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계수필창작교실 8기-9차시 자료(2023년 4월 29일 토)
1. 5년 만의 여행 /윤경희
5년 만에 친정 식구들이 다시 뭉쳤다. 우리 삼 남매는 모두 결혼하고 난 뒤 친가가 있는 지역에서 벗어나 각자 다른 지역에서 살았다. 결혼 이후 한자리에 모이는 시간이 줄어드는 아쉬움을 해소하고, 홀로 계신 엄마를 위한 효도 삼아 1년에 1~2차례 함께 모여 여행을 하곤 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남동생의 사고와 재활, 바로 이어진 조카의 발병으로 인해 오랫동안 숨죽여 살아야 했다. 해를 거듭하며 연거푸 닥쳐온 사고는 모든 식구의 삶을 사정없이 찢어놓았고, 우리는 또 다른 불행이 닥쳐올까 두려움에 움츠려졌다. 그 어떤 위로도 슬픔을 덜지 못하고 가식처럼 느껴졌다. 다 같이 모이는 것이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불가능한 시기였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슬픔과 원망을 가쁜 숨으로 내뿜으면서도 그 숨조차 조심스러웠던 시기였다. 친정 식구들에게서 전화벨이 울리면 두려움과 슬픔이 먼저 앞장섰다. 그래서인지 누구라 할 것도 없이 연락을 자제하고, 나아지기만을 빌며 납작 웅크리고 있었다.
그 사이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남동생은 퇴원했지만 예전의 몸으로 돌아갈 수 없고, 조카의 병은 재발을 반복하고 있어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 웅크리고 있을 수만 없었다. 그 사이 엄마의 주름살은 더욱더 짙은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고, 무엇보다 불행이라는 보이지 않는 적들이 우리를 계속 짓누르게 할 수 없었다. 이제 기지개를 켜고 우리 가족다움을 회복하고 싶었다.
모두 비슷한 감정을 품었던 것일까? 올해 초 여행 얘기를 꺼내자마자 모두 기다렸다는 듯 여행 계획에 반색하였다. 우리 삼 남매뿐 아니라 사위와 며느리도 적극적이어서 이전 어느 여행보다도 빠르게 날짜와 장소가 잡혔다. 엄마도 백만 원을 비용에 더 보태는 것으로 기쁨을 표현하셨다.
1박 2일로는 멀고 부담스러운 일정이지만 누구 하나 불만을 품지 않았다. 이런 평범했던 여행이 얼마나 특별하고 소중한지, 그리고 우리에게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올지 모른다는 불안함까지.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일상’을 절실하게 꿈꾸며 힘든 시기를 넘지 않았을까?
이번 여행은 그 어떤 때보다 풍족하였다. 오랜 운전도 우리를 지치게 하지 않았고, 여행지에서 마주치게 되는 순간의 행복을 만끽했다. 함께 모여서 웃을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였다. 이제 상처를 보듬고 의지하며 앞으로 함께 가자는 신호를 서로에게 준 여행이었다.
앞으로 우리가 겪어야 할 힘든 일이 또 뭐가 있을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여전히 두렵다. 또다시 절망 속에서 웅크려야 울어야 할 시간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절망이 오래가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더 강하다. 그 절망을 딛고 일어나는 힘이 우리에게 있다는 걸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 힘은 웅크린 심신을 다시 일으켜 뚜벅뚜벅 인생을 걷게 할 것이고, 때로는 희망을 안고 날아오르게 할 것이라고 믿는다.
2. 해운대역에서 /김옥수
1)캐나다로 이민 간 친구가 치과치료차 부산에 왔다.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바쁜 친구의 동선을 고려해 해운대구 장산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2)나는 집에서 가까운 북울산역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해운대역으로 갔다. 무궁화호로 울산에서 해운대역까지는 1시간, 차창 밖으로 계절과 날씨에 따라 바뀌는 바다를 감상할 수 있어 좋다.
3)해운대역에 내려 장산역 가는 지하철을 타려고 가방을 뒤졌는데 지갑이 없었다. 현금뿐만 아니라 신분증, 카드까지 아무 것도 없는 상황이다. 기차표는 휴대폰 코레일 앱으로 전날 예매했고...아침에 옷차림에 맞게 가방을 바꾸면서 지갑을 옮기지 않았나 보다. 혹시 가방 안주머니에 현금이 좀 있을 수도 있겠다 싶어 지퍼를 열어보니, 동전 몇 개만 나온다. 머리가 하얘지는 것 같았다. 그때 폰뱅킹이 떠올랐고, 계좌이체로 택시비, 점심값 등을 해결할 수 있겠다 싶었다.
4)해운대역 앞 택시 승강구로 갔다. 그런데 계속 예약된 택시만 들어오고, 택시 번호를 확인한 승객들만 하나 둘 떠나갔다. 줄이 길어 마냥 택시를 기다리고 있을 수 없어, 장산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로 했다.
5)버스 승강구로 가니, 마침 장산역을 경유하는 버스가 대기 중이었다. 기사에게 지갑을 두고 온 사정을 말하고, 장산역에서 내릴 것과 차비는 폰뱅킹으로 지불할 수 있는데 타도되는지 물었다. 기사도 어이없는지 멍하니 앞을 보고 있다가, “그냥 타세요.”하는 것이 아닌가. 세 정거장 거리의 장산역까지 승객은 나 혼자였고, 하차할 때까지 고맙다는 인사를 두 번이나 했는데도 모자라는 것 같았다.
