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 동화사️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이다. 493년(소지왕 15) 극달(極達)이 창건하여 유가사(瑜伽寺)라 하였다. 그 뒤 832년(흥덕왕 7) 왕사 심지(心地)가 중창하였는데, 그 때가 겨울철임에도 절 주위에 오동나무꽃이 만발하였으므로 동화사로 고쳐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율사 진표(眞表)로부터 영심(永深)에게 전하였던 불간자(佛簡子)를 심지가 다시 받은 뒤, 이 팔공산에 와서 불간자를 던져 떨어진 곳에 절을 이룩하니 곧 동화사 참당(籤堂) 북쪽의 우물이 있는 곳이라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신라 제41대 흥덕왕의 셋째아들로 태어난 심지는 중악(中岳:팔공산)에서 수도하던 중, 속리산 길상사(吉祥寺)에서 영심이 그의 스승 진표로부터 계법(戒法)을 전해받고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으나, 때가 늦어 당(堂)에 올라가서 참례할 수 없었으므로 땅에 엎드려서 참례하였다. 법회 7일 만에 진눈깨비가 심하게 내렸는데 심지의 둘레 10자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으므로 모두들 신기하게 여겨 당으로 안내하였다.
여기서 그는 열심히 수도하여 영심으로부터 법통을 계승하는 간자를 받았다. 그 뒤 팔공산으로 돌아와 산꼭대기에서 간자를 날려 떨어진 곳에 절을 짓고 간자를 모셔 동화사의 개조(開祖)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극달의 창건연대인 493년은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기 이전의 시기이므로 공인되기 전에 법상종(法相宗)의 성격을 띤 유가사라는 사명(寺名)이 붙여졌을 까닭이 없다는 이유로 심지가 창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도 많다.
창건 뒤 934년 선사 영조(靈照)가 중창하였고, 1190년(명종 20) 지눌(知訥:普照國師)이 중창하였으며, 1298년(충렬왕 24) 국사 홍진(弘眞)이 중건하였다.
조선시대에는 1606년(선조 39) 유정(惟政)이 중창을 하였고, 1677년(숙종 3) 상숭(尙崇)이 중건하였으며, 1732년(영조 8) 관허(冠虛)·운구(雲丘)·낙빈(洛濱)·청월(晴月) 등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들은 대부분 영조 때의 중창시에 세워진 건물로서 대웅전을 비롯하여 연경전(蓮經殿)·천태각(天台閣)·영산전(靈山殿)·봉서루(鳳棲樓)·심검당(尋劍堂)·칠성각·산신각·응향각(凝香閣)·강생원(降生院)·원음각(圓音閣)·천안문(天安門) 등이 있다. 또한 부속암자로는 금당암(金堂庵)·비로암(毘盧庵)·내원암(內院庵)·부도암(浮屠庵)·양진암(養眞庵)·염불암(念佛庵)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대웅전은 1606년 학인(學人)이 건립한 것을 1677년 상언(尙彦)이 중수하고, 1727년 천순·홍재·의회가 중수하였다. 이곳에 모셔놓은 삼존불상은 1728년에 왕준(王峻)이 만들었고, 후불탱화는 1620년(광해군 12)에 의현(義玄)이 그린 것을 1688년에 다시 고친 것이며, 이 밖에도 삼장탱화(三藏幀畵)·제석탱화(帝釋幀畵) 등이 있다. 또한 대웅전 천장의 극락조(極樂鳥)는 일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금당암은 건평 50평으로 공사비 4,900만원을 들여서 1974년 5월에 해체하여 1976년 10월에 준공하였다. 극락전(極樂殿)을 법당으로 삼고 있는 이 암자에는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이 봉안되어 있으며, 이 극락전 앞뜰에는 보물 제248호로 지정된 대구 동화사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이 있다. 두 탑이 모두 고준하고 경쾌한 감을 주며, 옥개석 네 귀에 풍경이 달려 있는 등 예술적 가치가 크다.
동화사사적비문에는 이 석탑이 863년(경문왕 3)에 건립되었으며, 불사리(佛舍利) 7과가 봉안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밖에도 동화사의 지정문화재로는 보물 제244호인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보물 제247호인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보물 제243호인 대구 동화사 마애여래좌상, 보물 제254호인 대구 동화사 당간지주, 보물 제601호인 대구 도학동 승탑,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3호인 팔공산 마애약사여래좌상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동화사 입구에 있는 마애여래좌상은 입구 주차장의 바른쪽에 있는 큰 암벽에 새겨진 불상이다. 이 불상은 상당히 높은 곳에 조각되어 있으며, 머리 위에는 바위가 튀어나와서 불상을 보호하고 있다. 섬세한 수법과 부드러운 감각, 자비로운 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구름무늬의 대좌는 표현이 지극히 사실적이다. 신라 흥덕왕 때 심지가 조각한 것으로 전한다.
