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교회가 빛을 따라서 생활하지 않을 때 오는 장애들
갈라디아서 2:11-14; 사도행전 11:1-18
사도 베드로는 자신을 비난하는 할례당들에게 욥바에서부터 있었던 일을 차례로 설명한 결과 유대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서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18절). 그러나 이러한 유대주의적 사고를 벗어버리지 못한 일이 이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약 10여 년이 지날 때까지도 여전히 있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 안에서도 이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복음 전파와 하나님의 나라가 행진해 나가는 데 있어서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 베드로를 책망한 행위
여러분, 갈라디아서의 저자인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11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여기서 말하는 “게바”는 사도 베드로의 다른 이름입니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그랬습니다. 따라서 이 일은 안디옥 교회가 세워진 이후에 된 일로써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한 훨씬 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처럼 역사(歷史)가 훨씬 더 진행되어서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졌고, 사도 베드로가 안디옥에 내려갔을 때 사도 바울이 베드로 사도를 책망할 일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조용히 다른 데로 가서 책망한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있는 데서 공개적으로 책망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 베드로를 책망한 이유
사도 바울이 사도 베드로를 책망한 이유가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2:12에 있습니다.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먼저, 여기 보시면 예수님의 동생 야보고 장로가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로 있을 때 예루살렘 교회 유대인 그리스도인 몇 사람이 안디옥에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으로 있다가 구원을 받은 안디옥 교회 성도들과 함께 식사하다가 예루살렘 교회 성도 몇 사람이 오자 그들을 두려워하여 슬그머니 그 자리를 떠난 일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베드로 사도를 책망한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안디옥 교회의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며 친교를 나누고 있었을 때 야고보 장로에게서 온 유대인 그리스도인 몇 사람이 오니까 할례자가 할례도 받지 않은 이방인 신자들과 한 식탁에서 음식을 먹으며 교제한다고 책망할 것 같으니까 안 먹은 체하고 슬그머니 그 자리를 피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목격한 사도 바울은 그것을 그냥 용납하고 지나가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였고 사람들이 보는 데서 대(大) 사도를 책망한 것입니다. 공개적으로 책망하기로 하고 책망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모습은 과히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잘못한 형제를 권징할 때 말씀하고 있는 성경적인 방법도 아니고 원수에 대한 태도와 관련된 주님의 가르침에 따르더라도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주님의 가르침을 모르고 있었는가?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大) 사도인 바울이 권징과 원수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을 모르고 있었겠습니까? 다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베드로 사도의 외식적인 행위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난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의 인격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과 ‘베드로 사도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옳지 잘 되었다고 하면서 그런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기로는 사도 바울은 주님을 닮은 사람으로서 매우 인격적인 사람이고 열등감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베드로 사도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것은 사도 베드로의 행동이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의 행진과 관련하여 매우 엄중한 일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행동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구현체인 신약의 교회가 행진해 나가는 데 있어서, 즉 사도 베드로의 행위가 큰 장애가 되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이 사실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책망할 필요를 느낀 것입니다.
아마 사도 바울은 베드로 사도에게 ‘지금 복음의 문이 열려서 이방 세계에까지 전해지고 있고,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어서 유대인과 하나가 되는 시대가 활짝 열렸으며 옛 언약 시대의 할례와 율법이 어떻게 복음 안에서 성취되었는가를 잘 알고 있으면서 순간 할례당이라고 하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비난할 것을 두려워서 그 자리를 피했느냐?’라고 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책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예루살렘에서 온 할례자들이 전한 복음, 즉 이방인으로서 구원을 받으려면 복음을 믿을 뿐만 아니라 할례와 율법을 행하여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 것에 대하여 그런 복음은 가짜이며, 다른 복음으로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그런 복음을 전한다고 할지라도 모두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고 아주 단호하게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또 갈라디아서 2:14 말씀, 즉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라는 말씀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방금 읽은 말씀에서 말하는 “그들은” 누구누구를 가리킵니까? 여러분, 오늘 본문 13절을 보시면, 사도 베드로만 할례와 관련하여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 교회에 파송한 사도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훌륭한 믿음을 가진(행 13:43 참조) 하나님의 신실한 일꾼인 바나바까지도 유혹을 받아서 할례와 관련하여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것입니다. 바나바도 사도 베드로처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식사하지 않은 것처럼 슬그머니 그 자리를 피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이런 행위는 복음을 거스르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지는 일을 가로막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개적으로 책망한 것이지, 사도 바울의 인격에 문제가 있고, 사도 베드로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꼬투리 하나를 잡아서 잘 되었다고 하면서 사도 베드로를 책망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 플러스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문제점
여러분, 예루살렘 교회를 대표하고 있는 야고보 장로에게서 온 할례 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하여 전한 복음은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만 믿는 믿음으로는 부족하고, 믿음과 더불어 율법을 따라서 할례를 받아야 하고 율법을 따라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즉 그리스도교로 개종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의 오심과 사역을 부인하는 일이 된다
