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41코스 제1부
구시포해수욕장-구시포항-구시포마을 입구-명사십리-장호 어촌체험장-
용두마을-상부마을 입구-명사십리 해양파크-전북수산기술연구소-
동호 국민여가캠핑장&해수욕장-구동호마을-삼양동마을-동호교차로
20230308
1.명사십리와 동호해안 해송숲의 아름다움
서해랑길 40코스를 마친 뒤 구시포 해안 편의점 앞에서 컵라면을 먹고서 곧바로 서해랑길 41코스 탐방에 나선다. 19.7km, 6시간 30분이 소요된다는 41코스 탐방을, 제1부 : 구시포해수욕장-명사십리-동호교차로 탐방, 제2부 : 동호교차로-서해안바람공원-심원면행정복지센터 탐방, 이렇게 2구간으로 나누어 기록한다.
'천년의 빛 영광(靈光)'에서 고창(高敞)으로 넘어왔다. 고창은 어떤 지역인가? 디지털고창문화대전에서 소개한 고창군 일부 내용을 통해 고창을 개략적으로 알아본다. "고창군(高敞郡)은 ‘유네스코 생물권보존지역’이며, 고인돌·판소리·농악·고창갯벌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고창군은 유형·무형·자연 등의 모든 세계유산을 가진 한국 유일의 생태·문화·관광 도시가 된다. 또한 고창군은 고인돌과 같은 거석문화가 발달한 고대 문화의 중심지이자 보국안민의 기치를 높이 세운 동학농민혁명의 거룩한 발상지이다."(디지털고창문화대전) 그렇군. 생물권보존지역, 고인돌, 신재효의 판소리, 호남우도 고창농악, 고창갯벌, 고창 무장(茂長)에서의 동학농민혁명 제2차 봉기, 이들이 고창의 중심이 되는 보물들이군. 그런데 이 기록에 해리염전, 현재의 삼양염전이 빠져 있네.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1891~1955) 선생의 동생 수당(秀堂) 김연수(金秊洙, 1896~1979) 선생의 사업체 해리염전 이야기가 빠지면 고창갯벌은, 구체적 역사 현실과는 상관 없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 아닌가. 자연에 인간의 삶과 현실을 아로새기는 것이 인간 역사의 흔적이 될 텐데, 고창 염전역사의 증인 해리염전이 빠져 있군.
높을 高, 높을 敞, 고창(高敞)의 한자 지명은 '높다'는 의미의 한자를 연속적으로 쓴다. 이 지명의 유래는 어떻게 되는가? 고창 지역은 마한의 54개 소국 가운데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이었는데, 이후 백제에 복속되어 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모로비리와 모량부리가 무슨 뜻일까? 모로비리와 모량부리가 같은 의미를 뜻하는 단어의 변화로 본다면, 모로(牟盧)가 모량(毛良)으로, 비리(卑離)가 부리(夫里)로 변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牟盧 = 毛良을 高, 卑離 = 夫里를 敞으로 적어 오늘의 고창(高敞) 지명이 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모로를 머리, 비리를 벌판이나 들의 뜻으로 보아, 모로비리(牟盧卑離)를 '가장 넓은 들, 비옥한 평야의 으뜸'의 의미로 풀이한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고창(高敞) 지역은 무엇이 '높다'는 것일까? 모로비리국은 마한 54개 소국의 맹주로 청동기 문화를 배경으로 해양 문화를 꽃피운 나라인데, 이를 증명하는 것이 '고인돌(지석묘)'이다.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의 지배자의 무덤으로, 고창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인돌 군집 지역에 약 440여 기의 다양한 고인돌이 모여 있다. 고창 고인돌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지배자들의 무덤이 높이 솟아 있는 지역, 우두머리들과 고인돌이 많은 지역, 고창(高敞)의 역사적 의미가 개략적으로 잡힌다. 그래서 고창의 심벌마크 '모로모로'가 이해된다. '모로모로'는 청동기 시대 문화유산인 '고인돌'과 청정함의 상징인 '나뭇잎'을 조합한 형상이다. 처음에 '모로모로'가 무슨 뜻인지 몰랐다. 이제 '모로'가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의 모로에서 따왔으며, 모로는 '머리, 高, 고인돌'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았다. 모로모로, 머리머리, 고인돌고인돌, 고창고창이여! 고창의 의미가 새롭게 살아온다.
41코스 제1부는 고창군 서쪽 해안을 따라가는 탐방길이다. 행정구역으로는 상하면의 자룡리, 용정리, 장호리, 해리면의 사반리, 광승리, 동호리로 이어지는 해안길이다. 출발! 구시포항 바다에는 앙증스런 가막도가 떠있는데 제방으로 연륙되어 그 아름다움이 반감되었다. 가막도가 섬이었을 때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꼬막처럼 생긴 작은 섬이 파도에 불려 흔들릴 것 같다. 그럼에도 파도를 이겨내며 홀로 떠서 오가는 배의 항로를 알려주는 등불을 깜빡였을 것이다. 가막도는 꼬막섬이 변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구시포항은 구시포 방조제로 인하여 구시포 끝단 북쪽으로 옮겨졌다. 구시포마을 앞쪽에 있었을 구시포항은 구시포마을 서쪽에 배수갑문이 생겨나면서 밀려났다. 양쪽 제방 사이의 좁은 물목을 통해 칠산바다가 배수갑문까지 들어온다. 제방이 없었을 때 칠산바다는 구시포마을을 거쳐 섬포(蟾浦)마을까지 들어갔다고 한다. 구시포 배수갑문 앞에서 구시포마을은 동쪽으로 이어지고 서해랑길은 명사십리로 이어진다. 명사십리(明沙十里)는 곱고 부드러운 모래가 십릿길이 된다는 뜻이다. 고창 명사십리(明沙十里)는 곱고 깨끗한 모래가 용정리 해안에서 동호리 동호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약 8.5km 거리의 직선형 해안을 이른다. 그러니까 고창 명사십리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명사이십리에 해당된다. 해안으로 나가 보았다. 모래는 알갱이가 없이 쌀가루처럼 곱고 부드럽다. 그래서 소리가 나지 않을까?
