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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제3차 아시아전쟁, 조선의 독립, 만주 공화국의 성립, 일본 제국의 해체라는 역사적 사건들도 어언 60년 전의 일이 되었다. 19세기 중반 이래 동아시아의 민중들은 서세동점, 일본 제국주의, 민족상잔, 내전, 이념전쟁 등의 아픔을 겪어야 했으며, 이 모든 것을 넘어 공영공존과 화해의 길을 완성하려면 앞으로도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2006년 일본, 조선, 만주, 중국, 대만의 5개국은 ‘5개국 합동 역사교과서 제정’이라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는 우리의 후손들에게 더 이상 반목과 범죄의 역사를 되풀이하게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의 굳은 표상이며, 각국 지도자들의 용감한 결단이었다.
이 프로젝트 참여를 요청받았을 때, 나는 개인적으로 매우 큰 부담을 느꼈다. 일개 작가이자 현대사 평론을 부업으로 하는 내가 과연 여러 민감하고도 무거운 사건들을 올바르게 다룰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러나 나의 멘토이자 정신적 지주이신 오에 겐자부로 선생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의 격려와 도움으로 어려운 작업을 마칠 수 있었으며, 다행히도 역사 교과서가 편찬되어 2023년 신학기부터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부족한 작가의 부족한 글이 독자들의 지식을 채우며 궁금증을 해소해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2022년 7월 9일
삿포로에서, 후지와라 히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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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들은 후지와라 히사시 저, “조선 현대사 60년: 어둠에서 밝은 빛으로”의 몇몇 챕터들을 발췌한 것이며, 모든 저작권은 후지와라 작가 및 출판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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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 당파, 협의의 정치, 그리고 중재자
흔히 왕조 시기 조선의 정치를 일컬어 ‘사색당파의 붕당정치’라고들 부르곤 한다. 공교롭게도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요정당 역시 (1990년대부터의 지형변화 이전까지) 넷이었으며, 이들은 “경쟁하되 적대하지 않는다”는 대전제 하에 지금까지 공존을 이어가고 있다. 독일과 더불어 조선의 정치는 ‘협의와 숙의의 정치’로 불리는데, 이는 아시아 지역의 다른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매우 독특한 형태를 띄고 있다. 내각 인선이 지연될 경우 각 정당은 조각협정에 따라 임시거국내각을 꾸리며, 거국내각 시기의 행정방침 역시 매우 체계적으로 기획되어 있다.
많은 정치학자들은 조선의 역사적 전통으로부터 그 기원을 찾지만, 보다 하위 레벨에서 - 즉 ‘인물’ - 그 원인을 찾는 시각 역시 두드러진다. 통상적으로 조선인민공화국의 건국 초기 정치가를 논할 때는 주로 이홍립, 전진한, 이행규, 이철수 등의 이름들이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배후의 설계자로 불리는 영강 전 대통령은 거의 언급되지 않으며, 언급되더라도 시대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 짧게 서술될 뿐이다. 그러나 초기 8년의 거국내각 시기는 조선의 향후 정치를 근본적으로 결정한 시기이며, 해당 거국내각이 무려 8년간이나 지속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영의 ‘조용한 리더십’에서 발원하였다.
영은 사업가 출신으로, 조선 독립전쟁 국면에서부터 각 세력의 조정자이자 후원자로 활동하였다. ‘원수’ 이홍립마저 영강의 영향력을 언제나 인정했으며, 이홍립의 가장 큰 라이벌로 여겨지던 이행규 조선공산당 위원장 역시 소수 몇 사례를 제외하고는 영강의 중재안을 큰 반발 없이 받아들였다. 대표적인 예시는 1969년의 국가보안법 파동이었다.
