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주용 술어 | 뜻 | 비 고 |
메낯체아흐 | 인도자, 노래 지휘자 | 시55편 등 51개 시, 합3:19에도 사용됨 |
네기노트 | 현악, 줄로 타는 악기 | 시4편 등 6개 시 언제나 ‘인도자를 따라’라는 말과 결합됨. |
스미닛 | 현악 여덟째 줄, 낮은 음 | 시6, 12편 |
알라못 | 뜻이 분명치 않음 | 시46, 49편 |
깃딧 | 기쁜 곡조 | 시8, 81, 84편 |
네길로트 | 관악, 부는 악기 | 시5편 |
마할랏안놋 | 병의 노래 | 시88편 |
<곡조명에 따른 분류>
곡 조 명 | 뜻 | 비 고 |
아앨렛 샤할 | 사슴이란 곡조, 새벽의 사슴 | 시22편 |
소산님 | 백합화 곡조 | 시45, 69편 |
요낫 엘렘 르호김 | 멀리 있는 침묵의 비둘기 | 시56편 |
뭇랍벤 | ‘벤’이란 악사의 죽음 | 시9편 |
<시의 양식에 따른 분류>
시의 양식 | 뜻 | 비 고 |
미즈모르 | 시(時) | 시3편 등 57개의 시 종교적 예배에 사용되던 시만을 가리킴. |
쉬르 | 노래 | 시4편 등 30개의 시 종교적인 노래와 세속적인 노래에 다 같이 사용됨. |
마스길 | 교훈시 | 시32편 등 13개의 시 |
믹담 | 황금시, 금언시 | 시56편 등 6개의 시 |
식가욘 | 뜻이 분명치 않음 | 시7편 |
테필라하 | 기도 | 시17편 등 5개의 시 |
테힐라하 | 찬송시 | 시145편 이 명칭에서 시편 전체의 히브리어 제목 ‘테힐림’이 나왔음. |
<주제에 따른 분류>
주 제 | 비 고 |
감사와 경배 | 다윗(8,19,29,65,68,103,124,131,133,145) 미상(33,67,91,95,98,100,104,105,107,111,113,114,115,117,123,134, 135,136,146,147,148,149,150), 아삽(81) |
개인적 찬양 | 다윗(11,18,23,30,32,34,40,41,108,138,139) 고라 자손(46,48,84,85), 아삽(75), 미상(66,92,106,116,118) |
개인적 비탄 | 다윗(3-7,13,17,22,25-28,31,35,39,51,54-57,59-64,69,70,86,109,140 -143) 고라 자손(42,88), 아삽(76,77), 미상(43,71,94,102,120,130) |
국가적 비탄 | 고라 자손(44), 아삽(74,79,80,83), 모세(90) |
왕 | 다윗(18,20,21,101,110,144), 솔로몬(72), 고라자손(45), 에단(89) 미상(2,132) |
취 임 | 고라 자손(47), 미상(93,96,97,98,99) |
시온의 노래 | 고라 자손(42,87), 다윗(122), 미상(43,121,125,126,129) |
참 회 | 다윗(6,32,38,51,143), 미상(102,130) |
저 주 | 다윗(35,58,69,109), 아삽(83), 미상(137) |
메 시 야 | 다윗(16,22,24,110), 솔로몬(72), 고라 자손(45), 미상(2) |
지 혜 | 다윗(9,12,14,15,19,36,37,52,53), 아삽(50,73,78,82), 고라자손(49) 솔로몬(127), 미상(1,10,112,119,128) |
<저작 시기별로 본 다윗의 시> -참고로, 범죄는 밧세바 사건을 의미함/삼하11장-
| 왕이 되기 전 | 왕정초기 | 범죄 후 | 망명 중 | 왕정말기 | 연대미상 | 계 |
1권 | 7,11-13,17, 22,23,34,35
| 8,9,15,16,18-21, 24,26,29,36 | 5,6,32, 38-41
| 3,4,27,28,31
| 37
| 14,25,30
| (37) |
2권 | 52,54,56,57,59 | 58,60,68
| 51,55, 64 | 61,63,69,70 |
| 53,62,65
| (18) |
3권 |
|
|
|
|
| 86 | (1) |
4권 |
| 101 |
|
| 103 |
| (2) |
5권 |
| 108,110 |
| 143 | 139 | 107,109,122,131,133,138,140-142,145 | (15) |
계 | (14) | (18) | (10) | (10) | (3) | (18) | (73) |
특히, 14개 시에 붙은 설명은 그의 삶 가운데 일어난 특별한 사건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삼상19:11(시59편) -사울이 사람을 보내 다윗을 죽이려고 그 집을 지키고 있었을 때
삼상21:11(시56,34편) -다윗이 가드에서 블레셋인에게 잡혔을 때, 미친 체하다가 쫓겨남
삼상22:1(시142편) -다윗이 굴에 있을 때에
삼상22:9(시52편) -에돔인 도엑이 “다윗이 아히멜렉의 집에 왔었다”고 사울에게 밀고했을 때
삼상23:19(시54편) -십 사람이 사울에게 다윗이 그 지역에 숨어 있다고 밀고했을 때
삼상24:3(시57편)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
삼하8:13(시60편) -다윗이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만 여명을 쳐 죽이고 돌아왔을 때
삼하12:13(시51편)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
삼하15:16(시3편)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삼하15:23(시63편)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
삼하16:5(시7편) -베냐민인 구시가 말로 다윗을 대적했을 때
삼하22:2~51(시18편)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때
<애가, 감사시, 찬양시 세 가지 기본 형태에 따른 분류>
1)개인적인 애가: 개인이 직접 하나님께 자신을 구원하고 보호해주실 것을 구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보통 서언(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 애가,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고백, 간구, 찬양의 선포 또는 서원 등의 요소가 포함됩니다(대부분의 시들이 이에 속함).
2)단체적인 애가: 개인이 아닌 백성 전체가 하나님께 구원과 보호를 요청한 것입니다(44, 60, 74, 79, 80, 83, 85, 90, 123편 등).
3)개인적인 감사시: 한 개인에게 하나님이 이미 행하신 일들에 대해 감사하며, 또한 앞으로 그가 행하실 일에 대한 신뢰를 표현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 개략적인 진술, 구원에 대한 보고, 찬양에 대한 새로운 서원 등의 요소가 포함됩니다(18, 30, 32, 34, 40, 41, 66, 106, 116, 138 등).
4)민족적인 감사시: 개인이 아닌 민족 전체의 감사를 표현한 것입니다(124, 129편).
5)일반적인 찬양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의 위대하심을 칭송하는 것으로 이 시들은 감사시보다 더 일반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8, 19, 29, 103, 104, 139, 148, 150편).
6)묘사적인 찬양시: 하나님의 속성과 그의 역사하심을 찬양하는 것입니다(33, 36, 105, 111, 113, 117, 135, 136, 146, 147편 등).
이 외에도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등 세 차례의 종교적 절기에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자들이 불리어졌던 ‘순례의 노래’ 또는 ‘시온의 노래’(43, 46, 48, 76, 84, 87, 120-134편), 시작과 끝이 모두 ‘할렐루야’로 되어 있는 ‘할렐시’(146-150편), 여호와의 주권적인 통치 및 장차 그리스도가 다스릴 왕국을 묘사한 ‘대관시’(47, 93, 96-99편), 지상의 왕과 하늘의 왕의 통치를 묘사한 ‘궁정시’(2, 18, 20, 21, 45, 72, 89, 101, 110, 132, 140편 등), 독자를 의의 길로 인도하며 가르치는 ‘지혜시’(1, 37, 119편)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시편 120편부터 134편까지는 흔히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로 알려져 있는데(각각의 시에 붙여진 표제로 인해) 그 의미는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됨을 노래한 것,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라는 것, 이 시편을 노래할 때 높이 올려서 부를 것을 의미한다는 등의 견해들이 있으나 대체로 예루살렘 순례자들에 의해 불리어진 노래들로 추정되고 있습니다(참고로, 전체 15편 가운데 저자가 밝혀진 것은 총 5편, 이중에서 다윗이 4편, 솔로몬이 1편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음).
또한 시편 146편부터 150편까지의 다섯 편은 시작과 끝이 ‘할렐루야’로 되어 있는 ‘할렐시’로 일컬어지는데 이는 이 다섯 편의 시가 시편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것은 모든 시 중에서도 가장 고귀하며 아름다운 것이 하나님께 대한 찬송시임을 암시하기 위함인 듯합니다. 한편, 시146편은 다른 네 편(공동체적 찬미시)과는 달리 개인적 찬양시로 이 시편의 저자는 70인역에 의하면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입니다. 따라서 시146편은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참된 도움의 근원되신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 셀라의 의미:
‘셀라’는 시의 한 연이 끝날 때마다 나타나는 특별한 용어로서 시편에서 39개의 시에 71번, 하박국에서는 3번 등장합니다. 이 말은 ‘들어 올린다’란 뜻을 지닌 히브리어 ‘살랄’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높임’ 혹은 ‘중지’(中止)의 뜻을 갖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러한 의미에서 ‘셀라’는 노래를 부를 때 음성을 높이 올리라는 일종의 음악 지시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노래에 반주가 있을 경우에는 간주곡이나 후주곡에서 기악의 소리를 높여 노래의 흐름을 나타내기도 했는데 이때 노래는 잠시 중지하여 쉬게 되는 것입니다.
* 성경에서 가장 긴 장(시119편)과 가장 짧은 장(시117편)
시편 119편은 성경 전체를 통하여 가장 긴 장으로써 총 176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176절은 8절씩 총 22연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연들은 모두 각 머리글자가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시작되는 답관체의 형식을 취하고 있어 매우 정교한 짜임새를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단 한 절 112절을 제외하고는 각 절마다 ‘율법’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율법, 증거, 판단, 율례, 말씀, 법도, 계명, 약속, 길)가 반드시 사용되고 있는데, 이렇게 긴 시가 이러한 통일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로서 본시의 구성상의 탁월함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 시117편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짧은 장으로서 단 2절로만 구성되어 있습니다(전체가 5행으로 이루어진 단연시). 무명의 이 시인은 이 짧은 시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찬양하면서(2절) 이 세상 모든 백성들에게 이 찬양에 동참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 시편 해석 시 주의할 점
1) 시의 저작 동기나 역사적 사건을 설명해 주는 문구가 있으면, 반드시 그것에 비추어 해석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런 것이 없을 시에는 역사적 상황을 재생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므로 무리하게 억지로 역사적 상황을 꿰맞추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2) 몇몇 시는 이스라엘 예배의 일부 성격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이러한 시들은 이와 같은 점 등을 고려해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5:7; 66:13; 68:24,25 등).
예컨대, ‘예배하리이다’(시5:7)는 문자적으로 ‘납작하게 엎드리다’는 뜻으로 이는 예배자가 지성소를 마주한 채 희생 제단 옆의 뜰에 엎드려 있는 모양을 설명한 것입니다. 후일 원방으로 흩어져 성전에 올라와 예배할 수 없었던 구약의 성도들은 기도를 드릴 때 얼굴을 지성소가 있는 방향으로 행해 기도드렸습니다(단6:10).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시5:7)
3) 많은 시가 확실한 구조와 주제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와 같은 구조 및 주제 파악을 통해 각 시의 저자가(특히, 성경의 원저자이신 성령께서) 말하고자 하는 바에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4) 대부분의 시들이 장차 오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역들을 예언하고 있고,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성취되고 완성되었으므로 각 시는 반드시 메시아적 관점, 즉 기독론적인 관점에서 해석해야 함이 마땅하겠으나, 문법적 ․ 역사적 해석을 무시한 무분별한 은유화는 지양해야 할 것입니다.
* 시편 개요
1. 제1권(1~41편)
1) 무명의 시(1,2,10,33편)
2) 다윗의 시(3-9, 11-32, 34-41편)
2. 제2권(42~72편)
1) 고라 자손의 시(42,44-49편)
2) 무명의 시(43,66,67,71편)
3) 아삽의 시(50편)
4) 다윗의 시(51-65, 68-70편)
5) 솔로몬의 시(72편)
3. 제3권(73~89편)
1) 아삽의 시(73-83편)
2) 고라 자손의 시(84,85,87,88편)
3) 다윗의 시(86편)
4) 에단의 마스길(89편)
4. 제4권(90~106편)
1) 모세의 시(90편)
2) 무명의 시(91-100, 102, 104-106편)
3) 다윗의 시(101,103편)
5. 제5권(107~150편)
1) 무명의 시(107,111-119,135-137편)
2) 다윗의 시(108-110,138-145편)
3)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120-134편)
4) 할렐루야 시(146-150편)
걱정과 묵상(1:1~3)
* '묵상'이 좋다는 말씀 많이 들으셨죠?
