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 왁사골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집은 반쪽이 헐려졌다. 새 포장도로가 생기면서 집의 절반이 길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점촌에서 십리정도 떨어진 상주군 함창면 대조리로 이사를 갔다. 그 마을은 전체가 삼 십 호 정도 되는 아담하고 작은 마을이었다. 내가 고향처럼 그리워하는 마을이기도 하다. 아버지와 내가 함께 다니며 집을 지은 탓도 있겠지만 밭을 몇 개씩 만들었을 정도로 넓은 마당과 벽돌담 대신에 뒤안엔 언덕이 있었고, 옆으로는 길게 대나무가 우거져 담장을 대신했기에 대문도 없는 집이었다. 문을 열고 마루에 누우면 하늘이 가득히 내게로 내려오고,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겨울에는 따스한 햇살이 아낌없이 내렸다.
함창면 대조리라는 지명을 두고 사람들은 모두 ‘왁사골’이라고 했다. 발음을 세게 하면 ‘악사골’이 되었다. 처음엔 ‘악사골’이라는 이상한 이름도 다 있네 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마을에 야산과 철길 그리고 냇가에 갈대와 ‘억새’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싶었다. 내 생에 가장 행복했던 유년, 그리움으로 늘 추억하던 곳, 마치 고향처럼 느껴지는 마을이 바로 이 ‘왁사골’이다. 이사를 가는 날부터 온 동네 사람들이 나를 이윽히 바라봤다. 이제까지 못 받은 사랑을 이곳에서 다 받은 느낌이 들 정도로 이웃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 참으로 행복했던 곳이다. 이사를 가던 그해에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셨다고 마을 아줌마와 언니들이 울던 것이 생각난다.
그 마을에 흑백 TV가 두 대 있었다. 한 대는 이장 집에 있었고, 한 대는 과수원 집에 있었는데 엄마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해가 지면 일제히 두 집으로 나뉘어 ‘여로’라는 드라마에 넋을 놓았다. 우물가나 빨래터에 엄마들이 만나서 하는 이야기의 소재도 드라마였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산이나 들로 나가 놀았다. 언덕 같은 야산인 앞산엔 큰 나무그늘이 좋아 햇볕이 뜨거우면 그 아래에서 놀았다. 그럴 때면 우리는 노래를 부르고 숨바꼭질도 했다. 깊지 않은 개울에서 물놀이를 하며 놀기도 좋았다. 가을이면 알밤과 꿀밤을 줍고, 터지지 않은 홍시를 찾기도 했다. 겨울에는 꿩도 주우러 다녔다. 물론 한 마리도 주운 적은 없지만 아이들과 다니는 그 재미에 빠져서 추운 줄도 몰랐다. 봄에는 밀 서리며, 찔레를 꺾어 먹으며 놀았다. 알맞게 익은 부드러운 생밀을 비벼 까서는 껌을 만든다며 씹어 먹기도 했다. 가을에 콩서리도 여기서 처음 맛봤다. 밀 서리나 콩 서리 모두 마을 오빠들이 했는데 새까만 손으로 한 줌씩 쥐어주는 밀과 콩은 불맛이 더해져 고소하고 맛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이사를 갔는데 친구들도 있었지만 언니 오빠들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마을 사람들은 거의 다 농사를 지었다. 따라서 학교에서 돌아오면 크든 작든 들일을 조금씩은 도와야 했다. 그래서 햇볕에 그을려 건강해 보이는 마을 아이들과 달리 희고 약한 나를 다들 공주처럼 대했다. 어느 집, 어디를 가도 먹을 것이 나왔고, 웃음과 관심이 있었다. 내가 특별히 예쁜 것은 아니었는데도 마을의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나를 예뻐한 것은 내가 시골 아이답지 않아서였다. 말도 애교스럽고 웃을 때마다 보조개가 예쁘다고 했다. 목소리가 예쁘다고 심심하면 노래를 시켰는데 노래를 곧잘 불러 꼬마가수라는 별명도 얻었다.
인사도 잘하고, 잘 웃고, 이야기를 잘 한다며 온 마을 사람들이 다 예쁘다고 하는데 부모님만 예전 그대로였다. 우리 집은 언덕에 있었다. 뒤안 더 높은 언덕이었고, 언덕 위에 할머니와 아제(모자)가 사는 집이 있었다. 아버지는 집을 지을 때 사람을 사 우물을 팠다. 요즘처럼 기계가 없던 시절이라 삽으로 구덩이를 파듯이 우물을 팠다. 며칠을 팠지만 밑에 청석이 있어 파낸 흙으로 구덩이를 도로 메웠다. 우물이 없으니 물을 길러야 했다. 마을 중앙에 공동우물이 있었다. 우리 집에서 백여 미터 떨어진 이 우물에서 물동이로 물을 길러 와야 했다. 빨래는 냇가에서 채소 등 물이 많이 필요한 것은 우물가에 가서 씻었다.