명사십리(明沙十里)는 모래의 시각적 의미를 강조한다. 모래밭의 시각적 감각보다 청각을 강조하면 명사십리(鳴沙十里), 밟으면 사각이는 소리를 내는 모래밭이 명사십리(鳴沙十里)다. 조선의 문장가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은 '관동별곡'에서 금강산에서 동해로 넘어와서 이렇게 읊었다. "명사(鳴沙) 길 니근 말이 취션(醉仙)을 빗기 시러(밟으면 소리를 내는 모랫길에 익숙한 말이 취한 신선을 비스듬히 실어), 바다흘 겻테 두고 해당화(海棠花)로 드러가니(바다를 곁에 두고 해당화 꽃밭으로 들어가니), 백구(白鷗)야 나디마라, 네 버딘 줄 엇디 아난(갈매기야, 날아가지 말아라, 내가 네 벗이 될지 어찌 아느냐)?
길손은 지금 말을 타지 않고 풍경에 취하여 서해 명사십리(明沙十里) 해안 명사십리路를 따라간다. 명사십리(明沙十里)로 내려가 모랫길을 밟아도 보고 손으로 부벼도 보았다. 아주 부드럽고 고와서 소리가 나지 않고 미끄러진다. "저를 보아 주세요. 저도 빛과 소리가 있어요." 바다 멀리서는 하얀 색의 풍력발전기가 바람개비를 날리는 듯 작은 소리를 속삭인다. 이 아름다움을 더욱 빛내주는 것은 해안사구 방풍림이다. 해안의 모랫바람을 막아주는 해송림이 푸르게 이어지는 풍경이 바다 풍경과 어우러져 길손의 가슴은 뜨거워진다. 풍경에 도취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것만이랴. 외로움이듯 그리움이듯 미여도와 외죽도가 바다에 무지개처럼 떠서 파랑새 노래를 들려준다. "귓가에 지저귀던 파랑새/ 마음을 파닥이던 파랑새/ 푸쉬싯 날개짓이 예뻐서/ 늘 곁에 두고 싶던 파랑새/ 마음 속에 파란 눈물 떨구고/ 꿈결처럼 먼 하늘로 날았네/ 삐릿삐릿삐릿 파랑새는 갔어도/ 삐릿삐릿삐릿 지저귐이 들리네/ 삐릿삐릿삐릿 파란 눈물 자욱이/ 삐릿삐릿삐릿 내 마음 물들이네"(김욱/작사·곡, 이문세/노래) 길손은 꿈길을 가듯 명사십리를 허위적거렸다. 무지개와 파랑새는 바다에 떠서, 길손의 가슴에 빛과 소리로 환각을 일으킨다. 그들이 보석처럼 반짝인다. 명사십리의 보석들이 쏟아진다.
동호 국민여가캠핑장&해수욕장으로 들어갔다. 이곳의 해송림 또한 명품이다. 입구에서부터 해안로 양쪽으로 해안사구 방풍해송림이 해수욕장까지 이어진다. 아름다운 길이다. 환각에서 깨어나 진짜 보석을 만나는 느낌이다. 해풍이 살며시 불어와 봄기온 같지 않은 더위를 살랑살랑 식혀준다. 명품 해송림은 동호해수욕장 조형물에서 노송의 품위를 보여준다. 모래밭으로 나가보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였다. 명사십리 끝 모래밭에 두 발을 딛고서 멀리 보이지 않는 위도를 그리며, 비록 대낮이라고 하지만 저녁노을의 풍경을 상상하는 즐거움을 누렸어야 했다. 빠듯한 시간에 쫓겨 오직 영신당의 위치를 확인하였고, 구동호마을의 퇴락함과 휴양시설 건축공사의 혼란함을 탓하였다. 명사십리의 환각적 도취는 끝이 난 것 같다.
아니었다. 동호항에 나가지 못하여 아쉬웠다. 그러나 아니었다. 구동호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니, '동백정(冬栢亭)' 정자가 있다. 왜 '동백정(冬栢亭)'일까? 지금은 동백나무가 모두 사라졌지만, 조선 시대에 이곳에는 동백나무가 푸르게 우거져 있었고 포구 언덕에 '동백정(冬栢亭)'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 포구를 '동백정포(冬柏亭浦)'라고 불렀다. 그러한 역사를 되살려 구동호마을에 '동백정(冬栢亭)' 정자를 세운 것이다. 아, 동호(東湖)가 아니로구나. 영광의 법성포 바다가 서호(西湖)인 것처럼, 고창의 명사십리 바다가 동호(東湖)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겨울 冬을 쓴 동호(冬湖)야. 그 연유는 '동백정포(冬柏亭浦)'에서 유래했어. 이곳은 '동백정포(冬柏亭浦)'였다가 '동호항(冬湖港)'으로 지명이 바뀌었고, 방조제가 생겨나면서 동호(冬湖)마을 앞에 있던 동호항(冬湖港)이 북쪽 끝으로 옮겨간 게야. '동백정포(冬柏亭浦)'가 보석처럼 반짝인다. 동백정포를 내려다보는 언덕에 '영신당(靈神堂)'과 '동백정(冬栢亭)'이 있었을 것이지만 지금은 영신당만 남아 있다. 동호마을의 '동백정(冬栢亭)'이 다름 아닌 보석이었다.
구동호마을에서 홍매화를 만났다. 새벽에 백매화를 만나고 다시 홍매화를 만나니 분명 봄이 온 것임에 틀림없다. 김종해(金鍾海, 1941~) 시인의 시 '그대 앞에 봄이 있다'를 읊으며 봄을 기다린 게 엊그제인데 벌써 봄이 와서 날개를 펼치고 있다. 계절의 봄은 활개치지만, 인생의 겨울은 끊임없이 순식간에 찾아와 지속된다. 생의 봄날은 기다림이 아니라 찾아감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끊임없이 찾아가야 할 삶의 봄날은 보석이다. 삶의 봄이 그대 앞에서 보석처럼 반짝인다. 그대 망설이지 말라. 이제 그대가 꽃 필 차례다.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 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김종해의 '그대 앞에 봄이 있다' 전문)
2.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20.21km 중 10.7km
전체 소요 시간 : 4시간 54분 중 3시간 4분
구시포해수욕장 앞에 여러 설치물들이 세워져 있으며, 그것들과 함께 서해랑길 41코스 안내도가 서 있다.