복 있는 사람은 늘 하나님의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사람이라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묵상'이 좋다는 말씀 많이 들으셨죠? '말씀 묵상'이 중요하다는 것 역시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어떤 것이 묵상이며,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는지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묵상'은 한 마디로 '되새김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 같은 동물은 일단 음식을 많이 먹어서 뱃속에 저장에 두었다가 시간이 나면 입으로 다시 꺼내어 되새김질을 한다고 합니다. 소를 자세히 관찰하면, 틈만 나면 무엇인가를 늘 열심히 씹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소에게서도 배울 점이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도 소처럼 틈틈이 되새김질하는 습관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음식뿐만이 아닌 생각까지도.... 종일 씹고 씹고 또 곱씹으면서 소화해 내어야 할 것입니다. 오랫동안 꼭꼭 씹어서 먹어야 건강에 좋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잘 읽고 묵상하여야 신앙에 여러모로 유익할 것입니다.
* '묵상'은 반복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반복해서 생각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대상이 중요합니다. 한 문제를 놓고서 반복해서 생각하면 ‘걱정’이 되지만, 말씀을 반복해서 생각하면 ‘묵상’이 됩니다. 무엇을 반복해서 생각하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무엇인가 하나씩을 반복해서 생각하곤 합니다. 단지 그 대상이 무엇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요즘 무엇을 반복해서 생각하고 있습니까? 혹시 문제와 걱정거리를 놓고 거듭 거듭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목숨)를 한 자나 더 할 수 있겠느냐"(마6:27)
이 말은 걱정이 너희 목숨을 한 순간이라도 연장시킬 수 있겠느냐 는 의미입니다. 문제를 반복적으로 생각한다고 그 문제가 닳아져 없어지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문제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성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문제 앞에 직면하면, 그 문제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되는 버릇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하면서 생각하고, 밥 먹을 때도 생각하고, 걸어가면서도 생각하고,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볼 때에도 생각하게 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하루도 모자라서 이틀을 생각하고 열흘까지도 생각합니다. '부지런히' 고민을 합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동안을 고민하고 또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문제는 우리가 본의 아니게 '문제'를 놓고 반복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묵상'이 아닙니다. 바로 '걱정'인 것입니다. 이런 것은 결코 우리에게 유익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늘 우리로 하여금 '걱정' 속에 파묻혀 살게 만듭니다. 문제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보면 그 문제가 닳아 없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커집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쪽으로 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문제를 더 키우는 쪽으로 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점을 하나님은 너무도 잘 아시기에 늘 이렇게 권면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빌4:6)
* 진짜 '묵상'을 하십시오.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라"(시1:2)
한 문제를 놓고 반복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걱정'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생각하는 것은 '묵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묵상' 한답시고 성경본문을 읽어 놓고선 그 본문과 전혀 상관없는 '문제들만' 반복적으로, 열심히 되새김질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문제를 묵상하지 마십시오. 문제를 되새김질하지 마십시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생각하십시오. 한번 읽고 덮어버리지 마시고, 한 구절 한 구절을 오랫동안 곱씹으십시오. 밥 먹을 때에도, 일을 할 때에도, 걸어가면서도, 혼자 있을 때에도, 누워 있을 때에도 생각하고 또 생각하십시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하루 종일 생각하는 습관을 기른다면,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비밀을 우리와 기꺼이 나누실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이 비밀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입니다(시편1편). 복 있는 사람은 처음부터 태어나는 사람이기 보다 만들어지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복 있는 사람은 흔히 생각하는 돈 많은 사람도, 권력가도 아닙니다. '묵상'의 즐거움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일 것입니다. 성경은 꾸준히 통독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매일 조금씩 오랫동안 곱씹고 되새김질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루 종일 하나님 말씀을 생각하는 습관을 기르십시오. 틈틈이 하루 종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생각하는 습관을 기르십시다.
* 묵상이 어려울 것 같다구요?
우리가 걱정하는 방법을 안다면, 묵상하는 방법을 우리는 이미 터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관심을 걱정거리에서 성경구절로 돌리기만 하는 되기 때문입니다. 묵상! 별게 아닙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부지런히 걱정하셨던 그대로 대상만 바꿔서 말씀을 묵상하시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시작해요. 우리~
회복을 위한 간구(시 6편)
*절망의 막다른 골목, 고통의 심연 앞에서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1~3절)
다윗은 하나님을 향해 더 이상 주의 분노로 자신을 책망하지 말아줄 것을, 더 이상 주의 진노로 징계하지 말아줄 것을 간절히 호소하고 있습니다(1절). 왜 입니까? 그간의 책망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충분히 수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의 징계만으로도 (육체와 영혼이) 충분히 고통당했기 때문입니다(2절).
대신 그는 하나님께 무엇을 구합니까?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또한 자신을 고쳐(변화시켜)주실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2절). 우리는 어떻습니까? 절망의 막다른 골목 앞에서, 고통의 심연 앞에서, 오직 하나님께만 메어달려 오로지 그분의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까?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라는 한 복음성가의 가사처럼 말입니다. 오직 주님만 의지한 채 오로지 주님의 말씀대로만 자신을 고쳐주시고 세워주시며 소성시켜주시도록 간구하고 있습니까?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 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시41:4) /
“나의 영혼이 눌림으로 말미암아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시119:28)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소성케) 하소서.”(시119:25)
한편, 다윗은 ‘이 일로 인해’ 연일 탄식함으로 피곤해질 대로 피곤해져 있었으며, 밤마다 눈물로 그의 침상과 요를 적시어 왔습니다(6절).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도대체 무슨 일 때문입니까? 다윗에게는 과연 어떤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요? 물론 성경에 구체적으로 명시된 바가 없어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다음의 구절들로 미루어 보건대 사람들, 즉 그의 대적들 때문에 비롯된 것으로 짐작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7절)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8,9절)
사실 우리는 ‘사람들 때문에’ 쉽게 실망하고, ‘사람 때문에’ 곧잘 분내며 ‘사람 때문에’ 종종 해서는 안 될 악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다윗의 경우 역시 이 같은 범주에 들어있을지도 모릅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시37:1,7,8)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들을 질투하였음이로다.”(시73:2,3)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람 때문에 실망하고 사람 때문에 불평하며 사람 때문에 해서는 안 될 악을 저지르려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었네 나의 하나님 그분을 볼 때 나는 만족 하였네’ 라는 한 복음성가의 가사처럼, 세상과 사람을 바라볼 게 아니라 오직 나의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오로지 그분만을 바라보면서 나아가야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변함없는 신뢰, 그리고 선취적 믿음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악을 행하는 자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소리를 들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시6:4,8,9)
다윗은 이 일로 인해 많은 슬픔과 고난을 당했으며 심지어 죽음의 그림자가 자신의 턱밑까지 드리워졌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5절).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시6:5) /“...그러나 진실로 여호와의 살아계심과 네 생명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뿐이니라.”(삼상20:3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회복을 위한 몸부림’을 멈추지 않습니다.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주의 사랑(자비)을 구함으로써(4절).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그가 이처럼 주의 사랑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변함없는 신뢰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어떠한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다윗처럼 망설이거나 주저함 없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변함없는 신뢰를 소유하고 있습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한편, 이러한 신뢰는 하나님께서 결국 자신의 간구를 들어주실 것이라는 확신, 즉 선취적(先取的) 믿음을 갖기에 이르게 했습니다(8~10절). “악을 행하는 자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소리를 들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미 성취된 것들에만 감사하고 또한 찬양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어주신 것뿐만 아니라 앞으로 이루어주실 것까지 감사하게 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됩시다. 소위 선취(先取)하는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 말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전5:18)
나의 의로우신 재판장(시 7편)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를 삼키려 하는 세상 한 가운데에서...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 건져낼 자가 없으면 그들이 사자 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시7:1,2)
시편 7편은 어떤 배경 하에서 드려진 찬양입니까? ‘베냐민인 구시의 말에 따라 여호와께 드린 노래’라는 표제에서 볼 수 있듯, 이 찬양은 온갖 말들로 다윗을 대적했던 일단의 무리에 대해 다윗이 하나님께 당신의 공의로우신 개입을 간절히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시7:1)
그 일단의 무리 중 대표격은 누구였습니까? (표제에서 알 수 있듯) 베냐민인 구시입니다. 우리는 그가 누구였고 또한 언제 어디서 다윗을 대적했는지 알 순 없지만, 마치 그 기세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사납고 무서웠음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2절). “건져낼 자가 없으면 그들이 사자 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 이는 신약성경의 어느 부분을 연상케 합니까?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우리가 근신하고 깨어 있지 않으면, 누가 우는 사자와 같이 덤벼들어 우리를 찢고 뜯는다고 했습니까? 우리의 대적 마귀입니다(벧전5:8). 그렇다면 그 마귀는 주로 무엇을 통해서 우리를 대적합니까? 육체와 사람, 세상 등을 통해서입니다. 본문의 경우는 육체와 사람, 세상 이 세 가지 중 어떤 것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사람, 즉 사람이 내뱉는 악한 말입니다.
대적들은 주로 어떤 말들로 다윗을 대적했습니까?(3~4)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런 일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서 까닭 없이 빼앗았거든” 본문으로 미루어보건대 ‘다윗이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다, 대적에게서 까닭 없이 빼앗았다’ 등으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다윗은 무엇이라고 하나님 앞에 항변하고 있습니까? 만일 내가 (대적들이 말한 것처럼) 이러이러한 일들을 저질렀다면, 원수가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고 내 영광을 먼지 속에 처박아도 좋다고 말하고 있습니다(5절). “....원수가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게 하고 내 영광을 먼지 속에 살게 하소서(셀라)”
*나의 의로우신 재판장 되신 하나님을 만나다.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나를 위하여 깨소서 주께서 심판을 명령하셨나이다.”(시7:6)
결국 다윗은 하나님을 향해 무엇을 간절히 요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입니다.
“...주께서 심판을 명령하셨나이다 민족들의 모임이 주를 두르게 하시고 그 위 높은 자리에 돌아오소서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시7:6하~9상)
이는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연상케 합니까? 마지막 심판, 즉 최후 심판입니다(7~9절). 다윗은 이 대목에서 무엇을 간절히 호소하고 있습니까?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입니다. 다윗은 이 대목에서 하나님께 무엇을 타개해달라고 애절히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까? 악인이 횡행하는 모순된 현실입니다.
왜 입니까?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다윗이 이처럼 그분을 향해 간절히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까? 의로우신 하나님, 즉 의로우신 재판장이자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는 분,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시7:9하~11).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를 삼키려 하는 세상 한 복판에서 ‘나의 의로우신 재판장 되신 하나님’(시7:9,11), 표호 하는 사자와 같이 우리를 집어삼키려 하는 거친 세파 한 가운데서 ‘우리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시7:9하), 사나온 맹수와 같이 우리에게 덤벼들어 찢고 뜯으려 하는 세상의 거친 물결 앞에서 ‘(우리를 위해)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시7:11)을 간절히 찾고 또한 만나고 있습니까?
이 고백이 있는 사람은 잠시 넘어질지언정 아주 엎드러지지 않습니다. 이 신앙이 있는 사람은 잠간 근심에 잠긴 듯하나 영원히 그 근심 속에 매몰되지 않습니다. 이 믿음이 있는 사람은 지금은 잠시 실패한 듯하나 후일 반드시 승리하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37;24)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고후6:9하~10상)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시 8편)
*지으신 모든 피조물들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찬양합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시8:1)
다윗은 오늘 시편 8편을 통해 마치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하는 듯합니다. 우리의 눈을 들어 온 땅과 하늘을 바라보라고 말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들에는 주의 아름다운 이름과 그 영광이 충만하게 뒤덮어 있기 때문입니다(1절). 한 찬송의 가사처럼 말입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숲속이나 험한 산골짝에서 지저귀는 저 새소리들과 고요하게 흐르는 시냇물은 주님의 솜씨 노래하도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찬송가 79장)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날마다 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세계 속에서 주의 아름다운 이름을, 주의 영광을 발견하고, 또한 목 놓아 찬양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분명히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 만한 것들이 하늘 속에 보이며,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지으신 모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져 있다고 말입니다(롬1:19,20).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들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그러나 애석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거나 감사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질 대로 허망하여지고 스스로를 지혜 있다고 하는 아주 어두워져 있습니다(롬1:21,22).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우리는 어떻습니까?
