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풍 목사
1.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이기풍 목사는 1865년 평양에서 출생하여 1883년까지 한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어린 시절 남다른 총명함으로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줄줄 외우고, 글과 그림에도 재주가 있어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이였다. 그는 의협심도 강하여 백성들에게 거만하게 굴던 평양 좌수를 폭행하여 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이기풍은 19세에 동학에 가담하였는데, 그 후로 서양인들이 조선을 집어삼키려 한다는 말을 듣고 서양 선교사들을 박해하고 기독교를 핍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1890년 어느 날 평양 거리에서 노방전도를 하던 마펫(마포삼열) 선교사에게 돌을 던져 턱뼈가 부러지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훗날 그의 제주도 선교 사역이 박해로 인하여 중단될 위기에 처했을 때 그를 얽어매는 족쇄가 되었고, 평생 복음에 빚진 자로 살게 만들었다.
이기풍은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전쟁터가 되어버린 평양을 빠져나와 원산으로 피신하였다. 피난 생활은 고달프고 희망이 없었다. 전 재산을 잃어버린 그는 담뱃대에 그림을 그려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곳에서 노방 전도하는 스왈른(W. L. Swallon, 소안론) 선교사의 모습을 보며 옛날 자신이 선교사의 턱뼈를 부러뜨린 일이 생각나서 마음이 심란하였다. 그날 밤 잠을 자는데 잠결에 방안이 빛으로 환해지면서 주님이 가시관을 쓰시고 나타나셨다. 그는 너무 눈이 부셔서 쳐다볼 수도 없었는데 소리가 들리기를,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복음을 증언할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마치 다메섹에서 사울을 회개시켜 바울로 만드시던 주님의 음성이 그에게도 들려진 것이다. 그 후 그는 완전히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고, 지난날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의 신실한 종으로 살게 되었다. 이기풍은 1894년 나이 30세에 전군보(田君甫)라는 사람의 전도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고, 1896년에 스왈른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기풍은 후에 마펫 선교사를 찾아가서 지난 날 자신이 돌을 던져 상해를 입힌 사건에 대하여 회개하고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1898년부터 매서인으로 함경도 각지를 돌며 복음을 전했다. 그는 1902년부터는 황해도의 여러 도시에서 조사로 일하였는데, 이때 마펫 선교사의 권고를 받아들여 1903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기풍은 길선주, 서경조, 양전백, 한석진, 방기창, 송린서와 함께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이 되었고, 한국교회는 7명의 목사를 배출한 1907년에 독노회를 조직하였다.
2. 죄인 중의 괴수, 이방인의 선교사가 되다.
목사 안수를 받은 이기풍은 독노회의 결의에 따라 당시 이방 땅이나 다름없는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당시 평양신학교 교장이던 마펫 선교사는 7명의 졸업생들에게 제주도 선교사를 자원하는 사람이 있는가 물었지만 아무도 선뜻 대답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당시에 제주도를 가려면 작은 돛단배를 타고 노를 저어 가야 하기 때문에 파선하여 죽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오직 이기풍 만이 제주도의 선교사가 될 것을 마음먹고 부인 윤함애 사모와 상의 한 후에 자청하였다. 이러한 결심에 대하여 이기풍 목사의 딸 이사례 권사는, 그가 목사가 되기 전 선교사를 박해하고 돌을 던져 턱을 다치게 한 죄를 기억하며, 죄인 중의 괴수였던 자를 구원하여 목사가 되게 한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심정으로 죽도록 충성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자청한 것이라고 술회하였다.
이기풍 선교사의 파송 예배는 1908년 1월 11일에 길선주 목사의 설교와 함께 장대현교회에서 거행되었다. 한국교회 최초의 선교사 파송 예배는 세계 선교의 문을 여는 출발점이었다. 길선주 목사는 설교를 통하여 “당신이 평양의 첫 선교사들에게 돌을 던졌던 사건과 마펫 선교사가 핍박을 견디며 복음을 전한 것을 기억하면서, 혹 제주도 사람들이 당신에게 돌을 던진다고 하더라도 결코 실망하지 말고 굳세게 견디며 복음을 전하라”는 말로 이기풍 선교사를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이기풍 선교사는 길선주 목사의 설교 내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예수님을 핍박하던 그가 이제 예수의 복음을 증언하는 사람으로 변한 것에 대한 감격과, 선교사를 박해하던 그가 이제는 선교사가 되어 박해를 받으러 가려는 숭고한 결단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었다. 이 최초의 선교사 파송 예배를 통하여 한국교회는 선교하는 교회로서의 의지를 확고히 하게 되었다. 이기풍 선교사를 파송하던 한국교회의 시작은 미미하였으나, 그 열매로 오늘날 세계 2위의 선교대국이 된 것을 생각하면, 그 날의 선교사 파송은 한국교회 역사상 가장 의미가 있는 사건임에 틀림이 없다.
