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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생 이상 되시는 분들은 모두 아실만한 우리나라 최초의 배낭 여행가 故 김찬삼 교수님의 야그 임다
어느 날 故 김찬삼 교수님의 유족 들로 부터 故人이 돌아가시고 몇주기 추모 행사와 여행 박물관(영종도) 개관식 날에
출간할 책에 故人에 마지막 여행기를 부탁을 받고 .. 자료나 기록도 없어 며칠동안 곰곰히 생각 하며 지나온 세월에
기억들을 하나,~ 둘, 씩 짜집기를 하여 생각 날때 마다 그것들 을 틈틈히 그때 ~그때 메모를 하고 추려서 ...
아래와 같이 정리를 해보았습니다
ㅡ 늙탱이 소리듣는 老탱이가 지난날에 따까리 노릇할때의 옛날 야그 임다 ㅡ
그래도 따까리 하던 그 젊은 시절이 더욱 그립습니다
우리 < 1950 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 들 >가 어렸을때는 먹고 사는것 자체 부터가 힘들어서 지금과 같은 자유여행이란
꿈도 꿀수 없었고...또한 그 시절에 해외로 나가는 여행이란 막연한 동경이 였으며.......... 일종에 사치스러운 망상 이였다.
내가 어린시절 중2 때 여름방학에 모처럼 서울에 사시는 작은아버님(탈렌트 박용식 父) 댁에 다니러 갔을때 나의 사촌 동생
(박용식)의 책 꽂이 에서 故 "김찬삼"교수님의 여행기를 난생 처음 접학고 읽어보게 되였으며 그 날 그 책을 처음부터 밤을
새워 읽고 나서 부터는 "김찬삼" 그 이름 석자는 나의 뇌리에서 떠 나지 아니 했으며 .그러한 나날 이후 세계여행이란 꿈을
이루려고 가슴속에 간직 하여 살아왔던 나에게 그 분(김찬삼)은 하나의 신앙과도 같은 선망의 대상 이였다.
그 때 그 책속에 남아있는 내용들은...50 여년이 흐른 지금에도 생생하게 떠오르는데 ~
교수님 께서는 어려서 매일 어느곳 이든지 마음대로 기차를 타고 떠나는 열차에 차장을 부러워 하며.....
그리고 조금 더 성장 하여서는 쌍고동을 울리며 끝없이 항구를 찿아 떠나는 마도로스를 동경 하게 되셨다고....
그래서 미국에 유학을 가셨다가 유학을 끝내시고 자동차로 아메리카 대륙을 횡단 하며...김치를 깡통에 담아서 드시며..
아메리카 대륙을 자동차로 횡단을 하시며 교수님의 위장은 아코디온 식으로 있을때 먹고 없을때는
굶어도 된다는 위장이 자동화 되였다는 둥...
그러한 내용들에 고무 받아 그때 감수성이 한참 예민한 나의 어린 소년 시절에는 꿈도 야무져 있었는데.....그러던 어느날
나의 친 형님은 야 ~ 임마 ! 그 분은 아버님이 우리나라에 유명하신 대법관 이시고 집안도 좋은데 우리 집 형편에 그런 꿈
은 바라지도 말고 공부나 제발 잘 해라 ...응 공부를 잘하면 나중에 모든 꿈은 이루워 진다고...그러한 잔 소리를 한 두번도
아니고 여러 차례 들어가며 공부는 안 하고 학교 갔다 돌아와서는 책 가방 집어 던져 놓고 싸 돌아다니는 내게 매번 야단과
따뜻하고 진심 어린 충언을 매번 해 주었으나..그러나 모든 세상 만사는 한번 마음 먹은 어린시절 동심에 싻터온 세계일주
여행은 어린 내가슴에 새록~새록~ 새로운 소망으로 싻트고 있었음은 부인할수없는 엄연한 사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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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여행가 故 金 燦 三 교수님 !
