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제6회 김명배문학상 당선작] 최지원 강승태 최지안
■대상
나이테
꽃을 주고
그늘을 주고
열매를 주고
새들을 품어 주던
나무
받는 것보다
주는 걸 더 좋아해
하나님 마음에 쏙 들었나보다
몸속에
점점 커져가는
동그라미
동그라미
동그라미.
산
누가 읽다 엎어 놓았을까
한 걸음 한 걸음 읽으며
들어갈수록
깊고 높아지는 책
눈이 멀고
귀가 먼 애벌레들이
꾸물꾸물 기어들어가
봄을 읽고 여름을 읽고 가을을 읽고 겨울을 읽는 동안
눈이 뜨이고
귀가 밝아져
허물을 벗고
훨훨 날아간다.
고라니 생각
강가 풀을 뜯어 먹다
사람들 고함소리에 놀라
겅중겅중 도망 다니던 고라니
눈 감아도 자꾸 떠올라
후들후들 떨리던 다리,
화들짝 놀란 눈망울,
예민하게 세운 귀를 일기장에 그려 봅니다
사람들 눈에 띄어
얼어붙은 몸 숨길 덤불을
왕버들 아래 우거지게 그리고
덤불 바로 앞에는
고픈 배 달랠 풀을 무성하게 그리고
풀들 사이에
놀란 가슴 주저앉힐 들꽃도
해맑게 그려놓아요
고라니가 외롭지 않게
친구 고라니 짝지어 놓고
저녁 늦도록 강가 풀숲을 뛰놀다
산으로 돌아가는 길 헤매지 않게
보름달도 환하게 걸어놓아요.
최지원_2014년 월간문학 동시 신인상. 2016년 계간 《시산맥》 등단, 11회 최치원 신인문학상. 2019년 황금펜아동문학상. 2021년 중소출판사 출판콘텐츠 창작지원금 수혜. 2023년 아르코 창작 발표 지원금 수혜. 동시집 『초승달 지팡이는 어디에 있을까』, 시집 『얼음에서 새에게로』. 응모시집: 초승달 지팡이는 어디에 있을까
■작품상 (강태승 : 시 3편)
비雨 또는 비非
나무 속에 비가 내린다 하늘은 푸르지만
나무에는 한창 비가 내리는 중이다
질퍽질퍽해진 길을 맨발로 걷는다
신발 없어도 생(生)을 걸어가는 나무
한결같이 투정하는 소리가 없다
나무속에는 벌써 장마 졌다
흙탕물이 강둑을 넘쳐 논밭 덮치고
저승 가는 길을 끊어버렸다
겨울과 봄의 수작이 무너져
산골짜기까지 들이닥친 바다에
돌고래가 돌아다니는지 소란하다
해마다 한 번은 폭우가 쏟아져
흙탕물이 방 안에 들이닥쳐도
나무 속에 내리는 비는 나무 밖으로
한 번도 넘치지 않았다
태풍이 군홧발로 함부로 쏘다녀도
밖으로 물기가 비치지 않는다
그러나 매미는 장마를 용케 알고
나무에 침針을 넣어 마신다
나비도 마른 데에 앉아
흙탕물을 피해 나뭇잎에 맺힌
맑은 이슬만 받아 마신다
나무 속에 가랑비가 내릴 때
알게 모르게 그 밑에 서거나 눕는다
햇빛을 피해 선 곳이 강물이 출렁이는
문득 나무 밑임을 깨닫는 노루,
시방 나무 속에는 여름 장마가 한창이다.
