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까지 도와주신 하나님”(삼상 7장 12~14절) 추가자료
스펄전의 감사 경구
촛불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전등불을 주시고
전등불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는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태양이 필요 없는 광명한 천국의 빛을 주신다.
유머 1
어느날 병원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부인이시죠, 남편분께서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 중환자실에 있습니다” 아내는 허겁지겁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남편이 그 새 죽어서 하얀 천을 뒤집어 씌어 놓았습니다. 매일 남편을 구박하고 잔소리를 해 댔지만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가 한참 울고 있는데 남편이 하얀천을 살짝 내리면서 부인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나 아직 안 죽었어” 아내는 깜짝 놀랐습니다. 울음을 그친 아내가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당신이 뭘 안다구 그래요. 의사가 죽었다면 죽은거지...”
우리도 감사의 제목을 놓치고 있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자.
콜린파월의 경험담
미국 국무장관을 지낸 콜린 파월(Colin Powell)의 이야기입니다.그는 뉴욕 빈민가 출신의 흑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르바이트를 하는 공장에서 다른 인부들과 함께 도랑 파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삽에 몸을 기댄 채 회사가 충분한 임금을 주지 않는다며 불평을 하였습니다. 그 옆에 한 사람은 묵묵히 열심히 도랑을 파고 있었습니다.
몇 해가 지난 후 다시 그 공장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는데 여전히 그 사람은 삽에 몸을 기댄 채 불평을 늘어 놓고 있었고 열심히 일하던 그 사람은 지게차를 운전하고 있었습니다. 또 여러 해가 흘러 그곳에 다시 갔을 때 삽에 기댄 채 불평만 하던 그 사람은 원인 모르는 병을 앓다가 회사를 그만 두었고 열심히 일하던 사람은 그 회사 사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일은 콜린 파월의 인생에 큰 교훈이 되었습니다. 불평과 원망을 일삼는 사람은 결국 그 불평과 원망의 열매를 따먹기 마련입니다. 반면에 감사하는 사람은 감사의 열매를 따 먹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서양 속담에 “행복은 언제나 감사의 문으로 들어와서 불평의 문으로 나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감사의 문으로 행복이 들어옵니다. 감사하면 지옥도 천국이 되지만 불평하면 천국도 지옥으로 변합니다.
이무라 가즈키요의 종이학
일본의 내과 의사 이무라 가즈키요(井'コ和清)는 믿음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섬유 육종암에 걸려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습니다.한쪽 다리를 잘라낸 후에도 진료를 계속하던 그는 암이 폐로 전이하여31살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죽음을 바라보며 기록한 편지와 글이‘종이학’이란 책으로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영화로도 만들어져 일본열도를 감동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그는 책에서“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가 보다”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이렇게 아름답고 귀한 것에 사람들은 왜 감사할 줄 모를까? 아버지가 계시고 어머니가 계시다는 것이,형제가 있고,친구들이 있다는 것이,손이 둘이고,다리가 둘이고,손을 뻗어 무엇을 잡을 수 있고,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갈 수 있다는 것,소리가 들린다는 것,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이것보다 더 멋지고 감사한 일이 있을까?그런데 이 아름답고 귀한 것에 아무도 감사할 줄 모르고 그거야 당연한 것이라고 말한다.하루 세끼 밥 먹고,밤이 오면 잠자고,다음 날 아침을 맞는다는 것,웃고,울고,노래하고,소리치고,뛰어다닌다는 것,산을 오르고,바닷가를 거닌다는 것,온갖 자연의 멋지고 아름다운 것에 아무도 감사할 줄 모르고 산다는 것 너무나 희한한 일이 아닌가?그 모든 것이 얼마나 눈물 나게 소중한 것인지!그 모든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신나는 것인지!이 모든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그걸 아는 사람은 마침내 그 모든 것을 잃어버려 본 사람만 알 수 있다.”그가 말한 감사는 지극히 소박한 것들입니다.이러한 것들에 대하여 감사해본 적이 있습니까?
윌리엄 캐리의 감사
제화공이었던 윌리엄 캐리(William Carrey)는 인도 선교의 꿈을 꾸며 라틴어,헬라어,히브리어,독일어,프랑스어를 공부하면서 문서로 선교하리라 기도하였습니다.그러던 중 영국 침례교단의 파송으로 인도에 갔습니다. 인도어를 공부하여 문법책을 만들었고,영인 사전을 편찬하며 인도어로 성경을 번역했습니다.이 소식이 본국에 전해지자 번역한 성경의 출판을 위해 인쇄기와 기술자들을 보내주었습니다.
