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 6개국 여행 후기 (2)
- 베니스 / 피렌체 -
인스부르크를 뒤로하고 차에 올라 차창으로 스치는 풍광들을 바라보며 셔터를 누르는 동안
긴 터널을 통과하니 이태리의 모데나 지역으로 들어 왔다고 하였다. 유럽지역에서 국경을
통과하는 데는 아무런 절차 없이 자유롭게 왕래하여 역시 선진국들의 세계는 이렇구나
하는 것을 실감하였다.
베니스를 향하여 계속 내려가는데 도로변의 농촌에는 지주를 세워 어린 묘목을 심은 과수원 지대
가 평지와 산비탈에 조성되어 있었는데 포도밭이 많았다. 서쪽으로 석산 줄기가 이어져 있었는데
그 아래로 강이 흐르고, 마을이 형성되어 과수농사를 하고 있었다. 남녘으로 내려오면서 평야지
대가 끝없이 펼쳐졌다.
과수원 지대
베니스에 도착하기 전에 오찬을 한국식당에서 비빔밥으로 하고, 이태리에서 3일 동안
안내해줄 가이드 김건주씨를 만나 옆에 있는 매장에 들러 발삼액과 올리브유 제품을
쇼핑하고 차에 올랐다. 가이드가 자기소개에 이어 베니스에 대한 설명을 해 베니스
관광을 하는데 사전 지식을 습득하였다. 여행은 이성적 투어가 아닌 감성적 투어로
문화를 체험하라고 하였다.
베네치아라고도 하는 베니스(Venice)는 베네치아만(灣) 안쪽의 석호(潟湖:라군) 위에
흩어져 있는 118개의 섬들이 약 400개의 다리로 이어져 있다. 섬과 섬 사이의 수로가
중요한 교통로가 되어 독특한 시가지를 이루며, 흔히 ‘물의 도시’라고 부른다.
대안의 메스테르와는 철교⋅다리로 연결되어 있으나, 철도역은 철교가 와 닿는 섬 어귀에
있고, 다리를 왕래하는 자동차도 시내에는 들어올 수 없다. 시가지는 본래 석호의 사주
(砂洲)였던 곳에 들어섰기 때문에 지반이 약하고, 따라서 근래 지반침하와 석호의 오염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고 하였다.
베네치아의 역사는, 567년 이민족에 쫓긴 롬바르디아의 피난민이 만(灣) 기슭에 마을을
만든 데서 시작된다. 6세기 말에는 12개의 섬에 취락이 형성되어 리알토섬이 그 중심이
되고, 이후 리알토가 베네치아 번영의 심장부 구실을 하였다
.
처음 비잔틴의 지배를 받으면서 급속히 해상무역의 본거지로 성장하여 7세기 말에는
무역의 중심지로 알려졌고, 도시공화제(都市共和制) 아래 독립적 특권을 행사하였다.
유람선을 타고 선착장을 출발하며
베네치아 풍경
10세기 말에는 동부지중해 지역과의 무역으로 얻은 경제적 번영으로 이탈리아의 자유도
시들 중에서 가장 부강한 도시로 성장하였다. S자형의 대운하가 시가지 중앙을 관통하
고, 출구 쪽의 운하 기슭에 장대한 산마르코 광장(廣場)이 자리한 기본적인 도시 형태는
산마르코 대성당을 비롯한 교회·궁전 등과 더불어 13세기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산마르코 대성당의 5개의 원형 지붕에서 볼 수 있듯이, 베네치아의 몇몇 건축물에서는
동방의 영향을 반영하는 비잔틴풍(風) 또는 오리엔트풍의 건축양식을 볼 수 있었다.
베네치아는 십자군(十字軍) 원정에 힘입어서 동방무역을 확대하고, 나아가서 현재
그리스의 여러 섬들을 비롯한 동부지중해 지역에 영토를 확대함으로써 14~15세기
초에 해상무역공화국으로서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고 한다.
