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도 평화의 섬에 가다
오하룡 시인
사곶 모래밭 비행장
1.
엔 엘 엘(NLL, 북방한계선)이란 이름으로 불안을 안고 견디는 섬 정도로 나는 백령도를 이해했다. 북한 황해도 장연군과 바로 마주하고 대척점에 있는 섬, 천안함 피격으로 비극의 현장으로 유명해졌고, 연평도 포격으로 서해 낙도들의 긴박한 현실이 대두되었을 때, 그 인근 섬들이 모두 안타까움의 생존현장으로 가슴속에 각인되면서 백령도 또한 그 범주에 머물러 있었다.
고려시대는 곡도로 불리었다. 고려 현종(1018년)때는 ‘백령진’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고종 33년에는 황해도 장연군에 속했다가 광복을 맞으며 경기도 옹진군에 편입되었다. 6.25사변이 일어나면서 우리 섬이지만 소위 엔엘엘이라는 북한과의 경계 영역에 묶이는 불편한 지역이 된다. 1995년에는 인천시가 광역시로 확대개편 되면서 옹진군 전체가 여기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는 내력을 가지고 있다.
현재 섬의 상주인구는 5,000여명으로 집계되고 있으나 주둔군이 그 정도 되는 것으로 보아 합치면 1만 여명 안팎으로 추산되고 있다. 가구 수는 3천여, 남녀 비율은 남자가 1,000여명 많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를 안내한 현지인의 설명에 의하면 이 중 700여명 안팎은 그냥 거주신고만 되어있다는 소개를 한다. 이유는 섬 주민에게는 인천을 오갈 때 선가(船價)의 할인 혜택이 있어 그것을 의식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섬이면서 어업인구보다 농업인구가 많다는 사실이었다. 농업이 30여 퍼센트인데 비해 어업은 10퍼센트 안팎이었다. 그만큼 농토가 많아 식량 자급은 물론 역외 반출이 꽤 된다는 설명이었다.
그 섬에 간다는 사실만으로 말 할 수없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비록 건너다보이는데 불과하지만(황해도 장연과는 17킬로미터), 북녘 땅 가까이 간다는 사실이 그렇고, 소문으로 듣던 모래밭 비행장 또한 어떤 곳인지 궁금하였다. 어떤 모래밭이 길래 그 거대한 쇳덩어리 비행기가 빠지지 않고 내리고 뜰 수 있는가. 우리가 아는 일반 모래밭은 발이 푹푹 빠져 걷기조차 쉽지 않다.
거기다 몽돌로 이루어진 해변은 우리가 사는 여기 남쪽의 가까운 거제나 남해 등 여러 곳에서 이미 구경한바 있지만, 백령도에만 있다는 콩 알만 한 자갈로 이루어진 이름조차 ‘콩 돌’이라 하여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명품 ‘콩 돌’ 해변 또한 그 이름만으로 호기심을 유발하기에 충분하였다. 이처럼 백령도는 섬 자체만으로 아름다운 경관과 빼어난 환경으로 비경을 이루어 사람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한 여건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사실 필자는 지난 1961년, 이곳을 먼저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 군복무니까 ‘구경’이라는 표현은 맞지 않고 ‘답사’할 기회가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해병대 신병훈련 후 이곳을 지원했더라면, 당시의 김포여단으로 배치 받아 백령도로 배치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진작 구경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포항 사단으로 발령받아 갔었다.
아무튼 우리 창원시문화상 수상자회 백령도 탐방단은 ‘백령도’를 일단 ‘평화섬’으로 이해하고 그 의미를 새롭게 부각시키는 목적을 위해 3박 4일 예정으로 백령도 행을 단행하였다. 새벽 6시 마산운동장을 버스 편으로 출발, 11시경 인천에 도착하여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고, 1시에 출발하는 백령도 행 여객선 <씨 호프> 호에 승선하게 되었다.
<시 호프> 호는 300톤(299톤)급 여객 전용선으로 360명이 정원이었다. 현재 백령도를 오가는 여객선은 <씨 호프> 호와 <하모니 플라워> 호가 있었다. <하모니 플라워> 호는 2,000톤 급(2017톤)으로 여객 564명, 차량 70여대를 탑재할 수 있었다. 두 배 모두 최고속도 35노트로 운행시간은 약 4시간 소요되게 되어 있었는데 중간에 소청도와 대청도를 거치게 되어 있다.
