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지극하셨던 불교 정성에 꽃피워드릴께요!!
경남 창원교회 김상효 이경숙 가정
1. 나와 남편의 출생지
2. 지극하신 할머니의 유교,불교정성 기반 덕분에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귀한 축복!!
3. 3년 임지와 신앙생활의 성장은
4. '참가정실천운동', 축복가정 탄생
창원에서 참어머님이 직접 주관하시기 위해 하루 전날 저녁에 창원에 도착
하시어 식구님들의 기다림과 설레임의 아름다운 가을 밤 추억이
5. 앞으로의 희망사항과 삶은
1. 나와 남편출생지:
나는 1958년 7월생으로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신애1리 540번지, 전주 이씨, 아버지 이각수님과 고령 신씨 어머니 신희수님 사이에 2남2녀 중 셋째 장녀로 태어나 건강하게 잘 자라는 나에게는 믿음과 사랑이 부족한 부모님의 삶이 나를 힘들고 아프게 했다. 부부간에 서로 믿어준다는 믿음은 정말 중요한 것이라는 걸 느꼈다. 그래서 난 믿음과 사랑이 충만한 좋은 부모가 되고 싶어서 하늘 축복을 받는 믿음의 가정이 되고 싶었다.
남편은 1960년 8월 생으로 광산 김씨 김성용님과 인동장씨 장정자님 사이에 삼형제 중 장남으로 진주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때 부모님을 따라 진해로 이사를 와서 잘 성장하고 있는 고등학교 1학년 겨울쯤에 진해교회로 전도 활동 나온 선배가정 1800가정 구자희님께 전도가 되었다고 한다. 수고하신 구자희님 뵙고 싶습니다! (그 때 손수 뜨게질을 하셔서 만들어 주신 둥그런 오색의 방석을 나는 진품 명품으로 귀히 여기며 아끼고 사랑하고 있다.)
2. 이명선 할머니의 지극하신 유교, 불교 정성 덕분에 "축복가정"의 꽃을 피우고
우리 4남매를 유교에 바탕을 두고 불교의 말씀으로 열심히 절, 즉 부처님 말씀을 섬기시고 지성껏 다니시면서 지극 정성으로 우리 남매들을 정갈하게 잘 키워주신 새하얀 고무신의 할머니 정성 덕분으로 잘 커나온 나는 어느새 잘 자라 혼기를 맞았는지 여기저기서 중신이 들어오기 시작했으나, 나는 왠지 그들은 내 짝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멀리서 백마타고 올 것만 같은 환상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봄, 여름날에 마을 순회중에 계시어 새마을회관에 찾아와 (농번기 탁아소 운영하고 있을때) 저를 발견하신 앙평교회 김종출 목사님 덕분으로 나는 앙평교회 성화유치원에서 3년간 일하면서 통일세계 소책자를 통해 말씀을 접하고 , 7일 원리수련을 받으며 부활론에서 내 영혼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목사님께서 정성을 많이 들이신 것이 6000가정으로 결실되었다.
3. 임지와 신앙생활
진해교회 청년이었던 남편은 축복을 받고 청파동 본부교회에서 '선교와 교육' 편집부에서 임지활동을 했고, 나는 충남 대천교회에서 느린 말씨가 여유롭고 정감가는 식구님들과 임무상 교역장님과 사모님의 고요하신 신앙을 배우며 각 지역에서 동원된 언니들과 함께하며 3년간 많을 것을 배우며 신앙생활을 키우며 공적활동을 했다.
천국은 가는게 아니라 말씀으로 부활된, 실체된 "우리 인간들이 이 땅과 이 지상에서 건설해 나가야 한다"라는 말씀과 '초가삼간에 살아도 부모님과 가족의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고 100평 집에 살아도 믿음과 사랑이 없으면 지옥', 잘못된 것은 청산짓고 새 시대 새 말씀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라는 말씀에 공감하면서 참가정 축복운동이야말로 구국 구세 운동의 원형이라는 사실에 내 영혼은 빛 가운데로 접어들었다.
곧게 자란 내 모습을 보며 행복해 하셨던 우리 이명선 할머니와 형제들의 큰 충격은 내가 통일교회에서 결혼을 한다는 것이었다.
여지껏 잘 있다가 이게 뭔 일이냐~?? 며 집안이 발칵 뒤집혀 혼란가운데 있을 때 나는 축복의 확신을 갖고 그 준비된 6000쌍 축복결혼을 할 것이라고, 한복을 싸서 신애리 집을 도망치듯 뛰쳐나와 드레스와 반지도 맞추고 계획된 일정대로 움직여서 일사천리로 그 꿈같은 축복가정 대열에 섰다.
