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로 게재되는 [天金]의 글은 자비(自費) 출판하여 대학도서관에 기증한 <훈민정음에 담긴 인류문화사(2017)>의 내용 중, 한국사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내용의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올린 글의 전후맥락의 정확한 이해와 내용 전체를 읽고 싶으신 분들을 위하여, 특수문자 때문에 출판 과정에 생략한 제3장이 포함된 책의 전문(全文)을 pdf로 변환하여 블로그 http://blog.daum.net/tiangold에 올려놓았으니 많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카페에 올린 글은 ᄒᆞᆫ글로 작성된 것인데, 훈민정음 고어글자와 특수문자, 도표 등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수 있어 pdf로 변환한 것을 같이 실으니, 될 수 있으면 pdf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역사문 카페에 글을 올리면서 좀 더 보완하고 다듬어야 하는데, 여러 여건상 그렇게 하지 못한 점 양해하시고 , 혹시라도 카페와 블로그에 공개된 내용을 인용 내지 차용하시게 될 경우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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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金48] 페르시아 군상(軍商)과 가라도(加羅都), 이화동리, 충주, 강릉, 그리고 황금가지 건목득자(建木得子) 십팔자(十八子)의 역사문화언어인류학적 이해
[天金48] 페르시아 군상(軍商)과 가라도(加羅都), 이화동리, 충주, 강릉, 그리고 황금가지 건목득자(建木得子) 십팔자(十八子)의 역사문화언어인류학적 이해.pdf
가라도(加羅都)
신라 진흥왕의 팽창정책으로 가야 연맹이 모두 사라질 상황에 처하자, 가야국 가실왕(嘉悉王, 嘉實王 일명 嘉寶王) 시대의 우륵은 가야금을 들고 신라로 망명하였다. 이에 진흥왕은 그를 충주 대문산으로 보내 제자들을 양성하도록 하였다. 그의 작품 곡명 중에 ‘상가라도(上加羅都)’와 ‘하가라도(下加羅都)’가 있다.
도읍지(都邑地)라는 단어에서 보듯이 가라도(加羅都)의 ‘도(都)’는 보통 왕도(王都)를 뜻하는데, ‘상가라도(上加羅都)’와 ‘하가라도(下加羅都)’ 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조선시대 충주목 관할에도 위의 12곡과 이름이 비슷한 저수지 이름들이 나오고 있어서 주목된다. 곧
상가라제(上加羅堤 음성군 금왕읍), 하가라제((下加羅堤 음성군 금왕읍),가야곡제(음성군 대소면), 가라곡제(加羅谷堤), 상가라곡제(上加羅谷堤), 하가라곡제(下加羅谷堤 이상 음성군 삼성면) , 등 가야계통의 이름들이 나오는데, 우륵의 출생지로 전해지는 제천시 청풍면과 제천 의림지의 설화 등을 감안할 때 그가 열두 곡을 만든 곳이 이곳 충주지역으로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위키백과 한국어판:우륵⟫
는 내용을 참고할 때, 하가라도는 충주 일대의 어느 곳과 관계있을 것인데, 이 지역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가야/가라의 세력권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이곳은 한반도 남한 지역의 중심부이어서 충남 서산시 해미면 산수리에 가야산, 경북 경기 파주시 법원읍 가야리, 경기 여주군 강천면 가야리, 경북 경산시 진량읍 가야리, 경북 안동시 와룡면 가야리로 둘러싸인 지역을 비교적 쉽게 통제할 수 있다. 충주를 중심으로 가야 지명이 보이는 곳을 연결해보면, 가야/가라 세력권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가라’ 지명은 한반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본 글에서는 우륵이 남긴 ‘상가라도와 하가라도’를 통해, 한반도의 ‘가라’는 남부 지방의 ‘가라’와 중부 지방의 ‘가라’, 두 개로 나누어 볼 수 있다는 것만 지적하고, 가실왕(嘉悉王)에 대하여 살펴본다.
역사적 기록에는 가실왕에 관한 것이 없어,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 가실왕(嘉實[jiā][shí])/가실왕(嘉悉[jiā][xī])의 사성음을 보면, 이는 ‘ᄏᆞᅘᆞ>ᄏᆞᄏᆞ, ᄏᆞᄒᆞ, ᄏᆞᄉᆞ’가 원음이다. ‘가야’가 이란 지역과 관계있다는 사실을 참고하면, 가야국의 ‘가실왕’은 페르시아의 4대 왕이었던 Xerxes I (/ˈzɜːrksiːz/; Old Persian: 𐎧𐏁𐎹𐎠𐎼𐏁𐎠 Xšayaṛša (Khshāyarsha "ruling over heroes",Greek Ξέρξης Xérxēs [ksérksɛːs]; 519–465 BC), called Xerxes the Great, was the fourth king of kings of the Achaemenid dynasty of Persia.의 이름 ‘크세르크세스’의 ‘크세르’를 음역한 것으로 보이는데, 로마의 유명한 장군이자 정치가였던 카이사르 (Gaius) Julius Caesar 에서도 ‘가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크세’는 고대 페르시아 어 xšāyaθiya "king"와 아베스탄 어 xšaϑra-, "power" and "command",의 크샤χyaθiya에서 볼 수 있는데, 이는 한자어로 ‘거수(渠帥)/거서간(居西干[jū][xī][gān,gàn])’으로 표기되었다.
따라서 가실왕의 ‘가실’은 ‘ᄏᆞᅘᆞ>ᄏᆞᄉᆞ’에서 유래된 명칭이고, 가실왕을 가보왕(嘉寶王)으로도 칭하였는데, 이는 보(寶[bǎo]보배, 보물, 보배롭게 여기다, 신(神))의 훈에 보이듯이, 신을 뜻하는 말 ‘ᄏᆞᄇᆞ>가비’에서 비롯된 명칭이고, 이것에서 유래된 말이 ‘가야’이다.
그런데 우륵이 살았던 시대와 페르시아 Xerxes I(519–465 BC), Xerxes II (IPA:/ˈzəːksiːz/ - Xšayāršā)(425 BC – 424 BC (45 days), (Gaius) Julius Caesar 시대는 너무 시간적 간격이 크기 때문에 서로 비교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한반도를 오갔던 페르시아 전함무역선 용병들에게 Xerxes와 Caesar은 매우 익숙한 이름이었다. 그들은 고대 페르시아 어 xšāyaθiya "king"와 아베스탄 어 xšaϑra-, "power" and "command"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가실왕’ 이란 명칭은 서방 세계에 대한 정보를 많이 접한 자들과 관련 있을 것이고, 우륵 또한 그들과 연관 지어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진흥왕(534~576)의 생존 기간에 우륵이 활동하였다는 것, “조선 초에 재(再)제작된 천상열차분야지도에 대하여 박성환과 리준걸은 서기 5~6세기 경에 관측한 것”과, “신라의 경우 서기 약 500년 이전에는 음력 4~5월에, 그 이후에는 5~8월경에 큰 물이 났다. 백제의 경우에는 5~6월경에, 고구려는 5~8월경에 났다....동북아시아에서 서기 500년 이후의 신라 기록처럼 음력 5~8월에 큰 비가 내리는 곳은 산동반도와 한반도의 위도로 나타났다. 이것은 바로 하대 신라의 일식 관측지(한반도)와 일치한다.” 는 박창범의 대수(大水) 분석을 참고하면, 서기 약 500년(,서기 5~6세기 경)양자강 유역에서 가야/경주 지역으로 이동한 페르시아 전함무역선 관계자들이 ‘가실왕, 우륵’ 이란 말을 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의 출신지역과 우륵의 관계를 알 수 있는 것은, 우륵이 남긴 가야금과 그의 이름 ‘우륵’이다.
“가야금의 기원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가야국의 가실왕이 6세기에 당나라의 악기를 보고 만들었으며, 우륵(于勒)에게 명하여 12곡을 지었는데, 그 뒤 가야국이 어지러워지자 우륵은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 진흥왕에게로 투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4세기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의 토우(土偶)에서 가야금이 발견되고, 중국의 『삼국지』 중 위지 동이전에 삼한시대에 이미 한국 고유의 현악기가 있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 등으로 미루어, 가야금은 삼한시대부터 사용된 민족 고유의 현악기가 가실왕 때 중국의 쟁(箏)의 영향을 받아 더욱 발전했다는 것이 오늘날 국악학계의 통설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가야금⟫
가야금은 중국의 쟁(箏[zhēng]비슷한 13현의 악기, 풍경(風磬))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쟁(箏)/고쟁(guzheng 古筝)은 중국의 Zither (/ˈzɪðər, ˈzɪθ-/; German: [ˈtsɪtɐ])로 불리는 현악기로 16 현(絃) 이상의 줄(絃)과 이동 조절이 가능한 현 받침다리(안족(雁足 : 일명 柱 또는 歧棵라고도 함)로 되어있어, guqin ([kùtɕʰǐn]古琴) 또는 칠현금(七絃琴; lit. "seven-stringed zither")과는 다르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따르면, 이것은 원래 대나무 관으로 만들어졌지만, 나중에 오동나무와 안족으로 대체 제작되었다.
고쟁(guzheng 古筝)은 일찍이 전국시대(475–221 BC)부터 사용되었고, 진(秦)(221–206 BC) 시대에 널리 퍼지고 알려졌는데, 당(唐) 시대에 성행하였었다. 이것은 고쟁이 전국시대에 활동한 중국 서북 지역의 유목민 용병과 관계있다는 것이다. 쟁(箏)과 글자가 비슷한 쟁(錚[zhēng,zhèng])은 괭과리를 칭하는 말이다. 괭과리와 같은 구조로 큰 금속악기를 징(鉦, 金鉦)이라고 한다. 쟁(爭)은 싸움을 뜻하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전쟁을 뜻하는 페르시아 어 jng과 음이 같고, 이 음이 고쟁(guzheng 古筝)과 금징(金鉦), 쟁>괭과리에 사용되었다. 이는 이들 악기가 페르시아 지역에서 전해진 군악대의 주요한 악기였다는 것이다. (장구의 원적지를 티베트와 인도 사이 지역으로 보는 것도 이와 관계있다.) 그리고 이들 악기가 전국시대부터 사용되었다는 것은, 가야금/고쟁의 기원은 전국시대에 페르시아 용병들이 사용한 군악대의 악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반도의 가야금을 삼한시대부터 사용하였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다.
그러면 ‘우륵’을 통해 가야금의 원적지가 어디였는지를 추적해본다. “가야금의 기원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가야국의 가실왕이 6세기에 당나라의 악기를 보고 만들었”다는데, 6세기는
중국 동부 지역 천문기상관측자들이 약 500년(,서기 5~6세기 경)양자강 유역에서 가야/경주 지역으로 이동한 시기이다. 당시 페르시아 전함무역선을 타고 다녔던 용병 관계자들이 한반도로 이동하였는데, 그 중에 우륵(의 집안)이 있었을 수 있다. 즉 우륵은 페르시아 용병 군악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사실은 페르시아 제국의 일부로 통치되었던, ‘우륵(于勒)’과 음이 같은 이라크의 고대 도시 우르크(Uruk)
(/ˈuːrʊk/; Cuneiform: 𒌷𒀕 or 𒌷𒀔 URUUNUG; Sumerian: Unug; Akkadian: Uruk; Arabic: وركاء, Warkā'; Aramaic/Hebrew: אֶרֶךְ ‘Ereḥ; Ancient Greek: Ὀρχόη, translit. Orḥoē, Ὀρέχ Oreḥ, Ὠρύγεια Ōrugeia) was an ancient city of Sumer (and later of Babylonia)
와 바로 인접한 지역의 고대 도시 우르(Ur)
(/ʊər/; Sumerian: Urim;[1] Sumerian Cuneiform: 𒋀𒀕𒆠 URIM2KI or 𒋀𒀊𒆠 URIM5KI;[2] Akkadian: Uru;[3] Arabic: أور; Hebrew: אור) was an important Sumerian city-state in ancient Mesopotamia,
에서 발견된 Lyres of Ur 또는 Harps of Ur 로 불리는 현악기를 통해 알 수 있다.
히브리 어와 그리스 어 번역어(Hebrew: אֶרֶךְ ‘Ereḥ; Ancient Greek: Ὀρχόη, translit. Orḥoē, Ὀρέχ Oreḥ)를 볼 적에 우르크(Uruk=U+ruk)의 어원은 ‘ᄅᆞᅘᆞ’이고, Uruk의 어두음 ᄋᆞ(U,E,O)는 존칭어접두사이다. 우륵(于勒)의 이름은 이것에서 취한 것으로 보이고, 이를 통해 그의 가계는 페르시아 영토의 일부였던 이라크 지역의 수메르 문화권에서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우르크에서 BC 22~21세기 가실왕(Lugal-kisal-si, king of Uruk)의 인물상이 발견되었다. 또한 우르크는 “쿠랍(Kulab) 또는 쿠라바(Kulaba), 우눅-쿠라바(Unug-Kulaba)”로 알려진 곳인데, Unug-Kulaba는 URUUNUG을 수메르 어로 읽은 것으
로, ‘우륵-쿠라바’이다. Kulaba는 ᄏᆞᄅᆞ(Kula)+ᄇᆞ(ba) 이니, Unug-Kulaba는 ‘우륵-가라’이고, 우륵(Uruk)은 ᄏᆞᄅᆞ(Kula)를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다. 이를 통해 우륵의 고향이라는 제천~충주 일대에 보이는 지명 ‘가라’는 ‘우륵-쿠라바’ 출신자들이 집단적으로 정착한 곳이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지역의 탄금대는 매우 오래 전부터 ‘우륵-쿠라바’ 의 음악이 연주되었던 곳이다.
우르는 페르시아 만이 가까운 유프라테스 강의 하류에 위치하고 있는데, 우르크와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1929~1934년에 Ur의 왕실 묘역에서 가야금의 기원으로 볼 수 있는 BC 25~24세기(the Early Dynastic III Period (2550–2450 BC)의 현악기 4점이 발굴되었다. 이는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현악기(The Lyres of Ur or Harps of Ur)로 간주된다.
<wikipedia;Lyres of 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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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cavation in the old city of Ur in 1929 revealed the instrument "Lyres" similar to the modern harps in the shape of bull, and eleven str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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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ithara or kithara (Greek: κιθάρα, translit. kithāra, Latin: cithara) was an translit. kithāra, Latin: cithara) was an ancient Greek musical instrument in the lyre or lyra family. In modern Greek the word kithara has come to mean "guitar", a word which etymologically stems from kithara. The name kissar (cithara) given by the ancient Greeks to Egyptian box instruments reveals the apparent similarities recognized by Greeks themselves.............The earliest reference to the word is the Mycenaean Greek ru-ra-ta-e, meaning "lyrists" and written in the Linear B script.[3] In classical Greek, the word "lyre" could either refer specifically to an amateur instrument, which is a smaller version of the professional cithara and eastern-Aegean barbiton, or "lyre" can refer generally to all three instruments as a family.
이곳에서 발견된 악기는 Lyre의 원조로 볼 수 있는데, 이것의 구조, 악기 연주와 관계된 단어가 낙랑(樂浪[lè,yào,yuè][làng])의 ‘낙(樂)’ 이다. 樂의 민남어 발음은 ga̍k, 고대음은 [ŋ]ˤrawk 이다. 樂樂은 ga̍k [ŋ]ˤrawk 으로 표기해볼 수 있으니, 한국어 노랫가락의 ‘가락’은 가락 시대에 Lyre(樂樂[lè][lè]) 악기 연주 리듬에 맞추어 부르는 ‘우륵-쿠라바’ 의 음악과 관련 있을 듯하다.