그러나 조판이 완성될 무렵,캐리 선교사가 지방 전도를 나간 사이에 집에 불이 나서 인쇄기는 물론 힘들여 완성한 원고까지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습니다. 아주 절망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캐리는 포기하지 않고 잿더미 위에 무릎을 꿇고“하나님,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해버렸으나 다시 시도해 볼 용기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용기와 인내심을 처음보다 강하게 해주시고 나를 붙잡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고 다시 작업을 시작하여1801년 완성을 보았습니다.
그 일로 인해 그의 실력은 더욱 향상되었습니다. 그 후 캘커타에 설립된 윌리엄 대학의 교수로 30년 동안 재직하면서 성경을 24가지 인도 방언으로 번역하였습니다. 행복은 소유에 정비례하기보다 감사에 정비례합니다. 비록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감사하였을 때 캐리는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감사하면 소소한 일상에도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감사는 쑥스러운 일이 아닙니다.감사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아무 것도 없을지라도 감사해야 합니다.
바바라 존슨의 감사
바바라 존슨(Barbara Johnson)은‘모자에 제라늄 꽃을 꽂고 행복하게 살아라’는 저서에서 ‘삶은 내가 원하는 바대로 되지 않지만 스스로 선택할 수 있기에 모자에 제라늄 꽃을 꽂고 행복하게 살아가라’고 당부합니다.제라늄 꽃향기가 우울증 치료에 좋으며 편안한 기분을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바바라 존슨은 남편과 네 명의 아들을 둔 평범한 주부였습니다.
어느 날 가정에 문제가 닥치기 시작했습니다.귀가하던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되었고,설상가상 첫째 아들은 트럭 음주 운전자에 의해 목숨을 잃었습니다.둘째 아들은 동성애에 빠져 집을 나갔고 셋째 아들은 베트남 전쟁에 파견되어18세 어린 나이에 전사했습니다.
계속되는 불행으로 인해 그녀는“하나님,어째서 내게 불행만 다가옵니까?”라고 반문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야속한 세상과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였습니다.
비참한 심정으로 지내던 어느 날, 마음을 추스르고“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지.더 이상 비관적으로 살아서는 안 되겠다.이제부터 긍정적인 삶을 살자”고 결심하였습니다.그리고 다시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하나님!남은 생을 하나님께 맡기겠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감사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했습니다.
시간이 나는 대로 교회에 가서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감사가 기적을 불러왔습니다.식물인간이었던 남편이 일어난 것입니다.그 후 그녀는 하나님의 은혜에 더욱 감사하며“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셨으니 나도 뭔가 좋은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자신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미국에는 베트남 전쟁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숫자가50만명이 넘었습니다.아들을 전쟁에서 잃은 부모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그녀는 이런 슬픔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아들이 죽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국가를 위해 큰 일을 한 것입니다.”라고 위로했습니다.교통사고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에게도 편지를 쓰고 전화로 위로했습니다.
이들을 모아 함께 기도하고 그들을 위한 세미나도 개최했습니다.그뿐만 아니라 이런 이들을 도와주는 그룹을 만들고 선교회도 조직했습니다.드디어 그녀는 여성계의 유명한 지도자가 되어 재난을 당한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와 희망을 주는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훗날 동성애로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이 돌아오게 되었고 남은 생애도 보람있게 사는 복을 받았습니다.
만약 그녀가 절망하고 낙심하며 원망과 불평 속에 있었더라면 더 비참하게 되었을 것입니다.그러나 절망적인 상황 속에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했을 때 그녀의 인생이 새로워졌습니다.기적이 나타났습니다.베스트 셀러의 주인공이 되었고 존경받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 ‘물질적 풍요’
2021년 11월 18일, 미국의 여론 조사 기관 퓨리서치센터(Pew Research Center)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경제가 발전한 17개 나라 1만 9천여 명의 사람들에게 개방적인 질문 하나를 던졌다: “인생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What Makes Life Meaningful?) 경제가 발전한 나라 사람들이 삶에서 가장 비중을 두거나 혹은 가장 만족을 얻게 되는 근원이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 17개 나라 가운데 14개 나라 사람들은 똑같은 대답을 했다. 그것은 ‘가족’이었다. 이들은 다른 어떤 가치, 즉 물질적인 풍요로움보다 가족을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로 꼽았다. 부모, 형제자매, 자녀, 손자, 손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가장 만족스런 경험으로 여겼다. 가족의 업적과 성취를 자랑스러워할 뿐만 아니라 후손들을 위해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도 가지고 있었다. 호주, 뉴질랜드, 그리스, 미국 등 절반 이상의 나라에서 가족이야말로 삶을 가장 풍요롭게 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반면, 세 나라는 다른 대답을 했다. 우선 중국의 위협 가운데 있는 대만은 ‘사회’가 가장 중요하다고 대답했고, 코로나로 큰 어려움을 겪은 스페인은 ‘건강’이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어땠을까? 한국인들은 ‘물질적 풍요’(material well-being)를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라고 대답했다. 물론 9개 나라 사람들의 상위 3위 답변 안에 물질의 풍요가 포함있지만, 그것을 최상의 중요성과 가치로 여긴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했다. 물질적 풍요 다음에 건강이었고, 가족은 3위에 자리했다.