님은 우리나라 근세 여행史에 최초로 배낭을 메고 온 세계를 누벼 그 당시에 대한민국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어
배낭 여행의 선구자 역활을 하시면서 배낭족 들에 元祖가 되였으며. 또한 배낭족의 代父이 였슴은 자,타,가 공인하는 ~ 바
화려한 은막과 무대에서 이름을 날리던 수 많은 스타들도 어느 날 소리도 없이 하나,둘,씩 世人들의 뇌리속 에서 말없이
조용히 사라져 가며 야금 야금 잊혀져 가듯이....우리곁에도 그렇게 여행의 빛바랜 역사의 먼지를 뒤집어 쓰시고 어느 날
우리에게 아무런 말씀도 남기지 못하시고 떠나가신 님(故 김찬삼 교수님)도 이제 여행史에서 조용히 흔적과,소리도 없이
잊혀져가는 서글픔과 함께 그렇게 안타깝게 사라져 가는듯 해보여서....
영원한 客家人 나 만주박씨는 그 분께서 生前에 남기신 말씀 중에 ~ ~ 처음 목적지를 정하고 마음 먹고 떠날 때에는....
시집을 와서 처음으로 친정 나들이 가는 새댁의 설레임과 같도다 .하시던 님의 숨결과 체취의 흔적을 어디엔가 남기고자
故김찬삼 교수님과 "" 마지막 룸-메이트""로 교수님의 마지막 여행을 생사고락을 같이 하며 .. 실크로드,파미르 지역 등
으로 ~ ~ 오지여행을 넘 ~ 나들때의 마지막 여행중에 유언 비슷하게 흘려 놓으신 일화들을 이제는 너무 오랜 시간이
경과하였고 나이도 들어 가물 가물한 저 깊숙한 기억속에서 끄집어 내여 기억의 파편 쪼가리들을 하나 ~ 둘씩 떠오르는
순서 내지는 생각 나는 대로 맟춰 가며 기록으로 남기고자 다음과 같이 주절 주절 ~ 늘어 놓으려 합니다.
님 께서 하신 말씀 중에는
여보게들 ..자네들을 ~ 따라 다니다..내가 이 한몸 가누지 못하고 아무곳에나 쓰러지면...그.곳이 내가 바라던 영원히
쉴곳 이니...그리 알고..그 山 자락 어느 기슭에 돌 무더기를 모아서 ..아니면 ..다행히...나무 木관이라도 구 할수있으면
절대로 흙으로 덮지 말고 그 山 자락 기슭에 돌 무덤이나 아니면 그 나무 관을 비스듬히 세워주시게...그래야만 당신은
죽어서라도 돌 틈과 나무 틈 사이로 오가는 여행객들을 바라 보며 지켜 보셔야 겠다고 매번 몇차례 부탁을 하셨다
님께서 한참 젊은 시절에는 東西冷戰의 시대로,鐵의 장막,과 竹의 장막,속에 가리운 공산권 안에 실크로드와 파미르 고원이
있어서 가고파도 갈수가 없어 죽기 전에 그 곳을 꼭 한번 가보시려는 일념은 어찌할수가 없어.....마지막 소망을 이루시려는
마지막 욕망과 의욕 을 어찌 할꺼나 주체를 못하시고..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바라셨다.
아무튼 그러한 나날들이 흐르던 어느 날 역마살 바이러스에 감염되여 치유 불능에 병적인 D.N.A.가 실핏줄에 까지 파고 들어
흐르는~ 여행 이라면 똥,오줌을 못가려서 주체를 못하는 코드가 맟아 떨어지는 병적인 여행의 매니아 변태들이 매월 모임을
갖는 ""서울 여행가 회""김 교수님은 고문)의 매월 모임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 하시며 애절한 눈빛과 무언의 침묵 시위와 S.O.S. 로 그곳을 가자고 싸인을 보내시는데 우리는 더 이상 외면을 할수도 없었고 ..월례회를 끝내시고 매번 집으로 힘없이
돌아가시던~그 모습이 너무나도 애처로워 보이기도 했다 ...젊으셨으면 단독 강행을 하셧으련만은 당신께서 죽기전 마지막
여행을 해야 된다고 보채시고, 그 채근 하시는..성화에 못이겨...우리는 그 동안 미루워오던 서울 여행가회 창립 10 주년 기념
행사를 ""히말라야 풍물기행""으로 < K.B.S. 세상은 넓다 에 5 회 방영 > 타이틀을 내걸고 長考에 들어가는 동시에 모두들 이심
전심으로 통하여 진지하고 엄숙하게 회의를 진행하면서 ''히말라야 풍물 기행''에 따라 나서려는 참가 희망자들을 소집 하였던바.....