만일 우리가 잠잠하면 하나님은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권능을 세우실 것입니다(2절).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시8:2)
실제로 예수님 당시 마땅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과 찬양을 올려드려야 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찬양하지 않자 어린아이들의 입술을 통해서 그 찬양을 받으신 바가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본 적이 없느냐 하시고.”(마21:15,16)
*우리를 생각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시8:4~6)
(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만물로 향했던 다윗의 두 눈은 이제 자신에게로 향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을(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한없는 관심과 사랑을 찬양하기 시작합니다(1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사실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천사보다 뛰어난 피조물로 창조되었으나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만물의 주관자’라는 그 영광을 상실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셔서 그 죄악을 해결하심으로써 그 지위를 회복하셨습니까? (물론 최종적인 회복은 주님의 재림과 함께 성취될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잠시(조금)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2:6~9)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와 같이 우리를 생각하시고 돌보시는 그 하나님을 마음껏 드높이고 있습니까? 삶과 노래로 말입니다. 한편, 히2:6의 ‘돌보시나이까’(헬, 에피스켚테)는 ‘방문하다’의 미래형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계속하여 찾아오시고 은혜 베풀어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를 찾아오시고 은혜 베풀어주시기 기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전심으로 찬양하고 있습니까? 다윗이 다시금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렸듯이 말입니다(1절).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또한 다음의 찬송 가사처럼 말입니다.
‘주 하나님 독생자 아낌없이 우리를 위해 보내주셨네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주 내 모든 죄를 대속하셨네 /내주 예수 세상에 다시 올 때 저 천국으로 날 인도하리 나 겸손히 엎드려 경배하며 영원히 주를 찬양하리라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찬송가 79장 3절)
하나님, 나의 환난 날의 요새(시 9편)
* 다윗, 지난날의 구원을 감사하다.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시9:1~3)
다윗은 여호와께 감사하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찬송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지난날 지존하신 주님께서 자신을 위해 이루신 모든 기이한 일들을 말입니다(1~2절).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그 기이한 일들이란 과연 무엇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까? 다음의 구절들로 보아 하니 부당하게 다윗을 대적해왔던 나라와 원수들로부터 구원을 의미하는 듯합니다(3~6절).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이방 나라들을 책망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나이다 원수가 끊어져 영원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하나님은 다윗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시되(4절) 어떤 방식으로 그리 하셨습니까? 다윗의 대적들을 책망하시고 멸하시되 토판에 기록된 글씨를 뭉개버리듯 존재한 흔적조차 없애버림으로 그리 하셨습니다(5절). 원수를 끊어 멸하시되 영원히 멸망하게 하심으로 그리 하셨던 것입니다(6절).
한편, 다윗이 지난날의 구원을 통해 알게 된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세계를 공의로, 만민을 정직으로 판결하시는 분, 즉 공평하신 하나님입니다(8절).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 둘째, 환난 때 압제를 당하는 자들의 요새와 같은 분, 즉 우리의 피난처 되신 하나님입니다(9절).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마지막으로 주의 이름을 알고 찾고 의지하는 자들을 결코 버리거나 떠나지 않는 분, 즉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10절).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 그 하나님을 의지하여 장차 주어질 구원에도 미리 감사하다.
“너희는 시온에 계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그들을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11~14절)
다윗은 이제 본론으로 돌아와 하나님께 지금 직면하고 있는 환난들로부터 구원해주실 것을 간절히 호소하고 있습니다(13절).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악인들에 대한 심판의 호소와 더불어 말입니다(15~20절).
“이방 나라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자기가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자기가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 (힉가욘, 셀라)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주 앞에서 심판을 받게 하소서 여호와여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자기는 인생일 뿐인 줄 알게 하소서 (셀라)”
한편,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다윗이 당면 중인 문제해결 호소에 앞서 지난날의 구원을 되돌아보면서 먼저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렸으며, 또한 지난날의 구원을 통해 구체적으로 깨닫게 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해가면서 당면 과제 해결을 호소하되, 장차 주어질 구원에 미리 감사하면서 그리 했다는 점입니다(11,12절). “너희는 시온에 계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그들을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현재 당면 중인 문제 해결을 위해 어떤 식으로 부르짖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의 다윗처럼, 당면 중인 문제해결에 관한 호소에 앞서 먼저 지난날의 구원을 회상해보고 감사함이 어떠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이 과정 중에 구체적으로 깨닫게 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면서 간구하되, 장차 주어질 응답에 미리 감사하면서 그리 함이 또한 어떠하시겠습니까?
잊지 마십시오.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당하지 않으며, 가난한 자들이 영원히 실망하지 아니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17절).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당하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들이 영원히 실망하지 아니하리로다.”
마음의 소원과 입술의 간구(시 21편)
마음의 소원과 입술의 간구를 거절치 않으신 하나님
“그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셨으며 그의 입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셨나이다. (셀라)”(2절)
다윗은 1절에서 크게 기뻐하며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크게 즐거워 하리이다.”(1절) 왜 입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여호와께서 자신의 소원과 그 입술의 간구를 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거절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2절).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겐 이와 같은 경우가 없습니까? 우리의 마음의 소원과 입술의 간구를 들어주시고 또한 거절치 않으신 그 분 앞에 (본문 속 다윗처럼) 다시 한 번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편, 2절의 “그의 마음의 소원(또는 그 입술의 요구)”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순금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셨나이다”(3절) 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 그의 대적들로부터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승리케 하시되, 어떤 식으로 그리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첫째, 주의 아름다운 복을 허락하심으로써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그를 영접하시고....그가 영원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복이 되게) 하시며 주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시나이다.”(3,6절)
먼저, 주의 아름다운 복을 허락하심으로써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다윗을 복, 즉 복의 통로로 삼으심으로써 그를 승리 가운데로 인도하셨다는 말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2,3)
둘째, 특정한 사람에게 베푸는 특별한 배려로써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그를 영접하시고...”(3절)
또, 특정한 사람에게 베푸는 특별한 배려로써 그리하셨습니다. 여기서 ‘영접하다’(히, 테카드멘누)는 ‘만나다, 참여하다’는 뜻의 강조형으로써 하나님께서 특정한 사람에게 베푸는 특별한 배려를 가리키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도우시되 특정한 사람에게 베푸는 특별한 배려로써 그리하셨다는 말입니다. 어찌 다윗뿐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 된 모든 사람들 역시 그런 특별한 배려의 대상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3:17)
셋째,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심으로써
“그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그에게 주셨으니 곧 영원한 장수로소이다.”(4절)
또한,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심으로써 그리하셨습니다(4절). 여기서 ‘영원한 장수’란 무엇을 뜻합니까? 실제적으로 수명이 길어져서 죽지 않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자들이 얻게 될 영생, 즉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4절은 어찌 해석될 수 있겠습니까? 생의 대부분을 전장에서 보내야만 했던 그에게 영원한 나라, 영원한 생명을 대망케 하심으로써 인내하게 하셨다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윗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 가운데서 영원한 나라만을 바라보면서 인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매일같이 겪게 되는 문제와 어려움들...
“왕의 손의 왕의 모든 원수들을 찾아냄이여 왕의 오른손이 왕을 미워하는 자들을 찾아내리로다...비록 그들이 왕을 해하려 하여 음모를 꾸몄으나 이루지 못하도다.”(8,11절)
사실, ‘원수 또는 대적’은 다윗의 시편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로서 행동뿐 아니라 말과 생각 등으로 다윗을 대적했던 모든 자들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 역시 매일같이 문제를 만나며, 크고 작은 문제들에 노출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마다 우리는 어찌 해야 합니까? 다윗처럼 부지런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이 모든 일들을 고하고 또 고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대해 부요한 자가 되라!(시 49편)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자랑하는 자여!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요함을 자랑하는 자는....”(6절)
시편 49편은 고라자손이 지은 시로 자신의 재물을 의지하고 자랑하는 자가 얼마나 어리석은 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 16절 이하에 등장하는 한 어리석은 부자처럼 말입니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눅12:16~20)
여기서 예수님은 이 어리석은 부자를 향해 단 한 마디로 평가하셨습니다. 무엇이라고 말입니까? 세상에 대해선 부요한 자일지언정 하나님께 대하여는 결코 부요하지 못한 자라고 말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12:21)
시편 49편 역시 세상에 대해선 부요하나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하지 못한 자들에 대한 경고가 담겨져 있습니다. 무엇이라고 말입니까?
*재물이 아무리 많다 한들 자신조차 구원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7,8절)
첫째, 재물이 아무리 많다 한들 자신의 형제는커녕 자신조차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7,8절). 왜 입니까? 사람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나도 크고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일평생 재물을 모은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자신을 위한 속전을 마련하지 못할 텐데 말입니다.
찬송가 544장의 가사처럼, 울어도 못합니다. 힘써도 못합니다. 참아도 못합니다. 오직 무엇으로만 가능합니까? 믿음입니다. 오직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힘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한 삶을 얻습니다. “믿으면 되겠네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힘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 고난당했네 나를 구원하실 이 예수밖에 없네.”(찬송가 544장 4절)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지만 언젠간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인가 그러나 그는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도 함께 망하며 그들의 재물은 남에게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을 보게 되리로다 그러나 그들의 속 생각에 그들의 집은 영원히 있고 그들의 거처는 대대에 이르리라 하여 그들의 토지를 자기 이름으로 부르도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9~12절)
둘째,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언젠간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9~12절). 그런데도 그들은 어리석게도 어떤 확신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들의 집은 영원히 있고 그들의 거처는 대대에 이르리라....”(11절 중) 이와 같은 확신이 단적으로 표출된 예가 바로 무엇입니까? 자신들이 거주하고 있는 땅을 자신들의 이름으로 명명한 것입니다. “...하여 그들의 토지를 자기 이름으로 부르도다.”(11절 하)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죽는다는 점에서 무엇과 같습니까? 짐승입니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12절)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들처럼 이 땅위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며 또한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서 말입니다. 오직 썩어질 양식만을 위해서 말입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6:27 상)
*영광과 지위가 하늘을 찌른다 한들 영원할 순 없습니다.
“사람이 치부하여 그의 집의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그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들은 그들의 역대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16~19절)
셋째, 아무리 그 영광과 지위가 극에 달한다 한들 결코 영원할 순 없습니다. 본문은 사람이 치부하여 그의 집의 영광이 더한다 해도 결국 어떻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17절) 비록 생전에 자신의 지위와 재물 등과 같은 세상적인 것에서 얻어진 뿌듯한 감정에 스스로 도취된다 하더라도(자기를 축하한다 하더라도),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다 하더라도 결국 어떻게 되고 만다고 했습니까? “...그들의 역대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19절).
*이제라도 깨닫고 돌아서서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십시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20절)
존귀하나 깨닫지 못한 자들에 대해 성경은 무엇 같다고 했습니까?(20절) 멸망하는 짐승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우리는 이와 같은 점들을 깨달고 돌이켜야 합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는 것 대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눅12:21).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 대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기 시작해야 합니다(요6:27). 보물을 자신을 위하여 땅에 쌓아 두는 것 대신 하늘에 쌓아 두고자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겠습니다(마6:19,20).
감사로 예배하는 자가 되라!(시 50편)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여 들으라!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판결하시려고 위 하늘과 아래 땅에 선포하여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4,5절)
시편 50편은 다윗시대의 성전음악가 아삽의 시로 참된 예배에 대한 권고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아삽은 많은 노래를 작곡, 그중 12편이 시편 가운데 수록되어 있는데(시50, 73~83편) 그의 작품 대부분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경건한 자세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찬양하는 삶을 살도록 권면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어떤 이들을 자신 앞에 모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성도들입니다.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5절 상)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과 무엇으로 언약을 맺은 자들이라고 소개되고 있습니까? 제사 곧 예배입니다.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5절 하) 이 말은 한 마디로 성도들의 삶이 무엇으로 특징되어져야 한다는 말입니까? 예배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삶이 곧 예배이며, 예배로 특징되어지는 그런 삶을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왜 자신의 성도들을 그 앞에 모으라고 하신 것입니까?
*형식적인 예배 행위를 이제 그만 멈추고...
“나는 네 재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는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내가 수고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8~13절)
첫째, 형식적인 예배에 대한 책망을 하시기 위해서입니다(7~15절).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그들을 책망하지 아니하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제물입니다. “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 아니하리니...”(8절 상) 왜 입니까? 그들의 번제가 항상 성전 앞에서 드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8절 하)
그러면 무엇 때문에 책망하시고자 하는 것입니까? 형식적인 예배 행위 때문입니다. 대신 무엇으로 예배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감사로 하나님께 예배하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마음 중심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감사와 찬양으로 예배하라.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14절 상)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 드리라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예배가 하나님께 상달되도록 마음 중심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곳에서 샘솟듯 흘러나오는 감사와 찬양으로 예배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날마다 마음 중심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감사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자 몸부림치고 있습니까?