6)친구를 만나자마자 내 실수로 빚어진 이야기를 쏟아놓았다. 친구는 “아이고오~ 김옥수 이제 다 됐네. 오늘은 내가 풀코스로 쏠테니 아무 걱정 마라.”하며 깔깔거렸다. 폰뱅킹으로 친구가 먹고 싶은 거 다 사줄 수 있다고 큰소리치는 나와 친구는 서로 우기다가 길거리에서 ‘가위바위보’를 했고, 그날은 친구가 이겼다.
7)장산역 근처는 골목골목마다 다양한 음식점이 즐비하다. 친구는 오랜만에 한국 오니 부산 도착한 첫날부터 매일 언니, 오빠, 큰아들내외가 돌아가며 맛 집 투어를 시키고 있다 했다. 그런데 막상 본인은 얇은 ‘왕돈까스’가 먹고 싶은데 그건 나랑 먹어야 한다 했다.
8)나는 친구가 말하는 그 돈까스가 어떤 건지 안다. 그 돈까스는 우리가 함께 다녔던 중학교 아래 동네에 있던 ‘만복당’ 메뉴 중 하나였다. 돼지고기를 최대한 얇고 크게 두드려 튀김옷을 많이 입혀 기름에 튀겨 내는 것이다. 우리가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그 ‘만복당’은 사실 자장면으로 더 유명했다. 그런데 친구는 고기 맛보다 바삭바삭한 튀김 맛이 더 강한 그 돈까스를 선호했다. 만복당에서 나는 주로 자장면을 먹었고, 친구는 늘 ‘왕돈까스’를 먹었다. ‘왕돈까스’를 시키면, 멀겋고 노란, 통조림옥수수 알갱이가 몇 알 떠 있는 스프도 나왔는데, 친구가 주인아주머니에게 ‘맛있다’ 소리를 연발하면, 아주머니는 웃으면서 어김없이 스프를 한 그릇 더 갖다 주셨다. 우리는 고등학교로 진학한 후에도 가끔 ‘만복당’을 찾았다. 우리에게 만복당은 중·고등학교 시절 기억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맛 집이다.
9)추억 속의 그 ‘왕돈까스’를 찾아 골목을 돌던 중, 친구가 갑자기 어느 분식집 앞에 멈춰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그 분식집 문 앞에 걸린 천 메뉴에 큰 글씨로 ‘왕돈까스’라고 적혀 있지 않은가? 우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들어갔고, 바로 나는 자장면, 친구는 왕돈까스를 주문했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을 때 우리는 낮은 함성을 질렀다. 제법 큰 접시를 채울 만큼 큰 돈까스는 그 ‘왕돈까스’ 였고, 스프까지 똑같았다. 자장면은 그저 그랬다. 그러나 친구는 만복당 왕돈까스 맛이라며 흡족해 했다. 친구가 건네는 한쪽을 먹어보니 비슷한 것 같았다.
10)파리바게트로 자리를 옮겨, 디저트로 엄청 달작 지근한 흰 앙금도너츠와 커피를 시켰다. 이야기는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저녁 무렵 친구가 둘째언니를 따로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가와, 한 번 더 보자는 약속을 하고 헤어져야만 했다. 헤어지기 전, 친구는 캐나다에서 갖고 온 선물 외, 빵식이 남편에게 갖다 주라며 커피 빵, 밤 빵 등을 주섬주섬 담았다. 너무 많아 절반을 덜어내었다. 친구는 또 비상금이 있어야 한다며, 해운대역으로 가는 버스비까지 12,000원을 억지로 손에 쥐어주었다.
11)울산행 기차가 들어오려면, 20분이나 남았다. 해운대역 고객대기실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데, 내 뒤에 혼자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빵 봉투 속 커피 빵을 가리키며, “나 저 빵 좀 주면 안돼요? 맛있겠다.” 했다. 내가 “배고프신가 봐요?” 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다른 빵을 주려고 하니, 또 커피 빵을 가리키며, “아니 저거” 했다. 나는 제법 큰 커피 빵을 반으로 잘라 그 아주머니에게 건네면서, “이 빵 주인이 제가 아니라서 다는 못 드리겠어요. 죄송해요.”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커피 빵은 남편이 좋아하는 빵이긴 하지만, 집에 있는 남편이 이 상황을 알 리 없고, 안들 뭐라 할 사람도 아니건만... 그 아주머니의 겉모습은 정신장애인 같아 보이지는 않았으나, 상식적이지 않아 좀 황당했다. 그러나 허겁지겁 먹는 아주머니가 걱정되어, 밖에 음용대가 있으니 물과 같이 먹으라고 했다. 아주머니는 웃으며 배낭 안에서 물병을 꺼내 보였다.
12)나는 고객대기실 밖으로 나와 울산행 기차를 타는 곳 가까이에 자리 잡았다. 그런데, ‘정말 배고픈 사람이면 어쩌지?’ 하는 생각과 함께, 아침에 공짜 승차부터 내가 받아 누린 은혜의 순간들이 차례로 머릿속을 스쳤다. 만일 주려서 그 빵이 절실했던 사람이라면 빵을 봉투째 주든지, 원하는 대로 커피 빵 하나를 다 주어야지 반을 잘라 주어서는 안 되었다.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대기실로 달려갔다. 그 어디에도 아주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남은 빵 봉투는 너무 무겁게 느껴졌고, 나의 옹졸하고 미성숙한 모습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받은 은혜 기꺼이 나누게 하시고, 부지부식 간에 만나는 천사를 외면하지 않게 하소서.”
