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 성지중심’이란 글을 보고!
다물흙
민족통신 대표 노길남 기자님께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 평양에 ‘태권도성지 중심’ 이라고 쓴 태권도 역사를 보고 깜짝 놀아서 여기에 제 의견을 씁니다.
본인은 1956년 3월부터 도복을 입고 산 사람으로서
눈을 감을 때까지 도복을 입고 살 한 사범(스승)이기 때문입니다.
북조선 태권도는 언제 시작되었는가?
평양에 국제태권도연맹(ITF) 태권도 소개 첫 시범단원 16명이 서전국 (Sweden)의 수도 스톡홀름 (Stockholm)에 모두 모이는데 한 일주일 걸렸고 모스코바에서 또 몇일 있다가 평양 에 1980년9월15일 날에 입국했습니다. 그때가 군사 독재자 전두환이가 왕왕도 델 때지만 공고롭게도 본인의 생일날이라 잊지도 아니합니다. 그리고 평양체육관과 원산체육관에서 많은 관중들 앞에서 시범을 하고 금강산도 구경을 했지요.
또 1982년1월3일부터 6월30일까지 오직 일요일만을 제외하고 6개월간 월요일에서 토요일 까지 8시간씩 북조선 태권도 국제 사범 제2기생을 직접 평양 체육관에서 4단을 기준하고 가르친 사람입니다. 그때 배운 나의 제자들 중 2명이 현재 9단이며 8단들은 수두룩합니다. 즉 제가 태권도 역사의 산 증인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오늘 평양에 ‘태권도성지중심’이라는 건물에 여러 사진들이 걸려 있는데 그 여러 사진들 중 1965년부터 오늘까지 이 지구 각처에서 무릎 척추 다 닳토록 ITF 태권도 한국인 개척 사범님들의 사진들이 만약 걸여 있지 아니한다면 그 ‘태권도성지중심’은 ITF 태권도 성지라고 하기가 매우 어색하다 못해 부끄러울 것이며, 할 수도 없을 것이고 또 북조선을 태권도 종주국이라고 말 할 수는 더더욱이 없을 것입니다.
역사란 때로는 뒤로 혹은 또 때로는 비틀비틀하면서도 발전한다 하지만 태권도 역사 만큼은 확실히 써야하겠지요. 솔직히 썼다고 해서 민족의 자존심이 손상되는 것도 아니고 무도라고 하면서 더더욱 정직히 써야 존경심이 설 것이 아니겠습니까!
모두 다 아는 말이 되겠지만 지금 세상은 거짓말을 못합니다. 모든 역사의 자료들도 정확 하게 인터넷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국제태권도연맹(ITF) 창립자 최홍희가 정당화 시키는 많고 많은 속임수 거짓말들을 잠시 속일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속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홍희가 김일성주석과 또 김정일장군과 같이 찍은 사진들을 걸어놓았다고 해서 그의 많은 속임수 거짓말들이 바꿔질 수도 없고 또 지워질 수도 없고 또 없어질 수는 더더욱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큰 누가 앞으로 될 것이 아닌가!
어느 민족이나 생명들이 발생한 장소가 다르다고 하고 인간들이 살면서 짐승으로부터 혹은 도적떼로부터 생명과 곡식들을 빼앗기지 아니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손발과 칼과 창을 쓰는 무술들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각 민족 마닥 그들의 고유의 무술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에는 무술들이 약 6백여 가지가 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어떤 전통 태권도 교범이라는 책 발행일자가 1979년3월10일입니다. 저자는 최영의라는 사람입니다. 이는 극기 당수도(가라데)라는 것을 일본에서 창립한 사람입니다. 이 극기 가라데에서 행하는 형(型, ITF/틀, WTF/품세)과 아주 똑 같습니다. 또 당수도(唐手/空手도-Karate) 소또간(松武館)의 동작들과 아주 100% 똑 같습니다.
왜, 이 최영의라는 사람이 극기 가라데 창립자이면서 왜, 전통 태권도라는 책을 써서 출판 하여 여기 저기에 깔았는가하고 생각을 해보니 최홍희라는 사람이 가라테를 가지고 태권도 라고 하기 때문에 최영의라는 사람도 자기 가라데를 가지고 전통 태권도라고 한 것 같 습니다.
그 뜻은 태권도는 가라데와 똑 같다는 표현이겠지요.