인천 연안부두에서는 아침 8시20분과 오후 1시 두 차례 출발한다. 아침 8시20분은 <하모니 플라워> 호, 오후 1시는 <씨 호프> 호가 맡아 운행하고 있었다. 우리가 인천서 탔을 때, <씨 호프>호는 2층 객실에는 승객이 거의 찼으나 1층은 반의반도 차지 않았다. 아침에 백령도 들어가면 일을 보고 오후에 나올 수 있기 때문에 <하모니 플라워> 아침 배는 손님이 언제나 만원이나 오후 1시배는 반도 차지 않은 채 운행되는 경우가 많아 선박 간에 알력이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도 나중 알았다.
반대로 백령도를 나올 때는 아침 8시에는 <씨 호프> 호, 오후 2시에는 <하모니 플라워>호로 맞춰져 있었으나 그래도 균형 맞추는 것이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배가 출발하여 2,30분 되었을까 ‘무슨?’ 일이 발생하여 5-10분간 정선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음성이 명료하지 않아 무슨 말인지 잘 들리지 않았다. 가슴이 덜컥 한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표현이 딱 맞다. 세월호 쇼크에서 헤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배를 탔으니 그러지 않아도 조마조마한 걱정이 마음을 압박하던 참이었다.
괜히 배 안을 오르내리며 이곳저곳 기웃거리는 행동을 한다. 이 배는 세월호에 비하면 20분의 1밖에 안 되는 소형 여객선에 불과하다. 그러나 배 안을 둘러보는 동안 세월호 같은 큰 배안의 여러 상황의 유추는 가능하다. 이 배만 하여도 입구마다 선원들이 지켜 서 있다. 하물며 세월호 같은 큰 배라면 더 인원도 많고 여러 정밀한 장치가 가능했으리라.
그런데 배가 기울어지는데도 선박 운행을 책임진 사람들이 자신들만 벗어져 나오고 승객들은 방치했다니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 배에 그런 상황이 온다면 어떨까. 구명복을 입고 죽든 살든 일단 바다에 뛰어들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 같다.
더욱 지금 이 배는 북방 해양 경계선인 엔엘엘을 끼고 북한 영향권 해역을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가는 날 어떤 돌발사태가 일어나지 말란 법이 없지 않은가. 저들 선박이 갑자기 나타나 우리를 인질로 무슨 일을 벌인다면 어떡하나? 갑자기 포탄이라도 날아오면 어떡하나? 연평도의 포격이 무슨 사전 낌새라도 있으면서 있었나? 참 부질없는 걱정이나, 사람이니까 온갖 망상을 해보는 것이다. 그런데 ‘정선이라니?’ 요망스런 생각이 겹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알고 보니 헌 그물이 스쿠류에 걸려 그것을 제거하는 작업을 한다며 ‘정선’한다는 방송이었던 것이다. 이날은 여느 날과 다르게 이런 작업으로 하여 서너 차례 더 정선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 영향으로 30여분 지체하여 정시보다 30분 늦은 5시 반경 백령도 용기포 항에 닿았다.
우리는 마중한 버스를 이용, 백령도의 중심 마을인 진촌리로 이동한다. 이 마을에 면사무소를 비롯한 보건소, 학교, 농협 등 주요기관이 집중되어있다. 백령성당, 백령병원도 이 마을에 있다. 안내는 관광버스기사가 맡았다. 이 기사는 버스 소유주이면서 안내인 역할을 맡아주었다. 백령도에는 12개 마을이 있으며 이 마을 간에는 군의 지원을 받는 마을버스가 다니고 있음을 안내 받았다.
음식, 잠자리 등 섬에 대한 궁금한 것이 많았으나 이틀 밤을 지내면서 대부분 해소되었다. 염소를 많이 기르고 있어 백령도의 육류식단으로는 염소고기가 특식이었다. 다음으로는 메밀국수도 특식으로 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메밀식단의 특성화를 위해 메밀 농사를 짓는 농가에는 군에서 장려금을 주어 생산을 지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녁식사는 바로 염소불고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관광객이 많이 드나들고 있어 숙박시설도 여관급 정도가 일반적인데 우리가 숙박한 모텔은 승강기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니까 다소 한적하기는 하나 전혀 도시와 다른 이질감을 느낄 수 없었다.
2.
먼저 이곳 부대를 위문 차 방문하는 행사가 급선무였다. 우리는 장병들에게 도움이 될 문학서적을 150여권 준비하였다. 10시가 약속이어서 가까운 심청각을 먼저 둘러본다. 심청각은 심청의 전설이 있는 황해도 장산곶의 인당수가 바라다 보이는 곳에 세워져 있다. 심청각 안에는 심청에 관한 자료가 일목요연하게 전시되어 있다. 정원에는 심청의 동상이 세워져 관광객들의 사진촬영의 명소가 되어 있었다. 주변에는 유명한 해당화 정원이 아담하게 가꾸어져 있었으나 꽃이 진 후여서 만개한 꽃구경을 할 수 없는 것이 아쉬움이었다.
