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동하기 쉬운> 흥덕진씨(興德陳氏)
평화광장/여양진씨 대종회 홈페이지에 게재된 陳右諒 후손> 興德陳氏는, "여양진씨 陳寵厚 후손> 興德陳氏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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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국과 한국, 일본에 남아있는 모든 진씨(陳氏)들은 순(舜)임금을 그 뿌리로 두고 있습니다만, 각자 본관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잘 모르시는 것 같더군요. 저도 여양진씨(驪陽陳氏)의 일원으로서 올려봅니다.
앞서서, 중국의 역사기록(사기등의 고대기록)에서의 순임금의 계통을 밝히니다.
사기(史記)등의 고대역사책에서 순임금은 동이(東夷)의 한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순임금의 후손인 진씨들도 원래는 한족이 아니라 우리민족이라는 의미죠.
이리하여 진씨(陳氏)도 우리 한민족과 기원이 같은 성씨라는 것을 먼저 밝힙니다.
(나는 옛날 진나라의 왕손이니 어쩌니 하기 이전에 같은 민족이라는 것을요.)
그러니까 초기계보를 설명드리면 이런 셈이 되는 거죠.
진씨 기본계보
환족(桓族 : 중국에서 동이족이라고 부르던 우리민족의 고대명칭.)
└---------------------------------------순(舜)---------------------------┐
중국 고대 전설상의 제왕중 하나. |
┌----------------------------------------------------------------------┘
호공 규만
(胡公 嬀滿)
※ 모든 진씨의 원류가 되는 인물입니다.
춘추전국시대 진(陳)나라의 시조로, 기록에 의하면 진나라가 망한 뒤에 후손들이 성을 진씨(陳氏)로 삼았다고도 하고, 주나라 무왕(周武王)이 나라를 바로잡은 후에 선대의 성군들을 기리면서, 순임금의 후손인 호공을 진나라의 제후로 봉하면서 성을 진씨로 내렸다는 등의 차이를 보입니다만, 확실한 것은 호공 규만의 직계로부터 진씨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여양진씨 유래의 기록에서 보면, 순임금의 34세손이자 주나라 도정 알부(陶正閼父)의 아들인 호공이 섬기던 주무왕을 위해 그릇을 만들어내어 나라를 부강하게 한 공으로 자신의 사위로 삼고, 성을 규(嬀)씨로 봉하여 진나라의 제후로 삼고, 조상인 순임금의 제사를 맡기니 이가 곧 진씨의 원조이며 때는 기원전 1111년 4월으로 무왕 11년 경인의 일이라고 전합니다.
호공 규만 이후의 진씨
호공 규만이 봉작받은 진나라는 이후 춘추전국시대의 다른 나라들에게 수차례 위협을 받았습니다. 나라 자체가 그렇게 넓지 않았고,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수차례 나라를 압박해오던 초나라에게 기원전 478년에 진나라는 멸망당했습니다. 633년만의 일이었습니다. 초혜왕(楚惠王)에게 멸망당한 진나라의 마지막 임금은 민공 월(湣公 越)로, 이후의 진씨는 호공의 20세손인 민공 월의 직계로부터 시작됩니다.
민공 월의 후손들은 이후 태공망 강상(太公望 姜尙)이 세운 제나라(齊)로 피신해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때 진씨는 진나라 왕실 직계의 진씨(陳氏)와 제나라에서 살기 위해 새롭게 성을 바꾼 전씨(田氏)로 나눠지게 됩니다.
구별을 위해 그냥 진씨로 남은 후손들을 본계로 부르며, 전씨로 성을 바꿔서 제나라에서 살아간 후손들을 제계라고 부릅니다.
호공 규만 ------------------------------------ 민공 월┐
진씨본계(陳氏本系)──---------------┘
진씨제계(陳氏齊系)┘
정리하자면, 초기 분파는 이렇게 됩니다.
이후에, 제나라에서 큰 변동이 일어납니다. 전씨로 성을 바꿔서 관직에 나갔던 제계 전씨들이 제나라 왕족인 강씨일족을 몰아내고 나라를 차지한 것입니다. 진씨제계, 즉 전씨들이 차지한 제나라는 이후 주나라 왕으로부터 직접 제후로 책봉을 받아서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되는데, 기록에서는 이때 제나라로 가서 실권을 잡은 세력들을 대부전씨(大夫田氏)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5세기, 그러니까 제나라로 피신하여 얼마지 않아 실권을 잡은 전걸, 전상부자에 이어 점차 제나라의 실권을 잡아가다가, 기원전 391년에는 마침내 전상의 증손인 전화(田和)가 제후로 인정받게 된 것입니다. 이 나라를 이전의 제나라와 비교하여 구별하기 위해 전제(田齊)라고 부릅니다.
수도인 임치(臨淄: 지금의 제남濟南)는 이 당시 상업도시로 매우 크게 성장하였고, 나라의 영토 자체가 기름진 탓에 수확물들이 많아 나라는 번성해 나갔습니다. 이후 위왕(威王)과 선왕(宣王)의 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았으며, 학문의 중심지로서 이름을 떨쳐나갔습니다. 그러나 전혀 상상치 못했던 서쪽의 진나라(秦)로부터 공격을 받아 항복하니 이때가 기원전 221년이었습니다.