내가 철이좀들어서 지금 생각해보니 2남 1녀를 두셨던 우리 이명선 할머니께서는 젊은 신랑 23세, 할아버지를 징병을 보내신후 3남매를 어렵게 키우시다가 귀한 딸도 갑자기 잃으시고 일본 제국의 혼란 속에도 자녀들의 생명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끼신 분이라서 저희 들을 더 아끼고 귀하게 잘 키워주신 것 같다.
고맙고 고마우신 우리 이명선 할머니!!
저희들을 바르게 잘 키워주셔서 참으로!! 정말로 고맙습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할아버지가 징병을 안가셨더라면 할머니와 우리 아버지 형제도 고생을 덜하셨을 것이고, 할머니는 자녀도 더 낳으시고 참으로 영화롭게 잘 사셨을 인정도 많으시고 젊으신 이명선 할머니이셨는데....
남과 북의 쓰라린 분단의 전쟁과 영토 분쟁이 할퀴고 간 흔적의 아픔들이 사실, 후손인 우리에게는 적지 않은 상처와 아픈 영향을 크게 미친 것이다. 저의 아버지께서도 오른팔에 총상을 당하셔서 아픈 흉터가 있으셨다. 할아버지는 징병나가서 충북 옥천에서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얼마~만에야 받으신 이명선 할머니는 남편의 대한 애닳픔과 그리움에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셨어도 여전히 맑으셨고 단아하셨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아버지 없이 자라신 나의 아버지와 삼촌과 고모의 외로움도 이해하고 가끔은 그것이 낳은 기운의 원인을 감지하며 이해와 위로도 해 드리며 산다.
아,
정말!!
시리고 아프다.~~~!!
아아,
영안이 밝게 깨이신
초 정치 지도자님들이시여!
초 종교
지도자님들이시여!
부디 지혜를 모아
세계인류가 화동하며 평화롭게 살도록 제안하시고
이 당시대에 평화가 정착할 수있도록 인도,협조하며 주시옵소서!!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아침 햇살처럼
은은한 밤에
고우신 달님처럼
서로 분쟁없는
아름다운 인간의 삶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쁘신 삶으로 보답하게 하소서.
소득, 생산 없는 전쟁, 영토 영입 분쟁에 얽힌 기막하고 가슴 아픈 사연들 ᆢ
다시 신선한 축복 얘기로 돌아가서,
수택리 수련소에서의 그 준비 찬양의 아름다운 저녁과 그 늦은 밤까지 기다림의 매칭시간을 기다리다가 아버님께 들은 말씀은 "코가 하늘에 걸렸다"고 참아버님께 혼들을 내신 후에 약혼 후보자들은 잠시 눈들을 붙힌 후 일어나 다시 준비 찬양들을 하고 묵상, 기도하며 귀한 매칭의 순간을 기다리고 또 온종일 매칭에 애쓰시는 그 영성 높으신 약혼 매칭으로 피와 살을 내리시는 생생한 현장을 직시하며 느끼고ᆢ, 구경을 아주 잘 했다고 생각한 나는 해가 져서 더 어둡기 전에 양평 집으로 내려갈려고 할때 즈음 아버님의 "너!"하시는 반가운 음성에 혹시하며, 설마했는데 "나"라고 어서 나가라는 주변 손짓들에 의해 나간 그 순간의 역사가 우리의 삶의 단단한 초석이 되었다.
참아버님의 눈길이 한번 지나간 후 다시는 아버님의 눈길이 안오시길래, 신앙이 깊지 않았던 나는 "엄청난 약혼 매칭 구경"을 잘했다면서 마음을 다 비우고 집으로 내려가려했던 것이었다. 사실 나도 축복 미자격자였다. 교회생활과 정성이 3년은 넘어야 축복서류가 통과하는데 그런 신앙생활 시간이 내게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ᆢ
밤 10시 안에는 내가 양평읍 양근1리 기찻길 옆에 사시는 삼촌 댁에까지라도 도착되어 있고 싶었다.