그 무렵의 베네치아 인구는 약 20만으로 추정된다. 공화국의 정치 중심이었던 두칼레
궁전이 완성된 것도 15세기였다. 16세기 이후, 투르크인에 의해 동부 지중해에서 세력
이 약화되고, 따라서 베네치아는 점차 오늘날의 베네토주의 풍요한 농업지대의 중심
도시로서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도시경제의 쇠퇴와 페스트의 유행으로 16세기에는 인구가 10만으로 감소하였다.
1797년에는 나폴레옹 1세에 의해 점령되었고, 1866년에 이탈리아 왕국군에
점령되기까지 반세기 이상은 오스트리아의 영토가 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이탈리아 경제의 중심인 북부평야를 배후지로 하는 항구도시로 발전하
였다. 상항(商港)은 서부의 철도역에 인접한 스타치오네 마리티마이나, 20세기에 들어와
대안에 공업항(工業港)으로 마르게라가 건설됨으로써, 마르게라·메스트레 등 대안(對岸)
지역이 근대공업지대로 발전하였다.
대안의 공업지구는 현재 행정적으로는 베네치아시에 포함되어 있고, 유리세공업(細工
業)으로 유명한 무라노섬, 국제영화제 개최지 및 해수욕장, 카지노 등으로 유명한 리도
등도 베네치아시에 포함된다.
베네치아의 구시가지는 지난날의 공화국 번영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고, 산마
르코대성당⋅두칼레궁전⋅아카데미아미술관 등은 미술⋅건축예술의 보고(寶庫)로 알려져
있다. 베네치아는 로마⋅피렌체와 더불어 이탈리아의 중요한 관광지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곳은 가면을 쓰고 즐기는 향락문화가 성행하여 사생아가 많아 고아원 시설이 많았다고
했다. 지금도 곤돌라가 있는데 곤돌라는 흔들린다는 의미로 흔들리는 곤돌라에서 남녀 간 섹스가
성행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곤돌라 사공에게는 비밀을 유지하게하기 위해 글을 가르기지 않았고
비밀을 발설하면 혀를 잘랐다고 하였다.
가이드의 설명을 듣다보니 베니스로 들어가기 위해 버스가 진입료를 납부하기 위해 정차 하였다.
수속을 끝내고 섬으로 들어 가다보니 기차가 지나고 있었다. 주차장에서 내린 일행은 노점상가를
지나 유람선 선착장 앞에서 무선수신기를 지급받아 가동시험을 하고, 배에 올랐다. 배를 타고 오
르는 동안 무선수신기를 통하여 가이드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대형크루즈선이 정박해
있었고, 좌우로 붉은 톤의 고풍스런 건물과 분주히 오가는 유람선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유람선 선착장
곤돌라와 크루즈
선착장에 내려 해안 광장으로 나가니 각종 노점상과 수많은 관광객들로 붐벼 앞으로
나가기가 어려웠는데, 이러한 것이 베니스의 실상이구나 생각하였다. 곤돌라 선착장으
로 이동하는 동안 가이드의 설명은 계속되었는데 사진을 촬영하느라 별로 귀담아 듣지
못했다. 어느 다리 위에서 건물사이를 바라보니 두 건물을 연결하는 다리가 있었는데
‘탄식의 다리’라고 하였다.
이 다리는 17세기에 만들어졌으며, 총독부가 있었던 두칼레 궁전과 피리지오니 누오베
감옥을 연결했던 다리라고 하였다. 두칼레 궁전에서 재판을 받고 나오던 죄수들이 이
다리를 건너면서 한숨을 내쉬었다고 해 ‘탄식의 다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좀
더 내려오니 문에 큰 철창이 박혀 있는 프리지오니 감옥이 있었다.
탄식의 다리
곤돌라 선착장에 이르러 5∼6명이 한 배에 타고 좁은 수로가 형성된 건물 사이를
흔들거리며 돌아 나왔다. 사공이 배를 두 차례 흔들어 놀라기도 하였다. 관광객을
태운 곤돌라가 죽 뒤를 이어 다니고 있었다. 건물 기초는 물속에 잠겨 있었고, 건물은
중간 중간에 다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배를 타고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불편함도 있을 것 같았는데, 어떻게 이러한 건축물을
짓고 살게 되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곤돌라 유람을 끝내고 내릴 때 1유로의 팀을 주고
내렸다. 다시 가이드의 안내로 명품점이 즐비한 좁은 상가 골목을 지나 산마르코 광장
으로 이동한 후 자유 시간을 주고, 집합장소와 시간을 정해 주어 산마르코대성당과
두칼레 궁전 등을 살펴보았다.