또한 비로전의 비로자나불좌상은 통일신라시대에 성행하였던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구비한 불상으로서 이것 역시 심지의 작품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또 이 절에서 동남쪽으로 약 7㎞ 거리의 관봉(冠峰)에는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이 불상은 638년에 원광(圓光)의 수제자인 의현이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조성하였다.
세련된 이목구비와 자비로운 얼굴이 잘 조화를 이룬 격조높은 불상으로서 머리에 커다란 갓을 썼다 하여 갓바위라고도 부른다. 이 불상에 불공을 하고 소원을 빌면 효험이 많다고 하여 참배객들이 언제나 끊이지 않는다. 특히 아들을 낳기 위한 아녀자들의 참배와 병을 낫게 하려는 참배객이 많다. 불상의 전체높이는 4m에 달한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미륵보살이 진표에게 주었고 영심을 거쳐 심지에게 전해졌다는 『패엽경(貝葉經)』이 전해지고 있고, 고려의 예종이 이 『패엽경』을 빌려보다가 일부를 잃어버리자 송나라에서 전해온 부처님 어금니 1개를 대신 보냈다는 불아(佛牙), 당나라에서 만든 요령(搖鈴), 유정이 영남도총섭으로 있을 때 사용하였던 영남도총섭 인장(印章), 그 밖에 유정이 사용하였던 금강저(金剛杵)·소라고동·관수대(灌水臺)·별향로(別香爐)·구룡대(九龍臺) 등이 있다.
이 절은 한때 유정이 영남도총섭으로서 승군(僧軍)을 지휘하였던 곳이며, 서사원(徐思遠)이 격문을 지어 많은 의병들을 모집하여 훈련시키는 등 호국의 본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민족항일기의 31본산 시대에는 55개의 사찰을 거느렸던 대본산이었으나, 현재에는 대구광역시 달성군·청도군·칠곡군·성주군의 4개군의 사암(寺庵)을 관장하고 있다.
절의 주위에는 무심봉(無心峰)의 흰 구름, 제천단(祭天壇)의 소낙비, 적석성(積石城)의 맑은 달, 백리령(白里嶺)의 쌓인 눈, 금병장(金塀莊)의 단풍잎, 부도암의 폭포, 약사봉(藥師峰)의 새벽별, 동화사의 종소리 등 공산팔경(公山八景)이 있으며, 약수암 앞 수숫골과 폭포골 사이에는 구세약수(救世藥水)가 있다.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맑고 찬 이 약수는 간장병에 특효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이곳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팔공산의 전설️
통일신라시대 때 호국정신으로 숭배되는 산 중에 팔공산은 신라의 중심이자 호국불교의 성지로써 중악이라고 하였단다.
동악의 토함산, 서악의 계룡산, 남악의 지리산, 북악의 태백산과 더불어 오악이라 하였단다.
팔공산은 신라시대에는 부악(父岳), 중악(中岳), 또는 공산(公山)이라 했으며, 고려시대에는 ‘공산’이라고만 하다가 조선시대에 들어 지금의 팔공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원래 명산에는 전설도 많듯이 팔공산에도 유래가 많다.
여덟 고을에 걸친 산이라는 설, 원효의 제자 8명이 득도를 했다는 설, 8간지가 보관되어 있었다는 설, 8공신이 전사했다는 설이 있다.
그중에서 고려를 세운 왕건이 견훤과 전투를 벌일 때 왕건을 살리고자 왕건의 옷을 바꿔 입고 장렬히 싸우다 전사한 신숭겸을 포함한 8명의 장수를 기리기 위해 공산을 팔공산(八公山)이라고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고 하며, 높이는 1,193m다. 팔공산맥으로 이루어지는 방가산, 화산, 팔공산, 도덕산 등이 산세가 수려하고 웅장하다.
팔공산 산신의 호칭은 격이 높은 천왕이란다. 북쪽의 태백산과 소백산, 동쪽의 주왕산과 가지산, 서쪽의 속리산과 덕유산, 남쪽의 여항산과 신어산이 각각 호위하고 있는 중심에 팔공산이 솟아 있다.