10시 약속대로 해병 부대를 방문한다. 백령도에서 제일 높다는 봉우리에 적진을 바라보고 초소가 있었다. 해병장교의 안내로 현재 적과 대치하는 상황의 설명을 듣고, 우리는 준비한 책과 금일봉을 전달하여 노고를 위로하고, 앞으로도 장병들이 이 외로운 섬을 통일의 그날까지 평화의 섬으로 잘 지켜나가기를 격려하고 하산하였다.
우리 일행은 모두 적게는 육순 중반에서 많게는 아흔 가까운 노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걷는 것이 여의치 않아 가급적 이동은 버스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둘러볼 것이 많았으나 중요한 곳 위주의 제한적인 관광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방문 예정지가 해변이므로 썰물과 밀물 시간을 맞추어야 제대로 볼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곶 자연 비행장은 시간대가 오후 2-3시 전후가 최적 시간대였다. 마찬가지로 콩 돌 해변도 시간대를 잘 잡아야 했다. 주요한 몇 군데만 방문소감을 정리해보기로 한다,
천안함 순직 장병 추모비: 백령도 서해 언덕위에 사고 현장 바라보고 추모비는 서 있었다. 우리는 미리 준비한 화환을 바치고 묵념하였다. 비 전면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이 활활 타도록 하고 있어 천암함의 비극을 숙연하게 되새기고 있었다. 참고로 천안함 사고에 대한 개요는 비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전문을 소개해 본다.
천안함 46용사 위령탑 비문
서해 바다를 지키다 장렬하게 전사한 천안함 46용사가 있었다. 이제 그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려 여기 위령탑을 세우나니 비록 육신은 죽었다하나 그 영혼, 역사로 남아 자유대한의 수호신이 되리라.
사건개요
2010년 3월 26일 21시22분, 우리의 용맹스러운 용사들과 함께 서해를 지키던 한국 최강예 전투함, 천안함(PCC-772)은 서해의 백령도 서남방 2.5km해역에서 경비작전을 수행 중 갑자기 엄청난 수중폭발로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충격으로 선체는 함수와 함미로 절단되었고 함미 함체는 곧바로 침몰하였다. 함수 함체는 오른쪽이 90도로 기운상태에서 부력을 잃었다. 침몰직전의 함수 함체에서 104명의 승조원 중 58명은 해군 고속정과 해경함에 의해 구조되었으나 46용사들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충격적인 비보를 접한 국민들은 경악했다. 군은 즉각적인 초동조치를 취하면서 미 해군의 적전력과 민간인, 관계기관 등의 지원과 협조로 거친 물살과 한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해상에서 동년 5월 20일까지 탐색 및 구조작전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전우가 목숨까지 바쳐가며 구하려 했던 천안함 46용사들은 온 국민의 한결같은 염원을 뒤로 한 채 끝내 주검으로, 장렬한 산화로 우리 곁에 돌아오고 말았다.
천안함 피격 사건에 대한 원인을 찾기 위해 민.군 합동조사단과 미국, 호주, 영국, 스웨덴 4개국에서 파견된 전문가들은 과학적이고 주도면밀한 조사와 검증작업을 펼쳤다. 그리고 동년 5월 15일에는 한 민간어선이 천안함 매몰 해역에서 피격사건의 결정적 증거물이라 할 북한 제 어뢰 추진체를 수거함으로써 천암함의 침몰이 ‘북한제 감응어뢰’의 강력한 수중 폭발에 의해 일어난 것이었음을 확인하였다. 이로써 천인공노할 북한의 잔악하고 호전적인 도발 작태는 만천하에 드러났다.
사곶 자연 비행장; 천연기념물 391호로 지정되어있다. 모래가 어떤 성질이기에 그 거대한 쇳덩이 비행기 바퀴가 빠지지 않고 이착륙이 가능한지가 궁금한 것이었다. 썰물이 되어 물이 빠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관광객을 실은 승용차와 버스들이 다투어 해변 깊숙이 들어가 관광객을 풀어 놓는다.
