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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5 분당벧엘교회 구요셉목사님
‘교회가 무너지고 있다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라는 제목으로 오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합니다. 지난주 영상이 조회수 13만이 넘었습니다. 물론 끝까지 시청한 것은 아니었지만 뭔가 싶어 들어와 보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댓글이 많이 달렸는데, 댓글의 80%가 목사에 대한 불만입니다. 저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크리스찬들이 교회가 무너지고 있는 것에 대해 위기감을 느끼는데, 그 중심이 바로 목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목회자에 대한 불만이 큽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왜냐하면 저도 어릴 때 교회 다니면서 목사님들에게 회의감을 느끼고 교회를 떠나려 했지만,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예수를 믿기로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3년이란 고뇌에 빠졌다가 진짜 예수를 만났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고나니 다시는 예수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교회를 비판하고 목사를 비판할 수 있지만 교회를 떠날 수는 없었습니다. 제가 정말 운이 좋았던 거는 진짜 목회자를 만난 것입니다. 군에서 제대하고 돌아와 보니 부모님들이 교회를 옮기셨는데, 그곳 목사님은 오직 예수만 강조하셨습니다. 성도들에게 여러분들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이 설교 주제였습니다. 예수님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살면 안 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끝까지 그 설교하시다가 마지막에 그 목사님이 목회를 그만두실 때는 우셨습니다. 성도들 앞에서 여러분 하나님이 이 교회을 버리셨다는 말씀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목회를 마치셨습니다. 생명 다해 목회를 하셨지만 성도들은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돌이키지 못했다고 한탄하신 것입니다. 다행히 청년부를 맡고 있던 청년부 목사님도 개혁적인 목사님이셨는데, 그분 또한 현재 교리는 성경과 맞지 않다고 주장하다가 고신파에서 쫓겨났습니다. 그 목사님은 지금도 본인이 깨달은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교회 부목사였다가 다른 교회 담임목사로 가시게 돼 있었는데 그런 주장 때문에 목사직도 가지 못하시고 조그마한 교회를 개척하셨다가 목회를 지금은 거의 마치신 지경이 되셨습니다. 왜 그 목사님은 자기의 모든 삶을 걸고 그렇게 외쳤을까요? 좋은 인생이 눈앞에 펼쳐질수 있었는데도 말씀 때문에 자기의 유익을 다 버린 것입니다.
원래 기독교는 천주교가 물질 때문에 타락하고, 천주교 신부들이 타락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돈에 붙잡혔을 때, 거기에 반박해서 나온 것입니다. 얀 후스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외쳤다가 화형당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예언했습니다. 앞으로 100년 후에 나와 같은 사람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성공할 것이다. 그의 예언과 같이 루터가 나와 종교 개혁을 시작하고 기독교가 탄생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을 하면 화형당하고 쫓겨나고 죽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가지고 그들은 외쳤습니다. 독일이라는 국가는 이 종교 개혁으로 종교 전쟁이 일어났고 독일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했습니다. 30년 전쟁을 통하여 독일은 국가 자체가 초토화됐습니다. 그 결과 기독교는 종교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종교의 자유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자기 생명을 걸고 말씀으로 돌아가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외치고 그들은 죽어 갔습니다. 수도 없는 투쟁을 통하여 기독교가 생긴 것입니다.