무술의 기원을 확 주려 써보면 옛 인도에서 요가(Yoga)이라는 것이 기원전 3500년 전에 생겼고 권법이란 것이 중국의 남쪽 Nanning, Lluzhou, Henan (Zhengzhou) 지역에서 소림 사가 BC 470-527경에 쿵푸(工夫-Kungfu)가 생겼다고 합니다. 고구려에서는 수박이 생겼고, 택견이란 것도 생겼고 베트남에서는 보비남(Vovina)도 생겼습니다. 유럽에서는 18세기 말에 사바테(Savate)라는 것이 생겼고 약 1500년이된 브라질 에서는 카포에이라 (Capoeira)라는 것도 생겼습니다.
오늘에 태권도 두 단체인 ITF(4개)틀, WTF 품새 태권도는 완전히 100% 일본의 송무관 (소또깐) 것과 아주 똑 같습니다. 심지어는 급. 단 제도까지 똑 같습니다. 이것을 1972-1990년대까지 한국 에서 고구려 돌조각까지 보여 주면서 고구려 수박에서 택견에서 전수된 것이 태권도라고 하였는데 지금은 쑥 들어가고 없어졌습니다.
물론 최홍희 책에도 기록을 했습니다. 이젠 북조선 땅에서 고구려 돌조각까지 보여주며 태권도가 고구려 수박에서 뭐 택견에서 왔다고 요란히 선전들을 합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어거지로 왜, 짜집기를 하려고 그렇게 몸부림들을 치는지 알수가 없습니다. 미래를 위해서 아주 ’주체도’나 ’자주 도’를 만들면 더 훌륭할 것이 아닌가! 참으로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태권도성지중심’에는 마치 태권도의 뿌리는 택견에서 온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태권도는 일본의 당수도(가라데)와 똑 같지 택견과는 완전히 거리가 멉니다.
동작들인 찌르기, 막기, 차기도 근본이 다릅니다.
만약 같다고 우긴다면 그러면 한국에 ‘택견’협회는 매우 크게 분노할 것입니다.
- ’1970년대 초부터 택견은 송덕기에게 배우고 있던 신한승(1928-1987)에 의해 체계적인 정리가 이루어졌고 이같은 노력의 결과로서 1983년 6월 1일자로 중요 무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 되었다. 1984년 부산에서 이용복(현 대한택견협회 상임부회장)씨를 중심으로 택견의 중흥운동 이 일어 나 택견의 대중화 시대를 열었다. 1985년 사회단체 등록을 한 한국전통 택견 연구회가 주축이 되어 1990년 사단법인 대한택견협회를 발족, 이듬해 체육청소년부 로부터 법인인가를 얻었다.
현재 사단법인 대한택견협회 산하에는 한국전통택견연구회(부산에서 시작), 택견 계승회 (서울에서 시작)등의 2단체가 등록되어 있으며 이외에 충주에서 시작된 한국전통 택견회가 있다고 한다. 이 택견의 계보를 보면, 송덕기 선생에 의해 명맥을 유지해오 다가 신한승 선생으로 이어졌으 며, 택견계승회는 송덕기 선생으로부터 전통택견회는 신한승 선생으로부터 전통 택견연구회는 송덕기, 신한승 두분의 선생님으로 부터 택견의 전수를 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라고 합니다.
한국에 당수도(가라데)는 그럼 언제부터 시작을 했인가?
왜놈들의 식민지 시절에는 우리의 고유의 무술들인 수박과 택견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중 ’이원국’이라는 일본 중앙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고 서울 중앙청 왜놈 총독부에 아베 총독의 소개로 법관계자로 들어와 1944년9월에 서울 서대문구 옥천동에 청도관을 세우고 모두 소또깐 가라데를 시작했다 합니다. 이때 배운자들은 모두 왜놈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주기 위한 모두 친일파들이었다 합니다.
1946년 4월3일에 ’전상섭’이라는 분도 일본에서 당수도를 배운자로서 해방 후 돌아와 서울 중구 을지로에 당수도(지도관)를 시작한 군사 훈련 교관은 한국식으로 말하면 전쟁 시기 북녘으로 납치되였다고 합니다. 그뒤 ’전일섭’ 이라는 친동생이 뒤를 이여 ’전주’에서 계속하였다고 합니다.
1946년 ? ’황기’라는 분이 ’무덕관’을 창립하였는데 만주에서 ’수박도’라는 것을 배웠다고 합니다. 1946년 6월에 ’노병직’이라는 분도 일본에서 ’소또깐 가라데’를 배운후 해방이 된 후에 뒤돌아와 경기도 개성 관노정에서 ’송무관’을 창립하였다고 합니다.