또한 이 전제를 멸망시킨 진나라(秦)도 오랜세월동안 제나라와 수교를 맺으며 혼약등이 자주 오갔는데, 이로 인하여 진나라의 왕족세력들 대부분이 제계진씨, 그러니까 전씨세력과 본계 진씨들로 채워지기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제나라를 멸망시킨 진나라도 진씨세력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진씨세력들간의 통합이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일겁니다. 기원전 221년에 전국시대를 마감한 진나라의 시황제 영정(嬴晸)은 전제세력에 왕위를 빼앗긴 강씨의 후손 여불위의 아들이었으나, 실제로는 장왕(莊王)의 아들로서 궁궐에 들어와 책봉됨으로서 여씨가 아닌 영씨로 남았습니다. 시황제의 이전계보로 미루어 볼때, 시황제는 진씨의 피와 강씨의 피를 동시에 물려받은 (원수끼리 합쳐진) 셈이었습니다.
엄격한 법치주의로 절대권력을 행사하던 시황제가 갑자기 죽어버린 후, 진나라 황실은 큰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결국 환관 조고의 폭정과 2세 황제 호해의 난정으로 인하여 진나라의 체제 자체가 뿌리채 흔들렸고, 결국 본계출신의 진평과 오광의 난(陳平·吳廣之亂)을 시작으로 초나라 복원세력인 항우와 한나라 건국세력인 유방이 대치하여 싸우게 되었습니다.
진씨가 전제부터 한나라초기때까지의 역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입니다.
이 와중에 진나라 마지막 황제인 3세 자영이 항우에게 참수를 당하자, 자영의 후손들은 자영을 지지하던 유방의 편으로 몸을 의탁했습니다. 이때 후손들은 자신들의 나라이름을 딴 진(秦)과 조상들의 성인 영(嬴), 그리고 오랜 혼인외교로 인해 외가가문이 된 전(田)과 진(陳)으로 성을 나누게 됩니다.
결국 유방(劉邦)이 승리하여 고조(高祖)황제로 즉위하면서 기원전 202년에 한나라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전한(前漢)이 세워졌습니다. 본계로 남아서 진평의 난을 겪은 진씨(陳氏)와 제나라의 왕족으로 남았던 전씨(田氏)는 한나라의 관직에 진출하여 다시 한 번 영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때 전씨의 일부가 다시 진씨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 와중에 제나라 전씨 일족으로부터 왕씨(王氏)가 갈라져 나오는데, 이 왕씨집안에서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新)나라를 세운 왕망(王莽)이 나왔습니다. 왕망이 전한을 무너뜨리자, 한나라의 문벌로 남았던 전씨와 진씨는 남양의 귀족들과 함께 고조 유방의 9세손인 유수(劉秀)의 협조세력이 되어 신나라를 무너뜨리는 데에 성공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서기 25년에 들어선 유수의 후한에서 전씨와 진씨의 입지는 더욱 굳건해졌습니다. 후한에서 유교중심주의가 채택되자, 중앙관료세력인 전씨와 진씨는 유교에 큰 관심을 두었고 이후 많은 인재들이 양성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후 후한도 계속되는 실정과 십상시의 등장으로 나라 자체가 흔들리게 되었고, 이로 인해 전씨와 진씨는 새로운 세력을 따르려는 일파와 그냥 한나라를 지키려는 수구파의 두 세력으로 나눠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조조에 의해 후한마저 멸망하자, 차례로 들어선 세나라(위/촉/오)에 세력을 의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때의 대표적인 인물이 촉말 진초(蜀末晉初)의 역사가이자 학자인 진수(陳壽)입니다. 촉나라 말기에 아버지와 함께 벼슬을 했으며, 사천성 파서출신이었던 그는 촉나라의 정세변화와 함께 움직이는 대외정세에 빠르게 대처했습니다. 이후 촉이 위에 망하고, 오가 위나라를 멸망시킨 진(晉)에 망하게 되자, 진의 학자 장화에 의해 그 재능을 인정받고 치서시어사에 오릅니다. 촉나라의 멸망과 다른 나라의 몰락을 누구보다도 빠르게 지켜본 경험으로, 진수는 삼국지(三國志)를 저술했습니다. 후의 삼국지연의의 모티브이기도 하죠.
이 와중에 한나라에서 태구장의 벼슬을 지낸 실(實)이 영천에 뿌리를 내리게 되는데, 이가 진씨의 첫번째 본관인 영천진씨(潁川陳氏: 우리나라의 영천이 아님)의 시초입니다.