개신교의 후배들인 현재 우리 상태는 어떻습니까? 목자들은 과연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려고 목숨을 겁니까?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이 말씀이 지금은 면죄부가 되었습니다. 과거의 가톨릭과 똑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네가 그렇게 고백만 하면 너는 구원받는다. 이것이 모든 개신교의 면죄부가 돼버렸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그렇게 외쳤을 때 생명을 내놓았습니다. 예수님 때는 그렇지 않았을까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씀을 통하여 너는 죽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목사님들이 이 말씀을 붙잡고 죽으려고 합니까? 말씀을 붙잡고 살려고 합니까? 이건 다 죽는 짓입니다. 목사가 죽지 않으면 교회는 죽습니다. 과거에 신부가 타락했을 때 교회가 죽었듯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가 죽지 않으면 개신교는 죽습니다. 교회는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종교 개혁을 해야 합니다. 어떤 종교 개혁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자유주의 국가입니다. 과거에 루터가 외쳤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란 말씀을 교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안 됩니다. 이것은 가톨릭과 대항하기 위해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교리를 버리고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루터가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했듯이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말씀 구원론에 대해서 성경은 네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절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5장 3절부터 7절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 말씀이 모든 성경을 함축한 말씀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쓰게 하셨습니다. 사람이 구원받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유일한 방법을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함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 하셨는데, 목적어가 빠져있습니다. 누구를 향하여 가난한 자인지가 빠져있습니다. 왜 빠졌을까요?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나의 관점에서 생각합니다. 우리는 나와 사람과의 관점으로 생각하니, 심령이 가난한데 어떻게 천국을 갈까 생각하지만, 관점을 하나님 앞에서로 바꾸면, 하나님 앞에서 심령이 가난해야 천국간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란 하나님 앞에서 낮아진 자로, 이들이 복이 있습니다.
그러면 구약에서는 안 그럴까요? 많은 사람이 구약의 율법이 폐해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 아느냐 나는 율법을 온전케 하려고 왔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율법과 선지자란 모세오경과 모세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언약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말씀은 십계명을 명확히 알 수 있게 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십계명의 언약을 완벽하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십계명 언약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까지 사랑하기 위해서 주셨습니다. 바울이 말했던 율법은 구약의 제사법을 말합니다. 아침, 저녁의 제사법, 날짜에 따른 제사법, 할례법 등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율법입니다. 본체이신 예수께서 오셨으므로 이것들은 폐해진 것입니다. 거룩하신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먹지 말라고 했던 음식법도 다 폐해진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한 말을 가지고 구약 말씀 전체를 없애버리는 분이 많습니다. 전혀 말씀과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를 온전케 하러 오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 말씀도 구약의 말씀과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십니다. 이는 너는 내 앞에서, 내 말에 네 마음을 낮추라는 말씀입니다. 마음을 낮추면 선악을 알게 나무 열매를 먹을까요? 못 먹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네 생각보다 높게 두라, 네 마음은 낮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절대 따먹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네 마음이 하나님 말씀 위에 있느냐, 밑에 있느냐, 이걸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생각을 하나님 말씀보다 앞세웠습니다. 심령이 가난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멸망 당한 것입니다. 죄를 지었고, 인류는 지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만났을 때도 뭐라고 하셨을까요? 똑같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묻는 말씀도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시는 말씀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십계명의 언약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여호와를 경외하여 복받게 하려 하신다고 하십니다. 왜 십계명 언약을 왜 주셨습니까?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왜 너희 마음을 여호와 앞에 낮추라는 것입니까? 여호와의 말씀 아래 너희가 존재하라는 것입니다. 똑같은 말씀입니다. 너희 마음이 여호와의 말씀 아래 존재할 때 너희가 복을 받을 것이다. 복은 히브리어로 [바라크]로 ‘무릎을 꿇다’란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추면 복을 주십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습니다. 십계명이 무엇입니까? 너는 내 앞에 섰을 때 우상들을 네 마음속에 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자기를 높이는 것, 물질을 더 높이는 것, 하나님보다 마음에 두는 것이 있다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자기를 낮출 때,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출 때 구원받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대강령입니다.
