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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서울에서 한 통의 편지가 왔다. (효봉 선사 수행기 9부)
효봉스님이 통영 미륵산 미래사에서 주석하고 있던 서기 1954년, 스님의 세속나이 67세 되던 8월 어느 날 서울에서 한 통의 편지가 왔다.
“방장스님, 서울에서 서찰이 왔습니다.”
“서울에서 서찰이 왔다고? 어디 펼쳐서 읽어보아라.”
이 서찰은 왜색으로 타락된 한국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울 불교정화를 벌일 것을 의논하고자 하니 속히 상경하라는 동산스님과 청담스님의 간곡한 말이 적힌 편지였다.
편지를 다 듣고난 스님은,
“여보게, 구산. 아무래도 서울로 가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제가 방장스님을 모시고 가겠습니다.”
“그래 주겠는가? 그럼 이곳 절 살림은 보성이한테 맡기고 구산이 자네는 나랑 함께 떠나세. 일관(一觀)이 너도 함께 갈 것이니 바랑을 꾸려라.”
일관이는 도솔암에서 머리를 깎은 갓 들어온 시자다.
“당장 말입니까요?”
“당장 내일이라도 떠나야지. 서울서 모두 기다리고 있다지 않더냐? 중들이 제대로 중노릇을 하지 아니하고 싸움질만 하다가는 이 나라 불교가 뿌리째 뽑혀 나갈 판국인데 이러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지 않겠느냐?”
서기 1954년 5월21일 이승만대통령은 ‘불교정화’ 유시를 통해서 왜색불교의 유풍인 처자 있는 대처승들은 사찰 밖으로 물러가고, 한국 고유의 승풍인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올 잇기 위해 독신승(비구승)이 사찰을 지키게 하라는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이승만은 특히 반일정신이 강해서 왜색불교의 흔적인 대처승불교를 혐오했다.
그러나 그에 앞서서 이러한 정화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원인을 캐자면 그 발단이 1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제국주의가 한국불교를 말살하기 위해서 친일파 승려 이희광을 앞세워서 일본 조동종(曺洞宗)과 합종(合宗)하는 연합조약을 체결한데서부터 발단된다. 박한영, 한용운스님의 한국불교의 주체를 확립하려는 운동은 서기 1911년 6월 조선총독부 ‘사찰령’에 의해서 일단 주춤했으나 해방이 되자 다시 일제의 잔재를 없애려는 시도가 일기 시작했다.
서기 1948년 박한영스님의 업적으로 송만암 스님이 종정에 취임하고 종헌을 바꿔서 스님들을 교화승(대처승)과 수행승(비구승)으로 구분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리하여 비구측과 대처측은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 등지로 옮겨가면서 연석회의를 열었으나 서로 이해가 상반되어 결론이 나지 않았다. 마침내 비구측은 서기 1954년 8월24일 선학원에서 전국 비구승 대표자회의를 열어 별도의 종단을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이승만대통령의 유시는 비구승 측에 힘을 주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불교정화운동은 활기를 띠고 동산, 효봉, 청담, 금오스님에 의해서 주도되었으며, 청담스님은 특히 젊은 스님으로서 완전 정화를 주장하는 강경한 입장을 표명하여 점진적으로 정화하자는 효봉스님과는 의견을 달리하기도 하였다.
서기 1956년 새로 구성된 종단은 종정에 만암스님, 부종정에 동산스님, 종회의장에 효봉스님, 총무원장에 청담스님, 감찰원장에 금오스님을 선출하였다. 만암스님이 종조(宗祖)의 문제로 종정직을 사임하자 석우스님이 종정을 맡았고, 2년 뒤에 석우스님의 입적으로 효봉스님이 종정에 취임하였다가 6년 뒤 서기 1962년 4월11일에 통합종단을 구성하고 초대종정으로 추대되었다.