1946년 9월에 ’윤병인’이라는 분이 서울 종로 YMCA에서 중국의 북방무술인 ’권법부, 창무관’이라는 것을 창립하여 수련 중 한국식으로 말하면 전쟁시기 북녘으로 납치되었다고 합니다.
위 사람들에게 배운 제2세대 당수도(가라테)인들인 지도자 격인 분들이 엄운규, 이종우, 현종명, 이교윤, 김인석, 배영기, 이병로, 오세준, 홍정표, 백준기, 박철회, 전진영, 홍종수, 김순배, 이영섭, 김봉식, 고재천 외 등등… 이분들은 모두 한국의 당수도 가라데에서 태권도 로 바꿔진 지도자급들이고 세계태권도연맹(WTF) 창립자들입니다.
1950년10월에 ’대한 공수도협회’가 창립되었다고 하며
1950년도에 ’정도관’, ’한무관’, ’오도관’, ’강덕원’이 생겼다고 합니다.
1959-1965년 9월3일 ’대한 태권도협회’가 생기며 ’최홍희’가 회장을 하고 그뒤 부터 ’공수도’, ’당수도’, ’태수도’ 협회하던 이름들이 서서히 살아지고 ’태권도’로 되였다고 합니다.
1965년에 첫 시범단이 왜놈 ’가라데’ 도복을 입고 해외로 나갔고
1966년 초봄에 ’주월 사령부’로 ’태권도 교관단원’들도 모두 가라데 도복들을 입고 출국을 했었습니다. 여기에 본인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972-1980년에 도복들과 팔쾌-태극 품새가 생기고 동작 용어들도 조금씩 바꿔졌지요.
1966년 3월에 ’국제태권도협회’가 생기면서 기발한 기회주의자 총재 최홍희는 ’김종필을 명예 총재’로 추대를 하였었습니다.
그럼 태권도는 도대체 언제 생겼는가?
1955년도에 최홍희 군단장은 전속부관을 시켜 국어사전을 주야로 찾아서 ‘태수도 (跆手道)’로 했다가 ‘태권도(跆拳道)’로 바꿔 고친 것이라고 하였고요. 같이 비슷하게 택견과 비슷한 글자를, 태자로 썼다고 해서 태권도가 택견에서 온 것 처럼 한 최홍희이라는 거짓말쟁이는 동경 중앙 대학교를 다닐 때 당수도(가라데) 소또깐을 조금 배운자입니다.
그리고 그가 만약 태권도 창시자라는 민족, 역사의식이 있어 자존심이 있었다면 어찌하여 1955년에 청도관에서 손덕성 관장 명의로 명예 4단 증을 받은 이유를 명쾌하게 해명 해야 하고 태권도 창시자라고 하는 그가 현대적 의미의 일본 당수도(가라데) 모체 각 관 중 대표 격인 청도관의 명예단증을 간절히 원해서 받았다는 주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서울신문, 1959년 6월 16일자 청도관 손덕성 관장 성명서 참조>
그리하여 태권도의 아버지는 수박과 택견이 아니고 일본의 소또깐(Karate) 입니다.
최홍희 경력
1918년11월09일 함북 명청군 하대리에서 탄생
1943년 – 일본 중앙대학 전문 법학과 중퇴(졸업했다고 했다.)-철저한 친일파
1946년 – 국방 경비대 입대-철저한 친미파
1953년 – 제주도 29사단장-아무나 가는 곳이 아니다. 철저히 미양키들의 신임없이는.
1955년 – 제 3군관사 사령관 – 얼마나 미군에게 잘보였으면
1960년 – 육군본부 정보 참모부장 – 이자리는 뼈속깊이까지 친미파가 아닌가!
1960년 – 전투병과 교육기지 사령관 - 얼마나 미군에게 잘보였으면
1960년 – 논산 제2훈련소장 -얼마나 미군에게 잘보였으면
1961년 – 제6군 단장 - 얼마나 미군에게 잘보였으면
1961년 – 5.16 군사 반란 적극 지원자 - 얼마나 박정희에게 잘 보였으면
1962년 – 예비역 편입
1962년 – 주 말레이시아 대사 – 얼마나 박정희에게 잘 보였으면
1965년 – 대한 태권도 협회장
1971년 – 국제 태권도 연맹 총재
2002년 – 위암으로 평양에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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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어떤 사물을 볼 때 그 본질을 뚫어지게 보아야 한다는 것은 변할 수가 없는 그것의 역사를 자주적인 청결한 양심으로 보았을 때라 할 것이다.
