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강성 역사적 시조 강여상(姜吕尙)
32대 667년 제나라 강성(姜姓) 열전<7>
제・노 건시지전(齐・鲁 乾时之战)
환공 원년(기원전 685년) 가을, 제나라 군대가 시수(时水) 지류, 경산(经山) 동쪽 환태(桓台) 서북으로 흘러 들어가는 옛날 제수(济水) 건시(乾时)에서 제나라와 노나라가 한판 붙은 전쟁입니다.
제나라 군과 노나라 군은 제나라 수도 임치 서쪽의 간시(乾时)에서 맞닥뜨렸습니다. 제나라 군대가 노나라 군대를 크게 물리쳤습니다. 노 장공은 전차를 버리고 경차를 타고 도망쳤습니다. 그의 마부 진자(秦子)와 차우(车右) 양자(梁子)는 장공의 깃발을 들고 길가에서 제군을 유인하다가 포로로 잡혔습니다.
제나라 대부 포숙아는 군대를 이끌고 노나라 군의 귀로를 차단했습니다. 제나라 환공은 노나라 장공에게 편지를 보내,
“공자 규는 나의 형제로 내 손으로 죽일 수 없으니 노나라가 처리해 주십시오. 소홀과 관중은 저의 원수입니다, 그들은 저에게 넘겨주세요, 저는 그들을 잘게 썰어야 한을 풀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노나라를 계속 포위하겠습니다.”
노나라 사람들은 두려워 산동성 하택시 북쪽 소류집향 생독(笙瀆)에서 공자 규를 죽였습니다. 소홀은 자살하고, 관중은 기꺼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환공이 노나라로 진격하여 관중(管仲)을 죽이려 했습니다. 제나라 환공은 노나라에 관중을 반드시 제나라로 보내라 요구했습니다. 한편 노나라에서는 시백(施伯)이 노나라 장공에게 간언했습니다.
“제나라가 관중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관중을 죽이려 하는 게 아니라 중용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노나라가 화를 입을 것이오니 차라리 관중의 시체를 제나라에 보내는 것이 더 낫습니다.”
포숙아가 환공에게 진언했습니다.
“환공께서는 행운이 따라와 마침내 제후의 자리에 오르셨습니다. 공의 지위는 더 이상 높이게 할 수 없습니다. 제나라를 다스리시려면 고혜(高傒)와 저 두 사람만 있으면 됩니다. 천하를 제패하시려면 관중이 있어야 합니다. 관중이 있는 나라는 강대할 것이니 그런 인재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환공은 포숙아(鲍叔牙)의 조언을 따랐고, 일부러 관중(管仲)을 돌아오면 죽이겠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를 기용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관중은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죄수의 몸으로 송환해주기를 청한 것입니다. 포숙아는 관중을 마중나갔고, 산동성 몽읍현 당부읍(堂阜邑)에 도착하자마자 족쇄를 모두 풀었고, 목욕재계하고 제사를 지낸 뒤, 다시 환공에게 데려갔습니다. 환공이 그에게 후한 예의를 베풀어, 그를 재상으로 삼고 제나라의 정사를 모두 맡겼습니다.
환공은 관중(管仲)을 얻고, 습붕(隰朋)・고혜(高傒) 등과 함께 제나라의 정사를 정비하고, 오가(五家)를 기층단위로 하는 병역제도를 추진했습니다. 곡가 조절을 시행하고 이어 화폐를 주조하고, 어업을 지원하고 바닷물로 대량의 소금을 만들어 이웃 제후국에 팔았습니다. 당시 소금은 지금의 반도체와 비슷했습니다. 반도체 없이 전자 공산품을 만들 수 없듯이 소금 없이 음식을 만들 수 없었습니다. 조세제도를 확립해서 거둔 재정으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며, 유능한 사람을 우대하여 제나라 백성들은 모두 기뻐했습니다. 특히 토향(土鄕) 제도를 정착시켜 징병 소집을 용이하게 했습니다.
환공 2년(기원전 684년), 제나라는 지금의 산동성 담성현에 있던 담(郯)나라를 토벌하여 멸망시켰고, 담나라의 국왕은 거(莒)나라로 도망쳤습니다. 일찍이 환공이 도망갈 때 담나라에 간 적이 있었는데, 담나라의 군주가 환공에게 무례하게 굴어서 이번에 토벌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