손과 손
밥을 주던 손에게 죽임을 당한 개
등짝 쓰다듬던 손에게 목 졸린 개를
저녁의 식탁에서 손들이 먹고 있다
손자에게 아들에게 아내에게
서로 식지 않게 건네주고 있다
정녕코 바위같이 믿었던 손이
여름 건강식으로 개를 나누고 있다
잠시 주인에게 저항하던 믿음도 삶아
개고기로 맛 내었고
그래도 다물고 있는 입에는
칼을 넣어 마지막 한마디 물고 있는
혓바닥을 잘라 소금 찍어 먹는다
반갑다 흔들던 꼬리마저 썰어놓자
손과 손들이 잽싸게 다녀간다
개의 오장육부 손의 오장육부로 흩어진다
뱃속에 잘 도착했는지 트림을 한다
손은 그 소리를 행복하게 듣고
TV를 켠다 이라크 자살 폭탄에서
탄식을 하는 입술, 엊그제 다시
사온 강아지를 그 손이 쓰다듬고
손을 핥는 강아지 아직은 꼬리가 짧다.
꽃신
모가지 꺾이고 신발 흩어진 자리마다 민들레 피었다
싼 값으로 속잎 마구 떨어진 자리마다 웃는 냉이
생짜배기 무처럼 뽑혀진 발목들이 돌아오는 봄이다.
가족인 양 한 무더기 노루귀 짝 잃고 피어나는 복수초,
그때 신발 흩어진 것처럼 봄날 떡잎 잃은 목숨처럼
붉고 노란 개나리 진달래 일어서는 서우봉
모였다 흩어지는 바람에 재잘재잘 흔들리는 유채꽃
제일 먼저 동백꽃은 생피 솟듯 언제나 단숨에 달려왔다
꽃 진 자리를 용케 알고 아니 여기서 까맣게 식었다
햇빛에 불려 나오는 발목들 정녕코 여기서 접혔다고
산비탈마다 맨발 맨손으로 꽃이 된 신발들이다
아무런 값없이 이유도 모르고 함부로 꺾이고 잘렸지만,
화인火印으로 돌아오는 한라산은 벌건 꽃밭이 되었다
그래서 속절없이 빛나는 너븐숭이 옴팡밭 곤을동
봄나물처럼 살았는데 갑자기 들이닥친 폭력에 져버린
수천 수만 꽃신들이 어깨에 맺힌 폭력 툭툭 털고 있다
살았을 때에는 고무신 꿰매었지만 이젠 꽃신을 신었다
진흙이 묻은 얼굴로 여기저기 밭에 버려진 남루였지만
함부로 쏘다닌 흉기에 뚝뚝 부러진 동백꽃이었지만
동지冬至 건너고 말았는가 꽃신들이 여기저기 오고 있다.
강태승_2014년 계간 문예바다 신인문학상. 김만중문학상, 머니투데이 경제신문 신춘문예 대상. 시집 칼의 노래 / 격렬한 대화 / 울음의 기원. 응모시집: 울음의 기원
■작품상 (최지안 : 시 3편)
가젤 같은 거
횃불을 높게 들어 올린다. 감지 않은 눈동자는 신이 두다 남기고 간 바둑돌 너에게도 꽃놀이패 묘수가 있던 거지
처음으로 찬찬히 내려다보는 가젤의 몸. 죽어서 온몸으로 동굴을 만드는 네 속에서 장묘를 치른다.
화려했던 가체 뿔, 긴 머리 여인의 고동색 치장은 아직 흘러내리지 않았으나 속에서부터 무너지는 산사태. 사바나! 질주를 그리던 등허리는 여전히 벌판의 소란 곁인데
나는 머리를 땋고 굴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으로 네게 다정해져 본다. 소화시키다 만 덤불과 불한당들 산성의 웅덩이에서 한 사람이 표류하고 있다. 나는 그걸 걸머지고 그저 붕 떠있었을 뿐 네게 종교인 적 있었어도 구원인 줄 몰랐는데
죽은 가젤 앞에서 으르렁대는 표범, 매서운 눈을 장기 알의 포신처럼 겨누는 놈이 온다. 놈을 내쫓아도 그것은 내가 으르렁대던 환청. 엄마 여기 뿌리내린 갈빗대와 박쥐 무리가 있어 손 휘저어도 몰려드는 공중 도돌이표들은 오늘도 적당히 으르렁댔다가 전복된다. 나의 이명, 음파로 불리는 각다귀 무리와 장송곡. 한동안 가젤의 허리춤에 종유석으로 돋아있었다.