가자 ~ 해를 따라 西쪽으로...
그 회의 에서 나 "만주박씨"는 다음 과 같이 이렇게 말을 꺼냈다
지나간 그 시절에는 우리가 이분 으로 인하여 여행을 알고...이분이 걸어오신 길이 ...우리 모두 하나같이 공통된 꿈과 희망
이였는데 그때와 지금의 상황에서 바라볼때 지금에 현실은 이제 우리가 이분을 따라 가는것이 아니고 모시고 가게 됐다는
아이러니 하게 만든 그 세월이 야속하지만 ~ ~ ~그러나 이분 께서 가시고자 하는 의지와 욕망은 그 누구보다 더 하시리라
믿어 의심 할 여지는 없으니 누구 한사람을 정하여 밀착 보필 해야 한다고 ~ 하였다.
["고령에 나이"] 와 ["약간의 치매 끼"] 와 ["거동이 불편 하시며"] 또한 [" 언어의 장애"] ~그 당시 후두암 수술로 말을
못함~ 등,등,을 어찌 하느냐가 최대의 관건이며 문제점 이였다. ~ 여행 도중에 예기ㅎ지 못하여 불행한 사태가 발생한다면
우리는 미리 우산을 준비 해야 된다는 만반의 우려 속의 대비 책으로...김교수님 의 모든 일거수 일투족을 보필하고 책임을
질수 있는 자원 봉사자 내지는 지원자 물색에 들어 갔으나 아무도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어..대책이 없는 회의 시간은 길어지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만주"마지막'' 청년이며 "언필칭 자칭 "만주박씨 종친회" 회장이 모든 총대를 메기로 하고 D-day 를
1999 년 6월 2일 로 대못으로 쾅,쾅, 쾅,박아놓고 .....우리는 그렇게 大長征 출발의 카운트 다운에 들어갔다
그렇게 우리의 여행이 시작 되여 매일 저녁 우리가 투숙 한 호텔 후론트에서 나 만주박씨는 매번 특별히 탁상용 전기스탠드
등 을 따로 부탁하여 교수님 방에 갖여다 드리면 밤 늦도록 지도를 펴 놓으시고 하루 일과에 대한 기록과 하루종일 찍으신
사진필림 정리에 열중하시는 모습은 마지막 생애의 한가닥의 촛 불을 태워가며 혼신을 다하며 최후까지 오늘 님이 다녀오신
그 흔적을 남기시려는 의지에 처절 한 몸부림의 투혼을 보는듯 했다.
교수님과 정확한 의사 소통이 될수만 있다면 한 房을 같이 쓰는 이러한 인연으로 밤을 새워가며 많은 질문과 새로운 지식을
얻을수도 있으련만 하는 아쉬움 속에서 나 만주박씨는 매일 매일 색 다른 감명을 받으며 그날 일정이 끝나고 매일 저녁마다
오늘의 하루여행이 무리없이 끝났음과 동시에 아직 교수님 건강이 양호하신것과 그 무탈 무사함에 감사 기도를 드리며 내일에
여행 준비에 만반에 준비를 게을리 하지아니했다.
