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묘자리..해미성지를 찾아서 저는 내포땅을 좋아합니다. 이곳 사람들은 순진하면서도 고집스러울 정도로 우직합니다. 윤봉길의사도 그렇고, 한용운선생님도 말할 것도 없고,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그 용기가 참 부러웠거든요.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랍니다. 시복시성대상자 124명중 51명이 충청도사람일 정도로 순교자가 많습니다. 중국과 가까워 일찍이 서학을 받아 들이기 쉬웠고, 혈연으로 거미줄처럼 묶여져 일가가 신앙촌을 형성하기 쉬었을 겁니다. 산너머 동네가 김대건신부님이 탄생하신 솔뫼라는 곳이지요. 김대건신부님의 증조부는 옥사했고, 아버지머져 칼을 받았고 어머니도 반 미치광이가 되었답니다. 즉, 천주교를 믿는 것은 온 집안의 파멸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 가시밭길을 걸었을까요?
해미는 천주교가 전파된 내포지방의 여러 고을 가운데서 유일하게 진영이 있던 군사 요충지였습니다. 한때 이순신장군도 이곳에서 훈련원교관으로 10개월을 근무했을 만큼 역사적 의미를 지닌 곳이지요. 그런데 요즈음은 천주교 박해의 상징으로 불리운답니다. 1970년대부터 백년동안 무려 3천명의 천주교신자가 죽어간 곳입니다. 그 중 양반도 있었고, 천한 노비, 대가집 규수댁과 몸종도 함께 있었겟지요. 그들은 십자가 아래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죽기 전 양반은 자기가 부리는 노비에게 용서를 빌었겠지요. 그리고 떳떳히 주님을 향해 걸어 갔습니다.
감옥터 옆에는 '호야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그 참혹한 현장을 지켜보았고, 또 자신도 동쪽 팔을 고문의 고리로 삼았습니다. 나무 가지에 상투를 걸고 매질과 돌로 짓이겼겠지요. 그래도 분이 가시지 않으면 멀리서 화살로 쏘아 죽였다고 합니다. 그 참혹함이란...
희게 원을 두른 부분이 보이지요. 바로 철사를 묶은 자국입니다 철사는 아래에 길게 늘어뜨려 목을 메거나. 상투에 걸었겠지요. 원래 이곳에 가지가 길게 늘어섰다고 합니다. 그런데 1940년대 태풍으로 부러졌다고 합니다. 나무 스스로도 자신의 행위에 견딜 수 없었나 봅니다. "차라리 죽고 말자." 그러나 이 나무는 신앙의 증거이며..복음의 열매인 것입니다. 1989년부터 해미천주교회에서 대대적으로 수술합니다. 나무를 살리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이겠지요. 썩은 가지는 치료하고. 영양주사까지 맞추고...... 그것도 모자라서 근처에 4그루의 후계목을 심었답니다. 죽어간 순교자를 살리는 심정으로 말입니다.
감옥터랍니다. 온갖 고문과 회유에도 그들은 성호경을 그으며 진리를 수호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성모님을 외쳤겠지요. "빨리 죽이시오...주님의 품안에 가고 싶소이다." 안내사무소에 물었더니 감옥터 복원계획을 가지고 있나 봅니다. 수 천명의 교인들이 이곳 감옥터를 거쳐갔을겁니다. 서로 기도해주고, 의지하면 신앙의 힘을 길렀을 겁니다. 김대건 성인의 증조부인 김진후(비오)가 10년간 옥고를 치르고, 죽어간 곳이기도 하지요.