박쥐는 머리에 한 뭉치 치장도 없어서 가볍다(그건 나일까) 바닥에 떨어진 검은 심장을 깜빡이는 눈이라 생각했으니 매일 불을 가져오는 프로메테우스 꿈만 꾸었다. 무병장수하는 박쥐와 표범 (둘은 나일까) 나는 불을 버리고 박쥐 옆에 나란히 단조로 매달린다. 너의 눈은 바닥에 나의 이마는 하늘에, 가젤에게 더러운 발끝만 보여 줘 왔다.
굳어가는 빙정 속 이곳을 몰래 떠나와 나는 네 발로 기어갔을까 비린 날개 펄쩍이며 날아갔을까. 거울을 보면 박쥐와 표범을 섞은 키메라 하나 주머니에 손을 넣고 삐딱하게 서있다. 이제 무너지는 동굴 그리고 여기 더 없을 가젤 같은 거
오고 계시죠 붉은 나무 흰토끼 숲
오늘은 사막을 참아야 해
뜨거워지려는 기분을
후끈하게 혀 내미는 토스트마저
나는 어젯밤 열대야를 다 팔아서 차갑고 하얀 발, 원주민식 이름을 지어버린 뒤야
이제 황량한 땅을 건너 붉은 나무숲으로 간다
일년내내 우기雨期인 이상한 나라
여긴 사람들이 모래알로 분별없이 엉켜있어
분명 부딪히는데 어느샌가 저 멀리 서있는
도시인들, 무엇보다 간결하고 아름다운 섹스야
사구에서 빠져나오려 남의 머리를 밟지 않는 숲 토끼의 하얀 발바닥이 있을 거야
내 뒤로 검은 발자국
사막에 찍어버려서
하루치 식량을 구워내려 만든 여행자의 형틀 같아 테두리부터 그을린 붕어빵들
도망친 곳에 낙원 같은 숲이 걸려 있을까. 물고기들이, 안개를 묘사하는 물푸레들이 모래 둔덕 한복판에서 꾸물거리는 저 마지막 춤
그런데 앨리스의 흙구덩이
그런데 붉은 나무숲의 카드 병정들
탈출해 도착한 숲은 바스러져 사막이 되어있어 홍등가를 닮은 저 붉은 나무 숲
몸은 작아졌다 커지면서 나무의 어깨에 갇힌다. 여기저기서 토끼 굴에 빠지는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 하얀 발은 이제 회색 유령이야 더러워졌어. 나무 위 고양이는 생선을 다 잡아먹었군
도망자의 풀섶 여기저기서 무정하게
붉은 나무 숲에서 발밑은 모래 조각으로 부서지는가
서리 내리는 저 심장의 웅숭깊은 곳
우린 왜 자꾸만 오이밭에 누워?