거리 19.7km, 소요시간 6시간 30분이라고 적혀 있다. 주요 탐방지는 구시포해변, 구시포항, 명사십리해변, 장호어촌체험마을, 동호해수욕장, 서해안바람공원, 만돌어촌체험마을, 람사르 고창갯벌센터, 심원면사무소이다. 실제 탐방 거리는 20.21km, 4시간 54분이 걸렸다. 무턱대고 쉬임없이 속도를 내며 건성건성 살핀 탓에 소요 시간을 1시간 30분 이상 줄였다.
노을이 아름다운 해수욕장인데 저녁노을을 감상하지 못하고 아침 시간에 이곳을 통과한다.
맨 뒤의 언덕 뒤에 고리포항이 있다. 구시포 노을캠핑장에서 구시포해수욕장으로 이어지는 해변이 아름답다.
서해랑길은 구시포 해변길을 따라 앞쪽 끝 가막도 입구 제방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구시포 마을 방향으로 이어간다.
구시포 포구 끝단에서 가막섬까지 약 1㎞의 제방이 연결되면서 가막섬에 구시포 외항이 건설되었다.
"구시포해수욕장(九市脯海水浴場)은 1992년 7월에 개장했다. 길이 약 1.7㎞, 폭 2m의 백사장과 우거진 송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화장실, 샤워장, 개수대 등의 편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으며, 오토캠핑과 야영을 할 수 있다. 구시포 해안의 지세는 유명한 장사산(長沙山)의 맥락을 이어받아 좌우로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는 듯 펑퍼짐하게 펼쳐져 있으며, 완만한 해변은 안전도가 놓아 천연의 피서지로 적격이다. 구시포해수욕장의 남쪽에는 천연 동굴인 비둘기굴이 있으며, 그 남쪽으로 약 1㎞쯤 내려가면 160m 고지에 고리포 봉수가 있다. 고리포 봉수의 남쪽에는 영광 홍농산(弘農山)이 있고, 북쪽에는 소응포(所應捕)가 있다. 해안 일대에는 기암괴석이 널려 있고, 해수욕장의 1㎞쯤 앞에는 쟁반 같은 가막도(可莫島)를 비롯하여 부근에 무수한 섬들이 전경을 이룬다. 주변 관광지로는 선운사(禪雲寺), 동호해수욕장, 인촌 선생 생가(仁村先生生家), 고창읍성(高敞邑城), 무장읍성(茂長邑城), 석정온천, 선운산 도립공원, 고창고인돌공원 등이 있다." - 디지털고창문화대전
"가막도(可莫島)는 상하면 자룡리 산99-1에 있는 무인도이다. 2010년 11월 현재 면적은 0.004㎢이다. 가막도는 현재 구시포 국가어항건설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구시포 국가어항건설사업은 2002년부터 2015년까지 진행되는 사업이다. 2002년부터 2008년까지 1단계 사업인 연육도로 건설로 인해 가막도는 육지와 연결된 상태이다." - 디지털고창문화대전
구시포해변길을 따라 가막도 제방길 입구를 오른쪽으로 돌아간다. 구시포해변길-명사십리로를 고창해안도로라고 이르는 듯.
앞에 보이는 가막도 제방길 입구를 돌아서 구시포어촌계 수산물복합활어센터 앞을 거쳐 왔다.
구시포해수욕장1.2km 지점, 구시포마을과 명사십리 갈림목인 갑문교에서 서해랑길은 명사십리 방향으로 이어간다.
바닷물이 구시포마을을 거쳐 섬포마을까지 올라갔었으나 제방에 의해 이곳에서 바닷물이 막혀 있다.
"조선 시대 구시포는 두 번의 위치 변동이 있었다. 조선 시대에는 구시포 마을의 앞이 포구였다. 당시에는 구시포 마을 안쪽에 있는 섬포(蟾浦)마을까지 바다였고 조수가 구시포 마을 앞 좁은 물목을 통하여 섬포까지 왕래하였다. 그러나 구시포 마을 앞을 막는 간척으로 인하여 섬포는 바닷물이 차단되어 1955년 구시포 염전으로 변화되었다. 따라서 구시포의 포구도 제방의 북쪽으로 이동되었으며 현재 30여 척의 마을 소형 선박이 정박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 디지털고창문화대전
구시포 배수갑문교를 건너 상하면 자룡리에서 용정리로 넘어가 명사십리로를 따라 장호어촌체험마을 방향으로 이어간다.
구시포항 북방파제가 오른쪽에 있다. 구시포어촌계 수산물복합활어센터 앞을 거쳐 구시포해변길을 따라왔다.
"구시포(九市浦)는 조선 전기부터 확인되는 옛 포구이며 한자로 구시포(仇時浦)로도 표기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등에 의하면 구시포의 위치는 “무장현의 북쪽 30리에 있다”고 하였는데, 지금의 고창군 상하면 자룡리 구시포마을 앞 동쪽에 있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3월에 법성포를 출발한 세곡 선단이 첫 번째 정박하는 곳이었으나 조운 제도가 폐지된 1895년 이후에는 마을 어항으로서의 기능만 유지해 오고 있다." - 디지털고창문화대전
오른쪽 구시포해변길을 걸어 배수갑문교를 건너 명사십리로로 들어왔다. 갑문교 위쪽에 보이는 마을이 상하면 자룡리 구시포마을이다. 고창군 상하면에 대하여 알아 본다.