한편, 진나라도 멸망하고 남북조시대가 시작되자, 진씨세력은 남조에 그 세력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동진이 멸망하고, 뒤를 이은 유송과 소제, 소양이 멸망하자, 양나라의 무장이었던 진패선(陳覇先)이 양나라의 군사출신으로 반란을 일으킨 후경(候景)군을 물리치고 선양을 받아 황제에 올랐으니, 이가 곧 무제(武帝)이며 남조 진나라(南朝 陳)의 시작이었습니다.(서기 557년)
그러나 진나라도 남중국의 풍부한 자원을 기점으로 부흥하지 못한채, 후주 진숙보의 실정으로 인하여 북조를 통일한 양견(楊堅)의 수나라(隋)에 의하여 멸망당하고 맙니다. 이때가 589년으로 남조가 멸망하고 수가 중국을 통일했습니다.
수나라는 건국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고구려를 넘보려다가 군사력과 재정을 낭비해 2대 37년만에 멸망하고, 왕세충마저 수나라의 황족을 폐하고 정(鄭)나라를 세웠다가 당나라(唐)에게 멸망당함으로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후 중국 고대의 전성국가로 통하는 당나라(唐/618-907)에 이르러, 진씨와 전씨, 그리고 복성한 진씨세력은 문관과 정치가, 장사꾼등 다양한 분야로 진출하여 가문의 세력을 넓혀나가기에 이릅니다.
이리하여 당나라가 주전충에게 멸망당하고 오호 십육국시대가 왔을 때에도 그것을 기회로 삼아 더 크게 세력을 키우게 되니 십육국을 통일한 송나라(北宋)에서 진씨, 전씨세력은 중앙귀족의 한 가문으로 뿌리를 박기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자영의 후손들인 진씨(秦氏)도 이때 세력을 키워 중앙귀족으로 진출합니다.
한국의 진씨의 역사가 이때에 시작되는데, 삼국지를 쓴 본계 진수(陳琇)의 후손으로, 북송에서 우윤(右尹)을 지내던 진수(陳琇 1)가 요나라(遼)의 침입을 피해 고려의 여양현 덕양산(驪陽縣 德陽山 :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군 장곡면 일대)에 숨어 은거하면서 살게 된 것입니다.
수(琇)의 후손인 총후(寵厚)공은 고려의 외척으로 황제를 폐하려던 이자겸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상장군 신호위대장군에 봉해지고 여양현을 식읍으로 받으니, 후손들이 본관을 여양(驪陽)으로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바로 여양진씨였습니다.
(흥덕진씨와 광동진씨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본관은 여양진씨에서 갈라져 나온 가문이었기에, 얼마전에 뿌리가 같은 여러 본관들이 여양진씨로 합본했습니다.)
이후 고려와 조선 중기에 걸쳐 여양진씨는 여러 본관으로 갈라지면서도 문관이나 정치가로서 뛰어난 많은 인재를 배출합니다.
이 와중에 원나라 이후 명나라를 건국하게 되는 주원장(朱元璋)의 세력과 싸우던 군웅 진우량(陳右諒)의 세력이 패침하자, 숨어 살던 그의 아들 이(理)가 고려 공양왕때 주원장에게 추방당해 고려에 와서 살다가, 조선 태종때 흥덕후(興德侯)에 봉해지니 이 후손들이 곧 흥덕진씨(興德陳氏 2)입니다 | |
註 1) 여양진씨 진수(陳琇), 선계설은 부정되었다.
성씨에 관하여 기술하고 있는 관찬서인 증보문헌비고 제계고에는 진씨에 관하여. 주나라 무왕이 순임금의
후손인 호공 만을 진의 땅에 제후에 봉하였는데. 그 후손이 이로 인하여 진을 성씨로 삼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한편 이 책에는 삼척. 여양. 임피. 흥덕. 덕창. 복주. 양주. 남해. 나주.강릉. 외 110 여 본관의 진씨가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조선 씨족통보에는 진씨는 모두 131본이 있는데 여양진씨의 시조는 진준이며, 고려 명종시에 참지정사를
지냈는데 판병부사로 용력이 있으며 행오(行伍)에서 시작하여 공덕을 쌓아 장군에 이르렇고, 경인.계사 년간
정중부의 무신란에 수많은 문신들이 공의 도움으로 살아난 사람이 많았다고 적고 있다. 계속해서 준의 손자는 문과 한림학사 진식. 진화 진온이 있다고 서술하며, 어떤 책에는 대장군 진총후를
시조로 한 책도 있다고 적고 있다.
위의 여양진씨 시조는 진준. 또는 진총후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양진씨 대동보에는 진총후를 시조로 하고
그의 아들이 참지정사를 지낸 진준이다. 즉 양자는 부자(父子)간으로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양진씨 족보외에 진총후와 진준이 부자간이라는 문헌이 있는가?
여양진씨 대동보에서. 시조 진총후는 고려 예종조(1106~1122)에 신호위 대장군으로,
적신 이자겸의 난(1126)을 토평한 공으로 여양군에 봉군되었다고 적고 있다.
족보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진총후는 1080~1090년 전후에 출생한 인물이다. 그러나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사서에는 진총후에 관한 기록이 없으며,
당시 난에 관하여 상세히 서술하고 있는 이자겸 열전에도 아무런 기록이 없다.
한편 참지정사 진준은 고려 명종조에 활약한 분으로 1179년 6월4일에 졸 하였으며, 당시 관직이 참지정사.
판병부사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1120년 전후에 출생한 인물이다.