팔공산의 줄기가 칠곡군, 군위군, 영천시, 경산시, 구미시에까지 뻗어 있으며, 봉황이 날개를 펴듯 좌우에 동봉과 서봉을 거느린 팔공산은 계곡이 아름답고 산봉이 웅장하며 숲이 울창하여 1980년도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동으로 은해사, 남으로 동화사, 서쪽으로 파계사, 북으로 삼존석굴이 있으며, 골짜기마다 크고 작은 암자와 사찰이 무수히 많다. 유명한 굿당도 많다.
야사로 내려오는 지명을 보라. 여덟 명의 장수가 지혜를 모으고 묘책을 세워 퇴로를 열었다는 공산전투장은 지묘동이다. 파군제 삼거리의 신숭겸 장군의 동상 뒤쪽에 있는 자그마한 봉우리는 왕이 피신하여 살았다 하여 왕산이다. 노인들은 다 전쟁터에 동원이 되어 어린 아이들만 마을을 지켰다 하여 불로동이 되었고, 이제 겨우 위험을 피해 얼굴을 폈다는 해안동이 있다. 중천에 떠있는 달이 도주를 도왔다는 반야월, 이제 겨우 살았다고 안심을 했다는 안심이라는 지역도 있다.
팔공산을 오르는 케이블카가 있어 거기까지만 가도 노약자에게는 극락이다.
️동화사 비로암️
《비로암 삼층석탑 ,보물
제247호》
비로암 삼층석탑은 동화사 서쪽 언덕에 자리잡은 비로암의 대적광전 앞뜰에 세워져 있는 3층 석탑으로, 1층 탑신에서 나온 사리호(舍利壺, 사리를 담는 그릇)에 새겨진 명문(銘文)에 ‘통일신라 경문왕 3년(863)에 민애왕의 명복을 빌고자 이 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이 탑이 민애왕(閔哀王,817~839)의 원탑(願塔)임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 탑이 세워질 때 심지(心地) 대사는 동화사에 머물며 전지대덕(專知大德)으로 원탑 건립에 참여하였다. 헌덕왕(809~825)의 아들인 심지는 민애왕 김명(金明)과는 사촌 형제지간이다. 또한 이 탑을 발원한 경문왕(861~874)은 민애왕에게 죽임을 당한 희강왕의 손자로, 분열된 진골 귀족을 화합시키고자 민애왕의 원탑을 이곳에 세웠던 것이다.
탑은 다듬은 긴 돌로 널찍하게 탑 구획을 두르고, 상ㆍ하 2단의 기단 위에 삼층의 탑을 쌓았다. 하층 기단 윗면에 돌출된 굽 모양 괴임대는 대적광전의 비로자나불 중대석받침과 수법에서 유사하다.
기단의 각 층에는 네 면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겼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기 한 돌로 이루어져 있고,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본뜬 조각을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수가 층마다 4단이며, 처마는 곱게 뻗어 나가다가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露盤, 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 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보주(寶珠, 연꽃봉오리 모양의 장식)가 차례로 올려져 있다.
각 기단 위에 괴임을 여러 개 둔다거나, 지붕돌 네 귀퉁이의 들린 정도가 크지 않은 점 등에서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는 단정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 비로암 대적광전》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244호》
동화사 비로암(毘盧庵)의 작은 전각 대적광전에 모셔져 있는 이 석조비로자나불좌상(石造毘盧遮那佛坐像)은 대좌와 광배가 완전히 보존되어 그 가치가 높아 보물 244호로 지정되었다.
민애왕(재위 838∼839)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만든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보물 제247호)과 동시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1.29m의 불상이다.
둥근 얼굴은 풍만하고 눈·코·입이 작아지고 있으며, 미소가 사라지고 단아한 모습이 마치 고요한 참선의 세계에 몰입한 선사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8세기 불상에 비해 어깨는 뚜렷하게 좁아졌으며, 가슴은 평평하고, 하체의 처리도 역시 둔화되었다. 이러한 위축되고 둔화된 표현은 9세기 중엽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불상양식이다.
손모양은 비로자나불이 일반적으로 취하고 있는 모습으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싼 형태이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데, 규칙적으로 얇은 평행의 옷주름선이 있고, 아랫도리에 있는 U자형 무늬가 특이하다. 부처의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배(舟) 모양으로, 가장자리를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으로 표현하였다.
광배의 꼭대기 부분에는 삼존불, 양쪽에는 8구의 작은 부처가 배치되어 있다.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갖추고 있으며 손상이 거의 없는 9세기에 유행하던 비로자나불상의 대표적인 예이다.
️동화사 대웅전️
대웅전(大雄殿)은 보물 1563호로 동화사를 대표하는 당우(堂宇)이다. 장대석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가공하지 않은 나무를 그대로 활용하여 배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 전각이다.