마태복음 18장 1절부터 6절
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제자들이 예수님께 천국에서 누가 크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질문과 다른 대답을 하십니다. 천국에서 누가 크냐고 묻는 제자들은 다 천국 가는 줄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목회자들도 똑같습니다. 다 천국 갈 줄 압니다. 천국 갈 뿐만 아니라 자기는 큰 상급을 받을 줄 압니다. 큰 교회 목사님만 그런 줄 아십니까? 아무리 설교하고 아무리 해도 자기 가족밖에 교인이 없어 나이가 50이 넘고 60이 넘어도 목회에 성공한 적이 없는 목사들, 교인 수가 10명내외인 목사들 이런분을 만나도 제가 오히려 고개를 숙여드려야지 만족을 하십니다. 목사, 장도, 권사, 집사들에게 상처받은 교인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교회를 떠나는 사람도 많습니다. 저도 교회를 떠나고 싶었지만 예수를 만났기 때문에 떠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방황한지 모릅니다. 크고 작은 목사님들 만나뵈면 다들 한가닥합니다. 목사가 뭐라고 목사는 높아지면 안 됩니다. 지금 제자들도 자기들은 높은 줄 압니다. 자기는 당연히 천국 간 줄 압니다. 누가 천국에서 큰 자냐는 질문은 의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뭐라 하십니까? 너희들 다 천국 가는 줄 아느냐 딱 한마디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돌이키라고 하십니다. 현재 제자들 상태로는 천국 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목회자분들께 호소합니다. 여러분 자기를 높이고 있으시면 여러분은 결단코 천국 못 갑니다. 예수님은 단에 선 자에게 무익한 종이니 뒤로 물러나라고 하십니다. 교회는 예수만 있게 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 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불행하게도 수 없는 목회자분들이 천국 가는 줄 착각합니다. 돌이키지 않으면, 목회자가 죽지 않으면 지옥갑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라고 대답해 주십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 너 자신을 낮추라.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과 똑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너를 낮춰라. 네 모든 재산을 버리고 가족도 버리고 나를 쫓아온 너희들도 예수 앞에 낮추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천국 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오늘날 목회자분들은 자기 간증들을 하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예수 이야기하셔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 앞에 낮춰야, 무릎을 꿇어야 천국 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목회자뿐만 아니고 모든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그 대상이 하나님 앞에서, 또는 사람 앞에서란 말입니다. 두 번째는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나으니라’고 하십니다. 목회자, 장로 그리고 권사, 전도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 자신을 성도 앞에서 낮추라. 너 자신을 높이고 남에게 상처 주고, 함부로 말하고 그리고 남을 없신 여길 때, 그래서 교인이 예수를 떠나버린다면 네가 자살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뿐 아니라 성도 앞에서도 낮아져야합니다. 많은 댓글이 목사를 욕합니다. 목사가 자기를 높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짜 목사, 자기를 낮추는 목사를 찾다 이상하게 제가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제 저도 자꾸 낮춰야 합니다. 저도 하나님 말씀대로 가야 합니다. 제가 잘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의사들이 난리를 치는데,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직업은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직업자체가 공적인 성격으로 공공재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자격증을 준 것입니다. 개인의 이익은 후순위여야 합니다. 목사들은 겸손해야 합니다. 정말로 낮아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사하면 안 됩니다. 자신을 높이려고 목사 됐다면 그만두십시오. 그 속에 있는 교만을 없애지 않으면 성도를 죽이는 것입니다. 성도 죽이고 자기도 죽습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이 어린아이 중에 하나라도 실족케 하면 차라리 자살하는 게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교인들이 목사 때문에 교회 못 가겠답니다. 많은 사람이 목사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목사는 짓밟히는 자리입니다. 욕 먹어도 괜찮습니다. 진짜로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예수님이 임명하신 것이고, 임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목사도 공공재입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서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성도 곁을 떠나면 안 되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댓글을 힘입어 하고 싶은 말을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4절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히브리어로 애통은 [펜떼오]라 하는데 슬퍼하고, 근심하다, 한탄하다는 뜻과 동시에 유월절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바라보고 가슴을 치는 것입니다. 옛날에 제가 어릴 때 이 말씀은 회개하면 위로해 준다는 뜻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를 알고 보니 의미가 명확해집니다. 십자가를 만난 자가 복이 있고 위로를 받습니다. 십자가를 만남으로 구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십자가가 주인되었는지, 십자가가 늘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기독교는 ing 진행형입니다. 한 번의 고백이 아닙니다. 계속 십자가가 내 마음에 있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만이 나를 구원하고, 내 죄가 사해집니다. 십자가 앞에 무릎 꿇은 자는 복이 있나니, 성령이 너를 거듭나게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거듭난 자는 천국에 갈 것입니다. 지난 주에 그 설명을 드렸습니다. 온유한 자를 간단히 말씀드렸는데 사실 온유한 자가 중요합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요.’ 온유는 히브리어로 [아나와]라 하는데 대답하다는 뜻과 억눌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억눌린 상태에서 대답하는 것입니다. 즉 종된 상태에서 대답하는 것, 바로 순종입니다. 말씀 아래 절제하는 것입니다. 애통이 십자가를 만나고 예수 안에 들어온 것이면, 온유는 그 예수 안에 들어온 자가 믿음이 성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온유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답하여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십자가를 만났다고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갑니까? 안 그렇습니다. 저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만나고 너무너무 감사해서 예수의 예자만 들어도 눈물을 뚝뚝 흘렸는데, 여전히 나쁜 습관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바로 안 변합니다. 그래서 말씀은 십자가를 만난 자가 구원을 받는다고 하시면서 온유한 자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낮아진 자, 바로 언약을 지키려고 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을 받습니다. 저는 예전에 이 말씀을 보고 화내지 않고, 남에게 유순하게 말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되어야지 했는데 여태껏 땅 한 평 없습니다. 어떤 성도님도 여태껏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살았는데 집도 없다고 하는데 저도 동감합니다. 성실히 열심히 살아도 내 집 하나 마련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내 집이 있다고 해도 만족이 됩니까? 온유하고 부드럽고 유순하다고 땅이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온유는 헬라어로 [프라우스]라 하는데 ‘길들여진 야생마’란 뜻입니다. 귀에 쏙 들어옵니다. 여러분은 길들여지고 있습니까? 우리 길들여집시다.
