’, 혹은 이하의 ‘장진주사’, 혹은 소동파의 ‘행화비염산여춘’의 곡을 노래했다. 아들 문량의 자는 대성인데 모시고 앉았다가 또한 ‘수곡’을 노래하는지라 내가 대성과 더불어 일어나 춤을 추니 공이 또한 일어나 춤을 추었다. 이때 공의 나이가 78세였다. 감동으로 목이 메이었다. 공의 거처는 비록 협소했으나 좌우로 서책이 차 있으며, 마루 끝에는 화분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담 아래에는 화초가 심어져 있었고, 마당의 모래는 눈처럼 깨끗하여 그 쇄락함이 마치 신선의 집과 같았다.” 신재의 ‘遊淸凉山錄’
나는 새로 복원되는 농암 생가가 신재께서 묘사한- 서책, 화분, 화초, 마당의 모래가 눈과 같은 -그런 소담한 집이 되기를 희망한다. 아울러 이들 명현들이 펼친 낭만적 이미지의 풍류와 문학이 이곳에서 재현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이 일대가 안동 문학의 향기를 전파하는 산실로 가꾸어져서 지역사회와 국가민족의 발전에 기여하기를 기대한다. 티끌 세상에 가려있고, 강호에 달 밝아 오는 올미재야 말로 “굽어보면 천길 파란 물, 돌아보니 겹겹 푸른 산”의 현장이니까 더욱 그러하다.
돌이켜보면 안동은 실로 세계적 문향文鄕이다. 그 어느 지역도 안동처럼 문학으로 가득하지는 않다. 안동은 문학의 열정이 폭발한 곳이다. 농암, 퇴계의 문학적 교유양상과 낭만적 미의식은 동시대의 세계 어느 나라의 문학적 성과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민족시인 육사가 바로 이 지역에서 태어남도 우연이 아니며, 저마다의 작가가 저마다의 글을 남긴 안동이야말로 실로 글의 보고이며 ‘문집文集의 고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향안동’을 인식하고 이를 소중한 전통의 자산으로 가꾸려는 관심은 잘 보이지 않는 느낌이다. 산과 강이 완벽하게 조화로운 도산이야말로 문학의 저변을 꾀해볼 수 있는 흔하지 않은 토양을 갖춘 곳이다. 나는 많은 가난한 문인, 지식인이 이 고장을 찾아 그 문학의 정열을 불태우기를 기대한다.
올미재를 뒤로하고, 모래사장과 청석靑石이 비단처럼 깔린 강변을 따라 수많은 강돌들을 밟으며 잠시 오르면, S자 모양으로 구비 꺾이는 곳에 깊은 소沼가 나온다. ‘월명담月明潭’이라 한다. 달빛 쏟아지는 연못처럼 맑고 밝은 소다. 너무나 고요하여 선인들이 ‘못(潭)’이라 했다. 못에는 용이 산다고 했던가? 용의 등천이 비와 관련이 있는가? 아무튼 이 고요한 못 층 벽에 ‘도우단禱雨壇’이 있어서 고을수령들은 예로부터 돼지를 잡아 기우제를 지냈고, 이 전통은 30여 년 전까지도 주민들에 의해 이어지고 있었다. 그 언어는 “용도용도 물 주소, 도랑용도 물 주소”였다. 이 말은 사물장단에 맞추어 제단 앞에서 오래도록 반복되었다. 이윽고 자정이 오면 제사를 지내고 돼지머리를 강물에 띄웠다. 이로써 의식은 종료되었다. 주민들은 지금도 제를 지내고 나면 신기하게도 비가 왔다고 했다. 믿음은 소망을 이루어주는 완강하고 기나긴 영적 결심이다. 퇴계의 시 한 구절은 이렇다.
그윽한 소 맑고 빼어나니, 그 속 음산한 곳 목석 신령 간직했네. 10일 동안 내린 비 이제야 개이니, 용아 구슬 안고 아늑한 달 속으로 돌아가라.