종단정화운동은 오늘날 불교의 현대화, 대중화 운동에도 한몫을 했다. 승단정화를 통해서 왜색불교의 잔재를 청산하고, 불교의 정통성을 회복함은 물론 우수한 도제(徒弟)의 양성, 어려운 불경의 번역, 대중포교의 활성화 등 오늘날 한국불교의 위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할 수 있다.
불교정화운동 동참 위해 서울로
효봉스님은 이러한 불교정화운동의 깃발을 들기 위해서 통영 미래사에 머물며 수행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그해 8월17일 상경하기에 이르렀다.
스님은 서울에 올라와서 안국동 선학원에서 머물게 되었다.
선학원에 머물게 되었다는 소문이 어느덧 문밖에 나가자 문안을 드리고자 찾아오는 스님들과 재가불자들로 선학원도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스님은 안국동 선학원에서 일년 동안 주석하며 종단정화에 매달렸다.
서기 1954년 8월24일 선학원에서는 천국 비구송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의 법문을 통해 스님은 이렇게 사자후(獅子喉)를 토했다.
오늘 나는 묘고산(妙高山)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았다.
안에는 사상(四相)의 산이 둘러있고 밖에는 생사의 바다가 둘러있으니, 어떻게 하면 그 사상의 산을 넘고 생사의 바다를 건널 수 있겠는가?
스님은 출가 입산한 뒤로 시정에 발딛기를 그토록 꺼려했으나 한동안 어지러운 종단일을 수습하기 위해서 번다한 일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그래서 무자 화두를 외던 스님의 입에서는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망할 놈의 자식들’이라는 말이 대신 흘러나왔다. 수도인과 시정인의 차이만큼이나 거리가 먼 두 말이었다.
옆에서 시봉을 들던 수좌들이 누가 망할 놈의 자식이냐고 물으면,
“너희는 알 것 없어!” 하며 말길을 끊었다.
그때 스님은 종단정화의 방법문제를 두고 다른 스님들과 의견을 달리했다. 급진적인 스님들은 한꺼번에 대처승이 소유한 절을 모두 장악하지 않으면 후일에 화근이 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일을 순리적으로 풀어가야 한다는 것이 스님의 주장이었다. 숫 적으로 열세인 비구승은 숫자도 적을 뿐 아니라, 본분이 수도에 있으니 이판(理判 : 불경의 연구와 참선에만 열중하는 일)에는 능할지 몰라도 사판(事判 : 절의 재무와 살림을 꾸려가는 일)에는 서투르므로,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 등 삼보사찰만 맡아가지고 거기서 착실히 수행하면서 힘 따라 서서히 정화하자는 주장이었다.
“쥐도 도망갈 구멍을 두고 쫓으랬는데 대처승을 일시에 몰아내려한다면 문제가 커지고 말 것이오. 그 사람들이 앉아서 가만히 당할 리는 만무할 것인즉, 반드시 절 뺏기와 주지 싸움, 나아가서 종권다툼으로 발전하여 악순환을 거듭하게 될 것이오. 더구나 대처승은 가족까지 거느리고 있으니 더 필사적으로 저항할 것이오.”
스님의 예견은 들어맞았다. 정화불사는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엉뚱한 데로 흘러가 한국불교에 치명적인 상처만을 더 크게 남기고 말았다.
누가 날 찾거든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하게
스님은 종단정화불사가 단시일에 끝나지 않을 것을 예견하고 다시 통영 미래사로 내려왔다. 그해가 서기 1955년 겨울. 스님은 제자들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방장스님?”
“응, 염치가 없구만. 내 자네들한테 한 가지 청이 또 있어서.”
“염치가 없다니요, 스님. 제게 무엇이든 말씀하세요. 힘자라는데 까지
스님을 모시는 게 저희들 도리인걸요.”
“고마우이. 자네들도 알다시피 지난 일 년 동안 서울에 가서 정화네 뭐네 하면서 공부를 게올리했으니 그동안 못한 공부를 해야 할까봐.”
“방장스님, 외람된 말씀일지 모르지만 건강도 좀 생각하셔야지요.”