창세기 17장 1절부터 2절
1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하나님이 아브라함 99세에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절대로 자식을 낳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만나셔서 1년 후에 네가 아들을 낳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하시면서 너는 내 말을 믿으라고 말씀하시면서 언약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처음 말씀,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하신 말씀은 하나님이 자신을 높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네 아들을 낳게 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합니다. 곧 너는 내 말을 믿고 내 말 안에 거하라. 내 말 안에 낮아지라고 일관되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말씀 아래에 있으라 그러면 네가 구원을 얻으리라. 구원은 단순합니다. 하나님 말씀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내 말 안에 거하면 이 언약 안에 거하면 네가 번성하리라. 곧 내가 네게 복을 주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합시다. 이 땅에서는 복을 못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복을 받습니까? 하늘나라에서 받습니다.
창세기 17장 6절부터 11절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6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내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 언약은 아브라함하고만 한 것이 아니라 후손과도 함께 맺고 있습니다. ‘내가 너와 후손에게 너와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누구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십니까? 너와 네 후손, 단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맺었던 언약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하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게 하시고 부활 승천시키셨다가 다시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왕국, 천년왕국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결론은 예수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말씀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 말한 것처럼, 예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시게 되면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업으로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다 받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했는데,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궁금해집니다. 말씀에는 언약을 지키는 방법으로 할례를 받으라 합니다. 이 할례는 십자가에 못 박혀 살 찢고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그래서 신약부터는 할례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으므로 구약의 제사법은 다 폐해졌습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맺은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언약입니다. 그 십자가의 언약을 굳게 잡고 지키는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입니다.
창세기 17장 12절부터 14절
12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13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언약의 대상자들이 나옵니다.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 아브라함의 직계 자손입니다.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 이방인 중에서 돈으로 산자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화목제물로 알고 있는데 이사야 56장에 보면 예수님을 속건제물이라 합니다. 속건제물은 성전의 성물이 훼손되었을 때, 그 훼손된 성물을 되갚기 위해서 드리는 예물입니다. 우리 사람은 원래 아버지의 성전에 있어야 할 존재들인데 그런 우리가 죄로 훼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그를 속건제물로 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에게 돌아오라 하여 내가 예수를 통하여 살리리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한분 한분은 빚진 자입니다. 1만 달란트 빚진 자입니다. 예수님은 그 1만 달란트를 갚아주신 분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용서하였듯이 너도 남을 용서하라 하십니다. 예수님이 속건제물 되셔서 우리 이방인 모두를 샀으니 그들 또한 언약 안에 들어갑니다. 구약과 신약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같습니다.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다고 하십니다. 바로 예수 십자가의 피입니다.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 끊어진다고 하십니다. 구원받지 못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의 언약 관계에 있으면 이방인도 아브라함의 언약의 자손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땅을 기업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은 천국에서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바로 새 예루살렘 성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두 번째는 새 하늘 새 땅이 내려올 때, 새 예루살렘 성이 내려오는데,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는 땅을 받지 못합니다. 성품이 변해야 합니다. 자기를 쳐 말씀 아래 복종시키고, 말씀 따라 순종하는 자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들이 휴거 대상자입니다. 정확히 이해하셔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자가 다 휴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이 어떻게 휴거와 연결되는 지는 계시록 7장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 중에서 다 올라오는데 흰옷을 입고 있습니다.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입니다. 자기를 쳐 복종시킨 자입니다. 그 모인 무리를 하나님의 군대라고 합니다. 군대이기 때문에 여기서도 남자에게 할례를 하라고 했습니다. 군사는 남자입니다. 하늘나라에 올라가면 성별이 없어집니다. 모두 군대가 되는 것입니다. 휴거의 목적은 군대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휴거 대상자는 온유한 자, 십계명의 언약을 지키는 자, 말씀 아래 대답하고 종된 자인 것입니다.