일행과 곤돌라에서
산마르코광장은 베네치아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다. 열주로 가득한 건물이 광장을
ㄷ자로 둘러싸고 있어 광장은 하나의 거대한 홀처럼 보였으며, 나폴레옹은 이를 두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홀)이라 불렀다고 했단다.
광장의 가운데에는 베네치아의 수호신인 날개 달린 사자상과 성테오도르상이 있고
동쪽으로 산마르코대성당, 두칼레 궁전이 있다. 광장을 둘러싼 건물은 16세기 경 정부
청사로 건립된 것으로 나폴레옹의 날개(알라 나폴레오니카)라고도 불리며, 현재는
박물관을 비롯해 오래된 카페, 살롱들이 들어서 있다.
그중 1720년에 개업한 카페 플로리안은 과거 바이런, 괴테, 바그너 등이 자주 들렀던
곳으로 유명하다고 하였다.
산마르코 광장
광장의 야외 카페에서
산마르코 광장에서
광장에는 관광객들이 주는 먹이를 받아 먹느라 비들기와 갈매기가 몰려들었는데, 갈매
기가 비들기의 먹이를 빼앗으려 했다. 그리고 양 옆으로 카페가 있어 야외에 탁자를 내놓
고 영업을 하고 있었다. 산마크로 성당 일부분은 보수를 하느라 가림막이 쳐져 있었다.
산마르코 성당은 2명의 상인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져온 성마르코 유골의
납골당으로 세워진 것(829~832)이라고 하였다. 그 후 성마르코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11세기 말에 현재의 산마르코성당이 재건되었는데 이 재건공사에
롬바르디아의 건축가와 석공이 상부구조 건축에 참가했다고 한다.
산마르코성당의 건축양식은 비잔틴 건축의 대표적인 양식으로 유명하다. 그리스 십자형
의 바실리카로 다섯 개의 동방적인 돔을 받치고 있으며, 파꽃형[蔥花形]의 아치와 고딕
풍의 천개(天蓋)가 이어진 정면(파사드)을 가지고 있고 아름다운 대리석 건축으로 황금빛
의 배경을 지닌 모자이크 벽화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리고 성당 아래쪽에 있는 두갈레 궁전은 679년부터 1797년까지 1,100년 동안 베네치
아를 다스린 120명에 이르는 베네치아 총독의 공식적인 주거지였다. 9세기에 처음 건설
되었고, 현재의 외관은 14~15세기에 형성되었다. 최초의 건물은 마치 요새 같은 고딕
양식의 건물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고딕 양식을 잘 나타내면서도 비잔틴, 르네상스 건축 양식이 복합된 모습
이다. 북방의 고딕 양식과 베네치아의 동방적 양식와 장식이 어우러진 모습을 베네치아
고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궁전은 베네치아 고딕의 조형미가 가장 뛰어난 건축물로
평가받는다고 한다. 건물은 흰색과 분홍빛의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고, 회랑은 36개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칼레 궁전에는 두 개의 정문이 있는데, 산마르코 대성당에 면한 쪽의 문서의 문은
옛날에 정부의 포고문이나 법령 등을 붙이던 곳이었다고 했다. 문 위에 보이는 날개가
있는 사자는 베네치아의 상징이라고 허였다.
산마르코성당
집합시간에 맞추어 사자상 앞으로 가니 인원 점검 후 수상택시 탑승장으로 이동하였다. 수상택시
탑승은 선택 관광 사항으로 50유로를 지불하였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시간에 보트에 탑승하
여 양편에 아름다운 건물들이 늘어선 사이의 수로를 달리며 수상도시의 진면모를 감상하였다.