생각해 보면 대한민국 반만년 역사상 지금처럼 국민이 잘살고, 오래 살고, 깨끗하고 편리하게 산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아직도 물질적 풍요가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어느 부자의 감사
어떤 돈이 많은 부자가 큰 병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병만 고쳐주시면 자기가 살고 있는 집을 다 팔아서 그 돈을 모두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겠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연인지 기적인지 그 부자는 병이 말끔이 나았습니다. 그 부자는 자신이 하나님에게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아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병을 고쳐준 댓가로 집을 바친다는 것은 너무나 억울한 생각이 들었고, 괜한 약속을 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가지 묘안을 생각해 내었습니다. 그는 자기 집을 만원에 내 놓았고, 그 집과 함께 구입하는 조건으로 고양이 한 마리를 10억원에 내 놓았습니다. 결국 그 집은 고양이와 함께 팔렸습니다. 집은 만원에 고양이는 10억원에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헌금 봉투에 1만원권 한 장을 넣고 헌금을 하고 나서는 쾌재를 불렀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광야에서의 감사절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땅에서 광야로 불러내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십계명을 주셨고. 모세를 통하여 그들이 지켜야 할 규례와 율법을 주셨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 하나가 절기를 지키라는 명령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년에 최소한 세 차례의 커다란 감사 절기를 지키라고 명령하셨다. 무교병의 절기와 맥추절기와 수장절이 바로그것이었다(출23:14-17). 그런데 이것은 다 농사와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명령을 받을 때 그들은 농사를 짓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만나를 먹으면서 광야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농사의 추수기가 되면 어김없이 하나님에게 큰 감사를 드리도록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늘 감사함 속에서 살아가야 됨을 말씀하신 것이다.
한국도자기 김종호 장로
한국도자기의 김종호 장로는 가마를 굽는 사람이었습니다. 독을 구워서 파는 사람이었는데 최집사라는 사람이 교회에 나가면 술을 사주겠다고 하여서 술을 먹고 싶은 기분에 교회에 나가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교회를 다니다가 은혜를 받고 예수를 믿으면서 하나님의 사업에 적극적으로 동참을 하였습니다. 그는 교회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봉사하였고, 헌금을 드리는 것은 자신의 분수보다도 과하게 하여서 많은 물질적인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사업을 하면서도 많은 빛이 있었지만 김종호 장로는 하나님의 일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풍성하게 헌금을 하였습니다. 목사님의 자녀들을 생각하면서 고무신을 한켤레 사도 자기의 자식것만을 사는 법이 없었다고 합니다.
사업이 힘겨워지자 아들에게 사업을 물려주었습니다. 김동수 장로가 사업을 이어받았을 때 얼마나 빛이 많았는지 하나님께 서원하며 기도하기를 하나님이 이 빚을 갚아주시면 제 생명을 거두어 가도 좋습니다. 빚이 다 갚아지는 날 그는 아내를 불러 이야기를 하고 잠을 잤습니다. 놀랍게 아침에 일어나보니 자기가 살아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여 그는 지금까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마음껏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광조(주기철 목사 아들)의 간증(1998. 7)
“어차피 사람은 죽습니다. 한번 죽을 목숨이라면 잘 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죽는 것이 잘 죽는 것입니까? 주를 높이다가, 주의 영광을 드러내다가 죽는 것이 제일 잘 죽는 것입니다.”
옥중 아버지를 위한 소년의 간절한 기도
1938년 2월, 내 나이 7세 때 아버지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참배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의해끌려가셨다. 그리고 그로부터 7년 후인 1944년 4월 21일 평양형무소에서 순교하셨을 때 나는 13세였다. 아버지의 7년간에 걸친 옥중생활의 고난과 순교는 곧 우리 가족들에게 있어서도 쓰라린 역경과 생활의 순교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철없던 어린 시절 나에게는 몇 가지 기도제목이 있었다. 그 하나는 “아버지를 살려주세요”였다. 다른 서술어가 필요치 않았다. ‘아버지를 위한 나의 기도’는 어머니의 명령에 따라 맹훈련되었다. 새벽에 일어나 한 시간이상씩 통성기도를 해야 했고, 금식에 철야기도까지 해야 했다. 배고프고 졸린 어린 소년에게 있어서 한 시간의 기도란 너무도 길고 지루하고 힘들었다.