본인은 철없던 시절 아무것도 모르고 태권도가 오직 우리나라 것이라고 하여 거기에 미처서 1966년부터 1985년까지 약20년을 베트남 중부지역 다낭과 스웨덴, 노르웨이를 개척했고, 덴마크에 검정띠를 만들어주어 보급케했고 평양에서 6개월 살면서 국제사범 제2기생을 가르쳤다.
또 오지리 비엔나에 ITF 본부를 본인의 이름으로 창립했던 자며 37년째 우리의 소원인 민족평화통일을 위해서 자식 이름도 통일이라고 짓고 한점 부끄럼없이 산 것을 여기에 이실직고한다. 그리하여 매우 불의한 자 최홍희에게 당당히 말하고자 하는 것이란!
미군 하사관에까지 거수 경례를 할 정도로 아부의 충성을 다하여 침략자 미군이 달아준 별을 빠르게 달고 미군정 시절인 이승만, 조병옥, 서북청년단(북조선 기독교 청년단체)들에 의해서 약10만의 양민들이 도살, 살인을 무자비하게 당했던 제주도 1948년 4.3후 그곳에서 약5년이 흐른 1953년에 사단장을 했고, 그후 군단장 혹은 육군본부 정보, 보급 장교 출신으로 또 5.16 주체세력으로 솔직히 공산당 때려 잡자고 만들은 ITF 태권도었었다.
그래서 그는 철저한 친일, 친미 사대 매국, 역적이었다. 특히 ITF 태권도 기본동작들은 왜놈들의 당수도 소토깐의 기본 동작들과 한치의 차이도 없이 똑 같고 특히 철학은 공자, 순자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양민 5백만을 도살한 침략 대 살인 강도 미군 밑에서, 사대 매국 역적놈인 이승만 밑에서, 사대 역적놈인 박정희 밑에서 각종 계급을 받고 산것에 후회나 반성도 없고 부끄러움이나 창피한 것도 없고 자기의 경력을 자랑하는 자가 최홍희라는 자의 양심이다.
더욱이 급. 단 제도는 유도의 창시자 가노지고로씨의 조직을 아직도 사용하며 ‘틀’들의 명칭은 철저한 친일, 친미 사대 매국 역적이었던 동경 중앙대학교 사학과 출신인 이선근이라는 사학자의 식민사관으로 만들은 것이다. 그는 최홍희의 이 중앙대학교 선배다.
ITF 틀 – 천지, 단군, 도산, 원효, 율곡, 중근, 퇴계, 화랑, 충무, 관계, 포은, 계백, 의암, 충장, 고당(본인이 이 고당틀을 1982년6월 말에 제2기생 졸업 시범을 평양 체육관에서 할 때 고 김일 부주석과 허정숙 서기국장의 동석에서 우리가 ‘고당틀’로 시범하는 모습을 본 허정숙 여사께서 분노하며 질책를 최홍희에게 한 결과로 그후 ‘주체틀’로 바꿨다.), 삼일, 유신, 최영, 연개, 을지, 문무, 서산, 세종, 통일이다.
그럼 어찌하여 마지막 틀에 통일이라는 칭호를 붙였는가다.
ITF 24틀이 1960년대 말에 완성이 되였다고 볼 수있다. 그러면 이때의 최홍희의 정치, 역사 의식수준은 김종필을 명예총재로 모실 정도니까 아주 수구 보수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북녘땅에 있는 그리운 자기 형제를 부담없이 만날 수있는 그런 민족통일을 원하는 의미일 것이다. 무슨 민족적인 양심에서 통일이라는 칭호를 붙였을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빈곤하다.
우리나라 역사를 제대로 터득한 자라면 위 ‘틀’들의 명칭들을 보면 많이 웃을 것이다. 물론 동작들은 최홍희가 동경에서 중앙대학교 법과에 다닐 때 잠깐 배운 소토깐 동작으로 최홍희가 붙었다. 그래서 민족의식이 매우 가난하기 때문에 중근(안중근)틀, 삼일(3.1)틀, 주체(김일성)틀들의 동작들을 왜놈의 가라데 동작들로 다시 예속을 시켰다는데서 분노케하는 것이다.
뿌리는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1930년 말에 친일파 자식이 아니면 동경에서 감히 대학교를 다닐 수가 있었을 것인가 말이다. 그러한데도 불구하고 정당화로 둘러붙이기에 도사인 희대의 사기꾼 최홍희는 자기가 사는 면 왜놈 경찰(순사)에게 몇 폭의 붓글씨를 써주고 허가증을 받았다고 하였으며 또 어린시절 서당에서 붓글씨를 배우는 선생한테서 택껸을 배웠다고 입슬에 침도 바르지 아니하고 거짓말을 했다.