임진왜란 후 1606년 사명대사가 학인(學仁)에게 명하여 중창하게 하고, 1677년 개창하였다. 이후 1725년 을사년의 큰 불로 인해 1727년 천순(天順), 낙빈당 홍제(落賓堂 弘濟), 홍우(弘雨), 의심(義心) 등이 화주가 되어 중수하였다.
대웅전의 문짝은 어칸과 협칸 모두 빗솟을살에 활짝 핀 연꽃과 국화꽃, 금강저를 새겨놓았다. 심지왕사가 절을 지었을 때 겨울임에도 하늘에서 오동꽃이 흩날렸다는 창건 설화는 이 꽃살문을 더욱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
대웅전 안에는 석가여래, 아미타여래, 약사여래의 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1728년 왕준이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웅전 안에는 여러 점의 불화가 걸려 있는데, 삼존상 뒤에 있는 후불탱화는 1620년에 조성되었고, 삼장탱화와 지장탱화는 대웅전이 건립된 무렵인 1728년에 제작되었다.
대웅전을 오르는 계단의 좌우에는 괘불대와 함께 2기의 노주(露柱)가 설치되어 있다. 괘불대는 영산재, 수륙재 등의 야외 법회를 개최할 때 괘불을 걸어 고정시키는 데 사용되는 석조물이다. 석조로 된 괘불대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야외 법회가 자주 있었음을 보여준다.
대웅전의 편액은 일주문에 〈八公山桐華寺鳳凰門〉이라 쓴 기성 쾌선스님의 글씨와 흡사하다. 주련은 영남 서화의 맥을 계승한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1862~1935)가 썼다.
《설법전》
《봉서루 앞 봉황 알》
《봉서루》는 오동나무에만 둥지를 튼다는 봉황을 상징하는 누각이라고 해요.
《 봉서루 계단》
《통일 범종루》
《 봉서루에서 뒤를 바라본 모습》
《대웅전 보물 제1563호》
동화사는 신라시대 때 창건된 이후
오늘날까지 8번 중창되었다고 해요.
지금의 대웅전은1727년(영조3)~1732년
(영조8) 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ㆍ
대웅전에는 석가모니여래, 아미타여래, 약사여래, 삼존불상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 화엄당》
《법화당》
《대웅전에서 바라본 봉서루의 모습》
《화엄당과 봉서루 사이로 보이는범종루》
《 심검당》
《 산신각》
《 조사전》
《 칠성각》
《심지대사나무》
《산신당에서 바라본 대웅전》
《영산전》
《육화당》
《용호문》
《수령 500년 된 보호수,
안익대사나무》
《 당간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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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대폰 밧데리가 없어 촬영을 못하고 다는분들 것을 보쌈 해 왔습니다》
️ 약사여래대불️
약사여래대불(藥師如來大佛)은 칠천만 겨레의 숙원인 남북통일과 세계평화, 인류의 행복을 간절히 염원하며 조성한 팔공총림 동화사의 대표 불상이다. 전체 높이가 33m에 이르러 석조 불상으로는 세계최대의 규모이다. 1990년 10월 26일 착공하여 1992년 11월 27일 점안대법회를 봉행하였다.
팔공산은 신라시대부터 오악(五岳) 가운데 하나인 부악(父岳)으로 추앙받던 민족의 영산(靈山)이자 약사신앙의 중심지로서, 팔공산 곳곳에는 수많은 약사여래상이 모셔져 있다.
약사여래는 보살도를 닦으면서 열두 가지 큰 원(十二大願)을 세워 성취하고, 중생의 고통과 일체 병자가 없는 이상세계를 완성하신 부처님이시며, 그 이상세계는 유리처럼 청정한 동방만월세계(東方滿月世界)이다.
우리 역사 속에는 불력(佛力)으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였던 대규모 불사의 예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통일약사대불의 본원은 우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하루빨리 성취하고 분단의 아픔을 해소하여 민족 대화합을 이루어 내는 데 있다.
약사여래대불 앞에는 국내최대의 삼층석탑(높이 17m, 원석 2천톤) 2기, 석등(높이 7.6m) 2기가 있고, 뒤로는 호법신장과 금강역사가 병풍처럼 조성되어 있다. 앞에는 통일기원대전이 조성되어 있는데,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고 통유리를 통해 약사여래대불을 바라보게 되어 있다. 약사여래대불 지하에는 불교문화관(국제관광선체험관)이 조성되어 있다.
YouTube에서 '◼해운대 반야선원◼제6차 사찰문화 현지답사 3, 팔공산 동화사 ,청파 박종안 법사님 사찰안내' 보기
https://youtu.be/XUY8t4bYl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