두번째 기도는 배부르게 먹고 싶다는 하소연에 가까운 기도였다. 아버지가 투옥되시고 평양 산정현교회는 폐쇄당했다. 그리고 우리식구는 목사 사택에서 쫓겨나 단칸 셋방에 갇히다시피 지내야 했다. 교회 성도들의 출입도 통제를 받았다. 쌀 배급도 중단되었다. 굶는 날이 먹는 날 만큼 많아지게 되었고, 죽 한 그릇을 세 번에 나누어 먹어야 했던 허기진 어린아이의 기도는 당연히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시기를 바라는 결사적인 기도일 수밖에 없었다.
세번째로 나에게 또 하나의 간절한 기도가 있었다. 신사 참배 거부로 아버지의 반복되는 투옥 속에서 나는 학교 근처에도 갈 수가 없었다. 그래도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 형과 함께 학원에 들어갔지만 그것도 잠시뿐, 일본 천황에게 큰 절을 하라는 동방요배를 거부하다가 쫓겨나게 되었다.
그 후 동서치과의원에서 급사로 마루 걸레질을 하면서도 공부에 대한갈급한 심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하나님! 저도 다른 애들처럼 학교 가서 공부하고 싶어요.’ 아버지의 순교도 13살 어린 소년의 마음엔 자랑스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싸늘히 식은 채 사과궤짝으로 만든 허름한 관에 누우신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울며 다가간 아들의 손에 잡힌아버지의 발은 상처투성이였고, 발톱은 다 뽑혀흔적도 없었다. 그 모양이 왜 그렇게도 보기 흉했던지! 순간, 어머니의 엄한 명령 속에서 지켜왔던 기나긴 새벽기도와 금식, 아버지만살아 나오시면 무언가 나아지겠지 싶었던 막연한 기대…. 이 모든 것이 끝이 났고, 나에게 남은 것이라곤 슬픔과 분노뿐이었다.
가난과 고통, 그리고 말씀이 유일한 유산 주기철 목사님, 그러니까 아버님이 순교하신 지 1년 4개월 후 마침내 8·15 해방이 찾아왔다. 이틀 후, 출옥 성도와 더불어 해방 감사예배를 드릴 때,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흐르는 눈물을 수없이 닦아냈다.
어머님이 유방암 수술을 받고 퇴원하여 집에서 요양하고 있을 때, “인민위원회 간부”들이 찾아와서 어머니에게 돈과 남산동의 적산가옥 문서 및 논밭 문서를 내놓았다. 항일투사인 주기철 목사의 숭고한 정신에 감복해 김일성이 보낸 보상금이라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완곡하게 사절하였다. “주 목사님은 이 세상의 포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순교했으니 하나님의 상을받기를 바랄 뿐이오!” 언제돌아가실지 모르는 어머니, 그렇다면 이 험악한 세상에서 혼자 살아가기 위해서는 저 돈이, 저 재산이 필요한데…. 어머니의 거절을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나를 의식하셨는지 그들이 돌아가고 난 후, 어머니는 정색하시며 나를 앞에 앉혀 놓고 성경 한 구절을 찾아읽으라고 하셨다.
시편 37:25~26절 말씀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의롭게 산 자가 버림 당하거나 그 자손들이 구걸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저는 항상 은혜를 베풀므로 그 자손들이 복을 받았도다.” 선친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했을 때, 그분이 남겨준 물질적 유산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순교자의 후손들이 누구나 다 겪을수밖에 없었던 배고픔과 원망과 좌절만이 남겨졌을 따름이었다.
그로부터 2년 후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한 줄의 성경구절을 건네주신 것이 내가 받은유산의 전부였다. 그것이 바로 시편 37:25~26 절이었다.
젊은 날의 방황과 고난들
1947년 5월, 괴롭고 슬픔으로 얼룩졌던 10년간의 평양생활을 청산하고 남쪽 서울로 내려와 둘째 형님 집에서 기거하며 보냈던 고등학교 시절은 즐겁고 행복한 나날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6·25는 그 조그마한 행복마저 송두리째 앗아가버렸다. 어쨌든 1954년 12월, 4년 3개월간의 기나긴 군대생활을 마치고 연세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른 새벽녘, 미 8군 쓰레기장에서 일하는 것으로 겨우겨우 학비를 마련하는 학교생활이었다.
주말엔 더 많은 쓰레기가 나왔기 때문에 교회에 갈 수 없었다. 평일에도 일하다 보면, 거의 오전 수업을 포기해야 했다.