3. 아버님 가시던 길 (1) /장미
- 부제: 벚꽃 흐드러지던 날에
1. 매년 벚꽃이 흐드러질 때면 시아버지를 떠나보냈던 아침 풍경이 떠오른다. 깜깜한 장례식장 안에만 있다가 눈부신 햇살을 며칠 만에 보았었다. 하늘엔 만개했던 벚꽃 잎들이 꽃비를 내리고 있었다. 내 가슴 속은 슬픔으로 가득 찼는데, 눈에 담긴 풍경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 마음과는 다르게 바깥은 너무나도 따뜻하고 푸근했다. 이런 따스한 봄날에 시아버지는 차가운 관 속으로 들어가셨다. 왜 스스로 올 수 없는 길을 떠나셨는가. 대답 없는 물음이 가득한 내게 하늘은 천진난만하게 해맑았다.
2. 그 일이 있기 전, 나는 육아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매일 살고 있던 아파트 아래를 몇 번이고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돌이 지나도 밤에 수시로 깨고, 고성으로 빽빽 울어댔다. 난 사계절 감기에 소화불량, 불면증, 이석증을 달고 있었다. 통통했던 몸집은 점점 말라갔다. 처음 가본 정신의학과에서는 ‘과(過)긴장상태’라 했다.
3. 그때까지 난 내 아이가 정말 예뻐 보이지 않았다. 예뻐해 주는 사람은 나 이외의 주변인들뿐이었다. 육아는 인간에게 내려진 가장 가혹한 형벌이란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내 ‘자식을 이렇게나 미워하는 엄마가 세상에 어디 있나.’라는 생각에 죄책감이 함께 들었다. 미디어나 주변에서 육아의 기쁨을 말하는 것을 보며 난 더 혼란스러웠다. 이렇게 자신의 아이를 키우는 것조차 버거운 어미는 죽어버림이 마땅하단 생각이 가득했다. 그래서 뛰어내리고 싶었다. 뛰어내리면 그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 같았다.
4. 그런 생각이 만연하던 때에 전화 한 통을 받았다.
“ㅇㅇㅇ 씨 큰 며느님 되십니까? 시아버지 되는 분께서 xx병원 응급실에 계십니다. 빨리 오셔야겠습니다.”
듣자마자 보이스 피싱 의심이 들어 얼른 남편을 바꿔주었다. 그런데 남편이 생각보다 너무 심각하게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끊더니 나보고 얼른 옷을 입으란다. 병원에 가봐야겠단다. 시아버지가 5층 건물에서 뛰어 내리셨단다. 난 이 때부터 갑자기 정신이 몽롱해졌다. 진짠지 거짓인지 구분을 하고 싶은데, 상황은 너무 급박하게 돌아갔다. 우선 두 눈으로 확인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아이는 급히 친정에 맡기고, 병원으로 향했다. 달리는 차 안에서 남편은 힘없이 말했다.
“5층이면… 가망성은 없겠네.”
5. 그렇게 도착한 병원에서는 시어머니와 서방님, 동서 이미 모두 와 있었다. 나는 사실 ‘지금 여기가 꿈속인가? 요새 우울증 약을 먹었더니 정신이 이상해 진건가?’라며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것 치고 모두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때 응급실 안 커튼 밑으로 피가 흥건해졌다. 많은 의료진들이 모두 그 피가 흥건한 침상에만 매달려 있는 게 보였다.
6. 곧이어 자신을 형사라고 소개하는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가족 중 한 명이 환자의 얼굴을 확인하라 했다. 장남인 남편이 대표로 그 침상에 갔다. 그리곤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그러자 형사는 아버님의 소지품과 함께 유서인 것 같다며 종이를 건네주었다. 정갈하게 접힌 종이를 펴기 전까지만 해도 아버님의 필체가 아니길 바랐다. 그러나 평소 강직한 성격을 보여주듯 힘 있게 써 내려간 획들. 야속하게도 아버님의 필체가 맞았다.
7. 유서엔 모두에게 미안하다는 내용이 가득했다. 그리고 가족 한 명, 한 명의 이름과 첫 손주인 내 아이의 이름 뒤엔 사랑한다고 적혀 있었다. 마지막은 아버님의 절친한 친구 분에게 이 모든 일의 처리를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8. 한참을 심폐소생술과 에크모(환자의 몸 밖으로 혈액을 빼낸 뒤 산소를 공급해 다시 몸 속에 투입하는 의료장비)를 돌리다 한 의사가 피범벅인 신발을 신은 채로 나와 말했다.
“환자 분이 수술실에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좋지 않습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리셨고, 저희한테 왔을 때는 이미 시간이 꽤 지나 있었습니다.”
9. 그렇게 수술 절차를 밟고 수술 중 사망 동의서까지 쓴 다음 수술실로 향했다. 우리는 그 때 아버님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아버님의 얼굴이 많이 바뀌어 있었다. 특히 턱 한쪽이 많이 부어 있었다. 너무 낯선 이목구비에 내 정신은 더욱 아득해져 갔다. 아버님을 모셔가는 침상 밑으로 또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아버님의 옆구리에서 나는 피였다. 그렇게 아버님이 수술실에 들어간 그 길은 핏자국으로 선명했다. 동시에 그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며 대걸레로 피를 닦아내는 청소 아주머니가 말했다.