도산서원 전경 나는 예뎐길 전체여정을 모두 좋아하지만 벽력암 앞 강변에서 월명담까지의 사이를 더욱 좋아한다. 10여 년 전, 처음 이 길을 걸을 때 나는 너무나 행복감을 느껴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태어나서 그런 일은 처음이었다. 그 이후에도 그런 감정은 계속되었다. 그래서 이 길을 ‘행복의 길’이라 이름 해 두고자 한다. 물론 나 혼자만의 생각이다. 월명담을 지나면 좌우로 인가들이 보인다. 좌측은 ‘쏘두들’, 우측은 ‘가사리’라고 하는 동네이다. 그리고 강물 저 멀리 절벽아래 그림 같은 정자가 보인다. ‘고산정孤山亭’이다. 어느 일간신문에 ‘한국의 아름다운 정자’에 소개된 것을 본 기억이 있는데, 이 정자의 아름다움은 선조 때 명신 심희수沈喜壽의 고산정 시 “그 진경은 그림이나 글로서는 묘사하기 어렵다(眞景難摹畵筆端)”의 한 구절처럼, 솔직히 필자 또한 글로 형용할 능력이 없다. 사진을 찍어봐도 현상을 해보면 전연 딴판이다. 그래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옛 문헌을 뒤적여 관련기록들을 소개하는 것밖에 없다. 정자의 주인공은 이미 소개한 금란수(1530-1604)라는 분이다. 호가 성재惺齋, 혹은 ‘고산주인’이라고 했고 퇴계의 제자이다. 성재는 이곳에서 만년을 보내며 장구지소로 삼았다. 부포가 고향인 성재 역시 이 ‘예뎐길’을 따라 올라왔다가 여기에 눈길이 머물렀다. 성재는 이 곳의 경치에 매료되어 한해 여섯 번이나 찾아오기까지 했다. 그 시는 이렇다.
한 해 여섯 번을 왔건만, 사철 풍광 어김없네, 붉은 꽃잎 떨어지자 녹음 짙어지고, 노란 낙엽 땅에 지니 흰 눈 날리네. 단사협 바람이 옷깃을 헤치고, 매네 긴 소에서 비가 도롱이를 적시네. 이 중에 풍류 있으니, 취하여 강물 속의 달빛을 희롱하네.
성재는 자신의 이런 취향 속에는 ‘풍류風流가 있다’고 했다. 풍류는 바람처럼 흐르고 예술적으로 노는 것을 말함이니, 당시 성재는 진정 그런 감정에 젖어들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런 제자를 청량산 길에 찾은 퇴계의 시는 더욱 희화적戱畵的이다.
일공의 주인 금씨를, 지금 계시는지 강 건너로 물어보네. 농부는 손 저으며 내 말 못들은 듯, 구름 낀 산 바라보면 한참을 앉았네.
성재는 아들 넷을 두었는데 모두 뛰어났다. 그 가운데 막내인 금각琴恪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었다. 그의 천재성을 『선성지』기록에는 7, 8세에 “萬理皆備 朝廷得失 世上人事 皆已理會”라 했다. 즉 “만가지 이치와 조정의 득실과 세상의 인사를 모두 터득하였다”는 것이다. 萬理는 학문이며, 朝廷은 정치고, 人事는 사회와 인간관계의 문제인데, 금각이 7, 8세에 이미 이를 터득했다는 것이다. 성재는 그런 아들을 서울로 유학을 보내 당대의 학자로 허균의 형이며, 허난설헌의 오빠인 하곡 허봉(荷谷 許?)에게 맡겼는데, 시문에 능통한 하곡이 17세 전후의 금각에게 준 시의 한 구절에는 “금각의 시는 이태백을 능가한다”고 했다. 사람들은 또한 저 유명한 ‘등왕각서?王閣序’를 쓴 왕발王勃과도 비견된다 했다. 그런데, ‘천재는 박명하다’고 했던가. 금각은 불과 18세에 요절했다. 당시의 지인들은 진정 슬퍼했다. 외삼촌인 월천 조목(月川 趙穆)은 제문을 지어 추모하며 천재가 쓰이지 못하고 사라짐을 애통해했다. 그 금각이 마침 가송리의 풍광을 묘사한 글이 있어 일부를 소개한다. 그 글을 ‘일동록日洞錄’이라 했는데, 이때 금각의 나이는 16세에 불과했다.
