福에도 고통 따르니 生死 벗어날 수 없어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세상 사람의 생사(生死)가 제일 큰일인데,
너희 문인들은 종일 공양해서
다만 복전(福田)만을 구하고 생사고해 벗어날 것을 구하지 않는구나!
너희들의 자성이 미혹하면 복의 문이 어찌 너희를 구하겠느냐?”
3. 게송을 지으라 이르심(命偈)
여기에 육조스님이 행자생활을 끝내고 법 받는 얘기가 나옵니다.
오조 홍인스님이 하루는 문인(門人)을 다 불러 모이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혜능행자가 온지 8개월이 지난 어느 날,
오조스님께서 천여 명 대중을 다 불러 모읍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세상 사람의 생사(生死)가 제일 큰일인데,
너희 문인들은 종일 공양해서 다만 복전(福田)만을 구하고
생사고해 벗어날 것을 구하지 않는구나!
너희들의 자성이 미혹하면 복의 문이 어찌 너희를 구하겠느냐?
세상 사람은 생사의 일이 제일 크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생사는 태어남과 죽음도 포함되지만,
그것보다 일상생활로 보면 됩니다.
지금 우리가 “응무소주(應無所住)”를 안하면 생각이 일어났다-꺼졌다 반복합니다.
이게 속성입니다. 도인이든, 아니든 일어났다-꺼졌다 합니다.
존재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분별심으로 일어났다-꺼졌다 하면서 나를 굉장히 괴롭히는데,
우리 본질인 불성을 깨달으면 똑같이 일어났다-꺼졌다 합니다만,
그것이 전혀 우리한테 고통으로 다가오지 않아요. 오히려 즐거움으로 다가옵니다.
인도에서는 한 찰나라고 하면 1/30초라고 하는데요.
한 찰나 간에 일어났다-꺼졌다 하는 것이 수십 번 한답니다.
이것이 뭐와 같는가 하면, 문 사이로 햇빛이 비치면 떠다니는 먼지와 같아요.
그런데 우리는 이걸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속성이 그렇습니다. 그게 나쁜 게 아니에요.
그런데 “내가 있다”고 착각을 일으키면,
그 자체가 나를 굉장히 괴롭히는 결과가 되는데 우리가 그 본질, 불성 자리,
오온개공 자리를 보게 되면, 그것이 전혀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분별심이 안 일어나야 도인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분이 있는데 잘못 이해한 겁니다.
하나는 세탁이 되어 깨끗한 데에서 생멸하고 있는 것이고,
하나는 오염이 되어 분별하고 있는 차이입니다.
그럼, 오염이 진짜 오염이냐. 그것도 착각이다.
“내가 있다”고 생각한 착각 때문이다.
그래서 견성을 꿈 깨는 것에 비유합니다. 꿈 깨는 것과 같다.
여기에 나오는 생사도 우리 일상생활에서 생각을 일으켰다가 거두어들였다,
일으켰다 거두어 들였다 하는 그것을 생사로 보시는 게 좋습니다.
물론 이 안에도 태어나고 죽는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계속 반복하다보면 결국은 죽음까지 가니까,
그러나, 죽음만 생사하는 게 아니고
우리 일상생활에 일어났다가 또 사그러졌다 하는 그 마음을
통틀어 생사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 생사의 일이 굉장히 큰데 복만 지어서 되겠느냐?
그 복 가지고는 생사의 괴로움을 해결할 수가 없다.
그럼 해결할 수 없다는 말은 무엇인가?
복에도 항상 고통이 따라 다닌다는 말입니다.
법을 공부해서 “오온개공”을 알고 법을 체험하면 그 고통이 없어지는 것이다.
너희들은 모두 방으로 돌아가 스스로 잘 살펴보아라.
지혜가 있는 자는 스스로 본래 성품인 반야의 지혜를 써서
각자 게송 하나씩을 지어 나에게 가져오너라.
내가 너희들의 게송을 보고 만약 큰 뜻을 깨달은 자가 있으면,
그에게 가사와 법을 부촉해서 육조로 삼을 것이니 어서 빨리 서두르도록 하라.
대중을 다 불러놓고 복으로는 태어남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여기 ‘본래 성품의 반야지혜’는 마하반야를 말하지요.
그 마하반야로 게송을 하나 지어 오너라.
만일 그 게송이 깨달음의 게송이라면
가사와 법을 부촉해서 육대조사로 삼겠다. 하셨습니다.
어찌 보면 일천여 명 대중 가운데
어떤 사람이 공부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다 알 수 없으니까,
대중의 공부 능력을 게송으로 공모하는 방식이지요.
당시 대중에서 신수스님이 제일 빼어난 분이었어요.
그런데 육조스님과 같이 행자도 뛰어난 견해를 가진 분이 있으니
대중의 공부 견해를 게송으로 받아 당신의 후계자를 공개적으로 물색하는 것입니다.
문인들이 지시를 받고 각자 방으로 돌아와서 서로 말하기를
‘우리는 마음을 가다듬어 뜻으로 게송을 지어 스님께 바칠 필요가 없다.
신수상좌가 교수사이니,
법을 얻은 후에 자연히 의지하면 되니까 굳이 지을 필요가 없다.’