또, 하나님은 자신 앞에 무엇을 갚으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서원입니다.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라.”(14절 하) 이는 하나님과의 맺은 약속들을 엄숙히 이행해가는 삶, 즉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한 언행일치적인 삶을 살아가라는 의미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물론 무분별한 서원 남발은 자제하되 하나님 앞에서 내 뱉은 말에 대해선 그것들을 이행코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매한 자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더 나으니”(전5:2,4-5)
또한, 하나님은 환난 날에 누구를 부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15절) 이는 구약의 어떤 말씀을 연상케 합니까?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욜2:32 상)입니다. 여기서 ‘부른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막연한 부름이 아닌 일정한 대상을 향해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부르는 것, 즉 간절한 기도로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날마다 하나님을 향한 확신과 믿음 속에서 기도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중심의 진실함을 원하시는 하나님(시 51편)
*나의 죄악을 지워 주시고 씻으시며 제하소서.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1,2절)
시편 51편은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라는 표제에 나와 있듯,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전장에서 죽인 후 선지자 나단을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엄중한 책망을 듣고 자신의 죄과에 대하여 폐부 깊은 곳에서부터 오열하며 통회했던 시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죄가 없습니까?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나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없는가 볼지어다...”(애1:12 상)
한편,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지금 다윗이 하나님의 징계를 면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닌 그의 죄 자체를 제거해 달라고 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다윗이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현실적인 그 어떤 고통보다도 바로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보통 죄 자체를 두려워하기보다 그 죄에 따른 징계만을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별반 다르지 않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다윗은 죄에 따른 징계보다도 그 죄 문에 상실하게 되는 하나님의 임재를 몹시도 두려워했는데 이것이야말로 경건한 자의 척도가 아닐까요? 우리 역시 다윗처럼, 그리고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처럼, 죄에 따른 징계보다도 죄 자체를 두려워할 줄 알아야겠습니다. 현실적인 그 어떤 고통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11절)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11절)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6절)
자신의 죄과에 대하여 뼛속 깊은 곳으로부터 오열하며 통회하던 다윗의 간구는 6절에 이르러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언제부터입니까? 하나님께서 중심의 진실함을 원하시는 분이라는 점을 깨닫고서부터입니다.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6절 상)
사실 다윗은 이 시점에서 자신의 죄악이 단순한 제사 행위 자체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직감하고 있었습니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16절) 간절한 마음이 없는 제사의 헛됨 말입니다. 그러던 차에 ‘중심의 진실함, 즉 내적 순결성을 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결국 그는 무엇으로 반응하게 됩니까? 상한 심령, 즉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예배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여기서 ‘상한 심령’이란 무엇을 가리킵니까? ‘상한’(히, 네쉬바라)은 ‘조각나다, 찢어지다’의 뜻으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며 범죄에 대해 마음을 찢으며 애통해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주께 나아가고 있습니까? 옷이 아닌 마음을 찢은 채(욜2:13) 말입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욜2:13) 실로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중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중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34:18)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시 52편)
*극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까? 모진 고통 속에 홀로 남겨진 것 같습니까?
“포악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하는 도다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 도다 (셀라) 간사한 혀여 너는 남을 해치는 모든 말을 좋아하는 도다.”(1~4절)
시편 52편은 표제에 나타난 바와 같이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자신을 돌보아 준 제사장 아히멜렉이 에돔인 도엑의 밀고로 죽임을 당한 사건을 배경으로 쓰인 시입니다(삼상21:1~9; 22:6~19). 하나님의 제사장 85인과 그들의 온 가족이 어찌하여 이렇게 한꺼번에 몰살을 당하게 되었습니까? 오직 한 사람 에돔인 도엑의 밀고 때문입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자신의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했고(1절), 선보다 악을,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더 사랑했으며(3절), 남을 해치는 모든 말을 좋아했던 사람이었습니다(4절).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에게는 그와 같은 요소들이 없습니까?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 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약3:8~10)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내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저주보다는 찬송이, 악한 말보다는 감사가, 거짓보다는 의를 말함이 더욱 가득할 수 있도록 구하고 또 구해야 할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습니다.
“포악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1절)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1절 하) 라는 대목입니다. 이는 사울의 신하이자 목자장이었던 도엑이 자행한 악행들을 소상히 열거해나가던 중에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말 같은 인상을 주게 합니다. 왜일까요? 다윗은 왜 이 같은 말을 불쑥 집어넣은 것일까요? 실수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이는 제아무리 악인들의 횡포가 가득하고 세상이 악으로 관영해진다 하더라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어떠한 상황과 어떠한 처지에 놓인다 해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토록 자신과 함께 할 것이라는 점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8절)
다윗은 지금 사울에게 쫓겨 다니는 와중에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항상 있도다’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돌보아 준 제사장과 그 일가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을 때에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도엑을 비롯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를 든든하게 하던 때에도(7절)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7절)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윗처럼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믿고 또한 의지하며 나아가고 있습니까?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자신의 인자하심을 의지하는 자들을 영원히,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고 보호하신다는 점을 말입니다.
악한 도모를 파하시는 하나님(시 64편)
* 나의 근심소리를 들으시고 내 생명을 보존하시는 하나님!(1~6절)
“하나님이여 내가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주는 악을 꾀하는 자들의 음모에서 나를 숨겨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들의 소동에서 나를 감추어 주소서.”(1,2절)
시편 64편은 아마도 정치적 파당이 조성되던 시기, 즉 압살롬에 의한 반란이 무르익어가던 시기에 (다윗을 대적했던) 압살롬 일당의 간계와 행악을 묘사하는 한편 이들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다룬 다윗의 탄원 시입니다.
원수들은 어떤 식으로 다윗을 대적했습니까? 독한 말(3절)과 비밀과 올무(5절), 묘책(6절)입니다. “그들이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숨은 곳에서 온전한 자를 쏘며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도다 그들은 악한 목적으로 서로 격려하며 남몰래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고 하는 말이 ‘누가 우리를 보리요’ 하며 그들은 죄악을 꾸미며 이르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다’ 하나니 각 사람의 속뜻과 마음이 깊도다.”(3~6절)
이러한 상황에서 다윗은 제일 먼저 누굴 찾습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주는 악을 꾀하는 자들의 음모에서 나를 숨겨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들의 소동에서 나를 감추어 주소서.”(1,2절)
왜 입니까? 그분이야말로 자신의 고통과 신음소리에 귀 기울이시는 분이며, 또한 그분이야말로 모든 원수의 두려움에서와 악을 꾀하는 자들의 음모와 소동에서 자신의 생명을 능히 보존해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1,2절).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고백이 있습니까?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대하20:12하)라고 고백했던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처럼, 우리 역시 (어떠한 상황 속에서라도)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나아가고 있습니까?
* 자신들이 판 웅덩이에 스스로 빠지게 하시는 하나님!(7~10절)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쏘시리니 그들이 갑자기 화살에 상하리로다 이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리니 그들의 혀가 그들을 해함이라 그들을 보는 자가 다 머리를 흔들리로다.”(7,8절)
성경은 그들이 자신들의 혀를 ‘무엇같이’ 연마했으며, 또한 독한 말로 ‘무엇과 같이’ 겨누고 곧 쏘았다고 말하고 있습니까?(3,4절) 칼과 화살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해줍니까? 독한 말은 실제로 칼과 화살만 안 들었지 사실상 살상무기나 다름이 없다는 말입니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3:8)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언어생활은 어떠합니까?
그러나 결국 다윗을 대적했던 무리들은 어떻게 될 것입니까? 갑자기 날아온 화살들에 모두 상하고 엎드러지게 됩니다. 왜 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7절).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쏘시리니...” 어떤 방식으로 말입니까? 그들의 혀가 그들을 해하게 함으로써 입니다(8절). “이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리니 그들의 혀가 그들을 해함이라...” 이처럼 악하고 독한 말은 상대를 쓰러뜨리는 강한 무기이지만 그 해는 결국 자기에게로 돌아오고야 마는 것입니다(마7:1,2).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대적들의 비밀과 올무(5절), 묘책(6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그들 모두 자신들이 파놓은 웅덩이에 스스로 빠지게 될 것입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말입니다.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 중에 빠졌도다 (셀라)”(시57:6)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고 묵상하되, 오직 여호와께만 피하고 오직 그분만으로 인해 즐거워하며 또한 자랑해야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9,10절).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46:5)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고후10:17)
다윗의 고백처럼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9,10절)
풍전등화의 위기 앞에서(시 83편)
* 풍전등화의 위기 앞에서 오직 주만 바라보다
“무릇 주의 원수들이 떠들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이 머리를 들었나이다 그들이 주의 백성을 치려하여 간계를 꾀하며 주께서 숨기신 자를 치려고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서로 그들이 멸하여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하나이다.”(2~4절)
이 시는 아삽의 이름이 들어 있는 마지막 시로 6절 이하의 내용으로 보아 유다가 이방 연합군들에 의해 침공을 받았던 때에 저작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마도 여호사밧 왕의 재위기간 중에 말입니다(대하20:1~27).
“곧 에돔의 장막과 이스마엘과 모압과 하갈인이며 그발과 암몬과 아말렉이며 블레셋과 두로 사람이요 앗수르도 그들과 연합하여 롯 자손의 도움이 되었나이다 (셀라)”(시83:6~8) /“그 후에 모압 자손과 암몬자손들이 마온 사람들과 함께 와서 여호사밧을 치고자 한지라 어떤 사람이 와서 여호사밧에게 전하여 이르되 큰 무리가 바다 저쪽 아람에서 왕을 치러 오는데 이제 하사손다말 곧 엔겐디에 있나이다 하니.”(대하20:1,2)
풍전등화(風前燈火), 곧 바람 앞의 등불처럼 나라 전체가 매우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 있는 상황에서 시인은 어찌 합니까? 오직 하나님께만 매어달린 채 그분의 즉각적이고도 강력한 개입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1절) 당시 유다 왕 여호사밧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 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대하20:12)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일들이 없습니까? 바람 앞의 등불처럼 매우 위태롭고 힘겨운 상황 말입니다. 헤쳐 나갈 힘도 없고 어찌할 바도 모르시겠다구요? 그러할지라도 (본문의 시인처럼) 믿음 잃지 맙시다. 용기를 냅시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면서 말입니다. “...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오직 하나님께만 매어달린 채 그분의 강력한 개입을 호소합시다(1절).
* 사사 기드온과 드보라 때처럼 변함없이 우릴 도와주시도록...
“주는 미디안인에게 행하신 것 같이, 기손 시내에서 시스라와 야빈에게 행하신 것 같이 그들에게도 행하소서 그들은 엔돌에서 패망하여 땅에 거름이 되었나이다 그들의 귀인들이 오렙과 스엡 같게 하시며 그들의 모든 고관들은 세바와 살문자와 같게 하소서.”(9~11절)
시인은 말씀(사사기)을 읽다가 그 속에서 변함없는 진리들을 발견하고 크게 용기를 얻었습니다. 무엇 말입니까? 주의 백성을 괴롭혔던 원수들은 결코 오래지 않아 모두 비참하게 멸망당했다는 점입니다. 사사 기드온와 드보라 때처럼 말입니다. “또 미디안의 두 방백 오렙과 스엡을 사로잡아 오렙은 오렙 바위에서 죽이고 스엡은 스엡 포도주 틀에서 죽이고... 기드온이 일어나 세바와 살문나를 죽이고...”(삿7:25; 8:21) /“...이스라엘 자손의 손이 가나안 왕 야빈을 점점 더 눌러서 마침내 가나안 왕 야빈을 진멸하였더라.”(삿4:24)
우리는 어떻습니까? (시인처럼) 말씀을 읽다가 그 말씀 속에서 위로를 얻고 있습니까? 말씀을 통해 용기를 얻고 있습니까? 잊지 마십시오. 본문의 시인은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도 오직 주의 말씀을 읽다가 그 속에서 변함없는 진리를 발견하고 크게 용기를 얻었다는 점을 말입니다. 그뿐입니까? 그는 또한 하나님의 극적인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대적들이 한순간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과거의 기드온이나 드보라 때처럼 말입니다.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 산을 멸한 후에는 그들이 서로 쳐 죽였더라 유다 사람이 들 망대에 이르러 그 무리를 본즉 땅에 엎드러진 시체들뿐이요 한 사람도 피한 자가 없는지라.”(대하20:22,23)
한편, 우리는 본문을 통해 우리의 대적들이 결코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에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본문 6절 이하에 언급된 대적들은 한 결 같이 이스라엘과 피를 나눈 형제국가들이자 국경을 나란히 하고 있던 이웃나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곧 에돔의 장막과 이스마엘과 모압과 하갈인이며 그발과 암몬과 아말렉이며 블레셋과 두로 사람이요 앗수르도 그들과 연합하여 롯 자손의 도움이 되었나이다 (셀라)”(시83:6~8)
그렇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원수들은 결코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깨어 근신해야 합니다. 더욱더 주님만 바라보면서 믿음을 굳건하게 한 채 오직 믿음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5:8,9)
시온성과 같은 교회(시 84편)
* 복 있는 사람은....
시편 84편은 아마도 예루살렘을 순례하던 한 사람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추측되며, 본문에 ‘주의 궁정’이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바벨론 포로 이전이 저작된 것이 분명합니다. 한편, 이 시는 정말 복이 있는 사람이란 과연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구구절절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언급되고 있습니까?