그런사이에 축복 연령이 미달이었지만, 턱걸이를 해서라도 꼭 축복을 빋아야겠다는 간절함으로 약혼 매칭장까지 달려온 진해 청년 김상효씨와의 순간 매칭으로, 경배드리고 밖에서 기다리던 진해 청년들의 환호와 축하 박수를 축복 세례와 같이 흠뻑받으며 우리의 출발은 그렇게 뜻 섭리와 함께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리며 따라온 것이 그 백마타고 오실것 같은 그님을 그렇게 참부모님이 맺어주셔서 달려온 삶이 어느새 축복 40주년을 맞았다!!!
그런 정성의 기반에는 지고지순이신 진해교회 식구님들의 오랜 기도와 쌍둥이 시동생들의 진해교회 건립 당시의 진한 땀방울 정성도 뒷받침되었다고 생각하며 늘 고맙고 고맙게 생각한다.
삶의 장애물들은 말씀으로, 신앙생활로 승리하여 오늘에 이르러 이렇게 승리로 말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신앙생활에 자긍심이고 엄청난 감동 감화로 나는 살고있다.
뭐 크게 표나게 한 일은 없어도 160가정 축복활동를 위한 진해교회 시절 정종호 목사님 (사까이 지즈루 사모) 내외분과 부인회 식구님들이 하나되어 하늘 심정을 부여잡고 진해시 면면촌촌의 노인정을 중심으로 순회 축복활동으로 전력 투입하는 동안 좋은 결과를 인정받아서 미국 위싱톤에서 준비한 1997년 12월 7일에 행사하는 4억쌍축복식에 초대되어 겨울 뉴욕과 위싱톤의 하얀겨울의 눈보라가 축하를 하듯 흩날리던 그 축복식 날에 축하객이 되어 미국 땅도 밟으며 하늘길은 열어가시는 님들과 참부모님과 선교사님들의 크신 심정과 사정에도 닿아보았다. 남편은 회사일관계로 함께 할 수가 없었음이 이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축복식 덕분에 미국 이민 1세와 결혼한 여동생과 동생 가족도 만나서 좋은 시간을 갖었고, 은행에 근무하고 있던 동생이 휴가를 내어서 2박3일간의 나이아가라 폭포 여행의 추억도 만들었다. 뉴욕 번화 거리에 나가서 '미스 사이공' 뮤지컬도 감상하고 뉴욕의 다양한 문화도 체험하고 왔다.
4. 참가정실천운동, 축복가정 탄생
"가정이 바로 서야 사회가 바로 선다"
1997년 가을에 참어머님께서 '참가정실천운동'을 창원에서 직접 주관하시기 위해 하루 전날 창원호텔에 오셔서 창원교회 식구님들께 귀한 추억과 화동회 시간도 잠시 갖었던 그 아름다운 가을 밝은 밤이 환하게 떠오른다. 참아버님은 일본에 행사관계로 계시면서 전화로 어머님을 격려해주셨던 기억이 따듯했고 행복했다.
창원호텔이 정말 더 빛이 났던 그 날밤, 몇몇 식구님들의 품격 있는 가곡들로 호텔방안을 깨우고 채웠을 때, 진해식구를 대표해서 나아가 어머님께 노래 한곡을 올리라는 정종호 교회장님의 권유에 '밀양아리랑'을 진해교회 식구를 대표해서 인사드린후 허벅지에 손바닥을 힘차게~쳐내며~
"날 좀보소~~ 오. 날~ 좀~보소~~오~!!
날 쫌보~오~소오~~^^^동지섣달 꽃 본듯이
날 좀 보소오~~오~~"하며 화동의 노래로 들썩일 때 참어머님도 그 분위기로 어머니의 기쁨을 더하시는듯 더욱 환하게 미소지어 주셨던 것, 아름다운 추억이 귀하다.
참가정실천운동으로 진해시 시민회관에서 "가정이 바로서야 사회가 바로선다"고 교회와 정종호목사님을 중심한 저희 부부가 보기 좋은 모습으로 시민들 앞에 서서 참부모님은 대신한 축복가정으로서 호소하고 손을들어 축복하고 선포했던 때가 엇그제 같은데 시부모님댁에서 우리가 첫 살림을 나와 주인집 셋째 아드님을 1988년 10월 30일에 수택리에서 6500가정 축복을 받도록 인도하고 잘 사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애가탔었는데, 지금은 그 어려움을 다 극복하고 참가정이 되어 우리 가정 보다 더 열심히 하늘 섭리에 정성모으고 지역사회에 봉사와 일본어 강사도 하면서 잘 살아줘서 사회에 축복가정으로 귀감이 되어서 고맙다.