“아니야, 난 이렇게 건강하지 않은가? 머리 깎은 중이 공부는 하지 않고 게으름을 핀다면 죄를 면하지 못할 거야. 내가 여기에 온 줄 알면 또 사람들이 몰려들테니 토굴을 하나 묻어야겠어.”
“그러면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방장스님.”
제자들은 일단 대답을 하고 나오기는 했으나 효봉스님의 건강이 염려되었다. 방장스님의 성격으로 미루어 뜻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 효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일단 토굴을 지어드리기로 결론을 내렸다. 토굴은 미래사 입구에서 왼쪽으로 산중턱을 타고 가다가 커다란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 밑이 사람 7,8명은 피할 만한 곳이어서 그곳의 천연조건을 이용하여 토굴을 짓기로 하였다. 효봉스님이 토굴로 자리를 옮겨 앉았으나 스님을 뵙고자 하는 신도는 물론 사방에서 눈푸른 납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미래사는 늘 무슨 잔치 집같이 붐볐다.
그때 토굴에서의 시봉은 법정(法頂)수좌가 머물면서 하였다. 법정수좌는 효봉스님이 서울 선학원에서 종단정화의 일로 주석하고 있던 서기 1954년 겨울 출가를 허락한 신참이었다.
법정은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던 나이에 6 ·25를 지켜보면서 인간존재에 대한 회의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며 큰 의문을 가지고 고뇌와 방황의 학창시절을 보냈다. 마침내 24세 때 입산 출가를 결심하고 초겨울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로 가기 위해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밤차로 서울에 내려 강원도행 버스를 타려 했으나 봉익동 대각사에서 만난 월정사의 한 스님이 말하기를 오대산에 눈이 많이 내려서 교통이 두절되어 한동안 가지 못활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대각사에 있던 한 스님이 선학원에 효봉스님이라는 도인스님이 머물러 계신다고 일러주었다. 그 길로 안국동 선학원을 찾아가서 그동안 가졌던 인간존재에 대한 의문과 출가할 결심을 말하였다. 한마디 말도 없이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효봉스님은 한동안 목포에서 왔다는 청년의 얼굴을 쳐다보고 비로소 입을 열었다.
“생년월일은 언제던고?”
스님을 찾아와서 출가하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생년 월일을 묻고는 조용히 간지를 깊어보고 출가 여부를 결정하는 습관을 효봉스님은 가지고 있었다.
“중노릇이라는 게 무슨 벼슬하는 것도 아니고,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야. 법란(法亂)이 심할 때는 신심이 금강같이 굳지 않고서는 견뎌내기가 힘드는 법이지. 수도생활이란 오로지 고행의 가시밭길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일세. 대저 한번 출가를 하면 사자의 힘줄과 코끼리의 힘으로 인정을 끊어야 하고, 일구월심으로 부처님의 출가한 뜻을 알아 부처의 행동을 지녀야 한다.”
이리하여 법정은 효봉스님의 허락을 받아 출가하였다.
효봉스님은 법정수좌를 곁에 두고 불교집안의 법도를 몸에 익히도록 지도했다. 스님은 법정뿐 아니라 처음 머리를 깎는 수좌가 생기면 누구나 곁에 두고 마치 속가에서 할아버지가 가문의 내력과 법도를 일러주듯 그렇게 절집안의 여러가지 수행법과 불교의 이치에 대해서 깨우쳐주고 타일렀다. 처음 머릴 깎은 수좌들도 젊은 사형(師兄)들 밑에서 주눅들어 생활하는 것보다 훨씬 편안한 마음으로 절집안 풍속에 익숙할 수 있었다.
효봉스님은 미래사 토굴에서 참선삼매에 들어 하루 한 끼의 공양만 들 뿐 오후에는 불식하는 정진을 또 시작했다. 스님은 털끝만큼도 계율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았고, 그러기에 제자들에게도 엄한 채찍을 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해 겨울 미래사 토굴에서 동안거를 마치고 해제를 하는 날 스님은 법정에게 사미계를 주고난 후 제자들을 불렀다.
