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0일, 많은 사람들이 별 의미 없이 지나칠 평범한 날짜 밑엔 '장애인의 날'이란 작은 글씨가 내 가슴속의 아픈 기억인 듯 콕 박혀 있다. 달력을 보며 가만히 생각해본다. 시각장애인으로 사는 지금의 내 삶을 축복 받은 삶이라고 말할 수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이 나에게 있었는지를......
어릴 때 당한 사고로 인해 시력이 남들처럼 발달하지 못하게 되었다. 40~50년 전 일이라 확대경이 있는 줄도 모르고, 집이 너무 가난해서 부모님들은 나에게까지 신경을 쓸 수 있는 형편도 못 되었다. 그렇게 초등학교 시절을 갑갑하게 보내다가 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아버님께서 나를 병원에 데리고 가셨다. 그러나 원장님은 "아버님, 우리 나라 기술로는 고칠 수가 없습니다." 이 한 마디만을 하셨다. 예상은 했지만 너무 실망스러웠다. 한 가닥 희망마저 사라지고, 더 이상의 희망도 용기도 나에게는 남지 않았다. 교실에서 제일 앞자리에 앉아도 칠판의 글씨가 보이지 않는데, 책의 활자는 점점 작아지고, 학교 친구들은 자기들과 다른 나를 멀리 하려고 하고, 부모님께도 죄송스럽고 더 이상 공부 할 힘이 없었다. 중학교만 마치고 용기가 없어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말았다.
마냥 집에서 놀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육지에 가면 공장도 많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던 중 마침 부산의 어망 공장에서 일을 하는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어부들이 사용하는 그물을 만드는 공장이어서 시력이 나빠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친구에게 나를 부산으로 데려 가 달라고 부탁했다. 제주에 내려왔다 올라가는 친구를 따라 부산으로 갔다. 친구가 다니는 어망 공장에 갔는데 시력부터 검사하는 것이었다. 장님 같은 분이 여기서 무슨 일을 하겠다고 왔느냐며 안 된다는 것이었다. 친구는 퇴근하고 와서 왜 거짓말 했냐며 마구 화를 냈다. 너는 안경을 쓰나 안 쓰나 효과가 없다면서 그렇게 눈도 어두우면서 일하겠다고 친구를 따라 오다니 너무하다며 화를 내는 것이었다. 이 일로 그 친구와는 어색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그러다 우연히 친척뻘 되는 언니를 만나 친척 언니 집에서 자취를 하게 되었다. 언니는 스프링 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그 언니랑 같이 스프링 공장에 다니게 되었다. 거기도 작은 스프링을 잘라 고리 하나만 올려주어야 하는데 내 눈으로는 보이지가 않았다. 그래서 거기서도 일할 수가 없었다.
다시 일자리를 찾아다녀야 했다. 다음은 와이셔츠 공장에서 셔츠 컬러와 소매에 마무리가 덜 된 실들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일을 했는데, 가위로 실만 잘라야 하는데 천을 자르는 실수를 자주 하게 되어 동료들을 볼 면목이 없어 더 이상 다닐 수가 없었다. 다시 여기저기 다니며 일거리을 찾다가 물레로 털실을 감아주는 공장에 다니게 되었다. 굵은 털실이라서 처음 몇 달은 일을 할만 했다. 그러나 오래 근무하려면 재봉실보다 더 가느다란 실을 감아야 했고 기계에 실을 연결해 감을 짜내어야 했다. 내 시력으로는 그것은 무리였다. 또 1년에 한 번씩 신체검사를 하는 날에는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공장을 쉬어야만 했다. 시력이 나쁜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숨기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허나 고향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남의 보리밭에 김을 매러 갔는데, 피를 같이 뽑아야 하는데 보리랑 비슷하니 구분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아무 일이나 해야 했다. 그러나 여러 사람 틈에 끼어서 그럭저럭 넘어가는 것도 한두 번이지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봄에는 일을 못하고 여름에는 콩밭을 매고 겨울이 되면 배추 캐고 배추를 자루에 담는 일, 밀감 따는 일을 하면서 지냈다.