“에이씨. 방금 바닥 다 닦았구만, 피를 왜 이리 질질 흘리면서 가!! 하여간 지네가 안 닦는다고 이렇게 흘리면서 다닌다니까! 으휴!!!”
아버님의 생명이던 피가 청소원에게는 한낱 더러운 얼룩일 뿐이었다. 신경질적으로 대걸레를 훔치며 지나가자 선명한 핏자국 길이 조금씩 사라져갔다. 그 길이 아버님의 마지막 길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듯이.
10. 수술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집도의(執刀醫)가 수술 방을 나왔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최선을 다했지만 돌아가셨습니다. 사망 시각은….”
남편은 알고 있었다는 듯 의사의 말에 끄덕이기만 했다. 이전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았던 시어머니는 그제야 바닥에 주저앉아 소리 내어 엉엉 우셨다. 서방님과 동서는 고개를 떨구고 울고 있었다. 난 그때 대상 없는 분노만이 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11. 그 뒤로 벚꽃이 흐드러질 때면 아버님 가시던 길이 함께 떠오른다. 누구보다 나에게 봄은 아름답지만 처절하다. 아름답던 벚꽃도 결국은 낙화(落花)한다. 떨어지는 것은 모두 아프고, 슬프다. 난 여전히 마음처럼 되지 않고 추락하는 것 같은 현실을 마주하는 중이다. 이를 목도(目睹)하는 일은 지옥이고, 고통이고, 비애이다. 그럼에도 삶을 이어가기로 다짐했다. 살아서 아버님의 아픔을 기억하기로 했다. 이유는 옆에서 삶의 끈을 챙겨드리지 못한 죄송함 때문이다. 봄마다 기억날 아름다운 벚꽃 잎 속에 아버님을 향한 그리움을 꾹꾹 눌러 담아놓았기 때문이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찬란한 봄날, 매년 이렇게 떨어지는 벚꽃 잎을 보며 아버님을 그리워하고 있다.
4. J와 진달래 /최정란
3월의 토요일 오후, 오영수 문학관에서 수필 강좌를 듣다가 휴식 시간이 되어 휴대 전화를 꺼냈다. ‘재진 언니, 바빠요?’ 아이의 이름으로 나를 부르는 톡이 와 있었다. 서울에 있는 사람이 웬일일까 궁금해하며 전화를 걸었다. 반가움에 들뜬 J의 밝은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친구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울산에 왔는데 내 생각이 났다고 했다. 미리 약속된 친구들과의 저녁 식사 시간 전에 잠깐 얼굴을 보고 싶다며 내 상황이 괜찮은지를 물었다. 나는 문학관 수업이 한 시간 남아있어 나가기가 어려우니 이쪽으로 와주면 좋겠다고 답했다. 무거동에 있다던 J는 수필 강좌가 끝나기도 전에 문학관 1층 테라스에 도착했다.
나는 딸아이 출산 후 지금까지 줄곧 워킹맘으로 살고 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나는 아이 학교의 어머니 모임에 참석할 수 없었다. 청소 봉사도 급식 봉사도 하지 않았다. 동네 친구 몇몇이 1학년 같은 반 엄마들과 모임을 만들어 어울리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남의 학원에서 일하는 형편상 가능하지 않은 일이니까 미련을 갖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래도 가끔 엄마들과 아이들이 밝은 얼굴로 우르르 어울리는 모습을 볼 때면 왠지 내 아이에게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가 동네를 벗어나 시내의 기숙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나는 최대한 시간을 내어 학교 설명회에 참석했다. 같은 반 엄마들끼리 모이고 보니 다들 아이의 학업과 기숙사 생활에 대해 얼마간의 염려를 안고 있었다. 이후 딸 가진 엄마 여섯 명이 모여 정기모임을 결성했다.
우리는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서로의 아이들을 통해 들은 학교 소식을 공유했다. 아이들이 3학년이 되어 진학을 앞두고 있을 때는 대학 입학 정보를 나누었고 대학 졸업반이 되면서는 좁고 험난한 취업에 대해 함께 걱정했다.
우리 아이들 가운데 대학 입학에 실패하고 1년 재수하는 아이가 생겼고 그 애는 이듬해에 좋은 성적으로 대학에 진학했다. 한 아이는 명문대 경영학과 3학년까지 다니고서 다시 시험을 보고 한의대에 입학했다. 도전했던 일자리 시험에 몇 년째 낙방을 거듭하다 목표를 바꾼 아이도 있었다. 그 세월 동안 우리는 서로의 아이들을 응원하며 서로를 격려했다. 이제 한의대 졸업반인 아이 외에는 모두 직장인이 되었다.
그러나 정겹던 이 모임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우리 중 가장 젊고 활동적이었던 H의 건강에 이상 신호가 왔다. 수술받고도 회복이 쉽지 않았던 그녀는 결국 모임에서 탈퇴했다. 그 후로 두 집이 울산을 떠났다. 둘째 셋째 아이가 서울로 진학한 K네 집이 먼저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가 서울로 발령받은 J네 집도 서울로 이주했다. 여섯이 만나던 울산의 모임 참석자가 절반인 셋으로 줄었다. 만날 때마다 허전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문학관 테라스에 도착한 J는 서울에서 지하철만 타고 다니느라 매화가 피고 진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고 했다. 그녀를 태우고 산 아래 새로 생긴 카페로 갔다. 푸른 나무와 붉은 흙 사이사이로 분홍빛 진달래들이 바라보이는 창가에 앉았다. 그리고 만나지 못한 몇 년 동안의 안부를 물었다.