우리도 한 중간쯤에 내려 소문으로만 듣던 모래비행장의 현장을 직접 답습하는 기회가 된다. 모래는 분명 모래인데 무슨 거대한 다지는 기계가 다져 놓기라도 한 듯 딱딱한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다. 오랜 세월동안 조개껍질 등 온갖 바다생물의 사체들이 화석화 되어 모래와 섞여 파도에 다져진 것이 이 해변의 특질이라는 설명이다. 자세히 보니 조개껍데기 가루 같은 물질이 모래와 섞여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무튼 이 모래사장은 지난 전쟁 때 군용기가 실제 이착륙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이제 이 비행장은 백령도의 가장 두드러진 관광지로 중요한 비중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주변을 보니 둑도 그렇고 관광지로서의 아늑한 면모로는 부족한 느낌을 받았다.
근방에 나무가 더 심어져 좀 더 넉넉하고 아늑한 분위기로 가꾸면 더 한층 돋보이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총길이 2.4여 킬로미터라고 한다. 해변폭도 100미를 훨씬 넘어보였다. 이태리 어딘가 이런 모래사장이 있는 것이 알려져 있으나 그곳은 길이나 폭이 사곶 모래사장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하니 그렇다면 우리 백령도는 세계적인 명물 자연비행장을 가진 셈이 아닌가.
콩돌 해변
콩 돌 해변; 천연기념물 392호 지정되어있다. 이곳도 썰물 때 방문해야 제대로 체험과 감상이 가능하다. 우리 남쪽 사람들은 거제도, 남해 등지에서 몽돌이라는 이름의 자갈밭 해변을 많이 접해본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들 몽돌 밭에도 콩 돌 같은 자갈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곳 백령도의 콩 돌 해변은 정말 만지작거리며 가지고 놀고 싶은 유혹을 느낄 만큼 오묘한 빛깔을 갖춘 작은 콩 알 만 한 자갈로 이루어진 해변임을 알고는 신기해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서는 눈치 없이 한번 쥐어보려고 허리를 굽히기라도 하면 “콩 돌을 가져가시면 자연보호법 ‘몇 조?’ 위반으로 처벌받습니다. 운운” 바로 점잖은 경고 방송이 귓전을 때린다. 감시원이 멀리서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작은 돌들의 부드러움에 전신을 맡겨보고 싶은 본능적인 충동에 양말을 벗고 맨발이 되는 것은 일순간이다. 세상 어디에서 이처럼 조화롭고 감미롭고 신비한 감촉에 전신 떨림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인가. 파도는 끊임없이 밀려들어 오묘한 자갈 소리를 풀어내어 귀를 간지르고, 부드러운 발바닥 감촉은 쉽게 여기를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이곳은 어느 정도 숲이 감싸고 있어 제법 관광지로서의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갖춘 느낌을 받았다. 해변 길이 2킬로미터, 폭은 60-70미터는 족히 되어 보였다.
연화리 무궁화; 천연기념물 521호의 6.3미터 높이의 오래된 무궁화나무이다. 우리나라 재래 원형 무궁화로 보고 있다. 이 무궁화를 심었을 것으로 보는 장로회 중화교회가 1896년에 세워졌다니 교회와 연륜을 같이한다. 중화교회 백주년 기념관은 교회역사를 고스란히 정리 보존하고 있었다. 교인들이라면 반드시 찾는 명소가 되어있다.
두무진의 석양 풍경
두무진 석양 체험; 한자로 두무진(頭武津)으로 쓰는데, 글자 그대로 옹기종기 앉은 바위모양이 흡사 무장들 회의 하는 형용이어서 그런 이름 갖게 되었다는 전설이다. 워낙 서해의 해금강이라고 불릴 정도로 이름난 곳이어서 낮에 유람선으로 30여분 해변을 돌며 코끼리 바위, 형제 바위 등 기암괴석을 둘러보는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이날따라 태풍여파로 파도가 심해 그 경치의 진수를 느끼기엔 아쉬움이 있었다. 저녁 석양 무렵 두무진 직접 답사는 그래서 값진 것이었다. 하루 동안 백령도 일원을 돌고 마지막 답사지가 두무진이었다. 해변을 끼고 2,30여분을 가면 이 바위들이 집중되어 있다. 가파른 계곡 길을 따라 해변까지 내려가야 더 실감할 수 있었으나 우리는 대부분 내려다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발길을 돌렸다.
석양의 명소여서인지 관람객이 이 시간대에 집중되어 좁은 길에 서로 비껴 다니기도 벅찼다. 아무튼 석양에 비친 이곳 풍광은 ‘자연의 비경’이라는 표현 그대로의 경관의 백미를 선사한다. 우리는 여기서 이곳 별미라는 볼락회를 저녁으로 입맛을 내고 진목으로 돌아와 마지막 밤을 지냈다.
3.