그러나 스물 일곱 살이 넘어가니 집에 있기가 눈치가 보여서 결혼이란 걸 하게 되었다. 지체장애 4급을 가진 분을 누가 소개시켜 주었다. 마냥 집에 머무를 수도 없고 그냥 세월에 떠밀려 좋은지 싫은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결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기 낳고 잘 살아보려고 노력했지만 딸만 낳다보니 시댁에서는 남자아이가 없다고 우리가 죽을 먹는지 밥을 먹는지 관심도 없고, 손자까지 재산을 나누어주면서도 우리에겐 딸만 있으니 아무 것도 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래도 집도 마련하고 안정을 찾는가 싶더니 남편이 당뇨에 걸리고 말았다. 남편은 다리가 불편하니 다른 사람 앞에서 걷는 것을 싫어해서 조금도 걷지 않고 차만 타고 다니니 살이 쪄서 생긴 병 같다. 이제는 당뇨가 생긴 지가 10여 년이 지나다보니 발에서 고름이 나서 일을 할 수가 없다. 그래도 요즘은 쉬니 좀 괜찮아진 것 같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발에서 고름이 나서 결국은 내가 생활을 꾸려나가야 했다. 10여 년 전부터 공공사업인 길가에 풀베기, 꽃 심기, 쓰레기 매립장에서 재활용품 분류하기, 사무실 청소 등 여러 일을 했지만 생활을 꾸려나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식당일을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허드렛일을 했으나 오랫동안 일을 하려면 음식을 해야 했다. 음식 하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음식에 머리카락이 들어가는지 하루살이 같은 작은 벌레가 있는지 구별해 낼 수가 없으니 역시나 오래할 수는 없었다.
한 두달 지나 주위 사람들이 시력이 나쁜 것을 알아차리면 다시 식당을 옮기고 하다가 어느 날 광고지에서 발 관리라는 직업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발 관리는 시력에 상관없이 할 수 있을 것 같아 발 관리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안마사 협회에서 손으로 하는 일은 자기네 일이라고 못하게 한다면서 보건소에서 단속이 나왔다. 그래서 안마사 협회에 전화로 저도 시각장애인인데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래서 읍사무소에 가면 서류가 있으니 서류를 가지고 안과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고 읍사무소에 등록하고 장애인 카드가 나오면 시각장애인 학교에 다닐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니 시각장애인 학교에서 안마를 배우고, 3년 수료증이 있어야 안마자격증 신청 자격의 주어진다는 것이었다.
시각장애 4급이란 등급을 받고 이 늦은 나이에 제주영지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학교에 다니려니 아침 8시부터 오후 4시까지는 일을 할 수가 없으니 오후 4시 이후에 문을 열다보니 일하는 날보다 노는 날이 더 많다. 이러다 보니 금융계에서는 수입이 없다고 대출을 안 해주고, 읍사무소에서는 저소득자로 인정을 안 해주고 참 답답하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이 오래 전에 보증 선 것이 잘못되어 남편에게 독촉장이 나와 가족들 몰래 대출해서 물고 다시 대출해서 물고 하다보니 재산보다 대출금이 더 많아졌다.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집 걱정 없이 살다가 이 아이들을 데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사방이 캄캄해 어느 쪽으로 발을 디뎌야 빛이 보일까 암담하기만 하다.
너무 외롭게 살아서 딸을 다섯이나 낳았는데 이렇게 어려운 지경을 당하니 자식을 적게 낳을 것을 하는 후회도 해 보았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 다섯 딸들이 다 건강하고 착하게 자라주었으니 이것이야말로 내가 가진 가장 큰 재산이고,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힘겨운 상황이지만 내가 제주영지학교에 다시 입학해서 얻는 마음의 벅참이 내 생활을 이끌어 가는 큰 힘이 되고 있다.
이전에는 나만 힘든 것 같고, 세상에 나처럼 힘든 사람은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여기 와서 보니 참 다양한 친구들을 보게 된다.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는 학생, 생각과 감정을 전달할 수 없는 학생, 전혀 안 보이는 학생, 장애가 하나가 아니고 두 세 개가 겹친 학생 등등 너무 많다. 그러나 모두 명랑하고 삶이 힘들다고 엄살도 부릴 줄 모른다. 모두 하나같이 서로 도와주려고 노력한다. 선생님들도 중증장애인을 돌본다는 게 보통 사명감으로는 힘이 들것이다. 그래도 웃으며 아이들과 늘 함께 한다.
선생님들도 학생들도 모두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나의 힘겨움도 이들과 다를 것이 없다고, 나도 한 번 잘 살아보자고 어느 순간에 힘을 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지난 시간을 이렇게 헤쳐왔듯이 남은 시간도 나와 내 가족들, 힘을 내서 살아갈 것이다. 내 삶이 축복 받았으니 이 세상을 구경하는 것이 아닐까?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가까이서 보아야 잘 보이는 세상이지만 이런 아름다운 세상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것이 내 삶의 진정한 축복이리라.
가끔 세상을 가까이 보려 다가가는 나를 이상한 듯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더 가까이서 소리를 듣고, 더 가까이서 느끼려고 다가가는 우리 학교의 여러 학생들과 다른 장애인들을 이상한 듯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우리처럼 가까이서 보고, 듣고, 느끼는 세상이 그들이 멀리서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세상과 같다는 것을 어서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서로 마음을 모아 축복 받은 서로의 삶을 아끼고 보듬어 줄 때 모두 어울려 웃음으로 사는 행복이 찾아올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4월 20일, 그 평범한 일상의 숫자 밑에 '모두 함께 되는 날'이라고 나는 적어 본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