물길은 山을 넘지못하고 山을 돌아흐르는 물은 막을수 없는것이 자연의 섭리 일진대 그러한
우리의 여행의 脈은 이어지고 老 선구자의 지난날 옹고집으로 똘똘 뭉쳐진 아집과 의연한 가운데
초연한 풍모를 보여 주셨지만 세월 앞에 年輪은 속일수 없었다.
지금 교수님의 발가락은 주판 알 역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루의 일과가 끝나면 찍은 필름과 안 찍은 필름을 세어봅니다. 수량이 많으니 발가락으로 주판알로 계산 합니다.옆에서 기침소리도 못내게 합니다. 헷갈린다고... 그리고는 다시 섞어 버립니다. 왠지는 모르겠습니다. 요것이 하루의 여행을 끝낸 초 저녘 일과 임다
하루에 찍으신 필림의 수량 입니다
필림을 가로, 세로, 줄을 앞으로 옆으로 나란히....
저 렇게 꼼꼼한 여행가 를 누가 보셨나요
누구도 못 말리는 우리 막가파 교수 님 !
누가 이사람을 모르시나요 |
만주박씨와 故 金燦三 교수 님의 매일 반복 되는 대화는 [ 교수님의 대답은 없고 고개를 끄덕 이시는 것으로 응답]
교수님 ! 내일 아침 6시 기상 입니다....그만 전등 끄시고 일찍 주무 세요...
더운 물이 잘 나오니...먼저 빨리 샤워 하세요....식사 시간 XX 분전 입니다....
출발 시간 XX 분 전 입니다.... 차에 오르세요, 내리세요,
그리로 가지 마세요....자 이제 도착 했으니 下車 하세요....
마지막 룸-메이트의 철저한 감시와 성화에 제 아무리 "막가파 교수님"도 한 마리 순한 洋이 되셔서 잘 따라 다니셨다
年式이 오래 되면 어린얘가 된다는 옛말을 곱 씹어보며
마치 學界에서 은퇴하신 老교수를 보필하고 무슨 어느 국제 쎄미나에 초청 받아 가는것 같은 착각 속에 괜스리 어깨에 힘을 주고
설쳐 대던 나를 지금 에 내가 돌이켜 다시금 회고 해보면 나도 모르게 쓴 웃음이 나오며.우습지도 아니 했다는 결론에 씁쓸하고
잔잔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러한 나날 들이 이어지는 여행도중.... 어느 날의 아침 식사 시간에 만들어 낸 해프 닝 가운데 하나
[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도...만들어 냈었다.]
교수님 께서 아침 식사시간에 식당에 내려오시기 전 까지 우리는 몸에 배인 윗 사람의 공경의 표시인 식사 매너(미덕)를
빙자 하여 만주 박씨는 교수 님을 모시고 같이 식당에 들어서는 순간 동시에 모두들 일어나 ..교수님 간 밤에 잘 주무셨냐는
인사말이 끝남과 동시에 교수 님이 말을 못하시는 것을 빌미로 ..【 그래 자네들 도 간 밤에 무사 한가 】.
한마디 멘트를 직접 날리는 만주 박씨...기라성 같은 선배들과 서진근 회장 님, 동료들 ...꿀 먹은 벙어리 냉 가슴...