과로가 겹쳐 일년 후 폐결핵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학업을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 나에게 생존을 포기하라는 사형선고와 같은 것이었다.
그때 나는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교회로 향했다. 검은색으로 염색한 군복에 군화를 신은 창백한 폐결핵 환자를 맞은 교회 목사님은 주 목사의 아들이라고 치켜세우며 교인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내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자존심을 상하게 했던지…. 내게 필요한 것은 돈이 들어 있는 흰 봉투 한 장이지, 목사님 말 잔치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순교 이후 지나온 세월 동안 하나님과 나와의 거리는 조금씩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자식을 버리면서까지 죽음을 선택했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 하나님이 앗아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뒤범벅이 되어 나의 젊음은 몸부림쳐야 했다.
그리고 육신의 아픔과 뼈저린 외로움 속에서 내가 “내 아버지의 하나님”을 포기하기로 결심한 것은, 있으나마나 한 하나님보다는 나 혼자라도 살아보겠다는 젊은 오기 때문이었다. 순교자의 아들은 10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이 땅의 한구석에서 그렇게 방황하고 있었다.
한줄기 빛으로 다가온 사랑
그러던 나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한 여인을 통하여 다가왔다. 나 혼자 외톨이가 되어 이 세상을 몸부림치며 걷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버지를 데려가신 하나님은 한 여인을 나에게 보냄으로써 사랑의 메시지를 대신하셨다. 내가 내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늙은 대학생이었다. 군복무 4년 3개월만에 제대했던 나는 고등학교 동창생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했던 그때에야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부모 없는 고아, 점심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가난, 그리고 창백한 폐결핵 환자…. 한치 앞도 기대할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두움의 미래와 참담한 현실생활이 그때 나의 프로필이었다. 자신의 자식을 미련 없이내팽개치고, 하나님께대한 충성을 앞세워 죽음을 선택했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어린아이의 기도와 절규에 묵비권을 행사하셨던 하나님을 버리기로 작정했던 스물 다섯의 젊음이었다.
바로 그때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나는 아내가 마련해준 학비로 대학을 순조롭게 졸업하게 되었고, 아내의 따뜻한 보살핌으로 병든 육신도 점차 회복되었다. 말단 사원으로 사회에 진출한 지 7년만에 석유회사의 임원으로 승진하고, 3년 후에 다시 그 회사의 사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내 아내의 극진한 사랑과 도움의 결과이기도 했다.
하나님은 내 아내를 통하여, 사랑과 평강과 믿음을 차갑던 나의 마음속에 다시 불어넣어주셨다. 뿐만 아니라 순교하는 그 순간어린 자식을 하나님 손에 부탁하셨던 그 아버지의 기도가 응답되어졌다는 것을 내 아내의 기도로써 확인할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 죽기까지 부인하지 못하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이 내 삶을 부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내의 사랑이 입증해주었던 것이다. 그로써 오기 부리며 방황하던 나의 삶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고난이 내게 유익이라
1976년 12월, 아내의 인도로 영락교회를 찾은 나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기다리고 있었다.
영락교회에서 몇몇 친구들과 함께 “임마누엘”이란 작은 모임을 만들어 하용조 목사님의 지도하에 매주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 6개월간 얼어붙었던 나의 마음이 녹아지면서 하나님과의 새로운 믿음의 관계를 바로 세우게 되었다.
“과거의 아픈 상처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이제부터 새로운 믿음의 삶이 시작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거나 지금이나 주 집사가 감당치 못할 시련을 결코 주시지 않습니다(고전 10:13). 비록 과거의 어려운 환경 때문에 좌절하고 고난도 당했겠지만 하나님은 미쁘사 주 집사를 시련으로 연단하여 보다 더 큰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했을 뿐입니다”(벧전 1:6,7).
하 목사님의 간절한 권면의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비로소 진리 안에서 자유를 깨달았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의 의미가 실감났다. 목사의 아들, 순교자의 아들로서 나의 모든 행동에 족쇄같이 무겁고 부담스럽기만 했던 그 진리가 세속에 얽매였던 나의 영혼을 자유롭게 해준 것이었다.