J는 아이들이 자라는 사이 자신은 나이를 먹어 이제 눈이 침침하다고 했다. 같이 일하는 젊은 아이들과 비교할 때 자신의 업무 처리 속도가 느린 것을 느낄 때면 기가 죽는다고도 했다. 부모님 곁에서 병원 심부름하는 형제에게 느끼는 미안함도 밝혔다. 두 아이가 이성 친구를 만나면서도 부모에게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에 대해 느끼는 서운함은 말보다 표정으로 전해졌다. 그러면서도 말수가 적은 딸아이가 최근에 열심히 살아온 부모를 고맙게 여기는 듯 보여 그게 또 대견하다고도 했다.
정작 모임의 매개체였던 우리 아이들은 각자 다른 대학, 다른 전공을 선택한 후로 점차 관계가 소원해졌다. 나의 딸아이는 이제 그 이름들은 내 친구가 아니라 엄마 친구 딸의 이름처럼 들린다고 말할 정도다. 내가 젊은 날 바라던 아이 동반 모임은 아닌 셈이다. 그러나 무슨 상관이랴.
우리의 인생에서 같은 시기를 같은 마음으로 겪어 온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따뜻한 일이다. 앞으로도 우리는 만날 때마다 삶의 이야기에 덧붙여 아이로 인한 기쁨과 쓰라림을 함께 나눌 것이다. 오늘 나는 몇 년 만에 J를 만났다. 그리고 진달래가 보이는 창가에 앉아 삶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랜 인연과의 예상치 못했던 만남의 시간이 마음을 진달래 빛으로 물들이는 봄날이었다.
5. 누워서 피는 꽃 2 / 이선옥
1. 과수원이다. 우리가 오지 않아도 매화꽃은 왔다 간다고 군데군데 늦사리 꽃잎이 바람에 손을 흔들고 있다. 복숭아꽃은 출발 신호총만 “땅”하면 화라락 터져 나올 태세다. 지금은 하얀 자두꽃이 숫눈처럼 골짜기에 깔렸다.
2.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다랑이논 서마지기를 상속 받았다. 층계를 이룬 열 두 도가리 논은 일거리가 엄청났다. 논두렁 쌓는 일부터가 그랬다. 소가 들어가 논을 갈려도 비좁은 논바닥에 쟁기질이나 써레질이 어려워 가쪽은 언제나 생땅이었다. 거기다 골짝이라 일조량이 적으니 일한 만큼 소출이 나지 않았다. 놉을 사서 모내기를 하면 능률이 오르지 않으니 할 수없이 가족이 쉬엄쉬엄 모를 내야 했다. 새댁 시절 내가 모를 심다가 논 구석 시북에 빨려 들어가고 있을 때 온 가족이 깔깔대며 꺼내 주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그 논이 지금은 과수원이 되었다.
3. 상속 받은 후 벼농사는 엄두도 못 내고 묵지로 두었다. 농기계가 들어 갈 수 없는지라 그저 주어도 소작할 사람이 없었다. 이런 땅을 아이들에게 물려준들 골치만 아플 것 같아서 내 대에서 처분하기로 작정했다. 직접 농사를 짓지 않으면 양도세가 엄청나다고 한다. 주기적으로 항공사진을 찍기 때문에 농사를 짓지 않고 우기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다. 읍사무소에 신고를 하고 흙을 채워 밭으로 만들었다.
4. 남편이 퇴직을 하자 그 밭을 과수원으로 꾸몄다. 매실, 복숭아, 살구, 자두, 배, 사과, 대추 등을 섞어 심어놓았다. 곡식이나 과일은 주인 발소리를 듣고 자라고 열매 맺는다고 하는데 멀리 살고 있다는 핑계로 걸음을 게을리 했다. 거기다 농업기술도 전무하고, 농약은 겁이 나서 치지도 못하니 소출을 기대할 수 없다. 과일나무에 응애가 붙어 하얀 버즘이 피고 열매가 열면 벌레들이 꼬여 달린 열매도 와르르 떨어졌다.
5. 실로 오랜만에 온 과수원이다. 나의 살던 고향, 꽃피는 산골이 이랬지 싶다. 반가운 마음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하지만 밭에 들어서자 놀란 가슴을 진정할 수가 없었다. 나무들은 하나같이 누워 있었다. 삶이 고달픈 사람들도 저리 쓰러져 버릴까. 아무래도 지난여름 태풍 힌남노가 짓밟고 간 흔적이리라. 골짝에 위치한 밭은 비만 오면 사방에서 흘러온 물이 모여 거대한 도랑이 된다. 그래도 여태껏 잘 견뎠는데 유독 지난여름 태풍은 이기지 못했나보다. 온 밭의 나무가 전쟁터에서 총탄을 맞고 쓰러진 시체들처럼 속절없이 넘어져 있다. 발을 땅밖으로 내 밀고 있는 것도 많다.