수로에는 섬과 섬을 연결하는 다리가 많았는데 다리 마다 특색이 있었다. 건물들의 독특한 조형미
나 아름다운 다리를 보는 동안 보트는 좁은 수로의 다리 밑을 아슬아슬하게 비집고 지나기도 다.
다리가 아름다운 베니스의 고풍스런 풍경
수상택시(보트)를 타고 관광 중에
보트관광이 거의 끝날 즈음에 비가 내리고, 섬에는 불빛이 살아나기 시작하여 아름다운 야경을
이루었다. 이를 뒤로하고 배는 넓은 바다로 질주하여 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선착장에 도착하였다.
주차장으로 나오는데 악세사리와 옷, 등을 팔고 있는 사람들이 한국말로 싸게 준다며 비가 오니까
우산을 사라고 하였다. 차에 올라 호텔로 이동하여 피곤한 몸으로 하루를 정리하였다.
베니스의 호텔은 시설이 열악하였다. 화장실에는 욕조가 없고, 양변기에는 비데가 없었는데
그 앞에 좌변기 같은 것이 있어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수동으로 조절하는
비데라고 하였다. 사용하는데 불편하다고 해서 써 보지 않았다.
여행 4일차 되는 날 아침에 어머님과 통화 하였다. 내 전화가 구형이라 로밍이 되지 않아 사용을
못하고, 병도 스마트폰을 빌려 안부를 전하였다. 비가 조금씩 내리는 가운데 피렌체(프로렌스)로
출발하였는데 이제 여행에 좀 적응이 되는 것 같았다.
고속도로에 진입하여 한참을 달리니 큰 산맥이 나왔는데 이 산 줄기를 기준으로 남부와 북부로
나누어진다고 하였다. 이 능선을 넘는데 터널이 많았으며 길도 굽은 곳이 많았다. 그리고 산 경사
면에는 초지가 조성되어 평화스러워 보였고, 능선을 넘어 마을로 내려가니 올리브 나무가 많이
식재되어 있었다. 평야지에 피렌체 시가지가 조성되어 있었는데 도로변에는 개나리와 벚꽃이
만발하였고, 우산소나무도 있었다.
피렌체(플로렌스)는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지방의 수도이다. 명칭은 ‘꽃 같은 도시’의 뜻으로
아르노 강 중류에 위치한다. ‘로마의 딸’이라 불리웠던 고대 로마의 도시로 예부터 교통, 무역의
요충지이며 특히 중세 이탈리아 도시들의 번영시대부터 르네상스 시대까지 이탈리아 뿐만아니
라 전 유럽의 금융업, 직물업의 중심지로서 풍성한 번영을 보였었다.
12세기 이래 공화국으로 교황파에 속하고 14세기의 페스트 대유행 후, 많은 은행가의 활약으로
서서히 부를 축척하여 갔고, 15세기에는 메디치 가의 지배체제가 확립됨과 동시에 번영의
절정에 서게 되었다고 한다.
공화국정 청사가 있었던 팔라초 베키오(13세기 착공) 및 이 도시의 정신적 중심인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1296~1461)을 비롯하여 대성당 부속의 산 조반니 세례당(11세기 창건, 안드레
아 피사노 및 기베르티의 문짝 장식), 종탑(지오토 설계), 산 미니아트 알 몬테 성(로마네스크
양식), 산타 크로체 성당(지오토의 벽화), 산타⋅마리아⋅노벨라 성당(마사치오의 벽화),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마조리노 및 마시치오의 벽화), 산 로렌초 성당, 산 마르코 수도원
(프라 안젤리코의 벽화⋅판화), 등이 있다고 하였다.
시내를 가로 지르는 강 옆 도로변에는 얼굴이 정말로 새까만 흑인 청년들이 풍경화를 팔고 있었
는데 대부분 밀입국자라 했으며 사진을 촬영하거나 처다 보지도 말라고 가이드가 주문하였다.
피렌체로 이동 중에 농촌풍경
피렌체의 아르노 강
쇼핑점에 들렀다 오찬을 하고 시내 관광에 나섰다. 먼저 좁은 골목 안에 자리하고 있는 단테
생가를 찾았는데 이탈리아 중세를 대표하는 시인 단테(1265~1321)가 태어난 집이라고 하였다.