원망스럽던 부모님에 대한 경외감도 그제서야 싹트기 시작했다. 신앙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같이 버렸던 그 차원 높은 신앙에 내 머리는 저절로 수그러졌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신앙훈련을 시킨 부모의 진정한 사랑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고난이 내게 유익했다”는 다윗의 고백처럼 지금까지의 나의 삶을 주관하셨던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깨닫자(시편 119:76)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이 기도가 되어 봇물 터지듯 터져나왔다. 다시는 소리내어 기도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순교자 후손의 사명
이제 내 안에서는 긴 세월 동안 오기와 원망으로 억눌렸던 하나님의 형상이 다시 회복되기 시작했다. 나의 오랜 방황은 끝이 났고, 비로소 순교자의 아들로서의 긍지를 찾게 되었다. 두 아들을 키우고 다섯 손자녀를 바라보면서 나는 어버이의 깊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나를 위하여 시도 때도 없이 기도와 간구로 눈물을 흘리셨던 나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께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리고 이후로 나의 여생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앞서간 그분들을 기쁘게 할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내 나이 67세, 살 만큼 살았으니 이제 남은 여생은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 치자. 그래도 순교자의 후손으로서 할 일이 너무 많음에, 그리고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건강과 능력을 주심에 감사한다. 통일이 되면 가장 먼저 북한에 들어가 당신이 섬겼던 산정현교회를 재건하는 것이 으뜸가는 기도의 제목이다. 그것은 북한의 복음화, 즉 선친이 피로 뿌렸던 그 한 알의 밀알을 평양에서 열매 맺게 하는 사역이야말로 순교자의 후손이 해야 할 첫째 덕목일 것이다.
순교자의 아들이란 말이 거추장스러워 교회의 뒷좌석에서 움츠리고 앉아 외톨박이로 추워 떨고 있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나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삶을 살 것이다. 한국교회가 순교자의 후손들에 대해 외면했거나 잊어버렸다 해도, 하나님은 결코 나를 버리지도, 잊지도 않으시고 언제나 내 옆에 계신다는 사실을 증거해야 하는 것이 나의 사역이 아니겠는가!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추수감사절의 유래와 역사 – 홍치모 교수
영국교회의 종교정책과 청교도들의 고난
지금의 추수감사절의 유래는 1620년 미국에 건너 온 청교도(淸敎徒)들, 즉 필그림파더즈(Pilgrim Fathers)의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
영국에 있어서 청교도운동은 1558년 처녀의 몸으로 왕위에 오른 엘라자벳1세 때부터 시작되었다. 엘리자벳 여왕이 즉위하기 전 약 5년 동안 영국교회는 메리여왕(Marry of Tudor)의 반동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암흑기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런던 서쪽에 있는 사형장(smithfield)으로 끌려가 타오르는 화염에 휩싸여 화형을 당하였다.
그러나 메리여왕의 피비린내 나는 악몽과 같은 신교탄압은 5년으로 끝이 나고야 말았다. 사람을 죽이기로 악명 높았던 메리는 온 몸에 알 수 없는 독창이 발생하여 저주스럽게 죽고야 말았다.
그녀는 영국 국민들로부터 ‘피의 여왕'이라고 불리 울 정도로 잔인하였다. 결국 그녀는 가톨릭신앙의 광기 속에서 살다가 요절하고야만 것이다.
메리여왕이 사망하자 그때까지 숨어 있었던 엘리자벳이 나타나 왕위에 올랐다. 그녀는 국가의 안녕과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 우선 종교를 통일시켰다. 그것이 통일령 (Act of Uniformity)으로 선포되었다. 이 법령에 의할 것 같으면 영국교회는 다시금 헨리8세가 취했던 입장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로마가톨릭도 아니고 프로테스탄트도 아니었다.
그것은 중간노선을 지향하는 정책이었다. 메리여왕의 치세 아래에 갖은 박해와 핍박 속에서 참아왔던 일부 개혁신앙가들은 엘리자벳 여왕에게 기대를 걸었으나 실망이었다. 그들은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엘리자벳 여왕과 의회에 신앙의 순결과 예배의식의 개혁을 탄원했지만 그때마다 묵살당하곤 하였다. 이른바 캠브리지 대학에서 발생한 제복논쟁(祭服論爭)이라든가 또는 토마스 카트라이트 교수의 퇴임사건은 철저한 교회개혁을 위한 시도를 말하는 것이다. 이들을 가리켜 청교도들(Puritans)이 라고 부른다.