거국내각을 이끌던 전진한 국무장관이 건강상 이유로 사임하고 (그보다 리더십이 부족하다고 평가받던) 예춘호가 거국내각의 새 지도자로 선임되었을 때, 공화민주당의 백남억 의원이 발의한 국가보안법이 뜨거운 감자로 자리잡았다. 심지어 그로부터 몇 달 전 서북청년단원 7인이 광복절 기념 행사에 난입해 자유당 및 공화민주당 의원들에게 상해를 입힌 사건이 발생한 터라 공산권에 대한 여론은 극히 악화되어 있었다. 조공과 자유당은 이 안건에 반대, 사민당은 자유표결을 선언했고 공민당은 안건에 찬성하며 “이 안건이 부결된다면 거국내각에서 이탈할 것”을 천명했다. 당시 재무장관 겸 차선임 국무위원을 맡고 있던 영은 이홍립과 접촉, 찬양고무죄 조항의 삭제를 권유하는 동시에 조공 측에 수정안 발의를 요청했다. 수정안은 ‘민주질서보호법’이라는 이름으로 발의되었는데, 여러 측면에서 원안보다 온건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배격의 대상 역시 “공산전체주의와 식민제국주의”에서 “전체주의와 불관용, 식민주의”로 바뀌었다.
더욱 강한 통제를 밀어붙이는 것이 정치적 입지에 그다지 도움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공화민주당은 수정안에 찬성입장을 내비쳤으며, 법안은 그렇게 통과되었다. (국토개발부 장관 이철수가 무려 13시간 30분동안 필리버스터를 이어가는 사건이 있긴 했다.) 법안 통과 과정에서도 영은 공화-조공의 대타협을 강조했을 뿐 자신의 위치를 과시하지 않았고, 이는 1970년 수산협동조합 사건, 1972년 원산 항구노동자 총파업 국면에서 좌우익 4당의 거국적 타협을 이끌어내는 밑거름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세 발의 총성
1975년 4월 19일 혁명기념일(광복절) 행사는 성대한 규모로 치러졌다. 1970년부터 수년간 이어진 미국 연준의 고금리 긴축재정정책 및 중동 정세 불안으로 인한 고유가라는 이른바 ‘양고불황’이 마침내 끝나고 수출경기가 활성화되자 정부는 다시금 공적 자금을 투입해 경기 살리기에 나섰고, 혁명기념일 행사의 규모 역시 늘리도록 결정했다. 그러나 조선계 일본인 난조 세이코(문세광)이 발사한 총탄 세 발에 조선공산당 제2대 총비서 이철수가 쓰러지자 식장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철수는 누구인가? 그는 조선의 오토 슈코르체니라고 불리던 인물로 독립 이후에는 사회주의 정치인의 길을 걸었던 인물이다. 조공 내 노농파의 거두였으며, 전태일 등 당의 미래 지도자들을 발굴하고 양성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상대가 누구든 책상을 쿵쿵 두드리며 대화의 기세를 잡는 이른바 ‘알파 메일 테크닉’은 미국의 협상대표들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암살범, 난조 세이코는 극우 성향의 청년 결사인 ‘욱일회의’의 조직원으로, 본래 이홍립 국무장관의 암살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의전차량이 엔진 고장으로 국무장관 관저와 인민회의의사당 사이 길에서 약 25분 정도를 허비하면서, 그는 사건이 벌어진 뒤에야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홍립이 식장에 없는 것을 발견한 난조는 자신의 계획이 탄로났다고 생각해 자수하려 했지만(조선경찰본부 보고서, 1975 참고) 지근거리에 이철수가 접근하는 것을 확인하고 그대로 리볼버를 꺼내 세 발의 총탄을 발사했다. 이철수는 세 발의 탄환을 흉부와 복부에 맞고도 완력으로 난조를 제압했으나, 곧바로 쓰러져 연희대학교 병원으로 옮겨지던 중 사망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조선-일본 간 관계에 매우 큰 파장을 미쳤다. 미국 닉슨 행정부의 강력한 주문으로 진행되던 조-일 국교정상화 협의가 파행으로 치달았고, 정치적 입장차이에도 불구하고 이철수와 ‘특수한 동지관계’를 형성하던 이홍립 국무장관은 “동경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유명한 연설을 퍼부으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또한 ‘평화선’을 선포하여 이를 침범한 일본 어선 및 상선을 무차별 나포, 일본 해군과 여러 차례 교전을 펼치기도 했다. 이때 중단된 조일교섭은 이른바 일본의 ‘대투쟁시기’가 종결된 1994년까지 약 20년간 다시 열리지않았다.