사실, 가정이 바로 서야 사회가, 나라가, 국가가 바로 서고, 인류 세계가 평화롭게 안착한다는 이 새로운 말씀에 함께 한다면 천국을 가는게 아니라 이뤄 나가야 한다는 말씀에 정말 공감되고 나도 그렇게 살고 싶은게 너무 좋아서 나는 이 참가정운동 문결을 타고 우리는 오늘 여기까지 온 것이다.
나도 이 좋은 물결에 힘을 더하고 뭇사람들도 따라오라고 나도 선구자가 되어 지신있게 손짓하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가 시부모님과 같이 살다가 첫 살림을 나와 월세방 주인집 아드님 전도에 정성을 다해 3일 수련, 7일 수련을 받쳤더니 축복을 순조롭게 받고 살면서 어려움들을 신앙으로 잘 승리해내고 이쁜 딸 2세도 낳아 기쁘게 잘 살더니 어느새 그 하늘의 그 고운 딸이 대학교 1학년으로 축복을 받을 때가 되었다.
시부모님과 쌍둥이 시동생들 가정이 함께 서울 올림픽운동장에서 36만가정 기성축복을 받았을 때도 어린 조카도 함께 한 그 시간이 얼마나 얼마나 소중하고 즐겁고 감동을 했었던지요. 참부모님!! 감사드립니다.
2005년 여름 3개월간의 120개국을 순회를 마치시고 오신 참부모님께서는 2005년 12월 25일 낮 일산 킨텍스에서 수만명 승리집회를 하시고는 밤 늦게 청평으로 들어가셔서 약혼매칭을 기다리는 2세들의 매칭하셨다. 나는 국내 서울 근처 일산 킨텍스집회 행사에 다녀오는 것만도 쉽지 않아 녹초가 되어서 쇼파에 엎드려 딸의 매칭 기도를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뜻대로 하소서"라고 하다가 잠이 살짝 들었을때, 따르릉 따르릉~~ 매칭해주셨다는 딸의 반가운 전화가 왔다.
ᆢ
선문대학교 1학년 2004년 말경에 학업을 접고 딸 2세 가현이가 STF활동 출발을 해서 열심히 했고, 그 이듬해 겨울 축복을 받게된 매칭 축복!! 그 축복 매칭은 참부모님이 3개월 동안에 120개국을 순회하시고 고단하심을 뒤로하신채 늦은 밤 시간에 맺어주신 호주(캐나다출생)~한국 교체축복으로, 교체축복 한쌍 한쌍이 다 참부모님의 피와 땀과 참사랑의 결정체이자 고귀한 발걸음의 역사적인 축복식이었다.
감동의 매칭을 받은 딸 커플은 축복식을 하고 바로 STF활동를 열심히 한후 미루었던 학업을 연계해 마무리하고, 직장을 갖은 후 축복 11년만에 3세도 건강하게 낳아 말씀 가운데 이쁘게들 살고 있으므로,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딸 가현이가 축복을 받은 덕분에 우리의 신앙도 견고해졌다. '부모가 자식을 키운 것보다 자식이 부모를 키운다'며 우리 부부도 늘 참부모님께 감사 감사 드린다. 그것이 다 우리 사돈 부부께서 사위를 신앙으로 잘 키워주신 것에 감사 드린다.
사돈, 수고 많으셨습니다. 늘~~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내 딸, 아니 우리 하늘 딸의 키는 153cm, 사위의 키는 189cm로 제일 큰 사람과 제일 작은 것 같은 사람을 짝을 지어주셨는데, 어쩜 그렇게들 참사랑으로 부모님이 주시는 사랑처럼 잘 지내는지 그저 고맙고 어여쁘다. 정말로 축복으로 우리 가현이를 하늘 딸로 크게 귀하게 엮어주시고 키워내시는 하늘과 사위가 참 감사하고 고맙다.
내가 축복을 받고 임지엘 떠났던 그 겨울 김종출 목사님은 우리 작은 오빠한테 맞아 죽을 뻔 했단다. "내동생 내어놓으라"며 화가 많이 난 모습으로 경운기를 끌고 교회로 식식대며 찾아왔을 때, 목사님은 다행이도 근처의 목욕탕에 계셨단다.
그런데 그 오빠 이주관씨는 내가 임지 공적 활동 마치고 와서 가정생활을 잘하고 있을때, 양평교회 목사님과 하나가 되어 겨울에 설악산 수련소에서 하는 승공연합 수련에 버스 한 대를 모시고 안내해 가다가, 이 승공교육 '주체측이 통일교회' 라는 것을 알고는 중간에서 늦은 오후 시간 도착 직전에 반 이상이 버스에서 내렸단다. 이렇게 황당할 수가! 이 때, 우리 작은 오빠는 하늘의 심정을 크게 느끼셨던 것 같다.