“이보시게, 구산.”
“예.”
“내 법정사미를 데리고 인적이 끊어진 선방에 가서 당분간 지내고 싶구만. 지리산 쌍계사로 갈 것이니 누가 날 찾거든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해주게.”
철저한 절약정신, 은연중 제자들에게도
스님은 새로 출가한 법정사미만을 데리고 지리산 쌍계사 탑전(搭嚴)으로 가서 참선삼매에 몰입하곤 했다. 미래사 토굴에서 안거를 하고자 했으나 마무리되지 않은 종단정화 등의 일로 부득불 만나야하는 내방객들 때문에 제대로 정진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리산 쌍계사 탑전에서 법정사미와 단둘이만 거처하면서도 스님은 계행을 철두철미하게 지켰다. 무더운 삼복더위에도 가사와 장삼을 벗지 않았다. 공양을 들 때도 항상 대중이 있는 것처럼 죽비를 치고 심경(心經) : 식당작법)을 외운 뒤 엄숙하게 앉아서 음식을 먹었다.
그해 여름 어느 날이었다. 법정사미가 동구 밖으로 찬거리를 구하러 내려갔는데 도중에 소나기를 만났다. 그래서 남의 집 처마 밑에서 잠시 비를 피했다가 오느라고 저녁 공양 지을 시간에 대지를 못했다. 늦은 시간은 단 10분. 그러나 스님은 법정사미를 불러 호되게 꾸짖었다.
“오늘은 저녁 공양을 짓지 말아라. 단식이다.
수행한다는 사람이 그렇게 시간관념이 없어서야 되겠느냐?”
“도중에 소나기를 만나서…”
“그것은 구실에 지나지 않는 변명. 수행에는 소나기보다 어려운 난관이 얼마든지 있는 법. 도를 닦는 사람이 그까짓 소나기가 무서워 피한대서야 어찌 더한 장애물을 넘겠는고?”
이날 준엄하게 시간에 대한 교훈을 얻은 법정스님은 시간관념이 뺏속깊이 박혔다.
그뿐 아니라 스님은 시주 들어온 물건에 대해서 인색할 만큼 아끼고 절약했다. 어느 날 아침 공양 후 우물가에서 설거지를 마치고 막 들어와 앉자마자 스님이 우물가에서 불렀다.
“얘, 법정아.”
“예, 방장스님.”
“빈 그릇하고 젓가락을 가져오너라.”
“빈 그릇은 어디에 쓰시게요 ? ”
“아, 인석아! 가져오라면 가져올 것이지 웬 토는 달아?”
스님의 목소리에 뻣뻣한 가시가 돋쳐 있었다. 법정사미는 숨을 죽이고 그릇과 젓가락을 가지고 우물가로 갔다. 스님은 우물가에 쪼그리고 앉더니 설거지 하면서 버려진 밥알과 된장국에 넣었던 시래기 줄기를 젓가락으로 주어담기 시작했다. 밥알은 겨우 l0개도 넘지 않았다. 스님은 그 밥알과 시래기 줄기를 물로 한번 행군 후훌쩍 한 입에 들이마셨다.
촛불을 켜고 불경을 읽을 때도 초심지가 다 타서 내려앉기 전에는 초를 갈아끼우지 못하게 했다. 행장을 챙겨드리다 보면 쓰다가만 비누조각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금강산 시절, 그러니까 30년 전에 쓰던 비누조각이었다. 이름이 비누이지 이미 향기가 다 빠져나가 때를 제대로 씻어낼 수 없을 정도였다.