이홍립이 이철수와 얼마나 특별한 관계를 형성했는 지는 알려져있지 않다. 이철수는 조선 공화국군 소속이 아니었고, 무장투쟁의 결 역시 이홍립과는 달랐으며, 결정적으로 레닌주의와 시장자유주의라는 상반되는 정치적 행보를 보였기에 그 둘은 통상 정적으로 분류되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철수 암살 이후 이홍립이 8개월 가량이나 공식석상에 검은 정장에 검은 타이 차림으로 나타났다는 점, 그리고 행정부 국무회의록에 여러 차례 기록된 “국무장관이 말없이 맹렬히 궐련을 피웠다”는 문구이다. (하략)
조선의 가장 긴 하루
1982년 12월 12일은 여느 날과 다름없는 하루가 될 것 같았다. 날씨는 춥고 건조했으며, 하늘은 보통의 겨울날처럼 흐리고 우중충했다. 다만, 하원 총선거의 개표가 완료된 지 꼭 이틀이 되는 날이었다. 12월 9일 총선에서 연립여당인 공화민주당과 자유당은 참패를 면치 못했다. 하심조 아라비아 붕괴 및 바트당 ‘아랍 연합 공화국’의 출범으로 유가가 폭등하는 이른바 ‘제2차 오일쇼크’가 전세계를 타격한 여파였다. ‘리노믹스(Lee-nomics)’라고 회자되는 특유의 경제정책 - 이는 80년대 신자유주의 기조의 프로토타입으로 여겨진다 - 을 펼치며 ‘강한 국가’를 강조했던, 독립전쟁의 영웅이자 ‘스트롱맨’이라는 위치를 십분 활용한 카리스마로 10년동안이나 집권했던 이홍립 행정부 역시 건국 이래 초유의 경제위기에서 자유로울 수은 없었던 것이다.
선거 결과대로라면 사전에 공개 합의한대로 이행규 조공 위원장을 국무장관으로 하는 조공-사민 적색연정이 출범할 예정이었다. 12월 12일 오전 9시 경, 이행규와 이홍립은 영강 대통령을 예방하여 행정부 인수인계에 관한 사항을 보고하고 행정부 조각을 협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용산에 주둔하던 수도방위사령부 예하 제7공수 및 제3급파여단 병력이 이촌동 대통령 관저를 습격해 조공 및 사민당 간부들을 폭행하고 구금함으로써 ‘조선의 가장 긴 하루’가 시작되었다.
쿠데타를 주도한 것은 수도방위사령관 노태우 중장을 필두로 한 육군 내 과격파 장교들이었다. 자신의 군 인맥을 신뢰하여 전역한 장교들을 곧잘 정계에 입문시키던 이홍립의 스탠스가 이들에게 잘못된 시그널을 보낸 것이다. M-16 소총을 들고 대통령 집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노태우, 박희도, 장세동, 허화평은 영 대통령과 이 위원장에게 총구를 겨누고는 이홍립에게 ‘결단’을 촉구했다. 이 과정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입회했던 대통령실 비서장 성수영에 따르면 그들은 “이홍립이 곧장 행동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대통령과 위원장을 문답무용으로 살해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홍립의 행동은 빨랐다. 우선 대통령과 위원장을 집무실 창고에 구치토록 하여 군인들의 방심을 유도한 뒤, 반격을 시작했다. (이홍립 본인이 직접 권총으로 응전해 4명 가량을 제압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이는 여러 차례 교차검증되었다.) 약 3분간의 총격전으로 대통령궁에 진입한 쿠데타 병력은 전멸, 수뇌부를 참수시킬 수 있었다. 곧바로 두 사람을 풀어준 이홍립은 이행규에게 “신임 국무장관으로서 결단을 발휘할 것”을 요청했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오전 11시까지 각지에 연락을 취해 상황을 파악한 이홍립은 남양주에 주둔하던 장태완 소장의 수도기계화사단을 동원해 의사당, 방송국, 3군본부, 정부청사 등을 장악한 쿠데타군을 역포위할 수 있었다. 그는 이행규 및 중대급 병력과 함께 KBS 방송국으로 진입, 인민들에게 "절대로 쿠데타군의 음모에 동요하지 말 것"을 호소했다. 패색이 짙어진 쿠데타군은 즉각 항복했고, 그렇게 '조선의 가장 길었던 하루'는 그 끝을 맞이했다.