[ 교수님이 말씀을 못 햐셔서 대신 대변 해 드린것 인디 ...어쩔 것이여 ]
때로는 만주박씨 혼자의 개인적인 숨겨진 의도와 뜻을 교수님에 생각과 지시 라고 우겨 대며 여행 일정,식사 일정,등을
마응대로 좌지,우지,하고 이리,저리, 만주박씨에 의중대로 잔 머리 를 굴려 진행하여 나가는데 ...만주박씨 잔머리 의 극치가
통하고.....만주박씨 생각 대로 진행을 시도할때 느끼던 쾌감은 지금도 그 흐믓함이 아직도 ~내 마음속에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어... 그때의 동료들 에게 두고 두고 미안한 감정이 아직도 조금은 남아 있다
< 요건 귀신도 모르고 하늘도 모르고 아무도 몰랐을 것이여 >
파미르 고원 입구 "타스쿠르칸"을 한참 지나고 "홍치라포"를 지나 ~ 중국 국경을 벗어나게되면 하얀 눈으로 덮힌 파키스탄
국경에 도달 하면 그 다음 "쿤 자랍" 고개를 넘어서 K 2 봉 근처를 경유 할때 일부 동료들은 코피를 흘리고 다른 동료들은
산소 부족으로 오는 고통을 호소 하며 산소 호홉기에 의지하여 고산적응에 애를 먹고 있을 때 그래도 선천적으로 强骨이신
교수님 께서는 한편의 장엄한 대자연의 서사시를 음미 하고 계시는듯 의연 스럽게 고통을 감내 하시며 지긋이 두눈을 감고
계시는 모습을 옆눈으로 흘깃 ~ 힐긋 훔쳐 바라보기만 하던 만주박씨 는 아무런 도움을 드리지 못하고 두손에 팔짱을 끼고
~수수방관하며 바라만 보고 있을수 밖에 없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blog.yahoo.co.kr%2Fybi%2F1%2Fa6%2F86%2Fyoung9987%2Ffolder%2F3%2Fimg_3_284_7%3F1232001019.jpg)
힘들게 기어 올라오는 뒤에 차량이 보이는데
이곳에서 구르면 어케 될런지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른다
大長征의 중간, 중간, 짧은 휴식 시간에 車를 세우면 만주박씨를 우습게 보시고 노익장을 과시하시듯
제일 먼저 下車를 하셔서 지표,지형,지질,들을 조사하느라 잠시도 쉬지않고 분주히 설치고 돌아 다니시는데...
아무도 못 말리는 막가파 교수님은 브레이크가 고장이 난 벤츠 처럼 질주를 하고 over 를 하시는데....행여 잘못
되시기라도 할까봐 노심초사 하며 만주박씨는 사냥개의 후각,청각,시각,을 총동원 하여 마치 먹이감에 이리 저리
끌려 다니는 사냥개 처럼 속수무책으로 따라 다녀야만 했다.
또 한번은 이렇한일도 발생 했었다.
어느날 무수한 인파 속의 카슈카르 재래시장 근처에서 만주박씨가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 막가파 교수님 이 튀여 버렸다 ,
좌,우,전,후,로 휘둘러 돌아 봐도 보이시지 않고....당황 김에 어느 장사 하는집 지붕으로 뛰여 올라가 내려다보니 무엇에
홀리신 걸음 거리로 질주하고 계시는 모습 (즐겨 입으시는 옷 색갈)을 발견 하고 지붕에서 뛰여내려 뒤 쫓아가니 카메라를
들고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시며 요리 조리 카메라 앵글을 잡고 계는데 얼마나 얄미웠는지 모른다.......
뫼시고 보무도 당당히 걸어 돌아오는 발길이 가벼운 가운데 ㅡㅡㅡ손오공이 튀여 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 이고
막가파 교수님이..튀여 봐야 이 만주박씨 손안에 있소이다 라고
속으로 중얼 거리며 룰~ 루 라~라 하며 흥얼거리며 돌아 왔다.
그럴듯한 소재를 못 찾아서 안절부절 하던차 저쪽에서 걸어오는 촌 노인을 발견하고 달려가신다. 상공에서 독수리가 지상의 먹이감을 겨냥해서 내려찍듯....신발을 찍는 교수 (김찬삼) 님의 미소! 카메라를 두개씩이나 메고 기뻐서, 신이나서 ~ 죽겠다는 표정 ! 이분 지금 천상에서 무얼하시고 계시는지? 세월이 갈수록 아쉬움을 더해 추억을 새롭게 하시는데...내속을 썩이고 저렇게 찍고 ~ 싶으 셨을까
만주박씨와 모든 의사 소통을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하여 O.K. 싸인과 검지를 이용하여 O,와 X , 字 표시로 의사 소통을
시도 하다 여의ㅎ지 못할때는 필담을 이용 하는데 맨 처음 첯날보다 시간이 갈수록 맟춤법과 글씨가 억망 ...이여서 줄곳
내심으로는 많은 걱정이 앞섰다
천신 만고 끝에 우리는 고산 적응 을 다 끝내고 파키스탄 국경 출입국 관리소 옆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휴식을취하며
담소를 나누는데 우리를 인솔하신 단장 (서진근 님) 께서 그 동안 만주 박씨가 총무까지 1 人 2 役을하며...교수님의
룸- 메이트 로 따까리(당번) 노릇 까지 하면서 고생을 많이 하였으니 ..룸 - 메이트 임무교대를 해줘야 된다고 발표를
하니 ~ 즉각 김 교수님께서 손가락으로 X (no) 표 하신다. 그리고는 잠시 자리를 비운 만주박씨가 보이지 아니 하니까 ..