즉 진총후 나이 30~40세를 전후에 진준이 출생한 것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진총후가 여양군의 봉군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만성보 성격의
씨족원류와 여타 기록에 진총후에 관한 서술이 없는 것은 이례적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문헌을 근거로
여양진씨 시조에 고찰을 해 보기로 하자.
1)동래조 진수(陳琇)설.
한편 여양진씨 청년회에서 운영하는 홈페이지에는 진씨의 유래에 관하여, 우리 동방의 진씨는 중국에서
고려시대에 동래하였는데 갑인보 사적편에, 송나라 복주인이며 우윤벼슬에 있는 진수라는 분이
오랑케의 난을 피하여, 바다를 건너 고려국 여양현에 숨어 살았으며 그 후손 총후가 비로소
고려 예종조(1106~1122)에 벼슬하여 상장군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만약 이 주장을 수용한다면 동래조인 진수는 진총후의 선대가 되어야 하는데, 진수의 동래(東來)시기에
관하여 여양진씨 대종회 자료에서는 송나라 휘종년간(1082~1125)이라 하였다.
즉 송나라 휘종은 금나라에 의해 수도 개봉이 함락되고 아들 흠종에게 양위를 한다.
1125년의 일이다. 이를 정강의 변이라 하는데, "이 때 송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동래하여 귀화한
역사적 사실이 있다.
여양진씨 동래조라고 추정하는 진수(陳琇)도 이 때 동래한 것이라 한다면, 진수는 1060년 전후에
출생하였을 것이며. 진총후는 진수의 아들정도로 추정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모순이 있다.
왜냐하면 진수의 아들 또는 후손인 진총후는 1125년 보다 앞서, 이미 예종조(1106-1122) 상장군으로
벼슬을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양진씨 갑인보등에서 진수의 동래설과,
그가 진총후의 선대라는 문헌적 근거는 무엇인가?
아마도 서산정씨 족보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서산정씨 시조는 송나라에서 원외랑을 지낸 정신보이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원래 중국 절강성 출신으로
증조부인 응충이 송나라에서, 아버지 우거는 원외랑을 지냈다.
응충의 증손인 신보는 송나라에서 상서형부 원외랑으로 있다가 나라가 망하자,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로
망명하여 서산에 정착 세거하였는데, 신보의 아들 인경이 고려 고종 41년(1254) 문과에 급제하고
충렬왕이 세자로 있을 때, 호종 하였으며 1274년 이등공신에 오른 인물이다.
문헌에서 서산정씨 시조 정신보 일행의 한반도 동래시기를 송나라 멸망시라 하였는데,
북송은 960년에 창업하여 1127년에 멸망하였으며, 절강성일대의 남송이 원나라에 멸망한 시기는 1279년
이므로, 송나라가 망하자 동래한것은 아니며, 아마도 북송말기에 정신보일행이 동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정인경의 문과급제(1254)와 충렬왕 호종(1269년경)으로, 북송이 멸망(1279)하기 전에
이미 정신보의 아들 정인경이 고려에서 활약하고 있는 사실에서 반증된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정리하면 기록에 정인경의 출생시기는 1237년이며, 1305년에 졸한 인물이므로
서산정씨 시조이며 정인경의 부친인 정신보는, 1210년 전후에 출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서산정씨 족보에 의하면 서산정씨 2세 정인경의 배위가, 중국 복주인으로 양주군부인 진씨이며
친정 아버지가 예빈윤인 진수(陳琇)이다. 서산정씨 족보상 2세 정인경의 장인 이름이 바로 진수로,
이는 여양진씨 갑인보 등에서 말하는 진수와 휘도 완전히 동일할 뿐 아니라, 벼슬. 동래한 시기.
이유 등이 모두 사실로 확인된다.
그렇다면 진수(陳琇)는 1210년 전후에 출생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산정시 족보에 등장하는 송나라출신 진수를, 여양진씨 기세조인
진총후(1080~90년 출생?)의 선대로 이해하여, 족보에 기록한 점은 명백한 오류이다.
오히려 진총후 여양군이. 진수보다도 적어도 110-120년 전에 출생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나라 진씨들이 그 뿌리를 중국에 두고 있다는 점 때문에 무비판적으로,
진수 선계설을 수용한 것으로 이해할 수는 있으나, 이들의 위차관계는 반드시 바로 잡아져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양진씨 갑인보 등에 서술되어 있는 우윤을 지낸, 진수의 동래 사실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인가?
공교롭게도 송나라 휘종 말년인 1125년 송나라 수도인 개봉이 함락되고, 송나라 관료들이 상당수
고려에 귀화할 무렵 고려 인종은 금나라에 사신을 파견한다. 그동안 송나라를 섬겼으나 새로 발호하는
금나라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어, 등거리 외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때 사신의 대표는 사재소경인 진숙(陳淑)과 상의봉어인 최학란 이었다.
금나라에서는 국서가 표문이 아니고 고려가 금나라에 대해, 신하국이라고 적지 않았다 하여,
받아들이지 않아 되돌아왔다.