樂[lè,yào,yuè] 즐길 낙{락},{풍류 악, 좋아할 요}즐기다, 풍류, 음악, 좋아하다, 아뢰다, 연주하다, 타다, 악기
(Pinyin): yuè (yue4) / Cantonese (Jyutping): ngok6 / Min Nan (POJ): ga̍k / Wu (Wiktionary): hhiaq (T5); ngoq (T5) /Middle Chinese: /ŋˠʌk̚/ / Old Chinese▼ (Baxter–Sagart): /*[ŋ]ˤrawk/ (Zhengzhang): /*ŋraːwɢ/
浪[làng]물결, 파도, 물결이 일다, 파도가 일다, 방자하다, 삼가지 아니하다
그리고 樂의 글자 자체는 뿔 사이에 줄을 걸어 만든 악기에서 비롯되었는데, 나중에 뿔 대신 나무를 사용하였다. 樂의 글자구성 풀이와 일치하는 악기가 우르에서 발견된 현악기(The Lyres of Ur or Harps of Ur)이다. 황소 뿔에 줄을 매어 연주를 한 것이 Lyre의 시작이고, 이것을 간단히 제작한 것이 우르의 악기인데, 나무 사이에 줄을 매고, 황소 머리를 장식으로 달아, 이 악기의 소리는 황소 신의 말씀이라는 것을 나타냈다. 이것이 나중에 kissar (cithara)로 불린 것과 우르 Lugal-kisal-si 왕의 이름을 볼 적에, 이 악기의 원래 이름은 ‘ᄏᆞᅘᆞ>ᄏᆞᄉᆞ>ᄏᆞᄉᆞr’ 이었고, 나중에 ‘ᄅᆞᅘᆞ>ᄅᆞᄏᆞ>樂樂ᄅᆞᄅᆞ(Lyre---the Mycenaean Greek ru-ra-ta-e, meaning "lyrists" and written in the Linear B script)로 불린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가야금의 이름은 ‘ᄏᆞᅘᆞ>ᄀᆞᄋᆞ>가야’에서 비롯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것을 전쟁터에서 연주할 수 있도록 개량한 것이 고쟁(guzheng 古筝)인 것으로 보이고, 가야금을 만들었다는 우륵은 고쟁에 대해서 정통하였을 것이고, 군악기 고쟁을 한반도 정서에 맞게 평상시 연주 악기로 개량한 것이 ‘가야금/가얏고’ 인데, 12현(絃) 가야금과 가장 현의 수가 일치하는 것은 11현으로 된 BC 25~24세기 우르의 현악기이다. 즉 우륵은 조상 대대로 전해온 우르의 현악기를 바탕으로 고쟁을 개선하여 가야금을 만든 것이다.
중국 동부 지역 천문기상관측자들이 약 500년(,서기 5~6세기 경)에 양자강 유역에서 가야/경주 지역으로 이동하였던 사실과 6세기에 당의 악기를 보고 가야금을 만들었다는 것을 종합하면, 우륵의 가야금이 만들어진 시기는 약 500년을 전후한 시기이다. 가야의 가실왕은 우륵에게 가야 연맹의 음악을 정리하여 남길 것을 부탁하였고, 신라의 진흥왕은 그를 충주 대문산/견문산에 머물게 하면서 신라 음악의 체계를 다졌다. 이는 그곳이 ‘우륵’ 음악을 잘 알고 연주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륵이 전한 ‘하가라도’는 오늘날 충주 일대인데, 충주에 관한 사실을 정리하면서, 문자기록에 전하지 않는 ‘하가라도’에 담긴 의미를 찾아보기로 한다.
충주
우륵이 머물렀던 충주 대문산(,견문산犬門山)의 유래에 따르면, 충주는 속리산의 개와 관련이 있다.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정선의 산봉우리와도 관련이 있다.
(;천지개벽할 때에 달천강의 상류인 보은 속리산으로부터 작은 산 덩어리가 떠내려 오는데, 그 위에 개가 타고 내려와 이곳에 정착하면서부터 개가 충주 땅으로 들어오게 되었다고 해서 견문산(犬門山)이 된 것과 김생이 신통력으로 물길을 돌려 ‘독산(獨山)’이 되었다고 하는 설이 있다. 또 다른 설에는 강원도 정선 땅의 산봉우리가 대홍수로 떠내려 오다가 물이 빠지자 멈추어 산이 되었다고도 한다.<디지털충주문화대전:대문산>
한반도 삼한 지역의 구해국(狗奚[gǒu][xī]國)과 구소국(狗素[gǒu][sù]國), 구로국(狗盧[gǒu][lú]國)과 일본(,왜)의 남쪽 1만 2천 여리에 있었다는 구노국 (狗奴國), 그리고 개를 ᄀᆞᄅᆞ로 불렀던(네팔어 kukura, 벵골어 kukura, 핀란드 어 koira, 하와이 어 ka'īlio, 마오리 어 kuri, 하우사 어 kare, 히브리 어 kailaib, 구로狗盧[gǒu][lú],‘구해(狗奚)’의 중국 고대음 ‘kəu-riei’), 각국의 단어를 참고하면, 속리산에서 충주로 산봉우리를 타고 내려온 개는 ᄀᆞᄅᆞ(Guru, 대스승)가 통치자의 명칭으로 불렀던 시절의 문화를 나타내고, 개/ᄀᆞᄅᆞ/Guru는 ‘ 하가라제((下加羅堤음성군 금왕읍) 지역이 “본래 충주군 금목면(金目面)과 법왕면(法旺面) 지역이었”다는 것에 보이는 ‘금목/법왕’과 관련 있다. 따라서 우륵의 ‘하(下)가라도’와 관련된 지역에 보이는 ‘가라’ 지명은, 삼한 시절부터 내려온 지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정선에서 충주로 떠내려 온 산봉우리와 관련 있는 것이, 단양 도담삼봉에 얽힌 전설이다. 단양 삼봉은 원래 강원도 정선군의 삼봉산이 홍수 때 떠 내려와 지금의 도담삼봉(장군봉,첩봉(딸봉),처봉(아들봉))이 되었으며 그 이후 매년 단양에서는 정선군에 세금을 내고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행정구역과 도로 교통 사정을 보면, 단양은 충주 관할에 있어야 하는데, 단양에서 정선군에 세금을 냈다는 것은, 단양이 정선군 관할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 사연의 답은 정선군의 가리왕산(加里旺山)에 있다.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강원도 정선군 북평면,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에 위치하고 있는 가리왕산/갈왕산 북쪽 사면으로는 남한강의 지류인, 동강(東江)으로 흘러드는 오대천(五臺川)이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나전리에서 조양강(朝陽江)과 합류한다. 남쪽의 회동리에는 무연탄의 탄광이 있고, ...옛날 맥국(貊國)의 가리왕(加里王)이 이곳에 피난하여 성을 쌓고 머물렀으므로 가리왕산이라 부른다고 하며, 북쪽 골짜기에 그 대궐 터의 흔적이 남아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가리왕산⟫
가리왕산은 속리산 문장대에서 강릉으로 가는 길의 중간 조금 더 되는 정도의 위치에 있으면서, 남한강의 지류가 흐르고, 무연탄 탄광이 있다. 철을 가공하는 데는 충분한 화력이 필요한데, 그것을 공급할 수 있는 곳이다. 이는 정선군 가리왕산이 현재의 관점으로는 중요도가 낮지만, 고대인의 관점에서는 이곳에 ᄀᆞᄅᆞ(加里)를 파견하여 관리해야 하는 곳이다. 이곳에 맥국의 가리왕이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더라도, 대궐 터가 있다는 것은 보통 수준 이상의 ‘관리자/가리/Guru’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단양 삼봉의 주인공인 ‘장군봉’일 것이고, 충주 견문산/대문산의 가리/Guru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을 것이다.
충주 견문산 칠금동에 삼국시대의 대형 용해로가 발견되었고, 조선 시대까지 철을 많이 생산하였다는 것은, 철광석과 그것을 녹여낼 수 있는 화력이 풍부하였다는 것인데, 충주시 바로 인근에서는 그럴 만한 것이 없다. 가리왕산의 무연탄(정선탄전:정선읍 가리왕산에서 회동리 덕둔지마을과 성마령을 잇는 남북방향을 따라 동서로 나누어져 동익부(東翼部)의 정선지구와 서익부(西翼部)의 평창지구로 구분된다⟪다음백과:정선탄전⟫), 단양의 석회석 · 형석(등축정계 입방체 결정. 가열하거나 광선을 비추어 형광을 발산한다. 용도로는 철강, 알루미늄등 제조용 용제.⟪기계공학대사전:형석⟫ ), 목재를 산봉우리같이 실은 배, 뗏목이 남한강을 따라 내려가면 충주 ᄀᆞᄅᆞ문(견문)산 아래 칠금동에 도달한다. 그런 점에서 정선의 산봉우리가 단양에 멈추어 도담삼봉이 되고, 충주 ᄀᆞᄅᆞ문(견문산)이 되었다는 것은, 제철 작업에 필요한 자원을 실은 배가 정선에서 단양을 거쳐 충주로 다녔다는 것이고, 이 자원의 보고가 정선군이다. 그래서 정선이 단양에 큰 소리치고 세금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고, 천자가 내린 깃발을 상징하는 정선(㫌善)의 㫌 만으로도, 이곳이 얼마나 국가에 중요한 곳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렇게 강물에 떠내려 온 산봉우리가 제철 작업에 필요한 광물 자원이라는 것을 뜻한다면, 속리산에서 충주로 떠내려 온 산봉우리 역시 광물 자원일 것인데, 속리산이 있는
“현재 가행되는 것은 20개의 광구 중 8개이다. 고령토 1,239M/T, 석탄 7만 7304M/T을 생산하고 있다. 마로면에서는 1개의 광구가 가행되어 연간 석탄 6만 6601M/T, 토상흑연 4,300M/T을 생산하고 있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보은군⟫.
보은군에서도 충주 제철(製鐵)/제동(製銅) 작업소로 석탄을 배에 실어 보냈고, 이것을 관리하는 자를 ‘개/ᄀᆞᄅᆞ/Guru’로 불렀던 것이다.
그러면 삼한 시절 충주 지역 가리/Guru와 관련이 있는 유물을 살펴본다.
충주시 금릉동의 유물에서 주목할 것은 BC 3세기 중반대로 추정되는 충주 최초의 검은 간토기(흑색마연장경호)와 원형 점토대 토기, 복구연호(複口緣壺) 1점, 기마인물상 파수부 유개호 1점이다. 이것과 “금릉동 유적에서 두드러진 유구는 원삼국시대의 유구이다. 무덤 형태나 출토 유물은 남한강 상류에서 발견되던 원삼국시대의 유적과는 달리 천안·공주·청주 일대의 한반도 중서부 지역과 친연성을 보인다.<디지털충주문화대전:금릉동유적>”는 평가는, 충주의 문화는 인도 검은 간토기 문화와 연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곳 검은 간토기의 문화적 뿌리는 칠금동양진명소오룡굿(漆琴洞楊津溟所五龍-)에서 찾을 수 있다. 이곳 지명의 칠지(漆枝)는 옻나무를 뜻하는데, 칠액(漆液)은 배를 만드는 나무의 방부 방수제로 사용되는 중요한 원료이다. 오룡굿은 봄가을에 선박의 안전운행, 풍어를 기원하는 의식인데, 이곳의 주신 오룡은 인도의 Kuru국(ca. 1400−500 BC)과 Panchala국(?−1100 BC)(?−4세기 BC)에 관한 자료와 고령 지방에 전해지는 알터 전설, Kuru 왕국의 수도 Hastinapur로 기록된 곳의 왕 Pandu의 다섯 아들 Yudhishthira, Bhima, Arjuna, Nakula and Sahadeva. 과 관련 있다.
금릉동 유적지 보고서
“ 초기철기시대의 유구는 토광묘와 구덩 유구가 각각 1기씩 확인되었다. 보고자는 이 유구들의 시기를 B.C. 3세기 중반대로 편년하였다. 원삼국시대의 유구는 토광묘 149기와 독무덤 1기가 확인되었다. 토광묘는 가장 많이 조사된 유구로 합장묘 13기와 기둥구멍이 확인된 토광묘 5기가 포함되어 있다. 토광묘는 서로 중복되지 않고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으며, 비교적 짧은 기간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철기는 모두 227점으로 무기와 마구류, 농공구류 등이 대부분이다. 무기류는 서로 다른 제작 기법을 보이는 고리긴칼 2점과 쇠투겁창 8점, 쇠화살촉 21점 등이 있다. 특히, 마구류는 그 유입 시기를 종래 4세 이후로 편년하던 것을 3세기대로 올려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디지털충주문화대전:금릉동유적>
의 BC 3세기 중반은 알렉산더의 동방원정으로 페르시아(Old Persian)(550 BC–330 BC)가 무너지면서 많은 이주민들이 한꺼번에 발생하였던 시기이다. 당시 인도 Kuru국(ca. 1400−500 BC)과 Panchala국(?−1100 BC)(?−4세기 BC)지역 사람들은 BC 400 검은 간토기를 가지고 한반도 금강 주변으로 이주하고 있었는데, 알렉산더의 침공으로 16대도시국가가 막을 내리면서, 이전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한반도로 이주하였고, BC 3세기 중반 금릉동의 무덤은 금강 줄기에서, 충주 지역으로 진출한 인도 지역 사람들 중 일부의 무덤일 것이다.
당시 인도에서 한반도로 진출하였던 사람들은 속리산을 천주(天柱)로 삼아 정착하였었는데, BC 3세기 중반 한반도로 이주한 사람들이 한반도에 세운 나라가 “초기철기문화를 배경으로 서기전 3∼2세기경 한반도 중남부지역에 성립해 있었던 정치집단.<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으로 정리된 진국(辰國)이다. 한반도의 진국은 인도 16대도시국가의 연장으로 이해해 볼 수도 있는데, 16개 나라 중에 Kuru 왕국(c. 1200 BCE–c. 525 BCE)이 있었고, 이를 계승한 Panchala 왕국(c. 900 BCE–c. 400 CE)에서는 Vedic Hinduism, Buddhism, Jainism을 믿고 있었고, Mahājanapadas (Sanskrit: महाजनपद, lit. 'great realm', from maha, "great", and janapada "foothold of a tribe, country")(c. 600 BCE–c. 345 BCE)에서는 Vedic Hinduism과 Śramaṇa (Buddhism and Jainism)을 믿었었다. 진국은 janapada의 ᄌᆞᆫ교(Jainism)를 믿는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세운 나라일 가능성이 많다.
우륵 집안이 거주하였을 충주~제천 일대에는 인도의 janapada를 거쳐 이주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들은 분명 베트남과 백월(百越) 지역을 지나왔을 것인데, 당시 베트남 Văn Lang(2524–258 BC)은 이러한 변동을 수용할 능력이 없었기에, BC 400c. 345 BCE 부터 한반도 충청도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 인도인의 이주가 바로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인도 Kuru국과 관련된 사람들이 속리산을 중심으로 진국을 세우고 살았던 시기의 지명이 충주 견문산(犬門山), 정선 가리왕산이다. 이들 다음으로 충주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남긴 유물이 2015년 BC 2~1 세기(, 또는 BC3세기~ AD 0년)로 추정된 충주 호암동 628-5 일대의 무덤 3기에서 발굴된 세형동검`(길이 23∼30㎝) 7점과 다뉴세문경 1점, 청동투겁창 3점, 청동꺾창(銅戈) 1점, 청동도끼(銅斧) 1점, 청동새기개 4점, 청동끌(銅鑿) 2점 등 각종 청동 유물 19점과 검은 간토기(黑陶)이다. 이는 한반도에서 한 지역에 최대의 청동 무기 유물이 발굴된 것이다.
충주 호암동에서 철제 무기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이곳의 유물은 베트남 Văn Lang(2524–258 BC) Âu Lạc(257–179 BC) Nam Việt(204–111 BC), 시기에 한반도로 이주한 사람들이 남긴 것임을 알려준다. 이는 호암동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금릉동으로 온 이주한 사람들과 집단의 성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호암동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이 지역의 자원 중에 구리를 재련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아연/갈렴석과 같은 광물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온 사람들이고, 베트남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페르시아 용병 출신들이다.