"고창군 상하면은 행정구역 개편 전의 이름인 상이면(上二面)과 하이면(下二面)에서 ‘상(上)’자와 ‘하(下)’자를 따 상하면(上下面)이 되었다. 본래 무장군(茂長郡)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무장군과 흥덕군(興德郡)이 고창군에 통합될 때, 상이면과 하이면 지역의 병합으로 상하면이 되어 9개 법정리로 개편되었다. 법정리로는 검산리·석남리·송곡리·용대리·용정리·자룡리·장산리·장호리·하장리가 있다. 상하면의 동쪽에는 송림산[295.3m]과 장사산[269.6m]이 있고, 북쪽에는 장군산[170.6m] 등의 100~300m 내외의 산지가 있으나, 그 외 지역은 대체적으로 낮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서쪽은 서해에 접하고 있고, 해안은 6~7㎞의 해안사구(海岸砂丘)가 발달하여 명사십리(明沙十里)라고 불린다. 하천은 남쪽에는 신흥천·자룡천·정동천·용대천이 있고, 중앙에는 장천 등이 흐르고 있다. 관개 시설로 남쪽에는 용대저수지, 북동쪽에는 송곡저수지, 서쪽에는 강선달저수지 등이 있다. 그중 용대저수지는 가시연꽃 군락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자룡리 구시포해수욕장 앞에는 가막도가 있고, 바닷가에는 천연 동굴인 비둘기굴 등이 있다. 자룡리 고리포 서쪽 해안은 전라북도 육지 제일 서쪽에 해당된다." - 디지털고창문화대전
왼쪽에 구시포어촌계 수산물복합활어센터, 중앙에 구시포항 북방파제, 포구 뒤쪽에 남방파제가 보인다.
"조선 시대 구시포는 두 번의 위치 변동이 있었다. 조선 시대에는 구시포 마을의 앞이 포구였다. 당시에는 구시포 마을 안쪽에 있는 섬포(蟾浦)마을까지 바다였고 조수가 구시포 마을 앞 좁은 물목을 통하여 섬포까지 왕래하였다. 그러나 구시포 마을 앞을 막는 간척으로 인하여 섬포는 바닷물이 차단되어 1955년 구시포 염전으로 변화되었다. 따라서 구시포의 포구도 제방의 북쪽으로 이동되었으며 현재 30여 척의 마을 소형 선박이 정박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 이후에 다시 구시포 포구 끝단에서 가막섬까지 약 1㎞의 제방이 연결되면서 가막섬에 신 외항이 건설되었다. 한편 현 구시포는 1914년 자룡리의 일부였던 원래의 구시포의 마을에 고리포와 석남리 일부가 합쳐진 것이다. 1989년에는 지방 어항으로 개발해왔다. 1999년에는 국가 어항으로 지정되어 어항 기본 설계와 환경 영향 평가 실시 등 적극적인 개발을 수립하고 있다. 개발 이후 북방파제 605m, 남방파제 330m, 물양장 300m, 선양장 50m를 완공하였고 연륙도로 200m를 개축하였다." - 디지털고창문화대전
장호어촌체험장 1km 지점, 서해랑길은 명사십리로를 따라 이어간다. 전망대에 올라가서 칠산바다를 조망한다.
전망대 난간에 해안사구(Coastal dunes) 설명안내판이 붙어 있다.
사구는 바람에 의해 퇴적된 파장 50cm 이상의 작은 언덕이나 능선으로 정의되며 고창 해안은 약 600m 이상의 넓은 모래질 조간대 환경과 강한 북서계절풍의 영향으로 모래가 공급되기 쉬워, 해안사구의 형성에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개방형의 조수간만의 차가 큰 환경이며 넓고 긴 모래퇴적층 해빈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구시포 포구 끝단에서 제방으로 길게 이어진 가막도에 건설된 구시포 외항이 보인다.
"구시포 포구 끝단에서 가막섬까지 약 1㎞의 제방이 연결되면서 가막섬에 신 외항이 건설되었다. 한편 현 구시포는 1914년 자룡리의 일부였던 원래의 구시포의 마을에 고리포와 석남리 일부가 합쳐진 것이다. 1989년에는 지방 어항으로 개발해 왔다. 1999년에는 국가 어항으로 지정되어 어항 기본 설계와 환경 영향 평가 실시 등 적극적인 개발을 수립하고 있다. 개발 이후 북방파제 605m, 남방파제 330m, 물양장 300m, 선양장 50m를 완공하였고 연륙도로 200m를 개축하였다." - 디지털고창문화대전
앞의 낮은 모래언덕을 해안사구라고 이를 수 있을까?
서남해해상풍력단지에서 생산한 전력을 특고압 해저케이블을 통해 서고창변전소로 공급한다. 오른쪽에 있는 전망대로 올라가서 칠산바다를 다시 조망한다.
좌치나루터-구시포해수욕장까지이며, 41코스 구시포해수욕장-람사르갯벌습지 구간은 동행한다.
명사십리(明沙十里)는 '곱고 부드러운 모래가 십리쯤된다.' 라는 의미로 곱고 깨끗한 모래가 끝없이 펼쳐진 바닷가를 말합니다. 고창 명사십리는 약 8.5km 거리의 직선형 해안입니다. 직선형 해안의 이유는 이곳이 과거에 움직였던 단층의 연장선이며 그 단층선을 따라 침식이 일어났기 때문이라는 가설이 있습니다. 4m 이상의 높이 차이가 나는 대조차 환경과 개방형 조간대 환경은 모래 퇴적물이 쌓이기 좋은 환경입니다. 육지 방향으로 모래언덕(해안사구)이 있어 해송 등 다양한 식생이 분포하고, 바람과 해일 등으로부터 해안 마을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조간대 : 갯벌이 형성되는 지역으로 만조 시 해수면과 간조 시 해수면 사이에 위치하며 평탄하고 넓게 펼쳐지는 지역
대조차 : 보름이나 그믐날 때의 만조와 간조 사이의 높이 차이
가막도로 이어지는 제방과 가막도의 구시포 외항이 보인다.
왼쪽 뒤에 풍력단지의 하얀 풍력발전기들이 흐릿하게 보인다.
왼쪽 뒤에 보여야 할 위도가 미세먼지 탓에 전혀 보이지 않는다.
왼쪽 정자는 장호 해변쉼터이고, 장호 갯벌체험장은 오른쪽 방향으로 370m 지점에 있다.
장호 해변쉼터는 해안에, 장호 갯벌체험장은 오른쪽 숲길탐방로를 따라가면 있다.
장호 해변쉼터에 장호 어촌체험장 표석과 장호 어촌이야기길 종합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장호 해변쉼터와 장호 갯벌체험장 거리는 370m 거리이다.
고창군 상하면 장호리에서 법장천 배수갑문교를 건너 해리면 사반리로 넘어간다.