여러분 휴거 되고 싶습니까? 그러면 마태복음 5장, 6장, 7장 매일 한 번씩 읽으십시오. 복 있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묵상은 눈으로 본다는 뜻이 아닙니다. 히브리어의 의미는 하나님 말씀을 읊조리는 것입니다. 말씀 아래 엎드린 순종하는 자가 휴거되어 군대가 됩니다. 이 군대는 예수님이 이 땅을 심판하러 내려오실 때 같이 내려옵니다. 함께 이 자리 와서 심판하고 이스라엘 12지파에 들어가 땅을 받습니다. 천년왕국 때 지형도 없고 산맥도 없고 강도 없고 뚝 뚝 잘라줍니다. 새 예루살렘 성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집 좀 없으면 어떻습니까? 집 없다고 우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자기 믿음 없음에 울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예수 만났으면 됐지, 십자가 만났으면 다 받은 것입니다. 좀 가난하고 남들이 병신같다면 좀 어떻습니까? 괜찮습니다. 십자가만 있으시면, 십자가 사랑과 은혜가 있으면 다 가진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5절부터 30절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풀어주시는 말씀입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무슨 뜻입니까? 내가 똑똑하고 내가 잘났어. 자신이 최고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어떤 분 댓글을 보니 성경을 잘 아시고 잘 푸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엔 반만 맞은 것 같은데, 그렇게 해놓고도 자기만큼 성경을 잘 아는 사람이 없으니 깨달으라고 훈계를 합니다. 이런 사람한테 제가 댓글을 달았습니다. 또 이런 글을 올리시면 강퇴시키겠습니다.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태도가 문제입니다. 구원은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높으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사람 앞에서 높아지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자세가 낮아져 있느냐 높아져 있느냐는 구원과 관계가 있습니다. 단순합니다.
오늘날 가장 태도가 불경한 게 목사들입니다. 제가 대놓고 말합니다. 저 평생 성도로 살았습니다. 저를 목사로 생각 좀 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직도 마음은 콩밭에 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아내가 어떤 목사님 보고 정말 좋은 목사님이라며 그 교회 성도로 가자고도 합니다. 솔직히 목사직이 부담스럽습니다. 중요한 건 구원은 태도에 달린 겁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이 감사하다’고 하십니다. 어린아이 같이 자기를 낮춘 자를 만나주시고 말씀하시고 응답하실 것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하나님은 예수님만 아십니다. 아들과 ‘또’라고 하십니다.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곧, 성도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가르쳐 지키게 하여 구원받게 하는 것, 이게 계시를 받는 자가 하는 일입니다. ‘받은’이 아니라 ‘받는’입니다. 계속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계속 성도가 구원받을 수 있도록 고쳐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 외에는 아버지를 모른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매일 만난다고 말하는 분들, 진짜 아버지를 만난 것일까요? 이들 중에 자기를 높인다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우리 인생은 모두 먹고 살기 위해서 수고해야 합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다. 어떤 짐입니까? 죄 짐입니다. 여러분 돈 많으면 마음 편합니까? 아무것도 없을 때는 옷 한 벌 있으면 좋은데, 옷이 생기면 갑자기 더 비싼 옷이 보입니다. 10만 원짜리가 100만원, 천 만원 짜리가 보입니다. 천 만원짜리 옷을 입으면 갑자기 1억짜리 보석이 보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계적인 거부가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만족이 안되고 평안이 없습니다. 이 땅에서는 아무리 높아져도 평안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평안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떨 때 평안을 얻습니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예수님은 스스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밝히십니다. 겸손은 히브리어로 [아나브], 심령이 가난하다는 뜻입니다. 헬라어로는 완전히 없는자, 거지 같은의 의미인데,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낮은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사람 앞에 낮은 자라 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너희도 이와 같이 성도를 섬겨라. 나는 섬기는 자로 왔노라. 예수님 스스로 나는 하나님 앞에 낮아진 자요. 사람 앞에 낮아진 자다. 너희는 나의 낮아짐을 배워라 하시는 것입니다. 겸손은 낮아짐입니다.