그들의 활동 중심지가 꼭 충주여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충주는 금강을 이용하는 부여/청주, 백제 문화권과는 달리 남한강이 주요 수로인데, 남한강을 타고 내려가면 강화도-황해도로 바로 연결된다. 그리고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단양-정선을 거쳐 강릉으로 연결된다. 충주를 중심으로 황해도 옹진 화산리와 강릉 하슬라, 하도대, 함흥 이화동, 경주 지역이 배를 타고 바로 연결된다. 그래서 충주의 청동 유물은 동해를 다녔던 페르시아 전함무역선 소속 집단이 강릉 하슬라에서 정선, 단양을 거쳐 전한 것이든지, 아니면 낙랑군이 가까운 황해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근래에 조사된 진국시기 지배자의 대표적 분묘유적으로 충청남도 당진 소소리유적, 부여 합송리유적, 전라북도 장수 남양리유적이 있다. 이들 유적에서는 세형동검·동과·동모·세문경과 함께 중국 전국(戰國)계 주조철제도끼·끌 등이 부장되어 있어, 대동강 유역과의 교류관계를 시사하고 있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진국⟫는 내용은, 중국 전국시대에 중국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페르시아 용병 집단이 충주 이외의 지역에 정착하였었고, 이들은 용병들이 많이 정착하고 있었던 대동강 낙랑군 지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주로 배를 이용하여 물자를 수송하였기에, 황해도/대동강 유역과 동해안 지역을 연결하는 충주가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게다가 충주에는 철과 갈렴석이 풍부하였기 때문에 호원동을 중심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원삼국시대 충주 금릉동에서 짧은 시간에 축조된 149기의 토광묘 유적지에서는 청동무기가 거의 발견되지 않고, 철기는 농공구가 대부분이고, 무기는 제작 기법이 다른 긴 칼 2점이 발굴되었다. 이는 페르시아 용병 출신자들도 아니고, 진국 문화와도 다른 계통의 사람들이, 진국 이후에 이곳에 정착하였다가 매장되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지역이 가야/가라와 관련 있다는 것은 ‘우륵’을 통해 알 수 있지만, 금릉동 마구류가 3세기대로 추정된다는 것은, 서로 다른 제작 기법을 보이는 고리긴칼 2점과 쇠투겁창 8점, 쇠화살촉 21점 등이 만들어지던 시기. 가 바로 변한/가라의 제철 전성기였다는 것, 낙랑과 왜, 동예 지역에 철을 수출하였다는 것과 연결된다. 다양한 제철 제련 기술을 확보하고 있었던 변한/가야/가라가 2~3세기에 이곳을 차지하고, 제철산업단지로 활용하였던 것이다. 가야(,변한)에서 낙랑과 동예에 철을 수출하려면 충주에 제철소에서 제작하여 강을 이용하여 전하든지, 마산/창녕 일대에서 제작한 것을 바다로 해안을 따라 전하든지 해야 한다. 그런데 고려시대 청자의 무덤이 신안 일대 해저라는 것을 고려할 때, 김해 마산의 변진 지역에서 철제품을 배에 실어 서해안을 돌아 낙랑으로 올려 보낸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현실적이지 못하였다.
그리고 충주에서 ‘임둔군→낙랑군 동부도위’가 있었던 강릉에 도착하려면, ‘충주-(제천)-(영월)-정선-강릉’의 국도를 타는 것이 지름길인데, 강을 이용하려면 ‘충주-단양-영월-정선-왕치산-왕산면-제왕산-강릉’ 이 가장 무난하다. 이 길과 관련된 것이 충주 대문산의 전설 중 하나인 강원도 정선 땅의 산봉우리가 대홍수로 떠내려 오다가 물이 빠지자 멈추어 산이 되었다고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漢)의 군대와 용병들이 거주하였던 낙랑군(樂浪郡)·대방군(帶方郡)·임둔군(臨屯郡)/동예(東濊)(낙랑군동부도위) 지역에, 무기와 생활용품을 만들 수 있는 철을 공급할 수 있는 충주 칠금동 일대에 제철소를 둔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론이었다. 이곳에서 철을 만들어 남한강 배편으로 내려 보내면, 가장 빠르고 안전하게 대방, 낙랑 지역에 도착한다. 동예 지역에서는 강릉 철국(鐵國)에 제철소를 두고 제작하여 사용하면서, 필요하면 충주와 울산에서 제작된 것을 수입하였었다.
이렇게 중요한 충주는 하가라도(下加羅都)로 불리면서 가락국 제2왕도로 활용되었었고, 그런 상황은 우륵이 남긴 곡명 ‘하가라도’라는 단어 하나에 담겨있다. 이 지역을 장악하였던 가라/가야의 세력권은 현재 일반적으로 알려진 정도가 아니고, 최소한 경기 파주시 법원읍 가야리, 더 나아가서는 임진강과 임진강 상류를 타고 북으로 이어지는 동해안 임둔군(臨屯郡)이 있었던 지역, 신라 진흥왕이 함경도 마운령과 황초령 지역에 순수비를 세운 곳까지, 그리고 낙랑군 지역까지였다. 이 정도의 강역이라면 왕도 한 곳에서 통치할 수 없고, 상가라도(上加羅都)와 하가라도(下加羅都)로 나누어야 효율적으로 통치할 수 있다.
2006년 중원문화재연구소는 칠금동 탄금대 서쪽 사면에서 바닥 지름 1,6m의 타원형 용해로 1기와 각종 제철 관련 유물을 발굴하였는데, 이곳의 노(爐)는 삼국시대 최대의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2016년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는 대형 용해로에서 100m 떨어진 주변을 발굴하여 제련로 12기 , 단야로 1기, 철광석 파쇄장 등을 찾아냈다. 이것을 토대로 고고학계에서는 충주시 칠금동 일대를 4세기 무렵 백제의 핵심 제철단지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가야 다음으로 백제가 이 지역을 차지하였다는 것이고, 당시 이 일을 한 것은
근초고왕(近肖古王, 재위: 346~375)이었다.
다음으로 고구려가 이곳을 차지하고 국원성(國原城)을 설치하였는데, 이곳은 미을성(未乙省)·탁장성(託長城)·완장성(莞長城)[또는 薍長城] 등으로도 불렸다. 미을의 을(乙)은 차례나 등급에 둘째라는 것이고, 未乙은 ‘ᄆᆞᆯ 또는 ᄆᆞᄅᆞ’로 읽어, 군사령관(m_r_)인 말객(末客)/말약(末若)/군두(郡頭);대형(大兄) 이상의 관등을 가진 자로서 임명되었으며, 중국의 중낭장(中郎將)에 비정된다. 1,000명의 병사를 지휘하는 무관⟪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말객⟫ 이 살펴보는 지역(省)으로 해석된다. 이는 평양성으로 왕도를 옮긴 고구려의 입장에서 국원성은 국내성(國內城)과 함께, 평양성 왕도에 버금가는 중요한 곳이라는 것인데, 이곳은 나중에 신라 진흥왕의 국원소경(557)으로 계승되었다.
충주 독산(獨山)과 화산(花山) 이씨(李氏)/정선(㫌善) 이씨(李氏)
충주 견문산은 김생(金生)이 기도로 물길을 돌려 독산(獨山)으로도 불렸다는 전설이 있다. 독산(獨山)과 관련된 것을 이해하기 위해 황해도 옹진군 화산 이씨를 먼저 살펴본다.
1226년 베트남 리 왕조(李朝)의 왕족이 정란을 피하여 해외로 망명하였는데, 당시 화산 이씨의 중시조 이용상(李龍祥)은 배를 타고 탈출하여 황해도 옹진군 북면 화산동리에 정착하여, 한국 화산(花山) 이씨가 되었다. 그의 종손이었던 이양혼은 송으로 망명하였다가, 1127년에 고려로 들어와 경주에 정착하였다. 그 후 이양혼의 9세손 이우원(李遇元)이 정선(旌善)으로 이거(移居)하여, 정선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정선에서 배를 타고 남한강을 내려가면 단양을 거쳐 충주 대문산/견문산/독산(獨山)에 도착하고, 이곳에서 다시 내려가면 서울을 지나 강화도 앞 바다를 거쳐 옹진군 화산동리에 도착한다.
베트남에서 한반도로 이주한 이씨들의 행보를 정리하면, 베트남→①황해도 화산, ②(→중국:송)→경주→정선(→화산)으로 요약된다. 이들의 행로에서 빠진 핵심 지역이 충주인데, 충주에서 남한강을 이용하면 황해도로 바로 갈 수 있고, ‘충주-단양-영월-정선-왕치산-왕산면-제왕산-강릉’ 으로 갈 수 있다. 조금 노력하여 낙동강을 이용하면 경주로 쉽게 갈 수 있다. 이를 보면 충주를 중심으로 화산과 경주, 정선/강릉이 연결된다. 9세손 이우원이 경주 도시에서 산골 마을 정선으로 이거한 것은 단순한 이사가 아니라 조상들의 뿌리와 관계된 것인데, ‘이씨’의 행보에는 베트남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페르시아 용병들이 한반도로 이주하면서 정착하는 과정에 있었던 과거가 그대로 담겨 있다.
베트남 역사에서 독산의 ‘독(獨[dú])’이 보이는 것으로 Âu Lạc(甌雒/甌駱, 257~179 BC)의 건국자 An Dương Vương (安陽王, Vietnamese: [ʔaːn jɨəŋ vɨəŋ]) Thục Phán(蜀泮)이 있는데, Thục(ᄐᆞᆨ th[tʰ]c) 씨 집안이 Âu Lạc 왕조를 세우기 이전 BC 6세기에 ᄃᆞᆨ(Đức) 씨 집안 Đức Quân Lang이 Tân 씨 왕조(c. 660 – c. 569 B.C.)를 세웠었다. 그는 대략 712 BC에 태어났는데, 왕이 되고나서 Hùng Tạo Vương 으로 칭하였고, 그의 후계 왕들도 모두 이 칭호를 사용하였다. Tân 씨 왕조에서 있었던 일로 주목할 것은 정교한 관계수로가 만들어져 델타 지역의 갯벌이 벼농사를 짓는 논으로 바꾸어졌다는 것과, 청동북(Đông Sơn drums)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외부의 새로운 문화가 수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왕조 기간에 왕가의 통치에 대항하는 지방 세력들의 반란("Man rebellion.")이 있었고, 이는 Thạch Tướng 장군의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다음으로 Nhâm 씨 왕조(568~476 BC)가 뒤를 이었고, 470 BC 월(越)의 Goujian (勾踐, 재위 496–465 BC)이 항복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에 전쟁이 있게 되고 마침내 Nhâm 씨 왕조는 막을 내렸다(470 BC). 470~408 BC 기간의 왕조 교체 혼란기를 지내고, 다음으로 Hùng Duệ Vương 왕조(408 BC to 258 BC)가 뒤를 이었다. 이 왕조의 존속 기간은 중국 전국시대에 해당한다. 주(周)(c. 1046 BC–256 BC/ 주(周)왕도변천: Fenghao[a](1046–771 BC),Wangcheng[b] (771-510 BC; 314–256 BC)[1]Chengzhou (510-314 BC))가 막을 내리는 256 BC 즈음에, 베트남에서도 왕조 변천의 움직임이 있었다.
BC 3세기, 베트남 북부 산간지역과 광서성(Guangxi) 남부 지역의 대략 9개 유럽계 부족들은 Thục Chế의 지휘 아래 Nanping (now the provinces of Cao Bang,高平 주도인 카오방 시는 베트남과 중국의 국경에서 남쪽으로 약 25㎞ 떨어진 방지앙 강 연안에 있는 상업 중심지이다. 가까운 틴투크 광산에서 주석이 채광된다<다음 백과:까오방>.)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나라(state of the European Vietnam)를 만들기 시작했다. Thục Chế가 세운 나라를 Nam Cương(南彊) 왕국으로 부르는데, 그는 아들 Thục Phán에게 Văn Lang(2524–258 BC)을 정복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258 BC or 257 BC 경 유럽계 부족들과 Âu Việt 부족들의 연합 대표 지도자가 된 Nam Cương(南彊) 왕국의 Thục Phán은 남쪽 Hùng Duệ Vương 왕조의 Văn Lang(, Lạc Việt)으로 영토를 팽창하였다. 그런데 당시 중국에서는 진(秦) 장양왕(莊襄王, 281 ~ 246 BC)이 주(周)를 병합하였는데, 그 과정에 북쪽의 전쟁을 무난하게 치르기 위해, 그의 적모(嫡母)의 나라 초(楚)의 군대를 남쪽 베트남 지역으로 진출하게 하면서, 양 지역에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초(楚)/진(秦) 군대와 맞서기 위해 Văn Lang(, Lạc Việt)의 베트남 왕 Hung Vuong XVIII은 유럽계 Thục Phán 군대( Vietnam's ethnic Thuc Europe)와 연합하지 않을 수 없었다. 10년 이상의 전쟁을 치르고 중국 세력의 남침은 저지했지만, 그 후 베트남/백월 부족 지역의 주도권을 두고 “Hùng-Thục 전쟁”이 전개되었고, 결국 Thục Phán이 Văn Lang(, Lạc Việt, 2524–258 BC)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 Âu Lạc(甌 雒/甌 駱,257–179 BC)을 세웠다. 그는 An Dương Vương(安陽王, 257 BC – 207 BC or 179 BC)이 되었는데, 진(秦)의 관리 출신 Qin general Zhao Tuo(趙佗)이 세운 남월(南越, 203–137 BC)에 의해 무너졌다.
그러면 유럽계로 알려진 Thục Phán(蜀泮)의 뿌리는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그는 페르시아 용병 집안 출신인데, 베트남 북부에서 중국 복건성 사이의 백월(百越)로 불리는 여러 족들 사이에 섞여있는 ‘유럽계 베트남인’으로 연구된 것이다. 그러한 Thục 집안의 근거지였던 베트남 북부 Nam Cương(南彊) 왕국의 처음 중심지는 Cao Bằng (高平)이었는데, 이곳은 남중국 서강(西江) 상류가 베트남 홍 강의 지류와 만나는 곳이고, 베트남 북부와 중국 광시(廣西) 지방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이다. 이곳의 치랑 고개는 중국의 전통적인 베트남 침공로였다. 이는 외부에서 베트남으로 진출하려면, 이곳을 통과해야한다는 것이고, 교역의 중심지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가까운 틴투크는 주석 생산지이다. 주석(tin)은 돈(전(錢[qián])이다. 이곳 주민의 대다수는 “가장 수가 많은 눙족을 비롯하여 타이족·자오족·메오족 등 소수민족 집단” 인데,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이곳으로 몰려든 사람들이다. 페르시아 용병 출신의 Thục Phán의 조상들도 그 들 중의 일부였고, BC 6세기 Tân 씨 왕조(c. 660 – c. 569 B.C.) Đức Quân Lang의 ᄃᆞᆨ(Đức) 씨 집안 또한, 그렇게 외부에서 이곳을 거쳐 베트남으로 진출한 세력 중의 하나였다.
페르시아 용병들의 출신 지역 중에서 ᄃᆞᆨ(Đức) 씨와 ᄐᆞᆨ(Thục) 씨들과 관련 있는 것으로 주로 북(北)코카서스 체첸을 중심으로 하여 인구시아, 그루지야 지역에 살고 있는 ᄇᆞᆫ ᄂᆞᅘᆞ인(Vainakh peoples (Russian: Вайнахи, apparently derived from Chechen вайн нах, Ingush вей нах "our people"; also Chechen-Ingush)이 있다. 소련 시절에 ᄇᆞᆫ ᄂᆞᅘᆞ인 Chechen-Ingush 집단과 그루지야 북동 지역에 살고 있는 ᄇᆞᄎᆞ(Bats people) 인들을 합쳐 ᄂᆞᅘᆞ인(Nakh peoples)으로 불렀다.
