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종단 출범이후에도 대처 측과 분쟁 계속돼 종단 재정 40% 소송비 탕진
시련과 중단의 연속에도 역경원 설립과 불교 성전 발간
군승제, 종비생 제도 신설로 역경·포교·도제양성 3대 사업 기어이 첫걸음
전국 불교도 대표자 대회서 의식의 현대화와 군승제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 신도조직 강화, 불교회관 건립 등
6개 항 결의문 채택 이어
전국 사찰 매주1회 정기법회 불교방송국 설립 승가대학 신설 원력 등
3대 사업 포함한 종단 청사진 천명
“…지난 10년 동안 한국불교는 온갖 손실과 치명(恥名)을 가져오면서도 오로지 불교전통과 사찰정화를 위하여 투쟁해온 결과 오늘날의 통일종단의 육성을 보게 된 이 성과는 참으로 그 의의를 크게 주지 않을 수 없다. 이젠 바야흐로 건설도상의 성업(聖業)만이 우리들에게 남았고 역경 포교 도제양성의 3대 사업만이 종단의 중대과업으로 남게 되었다.…”
1966년 12월13일 청담스님의 종정 취임을 보도한 <대한불교(불교신문 전신)> 기사.
<불교신문>의 전신인 <대한불교> 1964년 신년호에 소개된 청담스님의 신년사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스님은 벽안스님에 이어 초대 후반기 중앙종회의장을 맡고 있었다(1963년 6월~1966년 12월). 신년사의 요지는 불교정화운동이 어느 정도 마무리됐으니, 앞으로는 3대 사업에 종도들의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3대 사업은 중요했다. 청담스님은 이를 일찍이 자신이 주창했던 불교 근대화의 발판이라고 봤다.
부처님 말씀을 널리 알리고(역경),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 말씀을 따르게 하며(포교), 전법의 과정을 효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양질의 스님을 키워내자(도제양성)는 게 밑그림이었다. 비구와 대처의 통합으로 출범한 대한불교조계종은 해방 이후 최초의 자율적 교단이자 국가가 공인한 유일의 교단이란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실상은 가난하고 힘없는 신생종단에 불과했다. 불교의 신속하고 총체적인 발전을 위해 3대 사업은 가장 명쾌하고 확실한 방법이었다.
정화운동과 마찬가지로 3대 사업 역시 청담스님이 기초를 닦았다. 스님은 통합종단 출범 직전인 1962년 1월11일 ‘불교정화는 국민사상 개조운동’이란 제목으로 각 일간지에 기고를 실었다. 정화의 당위성에 대한 주장이 골자이지만, ‘정화 이후’에 대한 생각도 담았다. “한국불교 전통개건에 관한” 방안을 소개하고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현대화된 승가교육 의식의 한글화 등 오늘날까지 논의되고 있는 화두들임을 알 수 있다.
△현대적인 중앙수도장 건설의 건 : 승려로서 현대인의 사표가 될 수 있도록 신구 내외학문을 겸수할 수 있는 교육제도를 완비할 것 △팔만대장경 국역의 건 : 인도의 원서와 각국의 번역본과 한문본을 수집하고 국내외 승려문인을 총동원하여 집대성의 국역본을 만들어서 남녀노소가 일역으로써 불교 교리를 신앙할 수 있게 할 것 △포교현대화의 건 : 모든 의식을 간단하고 엄숙하게 하며 한문으로 된 가영구(歌詠句)를 전부 국문 가사로 만들고 현대곡으로 찬미하여 시대인으로서 참석하기 편리케 할 것. 이처럼 청담스님은 종단의 질적 근간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했다.
사실 3대 사업은 정화운동이 본격 일어난 1950년대 중반부터 비구승들의 고민과 지혜 속에서 무르익었다. 남양주 봉선사 조실 월운스님 등의 증언에 따르면, 대다수의 세인들은 비구들이 정의롭기는 하나 무식하다고 봤다. 청담스님 역시 “갑자기 불교계 정화가 되었다고 해서 (신앙과 수도생활에만 전념해 온) 비구승에게 사무능졸을 100% 기대할 수 없는 것”이라며 여론에 반박하기도 했다. 곧 역경과 포교가 기복이 아닌 정법을 전파해 교단의 정통성을 높이자는 취지였다면, 도제양성은 젊고 똑똑한 인재육성이란 목표를 품었다. 아울러 대처승들은 가족 부양에 바빠 3대 사업을 실행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는 논리를 펼쳤다.
3대 사업의 추진은 중앙종회가 주도했다. 3대 지표가 사업으로 확정된 것은 1964년 1월25일 열린 제6회 종회에 의해서다. 1963년 11월18일 제5회 종회에서 3대 사업이란 용어가 처음 등장했다. 종회의장이었던 청담스님의 역할이 컸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6회 종회는 총무원 집행부가 내놓은 3대 사업 원안을 그대로 통과시켰다. 3대 사업에 책정된 예산은 포교비 94만원, 교육비 97만원, 역경비 110만원이었다. 그해 총수입이 962만5000원이었음을 감안하면 전체 예산의 30%가 3대 사업에 할애된 것이다.