첫째, 주의 집의 사는 자들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4절)
시인은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이 복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전을 늘 가까이 하고 사모하는 자들의 복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시인처럼 하나님의 전을 늘 가까이 하되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리하고 있습니까?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1,2절)
시인의 이 같은 심정은 어떤 것들에 대한 부러움으로 빗대어 표현되고 있습니까? 참새와 제비(3절), 성전 문지기(10절) 등입니다. 즉, 시인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문지기로 일하는 사람들은 물론 심지어 성전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새들까지 부러워할 정도로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3절)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10절)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본문의 시인처럼,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낫고,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좋다’(10절)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모세처럼,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금은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기고 있습니까?(히11:25,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상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4~26)
둘째,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5, 7절)
또한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가 복된 사람입니다(5절). 여기서 ‘대로’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는 히브리어 ‘메실라’로 ‘다듬어진 길’ 내지 ‘쭉 뻗은 길’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과연 무엇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까? (당시 하나님의 전이 있었던) 시온을 향해 올곧게 나아가는 자, 다시 말해서 주께 힘을 얻고 더 얻되 날마다 (구원의 도를 좇아) 주께로 나아가기를 힘쓰는 자를 의미할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길로 나아가되 오직 하나님만을 인도자로 삼고 따라가는 자를 의미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주께 힘을 얻고 또 얻되 그 마음에 시온을 향한 대로가 곧게 놓여 있습니까? 날마다 구원의 도를 좇아 오직 하나님께로만 나아가기를 힘쓰고 있습니까? 하나님만을 자신의 인도자로 삼고 오직 그분이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고 있습니까? 그러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주께 힘을 얻되 부지런히 얻고 또 얻도록 힘쓰는 것입니다. “주께 힘을 얻고...”(5절)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7절) 내 힘으로는 도무지 역부족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전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시온을 향해 나아가고자 할 때, 시인은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우릴 도우신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비록 우리의 길이 눈물 골짜기, 즉 고통과 난관 뒤범벅일지라도, ‘많은 샘’과 ‘이른 비’ 등을 통해 도우시고 채워주실 것입니다. 즉, 도무지 물을 찾을 길 없는 골짜기 같은 곳에서도 ‘많은 샘들을’ 뻥뻥 터트리시며,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도 ‘이른 비’를 내려 우리를 도우시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주나이다.”(6절)
우리는 어떻습니까? 매일 각자의 삶 속에서 ‘많은 샘’과 ‘이른 비’ 등과 같은 주의 은택을 힘입어 살아가고 있습니까?
셋째, 주께 의지하는 자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12절)
결국 복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주께 의지하는 사람입니다(12절). 그런데 (본문에 의하면) 그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의 해와 방패와 같은 분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와 방패이시라...”(11절)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9절)
이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치 태양이 자신의 햇빛과 에너지 등을 아낌없이 남김없이 베풀듯, 하나님 역시 정직하게 행하는 자, 즉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5절), 주께 의지하는 자(12절)를 위해 은혜와 영화 등을 포함한 온갖 좋은 것들을 아끼지 아니하심을 의미할 것입니다(11절). “여호와 하나님은 해와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
또한 마치 방패가 적들의 온갖 날아오는 화살과 창, 칼 등으로부터 군인의 생명을 보호하듯, 하나님 역시 우리의 대적들로부터, 특히 원수 마귀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시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이다.”(시28:7)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를 위해 은혜와 영화 등 온갖 좋은 것들을 아끼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대적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시는 하나님(12절), ‘많은 샘’과 ‘이른 비’로 도우시는 하나님(6절). 그 하나님만을 의지한 채 시온의 대로를 향해 한걸음씩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습니까? 시온성과 같은 교회를 늘 가까이하고 사모하면서 말입니다.
‘시온성과 같은 교회 그의 영광 한없다 허락하신 말씀대로 주가 친히 세웠다 /반석 위에 세운 교회 흔들 자가 누구랴 모든 원수 에워싸도 아무 근심 없도다....’
다신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자(시 85편)
* 감사로 나아가는 자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 된 자들이 돌아오게 하셨으며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그들의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 (셀라) 주의 모든 분노를 거두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셨나이다.”(1~3절)
시편 85편은 아마도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한 시인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는 동시에 황폐한 이스라엘의 진정한 회복을 위해 부르짖는 내용의 노래로 판단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 된 자들이 돌아오게 하셨으며”(1절)
그렇다면 당시 시인이 처했던 상황은 어떠했을까요? 오랜 포로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고는 하나, 여전히 예루살렘을 비롯한 유다 대부분의 성읍들이 무너진 채 오랫동안 방치되어 왔던 터라 황무하고 황폐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곳곳에서 들끓는 대적들의 약탈과 방화, 횡포 등이 끊이지 않았으며, 백성들마저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 느헤미야, 에스라와 같은 사람들이 나타나기 전까지 좀처럼 구심점을 찾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져 각기 제 살길 찾기에 여념이 없는 등 (인간적인 눈으로 보기엔) 거의 희망제로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1~3절) 감사로 기도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 중에서도 말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 된 자들이 돌아오게 하셨으며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그들의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 (셀라) 주의 모든 분노를 거두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셨나이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어떠한 상황과 처지에 놓여 있든 간에 하나님께 감사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현재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총들에 대해 말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감사로 예배하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감사로 나아가는 자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50:23)
* 다시는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야 말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무릇 그의 백성,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그들은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8절)
시인은 주가 베풀어 주신 은총에 감사한 데(1~3절) 이어 황폐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기도합니다(4~7절).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분노를 거두소서 주께서 우리에게 영원히 노하시며 대대에 진노하시겠나이까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도록 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응답을 받게 됩니까? ‘모든 것이 회복되리라’는 주의 약속, 즉 화평(회복)에 관한 말씀을 듣게 됩니다(8~13절). “내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무릇 그의 백성,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8절 상) 우리는 어떻습니까? 황폐한 우리의 심령, 가정, 교회, 일터 등을 위해 날마다 주님 앞에 부르짖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보이시며 주의 구원, 즉 회복의 역사를 주시도록 말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고, 찾는 이가 찾아낼 것이며, 두드리는 이에게 그 문이 활짝 열릴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말입니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7:7)
한편, 하나님은 회복의 말씀과 더불어 세상의 어리석음을 철저히 떠날 것을 주문하셨습니다(8절 하). “...그들은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 여기서 ‘어리석은 데’(히, 키셀라)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고집이 세고 옳지 않은 것을 선택하는 어리석음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일이 없습니까? 마치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말입니다(벧후2:21,22).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어리석음을 향해 돌이키는 일이 없어야 하며, 두 번 다시는 세상의 더러운 데로 되돌아가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왜 입니까? 우리는 더 이상 뒤로 물러가 멸망에 빠질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히10: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시 86편)
시편 86편은 3권에서는 유일한 다윗의 시로 그의 고독한 심정과 개인적인 호소의 내용이 잘 드러나 있는 노래입니다. 또한 언제 붙잡혀 죽게 될지 모르는 다윗의 불안한 심정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칠전팔기하는 불굴의 신앙 역시 엿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1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2절),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3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4절), “여호와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6절)
이처럼 환난 날에 다윗이 주께 부르짖을 수 있었던 것은 무슨 연유에서 입니까? 그리할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입니까?
첫째,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의지하여서
“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하심이 후하심이니이다.”(5절)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지금껏 몸소 경험해왔기 때문입니다. 이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입니까? 사죄(용서)하기를 즐거워하시며 부르짖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후하신 것입니다. 15절에서 다시 한 번 고백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15절) 우리는 어떻습니까? 삶 속에서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몸소 체험하고 있습니까? 또한 그것에 근거하여 날마다 기도와 간구로 주께 나아가고 있습니까?
둘째, 기도 응답의 확신을 가지고서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7절)
또한, 응답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7절). 일전에 그가 고백했던 대로 말입니다(시17:6)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기도 응답의 확신이 있습니까?
셋째, 주의 도우심을 확신함으로써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 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의뢰하시는 이시니이다.”(17절)
더불어, 주의 도우심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주께서 자신을 돕고 위로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말입니다. 전에 수도 없이 고백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시40:17)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시63:7)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현재 직면하고 있는 고난과 아픔 등으로 인해 거의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뜻하지 않았던 위기와 문제로 말미암아 야기된 침체된 감정의 늪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떤 경우에라도 (다윗처럼) 우리는 일어나야 합니다. 아니 일어나려고 필사적인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다윗처럼)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의지하여서, 기도 응답의 확신을 가지고, 주의 도우심을 확신함으로써 말입니다. 고난 중에서도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한 채 그분의 전적인 은혜들을 힘써 구함으로써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 은총의 표적을 요구함으로써 말입니다.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 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의뢰하시는 이시니이다.”(17절)
다윗은 그의 노래 말미에서 하나님 앞에 무엇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은총의 표적’입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사 이 위기로부터 자신을 구원해주실 증거를 의미할 것입니다. 후일 히스기야가 그리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왕하20:8)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낫게 하시고 삼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게 하실 무슨 징표가 있나이까 하니.”
결국 이 은총의 표적을 통해 다윗은 누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길 원했습니까? 자신을 미워했던 대적들입니다(17절).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 하오리니...” 자신을 치고자 일어났던 교만하고 포악한 무리들입니다(14절). “하나님이여 교만한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의 무리가 내 영혼을 찾았사오며 자기 앞에 주를 두지 아니하였나이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은총의 표적이 있습니까?
“내게로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16,17절)
주께서 친히 세우시리라(시 87편)
* 절망과 실의에 빠진 백성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위로하라!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 또 아하수에로가 즉위할 때에 그들이 글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을 고발하니라... 이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성전 공사가 바사 왕 다리오 제 이년까지 중단되니라.”(스4:4~6,24)
시편 87편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다시 성전을 짓기 시작했으나 안팎의 여러 요인들로 인해 중단하게 되자, 하나님의 영에 감동을 받은 한 시인이 (선지자 학개나 스가랴처럼) 절망과 실의에 빠진 백성들에게 용기를 주고자 지은 노래로 생각됩니다.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으니 이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 예루살렘에 있던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하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함께 있어 그들을 돕더니.”(스5:1,2)
* 장차 완성될 하나님의 성을 대망케 하다.
“그의 터전이 성산에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 하나님의 성이여 너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도다 (셀라)”(1~3절)
시인은 어떤 식으로 백성들을 위로하고 또한 격려했습니까? 완성될 하나님의 성(城)의 거룩함과 영광을 노래함으로써 입니다. 대망케 함으로써 말입니다(1~3절).
이런 말이 있습니다. ‘배를 만들고 싶다면, 인부들에게 꼼꼼히 일을 지시하기 보다는 저 넓고 끝없는 바다에 대한 동경심을 키워 주어라’ 네, 맞는 말입니다. 성전의 완성을 보고 싶다면 어찌해야만 합니까? 더욱 꼼꼼히 백성들에게 (성전건축에 관한) 일을 지시해야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장차 완성될 성전, 즉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성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한편, 본문의 ‘하나님의 성’(3절)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일차적으로는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하나, 종국에 가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워지게 될 교회 또는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의 왕국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본문에는 이 두 가지의 개념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지만요. 우리는 어떠합니까?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는 가운데 주의 몸 된 교회를 묵묵히 섬겨나가고 있습니까? 종말에 완성된 하나님의 왕국을 소망하는 가운데 지금 여기서의 사명들을 충실히 감당해나가고 있습니까?
* 구원은 오직 시온으로 말미암아....
“나는 라합(애굽)과 바벨론이 나를 아는 자 중에 있다 말하리라 보라 블레셋과 두로와 구스여 이것들도 거기서(시온에서) 났다 하리로다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고 말하리니...”(4~5절)
한편, 그때에는 라합(애굽)과 바벨론이, 블레셋과 두로와 구스 사람들이 주님 앞으로 나아오게 될 것입니다. 이는 무슨 말입니까? 종국에 가서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많은 백성들이 나오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계7:9)
그런데 이들은 공통적으로 어디에서 났다고 고백하게 된다는 말입니까? 시온입니다. “...보라 블레셋과 두로와 구스여 이것들도 ‘거시서(시온에서) 났다’ 하리로다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고 말하리니....”(4,5절)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낫다 하시리로다 (셀라) 노래하는 자와 뛰어 노는 자들이 말하기를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 하리로다”(5, 6절)
이는 구약성경 어디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합니까? 이사야 2장 3,4절입니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교훈)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여기서 이사야 선지자는 율법(교훈)이 어디에서 나오며,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로부터 나오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시온, 즉 예루살렘입니다.