"해리면(海里面)은 행정구역 개편 전의 이름인 청해면(靑海面)과 오리동면(五里洞面)에서 ‘해(海)’자와 ‘이(里)’자를 따 해리면(海里面)이 되었다. 본래 무장군(茂長郡)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무장군과 흥덕군(興德郡)이 고창군에 통합될 때, 청해면과 오리동면의 병합으로 해리면이 되어 12개 법정리로 개편되었다. 법정리로는 고성리·광승리·금평리·나성리·동호리·방축리·사반리·송산리·안산리·왕촌리·평지리·하련리가 있다. 해리면은 구릉성 산지와 평지가 혼재되어 있다. 동쪽에는 청룡산[314m]과 이상산[198.8m], 남동쪽에는 한제산[209.7m], 중앙 북쪽에는 조지산[225.4m], 남서쪽에는 장군산[170.6m]등이 있고, 동쪽의 일부 구간은 선운산 도립공원에 해당된다. 하천은 북쪽에 해리천, 중앙에는 군보천, 서쪽에는 법장천, 동쪽에는 고성천·행산천·임해천 등이 흐르고 있다. 관개시설로 북쪽에는 궁산저수지, 서쪽에는 나성저수지, 동쪽에는 성지제 등이 있다. 해리면 광승리 상부마을 앞에는 미여도가 있다." - 디지털고창문화대전
앞쪽의 마을은 상하면 장호리 용두마을인 듯.
"長湖里는 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에 속하는 법정리. 장호리는 마을 뒤편에 긴 벌[명사십리]이 있어 ‘장불’ 또는 마을 앞쪽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마을에서 보면 호수처럼 보여 ‘장호(長湖)’라고 불렀다 한다. 약 30년 전 긴 개울이 있어 ‘장호’라 칭하였으나 지금은 간척으로 인해 개울의 흔적은 없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철원 주씨(鐵原周氏)가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본래 무장군(茂長郡) 상리면(上里面)의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평곡리(平谷里)·장룡리(長龍里)·광촌리(光村里)·복구리(伏龜里)와 오리동면(五里洞面) 중구리(中九里)의 일부가 병합되어 장호리가 되었고, 상하면에 편입되었다. 지형은 전체적으로 얕은 평지를 이루고 있으나, 동남쪽 일부에는 산지가 형성되어 있다. 관개 시설로는 용정리 판정마을 동쪽에 판정제가 있고, 복구마을 남쪽에는 장군제가 있다. 장호리는 상하면 북서부 있다. 장호리·용두리(龍頭里)·복구리 3개의 행정리와 장호·용사·용두·복구 4개의 자연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장호마을 뒤편에는 모래 백사장이 십리가 되어, 명사십리라고 부른다. 용두마을에는 바닷물의 유입을 막고, 농사용 저수 목적으로 설치한 갑문이 있다. 북동쪽에 지방도 3호선이 남북 방향으로, 남동쪽에는 지방도 5호선이 동서 방향으로 각각 지나고 있다." - 디지털고창문화대전
기온이 높아져서 날씨가 덥다. 웃옷을 벗어 배낭에 넣고서 탐방한다.
법장천 하구를 막아 육지 안쪽으로 들어오는 칠산바닷물을 막았다. 제방 사업은 2003.10.~2005.7에 이루어졌다.
법장천이 맞을까? 아니면 바닷물 유입인지? 이 물은 오른쪽 상하면 용두마을을 휘돌아 내려오다 갇혀 있다.
"법장천은 전라북도 고창군 해리면 사반리 기슭에서 발원하여 서해로 흘러드는 하천. 법장천이 발원하는 해리면 사반리의 상류 지역은 해리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사반리 방향의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있다. 사반리는 마치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형상이고, 풍수지리상 붕어 형국이라서 어룡(魚龍)으로 부르고 있다. 법장천의 유역 면적은 8.39㎢이고, 유로 연장은 4.14㎞인 지방 2급 하천이다. 법장천이 서해로 흘러들어 가는 하류의 해리면 나성리 매남마을은 해리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나성리 군도를 따라 10㎞ 지점에 있다. 매남마을은 옛적에 매화꽃이 만발하였고, 중구촌마을[中九村]은 뒷산인 장군봉에서 산줄기가 아홉 번 굽이쳐 내려오고, 나산마을은 앞에 있는 산의 모양이 당나귀 형상이다. 서해안 인근에 명사십리 모래사장으로 유명한 구시포해수욕장과 동호해수욕장이 있다." - 디지털고창문화대전
해리면 사반리에서 광승리로 넘어간다. 명사십리로 양쪽으로 해송림이 조성되어 있다. 해송림은 해안사구 방풍림 역할도 겸하고 있다. 해송림을 지나서 해안의 전망대에 올라가 칠산바다를 조망한다.
왼쪽 끝에 상하면 자룡리 구시포 포구와 가막도가 보인다. 왼쪽의 해송림은 해안사구 방풍림 역할을 하고 있다.
오른쪽 끝은 동호해수욕장, 그 앞 섬은 죽도, 그 앞에서는 방파제 공사가 진행 중이다. 바다에는, 밤중에 항해하는 선박의 안전을 위해 등을 높이 매단 기둥인 등간(燈竿)들이 설치되어 있다. 등간이 설치된 바위 주변에서 주민들이 바지락을 채취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며 그 뒤쪽에 쌍여도(미여도)가 보인다.
명사십리로는 해안의 명사십리와 해안사구 방풍림이 멋지게 운치있다.
"光升里는 전라북도 고창군 해리면에 속하는 법정리. 광승리는 빛이 있는 별이 무더기로 떨어졌다고 해서 ‘광승(光升)’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510년대 청도 김씨(淸道金氏) 김성호가 광승마을에, 비슷한 무렵에 연안 차씨(延安車氏)가 외경마을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본래 무장군(茂長郡) 오리동면(五里洞面)의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상부리(上阜里)·외경리(外景里)의 일부가 병합되어 광승리가 되었고, 해리면에 편입되었다. 지형은 대체로 평지와 산지가 혼재하며, 상부마을 북서쪽에는 미여도가 있다. 관개 시설로는 상부마을 동쪽에 상부제가 있고, 외경마을 동남쪽에 외경제가 있다. 광승리는 해리면 북서부에 있다. 광승리·내경리(內景里)·상부리·외경리 4개의 행정리와 광승·내경·상부·하부·외경 5개의 자연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상부마을에서는 마을 굿으로 정월에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광승리 해변을 따라 지방도 1호선이 남북 방향으로 지나고 있다." - 디지털고창문화대전
바다에서는 방파제 건설 공사가 한창이다.