3.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이기풍 목사는 부인 윤함애 사모와 함께 언어가 통하지 않고 낯선 불모의 땅이요 이방 땅인 제주도로 향했다. 윤 사모는 황해도 안악의 양반 집에서 태어났는데, 죽을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중 언더우드 선교사의 조사였던 김채봉의 기도를 받고 치유함을 얻는 신비한 체험을 하였다. 그러나 예수 믿는 것을 반대하던 부모는 그녀를 집에 가두어버렸다. 우여곡절 끝에 집을 탈출한 그녀는 평양에 도착하여 마펫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이길함(Graham Lee) 선교사의 양녀가 되었다. 마펫 선교사는 이기풍이 난산으로 전 부인을 잃고 홀로 된 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중 윤함애와의 결혼을 주선하였고, 둘은 부부가 되어 제주도로 선교의 길을 떠나게 된 것이다.
이기풍 목사는 1908년 1월 17일 평양에서 서울로 왔고, 24일 다시 목포로 갔다. 그리고 2월 20일 목포를 출발하여 제주도를 향하였으나 풍랑으로 배는 추자도에서 난파되었고, 이기풍 목사는 구사일생으로 44일이 지난 4월에야 제주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는 1899년에 있었던 신축교난의 여파로 인하여 제주도 주민들의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신축교난은 대원군이 천주교를 박해하여 수많은 교인들을 죽인 사건으로, 예수교를 믿으면 죽는다는 공포가 확산되어 있던 때였다. 이기풍은 바울의 고백처럼 수없는 죽음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음을 당해야 했다.(고후 11:27)
사람들은 예수교를 전하는 이기풍 목사를 꺼리고 회피하며 반대하였다. 길가는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면 주민들은 손사래를 치면서, “설러버려 설러버려 야가기 끊어 지갠”하며 도망을 쳤는데, 이는 “그만 두어라 그만 두어라 내 목이 달아난다”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그가 무심코 제주도의 풍습에 대하여 평양으로 적어 보낸 선교 보고서의 내용이 제주도민들을 불쾌하게 만들어,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 때문에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이기풍 목사는 마침내 마펫 선교사에게 제주도 선교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절망에 빠진 자신의 심경을 적은 편지를 보냈는데, 이때 마펫이 보낸 답신에는 “당신이 내 턱을 때린 흉터가 아직 아물지 않고 있으니 아물 때까지 더욱 분투하시오”라는 권면의 말이 적혀 있었다. 이기풍 선교사는 옛날의 잘못을 회상하면서 다시 용기를 내어 복음을 전하였다고 한다.
그의 복음에 대한 불굴의 의지는 조금씩 열매를 맺기 시작하였다. 제주도 선교를 위하여 한 달 동안이나 한라산 주위를 돌던 이기풍 목사는 결국 영양실조로 쓰러졌는데, 자신을 살린 집주인 해녀가 예수를 영접하게 되어 제주도 선교의 첫 열매가 되었다. 1909년 5월에는 제주도에 큰 홍수가 났는데, 이때 이기풍 목사가 물에 떠내려가는 여인을 건져내는 사건으로 인하여 제주도 주민들 사이에 그에 대한 긍정적인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였다. 이기풍 목사는 농사철에는 사람들 틈에 끼어 농사일을 도와주면서 낯을 익히고 복음을 전하였다. 장날에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으며 말을 주고받다가 슬며시 자기 집으로 초청하여 음식을 대접하면서 전도하였다. 그리고 윤함애 사모도 이길함 선교사로부터 산파술과 의학에 대한 상식을 배웠는데, 제주도의 여인들이 해산할 때 조산원으로 도와주고 병자들을 돌보는 일을 도맡으면서 복음전파에 기여하였다. 특별히 사람이 죽었을 때 염을 하고 장례를 치루고 나면 그 가정이 반드시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이기풍 목사는 교육 사업도 하여 1910년 영흥학교를 세워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의 기도에 하반신 불구자가 일어나고 정신이상자가 낫는 등 많은 신유의 은사도 나타나면서 선교사역이 자리를 잡아갔다.