이는 다시 예수님의 어떤 말씀과 연결되고 있습니까?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요4:22) 결국 이 말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해주고 있습니까? 왜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납니까? 유대 예루살렘, 즉 시온 성에 있던 성전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성전은 누구의 육체를 상징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요2:19~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니키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 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당시의 백성이 성전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역시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가 경배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14:6). 결국 이는 무엇으로 귀결될 수 있습니까? 오직 구원은 시온(또는 예루살렘)으로 대변되는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계7:10)
* 주께서 친히 시온을 세우시리라
“...지존하신 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는도다.”(5절 하)
결국 시온을 다시 세우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지존하신 자, 즉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성경에는 시온, 즉 예루살렘이 다시 세워지기까지 총독 스룹바벨을 비롯해 대제사장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 총독 느헤미야, 학사 에스라 등 수많은 일꾼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주께서 택하고 일꾼 삼아 곁에서 이 일을 거들었을 뿐, 실제로 친히 시온을 세워 가신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셨던 것입니다.
“이는 남은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 산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37:32)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이제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열심을 내어 야곱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하며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사랑을 베풀지라.”(겔39:25)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단지 그분의 도구일 뿐 친히 주의 몸 된 교회를 세워 가시는 분도,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가져다주실 분도 모두 하나님뿐이심을 믿고 있습니까? 또한 오직 하나님의 열심만이 결국 우리의 모든 것을 이루게 되는 결정적인 동인인 것 역시 믿으십니까? 명심하십시오. 지존하신 하나님께서 결국 이 모든 일을 친히 세워나가실 것입니다.
죽음의 고통 가운데서도(시 88편)
시편 88편은 고라 자손들의 찬양대를 지위했던 헤만(대상 6:33,37)이 지은 것으로, 표제에 나타난 바와 같이 ‘마할랏르안놋’, 즉 ‘질병 또는 병자를 위하여 연주했던 노래’입니다. 특히 이 노래는 중병으로 인한 끊임없는 비통과 슬픔을 노래한 것으로 차마 보지 못할 죽음의 고통 가운데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했던 시인의 신앙을 볼 수 있게 합니다. 마치 욥이 극심한 재난 중에도 끝까지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고 결국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현재 시인이 느끼는 고통은 어떤 것들입니까?
* 나의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사오니
“무릇 나의 영혼에는 재난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사오니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 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3,4절)
첫째,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육체적 고통입니다. 우스 땅의 의인 욥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고통을 받으니 고달픈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까, 언제나 밤이 갈까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덩이가 의복처럼 입혀졌고 내 피부는 굳어졌다가 터지는구나.”(욥7:3~5) 욥의 고통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심한 종기(바그다드 부스럼?)로 인해 그의 육체는 온통 물러져 득실거리는 구더기들로 가득 차 있었으며, 그의 피부 역시 마치 코끼리 가죽처럼 거칠게 부풀어 오르는 등 계속되는 고통으로 인해 밤에 잠조차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시인이 어떤 질병으로 고통당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나의 생명은 스올(음부)에 가까웠사오니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3~5절) 등의 표현으로 보아 거의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죽음의 그림자가 목전에 까지 드리워져 있지는 않습니까?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 가운데 처해 있지는 않습니까? 사선(死線)에서도 끝까지 주님을 놓치지 않으려 했던 시인처럼, 그리고 욥처럼, 끝까지 주님 한 분만을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나를 두셨사오며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며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가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셀라) ..... 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려움이 나를 둘러쌌나이다 이런 일이 물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러쌌나이다.”(6,7,16,17절)
둘째,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신앙적 고통입니다. 시인은 주께서 자신을 어느 곳에 두셨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입니다(6절).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비치치 않는 곳, 즉 흑암과 사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곳(시107:10)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그런 상태 말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우리에게는 이 같은 일들이 없습니까?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짓누르는 것 같은 영적인 고통 말입니다. 다윗의 경우처럼.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시32:4) 그리고 욥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욥6:4)
그렇더라도 우리는 끝까지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끝까지 소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시인처럼 말입니다.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13절) 설령 주의 진노가 우리를 심히 짓누르시고, 그의 두려움이 종일 우리를 에워싼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 모든 사람에게 나는 외인이 되었사오며
“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8,18절)
셋째, 친구들의 배신으로 인한 사회적 고통입니다. 여기서 ‘나를 아는 자’(8절)란 누구를 의미합니까? 시인의 친구이자 지인들입니다. 그런 사람들마저 모두 시인에게 등을 돌리고 멀리 떠났으니 시인의 심정이 오죽했겠습니까? 한편, 본문 중 ‘가증한 것’(8절)라는 표현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는 ‘보기에 역겨운 물건’이라는 의미로 결국 시인이 평소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에게마저 도움은커녕 오히려 따돌림과 소외당하고 있음을 묘사하고 대목일 것입니다. “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8절)
마치 욥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나의 형제들이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낯선 사람이 되었구나 내 친척은 나를 버렸으며 가까운 친지들은 나를 잊었구나 내 집에 머물러 사는 자와 내 여종들은 나를 낯선 사람으로 여기니 내가 그들 앞에서 타국 사람이 되었구나...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원수가 되었구나.”(욥19:13~15,19)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일이 없습니까? 그러할지라도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끝까지 하나님만을 신뢰하면서 일어나고 또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시인처럼 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라!(시 104편)
* 시편 속으로 고스란히 옮겨놓은 창세기 1장
“주께서 꾸짖으시니 물은 도망하여 주의 우렛소리로 말미암아 빨리 가며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정하여 주신 곳으로 흘러갔고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갔나이다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7~9절)
시편 104편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한 찬양시로서 마치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를 고스란히 시편 속에 옮겨놓은 듯한 인상을 받게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물론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이 시편 기자가 창세기 1장의 창조 사역을 순서대로 정확하게 기록한 것이 아닌 대자연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솜씨들을 묵상, 생각나는 대로 노래했다는 점입니다.
또한 이 시편은 우리가 익히 아는 한 찬송가의 가사를 연상케 하기에 충분한 것 같습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숲속이나 험한 산 골짝에서 지저귀는 저 새소리들과 /고요하게 흐르는 시냇물은 주님의 솜씨 노래하도다 .....(후렴)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 시편의 기자처럼, 우리 역시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찬양하고 있습니까?(1~4절) 그분이 지으신 모든 만물들을 보면서 그분의 솜씨를 마음껏 노래하고 있습니까? 또한 우리를 지으시되 심히 기묘하게 지으신 그분을 힘 있게 높여 드리고 있습니까?(시137:14)
* 창조사건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 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주의 영으로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24, 30절)
한편,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되 무엇으로 그리 하셨습니까? 지혜입니다.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24절) 이는 잠언의 어느 부분을 연상케 합니까?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 내가 그의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잠8:22,23,30) 여기서 지혜는 곧 누구를 가리킵니까? 창세전에 이미 존재하셨고,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함께 동참하셨던 ‘참 지혜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또한 무엇으로 그리하셨다고 했습니까? 주의 영, 즉 성령입니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30절) 이는 창세기 1장의 어느 부분을 연상케 합니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2)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함께 하셨던 성령님을 가리키는 대목입니다.
따라서 이 창조사역은 누가 하신 것입니까?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와 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은 비단 창조사역에만 국한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창조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어온 하나님의 섭리까지도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주의 영, 즉 성령님 안에서 참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 일평생 하나님만 찬양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나의 기도를 기쁘게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33,34절)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고백이 있습니까? 일평생 기도와 찬양으로 주께 나아가길 힘쓰는 저와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라(시 105편)
이 시는 세 편의 역사시(78, 105, 106편) 중 하나로서 자신의 언약을 성실하게 지키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내용의 찬양시입니다. 또한 본시의 끝부분이 ‘할렐루야’로 끝나기 때문에 할렐루야시라고도 일컬어지기도 합니다(106, 111, 112, 113, 117, 135, 146~150편).
또한 본시는 창세기 12장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은 때로부터 시작하여 여호수아서에서 이 언약이 이루어질 때까지의 과정을 다루고 있는데 (78편과 106편이 이스라엘의 역사와 함께 그들의 죄악을 지적하여 교훈을 목적으로 한 것과는 달리)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 이행에 대한 감사와 경배를 그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 여호와께 대한 감사와 찬양의 권면(1~7절)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말할지어다.”(1,2절)
본문을 통해 우리는 이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선하신 도우심과 그분의 모든 기이한 일들에 대하여 마음껏 외치고 싶은 열망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치 욥기서에 등장하는 엘리후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욥32:18~20). “내 속에는 말이 가득하니 내 영이 나를 압박함이니라 보라 내 배는 봉한 포도주통 같고 터지게 된 새 가죽부대 같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시인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분의 모든 일들을 만민 중에 알게 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1절) (시인처럼)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선포하고 또한 자랑하고 있습니까?(2절) (시인처럼) 날마다 그분의 거룩한 성호를 자랑하며 오직 여호와와 그분의 능력을, 그분의 얼굴을 구하고 있습니까?(3,4절)
* 하나님께서 족장들과 언약을 맺으심(8~15절)
“그는 그의 언약 곧 천대에 걸쳐 명령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이것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고 이삭에게 하신 맹세이며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원한 언약이라 이르시기를 내가 가나안 땅을 네게 주어 너희에게 할당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도다.”(8~11절)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었던 최초의 언약 사건(창 12장)과 또한 그것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언약의 내용이란 한 마디로 무엇이었습니까? 가나안 땅을 그들의 소유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르시기를 내가 가나안 땅을 네게 주어 너희에게 할당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도다.”(11절) 가나안 땅은 또한 무엇을 상징합니까? 그의 택하신 백성이 영원히 거하게 될 천국입니다.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11:9,10)
한편, 이 약속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등과 맺은 개인적인 언약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천대에 걸쳐 명령하신 말씀(8절), 즉 (이스라엘을 넘어) 온 세계를 향한 말씀입니다. “그는 그의 언약 곧 천대에 걸쳐 명령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8절) 그렇다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무엇입니까? 이 언약의 대표자로서 선정된 사람들에 불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이 언약에 속해 있는 자들임이 분명합니다.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오직 믿음 위에 서서 오직 믿음만을 가지고서 장차 영원히 거하게 될 천국, 즉 더 나은 본향을 향해 날마다 전진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5,16)
*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들어가게 됨(16~23절)
“그가 또 그 땅에 기근이 들게 하사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15~19절)
이 부분에서는 요셉의 생애와 야곱과 그의 가족이 기근으로 말미암아 애굽으로 가게 되는 과정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아들 중 누구를 애굽으로 앞서 보내셨습니까? 요셉입니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17절 상) 어떤 신분으로 말입니까? 노예입니다.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17절 하)
설상가상으로 그는 어떤 궁지에까지 몰리게 됩니까? 억울한 누명을 쓰고 투옥됩니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18절) 언제까지 말입니까?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입니다.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19절 상) 그동안 무엇이 그를 단련했습니까? 역시 그분의 말씀입니다.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19절 하)
여기서 ‘여호와의 말씀’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마도 꿈을 통해 주신 장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의미하는 듯합니다(창37:5~11). 이 같은 하나님의 약속이 요셉으로 하여금 10여년의 오랜 환난 중에서도 인내하고 또한 견딜 수 있도록 해주었던 것입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을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창37:6,7,9)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전혀 뜻밖의 고난을 통과하고 계십니까? 잊지 마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만 입니다. 그때까지만 인내하면 됩니다. 힘을 내고 또한 용기를 내십시오.