몇 년전에 이 곳을 찾았을 때 분개한 적이 있습니다. 왜..주님은 우리 민족에게만 유독 이런 아픔을 주셨습니까? 우리민족 스스로 주님을 받아 들였고, 누구보다 열심히 믿어왔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수천명의 사람들이 주님을 부르짖으며 죽어갔습니다. 과연 그때 교황청은 무엇을 했습니까? 혹시 제국주의에 영토확장의 꼭두각시 놀음을 한 것은 아닌가요? 기껏 생각해낸 것이 남연군묘의 도굴이었습니까? 그렇게 하면 뻔히 피바람이 일 것을 알텐데...왜 그리 무모했습니까? 정당하고 합리적인 방법을 찾아 이 땅의 희생을 막아야 하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감수하기엔 너무나 큰 희생이었습니다. 어쩌면 무모하게 보일 수 있는 이름없는 순교자들을 기념한다고 하니..어처구니 없었답니다.
동헌 건물입니다. 로마황제 네로가 엄지손가락을 거꾸로 하면 사자밥이 되듯 이 땅의 천주쟁이들도 마당에 엎드려 죄아닌 죄를 고백해야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을 기뻐했습니다. 어떤 이는 그 칼이 무서워, 가족의 위안이 걱정되어 또는 온갖 감언이설에 넘어가 배교를 합니다. 사또는 만족스럽게 껄껄 웃었겠지요. 그는 성을 나와서 유다처럼 고민하고 번뇌합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회개했겠지요. 다시금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저는 주님을 믿습니다." 그가 주님을 버린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동헌건물...이 곳에서 사또가 의자에 앉아 천주교인의 목숨을 좌우했겠지요. 그들을 하찮은 개미새끼처럼 보였겠지요. 그러나 주님은 그들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여기셨습니다. 창문에서 빛이 와락 들어왔습니다. 주님의 빛이 세상을 비추기 때문입니다.
순교자의 죽음을 생각하며 성을 걸어봅니다. 왜..그들은 죽어갔을까? 무엇을 위하여.... 저는 발견했습니다.. 살인을 자행한 자의 공간은 잡초만 간신히 자라는 폐허가 되 버렸습니다. 권력은 온데 간데 없고, 이 넓은 공간에 관리인 숙소만 덩그러니 자리잡았습니다. 민초들이 자라는 성 밖은 활기차고 삶의 향기가 넘칩니다. 아..이제서야 세상을 공평하게 만드셨구나.
진남문 홍예 밖에는 이름모를 풀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밖을 나오니 환한 세상이 펼쳐져 있습니다.
서문밖 순교 성지를 찾았습니다.
해미읍성 '자리개돌'입니다. 원래는 읍성 옆의 개울을 건너는 돌다리였지요. 천주교 신자들이 하도 지독해서 별의별 방법으로 배교를 유혹합니다. 이 돌다리 위에 십자고상과 묵주를 깔아놓고 ' 이걸 밟고 지나가면 술과 음식을 베풀어주고 너희들을 바로 풀어준다'라고 유혹했지요. 그런데 아무도 밟고 지나간 사람이 없었습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그 용기는 어디서 나왔단 말입니까? 그리고 신자들은 엄청난 대가를 치루어야 합니다. 신자들은 이 돌에 올려졌겠지요. 큰 돌로 머리를 짖이기고,눈이 튀어나오고 창자가 사방으로 튀었다고 합니다. 어찌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지 는 핏물이 수십리까지 따라 갔다고 합니다. 그 피를 보는 순간 민중들은 두려워야 하는데..오히려 감명을 받습니다. '그렇게 목숨을 바치는 것을 보니 천주님이 있을지 몰라.' 이렇게 주님이 하시는 일은 오묘합니다. 작은 불씨하나가 세상을 밝히는 불빛이 된 것이지요. 아멘
딱딱하고 무심한 돌도 순교자의 죽음을 애도한 것일까요? 돌을 자세히 보세요. 핏물이 스며 들지 않았나요?
