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회 고산문학대상 자선 대표작>
거울 속 거울 외
강현덕
폐쇄된 채석장에 내가 잘려있네
울음이 함께 남아 고요에 물려있네
수직의 암벽 아래에 그런 내가 모여있네
안개에 떠넘겼던 모든 부끄럼과
순정이라 믿었으나 무용했던 노래와
한 번도 닿은 적 없는 언젠가라는 말들이
일시에 붙들려 와 이 감옥에 갇혔네
울음은 마땅한 것 슬퍼서가 아니네
어깨가 들먹거릴 때 어루만질 돌 같은 것
채석장 하늘에는 수십 개 달이 떴네
달빛에 눌려있는 영혼의 껍데기들
적당한 간격에 맞춰 일시에 나를 보네
사랑
이 호수도 예전엔 조그만 웅덩이였으리
어쩌다 발을 헛디뎌 주저앉는 바람에
몇 차례 빗물 고이고 나뭇잎 떠다녔으리
이 호수도 나처럼 후회하고 있으리
어쩌다 널 헛디뎌 여기 빠져 있는지
조그만 웅덩이였을 때 흙 몇 줌 다져줄 것을
밤에 사는 참외
아직도 트럭에는 반쯤 남은 참외 상자
노란 더미에 둘러싸여 여자는 자고 있다
등 뒤에 노란 가로등 그 위엔 또 노란 달
긴 밤이 될 것 같아 그 앞에 멈춰 서니
한 봉지 오천 원요, 남자가 속삭인다
여자가 잠 속에서 웃는다 참외 단내가 난다
어두운 책상 위에 참외를 켜둬야겠다
가장 밝은 언어들로 온 밤 시를 쓰면
여전히 노란 가로등 그 위엔 또 노란 달
사막의 사자*
나는 꿈을 수집하는 사자라고 해둘게
초원을 오래 걸어 당도한 원시의 사막
지금은 만돌린을 타던 집시가 잠들었군
꿈이라면 집시의 것이 가장 순결하지
세상을 떠돌다 만난 날것만 가졌으니
바람이 물 항아리를 엎기 전 재빨리 채취해야지
포효는 내 게 아니니 달은 떨지 말기를
몽환을 담당하는 밤의 정령에 의해
발톱도 거친 이빨도 진즉에 다 뭉개졌으니
* 루소의 '잠자는 집시'에 있는 사자.
심금心琴
언제부터 마음아, 숲을 가졌더냐
소나무 오동나무에 명주실 걸어놓고
바람이 긴 목덜미도 부풀려 두었더냐
깊은 강물처럼 흐르기로 했더냐
네게서 전해오는 눈물을 좇아서
마을로 저 착한 마을로 나도 자꾸만 간다
거문고자리 별들도 술대를 쥐려나 보다
너도 네 음역을 흠뻑 넘나들려무나
마음아
울어보려무나
온전히 울어보자꾸나
헛
말 많은 임금도
법령 많은 법전도
기능 많은 가전도
메뉴 많은 밥집도
주석이 너무 많아서
읽을 수 없는 당신도
편경
완강한 노래들만 여기에 바쳐졌다
단단한 돌의 심장 두 손엔 옥색의 피
등뼈를 꺾어서 내는 또렷한 정음들만
각퇴를 만나기도 전 정전 기둥은 울었다
한 번도 그 중심을 잃은 적 없었기에
종묘는 더 깊어져갔다 고아한 조선의 악樂
이팝나무
아무래도 이 나무는 저 위서 온 듯해
글라라 자매님이 하늘을 올려다 본다
꽃잎이 밥솥 옆으로 밥처럼 내려온다고
하느님의 정원에서 뜸을 들였다가
마음 배도 부르라며 때맞춰 내려온다고
아홉 살 은지도 서 있는 무료급식소 긴 줄 옆
달의 뒷면
오른쪽 어깨가 자꾸 기우는 김정기 씨
외발 수레 밀면서 언덕을 오르다가
콩밭 옆 그의 묏자리에 앉아 잡초 몇을 뽑는다
기울다 그 자리 들면 안 보일 김정기 씨
어제는 콩밭 매다 거기 눕는 걸 보았다
토끼는 달의 뒷면에 우리 아버지도 숨겼다
내가 그리워하는 사람
밥 대신 남 눈물 먹는
어쩐지 시답잖은
눈물이 생선가시처럼
목에 걸린다면서도
툭하면
찾아 먹는 그늘처럼
기꺼이 삼키는
그러다 돌아서서
제 눈물은 남 주는
짠맛 절여진 혀에
소금이 돋아나서
그 소금
한 됫박씩 퍼주는
참으로 싱거운
제 가난 제 외로움으론
눈물 흘리지 않는
속 비어 거죽으로 사는
시냇가 버들처럼
실속도
잇속도 없이
그저 머리만 끄덕이는
- 《열린시학》 2023. 가을호
출처: 사단법인한국시조시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덕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