“선성 북쪽에 산이 있으니 청량이요, 그 남쪽에 봉이 있으니 축융이다. 축융 아래는 ‘일동日洞’이다. ‘日’이라고 한 것은 동리에 ‘월담月潭’이라는 못이 있어서 병처럼 좁은 지역에 日月 가운데 그 하나만을 쓸 수 없기 때문이었다. ....동리는 그윽하고 조용하며 산은 높지만 좁지 아니하여 ‘어진 사람이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함’을 겸했으니, 참으로 은자隱者가 살아갈 만한 낙지樂地 서른 여섯 곳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비록 그런 땅이지만 아직 이 곳을 즐기는 사람이 없어, 별천지 세계가 황폐한 숲 속에 버려져 있고, 또 얼마나 세월이 흘렀지는 알지도 못한다. 그 후 아버지가 계시어 이 곳을 드러나게 하였으니, 이곳은 곧 하늘이 땅을 만들어 간직했다가 내어준 것이리라.”
고산정의 맞은 편에 있는 산이 ‘고산孤山’이다. 소종래所從來가 강제로 끊어진 ‘외로운 산’이다. 억겁의 세월, 물은 산을 잘라 기어코 어머니의 산을 만나지 못하게 했다. 그 그리움의 손짓이 고산정이란 말인가? 고산과 고산정의 애틋한 만남의 손짓을 못본 체하며 강물은 그 사이를 유유히 흐르고 있다.
‘가송佳松’은 ‘도산9곡’에서 제8곡으로 ‘아름다운 소나무가 있는 마을’이며, 금각의 표현대로 “별천지 세계이며, 하늘이 땅을 만들어 간직한 고반의 낙지”이다. 사실 낙동강 700리에 강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을 이 곳에서 모두 보여주고 있다. 곡曲, 소沼, 담潭, 지池, 암巖, 협峽 등이 이 일대를 지나는 낙동강이 청량산과 더불어 연출하고 있다. ‘선성14곡’, ‘도산9곡’의 명칭은 듣기 좋아라 지어진 이름이 아니다. 그런 즐겁고 행복한 땅, ‘낙지樂地’였기에 먹황새들이 곳곳에 날아들었다. 올미재의 학소대 뿐만 아니 이 곳 고산정 옆에는 또 다른 학소대가 있어 그 옛날의 낙지임을 증명하고 있다. 걸작의 『안동향토지』를 쓴 송지향宋志香 선생은 “안동 땅의 山水美를 꼽으라면 선뜻 가송협을 들만큼 여기는 영가 산수의 압권으로, 구차하게 그 자세한 이름들을 알 필요조차 작고 부질없는 짓이다”이라 했다. 사실 나는 글로서 이 ‘예뎐길’ 일대의 풍광을 묘사할 수 없어 권기윤權奇允 화백에게 그려보기를 권유하고, 어느 날 동행했는데 그는 가는 곳마다 떠날 줄 모른다. 그 호기심과 정열로 보아서는 불후의 ‘권기윤대표작’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고산정이 있는 마을이 ‘가사리’인데 여기에는 또 하나의 유적이 있다. 바로 ‘공민왕당’과 ‘공주당’이다. 공민왕당은 고산정 뒤 ‘축융봉’ 아래에 있으며, 공주당은 마을 가운데 있다. 왕과 왕비인 노국대장공주, 차비이씨(次妃李氏)와 왕의 어머니 태후가 함께 몽진한 『고려사』의 기록과 매우 합치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런 추모공간은 윗뒤실, 아랫뒤실, 정자골, 등자다리, 높은데, 구티미 등의 지명을 지닌 주변마을에 저마다 부인과 딸과 사위를 모신 당들이 있고, 지금도 추모의식이 이어지고 있다. 이미 언급한 단천리의 왕모당과 더불어 모두 10여 곳에 달한다. 모두가 공민왕당을 중심으로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공민왕당 일대는 ‘산성마을’이라 하는데 산성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60년대까지 13가구가 있었고, 전에 밭에서 금비녀, 구리솥, 창과 칼을 습득했다고 『청량지』는 기록했다. 전설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단천리의 굉매리, 의촌리의 장군서들, 섬촌리의 ‘민왕대愍王臺’. 부포리 ‘고통高通’의 지명 등등 헤아리기도 어렵다.