6. 남편이 크게 아파 병원 신세를 지느라 거의 1년 만에 왔더니 이토록 마음 아픈 일이 벌어져 있다. 주인이 돌보지 않아서 삐친 걸까, 아니면 주인이 아프니 함께 무너진 걸까. 그러나 나무들은 자기들 아픔은 애써 참으며 주인을 도리어 위로하려는 듯 누워서도 하얀 웃음을 머금고 있다. 나무들을 쭈욱 둘러보다가 다시 한 번 가슴을 쳤다. 논가 산비탈에 서 있던 아름드리 갈참나무가 뿌리를 하늘로 쳐들고 쓰러지면서 몸통이 도랑을 건너고 밭에 쓰러져 자두나무를 덮치고 있는 게 아닌가. 거대한 힘에 눌려 사지가 산산히 부서지고 옴짝 달싹 못하고 있다. 꺾이고 찢어질 때의 고통은 어땠을까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다. 그런데 나를 더 아프게 하는 것은 꺾어져 거죽만 붙은 가지들이 꽃을 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르지 않고 놓아둔다고 해도 소생할 수 없는 가지가 마지막 혼을 불사르고 있다.
7. 지난여름 남편이 간암 수술을 했다. 오른 쪽 간을 모조리 잘라 내었으니 남은 건 30%도 채 되지 않았다. 남편은 다시 살아 올 수 있을까 절망을 했다. 입원을 앞두고 아직 여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남편이 다락에 있는 겨울 난방기를 내리고 있었다. 다락이 워낙 높아 내가 내릴 수 없다는 걸 의식한 모양이다. 나는 갑자기 화를 버럭 내었다. “나에게 못한 것도 많은데, 살아서 갚아야지 왜 이런 못난 짓을 하느냐”고. 내가 낫게 해 줄 터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큰 소리 쳤지만 의사의 칼끝에 운명이 달려 있지 않은가. 나도 과부 소리를 들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간이 조였다. 두 번의 시술에 이어 간 절제 수술을 받고서 제2의 삶을 찾았다.
8.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남편은 맨 먼저 과수원에 가고 싶다고 하였다. 과수들이 아픈 주인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려는지 부러진 가지가 껍질만 붙은 사이로 영양을 공급을 받아 꽃을 피웠다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남편도 나무들의 끈질긴 생명력에 기적 같은 꽃 피움을 보고 “거참! 거참!” 하면서 놀라워한다. 나무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면서 남편의 간도 저렇듯 강인하게 자라지 않을까. 남편은 과수들과 동병상련하며 투병의지를 키우지 싶다.
9. 갈참나무가 원망스러웠다. 저만 쓰러져 깨끗하게 죽을 일이지, 애먼 자두나무를 덮치다니, 원망하다가 다시 생각하니 그 또한 불쌍하기는 마찬가지이다. 100년은 좋이 묵은 듯한 저 나무가 어찌 넘어지고 싶어서 넘어졌으며, 다른 나무를 덮치고 싶어서 덮쳤을까. 참나무의 고통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내 열 살짜리 어린 자두나무가 저렇게 부러지고 찢어질 때 주인이 옆에 없었다는 자책감이 먼저다. 가지가 찢어지고 몸이 육중한 갈참나무 아래 끼어서 옴짝 달싹 못하고 반년을 견딘 자두나무가 위대해 보인다.
10. 자두나무가 피를 철철 흘리면서 외쳤을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래도 죽지 않고 버티어 준 나무가 눈물이 나도록 고맙다. 남편과 나는 자두나무를 살리는데 팔을 걷어 붙였다. 넘어지면서 워낙이 진하게 끌어안은 갈참나무를 자두나무에서 떼 내는 것도 여간 어렵지 않았다. 한나절 만에 갈참나무를 토막토막 잘라 내었다. 자두나무는 비스듬히 누워서 찢기고 꺾어져서도 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해쓱하게 웃음으로 고마움을 표하고 있다. 내년쯤에는 잘린 팔에 잔가지를 달고 잎과 꽃도 달 것이다.
11. 사람도 어려움에 다다랐을 때 좌절하지 않고 성급하게 포기하지 않으면 누군가의 도움의 손길이 닿을 것이다. 또한 어려움을 이긴 사람은 남을 도울 줄도 알지 않을까.
12. 넘어진 나무가 완전히 일어 설 순 없더라도 부목으로 받쳐 주면 조금씩 일어날 것이고, 잘린 저 나무가 힘을 얻을 때쯤이면 내 남편도 건강해 질 것이다. 나무와 남편이 과수원에서 건강하게 어울린 그림을 그려 본다.
6. 붉은 다이아몬드
- 故 정진혜 화가를 기리며 / 남경수
⓵다음 주에 진주 모교에 총동창회 모임이 있다. 대학 교정에 몇 년 만에 가 보는 건지 오랜만에 만날 친구들 생각에 들떠 있었다. 가는 길에 언니도 만나고 와야겠다는 생각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안 받는다. 아니 없는 번호란다. 전화기를 잃어버렸나?
최근에 전시회가 어디서 열렸는지 알면 연락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네이버를 검색했다. 예전 것만 있고 최근의 전시회 소식이 없었다. 다시 검색해서 찾아보니 故 정진혜......란 기사가 보였다. 이름을 잘못 봤겠지 싶어 확인하다 나는 너무 놀라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인가? 이게 무슨 일이지? 이게 뭔 말이지... 머리가 멍하고 가슴이 먹먹해서 울음도 나오질 않았다.