그러면 할례도 받고 율법을 그대로 행하여야 한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그리스도의 오심과 사역을 부인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할례와 율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율법이 완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율법의 마침이시며 율법의 완성자이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과거에 행했던 그것을 지금 또 행하여야 한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성취한 일을 부인하는 일이 됩니다. 그것에 관한 결과는 그리스도의 오심과 사역을 부인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입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사실에 대한 부인은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공효(功效)를 믿지 않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그런 복음은 다른 복음이라는 것이 바울 사도의 논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저주가 있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하면서 할례주의자들은 지금까지도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잘못 전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 ‘그것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하늘에서 온 천사가 그렇게 전한다고 할지라도 모두 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갈 1:6-9) 이렇게 단호하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외식이 복음을 거스르는 일이 되는 이유
그러면 베드로 사도의 이런 외식하는 행동이 왜 복음을 거스르는 일이 되는 것입니까? 비록 사도 베드로가 할례주의자들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런 행동은 할례당들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일이 되기 때문에 복음을 거스르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도 베드로의 행동을 보고, 할례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서 정당하다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사도 베드로의 외식적인 행동은 복음을 거스르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베드로 사도를 책망한 것입니다. 단순히 사도 베드로가 할례주의자들과 맞닥뜨리는 것이 싫어서 그렇게 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에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어떤 것입니까? 복음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고, 사도 베드로가 초대 교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와 다른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력 등을 놓고 볼 때는 파급되는 악한 영향이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베드로 사도를 사람들이 보는 데서 책망을 한 것이지 인격적인 결함이나 열등감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사람들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갈 2:12)은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 장로가 보낸 사람들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성경적 근거는 없습니다.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라고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야보고 장로가 직접 보냈다는 근거를 찾을 수 없습니다. 야고보 장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 교회에 야고보 장로가 있었는데 거기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왔다는 의미이고,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한 할례당들이 자기들의 가르침 혹은 주장이 옳다는 것을 더 믿게 하려고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인 야보고 장로가 자신들을 파송했다고 함으로써 자신들의 가르침에 권위를 실으려고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분, 초대 교회는 혹은 유대에 있는 교회들의 회원들은 거의 다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난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과 유대에 있는 교회들 안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할례가 어떻게 완성되었는가를 아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복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할례를 받아야 하고 율법을 행하여야 구원이 완성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후자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할례당 혹은 할례주의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 당시에 하나의 큰 세력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야고보 장로가 활동하고 있는 할례당들 가운데 몇 사람이 안디옥에 온 것입니다. 따라서 야고보 장로가 보냈다고 말할 수도 없고, 야고보의 사상과 신앙이 이 할례주의자들과 같다고 결론을 내릴 이유도 없습니다. 다만 할례주의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안디옥까지 온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구원관에 있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사도 바울과 같은 사상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헬례주의자들의 구원관, 즉 믿음 플러스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상을 알고 있으니까 그 사람들을 두려워해서 다른 곳으로 피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도 베드로의 비겁하고 연약한 모습을 보게 되고 다른 하나는 그만큼 이 당시에 할례주의자들이 하나의 큰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장성해 가는 일에 힘쓰지 않을 때 일어나는 일
우리는 초기 예루살렘 교회 내에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신앙의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좀 달리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초대 교회의 이러한 상태를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이해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약 2천 년 동안 유일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라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보내어 주셨으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이 복음을 한순간에 다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의 관계가 일시에 다 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계시가 계시의 영이신 성령님을 통하여 계속해서 충만히 비취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의 생각을 버리지 않고 고집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계시(啓示)하신 진리 위에 서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 복음의 빛을 온전히 받지 않고 자꾸만 복음의 빛에서 멀어져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사랑한다고 고백을 하고 살면서도 여전히 옛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자기 고집 가운데 있으면서 다시 비취시는 복음의 빛을 받지 않고 복음의 생활에서 자꾸 멀어져 간다면, 복음적인 생각에서 멀어져 가면 자꾸만 그 사람의 형편이 어두워지고 거칠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복음의 빛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진행을 보고 자기의 옛 생각을 다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진행에 자신을 다 드려서 나가지 못함으로 이 할례자들의 생각은 교회의 행진에 큰 장애를 일으켰습니다. 