이기풍 목사의 제주도 선교 13년의 열매는 1912년 제1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록에 의하면 성안교회를 비롯한 3개의 교회와 5개의 기도처에 교인이 410명에 이르는 놀라운 것이었다. 이기풍 목사가 떠난 제주도에는 30개의 교회가 설립되었고, 1934년에는 노회가 조직되었다.
4. 고난의 길, 순교의 길, 사도바울의 길
이기풍 목사의 선교의 길은 가정적으로는 고난 그 자체였다. 그의 6남매 중 셋째 아들인 사준은 10세 때 제주도에서 죽었고, 넷째 아들 사영은 2세에 광주에서, 그리고 첫째 딸 사라는 18세에 순천에서 죽었다. 이기풍 목사의 딸 이사례 권사의 증언에 의하면, 이는 불철주야 전도에만 급급하여 병든 아이를 잘 돌보지 못한 까닭이었다고 한다.(순교보, 서울: 기독교문사, 1991년, 103쪽.) 이기풍 목사는 이러한 고난 속에서도 감사의 기도를 계속하였고, 자신의 과거의 죄를 용서하시고 복음 전도자로 세우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선교사로서의 본분을 다하였다. 그는 새벽기도 후에 강대상을 부여잡고 울면서 “하나님 아바디의 은혜 감사합네다. 나는 죄인중에 괴수외다”라고 기도하곤 하였다.
이기풍 목사는 1차 제주 선교를 마친 후에는 전라도 내의 여러 교회를 돌면서 목회를 하였다. 그는 1913년에 벌교교회로 파송되었는데, 자전거를 타고 여러 마을을 돌면서 새벽부터 밤까지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다. 그는 너무 열정적으로 전도한 탓에 1915년 성대에 이상이 생겨 말을 잘 못하게 되었고, 관절염과 귓병 등의 지병을 앓게 되어 할 수없이 목회를 사임하고 서울로 올라와 요양 생활을 하였다. 병이 어느 정도 완쾌되자 다시 전라도로 내려간 그는 1918년 광주 북문안교회(現 광주제일교회)에 배유지 선교사의 뒤를 이어 2대 목사로 부임하였다. 1920년에는 전라노회장과 총회 부총회장으로 섬겼고, 1921년에는 제10대 총회장으로 장로교단을 이끌었다. 그는 1923년 순천교회와 1924년 고흥교회를 목회하였고, 1927년 다시 제주도로 내려가 성내교회의 목사로 목회를 하였다. 그리고 1934년에는 칠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가기 싫어하는 작은 섬 여수군 남면 우학리에 들어가 목회하였다.
이기풍 목사는 1936년을 기점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에 맞서서 신앙을 지켰다. 그는 1938년 미제의 앞잡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지만 신앙의 지조를 끝까지 지켰다. 그는 일제의 협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날 배반하신 적이 없는데 내가 어찌 예수님을 배반하겠는가?”라는 일념으로 버티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으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1942년 6월 20일, 75세로 소천하였다. 현재 그의 묘는 광주제일교회 공원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5. 설교자 이기풍 목사
이기풍 목사는 설교자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을까? 오늘날 우리는 그의 설교를 들을 수도 없고 분석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가 평생을 바쳐 그렇게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한 동력(動力)이 무엇이었는가는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는 고백이다. 그는 사도바울처럼 회심 전에 똑똑하고 명석하고 잘난 사람이었다. 그러나 잘못된 신념 속에서 교회를 핍박하고 선교사의 턱을 부러뜨린 박해자로서의 사건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을 구원하여 복음을 전하는 자로 세우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면서 전도하였다. 바로 이것이 설교의 동력이 되어야 한다. ‘죽을 죄인을 살려 주셨다’는 감격 말이다. 그 은혜에 대한 감격이 생생하게 살아서 온 생애를 지배할 때, 당신의 목회에 불평이 사라지고 순교적 각오와 열정이 생겨날 것이다. 바로 이 감격과 함께 설교가 터져 나온다면, 당신이 이 시대의 사도바울이 되지 않겠는가? 이제 우리의 다메섹으로 돌아가서 그곳에 자신을 세워보자! 그리고 영원히 멸망 받을 죄인을 구원하여 자녀로 삼으시고, 그것도 모자라 복음을 전하는 자로 세우신 은혜를 회복하고 말씀을 전하자!
글 / 문성모 목사 (서울장신대학교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