다음날 아침 여덟시 <씨 호프> 편으로 우리는 대청도로 향했다. 여기는 우선 저 사하라나 고비사막을 가야 만날 수 있다는, 사막 분위기를 체험 할 수 있는 대청도 사막 현장이 기대를 갖게 하고 있었다. 대청도는 인구 1,300여명에 730여 세대가(소청도 포함) 살고 있다.
백령도는 농업이 주업인데 비해 대청도는 어업이 주업이라는 안내원의 설명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곳의 특산물 시장을 찾았을 때 규모화 된 곳이 없어 아쉬웠다. 안내서에는 돌미역, 꽃게 등을 들먹이고 있으나 막상 찾으니 취급하는 곳이 없었다. 입출항 항구인 선진 선착장에 전시장 같은 특산물 취급점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대청도는 황해도 장연과는 약 19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대청도의 모래사막
대청도의 명소는 농여, 옥죽, 모래올 등 경관이 뛰어나고 환경이 좋은 해변이었다. 특히 옥죽 해변의 모래가 서풍을 타고 오랜 동안 쌓여 사막이 된 옥죽 사막은 소위 대청도의 사하라 사막으로 불리는 곳으로 독특하면서도 이색적인 관광 명소라는 인상을 받았다.
원래는 옥죽 해변에서 해발 200여 미터의 뒷산(산 이름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고 안내서에도 산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음)까지 사막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1990년 무렵부터 이곳의 유력인사들이 소나무를 심는 등 식목에 힘쓴 결과 거짓말처럼 사막이 사라져, 이제 남은 사막은 대략 1만 여 평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모래가 축적된 형태나 모래의 형상이 사막모래 그대로여서, 이곳 사람들은 대청도 사하라 사막이라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곳의 옛날 사막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때 그대로 두는 것이 관광지로서 더 좋은데, 축소시킨 것이 도리어 어색하고 환경을 이상하게 변형시켜 안 좋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다고도 한다.
우리는 푹푹 빠져 걷기가 어려운 사막체험을 하는 호사를 누린다. 다만 사막이 끝나는 정상부근에 철조망이 보이고, 지뢰 경고문이 붙어있는 것은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이곳의 긴박한 상황을 드러내는 것이어서 마음이 무거웠다. 하루 동안 대청도 일원을 둘러보는 것도 시간에 쫓기기는 마찬가지다. 알려진 대로 농여, 모래올 등 해변 답사는 이곳 해변들이 말 그대로 얼마나 ‘천혜의 축복받은 해변’인지를 알려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현지인의 말은, 여름 한철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고는 하나, 불안한 적지를 마주한 해안에, 찾아든다고 얼마나 찾으랴 하는 생각이 들어 먹먹함을 어쩌지 못한다. 만약 평화시대라면 저 동남아로 떠나는 피서객의 상당수는 이곳을 찾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한층 더 안타깝고 아쉬운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옥죽과 농여 해변 중간에 위치한 팬션 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이곳의 팬션 촌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편리한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깨끗하였다.
나는 어둑한 새벽에 습관대로 산책을 할까 하여 혼자 팬션을 벗어나 한참을 걸었다. 그런데 한순간 난데없이 불안감이 엄습하여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그리하여 황급히 숙소로 돌아왔다. 숲속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던 간첩이나 혹은 유사한 괴한이 슬그머니 다가와 목덜미라도 잡을 것 압박감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이다.
백령도나 대청도나 어디든 해변 가까운 곳에는 철조망이 있거나 그런 경계망이 있는 것을 흔히 보았다. 그만큼 위협을 안고 사는 지역이라는 표시인 것이다.
이 곳 사람들은 어느 정도 달관한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나 마음 속 저변에는 말 할 수 없는 불안을 안고 견디고 있을 것이다. 대청도에도 요소마다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우리는 3박 4일 동안 통일을 염원하는 백령도와 대청도 사람들의 삶의 현장을 살펴보며, 이들이 어려운 여건가운데서도 얼마나 절실하게 평화를 지켜가는 지를 확인 할 수 있었다.
이번 여행으로,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하고, 어떻게 하든 우리는 통일을 이루어 어떤 한 지역이라도 불안하지 않고 평화가 깃든 살기 좋은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다짐을 하며 귀로에 올랐다.
<창원시문화상수상자를 만나다(3)>
첫댓글 자유를 떠나 자유를 찾는 섬
38선을 지키려 홀로 떠난 전장터에서
아직도 총성을 머금고 서해 한가운데 떠 있는 외로운 섬
지척의 뭍을 뒤로 한채 몇백리 바닷길을 건너
이국처럼 찾는 반자유
그 순박한 자연의 섬을 찾아 아픔과 여망을 띄우는 편지 잘 감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