등간이 설치된 바위 주변에서 주민들이 바지락을 채취하고 있다.
고창군 해리면 광승리 해안에 방파제를 건설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명사십리로 오른쪽에 복합 휴양소 '명사십리 해양파크'가 있다. 지상 5층 건물 '명사십리 행양파크'는 1층 냉동창고, 2층 수산물판매장, 3층 횟집, 4층 토산품판매점, 5층 레스토랑으로 꾸며져 복합휴양쇼핑레저공간으로 개발되었다고 한다.
명사십리로 고갯길에서 바라보니 해안에 전북수산기술연구소가 자리하고 있다. 중앙 뒤에 동호항, 바다에 외죽도가 있다.
선운산 서쪽 아래 고창군 심원면 월산리 심원면 행정복지센터 앞이 서해랑길 41코스 종점이다.
명사십리로 옆에 넓은 인삼밭이 있다.
명사십리로 고갯길에서 내려다보았던 전북수산기술연구소 출입구를 지나간다. 해리면 광승리에서 동호리로 넘어간다.
"冬湖里는 전라북도 고창군 해리면에 속하는 법정리. 동호리는 이전에는 ‘수월정’ 또는 ‘동백정(冬柏亭)’으로도 불렸다. 마을에 동백나무가 무성하고, 대섬[竹島]과 변산반도 방향의 바다가 호수처럼 보인다 하여 ‘겨울의 호수’라는 이름을 따 ‘동호(冬湖)’라고 개칭했다고 한다. 조선 중종 때 어항과 무역항으로 발달하면서 마을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본래 무장군(茂長郡) 오리동면(五里洞面)의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동호리(冬湖里)·외경리(外景里) 일부가 병합되어 동호리로 되고 해리면에 편입되었다. 지형은 전체적으로 평지이며, 동쪽·서쪽·북쪽의 3면이 바다에 접하고 있다. 동호리는 해리면 북서부에 있다. 주요 시설로는 동호항·동호해수욕장·동호등대·삼양염전 등이 있다. 가재지[歌子洞]·구동호(舊冬湖)·남부(南部)·삼양동(三養洞)·신동호(新冬湖) 5개의 행정리와 가재지·신흥·구동호·남부·삼양동·신동호·소리개 7개의 자연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문화 유적으로는 방파제 위쪽 고지에 당할머니 신상(神像)을 모신 당각씨집인 영신당이 있다. 구동호마을에서는 마을굿으로 정월에 당산제[천룡제]와 이월에 용왕제[당할머니제사·수륙제·수리제]를 지내고 있다. 국도 77호선이 동호항에서 서쪽 해안을 따라 해리면 소재지 방향으로 지나고, 지방도 1호선이 서쪽 해안을 따라 장호리 방향으로 지나고 있다." - 디지털고창문화대전
해안사구 방풍림이 길게 조성되어 있다. 해변으로 나가 해안에 조성한 쉼터뎈에서 쉬어간다.
쉼터뎈에서 15분 정도 쉬면서 요기를 한 뒤 해변에 조성한 야자매트길을 따라 앞에 보이는 동호해수욕장 방향으로 이어간다. 바다에 소죽도가 떠있다. 소죽도 뒤에 대죽도가 있으며, 이 두 섬을 합하여 외죽도라고 부른다.
쌍여도라고도 불리는 미여도가 중앙에 있다. 그 뒤쪽으로 위도가 있을텐데 보이지 않는다.
해안사구 왼쪽 언덕 뒤에 전북수산기술연구소가 있으며 바다 왼쪽 뒤에 공사 중인 방파제와 등간(燈竿)들이 보인다.
오른쪽 끝에 동호항, 바다에 소죽도가 보인다. 소죽도 뒤에 대죽도는 보이지 않으며 이 두 섬을 합하여 외죽도라고 부른다.
왼쪽에 쌍여도라고도 불리는 미여도, 오른쪽에 소죽도가 있다. 소죽도와 그 뒤의 대죽도를 함께 외죽도라 이른다.
"고창군에는 5개 섬이 있다. 고창군 심원면 만돌리 미여도[쌍여도]·고창군 상하면 자룡리 가막도·고창군 심원면 만돌리 소죽도는 무인도이며, 고창군 심원면 만돌리 대죽도·고창군 부안면 봉암리 내죽도는 유인도이다.
소죽도는심원면 만돌리 산3번지에 있는 무인도이며 심원면 만돌리에서 약 3㎞가 떨어져 있고, 해리면 동호해수욕장에서 약 1.5㎞ 떨어져 있다. 개인 어선으로 이동 가능하고, 간조 때 갯벌이 드러나 경운기 및 도보로 접근이 가능하며 20분정도 소요된다. 대죽도와 남측으로 50m 정도 떨어져 있다. 섬 높이가 25m이며 곰솔군락, 억새군락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청동기 시대에서 고려 시대의 소죽도 패총이 있는데 주로 해안 단애면에서 확인된다. 패각의 폭은 60㎝ 정도고 수습된 유물은 무문토기저부편, 점토대토기편, 청자편, 석가여래판불 등이다. 대죽도는 심원면 만돌리 산1번지에 있는 유인도이다. 2010년 11월 현재 면적은 0.117㎢이며 1세대에 남자 1명이 살고 있다." - 디지털고창문화대전
해안사구 방풍림 역할을 하는 동호해송림길을 따라 동호해수욕장&국민여가캠핑장으로 향한다.
쌍여도라고도 불리는 미여도를 포토존에 담았다.
"미여도[쌍여도]는 무인도이고, 심원면 만돌리 산1-1에 있다. 면적은 0.012㎢이고 심원면 만돌리에서 약 6.8㎞가 떨어져 있고, 해리면 동호해수욕장에서 약 4.5㎞ 떨어져 있다. 섬에서 서쪽으로 300m 떨어진 곳에 암석으로만 이루어진 소규모의 바위섬이 위치하고 있다. 섬 동북단에는 간조시에 연결이 가능한 바위섬이 있다. 대부분 억새군락으로 덮여 있으며 보리밥나무군락 등이 분포한다. 2010년 11월 현재 공군 사격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 디지털고창문화대전
동호해수욕장 표석과 조개조형물이 조성되어 있다. 조형물 왼쪽 뒤 바다에 미여도가 보인다.