⓶그녀를 만난 건 대학교 4학년 여름이었다. 대학 생활 내내 학생운동에 얼치기로 들떠 시간을 보내고 나니 마지막 학년에는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것은 그림이었다. 학창 시절엔 그림을 좀 그린다고 생각했다. 미술학원을 다닌 적은 없었지만 더러 상도 받고 했기 때문이다.
③하지만 교대에 들어와 미술 수업을 해보니 그림의 기초를 배우지 못한 나에겐 데생은 너무나 어려웠다. 아그리파를 그려야 하는데 내가 그린 그림은 로보트 태권브이처럼 나왔다. 늘 그림을 배우고 싶다는 열망은 있었지만 학생회 활동을 하느라 여유가 없었다, 드디어 졸업반이 되어서야 나의 개인적인 소망을 이루게 된 것이다.
③그 미술학원을 어떻게 찾았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마도 진주 시내를 거닐다 우연히 발견한 것 같기도 하다. ‘그림도시 미술학원’ 진주 중앙동 어느 건물 2층에 있는 학원이었다.
④학원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학원 안에 있는 작은 방 같은 곳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긴 생머리와 이마 위로 짧게 앞머리를 자른, 눈이 아주 깊고 큰 작은 체구의 젊은 여자였다. 그 첫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냥 그 모습 자체가 ‘나 그림 그리는 여자예요’ 라고 말하고 있었다. 예쁘다기보다는 사람을 빨아들이는 묘한 매력을 가진 여자였다. 알고 보니 이제 갓 경남대 미대를 졸업하고 학원을 시작한 나보다 1살 많은 언니였다.
⑤첫 만남부터 언니의 매력에 이끌려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데생부터 시작하여 수채화, 유화까지 진주를 떠나기 전까지 그림을 배웠다, 그림이 좋았던 건지 언니가 좋았던 건지 거의 매일 미술학원에서 살다시피 했다.
⑥학원에는 불도 들어오지 않은 나무 마룻바닥으로 된 작은방이 있었다. 전기장판에 의지한 채 같이 잠을 자기도 했는데 아직도 그 공간에 퍼져있던 매캐한 유화물감 냄새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을 잊지 못한다. 작은 석유난로 위에서 언니는 김치찌개를 참 맛깔나게 끓였다.
⑦특히 언니가 전시회가 있을 땐 밤새도록 그림을 그리는데 그땐 나도 덩달아 같이 밤을 새웠다. 뭔가에 빠져 미치도록 열중하는 그 모습이 너무 좋았다. 언니의 풍부한 감성과 자유로운 영혼을 부러워했다. 내가 너무나 닮고 싶었던 삶의 모습이기도 했기에 대리 만족하는 기쁨으로 그녀의 곁을 맴돌았다.
⑧그녀의 곁에는 항상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언니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녔다. 진주 시내 골목 골목을 누비며 함께 마시던 술과 그 수 많았던 밤 향기를 잊지 못한다.
⑨나이는 1살 차이지만 그녀의 삶은 나와 너무도 다른 깊이와 넓이를 가진 듯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 같았지만 내 속에 움츠려있던 감성과 자유로운 영혼을 깨워 주는 것 같아 행복했다. 한편으로는 가질 수 없는 삶을 동경하며 아프기도 했다.
⑩진주를 떠나 울산으로 발령이 나면서 자연스레 멀어졌고 나는 낯선 삶에 적응하듯 직장생활에 적응해 가느라 잊고 살았다. 가끔 안부가 궁굼하긴 했지만 흔들리며 방황하는 나의 청춘을 살기에도 벅찬 시절이었다.
⑪그러다 결혼 소식을 들었다. 학원에 늘 꽃을 들고 찾아오던 웃는 얼굴이 맑고 순수한 사람. 문수 아저씨였다. 언니의 결혼으로 우리의 청춘은 잊혀진다고 생각했다. 나도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맞벌이와 육아로 인한 바쁜 삶에 지쳐갔다. 연락처도 잃어버렸다.
⑫그러던 2009년 3월의 어느 날.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아트페어에 그림을 보러 갔다가 우연히 언니를 다시 만났다. 우리는 너무 좋아서 부둥켜안고 춤을 추었다. 언니는 여전히 작가로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⑬그리하여 다시 시작된 우리의 만남은 그 해 여름방학 때 진주 이반성면에 있는 언니 집으로 다시 이어졌다. 결혼 이후로 처음 아이를 떼어놓고 혼자 가 본 여행이었다,
⑭집은 시골에 있는 주택이었는데 옆에 화실이 따로 딸린 소박한 집이었다. 두 딸과 함께 살고 있었고 이혼을 한 상태였다. 결혼생활은 잘 알지는 못하지만 힘들었던 삶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혼자서 그림 가르치는 강사 생활을 하며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다.
⑮풍족하진 않지만 언니를 사랑하는 지인들과 함께 여전히 그렇게 정을 나누며 살고 있었다. 가난도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이는 천상 예술가였다. 언니는 예전부터 물질적인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유로운 감성과 사랑만을 좇아가는 사람이었다.
16 유화물감 냄새가 짙게 베여있던 작은 개인 화실과 학교의 폐건물을 이용해서 만든 정수예술촌에서 1주일간 우리는 또 한 번 옛날처럼 시간을 살았었다.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마셨다. 그림 그리는 모습을 늦도록 지켜보고 그림 수업에도 따라다녔다.