전설은 진실이다. 진실이 없었다면 전설은 있을 수 없다. 정몽주가 철퇴에 맞아 죽은 선죽교에 지금도 흐린 날이면 붉은 피가 베어 나온다고 하고, 고양의 최영 장군의 묘는 풀이 나지 않은 ‘적분赤墳’이라 한다.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이다. 인심은 진실이 그렇게 라도 잊혀지지 않기를 염원한다. 염원은 전승된다. 공민왕 전설 또한 진실의 전승이다. 그 진실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 필자는 어린 시절 섬촌리 끝자락에 위치한 ‘민왕대’로 놀러가고 했는데, 그때 주민들은 ‘밀양대’라 수도 없이 말했다. 밀양대, 밀양대, 밀양대.....공민왕이 오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전설이고, 공민왕이 머무르지 않고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이들 지역들을 도표로 표시해보면,
고산정이 과거완료형의 건물로 남아있다면, ’공민왕당', '공주당'은 현재진행형이다. 서두에 이미 '왕모당'을 소개하면서 언급했듯이, 당시 몽고의 말발굽에 쫓긴 공민왕의 몽진행차는 이 일대를 은신처로 삼았고, 그 행차를 목격한 주민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아마 외계인이 출현했다 하더라도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민왕의 안동몽진기간은 3개월이 채 못되었다. 1361년 12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였다. 안동에서 어가가 정확하게 어디에 머물렀는지는 기록이 없다. 예천을 지나 안동을 들어오는 입구, 겨울의 차가운 시냇물에 다리가 없어 곤란을 겪자 이를 본 여자들이 인교人橋를 만들어 왕비인 노국공주를 건너게 했고, 어가는 계속해서 관아를 지나 북으로 향해 청량산 기슭으로 은신해갔다. 이미 안동 연고의 호종관료들이 은밀히 추천했던 곳이다. 안동대 김호종金昊鍾 교수의 연구결과를 보면, 호종관료 28명 가운데 38%인 10명이 경상도 출신이고, 나머지 18명 가운데도 5명이 안동과 인연이 있었다 한다. 안동과 청량산의 몽진은 치밀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청량산에 들어온 어가는 계획대로 왕족들을 분산했다. 안동에 온다고 해서 관아 같은 곳에 머물 수 는 없는 일이었다. 요컨대 청량산은 최적의 피난처였다.
무성했던 소문이 현실로 나타났다. 왕의 행차가 실재로 당도했다. 엄청난 소용돌이가 청량산 일대에 몰아쳤다. 그리고 2개월이 흘렀다. 2개월은 주민들에게 200년이었다. 그리고 왕은 떠나갔다. 주민들은 왕의 무사 귀로를 손 모아 기원했다. 이 기간 주민들에게 왕은 곧 신이고 그 신이 바로 옆에 와 계셨던 것이다. 아마 엘리자베스 영국여왕을 맞이한 하회마을 주민들이 받은 충격의 100배는 되지 않았을까? 충격은 간절한 추모를 통해서만 가까스로 견딜 수 있었다. 주민들은 상징물과 추모공간을 만들었고, 그 상징물과 추모공간은 6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남아 이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매년 정월보름날 밤, 주민들은 이 공간에서 정성껏 당제堂祭를 지내는데, 이를 보노라면 신앙과 종교가 어디로부터 연원하는 것인가에 대한 원초적 물음을 갖게 한다. 기복祈福적 신앙으로 틀이 잡혀진 것은 여기도 마찬가지지만.
