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후 십자가는 다른 면을 갖고 있다. 십자가는 이제 그리스도의 시야에서는 자기가 아버지에 대한 자기의 사랑의 모든 깊은 비밀을 온전히 말하는 하나의 장면으로 대두했다는 점이다. 그 십자가는 하나님이 "열납할 수 있도록"(자기 자신의 자의로) 그리스도가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취해서 서슴치 않고 다 들어마시게 된 장소였다. 그리스도의 모든 생애는 아름다운 향기를 발산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 향기는 아버지를 향해 계속 올라간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일들만 하셨다. 그는 지금까지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다. 그런데 번제는 그리스도가 살아계셨을 때의 그를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즉 그가 살았을 때의 모든 행동 하나 하나가 모든 생각을 초월하는 귀한 것임은 사실이지만 이렇게 살았을 때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의 그를 상징하고 있다. 이 경우에 있어서도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은 바 되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 속에 비교할 수 없는 그윽한 향기를 드리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다.
영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은 이 진리가 특이한 매력으로 십자가를 싸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 진리는 복스러운 우리 주님의 고난에 가장 열정적인 인격의 관심을 첨부해 준다. 죄인은 마음과 양심이 가장 절실하게 그리고 가장 열렬하게 갈망하던 것을, 이제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는 사실을 십자가 안에서 분명히 발견하게 될 것이다. 참된 신자는 자기 마음의 모든 애정을 사로잡고 그의 모든 도덕적 상태를 꿰뚫는 역사를 십자가 안에서 발견할 것이다. 천사들은 십자가 안에서 끊임없는 찬양의 제목을 발견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십자가 안에는 성도나 천사들이 생각하는 가장 높은 개념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그 이상의 어떤 사실도 있다. 즉 그것은 아들의 마음에 있는 깊은 열의를 보인 헌신이다. 이 헌신을 하나님께 바쳤으며, 하나님은 심중으로 이 헌신을 받아들였다. 이것이 번제에서 그토록 극적으로 예시했던 십자가의 고상한 일면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는 그의 일평생이 죄를 담당한 자(sin-bearer)로 보냈다는 관념만을 생각한다면 번제의 특이한 아름다움은 전적으로 소멸될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말해 둔다. "자발적"이란 말 속에는 강요가 없다. 자기 입장 때문에 부득불 목숨을 버려야 할 사람의 경우엔 자발적 행위란 있을 수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생애에 관련된 죄를 담당하는 자라고 한다면, 분명히 그의 죽음은 필연적으로 있어야 할 행위였지, 자발적인 행위는 아니었을 것이다. 죄를 담당하는 생애의 이론에 따른다면, 어느 제물이든 그 제물의 아름다움은 손상되어져야 하며 그 제물의 원상(原狀)도 손상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할만 하다. 그러나 번제의 경우는 특수한 경우다. 왜냐하면 번제의 경우는 죄를 담당하거나 또는 하나님의 진노를 감수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 안에서 나타내 보여진 전적으로 자발적인 헌신의 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번제에서 우리는 성령님에 의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고 있는 아들의 모형을 인식한다. 아들은 "자기의 자발적 의지"로 이를 행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요10:17).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번제의 일면을 보고 있다. 그런데 한편, 그리스도를 속죄 제물로 보는 선지자는 말하기를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라고 말했다(행8:33)(70인역 이사야 53:8). 그런데 "아무도 내게서 빼앗을 자가 없고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고 그리스도는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그는 죄를 담당한 자였던가? 잘 유의해 보라. "아무도 할 수 없다."─사람이나 천사나 마귀나 기타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의 생명을 빼앗을 수 없다. 목숨을 얻기 위하여 그의 목숨을 버림은 그리스도 자신의 자발적인 행위였다.
"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당신의 뜻을 행하기를 기뻐하나이다." 거룩한 번제물의 말은 그러했다. 아무런 흠도 없이 하나님께 자기자신을 바친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발견한 자의 말은 그러했다.
첫댓글 요한복음 10장 17절 하반,
"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
예수께서는 누가 시켜서 자신의 목숨을 죽음에 내어준 것이 아니다.
자발적으로 당신 자신을 번제물로 내어 주셨다.
" 성부 하나님께서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 예수 그리스도)을 예비하셨도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예수께서 ) 말하기를
아버지 하나님이여
보소서
두루마리 책에( 구약 성경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왔나이다 하셨습니다"( 히 10장 5절 ~ 7절)
우리는 이 성경을 읽을 때마다 무엇을 자각하게 되는가?
그것은
내주 예수님께서 자신이
속죄제물, 번제물, 대속물이 되려고 오셨다는 사실을
늘 자의식하고 계셨다는 사실이다.
마태복음 10장 28절에서도 이 사실을 피력하고 계시다.
" 인자가 온 세상에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애초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이 세상에서 죽어야함을 염두에 두고 사셨다.
나의 번제물이 되려고 오신
주님..
누구인가 죽어야만 , 자기 사람들이 살아나기에,
당신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 놓으셨다.
이런 희생 정신으로 사는 인생이 있을까?
온 지구상에 역사를 뒤져도 찾지 못할 것이다.
예수께서 날 위해 희생 제물이 되셨다는 사실이 진심으로 믿어지는 사람이라면,
아무런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없고,
현재 닥친 역경을 두려워 할 필요도 없다.
왜냐면, 목숨까지 당신의
백성에게 주신 예수께서
뭘 아끼시랴?
생의 필요를 당연히 채우실
것이다. 주의 사랑을 신뢰하는
내 미래를 주님께서는 안전하게 보호하실 것이다..아멘.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장 32절에 "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성부께서
어찌 독생자와 더불어
모든 것을 주시지 아니할까? " 한다.
신자가 미래에 대해 불안해 하는 것은,
내 주 예수께서 날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는 사실에 대해 믿음 부족 때문이다.
예수께서 날 위해 목숨까지 희생하셨는데.
뭘 주지 않으시랴?
생필품? 영생? 늙어서 돈을 벌 수 없을 때?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예수께서 날 위해 돌아가신 것을 믿는 자는
현재에 닥친 위급한 일이나,
미래나 , 영원토록 아무런 염려.걱정이 생기지 않는다.
모두 내 주님 예수께서 책임지실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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