사서에는 인종3년(1135)에 진숙이 김부식과 함께 서경에서 일어난 묘청의 난을 토벌하고, 이듬해 예부상서.
동지추밀부사 겸 태자빈객에 이어 병부상서 지추밀원사 1138년 우복야를 거쳐 다시 추밀원사가 되고
참지정사로 치사했으며, 1151년에 졸한 인물이라고 적고 있으며, 고려사 에서는. 고려 제18대 의종(毅宗)이
진숙(陳淑)의 죽음을 슬퍼하며, 조회를 3일간 철회 하였다고 적고 있다.매우 현달한 진씨성을 가진 인물이다.
즉 여양진씨 족보 서문에서 말하는 송나라 휘종년간에 금나라의 침입으로, 송의 수도 개봉이 함락되는
소용돌이에서 금나라와의 등거리 외교를 위해, 사신으로 나갔다가 되돌아온(東來)한 인물이,
진수와 이름이 비슷한, 진숙(陳淑)이 있는데 매우 흥미롭다.
졸년을 역산하면 진숙은 1090년 전후에 출생하였다.
즉 여양진씨 시조 진총후와 출생시기 또한 비슷 하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진숙이 묘청의 난(1135)을. 진총후가 이자겸의 난(1126)을, 그리고 진준이 정중부의 난에 공을 세운
인물이라는 가문사적 정체성 측면에서도 매우 설득력이 있다.
특히 사료에서 진준의 아버지인 여양군 진총후에 관한 기록이 전무하다는 점과,
진숙이 묘청의 난 진압으로 사료에 명백히 공적을 세운 사실이 있다는 점, 진숙은 대장군 병마사를 지냈고.
지광주사겸 호부시랑으로, 척준경 이자겸과 함께 송나라 사신 서긍 일행을 접반한 기록,
"여양진씨 상대 인물의 휘가 대부분 외자(준. 담. 식. 온. 화. 교...)이며, 3세의 경우 광순.광수.광경.광의. 광현 두자이지만, 중복되는 광(光)자를 제외하면 외자라고 볼 수 있다.
진총후(陳寵厚)는 왕의 두터운 총애를 받았다는 의미이므로 하사(下賜)한 이름이거나,
자(字)로 볼 수 있으므로, 진숙과 진총후가 동일인(同一人)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전 연세대학교교수 양권승 박사> 여양진씨 상대사 연구 논문을... 본 필자가 첨삭하여 다시 정리 하였다.
광주 광역시 주월동 寓居에서... 海松:陳玉洙 | | | | | |
1. 원나라 이후 명나라를 건국하게 되는 주원장(朱元璋)의 세력과 싸우던
군웅 진우량(陳右諒)의 세력이 패침하자, 숨어 살던 그의 아들 이(理)가
고려 공양왕때 주원장에게 추방당해 고려에 와서 살다가,
조선 태종때 흥덕후(興德侯)에 봉해지니 이 후손들이 곧 흥덕진씨(興德陳氏)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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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양진씨 후손 > 흥덕진씨(興德陳氏) 손록
여양진씨 시조 여양군 陳寵厚
2세 판병부사공 陳俊
3세 병부상서공 陳光脩
4세 매호공 진화(陳澕)
5세 휘 令獻
6세 휘 錫 (中系) 창양군파조
7세 휘사문(斯文) 창양군-
-2子 8세 휘 千儀 낭장군파조후손
=3子 8세 휘 千佑 어군랑공파조 후손
=4子 8세 휘 千祚 내부시사공파 후손들이, "전북 고창군 흥덕현(興德縣)을 관향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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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진총후 |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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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준 |
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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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子
휘 光脩 |
1子
휘 光恂
譜:光純 |
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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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子
휘 澕
매호공
파조 |
2子
휘 溫
예빈경
파조 |
1子
휘 湜
어사공
파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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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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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
휘 令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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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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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子
휘 錫
(中系)
창양군
파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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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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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子
휘 斯文
端城翊祚功臣
창양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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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 |
4子
휘 千祚
내부시사공 파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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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子
휘 千佑
어군랑공
파조 |
2子
휘 千儀
낭장군공
파조 |
1子
휘 千係
사인공
파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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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 |
1子
휘 盛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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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子
휘 成龍 |
1子
휘 成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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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 |
子
휘 叔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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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
휘 孝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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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 |
1子
휘 允平
문과급제 應敎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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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
휘 義珍
어모장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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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 |
1子
휘 适
靖國功臣
郡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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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
휘 繼
장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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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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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子
휘 世漢
迪順副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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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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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子
휘 應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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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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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子
휘 克讓 |
3子
휘 克謙 |
2子
휘 克諧 |
1子
휘 克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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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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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 |
여양진씨 임신보 1권 54페이지> 14세 陳應平 - 子 15세 陳克誠, 克諧, 克謙, 克讓 수록
<<진극성(陳克誠) /宣祖 38 增廣 進士 >>
[시험년도] 선조(宣祖) 38 (1605) 증광(增廣) 진사(進士)
[합격등위] 3등 0100
[본인성명] 진극성(陳克誠)
[본인 字] 일지(一之)
[본인생년] 계유(癸酉) 1573
[본인본관] 흥덕(興德) 진(陳)
[본인거주] 봉산(鳳山)
[본인구존] 구경하(具慶下)
[본인전력] 유학(幼學)
[부친성명] 진응평(陳應平)
[부친관직] 유학(幼學)
[안항 弟] 진극해(陳克諧), 극겸(克謙), 극양(克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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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양진씨,매호공파,(下系)내부시사공파 11세 진윤평(允平) 문과 급제기록.|게시판
진옥수 | | 조회 1596 |추천 0 | 2011.05.01. 05:24
-no 059. 성종(成宗) 06년 (1475) 을미알성방(乙未謁聖榜) 20 人
(무과 정양(鄭讓)등 19人) 이번 시험은 mk 에상행태학(上幸太學) 행석채(行釋菜) 잉취사(仍取士)"
라고 나와 있듯이 왕이 문묘(文廟)에 행차하여 작헌례(酌獻禮)를 행한 후,
명륜당(明倫堂)으로 자리를 옮겨 실시한 알성시(謁聖試)이다.