이 밭에서 풋풋한 냄새를 맡으면 우리가 풀처럼 선량한 연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잖아
등에 더러운 흙이 묻는데
우린 새하얀 와이셔츠를 즐겨 입는다
주머니에 차오르는 자갈을 비워내면서 노란 꽃으로 비 가리고
이대로 영영 누워
지렁이의 느낌으로 땅을 뒤섞고 싶다. 맨바닥에 옆으로 누워서 잠을 자는 당신, 나는 더 의욕적으로 재즈를 틀 거라고 말했지 너를 위해 심장의 한쪽 방을 비워 내고 하냥 거기 뽑혀질 잡초 같은 걸 무시로 심다가, 너를 위한다는 건 거짓말 나를 위해, 나를 위해 이 무용한 일들이 우리의 몸과 살이 흔들리지 않는 뿌리가 되어줄 거라고. 물컹한 오이의 뼈를 붙잡아 줄 거라고 생각만, 생각만 했었다…………
별거 아닌 오늘을 살아버리면 어떻게 하나 그래도 오이넝쿨은 오래오래 우리에게 엉겨 붙어줄까
뜻밖이야 나는 오이밭에서 일어나 무분별하게 핀 꽃만 보는데 새하얀 네가 저 진흙탕 속에 아직도 누워있다는 거. 옆자리를 비워 두고 무성한 풀 더미를 심어달라고 내게 빌고 있잖아
나는 한나절 비 오는 봄밤 야트막한 오두막
옆에 무단으로 누워서 높은 곳을 묻혀 온 물을 맞고 싶다. 곁에는 울리는 너의 영원한 노랫소리와 아이 같은 얼굴
최지안_시집 ‘이대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천년의시작)’, ‘아무튼 불가능한 세계(시인동네)’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공부했으며 천강문학상 우수상, 경상일보 신춘문예에 작품 ‘새 놀이’가 당선됐다. 광주일보 문화부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다. 광주문화재단 창작지원금을 3회 수혜받았다. 응모시집: 이대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제6회 김명배문학상 심사평 / 유종인(심사위원장)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여러 시편과 산문(평론)을 일별했다. 시편에는 시와 동시, 시조가 고루 포진했고 산문 평론은 한 편이 올랐다. 시집과 시편 원고를 보낸 시인들의 열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만큼이나 다양한 시적 주제와 소재, 표현의 색채 등은 하나의 경향으로 꿰기 어려울 만큼 나름의 진취적인 개성을 보였다. 무엇보다 흥미롭고 새로운 점은 아동문학 특히 동시의 일취월장이었다. 전통적인 대상 장르로 취급되던 시를 밀어내고 이번엔 동시에 대상이 주어졌다.
최지원의 동시 <나이테> 외(外)는 현대 아동문학이 갖추어야 할 요소와 타파해야 할 지점을 영리하게 잘 취합하고 있는 듯하다. 새뜻한 상상력과 발랄한 표현, 따뜻한 정서가 서로 촉매처럼 작용하며 한 편의 동시를 맛깔나게 구성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무엇보다 사랑의 너름새를 가진 동심이 두루 번져있는 가편(佳篇)들로 읽고 느끼고 되새기는 맛이 출중했다. 대상으로 미는데 흔쾌히 동의하였다.
강태승의 <손과 손> 외(外)는 사물을 보는 참신한 시각이 우선 압도적으로 다가온다. 평범한 대상이 가진 범상치 않은 비의(秘意)를 들춰내는 눈썰미는 시인이면 누구나 갖춰야할 덕목일 텐데 이 시인에게 있어 그런 안목은 수승(殊勝)한 지경에 이른 듯하다. 삶이라고 하는 전장과 자연이라는 생태가 어우러져 일으키는 스파크를 끄집어내 보여줄 줄 아는 그 남다른 눈길에 애호의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최지안의 <가젤이란 거> 외(外)는 저온(低溫)과 어둠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는 일종의 내면성을 발랄한 상상력과 경쾌한 시문으로 돋아내는 기지와 활력이 좋았다.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세계와 자아라는 두 줄의 궤도에 시라는 기차를 굴리는 듯한데 그 기차가 청룡열차거나 롤러코스터 수준으로 흥미롭게 전개되는 맛이 신선했다. 이런 시들의 활성(活性)에 따뜻한 눈길과 박수를 주지 않을 수 없다.
선(選)에는 들지 못했지만 열정과 시도가 갖는 열심인 응모작들과 시인에게 대상 못지않은 격려와 위로를 드리고 싶다. 후일의 더 좋은 작품으로 인연이 되리라 믿는다.
김선아, 김겨리, 유종인(대표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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