"동호해수욕장(冬湖海水浴場)은 1967년에 개장하였다. 백사장 길이는 약 4㎞이다. 수심이 0.5~1.5m로 어린이들도 안심하고 물놀이를 즐길 수 있으며, 백사장 뒤쪽으로 아름드리 소나무가 가지런히 서 있다. 캠핑장이 있으나 이용자가 적어 현재는 송림 언덕 주변에서 야영을 할 수 있다. 세면대와 화장실, 민박 등의 편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2010년 현재 동호해수욕장은 전라북도에서 변산해수욕장 다음가는 곳으로 꼽히는 곳으로서, 여름이면 전국 각지에서 피서객들이 찾아들고 있으며 특히 가족 단위 방문객들이 많이 찾는 휴양지이다. 해변 가에는 수백 년 된 소나무 숲이 천연 그늘과 바람을 만들어 주어 더위를 씻겨 준다. 모래사장은 모래가 가늘고 경사가 완만하여 어린이의 물놀이 장소로 적격이며, 특히 동호해수욕장의 해수는 염도가 높아 피부병 및 신경통 환자들의 모래찜으로 유명하다. 염도가 높기 때문에 인근에 대규모 염전이 개발되어 있고, 송림 위 언덕에는 고창군 해리면의 유일한 당집이 있어 ‘당신령’을 모시고 어머니들이 풍어(豐漁)를 기원한다." - 디지털고창문화대전
이곳을 구동호마을, 동호교차로와 동호초등학교가 있는 곳을 신동호마을이라 이른다고 한다.
구동호마을에 건물 공사가 한창이다. 휴양시설 건축 공사인 것 같다.
구동호마을 해안에 300년 이상 된 해송들이 어우러져 있다. 명품 해송숲이다.
삼거리에서 왼쪽 길은 동호항으로 나가는 길이고, 서해랑길은 오른쪽 골목길로 들어가 구동호마을을 거쳐간다. 이정목에는 영신당 150m라고 적혀 있는데, 앞의 동호체험센터 건물 왼쪽 뒤에 위치하는 것 같다. 오른쪽 파헤쳐진 언덕에 뚫려 있는 동호동굴을 통하여 동호항으로 바로 나갈 수 있다고 한다.
동호동굴을 통하여 동호항으로 바로 연결된다고 한다. 그런데 언덕이 파헤쳐지고 흉물스럽다. 동호동굴 왼쪽 언덕에 영신당이 있다고 하는데 살피지 못하고 그냥 통과한다.
"동호리구동호영신당(冬湖里舊冬湖靈神堂)은 해리면 동호리 구동호마을에 있는 조선 후기 당집. 당집은 마을에서 서쪽으로 400m 떨어진 해변의 산 정상에 있는데, 당집 앞으로 초소가 서 있고 그 주위로 철조망이 둘러져 있다. 당산은 마을 들어오는 입구 좌우로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이 있었으며, 마을 노인회관 안쪽으로 큰 당산[천룡 당산]이 있고 선착장 쪽으로 언덕 위에 작은 당산이 위치한다. 당집은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의 기와집으로, 당집 주위로 담이 둘러져 있다. 현재 세워진 당집은 1861년(철종 12)에 세워진 것이다. 한편 당산은 할아버지 당산, 할머니 당산, 큰 당산, 작은 당산이 등이 있었으나 1970년 무렵 새마을 사업으로 인해 할머니 당산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건물이 들어서 있다. 당산의 형태는 나무와 선돌이 한데 어우러진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나무는 팽나무이며, 나무 앞에 1m 정도 높이의 선돌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큰 당산에는 팽나무만 있으며 선돌은 없다. 작은 당산의 나무는 작은데, 이는 이전의 나무가 죽고 나서 그 자리에서 다시 자란 나무이다." - 디지털고창문화대전
구동호마을 해안에 휴양시설들이 건축되면서 마을 입구의 민가들은 폐허처럼 버려져 있다.
구동호마을에 '동백정(冬栢亭)' 정자가 있다. 왜 동백정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동호마을의 북쪽 언덕에 영신당과 ‘동백정’이라는 정자가 있었으며 동백정 주변은 몇 리에 걸쳐 동백나무가 푸르게 우거져 있었으나 지금은 동백나무가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 시대에 이곳을 동백정포(冬柏亭浦)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러한 역사를 되살려 동백정 정자를 세운 것 같다.
동백정 앞에 민박집 상호가 경파정(競波亭)이다. 무순 뜻일까? 파도로 향하여 나간다, 파도와 다툰다?
아침에 백매화를 만났는데 다시 홍매화를 만난다. 봄날이 곧 흐드러질 것을 알린다.
동호항은 왼쪽으로 들어가야 한다. 제방벽에 '고창에서 만나는 어촌의 미래 노을미항 동호항' 홍보문이 적혀 있다.
동호마을 앞에 있던 동호항(冬湖港)이 북쪽 끝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동호항을 들르지 못하고 바라만 보고 지나간다. 왼쪽 언덕 위에 영신당이 있을 것이며, 예전의 동백정은 사라졌을 것이다.
"동호항은 조선 시대에 동백정포(冬柏亭浦)와 영신당이 있었던 곳이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무장군읍지(茂長郡邑誌)』 등에 의하면 조선 시대에 동백정포는 “무장현의 북쪽 30리에 있다”고 했으며, 그 지형은 바다로 깊숙이 들어가 삼면이 바다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지금의 동호마을 일대와 일치한다. 동백정포는 동호마을의 북쪽 언덕에 있는 ‘동백정’이라는 정자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동백정 주변은 몇 리에 걸쳐 동백나무가 푸르게 우거져 호남에서 다시없이 경치 좋은 땅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흔적이 없다. 한편 동호마을 북단 해변에는 영신당이 있는데 그 주변에서 청자, 백자, 토기 조각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오래 전부터 해신제를 올린 곳임을 알 수 있다. 동백정포는 해리면의 최북단에 있는 포구로 구 동호마을 앞 남쪽에 있었으나 남동쪽의 간척과 더불어 북쪽으로 200여m 정도 이동하게 되면서부터 ‘동호항’이라 불려지게 되었다. 현재의 동호항은 고창군의 서쪽 해변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동호항은 마을 어항으로 북쪽에 80여m의 방파제가 건설되어 있으며 20여 척의 소형 선박이 이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동호항 바로 앞에는 갯고랑이 있으며 동호마을 서편 해안에는 동호해수욕장이 자리 잡고 있다." - 디지털고창문화대전
옛 동백정포는 이곳이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왼쪽 바다 건너 부안군 변산 반도와 내변산이 흐릿하게 들어온다.