시험일은 3월 5일(甲寅) 독권관(讀卷官)은 인산부원군(仁山府院君) 홍윤성(洪允成),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조석문(曹錫文) 등이었다.
시험 문제는 야인(野人) 방어에 관한 책문(策文)을 짓는 것이었다.
책제(策題)의 일부를 보면 고려 때에는 합단(哈丹) 1],계단(契丹) 2]몽고(蒙古), 홍구(紅寇) 3]가
여러 번 우리 서북 지역의 변방에 침범하여 피해가 매우 많았으며,
간혹 개경(開京)까지 침입할 때도 있었다.
이것은 서북 지역의 여러 고을에 성곽(城廓)이 없어서 그러한 것인가?
아니면 적당한 장수를 얻지 못하여 그러한 것인가? 또는 방술(防戌)의 대책이 올바르지 못해서 인가?
그 승리를 거둘 수 있는 방법은 어떠한 것이 알맞다고 할 수 있는가?
또 우리나라의 북쪽은 야인(野人)과 이웃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장성(長城)을 다 쌓지 못하고 있다.
성을 쌓으려고 하니 민력(民力)이 먼저 소모되고, 쌓지 않자니 적변(賊變)이 끊이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가." 등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내게 된 데에는 이번 알성시를 치르기 한 달 전에, 올적합(兀狄哈) 4]이
경원(慶源) 지역으로 쳐들어 온 일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무과는 문과를 실시한 지 3일 후인, 3월 8일(丁巳) 모화관(慕華館)에서 치렀다.
문, 무과 출방(出榜)은 9일(戊午)에 있었다.
註1] 합단(哈丹) = 원(元)의 반란세력, 1290년(충렬왕 16) 원나라의 합단이 고려를 침입한 사건.
註2] 계단(契丹) = 거란족,
註3] 홍구(紅寇) = 홍건적,
註4] 올적합(兀狄哈)= 여진족, 1475년 2월 두만강을 건너조선 백성들의 재산을 약탈하던,
(여진, 알타이, 골간, 올랑합, 올적합) 등을 야인이라 한다.
고유번호(固有番號) |
성명(姓名) |
본관(本貫) |
거주지(居住地) |
부명(父名)-아버지 |
01442 |
박형문(朴衡文) |
충주(忠州) |
공주(公州) |
박제성(朴悌誠) |
01443 |
양면(楊沔) |
청주(淸州) |
ㅇㅇ |
양자순(楊子淳) |
01444 |
유혜동(柳惠仝) |
서산(瑞山) |
ㅇㅇ |
유윤겸(柳允謙) |
01445 |
유효산(柳孝山) |
고흥(高興) |
ㅇㅇ |
유종서(柳宗敍) |
01446 |
허침(許琛) |
양천(陽川) |
ㅇㅇ |
허손(許蓀) |
01447 |
최을두(崔乙斗) |
전주(全州) |
ㅇㅇ |
최신한(崔信漢) |
01448 |
권인손(權仁孫) |
안동(安東) |
ㅇㅇ |
권치중(權致中) |
01449 |
최융(崔瀜) |
경주(慶州) |
포천(抱川) |
최윤옥(崔潤玉) |
01450 |
성세명(成世明) |
창녕(昌寧) |
경(京)-한양(漢陽)-서울 |
성임(成任) |
01451 |
박계간(朴季幹) |
고령(高靈) |
경(京) = |
박의효(朴義孝) |
01452 |
김효정(金孝貞) |
경주(慶州) |
보은(報恩) |
김처용(金處庸) |
01453 |
이세우(李世佑) |
경주(慶州) |
충주(忠州) |
이극감(李克堪) |
01454 |
이세광(李世匡) |
광주(廣州)-경기도 |
과천(果川) |
이극배(李克培) |
01455 |
진윤평(陳允平) |
흥덕(興德) |
경(京)-한양(漢陽)-서울 |
진숙량(陳叔良) |
01456 |
김영정(金永貞) |
김해(金海) |
경(京) = |
김진손(金震孫) |
01457 |
이록숭(李祿崇) |
전의(全義) |
ㅇㅇ |
이신효(李愼孝) |
01458 |
유인동(柳麟童) |
문화(文化) |
ㅇㅇ |
유계분(柳桂芬) |
01459 |
유찬(劉瓚) |
금성(金城) |
ㅇㅇ |
유소(劉昭) |
01460 |
정적(鄭積) |
하동(河東) |
경(京) |
정수충(鄭守忠) |
01461 |
이집(李緝) |
우봉(牛峰) |
ㅇㅇ |
이근계(李根繼) | |
진윤평>직계후손 30世(故)진의종 국무총리, 31世 진념 경제부총리.