옷은 실오라기가 닳고 닳아서 살이 비칠 정도가 되어야 바꾸었다. 솜옷도 세탁을 해야 할 경우 솜먼지 하나라도 나르지 않게 하면서 손수 한 올 한 올 실밥을 뜯어서 내주었다. 그 까닭을 물으면 솜과 옷감을 분리하면서 혹시 찢어질까 염려해서 그런다는 것이다. 이렇게 아껴쓰는 습관은 스님을 모시는 제자들에게도 은연중 몸에 배게 되었다. 다 쓰고 못쓰게 된 물건을 버리는 경우에는 반드시 보고하고 확인을 얻은 다음에 버려야지 그렇지 않고 마음대로 버렸다가는 혼줄이 났다.
불교대회 참가 후 세계로 눈을 돌려
쌍계사 탑전에서 법정사미와 단둘이 수행정진을 하고 있던 그해 10월 말경 미래사의 구산스님이 문득 찾아왔다.
“구산 문안올립니다.”
“그래, 대중들은 다 잘 있는가?”
“예, 모두 열심히 정진하고 있습니다.”
“암,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 말고. 그런데 자네는 무슨 일로 왔는가?”
“서울에서 전갈이 와서 스님께 여쭙고자 왔습니다. 이번 네팔에서 제4차 세계불교도우의회를 연다고 합니다. 그 회의에 한국대표로 방장스님이 참석하시도록 결정이 되었다 합니다.”
이때 그러니까 서기 1956년 11월에 한국은 세계불교도우의회에 가입을 하게 되었고 한국불교가 국제적으로 처음 소개되었다. 이 회의에 한국의 대표로는 동산스님, 효봉스님, 청담스님이 참석하였다. 세 스님은 네팔의 국제회의에 참석한 후에 부처님의 나라 인도 성지를 두루 살펴보고 동남아 불교국을 시찰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여행길에 나섰다.
그런데 인도에서 문제가 생겼다. 세 스님들을 안내하기로 했던 안내인이 그만 도중에 잠적해 버린 것이다. 통역이 없으니 꼼짝없이 손발이 묶인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여간 낭패가 아니었다. 손짓발짓을 해가며 호텔로 돌아온 스님들은 호텔 프론트에서 일본말이 귀에 들리자 번쩍 귀가 뜨였다.
일본의 어느 대학교수라고 하는 일본인 두 사람은 스님들의 이야기를 듣자 마침 자기들도 버마와 태국을 거쳐서 동남아의 불교문화를 시찰하는 중이니 자기들을 따라올 의향이 있으면 따라오라는 거이었다. 그들은 서양말을 제법 잘하는 듯 거리에서도 아무 불편없이 다녔고 스님들에게도 어느 정도 예절을 지키면서 대해주었다. 일제 36년의 피맺힌 한을 생각하면 대면조차 하기 싫은 일인들이었으나 낯선 이국땅에서 손발이 잘린 것이나 다름없는 처지고 보니 민족감정보다 부끄러움과 반가움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세계불교도우의회에 참석하러 가서 고생을 하고 온 동산, 효봉, 청담 세 스님은 공통으로 느끼는 바가 있었다. 그것은 우리도 세계로 눈을 돌리고 젊은 인재를 해외에 많이 보내서 공부를 시켜 우물안 개구리와 같은 처지를 탈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귀국 후에 효봉스님은 미래사에서 수행하고 있던 제자 중에서 나이가 가장 어린 박완일, 곧 일관(一觀)사미를 동국대학에 진학시켰다. 일관사미는 고등학교 때 충무로 이순신장군 유적지에 수학여행을 왔다가 효봉스님을 만난 뒤 도인이 되는 공부를 하겠다면서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담을 넘어서 출가한 이제 갓 스물되는 영리한 학인이었다.
중의 벼슬은 닭의 벼슬만도 못한 거야
세계불교우의회와 동남아 불교국을 순방하고 돌아온 스님은 인도에서 충격을 받았음인지 생각에 다소의 변화를 가져와서 그동안 그렇게 꺼리던 시정 출입도 자주 하는 편이었다. 더구나 아직도 종단정화가 마무리되지 못한 터라서 그 일도 두고만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종회의장에 추대되자 사양하지 않고 수락했고, 이듬해인 서기 1957년에는 칠십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총무원장직을 맡았다. 그러나 스님은 늘 이렇게 말하였다.