청교도운동은 엘리자벳여왕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엘리자벳여왕은 1603년 독신의 몸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죽기 전 후사문제에 대해서 유언을 남겼다. 즉 자기가 죽고 나면 북쪽 스코틀랜드왕국의 국왕 제임스6세(James)를 영국 왕으로 추대하라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영국의 청교도들은 한가닥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제임스 6세가 장로교국가의 국왕이기 때문에 만약 그가 영국 왕으로 즉위하게 될 것 같으면 그 어느 국왕보다 청교도들의 신앙적 입장을 잘 이해하여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만 하더라도 통신망이 거의 없었던 때였으니 만큼 영국의 일반 국민들은 북쪽 왕국의 사정에 대하여 너무나 모르고 있었다. 스코틀랜드왕 제임스6세는 장로교국가의 왕이기는 했지만 그는 로마가톨릭적 신앙의 소유자였을 뿐만 아니라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을 믿는 왕이었다. 그래서 제임스는 자기가 절대적인 권력으로 국가를 통치할 뿐만 아니라 교회까지도 자기의 수중에 들어와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고위 성직자도 국왕이 직접 임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북쪽 스코틀랜드는 1560년 존녹스(John Knox)가 개혁운동을 일으킨 이후 과도기적 상황에서 벗어나자 안드류멜빌(Andrew Melville) 목사가 쥬네브로부터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제2의 종교개혁을 단행하여 그 당시까지 남아있었던 감독제적(監督制的)요소를 완전히 제거하여 명실공히 장로제적 교회와 총회를 구축하였다.
이것은 제임스 6세에게는 큰 고통거리요 장애물이었다.
1572년부터 1595년까지의 역사를 보면 이 시기는 스코틀랜드에 있어서 장로교회의 황금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장로교회의 지나친 세력 확장은 도리어 화를 자초하게 되었다. 장로교 목사의 과격한 설교는 제임스6세로 하여금 장로교회를 탄압할 수 있는 구실과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제 정세는 역전되어 제임스6세가 장로교회에 대하여 격을 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영광스럽게도 영국 왕으로서 즉위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영국교회(Anglican Church)의 지도자들도 제임스6세의 진의를 파악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우선 영국교회 안에 있는 청교도 지도자들과 협상을 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합의는 돌연히 깨지고 말았다. 당시 청교도측 대표들은 영국 국교회측 대표들과 비교해볼 때 학식에 있어서나 언변에 있어서 영국국교회 대표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인물들이었다.
자신들의 약점을 깨달은 국교도 대표들은 제임스1세(스코틀랜드에서는 제임스 6세였으나 영국 왕으로서는 제임스1세에 해당함)를 먼저 알현하여 자기들의 의사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양쪽 대표들을 별도로 만나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것은 제임스1세 또한 바랐던 것이었다. 국교회 대표들이 만난 후 청교도 대표들이 국왕을 만나 교회의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였으나 묵살당하고 말았다.
제임스1세는 청교도들과 만난 석상에서 말하기를 “주교(主敎)가 없는 나라에 국왕(國王 )도 없다(No Bishop! No King!"고 하였다. 장로교 국가에서 온 국왕에게 기대를 걸었던 그들에게 이 말은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좌절당한 청교도들은 일단 벽에 부딪힌 셈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청교도들 사이에 의견이 둘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한쪽에서는 계속 투쟁할 것을 주장하는가 하면 또 한쪽에서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나라 밖으로 나가자고 주장하였다.
결국 청교도들의 일부는 정든 조국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영국 남쪽 해안에 있는 사우스 햄프튼항을 떠나 일단 화란으로 떠났다. 1607년 그들은 화란 라이든(Leiden)시에 집결하여 주로 영국과 화란의 중계무역에 종사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자녀들을 라이든대학에 입학시켰다.
이 대학은 유서깊은 대학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발생하였다. 이 대학 신학부에 새로운 조직신학 교수가 부임하게 되었는데 그 교수의 이름은 아미누스(Arminus)였다. 그는 칼빈과는 신학적 입장을 달리하고 있었다. 즉 칼빈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불가항력적 은혜를 주장하였다고 할 것 같으면, 아미누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주장함으로써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여기서 청교도들은 다시금 의견의 대립을 보게 되었다.
결국 신앙의 순결을 유지하기 위해서 일부 청교도들은 11년간이나 살았던 화란을 떠나 신천지 아메리카에 가기로 결정하였다.
브류스터(Brewster)를 지도자로 삼고 1620년 9월 16일 102명의 청교도들은 메이 플라워 (May Flower)호를 타고 암스텔담 항구를 떠나게 되었다. 그들의 행선지는 새로 개척한 영국의 식민지 버지니아주의 제임스타운(james Town)이었다.
대서양을 횡단하는 데 약 2개월이 걸렸다. 배가 거의 미국 해안에 접근했을 때 큰 폭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행선지와는 거리가 먼 동북부 해안에 간신히 도착하였다. 그곳은 케이프 코드라는 항구였다.
이곳에 기항한 메이 플라워호는 잠시 정박하여 거주할 만한 곳이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남자들만 상륙시켰다. 그들은 주변을 경계하던 중 인디언을 발견하였다. 청교도들은 위험을 느낀 나머지 다시 승선하여 항해하다가 프리마우스(Plymouth)에 도달하여 그곳에 착륙하게 되었다. 그날은 1620년 11월 21일이었다.