온유는 대답하다의 의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나는 내가 한 말이 하나도 없고 아버지께서 내게 하신 말씀만 전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다른 이름이 하나님의 말씀이신 것입니다. 그것이 온유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하나님 말씀 따라 순종하여 살아가며 낮은 자로 섬기는 자로 살아가는 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모든 성도와 목회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 자세여야 합니다. 그렇게 배우라 하십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가르쳐주는 곳입니다. 멍에를 메라고 하십니다. 멍에는 히브리어로 [체메드]입니다. 한국에서는 소 한마리로 멍에를 메고 땅을 일구게 하는데 이스라엘 땅은 척박해서 최소 두 마리, 네 마리까지도 멍에를 같이 멥니다. 엘리사가 땅을 갈 때 소 네 마리를 가지고 갈았습니다.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멍에의 나무는 언약입니다. 너희는 하나의 언약 아래 하나되어 예수님이 이끄시는 대로 따라오라는 뜻입니다. 모두 다 함께 예수님 이끄시는 대로 따라오라. 목사는 그렇게 예수님의 언약을 성도에게 가르쳐주며 따라올 수 있게 인도하라는 뜻입니다. 목사는 예수님 대신입니다.
‘내게 배우라’ 예수님의 성품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너희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자가 될 것이니, 곧 너희 마음이 심령이 가난하여지고 온유한 자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성도의 마음이 처음에 심령이 가난해져 천국 가게 해드려야 되고, 다음에는 온유한 자로 성품이 바꿔지게 도와야 합니다. 길들여진 야생마가 되도록 도와야합니다. 그리하면 너희 마음에 쉼을 얻는다고 하십니다. 너희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리라.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언약의 멍에입니다. 짐은 무엇입니까? 짐이 가벼우면 좋겠는데 제가 보기에는 안 가볍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이 짐을 가볍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 짐이 뭔가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부터 28절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
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죄 짐 대신 십자가의 짐을 지라고 하십니다. 온유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 곧 말씀 아래 자기 생각을 두는 것입니다. 내 생각대로가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우리가 져야 할 짐은 십자가의 짐입니다. 이 십자가의 짐을 왜 말씀하셨을까? 생명을 다해 사랑한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의인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말은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고 죽으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살던 시대에 그가 했던 말은 현재 우리에게 적용해 면죄부를 팔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면 감옥에 갇히고, 직장에서 쫓겨나고, 생명을 내놓는 시대에 하신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일로 죽을 일이 없습니다. 우리 시대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 계십시오. 말씀 아래 순종하여 따라갑시다. 어떤 자가 구원받습니까? 낮은 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말씀 따라 순종하여 내 생각을 내려놓고 말씀 따라 살아가는 자,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때 함께 내려와서 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줄 믿습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은 말씀 아래에서 우리 자신을 내려놓겠습니다. 먼저 낮아지는 자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말씀 따라 내 생각을 내려놓고 따라가겠습니다. 주님이 주신 멍에를 메고 주님의 짐을 지겠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환란이 와도 핍박이 와도 예수님을 시인하겠습니다. 주님! 우리 성도 한 명 한 명을 지켜 인도하여 주옵소서.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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