작은 오빠가 지병으로 서울 병원에 계실 때 참아버님의 귀한 자서전이 발간되어서 작은 오빠께 보내드렸더니 그렇게나 반가워하시며, 그런 일이 있었다 말씀을 해주시는 덕분에 나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군 생활에 바쁘셨던 큰 오빠 역시 양평교회 김종출 목사님께 '제 동생의 이 결혼은 집안에서 허락된 결혼이 아니오니 취소해 주십시요'라는 정중한 편지를 보내셨던 큰 오빠께서도 지금은 제 남편과 원리말씀도 이해해주시고 참 편안해 하신다. 제가 가끔, 아니 종종 카톡에 올리는 말씀도 거부하지 않으시고. 내 어릴적 고향 친구 기독교신앙의 김 목사는 기독교에서 제명 당할 수도 있다면서, 그리고 "이해가 쉅지않다며" 내가 보내는 동영상이나 말씀들을 아직은 수용하지 못하고 거부하는데, 나는 그 김 목사님을 참부모님처럼 끝가지 수용할 것이다.
그렇게도 반대하고 이해를 못하시던 작은 오빠가 어떻게 그렇게 통일원리를 이해를 하시고는 가현이 아빠를 너무나 좋아해주시고, 이뻐해 주셔서 나의 한도 시원히 풀렸다.
그리고 그 불교정성이 지극하셔서 행여 잘 키운 손녀딸이 잘못 될까 봐 걱정이 태산이셨던 우리 이명선 할머니께서는 독신축복을 받으시곤 청평 성지에서 "천국이 이런 것" 이라고 노래하시듯 춤을 덩~실 덩~실 더~덩실 추시며 행복해 하셨던 추억도 남겨주셨으니, 나의 겹겹이 쌓였던 아픔과 슬픔이 다 씻겨 나갔고 참 홀가분하게 감사 속에 산다. 청평에서 축복식 전날 할머니를 목욕시켜 드린 후에 할머니를 업고 고개 위에 (강의실) 숙소까지가는데 내가 할머니를 업고 날아가는 것 같았다. 할머니도 얼마나 어찌나 좋아하셨던지요. 하늘 같으신 할머니랑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란히 누워 새우잠을 잔 그 잠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꿈길 같은 잠이었다. 할머니가 얼마나 얼마나 아끼던 손녀랑 좋은 곳에서 깨끗이 씻고 함께 있다는 것에 좋아하셨던지요. 그 때는 양평교회 후임으로 전찬인 목사님이 수고하실 때였다.
전찬인 목사님! 지금도 미국 계시는지? 어느 곳에서 하늘 수고를 하고 계신지 안부가 궁금하다 살기에 바쁘다보니 이렇게 안부를 묻는다.
하늘이나 알고, 땅이나 아는 얘기들를 이렇게 6000가정 축복 40주년을 기념하는 합동 자서전을 통해 얘기할 수가 있으니 더 없는 감사이고 오아시스 같은 은혜라고 생각한다. 하늘섭리사의 아픈심정과 그 하나님을 위로하시며 승리로 이겨내시며 지금까지 함께한 형제자매님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다.
5. 앞으로의 희망사항과 삶은
앞으로의 우리의 삶은 뭐니뭐니해도 우리 2세 하늘 아들 현수가 축복을 받아서 기쁨의 가정으로 사는 것을 보면서 “어하~둥둥~” 응원하며, 우리도 그동안 못한 활동을 되살려서 천보가정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축복 45주년, 축복 50주년, 2042년에 축복 60주년이 되면 우리도 어엿한 천보가정이 되어 하늘과 땅을 기쁘게 하는 참가정의 디딤돌이 되어서 감사와 은혜에 속에 인생의 여유를 찾아 천지인참부모님께 기쁨과 영광을 돌려드리며 기쁨의 가정으로서,
시편 23편 1~6절 말씀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란 말씀과 고린도전서 15장 10절 말씀에 더해 "나의 나됨은 하나님, 천지인 참부모님의 크신 은혜와 전도하신 분과 나를위해 정성들이신 분들의 덕분으로 된것이니"를 고백하면서 새 말씀의 실체로 거듭난 축복가정으로 감사와 은혜를 노래하며 하늘가정들과 못다한 사랑을 나누며 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