신대륙에서 꽃핀 감사의 생활
청교도들이 프리마우스에 도착한 때는 늦가을이었고 얼마 안가서 겨울이 닥쳐왔다. 도착한 그해 겨울은 몹시 추웠고 눈도 많이 왔다.
식량난과 추위에 떨면서 살았으니 그 생활은 비참하였다. 겨울과 봄 사이에 102명 중에서 44명이 사망하였다. 이들의 대다수는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나무를 잘라 통나무집을 지었는데 먼저예배당을 지은 다음에 자신들이 거처할 집을 지었다. 기아와 영양실조로 말미암아 대다수는 폐결핵을 않게 되었다.
1621년 정월 초하루에는 하루에 세 사람이나 사망하였다. 어떤 날은 불과 일곱 명이 집을 짓는 일에 종사하였다. 사람이 죽어도 몰래 장례식을 치르어야 했다. 사람의 수가 줄어드는 것을 인디언에게 보여서는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1621년 3월 하순 경 어느 날 한 인디언이 찾아왔다. 이 사람은 추장으로서 메인(Maine)주 해안가에서 약간의 영어를 배웠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그 인디언으로부터 주변사정을 들을 수가 있었다. 얼마 후 또 한명의 인디언을 데리고 왔다.
그는 백인 선장에게 납치되어 일단 스페인으로 끌려갔다가 다시 영국으로 탈출한 사람이었다. 영국에 있는 동안 영어를 배우게 되었으며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인디언이었다.
청교도들은 인디언과 친하게 되었고 그들로부터 옥수수를 재배하는 방법을 배웠다.
1621년 가을 첫 수확을 거둔 청교도들은 농작물과 생선, 과일을 차려놓고 인디언들을 초청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고 서로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이때 칠면조를 잡아먹은 것이 아마도 전통으로 내려와 관습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 농사를 지어서 주식으로 삼는 것 대신에 사냥을 해서 짐승들의 고기를 먹는 것과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아먹는 것으로 식량을 대신하기도 하였다. 정착 이후 3년이 지난 1623년부터 식량사정이 좋아지자 각 가정별로 토지를 분배하였다. 미국에 있어서 추수감사절의 기원은 청교도들의 신앙생활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역경 속에서도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기적적 은혜를 너무나 많이 체험하였다. 어느 해인가 알 수 없으나 수확을 앞둔 농작물에 새가 떼를 지어 날아와 농작물을 뜯어먹자 마을사람 전원이 합심하여 밤새도록 기도하니 새들이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여하튼 청교도들의 신앙정신과 생활은 미국사회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고, 그들의 영향력은 20세기 초엽까지 전 미국에 걸쳐서 세속사회까지 지배하여 왔었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잘 알고 있다. 언제부터 날짜를 정해서 추수감사 절기를 지키게 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1789년 미국 초대대통령 조지 와싱톤(George Washington)이 독립전쟁의 승리와 아울러 미국 헌법 제정을 축하하면서 11월 26일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선언했다는 말이 있다. 다음은 미국 남북전쟁 중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전쟁의 조기 종전과 국민의 단결을 위해서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감사일로 정했다고 한다.
추수감사절을 정부적 차원에서 확정지은 것은 미국 의회에서 1941년 11월 넷째 목요일을 감사일로 정함으로써 국경일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장로교 총회에서는 1908년에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추수감사일로 정하였고, 1921년 총회에서는 11월 셋째 주일 후 수요일로 개정하였다가 1941년 총회에서는 11월 둘째 수요일로 정하였다. 그러나 지금 추수감사주일은 11월 셋째 주일에 지키고 있다.
맺는말
지금 미국 동북부 해안에 있는 프리마우스 록 언덕에 세워진 기념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너희 조상이 어려움 속에서 성취한 것들을 비겁하게 포기하지 말라." 이 말은 미국 청교도들이 살아오는 동안 삶의 좌우명이 되어왔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은혜와 복을 베풀어 주시되 역경을 통해서 주시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해마다 추수감사절을 맞이할 때마다 이 절기에 한해만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 아니라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특히 역경 속에서도 참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자세가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과 같이 사치와 향락이 극심한 사회에서 나와 교회는 과소비적인 사회풍조에 물들지 않으려고 필사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지금도 미국의 어느 가정에서는 일년에 한번씩 저녁식사는 옥수수 죽을 끊여서 먹는다고 한다. 그것은 미국에 처음 온 조상들이 어떻게 고생했는가를 산실물로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물질의 번영은 인간으로 하여금 교만과 나태에 빠지게 할 위험률이 높다. 그러므로 겸손한 마음으로 나 자신을 늘 경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