이홍립 행정부는 1970년대 조선의 고도성장기를 이끌고 '선진국 조선'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많은 호평을 받았으나, 해석선언을 이용한 헌법 우회 - 1974년의 이익균점권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 및 군부와의 유착관계 형성 등으로 인해 비판 역시 많이 받은 정부였다. 그러나 자신의 정치적 생명과 명성보다 국가의 미래를 망설임없이 앞세웠던 그의 마지막 결정은 이홍립 자신을 조선에서 가장 존경받는 근현대 정치인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상원은 사실상 만장일치로 이홍립을 대통령직에 선임했으며, 그는 일선에서 물러나 6년의 임기동안 이행규 행정부를 후방에서 아낌없이 지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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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E.샤츠슈나이더 그럼... 이소성의 3월 발언은, 그 연구가 결실을 맺을때쯤, 미국이 압박을 넣었고, 그 다음의 발언인가보네요 ㅋㅋ... 그 발언 이후로 저 협상까지 해서 확정 지어버린거고? 기조는 ncnd라지만...
+ ... 근데 그럼... 이 세계는 npt가 없나보네요? ㅋㅋ... 소확행 때문에 미국이 협상 거부했나... 아님 밸런스가 안맞아 그러나...
@dear0904 NPT는 있습니다. 2022년 기준 핵보유국, 핵무장국의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핵보유국(공인)
- 미합중국
- 소비에트 주권공화국 연합
- 그레이트 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
- 프랑스 공화국
2. 핵무장국(미공인, NPT 미가입)
- 중화민주공화국
- 이란 제국
- 아랍연합공화국
3. 핵동결국(특별협정국, NPT 미가입 및 특별협정 가입)
- 조선인민공화국
- 아르헨티나 공화국
4. 핵폐기국(NPT 가입)
- 일본인민공화국
- 남아프리카공화국
@E.E.샤츠슈나이더 이스라엘이 없네요...? 멸망했나?
@렌지파일 인도랑 파키스탄도 없습니다 ㅋㅋ
@E.E.샤츠슈나이더 아 그러네요 ㅋㅋㅋㅋ
근데 이스라엘은 그 영토에, 하심아라비아가 친소루트타면.. 살아남기 힘들것같은데..
@렌지파일 여기선 이스라엘이 친소고 하심이 친미 아니었어요?
@돈이 곧 진리 UAR이 하심 아라비아 붕괴로 생겼다네요
@E.E.샤츠슈나이더 빨리 PTBT도 해야...
@통장 못할거 같은건 바라지 말고 ppap나 춥시다(?)
@dear0904 파인애플애플? 무엇이지? 핵융합을 말하는 것인가?(..)
@통장 그렇습니다 사실 ppap는 플루토늄과 알파입자의 약자였던것입니다 여러분!(?)
@dear0904 PLUTONIUM PLUS ALPHA PARTICLE ㄷㄷ
@통장 Plus Ultra! (?)
@E.E.샤츠슈나이더 줄여서 Pu...(?)
@통장 핵무기의 상징인 플루토늄의 pu와 최고의 술잔인 주석 잔의 tin을 합하면 putin이 된다는걸 알고 계십니까(?) 이것은 러시아의 숙명이었습니다(?)
@dear0904
@dear0904 이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