ᄇᆞᆫ ᄂᆞᅘᆞ인 개인은 "Tsa" 로 불리는 가(家)의 일원이고, 여러 "Tsa"가 모여 "Gar“이 되고, 씨족clan(,Teip)이 된다. Teip들이 모여 Tukkhum을 이루고, 전통 체첸 사회의 사회적 조직인 Tukkhum은 군경(軍經) 또는 군정(軍政) 연합체( a military-economic or military-political union teips)이다. 여러 Tukhums은 Teips의 대표기관인 Teipan-Khelli에 의해 관리 운영되고, 이것들이 모여 나라/nation(Kham)가 된다. Tukhum이 국가(Kham) 운영의 핵심 주체인데, 이것은 혈족 연합체(consanguineous union)가 아니고, 특별한 목적들을 위해서 설립된 여러 teips의 연합체로, 부족적 조직( tribal organization)으로부터 형성된, 일종의 동업자 단체(brotherhood)였다. 이것들의 부족적 합체(tribal union)가 the Kham 또는 체첸 국가 전체를 형성한다. 16세기와 17 세기에 9개의 tukkhums이 체첸을 이루었었다. 현재 미국과 같은 고도의 산업국가가 운영되는 사회의 기본 원리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을 국가라고 칭하지만, 국가보다는 Teipan-Khelli가 중심이 되어 운영되는 일종의 동업자 단체들로 구성된 연합체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것은 페르시아와 그것을 계승한 파르티아 제국이 운영된 기본원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황제가 있었지만, 그는 다국적의 기업과 군인들을 모아서 제각각 이익을 취하도록 조정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국적에 관계없이 돈을 벌고자하는 자는 페르시아 제국의 군상/군경(軍商/軍經) 조직에 들어가 전함무역선을 운영하는데 참여하였고, 황제는 그들이 최대로 이익을 내면, 최대의 세금을 거둘 수 있었으니, 그 역시 조합의 일원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정치는 봉건제 형태로 느슨한 여러 독립체가 연합된 방식으로 운영된 것이다.
그러면 ” BC 3세기, 베트남 북부 산간지역과 광서성(Guangxi) 남부 지역의 대략 9개 유럽계 부족들은 Thục Chế의 지휘 아래 Nanping (now the provinces of Cao Bang,高平 주도인 카오방 시는 베트남과 중국의 국경에서 남쪽으로 약 25㎞ 떨어진 방지앙 강 연안에 있는 상업 중심지이다. 가까운 틴투크 광산에서 주석이 채광된다<다음 백과:까오방>.)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나라(state of the European Vietnam)를 만들기 시작했다.” 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Thục Chế는 페르시아 제국의 군상/군경(軍商/軍經) 조직인 9개의 tukkhums을 조합하여 지휘한 것이다. 그들의 구성원은 매우 다양하였을 것이고, 백월(百越)로 칭해진 100개의 알에서 태어났다는 사람들은 9개 tukkhums의 부족적 조합원이었다고 보면 된다.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에서 살던 사람들 가운데 체첸 어와 인구시 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현재 다게스탄 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연접하여 지내는데, 다게스탄(Dagestan)과 체첸, 인구시아 지역에서 인도 북부와 베트남 북부를 거쳐 한반도로 이주한 사람들이 있었다.Ingush (/ˈɪŋɡʊʃ/, ГӀалгӀай, Ġalġay, pronounced [ʁəlʁɑj])를 Ğalğaj mott로도 부른다. 한국어 갈가지는 ‘개호주(범의 새끼)’의 방언(경기, 경상)인데, 웃니 빠진 어린이를 놀림조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다게스탄 일대에서 한반도로 이주한 사람들을 고려하면, 갈가지의 어원이 Ğalğaj 일수도 있다. 현재 죽음을 불사하고 러시아와 맞서는 체첸 사람들을 보면,용병으로서 이 지역 사람들은 호랑이 같았고, 그들(Ğalğaj, 그루지야 인)을 칭하였던 말 ‘갈가지’가 경기, 경상 방언이라는 것은, 이들이 한반도로 이주하여 활동하였던 지역이 어디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Thục Chế를 계승한 Thục Phán 역시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Chế와 Phán은 체첸(Chechens (/ˈtʃɛtʃən/)의 체(che/Chế), ᄇᆞᆫ ᄂᆞᅘᆞ(Chechen вайн нах, Ingush вей нах "our people")의 ᄇᆞᆫ(ban/Phán)과 관계있고, ᄇᆞᆫ ᄂᆞᅘᆞ가 ‘우리 사람’("our people")이라는 뜻인 내력 또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Thục Chế와 Thục Phán 이전, BC 6세기 베트남에 Tân 씨 왕조(c. 660 – c. 569 B.C.)를 세운 Đức Quân Lang 또한 마찬가지로 군상/군경(軍商/軍經) 조직을 이끈 지휘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Đức과 Thục은 9개의 tukkhums을 이끈 말뚝을 칭하는 말로 ‘ᄃᆞᆨ’으로 표현할 수 있고, ‘ᄃᆞᆨ/ᄐᆞᆨ’의 뜻은 원(原)인도유럽어원 *deuk- : "to lead."에서 구할 수 있다. 이것의 파생어가 라틴어 dux (genitive ducis) "leader, commander," in Late Latin "governor of a province," ducere "to lead;"이다.
그리고 체첸의 연접하여 다게스탄(Dagestan)이 있는데, Dagestan은 터키어 dağ ( 'mountain')과 페르시아 어 –stan('land')에서 유래하였으니, ‘산(山)의 나라’인데, dağ의 어원 *tēga (“high; top, mountain”)(Old Turkic tāɣ/tau, from Proto-Turkic *tāu, *tāɣ, *dāɣ (“mountain”), *dāg (“mountain”), possibly from Proto-Altaic *tēga (“high; top, mountain”)를 참고하면, ‘ᄃᆞᆨ/ᄐᆞᆨ’의 뜻은 *tēga (“high; top, mountain”)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 나라의 주요한 인종은 Avar, Dargin, Kumyk, Lezgian, Laks, Azerbaijani, Tabasaran, and Chechen 족들이다. 다게스탄 역시 체첸과 같은 사회조직 원리로 운영되는 나라로 보면 된다.
‘ᄃᆞᆨ/ᄐᆞᆨ’의 뜻 원(原)인도유럽어원 *deuk- : "to lead."과 dağ의 어원 *tēga (“high; top, mountain”)을 통해, 베트남에 왕조를 이룬 용병들은 다게스탄과 체첸 일대 출신들이었고, 그들의 조상 중에 BC 6세기 베트남 Tân 씨 왕조(c. 660 – c. 569 B.C.) Đức Quân Lang이 있다. 그는 대략 712 BC에 태어났는데, 660 BC 경에 왕조를 개창하였으니, 50여세에 왕이 된 것이다. 청동기 문화의 발전단계를 볼 적에 그는 다게스탄 부근에서 태어나, 베트남 지역으로 이주하여 나라를 세웠다고 보는 것이 나을 듯하다.
Tân 씨 왕조(c. 660 – c. 569 B.C.) 초기 베트남 청동북(Đông Sơn drums)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가야금, 괭과리, 징, 장구의 역사를 볼 적에 장구 형태의 청동북이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페르시아 문화권에서 처음 만들어졌을 것이고, 이 문화를 알고 있는 집단이 베트남으로 이주하여 동 손 문화 청동북(Đông Sơn drums)을 만든 것인데, 베트남 청동북이 처음 제작된 시기와 이란 서부 지역 Lorestān 주(州)와 Kermanshah에서 발견된 1000~650 BC의 대단히 세련된 Luristan 청동제품 (, "Lorestān", "Lorestāni")이 막을 내린 시기, Tân 씨 왕조(c. 660 – c. 569 B.C.)가 세워진 시기는 서로 일치한다.
이란 서부 지역의 청동문화는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Luristan Iron I는 1000 BC 경, Iron II는 900/800–750 BC 경, Iron III 는 750/725–650." BC 경으로 분류되는데, Iron III(750/725–650.")는 Đức Quân Lang이 태어난 712 BC와 일치한다. 즉 Đức Quân Lang은 이란 Luristan에서 다게스탄이 있는 사이의 어느 곳에서 태어났고, 그곳의 기존 세력 집단이 몰락하면서 새로운 지역 베트남 북부로 이주하여 왕조를 세운 것이다. 그래서 이방인이 세운 그의 왕조는 현지 지방 토착 세력들의 반란과 저항으로 시달리다가 막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Đức Quân Lang이 베트남 북부에 Tân 씨 왕조(c. 660 – c. 569 B.C.)를 세우고, 간척지 사업을 하면서 정교한 관개수로를 만들고 벼농사를 짓게 한 변화와 같은 일이, 한반도 아라가야의 출발지인 함안 일대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났었다. 함안군 가야읍 도항리 일대의 유적지에 BC 6세기 경 리(里)/읍락 규모의 소군장이 등장한 것이 보이는 유적이 있고(<김태식 연구 참고>), 상주시 일대 낙동면 낙동리와 화북면 등지의 청동기 유물에도 BC 7세기경부터 새로운 질서가 나타난 것으로 추정되는 변화가 있었다. 낙동면에는 낙동강을 타고 이주해온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아마 함안 도항리 일대의 변화와 같이 진행되었을 것이다. 상주시 일대 청동기 문화의 출현 시기는 이란 서부 지역 된 Luristan 청동제품 (, "Lorestān", "Lorestāni")이 막을 내린 시기(1000~650 BC)/Iron III(750/725–650.")와 일치한다. 이란 서부 Luristan 지역, 베트남 북부 지역, 한반도 함안/상주 지역의 변화는 거의 같은 시기에 진행된 것이다.
700 ~ 300 BC 시기 세계사의 가장 큰 사건은 700 BC에 있었던 세계적 기온급강하이다. 이를 계기로 기존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시대가 전개되었는데, 그 여파로 Luristan (1000~650 BC)/Iron III(750/725–650.")의 기존 질서는 무너졌고, 인도에서는 16대도시국가(Maha janapadas, 600−300 BC)가 등장했다가 알렉산더와 마우리아 왕조의 등장과 함께 퇴장하였다. 그리고 페르시아 제국(Achaemenid Empire ca. 550−330 BC)이 등장하였다가 거의 같은 시기에 퇴장하였다.
베트남과 한반도에서도 거의 같은 시기에 큰 변화가 있었는데, Đức Quân Lang이 베트남 북부에 Tân 씨 왕조(c. 660 – c. 569 B.C.)세운 것, Thục Phán이 Âu Lạc(甌 雒/甌 駱,257–179 BC)을 세운 것은 이러한 세계사의 흐름을 타고 일어난 것이다. 그러한 변화의 진원지는 아나톨리아 고원과 이란 고원 일대 청동기 문화권이었다. 그곳에서 인도, 베트남, 한반도로 변화의 물결이 쳐왔고, 사람들의 이주가 있었던 것인데, 그 때 앞장선 사람들이 ‘페르시아 용병’의 조상들이었다.
그래서 Đức Quân Lang의 성공 신화는 페르시아 문화권에서 널리 알려져 있었고, 그 뒤를 이어 성공한 것이 Thục Phán이 세운 Âu Lạc(甌 雒/甌 駱,257–179 BC)이다. 그는 Văn Lang(, Lạc Việt, 2524–258 BC)을 무너뜨릴 때 금구(金龜)를 타고 온 페르시아 용병들의 도움을 받았는데, 그 역시 이방인 용병출신이라 현지인들에게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그래서 나라를 세운지 100년도 되지 않아 중국인 Zhao Tuo(趙佗)/남월(南越, 203–137 BC)에게 무너졌는데, 그의 죽음에 관한 전설 중 한반도와 관련된 것이, 금구(金龜)를 타고 바다로 갔는데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해안 절경으로 손꼽히는 곳이 화진포(花津浦)인데, 이곳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광개토왕의 해중릉(海中陵) 전설이 있는 작은 섬 금구도(金龜島)가 있다. 지형이 거북이 같다 해서 붙은 이름이라지만, 금구도(金龜島)의 금구(金龜)는 페르시아 최정예 전함무역선의 이름이다. 금구(金龜)를 타고 다니는 페르시아 용병들은 Âu Lạc의 건국과정에 참여하였는데, 그들이 동해안에 왔었다는 뚜렷한 증거가 금구도이다.
금구도의 주인공이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신라 문무대왕의 해중릉으로 알려진 감포 앞 바다 작은 돌섬 또한 금구도(金龜島)로 볼 수 있으니, 화진포 금구도에는 광개토왕 정도의 인물이 묻힌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면 금구를 타고 이곳에 왔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남월의 조타는 한 무제 군대에게 패하고, 월남 땅을 떠나지 않고 죽었다. 조타에게 패한 Âu Lạc(甌雒/甌駱, 257~179 BC)의 건국자 An Dương Vương (安陽王, Vietnamese: [ʔaːn jɨəŋ vɨəŋ]) Thục Phán(蜀泮)은 금구의 도움을 받아 바다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무덤이 화진포 앞 금구도(金龜島)가 아닐까. 쿠로시오 해류의 흐름상 그가 베트남을 떠나서 갈 수 있었던 곳은 황해도 일대와 남해안과 동해안의 경계에 있는 감포 금구도/해중릉 주변, 그리고 동해안을 따라 올라가면 화진포 금구도 지역이 있다. Âu Lạc(甌雒/甌駱, 257~179 BC) 멸망 당시 조타의 남월(趙佗南越)과 성격이 비슷한 위만조선(衛滿朝鮮: 194 ~ 108 BC)이 평양 대동강 북쪽에 있었다. Thục Phán은 황해 해류를 타고 황해도로 갈 수는 있었지만,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여 안전을 위해 동해안 지역으로 갔고, 당시 이주민은 황해도와 화진포 북쪽 함경남도 함흥/영흥 일대로 가서 정착하였다. 함흥/영흥 지역은 낭림산맥이 북서풍을 막아주기 때문에 같은 위도상의 서해안 지역보다 따뜻하면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평야가 있는 곳이다. 화진포 금구도는 이런 배경에서 역사적 유물로 남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고, 여러 가지 정황상 이곳은 Thục Phán(蜀泮)의 무덤일 가능성이 많다.
충주의 독산(獨山), 정선(㫌善) 이씨, 화진포 금구도, 옹진군(甕津郡) 화산동리는 베트남 Âu Lạc(甌雒/甌駱, 257~179 BC)이 멸망하자 금구의 도움을 받아 바다로 간 Thục Phán(蜀泮)을 중심으로 서로 연결된다. 옹진군의 옹(甕[wèng독, 단지, 옹기 두레박, 술이나 젓을 담는 독, 장단을 맞추는 악기])은 ‘독:옹’으로 풀이되고, Âu Lạc(甌雒/甌駱)의 Âu(구(甌) (𤮥)는 1.small crock(단지, 항아리, 《英方》 (금속(金屬)의) 항아리; (화분(花盆)의 밑구멍을 막는) 사금파리. ① 《方》 검댕, 더럼, 때(soot, smut).② 비비면 벗겨져 떨어지는 안료.) 2.dockyard(조선소; 《英》 해군 공창(《美》 navy yard).), shipyard(조선소.) 으로 풀이된다. 옹진군 화산동리에는 Thục Phán(蜀泮)이 Âu Lạc(甌雒/甌駱)을 건국하는데 참여한 용병들의 해외 무역 조선소 기지가 있었던 곳이고, Thục Phán의 사업체와 그의 직원으로 볼 수 있는 베트남계 페르시아 용병들이 이곳에 거류하고 있었을 것이다.
화진포, 강릉, 하조대, 감포, 옹진군 화산리, 정선, 충주 독산에는 Thục Phán(蜀泮)과 관계있는 페르시아 용병 전함무역선의 항구와 거류지가 있었다. 그래서 그가 베트남에서 조타(趙佗)에게 패하자, 당시 지배층들은 금구를 타고 이미 그의 활동 기반이 갖추어져 있었던 한반도로 이주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죽어서 동해안의 가장 아름답고 안전한 화진포 금구도 해중릉으로 들어가 바다를 다니는 후손들을 지키는 용신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지금은 알려져 있지도 않은 과거의 일이 되었지만, 베트남 리 왕조(李朝) 시대까지는 전승되었었고, 이를 바탕으로 1226년 베트남 리 왕조(李朝)의 왕족 이용상(李龍祥)은 정란을 피하여 옹진군 화산으로 이주하였고, 중국 송으로 갔던 이양혼은 이듬해 경주로 와서 정착하였던 것이다.