시조:진총후(陳寵厚) 여양군(驪陽君)
-2세 진준(陳俊)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 참지정사(參知政事)
판병부사공(判兵部事)
-3세 진광수(陳光脩)-특진(特進) 낭중(郎中) 배(拜) 안서대도호부사(安西大都護府使) 拜
병부상서(兵部尙書)
-4세 진화(陳澕) 한림학사, 서장관, 우사간, 지공주사 上系 (매호공 파조)
-5세 휘 영헌(令獻) 한림학사
-6세 휘 석(錫) 中系-(창양군파조)
-7세 휘 사문(斯文) 보문각 대제학,도첨의 참리, 창양부원군-족보기록.
4子-8세 휘 천조(千祚) 판내부시사공- 下系 [내부시사공파조]
-9세 휘 성덕(盛德)? 군수공.-족보기록 ).
-10세 휘 숙량(叔良)譜:淑? 군수공.
-11세 휘 윤평(允平)성종 6(1475) 을미알성시급제 1) 평창군수, 예문관 춘추관- 편수관, 응교
진윤평-1子 12세 휘 괄(适)
= 2子 12세 휘 준(遵)
= 3子 12세 휘 매(邁)
휘 매 -2子 13세 휘 홍범(洪範)
-2子 14세 휘 간(侃)
-子 15세 휘 처우(處右)
처우 子 16세 휘 천수(千壽) 묘:전북, 고창군, 흥덕면 - 임신보 1권 282페이지 수록
17세 휘 세붕(世鵬)
18세 휘 정주(廷柱)
정주 2男 19세 휘 경남(慶南)
20세 휘 득민(得敏)
21세 휘 필수(弼秀)
-묘:전북 고창군 해리면 송산리 33번지
22세 휘 성유(成裕)-9세(8대)손, 前 국무총리 30世-(故)진의종
묘:考位塋下
= 10세(9대)손, 前 경제부총리 31世- 진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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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광장>흥덕진씨(興德陳氏) |
/정복규 논설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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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규 논설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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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진씨(興德陳氏)에 대한 자료는 없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진윤평(陳允平 1), 1430 庚戌生) : 문과(文科) 성종6년(1475) 친시 병과(丙科),
진덕신(陳德新), 1580 庚辰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진 택(陳 澤), 1612 壬子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진재창(陳再昌), 1625 乙丑生) : 무과(武科) 효종2년(1651) 별시 병과(丙科),
진경복(陳景福), 1562 壬戌生) : 사마시(司馬試) 광해군2년(1610) 식년시 삼등(三等),
진극성(陳克誠 2), 1573 癸酉生) : 사마시(司馬試) 선조38년(1605) 증광시 삼등(三等),
진유(陳留 3), 誤 1573 誤癸酉生 >己酉(1489)年生)? ) : 사마시(司馬試) 중종8년(1513)
식년시 삼등(三等) 등 모두 7명이 있다.
문과 1명, 무과 3명, 사마시 3명이다.
본관 흥덕(興德)은 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 흥덕면 일대에 위치하는 지명이다.
백제 때에는 상칠현(上漆縣: 上村縣)이라 하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상질현(尙質縣)으로 고쳐
고부군(高阜郡)의 관할이 되었다. 1018년(고려 현종 9) 이후 장덕현(章德縣: 昌德)으로 고쳐서 감무를 두고
고창을 겸해 다스리게 하였다가 1308년(충선왕 1) 흥덕으로 바꾸었다.
1401년(태종 1) 고창현을 분리하고 흥덕현으로 독립하였으며, 흥성현 이라고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전주부 흥덕군이 되었고, 1896년 전라남도 흥덕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흥덕면으로 축소되어, 고창군에 통합되었다.
1985년에는 52가구 213명, 2000년에는 113가구 341명이 있다.
註 1)진윤평 평창군수공은 > 여양진씨 매호공계 창양군(중계),
내부시사공파(하계) 11세 임신보 1권 56페이지 계대됨.
註 2) 진극성 진사 급제자는 여양진씨 매호/창양군/어군랑파 후손 15세손
|
註 3) <진유(陳留) / 中宗 08 式年 生員 >
[시험년도] 중종(中宗) 08 (1513) 식년(式年) 생원(生員)
[합격등위] 3등 0039
[본인성명] 진유(陳留)
[본인 자] 자진(子晋)
[본인본관] 흥덕(興德)진(陳)
[본인거주] 곤양(昆陽)
[본인전력] 전훈도(前訓導)
[부친성명] 진승중(陳承重)
[부친품계] 선무랑(宣務郞)
[부친관직] /전녹사(前錄事)
註 3) 정리>1573년 계유생은 오기(誤記)다,
생원기록에는 출생년이 없는데, 어느자료를 인용했는지는 모르겠으나,
1513년이 계유년인데 자료정리자가 실수를 한듯하며?