"동백정포는 해리면의 최북단에 있는 포구로 구 동호마을 앞 남쪽에 있었으나 남동쪽의 간척과 더불어 북쪽으로 200여m 정도 이동하게 되면서부터 ‘동호항’이라 불려지게 되었다." - 디지털고창문화대전
옛 동백정포 포구에서 건너편 심원면 고전리 해안사구 방풍림을 조망한다. 뒤쪽에 선운산 산줄기가 흐른다.
현재의 동호항까지 버스는 들어가지 않고 옛 동백정포 포구 앞에 동호항 버스정류소를 설치했다. 제방길을 따라간다.
고창군 해리면 동호리 제방길을 따라 동호로로 나간다.
제방이 오른쪽으로 빙 돌아 건너편 심원면 고전리 해안사구 방풍림으로 이어진다. 중앙 뒤는 선운산이다.
제방이 남동쪽으로 빙 돌아서 심원면 고전리 해안으로 이어진다.
중앙 끝에 대죽도가 있고, 그 앞쪽에 동호항과 홍등대, 그 왼쪽에 영신당이 있는 언덕이 보인다.
건너편에 부안군 변산반도 줄포만과 내변산 산줄기가 길게 이어진다. 오른쪽은 심원면 고전리 해안사구 방풍림이다.
동호제방길에서 동호로로 나와 동호교차로 방향으로 이어간다. 제방 왼쪽에 해리천 배수갑문과 왼쪽 뒤에 선운산이 있다.
중앙에 대죽도, 그 왼쪽에 동호항과 홍등대, 그 왼쪽에 영신당이 있는 언덕, 그 왼쪽에 구동호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구동호마을 뒤쪽 동호해수욕장에서 구동호마을과 옛 동백정포 포구를 거쳐 동호제방길을 따라 동호로로 나왔다.
국도77호선 동호로를 따라간다. 오른쪽에 수산물업체인 광명양만이 있다.
수산물업체인 광명양만이 동호로 옆에 위치해 있다.
해넘이마을 구동호마을 표석이 있다. 북부마을을 구동호마을, 남부마을을 달리 해리마을이라 이르는 것 같다.
삼양동(三養洞)마을이 오른쪽에 위치하는데 삼양동은 삼양염전과 관련되어 있는 것 같다.
삼양사의 창업주인 수당(秀堂) 김연수(金秊洙)[1896~1979]는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당시 부안면 인촌리] 출신으로 1924년 삼수사(三水社)를 창업하였으며, 1927년 줄포에서 처음으로 간척 사업을 시작하였다. 1931년에는 회사 이름을 삼양사(三養社)로 변경하였다. 김연수가 고창군 해리면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36년으로, 해원농사주식회사라는 일본인 회사가 간척 공사권을 따내고도 5년여 동안 방치한 것을 이어받으면서부터였다. 1946년 ‘전매 제2호’ 발령으로 민간 염전이 허가되면서 삼양사는 해리염전[삼양염전] 개설 인가를 받았다. 염전 축조 공사는 1947년 3월 시작하였으며, 1949년까지 94만 4132.23㎡가 축조되어 그해 처음으로 천일염을 수확하였다. - 디지털고창문화대전
동호로 동호교차로에서 서해랑길은 왼쪽 선운산 방향으로 진입하여 해리천 배수갑문교를 건넌다.
동호교차로 건너편 오른쪽에 동호초등학교와 신동호(新冬湖)마을이 있다. 서해랑길은 왼쪽 애향갯벌로를 따라 이어간다.
신동호마을과 동호초등학교로 이어지는 신동호길이다. 왼쪽 건물들은 '삼양사 동호공장' 건물인 것 같다.
"삼양사 동호공장의 출발은 1939년 8월 ‘삼양사 해리농장사무소’로 설치됐고, 그후 1956년 ‘삼양염업사’가 분리 독립하면서 ‘삼양염업사 해리지점’으로 변경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삼양사 동호공장(해리지점)은 고창군 심원면 고전리와 해리면 동호리의 경계에 위치(고창군 해리면 동호로 349)하고 있고, 북쪽의 심원면 고전리에는 염전이 넓게 펼쳐져 있으며 인근에는 동호초등학교가 있다. 이 시설물들은 일제강점기 인촌 김성수의 동생인 수당 김연수(秀堂 金秊洙,1896∼1979)가 심원면과 해리면 일대에서 추진한 간척사업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김연수는 1931년 삼수사를 삼양사로 개칭하고, 1936년 심원면 고전리·궁산리·만돌리·주산리와 해리면 금평리·동호리에 걸친 730정보(2,190,000평)를 간척을 진행한다. 이때 소요된 경비는 당시 돈 100만원으로 알려졌으며 1939년 9월에 간척을 완료한다. 삼양사 해리농장사무소는 간척사업을 완료한 후 농장 관리를 위한 직원들의 숙소와 간척지에서 생산된 벼를 도정하기 위해 정미소의 필요에 따라 조성된 것이다. 현재 삼양사 동호공장 서쪽으로 정미소와 약 20여동 창고가 늘어서 있으며, 정문 가까이에 한·일 절충식 가옥형태의 사무실이 있고, 동쪽으로는 소규모 사택들이 배치되어있다. 부지 내에는 삼나무, 향나무, 뽕나무 등 20~30여 그루의 100여 년 가까이 된 나무들이 있으며, 시설 및 공간이 50여년 방치되어 생태계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 전라일보, 2022.10.18
서해안바람공원 4.5km 지점. 건너편에 간척준공비가 세워져 있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고창 컨트리클럽 방향으로 이어간다.
간척지준공기념비는 1977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해리면 동호리에서 해리천을 건너 심원면 고전리로 넘어가 애향갯벌로를 따라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