경주는 감포와 울산으로 오갔던 전함무역선의 베트남계 페르시아 용병들의 후손들이 입실리(入室里)를 거쳐 정착하여 살고 있었던 곳이다. 그래서 베트남계 이씨들은 종족의 보존을 위해 화산과 경주, 두 곳으로 나뉘어 세거하였던 것이다. 나중에 이양혼의 9세손 이우원은 경주에서 정선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는데, 정선 또한 강릉/양양/삼척으로 왔던 전함무역선의 일부가 충주와 단양으로 다녔던 곳이다. 그래서 충주-정선 일대도 베트남계 용병들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던 곳이다.
고려시대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충주백(忠州伯)에 봉해졌던 이관(李/土寬)을 시조로 하는 충주 세거(世居) 이씨와 화산 이씨의 관계는 알 수 없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등의 여러 지리지에서 충주 지역의 성씨로 기록되지 않은 점으로 봐서 충주에서 별다른 세력을 갖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디지털충주문화대전:충주 이씨>”는 것은, 이들의 뿌리가 ‘화산 이씨-정선 이씨’와 같은 외래(,베트남?) 성씨 일 가능성이 있으니, 충주 이씨는 말 그대로 충주의 ‘독산(獨山)’이다.
이 지역들은 Âu Lạc 시절 또는 그 이전부터 베트남을 거점으로 하는 페르시아 용병 전함무역상들이 정착하였던 곳인데, 옹진군 화산리, 고성군 화진포에는 공통적으로 꽃:화(花)가 들어 있고, “황해도 봉산군 송산리와 배천군 석산리 등지에서 출토되는 것과 동일한 BC 2세기 경의 청동기·철기유물들이 출토된⟪신편 한국사:국사편찬위원회⟫” 함경남도의 함흥시 이화동(咸興梨花洞遺蹟)에도 꽃이 있다. 황해도 화산, 강원도 화진포, 함흥 이화의 화(花)는 페르시아 어 hsth(꽃술)와 관계있고, 이곳에는 금구 전함무역선을 운영하였던 페르시아 용병들이 거류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들에게 해당화의 hsth(꽃술)는 인생의 꽃 ‘화폐(貨幣)’를 의미하기에, 황해도 화산리동과 함흥 이화동, 화진포의 꽃은 베트남계 페르시아 용병과 관계되는 사람들이 이주하여 남긴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 베트남 사람들이 꽃을 좋아하고 많이 사서 장식하는 것과도 관련 있을 것이다.
강릉
강릉은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아온 곳이고, 청동기 유적도 있다. 일찍이 ‘예족이 살았고, BC 129 위만조선에 속했으나, BC 128 한(漢) 창해군의 일부로 소속→BC 108 임둔군→BC 75 낙랑동부도위→AD 30 동예’의 과정을 거쳤다. “가탐(賈耽)의 『고금군군지(古今郡國志)』에는 ‘지금 신라 북계인 명주(溟州)는 대개 예(濊)의 고국(古國)’이라고 되어 있다.『삼국사기』 「지리지」에 명주는 본시 고구려의 하서랑(河西良) 또는 하슬라(何瑟羅)였는데 후에 신라에 속하였다. ... 757년(경덕왕 16)에 명주라 명명되었다...1261년(원종 원년) 명주를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로 승격시켰다. 1263년(동왕 4년)에는 경흥도호부를 강릉도(江陵道)로 개칭하였다. 1308년(충렬왕 34)에 강릉부(江陵府)로 되었다.1389년(공양왕 원년)에는 강릉부를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로 승격하고 별호(別號)를 임영(臨瀛)이라 하였다....하슬라를 두고 예(濊)의 고국(古國)이니, 철국(鐵國)⋅예국(蘂國)⋅예국(濊國)⋅하슬라국(河瑟羅國) 등의 명칭이 상용되었던 것으로 보아 하슬라는 하나의 성읍국가(城邑國家) 또는 읍락국가(邑落國家)였음을 알게 한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강릉시⟫
이를 보면 ‘강릉(江陵)’은 1263년 붙여진 이름인데, 중국 호북성 강릉(江陵)의 이름에서 취했을 수 있다. 하지만 강릉에서 9번 군도를 타면 정선군 여량리으로 가고, ‘영월-단양-충주’로 이어진다. 충주 일대를 하가라도(下加羅都)로 칭했던 것과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의 굴포나루(屈浦나루), 경상남도 창원의 삼한 시대 골포국(骨浦國), 함경북도 굴포리 서포항동 굴포리유적(屈浦里遺蹟) 등, 바닷가의 주요 항구 지역에 ‘ᄀᆞᆯ’ 음의 지명이 있고, 굴(屈[qū])⦁골(骨[gǔ,gū])⦁고(古[gǔ])의 사성음이 같이 ‘ᄏᆞ’ 발음되는 것으로 미루어 , 강릉 일대는 예(濊)의 고국(古國) 시절에 ᄏᆞ/ᄏᆞん 또는 ᄀᆞんᄅᆞん/ᄀᆞᄅᆞん과 같은 이름으로 불렸던 적이 있었을 것이고, 이를 한자로 옮기면서 중국식 지명 ‘강릉’으로 한 듯하다.
그리고 “진한과 변한은 철산지로 유명하여 마한(馬韓)·낙랑군(樂浪郡)·대방군(帶方郡)·동예(東濊)·왜(倭) 등이 모두 이곳의 철을 사갔다고 한다”는 것을 통해, 강릉 고국(古國)과 창원 골포국(骨浦國)은 서로 관계있음을 알 수 있는데, 두 지역을 연결해준 것이 아마도 페르시아 전함무역선이었을 것이다. 강릉과 골포국 사이에 페르시아 전함무역선이 다녔고, 골포국의 관할권 가까운 지역의 사천 륵도(勒島)유적지(BC 2세기∼AD3세기)에서 스키타이계 남자와 많은 개의 유골, “한반도 남부에서 발견된 최고(最古)의 철제품인 대형·소형의 판상철부(板狀鐵斧)·철검편(鐵劍片)·녹각장병부철도자(鹿角裝柄付鐵刀子) 등 철기류의 출”되었다. 륵도의 무장한 남자는 페르시아 전함무역선 용병대장(?) 일 것이다.
그들의 출신이 무엇이었는지는 강릉 주변의 제왕산(帝王山, 841m)·능경봉(1,123m)·고루포기산(1,238m)의 이름을 통해 알 수 있다.
릉경봉/능경봉(凌頸[líng][jǐng,gěng])의 이름을 살펴보면,
凌頸(凌[líng]능가할 릉{능}; 능가하다, 깔보다, 범하다, 침범하다)
頸[jǐng,gěng] 목 경;목, 목덜미, 기물의 목 비슷한 부분, 멱, 목덜미의 앞부분)
릉경은 ‘침범(侵犯)전선(前線)’으로 해석되고, 凌頸[líng][jǐng,gěng]은 ‘ᄅᆞんᄀᆞん’으로 표기된다. 이는 전함무역선 정크(Junk,戎克船)의 戎克([róng]무기의 총칭, 병거(兵車)[kè]이기다, 능하다, 능히)의 음([róng][kè])과 훈 ‘충봉’(衝鋒 적진으로 기운차게 돌진함)과 통한다. 릉경봉의 이름은 전함무역선 戎克 용병의 기개를 잘 담고 있는데, 이는 제왕산성의 역사적 의미를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제왕산성:『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능항봉(凌項峰) 국유림에 있고, 강릉의 서남 약 4리 정선군 경계의 높은 봉에 있는 석성으로 주위 약 9백간(間)으로 붕괴되었으며,...제왕산성은 제왕산 정상인 능선부와 남사면에 발달된 두 개의 작은 골짜기의 위쪽에 축조되었다. 성 내부의 정상부는 북쪽과 동쪽을 조망하기에 적합하다... 제왕산성은 현재 자세한 문헌 자료는 없지만, 강릉으로 통하는 교통 요지를 조망할 수 있는 위치로서 정찰 및 연락 등 방어 초소 역할에 사용된 성으로 판단된다. ⟪디지털강릉문화대전:제왕산성⟫”
제왕산성이 능항봉(凌項[líng][xiàng]峰)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 기록은, 능경봉(凌頸[líng][jǐng,gěng])의 오기일 수도 있다. 능경봉은 고루포기산과 제왕산(帝王山) 사이에 있고, 고루포기산과 능경봉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왕산면을 지나 강릉 남대천을 이루고 동해로 흘러든다. 제왕산성은 북쪽과 동쪽을 조망하기에 적합한 군사기지로 설치된 것인데, 이를 누가 축성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강릉의 옛 이름 예국(蘂國)을 통해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다.
우선 예국(蘂國[ruǐ][guó])의 예(蘂[ruǐ])에는 마음 심(心[xīn])이 셋(心心心) 있다. 쇄(惢[ruǐ,suǒ,zuī,zuǐ]꽃술, 초목이 더부룩 나는 모양, 향초의 이름, 열매, 꽃, 꽃이 더부룩한 모양, 蕊와 同字,)는 꽃의 핵심인 꽃술이 모여 있는 것이고, 그것을 나무에 걸어 표현한 것이 예(橤[ruǐ]꽃술, 드리우다, 축 늘어지다), 예(蘂[ruǐ]꽃술, 초목이 더부룩 나는 모양, 향초 이름, 蕊의 俗字)이다.
쇄(惢)의 음훈([ruǐ,suǒ,zuī,zuǐ]心[xīn]三[sān])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다리우스 1세가 자신을 "χyaθiya χyaθiynm"로 칭한 것에서 비롯된 Šāh, or Šāhanšāh (King of Kings)/ Šāhe Šāhān(, "King of Kings" or "Emperor")를 나타낸 것이고, 쇄(惢)의 한국어 음독은 Šāh를 음독한 것이다. 그리고 蘂[ruǐ]를 달리 표현한 것이 한자어 정선(㫌善)의 㫌의 훈에 보이는(“음악(音樂)에 쓰이는 의물(儀物)의 하나 둥글고 큰 유소(流蘇) 셋을 긴 대에 드리워 무무(武舞)에 썼음”) 긴 대에 드리워진 유소 셋이다. 이는 천자가 깃대 끝에 새의 깃으로 꾸민 장목을 늘어뜨린 기(旗), 왕명을 받은 신하에게 신임의 표시(表示)로 주던 기, 천자(天子)가 사기를 고무할 때 쓰던 기 이고, 천자의 권위를 나타낸다.
그래서 蘂[ruǐ]의 사성음 [ruǐ]는 왕을 뜻하는 라틴어 rex, 프랑스 어 roi와 어원이 같을 것인데, 의미상으로는 고대 프랑크 어 "fame" (hlōd) and "warrior" (wīg)(뜻:famous warrior or "famous in battle")에서 유래된 프랑스 남자 이름이면서 왕의 칭호에 사용된 Louis(에스파냐어: Luis / 영어: Lewes, Lewis / 포르투갈어: Luís)가 더 어울린다.
제왕산성을 지키는 능경봉의 의미는 蘂[ruǐ]와 고대 프랑크 어 "fame" (hlōd) and "warrior" (wīg)(뜻:famous warrior or "famous in battle")에서 유래된 루이(Louis)에 잘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릉경봉의 릉경(凌頸[líng][jǐng,gěng])의 음훈은 전함무역선 정크(Junk,戎克船)의 다른 이름 戎克([róng][kè])로도 나타내어지고, 이들 단어는 PIE root *reg- "move in a straight line," with derivatives meaning "to direct in a straight line," thus "to lead, rule"Sanskrit raj- "a king, a leader," rjyati "he stretches himself," riag "torture" (by racking); Avestan razeyeiti "directs," raštva- "directed, arranged, straight;" Persian rahst "right, correct;" Latin regere "to rule, direct, lead, govern," ,Latin rex (genitive regis) "a king,",;" Old Irish ri "king," genitive rig와 연결된다. 즉 페르시아 문화권의 전함무역선 용병들이 강릉에 거류하면서 남긴 것이 ‘릉경봉’이란 지명과 ‘예국(蘂國)’이다.
릉경봉을 지나 정선 지역으로 간 사람들이 남긴 지명이 정선(㫌善)인데, 이 단어에는 정크(Junk,戎克船)와 蘂[ruǐ]의 의미가 다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정선의 가리왕산(加里旺山)에 대궐 터가 있다. 이는 ‘제왕산성, 제왕산(帝王山), 고루포기산’과 함께 정크(Junk,戎克船)를 타고 온 페르시아 전함무역선 용병들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데, Teipan-Khelli라는 단어는 참고할 만하다.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역대 군주들은 샤, 샤한샤(χyaθiya χyaθiynm)이외에도 위대한 왕, 대왕(χyaθiya Vazrka)라 하는 칭호도 사용했다. χyaθiya Vazrka의 Vazrka는 Vazrka=Vaz+r+ka 로 분석되고, Vaz는 Proto-Iranian *baga- "god; lord", Proto-Turkic root *bāj- "rich, richness, wealth; prince; husband", Proto-Altaic *bēǯu "numerous, great", the Slavic noun boj "battle.", 와 관계있다.
Vazrka=Vaz+r+ka와 관련 있는 말이 고루포기산의 이름에 보이는 ‘포기’이다. 이는
*baga- *bāj- *bēǯu *boj를 나타낸 말이고, 이를 한자어로 옮긴 것이 가리왕산의 ‘왕’이다. 그래서 고루포기산의 ‘고루’는 가리왕산의 ‘가리’에 해당하고, 이는 강릉의 이름에 들어 있는 ‘ᄀᆞᄅᆞ’이다.
그러면 대관령의 발왕산(發旺山)의 명칭 ‘발왕’의 ‘발’은 가리왕산의 ‘가리’와 같은 말이고, 이는 Vazrka=Vaz+r+ka의 Vazr에 해당한다. 발(發[fā])의 훈 “쏘다, 가다, 떠나다, 보내다, 파견하다”를 참고하면, 발왕산은 *boj "battle."에 파견된 사령관 정도의 의미로 해석된다. 아마 그는 페르시아 황제로부터 유소 셋이 달린 정(㫌) 깃발을 하사받고, 제왕산성을 지키면서 강릉과 정선 일대를 관장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페르시아 전함무역선이 강릉을 오갔던 시절을 보여주는 또 다른 지명이 하슬라(何瑟羅[hé][sè][luó])이고, 이것의 중국식 명칭이 하서량(河西良[hé][xī][liáng])이다. 하서량과 하슬라에서 량(良[liáng])은 베트남 어로 làng이고, làng은 영어로 village(마을, 촌락《hamlet보다 크고 town보다 작음》), 페르시아 어로 rwstạ 이다. 이를 라(羅[luó])로 나타냈다. 하서량과 하슬라에는 베트남 어 làng과 페르시아 어 rwstạ가 들어있다. 이는 베트남 일대에서 활동하던 페르시아 전함무역선이 강릉 일대에 머물면서 남긴 것이 하슬라이고, 이를 중국식으로 표현한 것이 하서량이라는 것이니, 페르시아 용병들 중에 한자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명(明) 대의 왜구 중에 중국인이 섞여 있었던 것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하슬라의 라(羅)가 페르시아 어로 rwstạ를 나타낸다는 것은 페르시아 어 hsth(꽃술)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꽃의 핵심부가 꽃술(hsth)이니, hsth는 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의 꽃 중의 꽃, 해당화(a sweet brier)의 꽃술(hsth)이라는 말로 통용되었을 것이다. hsth를 한자어로 번역한 것이 해당화(海棠花)의 해당(海棠)이다. 해당화는 영어로 a sweet brier로 번역되고, 영어 brier, 페르시아 어 brạdr는 들장미를 뜻하는데, 바다의 장미가 해당화인 것이다.