엄마가 물을 길어오면 일곱 번이지만 나는 물을 반동이 밖에 이지를 못해서 열세네 번은 오가야했다. 물동이로 물을 이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지만 논에서 논골벵이를 잡기도 했다. 냇가에서 빨래를 해 와서 발에 피를 보고 깜짝 놀란 적도 있다. 이 마을에 살 때는 거머리가 참 많았다. 거머리가 피를 어찌나 빨아먹었는지 원래 요지만한 거머리가 밤톨만하게 굵어져 놀라 비명을 지르며 운 것도 이 마을에서의 경험이다. 어리지만 엄마는 내 옷은 내가 빨게 했다. 봄부터 가을까지 마을 사람들은 농사일로 바빴다. 마당의 텃밭이 있지만 농사라고 할 것도 못되었다. 아버지는 밭으로 만든 마당에 온갖 채소를 다 심었다. 감자, 마늘, 상추, 쑥갓, 오이, 가지, 옥수수, 생강, 당근, 시금치, 배추, 무까지 철마다 다른 채소를 심어서 우리 가족이 다 먹고도 남아 엄마는 점촌 친척, 친구에게 나눠줬다. 농사철이면 엄마는 집에 있는 것을 싫어했다. 이웃집에 일손이 필요해도 엄마는 농사일도 못했다. 그래서 친구들과 놀기 위해 십 리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 엄마에게 가장 큰 불만이었다.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시니 걱정이 없었지만 평발인 엄마는 걷는 것을 너무나 힘들어했다. 그 마을에는 점촌을 오가는 버스도 없었다. 엄마는 틈만 있으면 다시 점촌으로 이사를 가자고 아버지를 졸랐다.
아버지는 집에 애정이 있어 엄마를 달랬다. 나는 정말이지 그 마을을 아버지보다 더 좋아했다. 마을 사람 모두가 기분 좋은 말만 했기에 그 마을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마을의 곳곳이 나에게는 즐거운 놀이터였고, 보이는 모든 것이 친구였다.
이사는 갔지만 전학은 하지 않아서 나만 점촌초등학교를 다니고 마을 아이들은 모두 함창초등학교에 다녔다. 학교가 다르다 보니 등하교 길 동무가 없어 늘 혼자였다. 동무가 없으니 십 리 길의 풍경과 친해졌다. 봄이면 언덕 같은 뒷산을 내려가노라면 제비꽃이랑 철죽, 싸리꽃, 할미꽃이랑 양지꽃 등이 피어서 나에게 힘내라고 응원을 했다. 마을 야산 아래로 기찻길이 있다. 학교로 오가는 길에 지나는 기차가 있으면 걸음을 멈추고 손을 흔들었다. 기차에 탄 사람들도 웃으며 손을 흔들어 화답한다. 잠깐이지만 그 순간 나도 그 기차를 타고 멀리 떠나는 상상을 했다. 요즘처럼 자동차가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누구나 기차를 타고 떠나는 여행을 꿈꿨다. 그 마음을 실어 기차가 지날 때마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손을 흔들었다. 왼팔을 얌전히 접어 책보를 안고, 오른손을 가볍게 들어 손을 흔들면 차창으로 밖을 보던 사람들의 얼굴이 환해져 손을 마주 흔드는 그 찰나의 만남은 깃털처럼 마음을 가볍게 했다.
집에서 나서면 언덕을 올라 뒷산 능선을 넘어 내려가면 철길이 나온다. 철길을 따라 걸으면 조금 더 멀기에 철길을 건너 개울을 건너 들길을 한참 걸어가면 신작로가 나온다. 먼지를 일으키며 버스가 다니는 신작로로 2킬로미터쯤 가면 학교다. 비가 오면 더 먼 철길을 따라 신작로와 만나는 지점까지 걸어야 한다. 비가 좀 많이 오면 냇물이 불어 황톳물이 거센 소리를 내며 흐르기 때문에 어른도 건너지 못한다. 기차가 지나는 튼튼한 철길이지만 냇물 위를 지날 때면 다리가 후들거렸다. 가끔은 엄마랑 같이 가거나 돌아올 때도 있는데 그럴 때는 기분이 좋았다. 내가 공부를 하는 동안 친구들과 맘껏 논 엄마가 기분이 좋아진 데가 내가 있어 심심하지 않으니 엄마가 곧잘 웃기도 했다.
학교 갔다 오는 길에는 논에 물을 대기 위한 긴 도랑(수로)이 들 한 가운데로 흐른다. 물이 깊지 않은 탓에 비만 오면 족대를 들고 미꾸라지랑 붕어를 잡으러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버지는 봇도랑에서 잡은 고기는 해금내가 난다고 잡지 않지만 고기 잡는 구경은 여간 재미있는 게 아니다. 다 큰 어른들이 물풀 속을 절벅 들쑤시고 들어 올린 족대에 미꾸라지 붕어가 꼼지락 파닥거리면 금새 환호성을 지르는 모습에 나도 덩달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을 한다. 한참을 그렇게 구경을 하다보면 엄마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내가 늦다 싶으면 엄마는 뒷산 마루에 서서 내가 오는지 들판을 살폈다. 그렇게 놀다 집에 늦게 오면 엄마는 회초리를 들었지만 나는 기꺼이 맞았다. 엄마는 날이 갈수록 그 마을을 못견뎌하는 것과는 반대로 나는 갈수록 신나는 일로 마을을 더욱 떠나기 싫어하게 되었다.
이웃해 있는 건너 마을에서 점촌 철공소에 다니는 아제가 한 사람 있었다. 나는 동네의 젊은 남자는 다 아제라고 불렀다. 그 아제는 거의 날마다 학교 정문 앞까지 자전거 뒤에 나를 태워서 데려다 주었다. 나는 아침마다 그 아제를 만나는 것이 즐거워졌다. 자전거 뒤에 타면 엉덩이가 조금 아프긴 했지만 편하게 빨리 학교에 갈 수 있어서 신났다. 그 때는 자전거는 요즘의 자가용과 같았다. 잘 생긴 아제가 나를 자전거에 태워서 학교 앞에 내려주면 아이들이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기에 저절로 우쭐해졌다. 어쩌다 아제가 일찍 출근해 걸어서 학교에 가는 날은 등교 길이 더 멀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