제 딸에게 물었습니다. "정수야..여기는 예수님을 사랑하냐고 물어보고... 사랑한다고 대답하면 돌로 쳐죽이고 미워한다고 얘기하면..집에 가게 해준대.. 정수는 포졸이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 할거야?" 아주 어려운 질문을 했지요? 심각하게 고민을 하더니.. "포졸앞에서 예수님 미워한다고 대답하고..집에 가서 몰래 기도할거야. 히히..그럼 모를 꺼야. 하느님만 알꺼야." 참 솔직한 대답입니다. 저는 그마저 솔직한 신앙도 잊은지 오래 되었어요.
여수골 수십년간의 박해에도 끄덕없이 천주교 신자는 활화산처럼 불어납니다. 형리는 일일이 매질하는 것보다 산채로 묻어 버리면 훨씬 수월하다고 생각했겠지요. 이젠 힘들 게 죽이는 것도 지겨워졌습니다. 죽음의 구덩이로 들어가는 그들의 심정은 오죽했겠습니까? 그러나 천국에 들어가는 문으로 생각하고 기도하며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죽어가면서 "예수 마리아"를 목청껏 외쳤습니다. 이를 본 동네사람들은 "여우머리"라고 잘못 듣고 여우에 홀려 머리채로 들어갔다고 하여 '여숫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답니다.
'진둠벙'이란 곳이지요. 신자들을 묶어 둠벙에 처박아 처형하였는데.... 동네사람들은 '죄인둠벙'이라고 부르다가 오늘날 '진둠벙이라고 불리었습니다.
십자가의 길 순교자가 죽음을 향하는 길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순교자가 죽음의 구덩이로 들어가는 것을 묵상합시다."
이름을 몰라, 사인을 몰라 죽어간 순교자들 성인반열에 오르지 못하고 후세에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것에 늘 아쉬움을 받았거든요. 그런데 이곳에 그들의 유해를 모셨답니다. 발굴했을 때 머리를 처박고 죽은 신자, 꼿꼿히 선채로 죽어간 신자들의 유골이 고스란히 모셔졌답니다. 그들은 이름모를 농민이고 천민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날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왕릉처럼 생긴 '유해참배실'을 마련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위정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왕의 반열에 올라 놓았답니다. 150년이 지난 지금....무덤이나마 세상은 돌고도는 겁니다. 그들이 있기에 내가 있고 정수와 성수가 존재합니다. 따뜻한 주님의 품안에 평안하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머님의 품안은 언제나 따뜻합니다.
해미 순교 현양탑엔 노을이 붉게 물들었습니다. 순교자의 피가 하늘을 수놓았습니다.
매번 느끼는 일이지만 성지에 오면 십자고상이 더욱 성스럽게 보이고 간절하게 느껴집니다. 아멘 이렇게 때문에 순례자가 되는 모양입니다.
제 딸 정수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얼마나 힘들게 얻은 신앙입니까? 수천명의 목숨과 바꾼 신앙의 자유를 저는 지금 만끽하고 있습니다. 과거를 빨리 잊고 살아서 그런가요? 제게는 너무나도 쉽게 얻은 신앙이어서 그런가요?
세상이 알아주지 않은 나만의 믿음을 지키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순교자들에게 초를 하나 봉헌하고 나왔습니다. 들어갈 때보다 발걸음이 훨씬 가벼운 것을 느끼면서...
|
첫댓글 ,,,,,,,,,,()
나의 믿음에 대해 다시 한 번 반성해 봅니다. 좋은 글 감사, 꾸벅^^
장엄미사를 드린 듯 진한 감동과 경건함이 전해집니다. 분노의 현장이 너무도 가슴이 아픕니다 이 나라의 역사는 왜 이리도 미련한 자들이 권세를 잡고 행세를 하는지요. 우리의 기도 몫이겠지요. 감사드립니다.
이번 답사가 기대 됩니다...그동안 약간은 그랬거든요...순교하신분들의 믿음을 본받아야 할텐데..늘 빚진 사람처럼 마음이 괴로워요...나도 촛불 하나 봉헌 하고 와야겠어요
방장님의 신앙증언을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