페르시아 용병들로 구성된 군상(軍商)들은 대형 전함무역선이 쉽게 오갈 수 있는 동해안을 즐겨 사용하였고, 해당화의 꽃술에 해당하는 강릉 지역을 하슬라로 불렀던 것이다. 그들은 동해안으로 와서 일반적인 무역거래보다는, 강철을 단단하게 가공할 수 있는 붕사(‘ṭānkaṇa/Borax/페르시아 어 burah, Borah/터키어 bor/영어 boron’)와 같은 광물질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듯하다. 꽃 중의 꽃 해당화(a sweet brier)의 영어 brier, 페르시아 어 brạdr의 기본음이 Borax(붕사)의 기본음과 같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철을 강하게 만드는 붕사는 바닥이 드러나는 것을 반복하는 호수 지역에서 주로 발견되는데, 강릉의 경포호, 속초 청초호, 영랑호, 고성군 화진포(호), 두만 강 하구 경흥군의 함림산 부근 둘레 5㎞ 정도의 호수 적지(赤池)와 만포(晩浦)·서번포(西藩浦)·동번포(東藩浦) 등의 석호(潟湖) 등은 주목되는 곳이다. 경흥면의 보로지봉(保老地峰, 819m)의 이름 유래는 정확히 알기 힘들지만, 보로지(保老地[bǎo][lǎo][dì,dė,di])의 사성음에 페르시아 어 brạdr(해당화)의 음과 Borax(붕사)의 음이 있다는 것은, 이 지역에 페르시아 전함무역선이 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흥면 이외에도 함흥 이화동유적(咸興梨花洞遺蹟)의 세형동검(細形銅劍)·동모(銅鉾), 이성계의 고향 영흥(永興)읍 영동리, 소사리 등 지역의 청동기 시대의 주거지·동모(銅鉾)·동검·다뉴경(多紐鏡), 용산리의 초기 철기시대 유적, 등 지역은 전함무역선과 관계있는 지역으로 보인다.
hsth가 지명에 사용된 또 다른 예는 하슬라와 삼척 일대를 중심으로 가야의 김수로 시절에 있었던 실직국(悉直國[xī][zhí][guó])과 양양 하조대(河趙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실질국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는데, 나라 이름 실직의 사성음 [xī][zhí]는 ‘ᅘᆞᄍᆞ’로 표기되고, 이는 하조(河趙[hé][zhào])의 표기로도 된다. ‘ᅘᆞᄍᆞ’의 뜻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 실직(悉直)(悉[xī]다, 모두, 남김없이, 다하다, 끝까지 궁구하다, 다 갖추다)(直[zhí]곧다, 바른 도(道), 또는 바른 행위, 바루다, 고치다, 펴다, 억울함을 씻다)의 훈이다.
바른 도리를 끝까지 궁구하는 것, 이러한 ‘ᅘᆞᄍᆞ’의 뜻을 부족 명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프리카 탄자니아 Serengeti 고원에서 수렵과 채집을 하며 살고 있는 Hadza, or Hadzabe 족이다. Hadzapi (,"they are Hadza")는 Hadza(Hadzabe'e)로 볼 수 있고, 이는 이들이 ‘Hadza 신 또는 Hadza를 믿는 무리’라는 뜻이다. ‘Hadza’는 ‘ᄒᆞᄍᆞ’로 발음되지만, 실제음은 ‘ᅘᆞ+=+za:존칭접미사’로 분석된다. 이 말은 하늘의 뜻을 탐구한다는 Hatata (Ge'ez: ሓተታ ḥatäta, "inquiry")와 알을 깨고 나온다는 뜻의 영어 hatch, 순례자를 뜻하는 아랍 어 Ạl-ḥjạj와 관계있다.
‘ᅘᆞᄍᆞ’ Hadza/실직(悉直[xī][zhí])/하조(河趙[hé][zhào]이 세상과 진리가 있는 저 세상 사이를 흐르는 河를 건너 뛰어 넘다)야 말로 삶의 최고 가치일 것이고, 정수(精髓)이다. 그것을 표현한 것이 꽃을 대표하는 모란과 해당화(海棠花[hǎi][táng][huā])의 핵심부 꽃술을 나타내는 페르시아 어 hsth이다. 동해안의 실직국과 하조대는 구석기 시절부터 그런 문화가 이어져 왔었고, 나중에 페르시아 문화권에서 그런 문화를 이어온 사람들이 전함무역선을 타고 와서 정착하면서 실직국(悉直國)이란 이름으로 나라를 세웠고, 동해 양양 바다에 해당화 꽃술과 같이 생긴 바위를 보고 hsth로 불렀고, 그것이 하조대라는 이름으로 남게 된 것이다.
하조대는 동해안에서도 가장 손꼽히는 절경인데, 바다 위로 솟은 바위의 모습은 바다의 꽃술이고, hsth 라는 단어와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이다. 하조대의 유래에는 하륜과 조준이 머물렀다는 설, 하씨 집안 총각과 조씨 집안 두 처녀 사이의 이루지 못할 연애 설이 있는데, 하조대의 모습은 바다에 피어있는 해당화(海棠花[hǎi][táng][huā])의 꽃술 hsth과 같으니, hsth를 음역한 것이 ‘하조대’‘하슬라’이다.
전설의 ‘하씨 집안 총각과 조씨 집안 두 처녀’는 조타(趙佗 (ca. 240 BC ~ 137 BC (aged 103)/재위 203–137 BC)와 관계있다. 조타가 남월(南越Namzyied, or Nam Viet, Nanyue)을 건국하고 통합한 Âu Lạc 지역은 나중에 전한(前漢) 무제의 9군 중 하나인 교지(交趾, 交阯, Giao-chỉ))로 되었고, 이 지역을 후한(後漢) 교지 태수 소정(蘇正)이 통치하게 되었다. 그의 폭정에 항거하여 베트남 독립정신의 상징적 존재인 Trưng Trắc (징측徵側) and Trưng Nhị (징이徵貳) 자매가 Lĩnh Nam 왕국(AD 40~43)을 세웠으나, 후한 마원(馬援)에게 진멸(殄滅)당했다. 당시 많은 베트남 교지 사람들이 배를 타고 해외로 이주하였는데, 그들의 일부가 하조대 일대에 정착한 것이다. 두 여자가 조씨(趙氏)로 된 것은, 조타(趙佗)가 세운 남월의 교지 출신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하씨(河氏) 집안은 아마도 당시 두 자매의 항거를 진압하는데 하서(河西) 지방 사람들이 한의 용병으로 참여하였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베트남을 탈출하는데 많은 기여를 한 것이, Âu Lạc을 건국하는데 도움을 주었던 페르시아 용병의 전함무역선 금구(金龜)였다. 그들은 후한 시절 이전부터 인도에서 동남아시아와 한반도 지역을 오가면서 무역을 하였고, 해외에 교두보(Karum (Akkadian: kārum "quay, port, commercial district", plural kārū, from Sumerian kar "fortification (of a harbor), break-water") is the name given to ancient Assyrian trade posts in Anatolia (modern Turkey) from the 20th to 18th centuries BC. )를 확보해두고 있었기 때문에, Trưng Trắc (징측徵側) and Trưng Nhị (징이徵貳) 자매의 사건이 일어나자, 베트남 교지 사람들을 한반도로 이주시킨 것이다.
하조대(hsth) 일대는 그 이주 지역 중의 한 곳이고, 이 곳 외에 원산, 함흥, 영흥, 경흥 등 동해안의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은 모두 이주지역에 해당된다. 이성계의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운 조영무와 같은 영흥 조씨(趙氏), 조지수(趙之壽)와 같이 덕원부(德源府) 용진현(龍津縣 : 현 함경남도 문천시, 원산시 일대)에 세거하다가 본적지를 옮긴 한양 조씨, 이들은 모두 한국 성씨 ‘조(趙)’로 분류되지만, 그 원류는 남월 조타 집안과 관련 있다고 보면 된다. 즉 하조대의 ‘조(趙)’는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슬라’에는 페르시아 전함무역선의 사연이 담겨 있는데, 다른 이름 ‘하서량(河西良)’에는 한(漢)이 이 지역으로 진출한 내력이 담겨 있다.
하서(河西)라는 단어는 중국 간쑤 성[甘肅省] 서북부에 있는 하서회랑(河西回廊)에서 볼 수 있는데, 수와 당 시대 이후 이 일대에는 하서국(河西國: 티베트계통의 탕구트黨項), 탕구트(黨項)의 서하(西夏)가 있었다. 한 무제는 남월을 무너뜨린 후 위만조선을 공격하여 한4군을 설치하였는데, 이곳을 방위하는 군사들을 한인(漢人) 이외에 다양한 지역의 용병들을 이용하였고, ‘하서량’ 이라는 단어를 보면, 하서회랑(河西回廊) 지역 사람들이 많았던 듯하다. 이 지역 사람들은 후한 시절에도 계속 주둔하였는데, 그들과 관련된 것이 동예의 특산물로 꼽히는 과하마(果下馬)이다.
한(漢)은 ‘하서량(河西良[hé][xī][liáng])’을 통해, 베트남 북부 쿤룬산맥 산악 지대에서 하서회랑에 걸쳐 살았던 탕구트(黨項) 족이 페르시아 용병부대의 일원으로 왔다는 것을 밝혔고, ‘하슬라(何瑟羅)’를 통해 이곳의 지형이 고대 중국의 25현 큰 거문고(瑟)와 같음을 알렸다. 그리고 예국(蘂國)의 ‘예(蘂[ruǐ])’에는 주의 제후국이었다가 진(秦)목공(穆公)의 공격을 받아 멸망한(BC 640 또는 BC 658) 예국(芮国(芮[ruì],Wade–Giles: Jui, 瑞와 同字)의 사연을 담아 두었다. 예(蘂)는 서(瑞[ruì]상서, 길조, 경사스럽다, 홀(笏), 천자가 제후를 봉할 때 주는 홀(圭))와 같은 글자로 사용되는데, 한국어 독음 ‘서(瑞)’에는 ‘쇄(惢[ruǐ,suǒ,zuī,zuǐ])’의 음훈이 담겨있지만, 이것의 사성음 [ruì]에는 예국(芮国)의 예(芮[ruì])의 음이 있고, 단어의 훈(상서, 길조, 경사스럽다, 홀(笏), 천자가 제후를 봉할 때 주는 홀(圭))에는 예국(蘂國)이 예국(芮国)과 같이, 한(漢) 천자의 제후국이라는 것을 담아 둔 것이다.
한(漢)의 ‘하서량(河西良[hé][xī][liáng])’과 탕구트(黨項) 족의 관계는, 한 이후의 기록을 통해 확인해볼 수 있다.
(동)예국의 남녀는 모두 곡령(曲領)을 입고, 남자들은 허리에 넓이가 여러 치나 되는 은화(銀花) 장식물을 차고, 세 길이나 되는 장창을 사용하고, 이 창을 여럿이서 사용하기도 하며, 보전(步戰)에 능하다. 이들의 모습은 Hoplites (Greek: Ὁπλιτης)로 불린 고대 그리스 시민군 또는 박트리아 지역의 Greco-Bacatria 군사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도 보인다. 이 지역 일대 사람들은 한 때 페르시아의 용병이었고, 나중에 파르티아의 용병이었고, 그리고 한(漢)의 용병으로 낙랑군⦁대방군⦁동예 지역에 주둔하였는데, 그들의 후손으로 볼 수 있는 이들이 《수서(隋書)》에 탕구트(党項, Tangut)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하서회랑 지역의 유목민들이다.
이들 중 평하부(平夏部) 사람들은 당말 황소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우고, 당 황실의 성씨인 이씨(李氏)를 하사받았다. 이들과 관계있는 유적이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구봉산 정상에 축성된 당항성(黨項城), 당항성(党項城), 화성당성(華城唐城)으로 불리는 삼국시대의 산성이다. 이 성의 이름을 볼 적에 이곳에는 탕구트(党項, Tangut) 족 출신의 당군(唐軍)이 머물렀던 적이 있었을 것이고, 이와 유사한 성격의 지명이, 경남 남해당항리(南海唐項里), 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 성산리와 경상남도 고성군 영오면 오서리에 걸쳐 있는 당항산(唐項山), 경남 고성군 회화면과 동해면 사이의 당항만 당항포(唐項浦)가 있다.
당항포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후한과의 교역품이 많이 출토된 창원 다호리 유적지가 있다. 당은 후한이 동예 강릉을 하서량으로 부르면서 관리하였던 것을 기록을 통해 알고, 한반도 남부를 통제 관리하면서 무역거래를 할 수 있는 곳으로, 서해의 화성시 당항성, 남해의 고성군 당항포를 운영하였던 것이다. 이곳의 지명을 통해 이곳에는 아마도 탕구트 족 평하부(平夏部) 사람들이 무역소 경비병으로 주둔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당이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할 적에 파견되었던 병력의 일부였을 것인데, 당이 탕구트 용병을 활용한 방법은 한이 하서회랑 지역의 하서군대를 강릉/하서량 지역에서 활용한 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
페르시아 전함무역선의 용병이 강릉 일대에 제왕산성을 쌓고 거류한 이유 중의 하나로, 인근의 양양은 남한 지역 9대 철광 산지였고, 이곳에 갈렴석이 섞여 매장되어있었다는 것과 “강동(변내)·왕산·옥계면 등지에서 무연탄이 생산되었으나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에 의하여 쇠퇴되었다. 석회석이 옥계면, 규사가 주문진읍에서 생산된다.” 는 것을 들 수 있다. 강릉이 철국(鐵國)으로 기록되었던 것은, 이러한 자원을 이용해 철을 생산하였고, 부족한 것은 ‘정선-단양-충주’ 노선을 이용해 충주의 풍부한 철제품을 구입하여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곳은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곳이어서 제왕의 군대가 주둔하면서 지켜야하는 곳이었기에, 제왕산성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당시 제왕과 관련된 곳이, 무연탄이 매장되어 있는 강동(변내)·왕산·옥계면 등지인데, 그 중에서도 제왕산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왕산면 도마리에는 “새재마을, 도마1리, 돌탑마을에 각 한 곳씩 3개의 서낭당이 있다. 이곳의 제의는 성황제(城隍祭)라고 하며 성황지신·토지지신·여역지신을 모신다.<디지털강릉문화대전:왕산면 도마리 서낭당>”
도마리(都麻里)의 이름은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도마리(道馬里), 경상남도 남해군 고현면 도마리(都馬里)<위키백과:도마리>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와 음이 유사한 것으로 대마도(對馬島)와 서해 백령도의 두모진(豆毛鎭, 頭毛鎭)/두무진(頭武鎭), 대마도(大馬島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대마도리에 있는 섬)가 있다.
도마리의 문화적 바탕에는 수메르 문명의 Girsu 국의 신이었던 Damu(문자적 직역 "어린이")가 있다. 수메르 어 Dumuzid (DUMU.ZI(D), "faithful or true son"), 그는 Enki와 Nininsinna의 아들( He is the son of Enki and Nininsinna, or Bau and Ninurta)로, 자연계의 순환과 식물의 생장과 재생을 담당한 신이었는데, 나중에 두무지 숭배와 융합되었다. 두무지는 수메르의 풍요와 식물의 생장의 신이었는데, 원래 목초지의 신이었고, BC 3000년 무렵부터 있었다. 기록상으로는 2600−2334 경 BC에 나타났고, 2000−1000 BC에 아시리아로 전파되면서 농경신으로 전환된 듯하다. 아시리아의 ᄃᆞᄆᆞ 문화는 초원과 해양으로 전파되었고, 그 흔적의 일부로 도마리가 있는 것이다. 이곳에 ᄃᆞᄆᆞ 문화를 전한 이들이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제왕산성을 고려하면, 아마도 페르시아 전함무역선의 용병들이 전한 것이 아닌가한다. 그리고 도마(都麻)는 주몽(朱蒙)의 다른 명칭 추모(鄒牟)·상해(象解)·추몽(鄒蒙)·중모(中牟)·중모(仲牟)·도모(都牟),에서 볼 수 있으니, 나중에 고구려 군대가 이곳에 주둔한 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 외 지역
주요 광물 자원을 찾아 페르시아 전함무역선이 다녔던 곳을 강릉 이외 동해안의 다른 지역에서 찾아본다.
황해도와 함경도의 갈렴석 산지는 1900 년대에 처음 알려진 것이 아니고, 한반도 지역에 청동기-철기 문화가 전개되면서, 이미 활용된 지역이었다. 황해도 지역은 월(越)/베트남에서 이주하는 사람들이 집중 정착하는 곳이었다. 해류의 흐름상 그곳에 정착해야 했지만, 서해안의 많은 지역 중 황해도를 고집한 것은, 페르시아 군상들이 파악하였던 갈렴석이 있는 황해도에 매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경우는 함경도에서 볼 수 있다.