단테 알리기에리 거리에 있으며, 현재 작은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며 13세기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 되어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1294년 아르놀프 캄비오가 기공, 1442년에 헌당된 고딕풍의 산타 크로체 성당을 보았는데
전면에는 광장이 넓게 조성되어 있었다. 다시 꽃의 성모마리아 성당이라고 불리는 두오모 대성당
으로 가니 로마의 판테온을 모방하여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했다는 8각형의 붉은 돔이 이채로웠는
데 바티칸 시국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 돔과 쌍벽을 이루는 아름다운 돔이라 하였다. 아름다운
대리석건물은 하나의 예술품이었는데, 이를 보기 위해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
로마네스크, 고딕 양식과 고대 로마의 건축 양식이 혼합된 두오모로 잘 알려진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은 르네상스 양식을 대표하는 건축물로써 피렌체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라고 했다.
1296년 공사를 시작하여 1462년에 완성되었다고 하였는데, 피렌체의 건축물 가운데 가장
높고 웅장하며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성당이라 했다.
피렌체 두오모를 르네상스 양식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보는데, 그 이유는 건물의 모습보다는 실내
에 르네상스의 여러 예술품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두오모 안에는 조르조 바사리와 주카리가
그린 천장화 ‘최후의 심판’과 도나텔로 작품인 스테인드글라스,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
등이있다는데 내부는 들어가 보지 못하였다.
산타크로체성당
두오모 대성당
두오모 입구 남쪽에는 82m의 종탑이 서 있었다. 조토의 탑으로 불리는 이 종탑은 당시
이탈리아에 세워진 종탑 중 가장 높았다고 한다. 3명의 건축가가 만들었는데, 1층은
조토가 설계하고 건설했으며 2층은 안드레아 피사노가, 종이 매달린 3층은 탈렌티가
완성했다고 하였다. 토스카나 지방에서 생산된 흰색, 연두색, 분홍색 대리석을 이용하여
지어서 웅장하고 화려한 색상을 자랑하고 있었다.
또 종탑 벽에는 인간의 창조, 예술, 산업을 주제로 한 조각이 새겨져 있었는데, 매우 섬세
하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종탑전망대에 올라 시가지를 바라보면, 붉은 지붕이 많은 피렌
체의 아름다운 경관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오르지 못했다.
또 두오모 성당 앞에는 4세기경에 지어졌다는 8각형 모양의 세례당이 있는데, 피렌체
유적지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 세례당은 하얀색과 연두색 대리석을 이용
하여 지은 것으로, 아름다운 모자이크 조각과 3곳의 출입문이 유명하다 하였다. 특히
기베르티가 제작한 동쪽과 북쪽 출입문에는 성경의 내용을 담은 청동 조각이 새겨져
있는데, 이를 본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답다.”고 하며 감탄했다고 하여 천국의
문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하였다.
천국의 문
두오모 지역에서 상점가를 지나 남쪽으로 걷다 보니 넓은 시뇨리아 광장을 만날 수 있었는데
여러 개의 조각상이 있었다. 미켈란젤로 작품인 높이 6m의 ‘다비드’상과 잠볼로냐의 작품 ‘사빈
여인의 강간’, 메두사의 목을 벤 페루세우스의 청동상인 첼리니의 작품 ‘페르세우스’,의 모조품과
피렌체 시민들이 ‘흰 거인’으로 부른다는 ‘넵투누스’ 분수, 도나텔로의 작품 ‘사자’ 상 등
르네상스 미술을 대표하는 조각 작품들이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높이 94m의 거대한 탑이 있는 베키오 궁전이 있었는데, 이 궁전은 1298년에 착공하여
몇 번의 개수를 거쳐 16세기에 완성된 것으로 오랫동안 관공서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도 피렌체
시청으로 사용한다고 하였다. 웅장한 외관은 전형적인 중세풍으로 무척 딱딱하고 어두웠지만,
건물 안은 여러 예술가의 수많은 작품으로 장식되어 있다고 하였다.
베키오 궁전
조각상이 있는 분수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