모든 사람들이 마음을 쉬고 다들 감히 게송을 짓지 않았다.
신수상좌가 당시에 오조 홍인스님 밑에서는
교수사로 제일 공부가 많이 되어 가르치고 있었어요.
지금 총림의 유나(維那)로 방장을 보좌하여
대중을 통솔하던 분이 자타가 공인하는 신수스님이 있으니까
우리는 게를 지어 바칠 필요가 없다.
신수스님이 게송을 지어 바치고 법도 얻을 테니
우리는 신수스님한테 의지하면 된다. 대중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때에 오조스님 방 앞에 세 칸의 회랑이 있어
그 회랑 벽에 ‘능가 변상도’와 오조스님이 가사와 법을 전수하는 그림을 그려
공양해서 후대에 유행시켜 기념하고자
화인 노진에게 벽을 살피게 하여 다음날 시작하려 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하나 있어요.
오조스님이 ‘금강경’만 읽으면 견성성불 한다. 하시고
벽화는 ‘능가경 변상도’를 그린다고 했지요.
변상도(變相圖)는 경의 특색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금강경’ 그림을 그리면 맞는데 ‘능가경’을 그리라 했어요.
조금 문제가 있는 대목입니다.
4. 신수(神秀)
신수(606~706)스님은 스승인 오조 홍인(594~674)스님과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됩니다.
신수스님은 젊었을 때부터 학문을 많이 한 분입니다.
굉장히 유식하고 인물도 잘 생기고 키도 8척이나 되었다고 해요.
반면에 육조스님은 얼굴도 못생기고 키도 작았어요.
신수스님은 여러 모로 능력을 갖춘 분이었지만,
육조스님에 비하여 불성 보는 것에는 뒤떨어 졌던가 봅니다.
이 불성 자리를 보면 외형적 조건이나 능력 같은 것도 다 극복할 수 있습니다.
신수스님보다는 혜능스님이 도를 깨치고 난 후에
훨씬 더 행복하게 산 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불성 보는 것이 능력보다 훨씬 더 귀중하다는 것을 아셨으면 합니다.
신수스님은 생각하되,
‘모든 사람이 마음의 게송을 바치지 않는 것은 내가 교수사이기 때문이다.'
신수스님이 교수사로 되어 있어 다른 사람들이 게를 안 바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만약 마음의 게를 바치지 않으면
오조스님께서 어떻게 나의 견해가 깊고 얕음을 알 것인가?
게를 안 바치면 오조스님이 자기의 심중을 볼 수 없지요?
내가 오조스님께 마음의 게송을 지어 뜻을 밝혀 법을 구하는 것은 옳거니와,
조사의 지위를 넘보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게 함은 오히려 범부의 마음으로 성인의 지위를 빼앗으려 함과 같다.
게송을 지어 오조스님께 바쳐 법을 구하는 것은 옳지만,
능력 없는 사람이 그 자리를 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신수스님은 겸손한 분 같아요.
법으로 후계를 이어야지 다른 것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만약, 마음의 게송을 바치지 않으면 마침내 법을 얻지 못한다.
우리 사회에서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신분상승 하려는 것과는 많이 다르지요.
그렇게 신분 상승해도 실제로 이 마음을 모르면 굉장히 불안합니다. 행복하지 않아요.
나쁜 방법으로 얻으면, 그만큼 마음이 불안한 것이 당연하지요.
왜냐, 자기도 그렇게 그 자리를 차지했으니,
다른 사람도 그런 식으로 내 자리를 빼앗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이 편안하지 않습니다.
침묵하며 생각하고 생각하되 참으로 어렵고 어려우며, 실로 어렵고 어려운 일이다.
게를 쓰려고 하니 자신은 없고, 안 쓰려고 하니 난감하고,
대중은 전부 자기 얼굴만 쳐다보는 것 같아 정말 어려운 일이라 생각하지요.
밤이 삼경에 이르면 사람들이 보지 않으니
남쪽 회랑 중간 벽에 마음의 게를 써놓고 법을 구해 보아야겠다.
자신이 있으면 당당하게 견해를 밝히는데,
그렇지 못하니 사람 안 보는 밤중에 벽에다 써놓자는 생각을 합니다.
자신이 없지요. 이래선 안됩니다.
만약 오조스님이 게를 보시고
이 게가 합당치 않다고 나를 찾으면 내가 전생 업장이 두터워 법을 얻지 못함이니,
성인의 뜻은 헤아리기 어려우므로 내 마음을 스스로 쉬어야 하겠다.’
이 게를 보고 “견성 못한 게다.” 하시면, 성인의 뜻을 내가 이해 못한 것이니
육조가 되려는 것도 스스로 쉬어야 하겠다고 합니다.
이로 보아 신수스님이 상당히 사리 판단이 분명한 분입니다.
나중에 육조스님이 남쪽으로 내려가고
이 분은 낙양, 장안 쪽에서 3대 황제 동안 국사(國師)를 합니다.
그때 측천무후한테 육조스님이 도인이니까
그 분을 한 번 만나보라고 추천한 적도 있습니다.
육조스님은 측천무후의 초청에 병을 핑계 대고 안 갔어요.
2006. 07. 29
고우 스님의 돈황본 육조단경 대강좌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