함경도의 청동기⦁철기 유물이 가장 많이 출토된 곳은 함흥과 영흥 일대이다. 함흥 이화동 유적지를 중심으로 남북 100Km 정도의 거리 안에 밀집되어 있는데, 이곳을 임둔(臨屯)의 중심지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곳 유물의 성격은 ‘함경남도의 함흥시 이화동 등지에서는 황해도 봉산군 송산리와 배천군 석산리 등지에서 출토되는 것과 동일한 BC 2세기 경의 청동기·철기유물들이 출토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유추해낼 수 있다. 당시 베트남에서는 Âu Lạc(257~179 BC)이 등장하였다가 무너졌고, Làng Cả 청동제작소(382 ~195 BC)가 문을 닫는 정치적 대변동이 있었다. 그들은 바다를 건너 한반도 황해도와 함경도, 그리고 충주 일대로 이주하였었고, 그곳에는 중요한 갈렴석, 형석, 석회석, 제철 원료가 있었다.
황해도 옹진군 화산 이씨는 고려 시대에 귀화한 베트남계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들이 오기 전 BC 2~1세기 경에 이곳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이 봉산군 청동기 유물을 제작하였었고, 정선-단양-충주 지역으로 진출하여 터를 잡았었다. 함경도 지역으로 이주하였던 사람들은 함경남도 함흥과 영흥 일대에 정착하였는데, 당시 상황을 알려주는 것이 함흥시 이화동 청동유물이다. 이곳 주변에 석기시대 유물은 없지만, 영흥읍 용동리, 용산리, 소라리 등의 청동기 시대 유적지와 동모, 동검, 다뉴세문경 등의 유물이 있다. 용산리에서는 초기 철기시대 유물도 발굴되었다. 이를 통해 청동기 후기에 외부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영흥평야를 중심으로 정착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조선왕조 건국자 이성계의 고향인 영흥은 낭림산맥(狼林山脈)이 북서풍을 막아주어서 같은 위도 상의 평안도 서부 해안지방보다 온화하다.
영흥군과 북쪽으로 인접한 고원군(高原郡) 또한 같은 자연환경이어서 일찍부터 사람들이 정착하였는데, 군내면 조양리 봉황산록에는 석기시대 유적지가 있다. 이는 고원군이 처음 중심지였고, 나중에 영흥군으로 새로운 사람들이 이주하였다는 것이다. 고원군의 부래산은 원래 평안남도 양덕의 산인데, 고원 쪽으로 날아와서 명산이 되었기에, 양덕 군수가 산세(山稅)를 받아갔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 단양 도담삼봉이 정선에서 떠내려 왔기에, 정선에서 세를 받아갔다는 것이 있다.
부래산의 이야기는 평안남도의 양덕에서 이곳을 관리하였다는 것을 뜻하는데, 고원군은 함경남도의 삼거리로 불리는 교통의 중심지이다. 이곳을 장악하면 함경남도를 장악할 수 있으니, 평양에 정치중심지를 둔 세력들은 모두 관심을 가질 곳이다. 그래서 고조선 시절부터 고원군은 중요시되었던 곳이었는데, 위만 조선을 무너뜨린 한(漢) 역시 낙랑군에서 이곳을 통제하였고, 이곳의 남쪽이 낙랑군 동부도위, 동예이었다. 고원과 인접한 영흥은 훗날 몽고의 쌍성총관부가 설치된 군사적 요충지로 활용되었다. 그래서 부래산 이야기는 고조선 또는 낙랑군 시절부터 평양에서 양덕과 고원, 영흥을 통제하였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곳에는 질 좋은 무연탄과 금⦁은⦁동⦁연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
그리고 부래산 북쪽에 야광석(夜光石)이 많이 있어, 고을 수령들이 매일 밤 이곳으로 놀러오는 것에 지친 허씨네가 야광석을 묻어 버린 후 집안이 몰락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야광석은 어쩌면 형석(螢石)일 수도 있을 것이다. 영흥군 횡천면 산성리의 ‘고철옹성지(古鐵甕城址)라는 토성은, 이곳에서 철을 제작하였던 적이 있었다는 것이고, 야광석/형석은 제철에 필요한 자원이다.
이렇게 보면 함흥 영흥 고원 일대는 낭림산맥이 막아주는 비교적 온화한 기후조건, 함흥평야, 영흥평야의 농지, 동해의 해산물, 무기제작에 필요한 지하자원 풍부한 지역이다. 동해안을 따라 여러 자원을 탐색하였던 사람들은, 이곳을 눈여겨보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외부의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BC 2세기 경 초기
베트남 Làng Cả 청동제작소(382 ~195 BC)가 문을 닫고, Âu Lạc(257~179 BC)이 무너지면서 부터였다. 이 시기부터 이곳 일대에는 청동기 유물이 집중적으로 제작되었는데, 대표적인 곳이 BC 2세기 전반기로 추정되는 함흥시 이화동 유적(咸興梨花洞遺蹟)이다.
유물의 시기로 보면, 이곳은 Âu Lạc과 매우 관계가 깊은데, ‘이화(梨花)’라는 지명은 베트남 북부 윈난(雲南) 접경지역에도 있다. 그곳을 거쳐 베트남 중심부로 내려가면 Làng Cả 유적지가 있고, Làng Cả는 전주(全州)로 의미 번역된다. Làng Cả에서 함흥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이 있었든지, 이화(梨花)가 지니는 문화적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함흥에 있었다는 것인데, 이성계의 고향이 이곳에서 멀지않은 영흥이다. 일단 베트남 북부에 ‘이화(Lê Hoa 梨花)’라는 지명이 있다는 것을 통해, ‘이화동-영흥’ 일대는 베트남 북부 지역에서 활동하던 페르시아 용병 출신들이 전함무역선을 타고 이주 정착한 곳임을 알 수 있다.
리화(梨花)
리화(梨花[lí][huā])는 전주 이씨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 왕조 왕실의 상징인데, 배나무 꽃이라는 뜻이고, 일본어로는 리카(りか)로 음독된다. 리카(りか梨花) 발음은 베트남 어 Lê(배) cây(나무), 梨[lí])=利[lì]+木(ki<일본어>, khe<조지아 어>), 네팔 어 나무(rūkha)에서 볼 수 있다. 이 단어는 BC 2세기 전반기로 추정되는 함흥시 이화동 유적지(咸興梨花洞遺蹟地)의 지명에서도 볼 수 있다. ‘이화(梨花 Lê Hoa)’라는 지명은 베트남 북부 윈난(雲南) 접경지역에도 있다. 그곳을 거쳐 베트남 중심부로 내려가면 Làng Cả 청동기 유적지가 있고, Làng Cả는 전주(全州)로 의미 번역된다. 베트남에도 전주 이씨와 같은 한자를 사용하는 이씨(李자두나무, 자두, 별 이름, 옥관, 도리, 심부름꾼, 성氏)들의 리(李[lǐ]) 왕조가 있었다. 이들과 조선 이씨 왕조의 관계는 어떠한가.
아르메니아 어 나무(tsarr)에서 볼 수 있듯이, 수목숭배 시대에 있어서 나무는 하느님의 대리자(tsarr)이다. 그래서 황제수장은 짜르(tsarr)로 칭해진다. 힌디어 배(naashapaatee) 나무(ped)에서 naashapaatee(=naasha+paatee)는 중동/파르티아 지역의 왕을 뜻하는 ᄂᆞᄉᆞ(Naasha)와 나무(ped)의 합성어다. 이는 배나무가 왕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네팔어 나무(rūkha), 베트남 어 Lê(배) cây(나무)와 리카(りか梨花), 梨[lí])=利[lì]+木(ki<일본어>), 링고 (りんご 林檎릉금나무) 또한 왕을 상징한다.
리카(りか梨花), 링고(りんご)는 전함무역선을 칭하는 戎克([róng][kè])와도 발음이 같다. 이것은 리카동유적지(梨花洞遺蹟地)가 페르시아 황제가 운영하였던 전함무역선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고, 베트남의 ‘리화(梨花 Lê Hoa)’와 조선의 리카동유적지(梨花洞遺蹟地)에는 이들 용병들이 거주하였던 적이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우르크(Uruk=U+ruk)의 어원 ‘ᄅᆞᅘᆞ(Hebrew: אֶרֶךְ ‘Ereḥ; Ancient Greek: Ὀρχόη, translit. Orḥoē, Ὀρέχ Oreḥ’가 사용된 BC 3천 년대 The Uruk(ᄅᆞᅘᆞ>ᄅᆞᄏᆞ) period (ca. 4000 to 3100 BC)→The Jemdet Nasr(ᄂᆞᅘᆞ>ᄂᆞᄏᆞ) Period(circa 3100 BC — circa 2900 BC)와 이집트 제5왕조(BC 25-24세기) 때 태양신 ᄅᆞ 문화 Ra (/rɑː/ rꜥ or rˤ; ; rˤw; ri-a or ri-ia) or Re (/reɪ/; Coptic: ⲣⲏ, Rē)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고려할 때, ‘리카/ᄅᆞᆼᄏᆞ’ 문화의 출발지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인 듯하다. 이 지역의 ᄅᆞᅘᆞ 문화는 ‘아시리아→~~페르시아→파르티아’ 시절을 거치면서, 아나톨리아 고원, 중앙아시아와 인도, 동남아시아를 거쳐 한반도에 전해졌고, 그 뚜렷한 증거가 리카(りか梨花)이다. 그리고 유럽 지역으로도 전해졌다.
황금가지
왕을 상징하는 리카(りか梨花) 문화는 그리스 황금가지 문화와 만나면서 좀 더 세련되게 다듬어졌고, 페르시아 제국 시절 이 문화는 용병들 사이에 황금가지와 ‘월계수/월계관’으로 널리 회자되었고, 이는 그들이 중국 전국시대에 활동하면서 건목득자(建木得子) 십팔자(十八子)(=李)위왕(爲王)으로 번안되었다. 베트남과 조선의 이씨 왕조의 건국은, 이러한 역사 문화적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리카(りか梨花) 문화의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이탈리아의 리카인 Lucus’에 관한 것을 먼저 살펴보고 난 다음, 그것을 바탕으로 인도, 동남아시아를 거쳐 한반도 일대로 전해진 것을 정리한다.
라틴어 Lucus, nemus, silva, and saltus는 일반적으로 숲("forest, woodland, grove")을 뜻하는 단어인데, 이 중에 lux, lucis와 어원이 같은 lucus는 ‘빛, 정화(淨化)(a lucendo)’와 관계있는 신성한 작은 숲이다. 이것과 역시 정화성수( "clearing, holy grove.")를 뜻하는 고대 고지 독일어(OHG) lôh를 통해 ᄅᆞᄏᆞ(, lucus)의 원래 표기는 ᄅᆞᅘᆞ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lucus에서 유래된 고대 로마 종교 신화의 Lucina는 Vagitanus, Fabulinus, di nixi와 같은 아이들과 관련된 여러 신들 중에서도, 노동하는 여인들의 생활을 보호하는 아이들의 으뜸 여신이다.
빛과 관련 있는 나무 Lucus와 연관 있는 또 다른 성수(聖樹)는 Diana Nemorensis로 알려진 nemus이다. 이것은 이탈리아에서는 시적 영감이 떠오르는 정도의 숲을 의미하지만, 고대 켈트 족의 종교에 등장하는 nemeton은 종종 신성한 숲, 나무들이 서 있는 자연 상태의 신성한 공간이다. nemeton과 관련 있는 지명 Nemeta는 이베리아 반도의 Galicia, 스코틀랜드, 터키 중앙부에 보이고, 그리고 독일 Nemetes 부족과 그들의 여신 Nemetona의 이름에도 보인다. 이는 nemus가 성수(聖樹)였다는 것이고, 황금가지(The Golden Bough, James George Frazer) 신화에 등장하는 나무이다.
이 숲의 여신 Diana는 야생동물과 숲, 달을 관장하는 다산의 여신이다. Diana는 원(原)인도유럽어원 *d(e)y(e)w(,"bright sky" or "daylight")에서 유래된 말인데, 고대 라틴 작가 Varro and Cicero는 Dīāna의 어원을 월광(月光)과 연관 지었다. 달(,月,라틴어 luna)이 빛나는 것을 lucere라 하였고, 고대 이탈리아에서는 출산 시에 Juno Lucina에게 기도하였다. 이는 그리스 인들이 출산 시에 Diana(, the Light-bearer)를 부르는 것과 같다. 밤이 되면 태양빛은 어둠속으로 사라진다.(daylight (dies)) 고대 그리스 인들은 이를 일곱 행성들 중에 하나인 Diana가 빛을 데려가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임산부의 뱃속 어둠 같은 상황이 이제 막 태어나는 아이에게는 좋기 때문에, 사람들은 일곱(시), 아홉(시) 하는 숫자로 Diana를 부르면서, 출산의 시간을 맞출 수 있도록 기도하였다. 그래서 Diana는 달과 연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연의 디아나(,Diana Lucina)를 모시는 사제(The rex Nemorensis (Latin, "king of Nemi" or "king of the Grove")는 nemus(,"holy wood". ) 신성한 숲을 관리 통치하는데, 주인에게서 탈출하여 이곳으로 도망친 노예만이 숲의 (황금)가지를 꺾을 수 있고, 그 일을 한 자는 신성한 숲의 사제와 결투하여 그를 죽여야만, 다음 사제가 되어 살 수 있다. 이 숲에서는 그 일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 숲의 황금가지를 쥐고 있는 동안 그는 왕으로 살아 있고, 결투에 져서 놓치면 죽는 것이다. 그가 살아있으려면 나뭇가지를 찾기 힘든 어둠, 달의 시간이 길어야 좋다. 아이가 태어나는 것에 밤의 어둠이 좋듯이, 그의 생(生)에는 월(月)이 좋다. 그가 살려면 숲의 신 Diana에게 밤이 길도록 간절히 기도하여야 한다. 그래서 그는 출산의 신이자 숲의 신 Diana를 모시는 사제/왕 으로 살아가는 것이다.→도망친 노예(천자에게 매인 관리)가 주인을 배반하고 nemus(,"holy wood". )가 황금가지(goldn bough)를 꺾는다는 것은, 역린(逆鱗)으로 용을 죽이고 역성(易姓)혁명한다는 것이다.
승리한 자가 차지한 황금가지는 고대 그리스에서 월계수(月桂樹(Laurus nobilis)로 인식되어서, 올림픽 경기에서 승리한 자에게는 월계수 가지 잎으로 만든 월계관을 씌워주었다. 월계수는 (칼에 베어) 벌어진 상처를 아물게 하고, 야전에서 풀밭을 헤치고 다니다가 풀독에 올라 아픈 것을 치료하고, 스트레스를 줄이는 방향제의 민간 약제로 사용되었는데, 전쟁을 생업으로 삼는 용병들에게는 매우 소중한 식물이었고, 월계수관은 일종의 비상의약품이기도 하였다.