우리가 비록 연약할지라도 그 연약함을 계속해서 가져갈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말씀과 더불어서 깨닫게 하여 주시는 것에 자신을 온전히 맡겨서 자기의 잘못을 고쳐 나가고, 그렇게 해야 더 높은 믿음의 수준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여전히 옛것만 붙들고 있다든지, 아니면 그 반대로 불행하게도 과거로만 나가려고 한다면, 과거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전부라고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교회의 행보에 유익이 아니라 해를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혹시 자신의 믿음은 지킬 수 있는지는 몰라도 교회 전체로 하려고 하시는 일에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오히려 장래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령님께서 구원하여 주시고 복음의 빛을 주시면 계속해서 복음의 빛을 따라서 생각하고, 잘못된 옛 생각이 있으면 고쳐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복음이 빛을 계속해서 비춰주고 있어도 그 빛에 따라서 생활하지 않고 자꾸 멀어져 가면, 결국에는 그 사람의 형편이 어두워지고 거친 사람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본인들의 어둠 정도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의 진행에 큰 장애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서 말씀을 드렸듯이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 할례자들에게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것이라고 단호하게 책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잘못된 사상이 하나님 나라의 진행에 큰 장애를 가져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초대 교회가 세워져 상당한 세월을 흘러왔음에도 여전히 이러한 할례자들의 생각이 복음으로 변하지 않고 있어서 교회의 행진을 가로막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계시에 대한 바른 이해가 부족할 때 나타나는 장애를 여기에서 보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마다 그 수준이 있어서 계시를 깨달아 가는 일에, 즉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가는 일에 격차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말씀을 깨달아 가는 일이 저조하면 교회의 행진에 장애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 회원들 각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분량에 있어서 다 다르고 그 수준 역시 다르므로 사람마다 격차가 생길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깨닫기 위하여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는 일이라든지, 말씀을 공부하는 일에 게으름을 피운다든지 하는 것은 개인의 행보뿐만 아니라 교회의 행보에서도 큰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문제가 처음에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지만, 마치 마라톤 선수가 출발 선상에서 출발 신호에 따라 출발할 때는 모든 선수 간에 격차가 없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얼마나 열심히 훈련했느냐 하는 것과 관련하여 훈련한 만큼의 그 격차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분기점이 있습니다. 그때부터는 뒷사람이 앞 사람을 따라잡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교회의 문제 전면(前面)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교회는 큰 문제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성령님께서 복음의 빛을 비춰주시면, 옛 생각과 옛 생활과 옛 전통에 대한 고집을 다 버리고, 그 복음의 빛을 따라서 자신을 드리고 나가야 거룩한 삶을 살아가고, 교회도 그만큼 잘 이루게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증시(證示)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디도서 1:10을 보시면, “불순종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할례파 가운데 특히 그러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할례파’는 ‘할례자들’이라고 번역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들을 그리스도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들이고, 헛된 말을 하고 속이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앞에서 말씀을 드린 대로 ‘할례를 받아야 하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바리새인들의 교훈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다 씻어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하여 살아가야 하는데, 그냥 과거 유대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던 주장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의 은혜를 충분히 받지 못하고 그런 관계로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고 속이는 그런 자리에 이르게 되어 타락해 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힘을 합해서 무슨 일을 한다고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보다 가리는 일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새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이 거듭남을 중생(重生)이라고도 합니다. 또 이 중생을 새로 태어났다(new birth)고도 합니다. 그런데 새 생명의 특성은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이 생명을 가진 아이는 자연스럽게 자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때를 따라서 먹어야 할 일용할 양식, 즉 모유나 우유를 먹고, 이유식을 먹고, 밥을 먹고 하면 자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자라지 못한다면 부모들에게는 큰 근심거리가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여 주시고,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설교단을 통하여 주일마다 시간마다 일용할 영의 양식을 공급해 주시고 여러 수단을 통하여 영의 양식을 공급해 주시는 데도 그 말씀을 받아먹고 자라가는 일을 게을리한다면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근심하시고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용할 양식을 제공할 때 먹지 않는다든지 아니면 정신적인 장애가 있다면 나이를 먹을수록 덩치는 커지는데 생각과 행동은 그 나이에 걸맞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나이가 어리고 덩치가 적은 아이들과 같은 생각과 행동을 하므로 자기보다 나이가 적고 덩치가 적은 아이들에게 힘으로 몰아붙이는 일이 있게 됩니다. 그때 이 덩치 큰 아이보다 나이가 적은 어린아이들이 피해를 받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지 못하는 이런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살아온 시간이 지났으면 도의 초보를 버리고 장성함으로 나아가야 하고 선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여러분, 올 한 해 동안 성경을 일독 이상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묵상하면서 깊이 생각하기 전에 먼저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깨닫게 해 주신 만큼 실천하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영적으로 훨씬 더 자라있고 내 마음이 하나님의 나라에 향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렇게 해서 자라게 되고,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행하고 살아가야 더 큰 은혜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멘.
(2014. 1. 29 수요 예배)
(2023. 1. 15 주일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