메모지에 만주박씨의 이름을 쓰시고 고개를 가로 저으며 메모지를 흔드셨는데 ....지금도 天上에서 그 내 이름 석자를
기억하고 계실런지.........
그리하여 만주박씨는 여행을 끝 마칠때까지 교수 님의 안전을 책임을 지기로 족쇄를 다시 채우고
다음 날에 지구상 마지막 남은 長壽 마을 "훈자" 마을에서 가까운 ""이글 레스트""( 一名 : 독수리 둥지) 트랙 킹에 만주박씨를
포함하여 몇 사람은 미리 겁을 집어 먹고 일찌감치 기권 ...그곳 까지 따라나서는 막가파 김교수님을 그 누구도 말릴수 없어
만주박씨는 잔 머리를 굴려 동료들에게 부탁하고 숙소에서 쉬고 있었는데 동행을 하여 모시고 같이 다녀온 동료들 말에
의하면 정상 까지 완주를 하시고 오셨다 하는 말에 젊은 만주박씨는 염치없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지못했다
우리의 "막가파" "김 교수님" 께서 조금 만 더 젊으셨더라면 그 많은 양의 사진 필림 (추럭으로 몇 추럭 분) 이 필요 없는
디카를 사용 할수 있었고 그리고 현대 문명의 利器로 자리 잡은 컴과 인터넷을 배우셨더라면 .... 얼마나 좋았었을까
라는 아쉬움으로 달래 보면서 ~
아 ! 아 ! ~ 님은 갔습니다.우리 곁을 떠나 갔습니다.그러나 우리는 님을 보내지 아니 했습니다.
喪主들 보다 더 서러운 곡 쟁이 소리 처럼 이글을 올리면서
*교수님* 우리들은 前生에 바람 이였나 봅니다.
지금 우리 곁에 부는 바람이 하늘에 까지 불면 우리가 곁에 있슴으로 아시고 편히 쉬시고 계십시요.
우리가 하나,둘,씩 그곳으로 교수님을 찿아 뵈려고 갈때 까지 편히 쉬시면서 우리들을 기다려 주십시요
선생님 ! 天上의 세계를 주유 하시다 또 다시 지쳐 쓰러져 다시 잠 드시더라도
수미산 제1 봉에 낙낙 장송 되셨다가
백설이 만건곤 하여 독야청정 하실때
우리와 상면 할수 있도록 하늘에 흘러
다니는 한조각 구름에 天上의 소식과
生前에 못다한 사연들을 적어 이곳으로 바람이 불때 보내주시길 바라며........
지금은 故人이 되신 生前에 金燦三 교수님의
夕陽紅 열차 안에서 망중한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ro.org%2Ftt%2Fboard%2Fdb%2Fboard%2Findidiary%2Fupload%2F1_10000%2F49%2FScanned_Photo-11-4.jpg)
~ ~ 2003 년 7 월2 일 자택에서 투병중 ~
~ ~ 天上의 세계를 우리 보다 먼저 가보시겠다는 욕심으로 서둘러 그곳 으로 떠나셨다.
막가파 교수님 과 만주 박씨에 진솔한 아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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