지금 공주당에는 화려한 초록저고리와 다홍치마가 걸려있다. 6. 25 전후, 그러니까 20년 전까지 주민들은 정월 초하루나 그 다음 날 이 옷을 입고 서낭당을 앞세워 뒷산을 올라 공민왕당이 있는 산성마을로 세배를 갔다. 왜 세배를 갔을까? ‘공주당’은 바로 왕비인 노국공주가 머문 곳이다. 역사상 가장 금슬이 좋았던 부부였기에, 피난처에서도 부인은 남편의 지근거리에 있었다. 그런 지척지간이었지만 만날 수는 없었다. 그런 도중 해가 바뀌었다. 피난 중에도 설날은 각별했다. 전세는 마침 호전되어 차츰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공주는 새 옷을 갈아입고 시녀와 위병을 대동하고 가마에 올라 높디높은 축융봉으로 향했다. 이 모습을 주민들은 고스란히 목격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지금 당집에 걸려있는 화려한 옷들은 그때 공주가 입은 옷이 아닐까? 새해 주민들이 이 옷을 입고 산성마을로의 세배는 공주행차의 재현은 아닐까? 경이적 세계에 대한 충격은 그렇게 각인되어 있다. 공민왕은 죽지 않았으며, 왕의 몽진은 적어도 여기서는 아직 끝나지 않은 셈이다.
玉淵書堂 근래 ‘안동’이 오늘의 안동으로 발전한 연유에 대해 두 분 왕의 행차를 농담삼아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한 분은 안동을 반도전역에 알렸고, 한 분은 세계에 알렸다. 공민왕과 엘리자베스 영국여왕이다. 몽진을 끝낸 공민왕은 그 후 조그만 ‘목牧’(福州牧)에 불과한 안동을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시켜 ‘안동대도호부’라하고, ‘安東雄府’라는 글씨를 써서 하사하여 안동발전의 초석을 놓았다. 이뿐만이 아니라 공민왕은 중앙정계에 안동출신 인사들이 진출하여 활약하도록 배려했고, 이런 환경은 결국 왕조가 바뀐 이후에도 안동의 영향력을 잃지 않게 했다. 이는 물론 몽진초기 인교를 만들어 강을 건너게 하여 ‘놋다리밟기’의 전통을 만든 안동인 모두의 갸륵한 정성의 반대급부에서 나온 조치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영국여왕은 ‘하회마을’, ‘봉정사’를 방문하여 세계에 안동을 알렸다. 여왕의 방문은 조용한 반가의 농촌마을의 모습을 송두리째 바꾸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지금 하회마을은 파천황의 변모를 겪고있다. 주민들은 1000년을 이어온 천직을 용도패기하고 숙박업으로 직업을 바꾸고 있다. 탓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노골적 상행위는 ‘군자의 의義’에 반하는 ‘소인의 이利’ 추구로 인식되어, 겸암(謙菴 柳雲龍)과 서애(西厓 柳成龍)의 숨결이 남아있는 전통적 반촌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으며, 백가쟁명의 무성한 처방이 쏟아지게 하고 있다. |
첫댓글 도산 온혜가 고향인 저도 잘 모르던 사실들을 알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계속 많은 글 부탁드립니다 저의 친구 濟春씨가 포항시청에 근무하는데 김선생님의 족친입니다 혹시 아시는지요
예 ! 알고 있습니다 . 도사공 5 남이신 장사랑 (휘:난) 선조 후손입니다 . 5 월 22 일 만났습니다 . 저한테는 아저씨 되죠...연세도 저보다 많구요 ...<선경회>카페 운영자 입니다. 저도 그렇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