이것들이 근거도 없는 것이 사실이라고 설령 할지라도 난 이자의 말을 단 한마디도 믿을 수가 없다. 왜, 우리 태권도 개척사범들에게 너무도 많은 거짓말로 최홍희에게 속아왔기 때문에 우리 많은 개척사범들은 단 한 말도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앉으나 서나 공자, 순자 이야기요 미국자랑이요, 서로 이간시키고 쌈을 붙이는 자었다.
또 카나다 도론토에 대궐 같은 최홍희의 집은 엄청나게 고생하는 ITF 개척 사범님들에게 철석 같이 주야로 약속한 것을 하루 아침에 헌신짝 버리듯이 한 것이란 무엇인가!
한성봉 글씨를 동경 어느 누구에 많은 돈을 받고 팔아 그 돈으로 고생하는 개척 사범님들의 도장을 차려 주겠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철석같이 약속한 것을 썩은 나무 토막 버리듯이 하고 산 대궐 같은 집이다. 그럼 장물취득죄, 장물매매죄는 어떻게 되는가고 묻고 싶다.
그 한석봉 글씨는 어디에서 구했는가 나의 질문에 제주도 29사단장을 할때 도민으로부터 상납을 받았다고 언겁결에 답을 했었다. 또 많은 개척 사범님들이 단증대 보내서 카나다에서 일류로 먹고 살았는데.
그에 한마디의 감사는 커녕 ‘태권도와 나’라는 자서전 책에 척추 다 달토록 ITF 태권도 개척한 참 사범님들을 거짓과 사기로 모두 깡그리 악질적으로 매도한 의리부동한 인간 배신자라, 인간쓰레기라 해야 당연할 것이다.
더욱이 중국사람들을 만나면 태권도는 공자철학으로 만들었으니 당신들이 태권도를 하면 당신들의 철학을 찾게 될 것이라고 말을 했다고 ‘태권도와 나라’는 책에 쓰여져있다. 그럼 ITF 태권도 철학이 공자 것이면 태권도는 중국 것이지 최홍희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리고 이 최홍희는 단 한 사람도 흰띠에서 검정띠를 만들어 본적이 없는 자다. 고로 태권도가 어느 누구에 의해서 보급되었는가고 본인은 주야로 묻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고 무도(武道)에 무(武)자의 개념도 모르는 자 ITF 창립자는 부끄럽고 창피하다.
ITF 본부 오지리 비엔나에 한국인 ITF 개척자 사범님들이 단 한 사람도 없다. 지능적으로 떠나게 한 것이 아닌가? 이들은 철저히 한국인 ITF 개척 사범님들을 배척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마치 최홍희가 ITF 개척사범들을 배척했던 것처럼 위선하지 말자!
그러므로 본인은 ITF 태권도 개척자의 양심 선언으로 북녘에서는 날 싫어하지만 난 하나도 두려울 것이 없다. 왜 본인은 참 옳그(武道)인이라고 자부하며 살기 때문이다. 그것의 참 양심을 북녘의 영화들에서 줄기차게 표현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최홍희의 경력들을 보면서 그는 북녘에서 다시 태여났다고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아니하고 말을 했다 하지만 ‘태권도와 나’라는 책에는 그런 말이 단 한 단어도 없고 또 단 한구절도 감사가 없다. 그것은 뼈속 깊이까지 친미 사대사상이 찌들은 자이고 희대의 표절(도용)의 왕이요, 거짓말 도사인 최홍희는 꼭 이명박 쥐새끼와 똑 닮았다 것을 난 절절히 느꼈다.
후손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지 아니할려거든 역사만은 정직히 똑바로 써야한다고 보는 자다. 그것이 강자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무술은 그릇이 작지만 무도는 그릇이 큰 것이라.
생각은 자유다. 그러나 크게 갖으라!
하늘 아래 모든 이치는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4345(2012)년 12월26일.
첫댓글 ITF 태권도 개척자 사범님의 절절한 글입니다.진실은 명확하지 않지만, 평생을 무도인으로서 살아가면서 절망적인 현실을 가감없이 쓴 글이네요~ 진실된 태권도의 산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회주의자가 어떻게 처신하고 성공가도를 달려왔느냐를 볼 수 있어 씁쓸합니다.
택견에 대한 글은 대택의 이용복 선생님의 글을 옮겨놓다보니 다분히 대택중심적인 사고라는 걸 감안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