* 모세를 보내어 백성들을 애굽 밖으로 데리고 나오게 하심(24~38절)
“그리하여 그는 그의 종 모세와 그의 택하신 아론을 보내시니 그들이 그들의 백성 중에서 여호와의 표적을 보이고 함의 땅에서 징조들을 행하였도다...마침내 그들을 인도하여 은금을 가지고 나오게 하시니 그의 지파 중에 비틀거리는 자가 하나도 없었도다.”(26,27,37)
하나님의 은혜로 굶주림의 위기를 모면하여 일시적으로 평화를 누렸던 이스라엘은 또다시 하나님이 허락하신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무엇입니까?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 왕과 방백들이 그들을 멸절시키려 했던 것입니다(출1:1~22). “또 그의 대적들의 마음이 변하게 하여 그의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며 그의 종들에게 교활하게 행하게 하셨도다.”(25절)
이때 하나님은 누구를 보내셨습니까? 모세와 아론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종 모세와 그의 택하신 아론을 보내시니.”(26절) 무엇을 통하여 자신의 백성들을 구원해내셨습니까? 표적과 징조 등을 통해서입니다. “그들이 그들의 백성 중에서 여호와의 표적을 보이고 함의 땅에서 징조들을 행하였도다.”(27절)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죄악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누구를 보내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어떤 표적과 징조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까? 표적 중의 표적이요 징조 중인 징조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을 통해 그리하셨습니다. 할렐루야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눅11:29~30)
* 광야에서의 인도하심과 언약의 성취(39~45절)
“여호와께서 낮에는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밤에는 불로 밝히셨으며 그들이 구한즉 메추라기를 가져 오시고 또 하늘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하게 하셨도다 반석을 여신즉 물이 흘러나와 마른 땅에 강 같이 흘렀으니.”(39~41)
끝으로 시인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광야생활 40년간 자신의 백성들을 무엇들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셨습니까? 구름기름과 불기둥입니다. “여호와께서 낮에는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밤에는 불로 밝히셨으며.”(39절)
또한 그들이 주릴 때 어떤 것들로 먹이셨습니까? 만나와 메추라기입니다. “그들이 구한즉 메추라기를 가져 오시고 또 하늘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하게 하셨도다.”(40절) 그들이 목마를 때 무엇을 통해 마시게 하셨습니까? 반석을 열어 그리 하셨습니다. “반석을 여신즉 물이 흘러나와 마른 땅에 강 같이 흘렀으니.”(41절) 어디에까지 이르도록 말입니까?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를 때까지 입니다. “여러 나라의 땅을 그들에게 주시며 민족들이 수고한 것을 소유로 가지게 하셨으니.”(44절)
무엇 때문입니까? 그의 거룩한 말씀과 그의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언약에 근거해서 입니다. “이는 그의 거룩한 말씀과 그의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이로다.”(42절)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그의 말씀을 따르게 하려 함입니다. “이는 그들이 그의 율례를 지키고 그의 율법을 따르게 하려 하심이로다 할렐루야.”(45절)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되 우리 모두가 약속된 새 예루살렘에 입성하기까지 그리 하십니다. 하나님 자신의 풍성한 자비로 인해서 말입니다. 이와 같이 신실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선포하고 또한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까? 날마다 그분의 거룩한 성호를 자랑하며 오직 여호와와 그분의 능력을, 그분의 얼굴을 구하고 싶지 않으십니까?(3,4절)
자기 백성을 향한 지극한 사랑(시 106편)
이 시도 105편과 같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루고 있으며 구성도 비슷합니다.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105편이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감사와 찬양시인데 반해 106편은 하나님의 많은 인자하심에도 불구하고 이를 시험하고 거역한 이스라엘의 죄악을 통탄하며 지은 참회적인 성격이 강한 시라는 점입니다.
한편, 이 시의 저작 시기는 46, 47절 등으로 미루어 보아 포로시대 중으로 보입니다. “그들을 사로잡은 모든 자에게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도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여러 나라로부터 모으시고 우리가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권고와 크신 은혜를 간구함(1~5절)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누가 능히 여호와의 권능을 다 말하며 주께서 받으실 찬양을 다 선포하랴 정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공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1~3절)
시인은 여기서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하여 감사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1절). 물론 우리가 가진 말들로 다 표현할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 “누가 능히 여호와의 권능을 다 말하며 주께서 받으실 찬양을 다 선포하랴.”(2절)
또한 그는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주의 백성의 형통함을 보게 하시고, 천국의 기쁨을 누리며, 주의 기업을 자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나를 돌보사 내가 주의 택하신 자가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을 나누어 가지게 하사 주의 유산을 자랑하게 하소서.”(3,4절)
우리는 어떻습니까? 늘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해 감사하며 찬양하고 있습니까? 주의 백성의 형통을 보게 해달라고, 주의 나라의 기쁨을 누리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또한 매일 각자의 삶 속에서 주의 유산(기업)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 홍해에서의 거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들을 건지심(6~12절)
“우리의 조상들이 애굽에 있을 때 주의 기이한 일들을 깨닫지 못하며 주의 크신 인자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으니 그의 큰 권능을 만민이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7,8절)
시인은 홍해 앞에서의 모세와 하나님께 대한 원망(6~12절)을 필두로 과거 이스라엘이 범했던 죄악과 그 결과를 참회하는 심정으로 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때마다 어찌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이름을 위해 그들을 구원하심으로써 만민으로 하여금 그분의 권능을 알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으니 그의 큰 권능을 만민이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8절)
여기서 ‘구원하셨으니’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는 히브리어 ‘아솨’로 ‘(닫혔던 문을) 열어주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홍해를 ‘열어’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에 홍해를 꾸짖으시니 곧 마르니 그들을 인도하여 바다 건너가기를 마치 광야를 지나감 같게 하사 그들을 그 미워하는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며 그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셨고 그들의 대적들을 물로 덮으시매 그들 중에서 하나도 살아남지 못하였도다.”(9~11절)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끊임없이 원망과 불평을 입에 단 채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까지 우리를 위해 행하신 주의 기이한 일들을 깨닫지 못한 채 말입니다. 여태껏 부어주신 주의 크신 인자함을 기억하지 못한 채 말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애굽에 있을 때 주의 기이한 일들을 깨닫지 못하며 주의 크신 인자를 기억하지 아니하고...”(7절 상)
또한 우리는 믿고 있습니까? 그런 우리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자신의 이름을 위해’, ‘주의 크신 인자로 말미암아’ 친히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며, (여태껏) 닫혀 있던 문들을 열어주실 것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을 징계하심(13~33절)
“그러나 그들은 그가 행하신 일을 곧 잊어버리며 그의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내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13, 14절)
홍해 사건 이후에도 광야에서의 먹을 것에 대한 탐욕(13~15절),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대한 도전(16~18절), 우상숭배(19~23절), 약속의 땅에 대한 악평과 불신앙(24~27절), 이방신 제사에의 참여(28~31절), 므리바에서의 갈증으로 인한 원망(32, 33절) 등 이스라엘 백성들의 탐욕과 원망, 불신앙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원인이었습니까? 잊어버림, 즉 망각 때문입니다. 무엇에 대한 잊어버림이며, 또한 어떤 것들에 대한 망각입니까? 하나님의 행하신 일과 그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행하신 일을 곧 잊어버리며 그의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13절) 결국 이러한 망각이 탐욕과 도전, 악평, 불신앙, 원망 등을 끊임없이 양산해냈던 것입니다.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내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14절) /“그들이 진영에서 모세와 여호와의 거룩한 자 아론을 질투하매.”(16절) /“그들이 그 기쁨의 땅을 멸시하며 그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 그들의 장막에서 원망하며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아니하였도다.”(24, 25절)
우리는 어떻습니까? 깊이를 알 수 없는 망각의 늪 한 가운데에 빠진 채 각종 탐욕과 악평, 불신앙, 원망 등만 잔뜩 뿜어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사랑하심을 망각한 채 육을 좇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잊지 마시시오. 모든 비극의 시작은 망각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을 말입니다.
* 가나안 입성 이후에도 계속된 불순종(34~46절)
“그들은 여호와께서 멸하라고 말씀하신 그 이방 민족들을 멸하지 아니하고 그 이방 나라들과 섞여서 그들의 행위를 배우며 그들의 우상들을 섬기므로 그것들이 그들에게 올무가 되었도다.”(34~36절)
가나안에 들어온 이후에도 이스라엘의 불순종하는 습관은 여전했습니다.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하나님의 전적인 도우심으로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멸하라고 말씀하신) 가나안 족속들을 모두 전멸시키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멸하라고 말씀하신 그 이방 민족들을 멸하지 아니하고.”(34절) 이방족속을 진멸하기는커녕 결국 그들과 섞여 그들의 행위를 배워 각종 우상숭배의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그 이방 나라들과 섞여서 그들의 행위를 배우며 그들의 우상들을 섬기므로 그것들이 그들에게 올무가 되었도다.”(35, 36절)
심지어 어떤 행위까지 하기에 이르렀습니까? 자신의 자녀마저 우상 앞에 제물로 내어놓은 것입니다. “그들이 그들의 자녀를 악귀들에게 희생 제물로 바쳤도다 무죄한 피 곧 그들의 자녀의 피를 흘려 가나안의 우상들에게 제사하므로 그 땅이 피로 더러워졌도다.”(37, 38절)
결국 이것이 화근이 되어 이스라엘은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어떤 대가입니까? 주변의 여러 이방 민족의 압제 아래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맹렬히 노하시며 자기의 유업을 미워하사 그들을 이방 나라의 손에 넘기시매 그들을 미워하는 자들이 그들을 다스렸도다 그들이 원수들의 압박을 받고 그들의 수하에 복종하게 되었도다.”(40~42절)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들처럼 하나님 앞에 여전히 불순종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 구원에 대한 기도와 찬양(47, 48절)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여러 나라로부터 모으시고 우리가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지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 할렐루야.”(47, 48절)
지금껏 이스라엘의 범죄한 역사와 하나님의 은혜를 회고하던 시인은 다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간구하면서 믿음의 찬양을 드림으로써 시를 끝맺고 있습니다. 특히, 47절은 바벨론 포로 생활로부터의 구원을 언급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역시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간구하면서 믿음의 찬양을 드림으로써 마무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구속함을 받은 자들의 노래(시 107편)
*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자들의 마땅한 바, 찬양(1~3절).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 모으셨도다.”
시편 107편은 작자 미상의 시로서 제5권의 첫머리답게 ‘바벨론 포로 귀환’이라는 벅찬 역사적 체험을 바탕으로 여호와께 속량함을 받은 이들이 (그분께) 마땅히 올려드려야 할 감사와 찬양을 촉구하고 있는 노래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 여기서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2절)란 직접적으로 누구를 가리킵니까? 바벨론의 포로 생활로부터 해방된 자들입니다. 그렇지만 이는 궁극적으로 누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까? 죄악 세상으로부터 구원함을 입은 모든 사람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시인은 무엇을 촉구하고 있습니까? 감사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1절 상)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감사하라는 말입니까?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입니다. “...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절 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감사와 찬양이 있습니까?
* 찬양해야 할 구체적인 이유 4가지(4~32절)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어다.”(6~8절)
이 부분은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어다”라는 반복되는 구절에 의해 첫째, 주를 떠나 방황하던 자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심(4~9절) 둘째, 죄악의 어둠과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심(10~16절) 셋째, 사망에 문에까지 이른 그들을 고치시고 건져내심(17~22절), 넷째 인생의 항해 그 모든 위험으로부터 끝까지 보호하사 결국 그 소망의 항구로 인도하심(23~32절) 네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광야 같은 세상에서 유리방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4,5절) 그러할지라도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그분께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6절) 여호와께서 반드시 우리를 그 고통에서 건져 내사 ‘바른 길’(7절), 즉 ‘마땅히 행할 길’(사48:17), ‘평강의 길’(눅1:79)로 인도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6,7절) 만족을 주시고 좋은 것으로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9절)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갇혀 있는 것 같고, 고통과 곤고함의 사슬에 매여 있는 것처럼 느껴지십니까?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그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10~13절) 그러할지라도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그분께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이에 그들이 그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13절) 여호와께서 반드시 우리를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고,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실 것이며, 그 얽어 맨 줄들을 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의 얽어 맨 줄을 끊으셨도다.”(13,14절)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세상의 죄악을 좇다가 결국 사망에 문에까지 이르러 있습니까? “미련한 자들은 그들의 죄악의 길을 따르고 그들의 악을 범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아 그들은 그들의 모든 음식물을 싫어하게 되어 사망의 문에 이르렀도다.”(17,18절) 그러할지라도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그분께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19절) 여호와께서 반드시 우리를 우리의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위험한 지경에서 건져주시며 자신의 말씀을 통해 고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 도다.”(19,20절)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인생의 항해 중 뜻밖의 광풍을 만나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명령하신즉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 도다 그들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가나니 그 위험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녹는 도다 그들이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그들의 모든 지각이 혼돈 속에 빠지는 도다.”(25~27절) 그러할지라도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그분께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28절)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 광풍과 물결을 잠잠케 하사 우리를 그 위기에서 건져내, 결국 우리가 바라는 소망의 항구로 인도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 도다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 도다.”(28~30절)
*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을 찬양!(33~43절)
“정직한 자는 보고 기뻐하며 모든 사악한 자는 자기 입을 봉하리로다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43, 44절)
결국, 시인은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사들을 깨달을 것을 촉구함으로써 본 시편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44절) 이는 물론 앞서 서두(1절)에서 미리 언급했고, 이후 네 번씩이나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찬송할 것을 촉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절)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8, 15, 21, 31절).