“중의 벼슬은 닭의 벼슬만도 못한 게야.”
특히 불교정화의 문제가 매듭되지 않은 때라서 그야말로 날마다 편할 날이 없었다. 그래서 스님은 다음과 같은 불교정화불사송을 손수 써서 걸어두고 대중들이 마음에 새기도록 하였다.
큰집이 무너지려 하니
여렷이 힘으로 붙들어라.
(大厦將崩 家力扶持)
총무원장직을 맡은 지 일 년이 막 지난 2월에 종정으로 있던 석우 대선사가 입적하였다. 효봉스님은 이렇게 조사를 지어 종정스님의 열반한 뜻을 전했다.
백설이 어지러이 흩날려도 산천은 겨울이 아닙니다.
이제 종정 석우대선사께서 열반상올 보이시니
이는 백설의 의지입니까,
산천의 웅자(雄姿)입니까.
오실 때도 상(相)이 없이 오셨고,
가실 때 또한 그러시니
이날 종정의 면목은 어디서 찾으오리까.
산은 첩첩하고 물은 잔잔합니다.
시절인연은 바야흐로 교황(敎況)이 왕양(汪洋)하여
정화성업이 본궤에 오른 때에
홀연히 무상대법문(無常大法門)을 보이시니
영광이 독요(獨耀)하여 하늘을 가리고 땅을 덮습니다.
천지를 거두어 세상 밖에 내던지고 일월을 움켜 소매 속에 간직하니 이 무슨 도리이며, 종소리 떨어지는 곳에 뜬구름 흩어지고 만송이 푸른 산이 바로 석양이니 이 무슨 말씀입니까. 선사는 뜬구름이 아니시며 때는 석양이 아닙니다.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되어
종정 석우대선사가 입적하자 종단에서는 효봉스님을 새 종정으로 추대하였다. 이때 세속나이 일흔한 살. 종정이 되었으나 그동안 직접 관련한 종단정화사업과 불교중흥을 위해서 서울에서 가까운 양주 흥국사에 주석하였다.
흥국사에 주석하고 있던 무렵 이승만대통령의 생일에 종단대표로 참석하게 되었다. 오늘날 청와대인 대통령 관저 경무대에는 고관대작과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벌써부터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승만대통령이 등장하여 자리에 앉자 차례로 줄을 서서 축하 인사를 올리며 그 앞을 지나가게 되어 있었다. 스님도 줄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리에 앉은 채 고개를 끄덕여서 생일축하 인사를 받았다. 그러다가 스님의 차례가 되었다.
“대통령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이승만대통령은 자리에서 얼른 일어나 앞으로 걸어 나오며 스님의 두 손을 마주잡고 앉을 자리를 권했다.
“도인스님께서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네다. 스님의 생일은 언제입네까? 스님 생일에 나도 꼭 초대해 주시오.”
“생불사 사불사(生不死 死不死)라.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년데, 늙은 중한테 무슨 생일이 따로 있겠습니까?”
“생불사 사불사 생불사 사불사…”
이대통령은 정색을 하고 이 말을 입속으로 되뇌이더니
“우리나라에 스님같은 큰 도인이 많이 나오게 해주시오.”
하면서 다시 스님의 손을 꼭 잡았다.
스님은 그동안 총무원장과 종정으로 있으면서 체질에 맞지 않는 세속의 일에 너무 마음을 썼던지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서기 1958년 겨울 대구 팔공산 동화사 금당선원(金堂禪院)으로 내려와 잠시 지친 몸을 쉬고 있었다. 동화사에 머물게 된 것은 건강진단도 받고 신병치료를 하기 위해 대구와 가까운 절을 물색하다보니 임시 거처로 정한 것이다. 비록 건강은 약화되었으나 스님은 여전히 엄한 계행을 고수하였다. 학인들을 위해서 법문도 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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