유(酉)년생 (닭)띠라 한다면 기유(1489)년생으로, 1513년 생원시 당시 25세가 된다.
*혼동하기쉬운 흥덕진씨!
진리(陳理)를 시조로하는 흥덕진씨와, "진총후(陳寵厚)를 시조로 하는 흥덕(여양)진씨가 있다.
1)의 흥덕진씨와, 2)의 흥덕진씨(여양진씨)는 시조가 다르다 |
첫댓글 정리를 잘 해놓으셨네요 수고많았습니다.
앞으로 해결 해야할 숙제도 있고요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씨족사에서 정체성을 잃고,
왜곡된 역사를 인용하며,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울뿐입니다. 대종회는 강건너 불구경하고...
대한국을 세운 진우량은 본래 사씨로써,데릴사위로 진씨가 되었읍니다.따라서,우리나라에 있는 진우량의 손자 진리를 시조로 하는 양산진씨는 중국진씨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개성한 진씨입니다.
과거급제 자료를 살펴보면, "여양진씨 매호공계/ 8세 창양군 휘 사문(斯文) 후손들이,
"세거지인 흥덕(興德)을 관향지(貫鄕地)로 하여, "흥덕진씨(興德陳氏)로사용하였습니다.
진우량의 아들 진리를 시조로 하는 흥덕진씨로 인해, "매호공계 흥덕진씨까지 포함하여,
흥덕진씨는 여양진씨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대종회' "위 자료는 잘못된 것이며,
"후손들에게 혼란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중국귀화성씨 백여개 목록을 보면,진씨는 흥덕진씨만 나오더군요.
매호공계 흥덕진씨는 귀화성씨가 아니고,
위의 조선시대 문과급제기록에서 보듯이 여양진씨 11세 진윤평 선조님이
조선초 '문과' 을미(1475)알성시에 응시하면서,
"본관을 흥덕진씨(興德陳氏)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양진씨 자체가 귀화성씨로 본다면, '큰틀에서는 귀화성씨겠지만'
본 필자가 말하는 흥덕진씨는 여양진씨에서 분종하였기 때문에,
조선조 문과급제기록의 흥덕진씨를 귀화성씨 운운하는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은것같군요.
조선씨족통보등 사서를 보면...
'조선초~중엽에 여양진씨는 거주지를 중심으로'
"131본이 분종(分宗)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르신 제가 하고자하는 의도는,일반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귀화성씨목록 백여개성씨에,진씨는 흥덕진씨만 있고,여양진씨는 여기에 빠져있디는걸 말한 겁니다.다소,본문내용에 맞지않는지는 모르겠지만,흥덕진씨하길래 생각나서 썼읍니다.
젊은일가가 보학에 이정도 '관심과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것은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앞으로도 궁금한것이나 의문점이 있으면 주저마시고 댓글로 남겨주세요.^^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이라서 조금 길~게 설명을 했습니다. 오해없으시길...
대종회 홈페이지 운영상의 문제점과 자료부재를 질책하는 진재석님의 글을 읽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아직 정의가 살아있구나. ~ 대종회의 현주소는... 독선과 아집으로 종무를 그르치고있습니다.
족보의 사적과 계대가 역사와 일치않는다면 계대를 소연히 밝히고 선현의 사적을 세상에 알리는 위선사업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대종회 집행부는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해야할일과 하지 말아야 할일도 구분못하는 현시점에서,
"중화영웅님의 일갈은 한줄기 희망으로 보였습니다.
환골탈태하는 '아픔을' 그리고 노력을 해야 할때인데, 그런 시대적요구마저도 모르고 있는듯하여
여양진문의 앞날이 심히 걱정이 됩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물론,운영자님도 바쁘신 이유도 있겠지만,타성씨인들이 봤을때 잘되있다는 말을 듣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행동하는 양심!
고인이 되신, 모 (前)대통령이 강조한 말이 생각납니다.
우리진문에서도 직언하는 일가가 많이 나오길 기대합니다.
잘못된 자료는 바로 잡아야 합니다.문제 제기를 않고 놔 두면 그것이 진실처럼 모두가 받아들입니다.
먼 훗날에 아는 분들이 봤을때는 대종회가 웃음거리로 전략하고 진문이 부끄러운 일이지요.
다 같이 바로 잡는 노력에 힘을 모아야 됩니다.
그러게요.~ 여양진씨의 역사는 오 계,대(誤系代)와, 선현의사적이 일부는 오류가 너무 심합니다.
그런데도 대종회 집행부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나쁜것을 쉽게 배우고 활용하는듯 보이는데 종사에 씻지못할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것입니다.
종사(역사)는 영원히 이들을 기억하게끔 사실을 실명(實名)으로 남겨놓을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