17 그런데 가을부터 내가 몸이 아팠다. 투병 생활을 하다 보니 또 잊고 살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언니도 그때 몸이 아팠다고 한다.
18 또 바쁜 삶 속에서 잊고 지내다 2021년 1월. 지독하게 외로웠다. 사는 게 숨이 막혀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꼈을 때 마음 깊은 곳에서 언니가 생각났다. 언니가 너무 보고 싶었다. 잊고 살았는지 잊고 싶었는지, 모른 척 살았던 날 것이 아직도 가슴속에 꺼지지 않고 남아서 꿈틀댔다. 그렇게 다시 연락의 끈이 닿아 진주에서 언니를 만나게 되었다.
19 자주 만나지 않아도 말을 하지 않아도 우리는 닮은 결이 있었다. 그건 아마도 예민한 감성이 가지는 어떤 외로움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나는 언니처럼 두려움 없이 온전하게 몸을 던져 살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20 언니와 함께한 진주와 하동에서의 만남. 언니는 팍팍한 삶 속에서 나를 위해 이틀을 비워 두었다. 매화 향기만큼 싱그러운 2월 속을 거닐며 시인을 만나고 차를 마시며 주변 지인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21 진주의 낡고 오래된 작은 원룸에서의 하룻밤은 다시 나를 대학 시절로 데려다주었다. 창문에 무심하게 툭 걸쳐놓은 진홍빛 천 한 장이 커튼인 소박한 살림과 낮은 침대. 언니는 늘 작고 낮은 것, 보잘 것 없는 것, 후미진 곳을 좋아했다. 아프고 슬픈 모습들을 사랑했고 그 속에서 찬란함이 나올 때가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 언니에게서 그림은 슬픈 감정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카타르시스라고 했다.
22 언니한테는 내가 좋아하는 삶의 향기가 있었다. 전기 포트에 끓인 따뜻한 물 한 잔으로도 우리는 행복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나는 언니가 어떤 삶을 살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언니와 나 사이엔 무언의 기류 속에서도 소멸되지 않는 특별한 애정이 존재한다고 느꼈다.
23 그해 6월. 루시다 갤러리에서 언니의 전시회가 열렸다. 언니는 진정한 초록의 계절인 유월을 좋아했다. 나는 샴페인과 케잌을 사 들고 날아갔다. 작품을 사고 싶어서 머뭇거리며 이것저것 보고 있는데 하나를 추천해 주었다. 그 그림은 동백꽃이 짙은 어둠 속에서 피어 있는 ‘붉은 다이아몬드’ 작품이었다. 반짝이는 보석처럼 살라고 하면서.
24 그리고 9월 인사동 갤러리까지 나는 언니랑 동행했다. 인사동의 그 허름한 여관에서 2박 3일을 같이 지내면서 전시회를 지켜보았다. 화려한 작가의 삶 이면에는 가난한 현실이 있었다. 그 힘든 현실 속에서도 언니는 늘 당당했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며 살았다. 나처럼 오랜 세월 동안 알고 지낸 지인들이 참 많았다.
25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끊임없이 포용해내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언니는 자신의 힘듦을 말하지 않는다. 나도 물어보지 않았다. 늘 그렇게 살아왔기에 어쩌면 익숙한 모습이기도 했다.
26 그리고 다시 봄이 왔지만 내 삶이 바빠서 만나지 못했고 카톡으로만 안부를 전했다. 아마도 이젠 언제든지 언니를 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앞으로 만날 수 있는 날들이 많을 거라고. 좋아하지만 가질 수 없는 삶을 동경하며 나는 다시 편안한 현실로 돌아왔다.
27 “겨울 방학하면 진주 한번 와라 잘해줄게ㅎㅎ 보고 싶다” 이게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카톡이다. 결국 언니는 겨울방학도 시작되기 전인 작년 8월에 고인이 되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암으로 돌아가신 셋째 오빠와 그 충격으로 인해 생긴 엄마의 치매 때문에 힘든 시간을 통과하고 있었다.
28 문수 아저씨가 먼저 떠나고 언니도 뒤따라갔다고 한다. 지독한 슬픔에 지쳤던 것일까... 그들의 끈질긴 인연이 먹먹하게 가슴을 저민다.
29 이 황망함을 어쩌란 말인가? 왜 인간을 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사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늘 거기에 있을 거라고 언제든지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여기면서 나중으로 미루는 것. 나는 또 한 번 머리를 강하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30 이제 진주에 가도 언니를 만날 수가 없다. 언니가 없는 진주는 너무 쓸슬 할 것 같다. 언니가 너무 보고 싶다.
“우리가 진정으로 만나야 할 사람은 그리운 사람이다. 곁에 있으나 떨어져 있으나 그리움의 물결이 출렁거리는 그런 사람과는 때때로 만나야 한다. 마주침과 스치고 지나감에는 영혼의 울림이 없다. 영혼의 울림이 없으면 만나도 만난 것이 아니다.”
31 언니는 나에게는 언제나 그리운 사람이다. 그래도 다시 만나 오래된 회포를 풀었던 시간은 나에게 준 선물인 것 같다. 내 삶의 한 덩어리가 떨어져 나간 듯한 느낌이다. 언니와의 추억은 이제 붉은 보석으로 남았다.
언니 잘 가요
찬란한 슬픔을 사랑했던 언니
기쁜 우리 젊은 날에 다시 만나요
고단했던 삶의 무게를 이제는 내려두고
영면에 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