물론 3대 사업의 실행은 시련과 중단의 연속이었다. 통합종단 이후에도 대처 측과의 분쟁은 계속됐고 종단 재정의 40%를 소송비로 탕진하던 형편이었다. 세계 최빈국 수준이었던 나라의 경제사정도 영향을 끼쳤다. 가난하고 곡절 많은 살림이었으나, 3대 사업은 소걸음으로라도 기어이 걸었다. 도제양성은 동국대 종비생 제도 신설로, 역경은 동국역경원 설립과 <불교성전> 발간으로, 포교는 군승제도 도입으로 첫걸음을 뗐다.
종단의 미래를 향한 청담스님의 헌신은 종정(宗正)에 오르면서 더욱 구체화됐다. 초대 종정이었던 효봉스님이 입적한 후 중앙종회는 1966년 11월30일 제2대 종정에 청담스님을 추대했다. 스님은 “임기 5년을 500만 신도의 정화운동에 바치겠다”며 “진아(眞我)만이 과도기적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모체”라고 소감을 전했다. 취임법회는 12월13일 조계사 대웅전에서 거행됐다. 법어에선 “기아(飢餓)의 고통에서 허덕이는 중생을 건질 것이며, 욕심에 사로잡혀 싸움을 일삼는 중인(衆人)들에게 자기희생의 미덕을 깨우치게 할 것이며, 이러한 것을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는 불법(佛法)이 가장 수승함을 알도록 할 것이며, 자타(自他)가 본시 둘이 아니며 산하대지와 삼라만상이 즉시 성불하게 되는 선리(禪理)를 깨치게 하겠다”는 포부를 드러냈다. 절대적 빈곤에 시달리던 국민들의 생활상과 미진했던 불교정화 등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나타난다. 전법과 교화, 종단 발전을 향한 의지도 뚜렷하다.
당시는 종정중심제였고 청담스님은 한국불교의 명실상부한 중심이 됐다. 법어는 취임 이듬해부터 실행으로 옮겨졌다. 청담스님을 회주로 한 전국 불교도 대표자 대회가 1967년 5월25일 서울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다. 사부대중 3,000여 명이 운집한 이 자리에서 청담스님은 종단의 청사진을 천명했다. 역경 포교 도제양성 등 3대 사업을 포함해 의식의 현대화와 군승제의 촉구, 신도조직 강화,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 및 불교회관 건립 등 6개 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와 함께 포교의 현대화 활성화를 위해 각 사찰에서 매주 1회 정기법회를 개최할 것과 불교방송국 설립 및 승가대학 신설의 원력을 세웠다.
불교도 대표자 대회 제안 ‘모두 실현’
대회에서 제안된 모든 사업은 오늘날 모두 달성됐다. 군승제도는 개신교와의 형평성에 관한 지속적인 문제 제기로 1968년 최초로 5명의 군승이 선발돼 전쟁에 한창이던 베트남으로 파송됐다. 부처님오신날은 국가와의 법적 다툼을 불사하며 끝내 1975년 공휴일로 제정됐다. 중앙승가대학은 1979년, 불교방송은 1989년 설립됐다. 백년대계의 근본에는 청담스님의 지휘가 독려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971년 <대한불교(현 불교신문)>에 입사해 오랫동안 불교 언론인으로 활동해 온 선원빈 기자(1993년 별세)는 청담스님 원적 20주기(1991년)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청담스님은 승단 정화를 통해서 불교의 정통성 회복과 함께 불교의 현대화에 대한 구체안을 제시하고 있었다. 우리는 스님의 위대한 행동과 정신을 결코 사라지지 않고 오래도록 한국불교에 자양이 되어 불교중흥의 밑거름이 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다.”
한편 선풍 진작을 향한 청담스님의 관심은 해인총림 승격으로 빛을 봤다. 청담스님이 소집한 중진협의체는 1967년 7월 총림법을 통과시키고 합천 해인사를 총림으로 지정했다. 초대 방장에는 성철스님이 추대됐다. 총림(叢林)이란 선(禪) 교(敎) 율(律)을 동시에 닦는 종합수행도량으로, 수행 정진에 매진하는 비구 전통을 회복하기 위한 필수조건이었다. 해인총림을 계기로 전국 사찰에선 선원(禪院) 복구와 정비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1965년 도봉산 천축사에 면벽수행으로 일관하는 무문관(無門關)이 개설됐고 1969년 5월엔 해인사에 이어 송광사가 조계총림으로 지정됐다. 1969년 결제에 들어간 선원은 총 39곳이었으며 결제대중은 600여 명이었다.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혼란스러웠으나, 그래도 내실은 쌓여갔다.
청담장학문화재단ㆍ불교신문 공동기획 [불교신문313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