우리는 어떻습니까? 어떠한 처지와 형편에 놓여 있든지 간에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양하고 있습니까?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사들로 말미암아 그분을 드높이고 있습니까? 또한 이러한 일들을 지켜보면서 그분의 인자하심을 깨닫고 있습니까?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43절)
우리를 도와 승리케 하소서(시 108편)
*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니아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의 군대들과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11절)
시편 108편은 다윗의 찬양시로 (10절 등으로 보아) 그가 에돔과의 전투 중 지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마도 이 시기에 다윗은 전투 중 일시적인 패배를 당한 나머지(11절) 그 충격에서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오직 성소에 들어가 두문불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의 군대들과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10절)
사실 본문의 6~13절은 시편 60편 5~12절과 매우 유사한데 이 역시 (그 표제를 통해 알 수 있듯) 에돔과의 전투가 그 배경입니다. “...다윗이 아람 나하라임과 아람소바와 싸우는 중에 요압이 돌아와 에돔을 소금 골짜기에서 쳐서 만 이천 명을 죽인 때에”(시 60편의 표제) 이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이 두 시편이 같은 시기에 동일 사건을 배경으로 지어졌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본문의 1~5절 역시 시편 57편 7~11절과 유사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이 노래가 반드시 시편 57편과 60편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노래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다윗이 1~5절 부분을 마치 관용구처럼 사용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1, 2절)
아무튼 다윗은 뜻밖의 패배(11절)로 인해 주의 성소에서 기도하던 중 (특별히 새벽에/2절) 정한 마음, 즉 마음의 확신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1절) 무엇 때문입니까? 성소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성소에서 말씀하시되....”(7절)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내가 기뻐하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측량하리라 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투구요 유다는 나의 규이며 모압은 내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내 신발을 벗어 던질지며 블레셋 위에서 내가 외치리라 하셨도다.”(7~9절)
무슨 말입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온 이스라엘을 주장하시고 통치하시는 것은 물론, 그 주변에서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괴롭혀왔던 대적 즉, 모압과 에돔, 블레셋 등을 그 앞에 복속시키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응답 앞에 다윗이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까? 어찌 감사로 나아가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비파야, 수금야,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여호와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양하오리니 주의 인자하심은 하늘보다 높으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 이르나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땅에서 높임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1~5절)
*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12, 13절)
다윗은 하나님의 응답(7~9절)에 근거,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와 이스라엘의 대적을 치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12절 상) 오직 하나님만이 이 전쟁의 승패를 쥐고 있음을 알고 있기에 말입니다.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12절 하) /“...그는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13절 하) 이제부턴 사람의 구원이 아닌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한 채 담대하게 나아가겠다고 결심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13절 상)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뜻밖의 쓰라린 패배 앞에서 절망하고 있습니까? 갑작스런 실패 앞에 망연자실해 있지는 않습니까? 다윗처럼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새벽에 말입니다. 그러할 때에 곧 말씀을 통해 공급함 받고 용기를 얻어 다시금 분연히 떨쳐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시 120편)
* 지금 환난 중에 있습니까?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주소서.”(1,2절)
본 시편은 환난 중에 있던 한 시인이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 등으로부터 자신을 건져내주실 것을 간구하는 내용으로 내용과 분위기로 보아 시편 52편과 흡사, 에돔 사람 도엑이 다윗의 동정을 사울에게 밀고한 때에 지은 다윗의 작품으로 보기도 합니다(칼빈, 메튜 헨리).
아무튼 분명한 점은 무엇입니까? 이 시편의 저자가 (극심한) 환난과 핍박 중에 처해 있다는 점입니다. “내가 환난 중에....”(1절) 무엇으로 말미암은 환난입니까?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입니다.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2절) 이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 등으로 인해 (시인은) 생명의 위협까지 느낄 정도로(2절 하) 큰 곤경에 처해 있었던 것입니다.
혹 우리는 어떻습니까? 뜻하지 않은 사건, 전혀 예기치 못했던 상황들로 인해 큰 곤경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혹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 등으로 말미암아 극심한 환난을 겪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그렇더라도 낙망치 않으시길 바랍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다시 일어나십시오. 어떻게 함으로 말입니까? 여호와께 부르짖음으로써 입니다(1절).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왜 입니까? 주께서 그리하라고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편 50편 15절)
환난 중에 계십니까? 고난 중에 계십니까? 환난 날에 하나님을 부르십시오. 고난 중에 하늘 아버지를 찾으십시오. (물론 그렇지 않은 날에도 하나님을 찾고 그분께 부르짖어야 하지만...) 반드시 우리를 건지실 것이며 또한 이로 인해 친히 영광을 받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기뻐하십니까? 당신의 자녀가 고통 중에라도 당신께 나아와 부르짖는 것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시50:15상) 그러할 때 하나님은 그 응답으로 무엇을 베풀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까? 구원입니다. “...내가 너를 건지리니....”(15절 중) 그런데 이것은 성도 자신에게만 기쁨이 된다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당신에게도 큰 영화와 기쁨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15절 하)
이는 신약성경의 어느 부분을 연상케 하고 있습니까?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요14:13) 무슨 말씀입니까? 성도의 기도는 궁극적으로 누구를 영화롭게 한다는 것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무엇이 이를 가능케 한 것입니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각별하신 관심과 사랑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환난 중에 있습니까? 불가항력적인 문제 속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더욱더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구하십시오. 왜 입니까?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기회요 타이밍이기 때문입니다. 준비 되셨습니까?
* 다시는 악한 자들과 함께 마십시오.
“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과 함께 오래 거주하였도다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6, 7절)
결국 시인의 고난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던 것입니까?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 즉 싸움을 즐기는 악한 자들과 함께 오래 지냈었다는 데서 입니다. “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과 함께 오래 거주하였도다.”(6절)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세상의 미련한 자들과 함께 교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 악인의 꾀를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 죄인들의 길에 서 있지는 않습니까? 혹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아 있지는 않습니까?
잊지 마십시오. 미련한 자와 사귀면 언젠가 해를 받습니다(잠13:20 하).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악인들의 꾀를 따르다 보면..... 죄인들의 길에 서 있다 보면....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아 있다 보면, 언젠가 반드시 큰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1:1)
다시는 세상의 미련한 자들과 사귀지 마십시오. 다시는 악인들의 꾀를 따르거나 죄인들의 길에 서 있지 마십시오. 다시는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함께 앉아 있지 마십시오. 오히려 지혜로운 자, 화평을 사랑하며 화평케 하기를 즐거워하는 자,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기를 힘쓰십시오.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잠13:20 상)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딤후2:22)
나의 도움은 어디서?(시 121편)
*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올까.”(1절)
본 시편은 한 순례자가 그 여정 가운데서 자신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또한 찬양하는 내용으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중 두 번째입니다. 참고로, 시편 120편부터 134편까지는 각각의 표제에서 볼 수 있듯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편, 시인은 어떤 말로 그 찬양을 시작하고 있습니까?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올까.”(1절 하) 무슨 말입니까? ‘누가 나를 도와줄 수 있을까?’, ‘누가 나를 지켜 이 모든 환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을까?’(7절) 등의 의미일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도 여전히 이 같은 질문들을 되뇌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함께 그 해답을 찾게 되시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시인은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올까’라는 질문과 함께 눈을 들어 무엇을 바라보게 됩니까? 산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1절 상) 무슨 산입니까? 예루살렘 성전을 둘러싸고 있는 웅장한 시온 산(Mt. Zion)입니다(이는 예루살렘 성전의 시온문, 즉 다윗의 문 밖에 위치한 산으로 다윗 왕의 무덤, 최후의 만찬 장소, 마가의 다락방, 베드로 통곡교회 등의 유적이 이 산에서 발견된 바 있습니다).
시인은 성전을 둘러싸고 있는 이 웅장한 산을 보면서 무엇을 떠올리게 됩니까? 성도를 지키시고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는 더 나아가 결국 어떤 결론에까지 이르게 됩니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로다.”(2절) 결국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인생의 숱한 문제, 그 문제들을 풀 수 있는 해답을 찾으셨습니까?
*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로다.”(2절)
궁극적으로 이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을 도우실 수 있으며, 또한 모든 환난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실 수 있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7절) 왜 입니까? 그분은 이스라엘, 모든 성도들을 지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3절) 한편, ‘지키시는’(히, 쇼므레카) 이라는 말의 원뜻은 ‘신중하다’이나 여기선 세심한 주의를 기울어 살피어 보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되 아주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살피시고 보호하신다는 말일 것입니다. 또한 이는 신약성경의 어느 부분을 연상케 합니까?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다 귀하니라.”(마10:29~31)
혹 지금 환난 중에 있습니까? 혹 지금 고통 가운데 처해 있습니까? 우리를 지켜 주시되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실 하나님 한 분만 바라봅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7절)
혹 낮의 해가 우리를 상하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오른 편에서 친히 우리의 그늘이 되어주시는 하나님 한 분만 바라봅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 쪽에서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5,6절)
혹 밤의 달이 우리를 해하려 하고 있습니까?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를 지키시는 주님만 바라봅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4절) 지금부터 영원히 우리의 출입을 지켜주실 하나님 한 분만을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8절)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시 143편)
*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참담하니이다(1~4절).
“원수가 내 영혼을 핍박하며 내 생명을 땅에 엎어서 나로 죽은 지 오랜 자 같이 나를 암흑 속에 두었나이다 그러므로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참담하니이다.”(3,4절)
시편 143편은 다윗의 개인적인 비탄시이자 시편에 나타나는 7편의 참회시 중 하나로서 자신의 원수들로부터의 구원을 호소하는 다윗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져 있습니다.
현재 다윗의 처지는 어떠합니까? 대적들로부터 갖은 핍박과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원수가 내 영혼을 핍박하여 내 생명을 땅에 엎어서 나로 죽은 지 오랜 자 같이 나를 암흑 속에 두었나이다.”(3절) 한편, 그의 심적 상태는 어떻습니까? 그의 심령이 상하되 심히 참담한 지경에까지 이르러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참담하니이다.”(4절) 본문의 ‘참담하니이다’(히, 솨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아찔하게 하다’, ‘마비되다’란 뜻으로서, 너무 놀라 ‘넋을 잃거나 마음이 황폐하게 됨’을 뜻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와 같은 경우가 없습니까? 뜻하지 않은 인생의 장애 앞에 우리의 심령이 상하되 너무 놀라 거의 넋을 잃을 뻔하거나 마음이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던 경험이 없습니까? 아니면 혹 지금 그와 같은 처지와 형편에 놓여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더라도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다시 기도와 간구로 나아가야 합니다. 본문의 다윗처럼 말입니다.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1절)
*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5~12절).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셀라).”(6절)
다시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왜 입니까? (다윗이 일전에 고백한 바와 같이)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는 내 길을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시142:3).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의 심령이 내 속에서 심히 상할 때, ‘주께서 내 길을 이미 알고 계심을’ 확신하고 있습니까? 나의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참담할 때에라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하늘 아버지는 우리의 영이 속에서 상할 때에도 내 길을 이미 알고 계시는 분이며(시142:3), 홍해 바다에 앞이 가로막혀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는 진퇴양란과 같은 상황에서도 ‘주의 길을’ 바다에, 큰물에 예비해놓고 계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시77:19). “주의 길은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길이 큰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기도와 간구로 나아가되, 특히 아침에(새벽에) 더욱 그리해야 할 것입니다.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8절) 그러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게 당신의 인자한 말씀을 들려주실 것이며, 우리가 매일 다닐 길을 알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에서부터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시 144편)
* 나의 반석이신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1~4절).
“나의 반석이신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전쟁하게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 그가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도다.”(1,2절)
다윗은 즉위 초, 아니 훨씬 그 이전부터 수많은 대적들과 대치해야만 했습니다. 그때마다 다윗은 어떻게 그 위기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까? 누구만 의지했기 때문입니까? 반석이신 여호와입니다. “나의 반석이신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1절) 또한 누구에게 피하였기 때문입니까? 역시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2절)
우리는 어떻습니까? 환난의 날에, 인생의 크고 작은 문제들 앞에서,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며, 또한 그분만으로 자신의 피난처를 삼고 있습니까? 잊지 마십시오. 주께 피하는 자마다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시5:11)
* 위에서부터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5~11절).
“여호와여 주의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며 산들에 접촉하사 연기를 내게 하소서 번개를 번쩍이사 원수들을 흩으시며 주의 화살을 쏘아 그들을 무찌르소서 위에서부터 주의 손을 펴사 나를 큰물과 이방인의 손에서 구하여 건지소서.”(5~7절)
이와 같은 하나님 앞에 다윗은 다시금 구원을 호소합니다. 누구로부터의 구원입니까? 대적들로 인한 심각한 위협입니다. “... 큰 물과 이방인의 손에서 구하여 건지소서.”(7절 하) 한편, 다윗은 여기서 자신의 대적들을 무엇에 빗대어 말하고 있습니까? ‘큰 물’(7절)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다윗을 대적하는 이방인의 무리가 그만큼 많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위협 역시 심각한 수준임을 의미할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이러한 상황에서) 누구에게 구원을 호소합니까?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며 산들에 접촉하사 연기를 내게 하소서 번개를 번쩍이사 원수들을 흩으시며 주의 화살을 쏘아 그들을 무찌르소서.”(5,6절) 왜 입니까?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이방인의 손에서 벗어날 길 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이 상황에서 벗어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피난처와 방패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분임을 고백하고 있습니까?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2절 상)
한편, 다윗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되, 어디로부터 자신을 구하여 건져내어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까? ‘위에서부터’입니다. “위에서부터 주의 손을 펴사 나를 큰 물과 이방인의 손에서 구하여 건지소서.”(7절)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오직 위에서부터, 즉 위로부터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명심한 채, 일평생 (땅의 것이 아닌) 오직 위의 것만 바라보며 나아가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3:1~3)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삼고서 말입니다(12~15절).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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