월계수, 계수나무는 지중해가 원산지이고, 한반도에서는 경남, 전남 지방에 주로 분포한다. 이는 기후 조건상 그런 점이 있지만, 고대에 이 지역으로 계수나무를 가지고 온 지중해 그리스 로마 문화인, 용병과 상인이 있었다는 것인데, 전국시대/삼한시대의 황금가지와 관련된 그들의 역사는 대체로 페르시아 용병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페르시아 용병들의 꿈이라고도 볼 수 있는 황금가지 주인공의 대표적 사례는 외조부의 나라 메디아를 무너뜨리고 아르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를 건국한 키루스(Kūruš) 2세와 그의 아버지 캄비세스 I세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아나톨리아고원과 이란 고원에서 페르시아 만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위치한 Anshan 지역의 왕 Cambyses I (고대 페르시아 어 Kambūǰiya, 아람어 Knbwzy; c.600~559 BC)는 원래 이 지역 낮은 가문의 관리였는데, 메디아 제국 아스티아게스 왕의 딸 만다나 공주와 결혼하면서 출세하게 되었다. 둘 사이에 태어난 키루스 2세는 Anshan의 통치자로 있다가 외조부의 나라 메디나를 무너뜨리고, 페르시아 제국을 건국하였다. 변방관리 출신 Cambyses I (,Kambūǰiya)의 아들 Kūruš가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가 된 것이다. 그때가 BC 549 전후였다.(,→이것에 관한 것은 한국사의 함경도 이성계와 원의 관리였던 아버지 이자춘을 연관하여 이해하면 된다)
Cambyses I는 메디아 왕의 관리/노예 신분이었지만, 전쟁 지휘 능력이 있었기에 공주와 결혼할 수 있었고, 사위가 된 다음 왕이 되었다. 그의 아들 키루스는 메디아 왕의 관리/노예는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메디아 왕조의 노예 장군 왕이었기에, 그 역시 노예 아닌 노예 신분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런 그가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가 된 것이다. 이렇게 황제의 돈에 팔려 스스로 노예 신분의 용병으로 고용된 자가, 왕을 죽이고 또는 왕위를 양위 받아 왕조를 개창하는, 이 문화의 밑에는 그리스의 Diana Nemorensis 신화에 나오는 숲의 왕/사제 문화가 깔려 있다. 캄비우스와 키루스 시대에는 이런 이야기가 일상적인 잡담 정도로 많이 돌아다녔고, ‘노예출신 황금가지 왕’은 전쟁이 빈번했던 시기에 능력 있는 자를 후계자로 선발하기 위한 일종의 시험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페르시아 용병들 사이에 회자되었던 이러한 ‘황금가지 왕’과 BC 5~3세기 세계최강대국 페르시아 캄비세스와 그의 아들 키루스의 이야기는 , ‘나도 왕이 될 수 있다→왕후장상이 어찌 씨앗이 따로 있는가’ 하는 희망의 씨앗이었고, 용병들이 가는 지역마다 전파되었을 것이다.
건목득자(建木得子)
한자문화권에서 접한 황금가지 신화는 월계수(月桂樹)로 번역되었다. 월계수의 월(月)은 디아나(,Diana Lucina) 신을 뜻하고, 계수는 계(桂)로 Lucus, nemus(,"holy wood". )이다.
桂 Min Nan (POJ): kùi//Old Chinese▼ (Zhengzhang): /*kʷeːs/ //일본어 2.the cinnamon or cassia tree. cassia(/ˈkas.si.a/): From Latin cassia (계피1.桂皮(植物名),“cinnamon”), from Ancient Greek κάσια (kásia), from Hebrew קציעה (QeTsi`aH), from Aramaic [Term?][1]. Compare Kezia.
계(桂)의 고대음을 보면, 이는 지도자를 뜻하는 ᄏᆞᄉᆞ(居西干)에서 비롯된 것으로 육계나무(ròu gùi;肉桂-)로 번역 사용되었다. ròu gùi 음은 Lucus와 리카(りか梨花)와 일치한다. 중국의 육계나무는 주로 운남, 광동과 광서 지역 남부에서 재배되는 것으로 보아, 서방에서 이 나무를 가지고 온 자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면서 전한 것이든지, 기존 있던 나무를 ‘나무 중의 나무’라는 의미로 ròu gùi 로 불렀을 수 있다. 그래서 Lucus 와 음이 같은 것이다.
이를 한자로 나타내면서 계(桂)로 표기하였는데, 桂=木 +圭이고, 규(圭)는 옥으로 만든 홀(笏)로, 천자가 제후를 봉하거나 신을 모실 때 사용하였으니, 황금가지/桂=木+圭를 꺾는 것은 천자의 명을 받들지 않고 거역한다는 것이다. 이는 죽음을 뜻하니, 그는 천자와 싸워 이겨야만 생존할 수 있다. 이는 그리스 신화 ‘황금가지의 노예 사제 왕’ 그대로이다.
이것을 건목득자(建木得子)로도 표현하였었다. 월계수 문화가 서방에서 전해졌듯이, 건목득자 또한 그곳에서 전해진 것인데, 建木得子에서 木을 풀면 十八이 된다. 木과 子를 합치면 李가 된다. 十八子를 합치면 李가 된다. 조선 왕조를 개창한 이성계(李成桂)의 이름에는 ‘십팔자(十八子) 건목득자(建木得子) 목자득국(木子得國)’의 내용이 다 들어있다. 먼저 李=十八子의 의미를 먼저 살펴본다.
18살이 되면 성인이 되니 자립해야하는데, 그렇게 하자면 미다스의 손을 가진 왕자로 태어나는 것이 가장 쉽다. 그렇지 못하고 생계를 위해 돈의 노예 상태로 살아가는 대부분 보통 남자의 자식들이 한 번에 목돈을 쥘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전함무역선 용병이 되어 새로운 곳으로 가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엿보는 것이다. 당시 페르시아 전함무역선을 타고 다닌 용병들이 부남/베트남/중국/한반도에 온 주된 이유는, 부국강병의 원천적 소재인 청동과 철을 강하게 만드는 매개 광물과 직물, 그리고 계피와 같은 향신료 무역을 해서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 부남과 중국 남부지역에서 한자를 배우면서, 중국 오어(粵語) 實發 (shì fā)( 'definitely get rich', 'to get rich for sure’/확실하게 부자가 되는 것)이 十八 (shí bā)과 발음이 같다는 것을 알고, 1818(十八十八)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나도 한 몫(木) 잡는 자(子)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담아, 성씨를 이(李)로 하였는데, 리(李)는 리(利)와 음이 같다. 그래서 李=十八子의 첫째 의미는 육계나무(ròu gùi;肉桂-)를 차지하여 돈을 많이 벌어 자수성가한 자(子)가 되는 것이다. 향신료 사업으로 부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돈을 벌려면, 황금으로 대표되는 광물사업을 해야 하고, 그러자면 전함무역선을 운영해야한다. 그리고 황금가지 나무(nemus)를 차지해야 한다. 이것은 삶과 죽음이 오가는 모험이다. 성공하면 십팔자(十八子)가 왕이 되는 것(爲王)이고, 실패하면 죽는 것이다(十八十八[shí bā][shí bā] 死發死發[sǐ][fā][sǐ][fā]).
그래서 子의 뜻에는 죽음이 있다.
子
Pictogram (象形) – an image of a baby, with a large head and spread arms. The legs are wrapped in a blanket. Compare with 了, where the arms are wrapped.
The big seal script form is much more elaborate, showing a baby with hair on a head (囟) and arms on the two sides of the body, sitting on a stool (几).
발음
Mandarin (Standard) (Pinyin): zǐ (zi3)//Cantonese (Jyutping): zi2//Hakka (Sixian, PFS): chṳ́//Min Bei (KCR): cǎ̤//Min Dong (BUC): cṳ̄//Min Nan (Hokkien, POJ): chú / chír / chí(Teochew, Peng'im): ze2 / zi2//Wu (Wiktionary): tsr (T2)//Middle Chinese: /t͡sɨX/ //Old Chinese▼ (Baxter–Sagart): /*[ts]əʔ/, /*tsəʔ/(Zhengzhang): /*ʔslɯʔ/
베트남 어
tử
1.(only in compounds) child, son / Sino-Vietnamese word from 子 (“child”).
tử 죽다>둑다
1.(only in compounds) to die / Sino-Vietnamese word from 死 (“death”).
建木得子의 子 는 의자에 앉아 있는 두 팔과 머리털이 난 어린 아이를 묘사한 것이고, 고대음 ʔslɯʔ 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구구타예설라(矩矩吒䃜說羅)’의 ‘예설라(䃜說羅[shuō,shuì,yuè][luó])’이다. 이 단어의 뜻은 ‘귀(貴[guì,guǐ]귀하다, 신분이 높다, 값이 비싸다, 소중하다, 빼어나다, 우수하다, 귀히 여기다, 귀하게 되다)’이다. 子의 민남어 발음 Min Nan (Hokkien, POJ): chú / chír / chí(Teochew, Peng'im): ze2 / zi2//Wu (Wiktionary): tsr (T2)을 보면, 子 는 슬라브 문화권의 황제 짜르Tsar (/zɑːr, tsɑːr/; csar, or czar)/찰리(刹利), 치리(齒理), 치리(哆唎)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자(子)라고 하였다.
子의 베트남 어 tử 는 子 (“child”)와 死 (“death”)/die의 뜻이 있다. 이것과 일본어 子 (し,shi)를 종합하면, 주검:시(尸[shī]시체, 시동, 제사 지낼 때 신위 대신으로 교의에 앉히는 어린아이, 효시(梟示)하다/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경계하는 뜻으로 뭇사람들에게 보임)가 된다. 이는 子의 상형(象形), 의자에 앉아 있는 두 팔과 머리털이 난 어린 아이를 묘사한 것과 관계있다. 建木得子의 子 는 뇌우의 신 Asalluhe(䃜說羅)와 같이 번개같이 나타나서 왕이 된 자이거나 , 나무 의자에 앉아 효시(梟示)를 당한 어린 아이다.
그래서 李=十八子 의 이씨(李氏)는 황금가지를 손에 잡고 왕이 되든지, 역성혁명에 실패하여 죽든지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의 성씨이다. 수나라의 관리로 있다가 혁명을 주도하여 나라를 차지한 당나라 황실이 이씨(李氏)인 것은 이 때문이다. 木子 李氏 왕이 되려면 建하고, 되고 나면 得 해야 한다. 建 건(建[jiàn]세우다, 월건(月建), 북두성의 자루 쪽에 있는 여섯 개의 별) 은 여섯 개의 별에 해당하는 조상들이 준비를 하는 것이다.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해동육룡(海東六龍)은 ‘건(建)’이다. 이것이 되고 나면 이⦁성⦁계(李成桂)가 전임 노예출신 왕을 죽이고 황금가지를 차지하고 왕조를 개창할 수 있다. 왕이 되고 나면 ‘득(得)’해야 한다. 得 득(得[dé,dė,děi]얻다, 이익, 이득, 덕(德))의 최고 가치는 덕(德)이다. 그렇게 해야 오래 살 수 있다. 그리고 금목(金目)하고, 법왕(法旺)해야 한다. Diana 신에게 (다음 도전자가 올 수 없도록) 새벽이 오게 하지 마소서하고 기도해야한다. (→이성계는 왕이 되고 난 다음 이름을 이단(李旦)으로 바꾸었다.)그렇지만 나의 밤은 지나고, 남의 낮은 오니, 또 다른 李=十八子가 도전해온다.
Ideogrammic compound (會意). The ancient form of 得 is 㝵, composed of 貝 (“cowry”) + 又 (“hand”) — to pick up a cowry > to obtain valuables. A component 彳 was sometimes added to show that the cowry was picked up on the road.
the 貝 simplified as 目 (“eye”), such simplification can be seen in its early form like Spring and Autumn and Warring States bronze inscriptions and Chu Bamboo an Silk script as well as other characters such as 具. Then it corrupts into 旦 (“dawn”) in later clerical script, and Regular script inherited it. →이성계는 왕이 되고 난 다음 이름을 이단(李旦)으로 바꾸었다.
이러한 建木得子의 대표 주자는 페르시아 제국의 개창자 Cambyses I와 Cyrus II이다. 영어 Cambyses는 고대 페르시아 어 Kambūǰiya, 아람어 Knbwzy이다. Kambūǰiya는 그가 Kamboja로 불리는 집단의 지배층이었다는 것이다. Kambojas는 카스피 해 주변 코카서스 지역에서 살다가 이란 북부로, 인도로, 동남아로, 한반도로 이주하였었다. 그들 중의 일부가 인도 Andhra Pradesh, Telangana, Tamil Nadu 지역에 살면서 Telugu 어와 Tamil 어를 사용하는 Kamma(, 자칭 Kamma Naidu)족이 되었다. 이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Kamma(, Kambūǰiya) 족이 동남아시아로, 한반도로 많이 이주하였다.
Kamboja 가운데 페르시아 용병이 된 자들이 많았는데, 중앙아시아 산록의 Kambojas는 Komedei, Komadas, Kiumito, Kumadh, Kiumiche, Kumiji 등으로도 불리었다. 이들 명칭에 보이는 ᄏᆞᄆᆞᄃᆞ는 建[jiàn](kiến)건木[mù]得[dé,dė,děi]子[ts]əʔ 에서도 볼 수 있다. 건목득자(建木得子)는 ‘ᄏᆞᄆᆞᄃᆞ(Komedei)자(子)’로 나타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건목득자’는 아마도 동남아시아에 살던 ‘ᄏᆞᄆᆞᄃᆞ(Komedei)자(子)’ 무리들 가운데 황금가지 신화를 알고 있는 자들이 먼저 사용하였고, 나중에 한자를 익혀 그들의 꿈을 建木得子로 표현한 듯하다.
삼한의 군미국(軍彌國), 건마국(乾馬國)은 이들 가운데 Kamma(, Kambūǰiya) 족의 일부가 한반도로 이주하여 세운 도시국가로 보이고, 한자 표기에 ‘군/마(軍/馬)’가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建木得子는 Kamboja 가운데 군마를 타고 싸우는 페르시아 용병이 된 자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군마를 택하여 전쟁터의 용병으로 활동하면서, 기회를 엿보아 나라를 차지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일도 하였다. 이들은 한자문화권에 정착하면서 성씨를 Kamma(, Kambūǰiya)→ᄏᆞᆷ(金)으로 택하였다. Phono-semantic compound (形聲, OC *krɯm): semantic 王 (“upside-down axe”) + semantic 呂 (“two blocks of metal”) + phonetic 亼. 亼 is the ancient form for 今 (OC *krɯm). 이들이 초기 건목득자이고, 나중에 Kamboja 가운데 황금가지 신화 문화권의 십팔자(十八子)(18세가 된 남자)가 성인이 되어 돈을 벌기 위해 전함무역선의 용병과 무역에 참여하면서 기회를 엿보아 역성혁명에 성공한 이들이 생겼고, 이들은 대체로 이씨(李氏)를 성씨로 택한 듯하다.
그리고 이러한 운명을 건 일은 숲/나무의 신에게 성패를 물어보아야 한다(占卜). 박(朴[pō,piáo,pǔ])을 성씨로 삼는 자들이 나타난다. 박(朴[pō,piáo,pǔ])의 사성음은 부(富[fù]), 복(福[fú])과 같으면서 목(木[mù])의 사성음과 음이 통한다.(ㅁ과 ㅂ 은 순음으로 음이 상통(相通)). 한국어 독음 ‘박’은 복(卜[bǔ,bȯ]), 복(福[fú])과 기본음이 ‘ᄇᆞᆨ’으로 같다. 그리고 ‘ᄇᆞᆨ’은 페르시아 문화권 지역의 baga, ᄇᆞᆰ( *bhereg- "to shine; bright, white." )과 러시아 문화권 지역의 bog과 음이 같다. 이를 통해 ‘박(朴)’을 성씨로 삼은 자들은 서방의 ‘ᄇᆞᆨ’ 음 문화권 출신 가운데, 복부자(福富者)가 되고 싶은 자들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이들은 중국 남부 복건성(福建省) 지역을 중심으로 정착하였다가 한반도로 이주하였다.
그래서 서방인들, 특히 Kamma(, Kambūǰiya)가 지나가는 자리에는 建木得子 十八子 金⦁李⦁朴이 물결쳤었다. 이들이 페르시아 전함무역선의 실체 내지는 실세였던 것이다. 金의 대표로는 김수로(金首露)와 김알지(金閼智)가 있고, 李의 대표로는 이성계(李成桂)가 있고, 朴의 대표로는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있다. 이중에 이성계만이 삼한시대에서 기원전후 시대의 인물이 아니다. 한반도에서의 김수로와 박혁거세를 볼 적에 사로6촌 알천 양산촌 알평 급량부에서 파생된 성씨 이씨(李氏) 집단은 김수로 박혁거세 집단이 활동할 적에 분명 무언가를 했을 것인데, 당시 이씨로 개국한 이가 없어 그에 대한 뚜렷한 기록은 찾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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