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신히 본진으로 돌아간 조조는
먼저 전위에게 큰상을 주고 그를 영군도위로 삼았다.
그리고 하후돈을 비롯한 다른 장수들과 사졸 들에게도
각기 그 공에 따라 비단과 금을 내려 위로했다.
그 무렵 자신의 진채로 돌아가 있던 여포는
진궁을 불러 조조를 깨뜨릴 의논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들은 덕택에 서쪽 진채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조조까지 사로잡을 뻔하고 보니 새삼 진궁이 돋보였던 것이다.
여포가 자신을 믿기 시작하자 진궁도 힘이 났다.
사람이 좀 단순하고 지모가 부족하기는 하지만 잘만 돕고 이끌면
여포를 통해 어떻게 자기의 뜻을 펴볼 길도 있을 것 같았다.
이에 진궁은
진작에 생각해 둔 계책 하나를 여포에게 펼쳐 보였다.
"복양성 안에 전씨성을 쓰는 부호가 있는데,
집안에서 부리는 종만 천이 넘는 군의 큰 호족입니다.
그를 시켜 조조의 신중에 글을 보내게 하되,
내용은 '온후(=여포)께서 잔포하고 어질지 못해 백성들의 마음속에 원한이 커지자
여양으로 옮기시려 한다'고 알려 주게 하십시오.
그리고 '복양성은 고순을 남겨 지키게 하고 있으나
밤을 틈타 군사를 내면 자기는 성안에서 응접하리라'고 쓰게 하십시오.
꾀를 부리기 좋아하는 조조라 그 글을 받으면 틀림없이 응할 것입니다.
그때 그를 성안으로 꾀어들여서 네 성문에 불을 지르고 바깥에는 복병을 숨겨 두면
조조가 비록 하늘로 솟고 땅을 가르는 재주가 있다 한들 어찌 달아날 수 있겠습니까?"
여포가 들어보니 훌륭한 꾀였다.
곧 진궁의 말을 좇아 부호 전씨를 불러 들여 진궁이 말한 대로하도록 했다.
여포의 다스림 아래 있는 처지라 전씨도
그런 여포의 명을 어기지 못했다.
전씨의 밀서를 지닌 사람이 조조의 진중에 이른 것은
두 번씩이나 싸움에 진 조조가 울적해 있을 때였다.
"복양성 안의 부호 전씨가 몰래 사람을 보내 밀서를 전해왔습니다."
"이리 가져오너라."
밀서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지금 여포는 이미 여양으로 떠나고 성안은 거위 비어 있다 할 만합니다.
장군께서는 급히 오셔서 이성을 거두도록 하십시오.
저는 마땅히 성안에서 내응하겠습니다.
성 위에 의자를 크게 쓴 깃발을 내 걸면 그게 곧 때를 알리는 암호가 될 것이니
그리 아십시오.>
읽기를 마친 조조는 크게 기뻐했다.
"하늘이 내게 복양성을 주시는구나!"
그렇게 말하며 밀서를 가지고 온 사람에게 두터운 상을 내리는
한편 군사를 움직일 준비에 들어갔다.
여포의 계략임을 조금도 의심치 않은 것은
그만큼 그가 알고 있는 여포의 됨됨이와 그토록 단수 높은 계략이
너무도 어울리지 않게 여겨진 탓이었다.
☆☆☆
유엽이 그런 조조를 일깨웠다.
"여포가 비록 꾀 없으나 진궁은 지모가 있는 인물입니다.
이 일에 속임수가 있을지도 모르니 반드시 대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명공께서 정히 가시겠다면 군을 3대로 나누어
두 부대는 성밖에 매복해 밖에서 접응케 하시고
한 부대만 성안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기쁨으로 들떠 있는 가운데도 조조는 그 말을 옳게 여겼다.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복양성으로 향했다.
성 아래 이르자 조조는 먼저 성벽 위를 살폈다.
과연 성문 위에
의자를 크게 써 둔 백기 하나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밀서에 씌어 있던 대로라 조조는 속으로 은근히 기뻤다.
거기다가 더욱 조조의 마음을 놓게 한 것은 정말로 여포가 보이지 않는 일이었다.
조조의 군사가 온 줄 알고 갑자기 성문이 열리며 두 장수가 군사를 이끌고 나오는데
전군은 후성이 이끌고 있고 후군은 고순이 이끌고 있었다.
조조는 곧 전위를 내보내 후성을 잡게 했다.
원래 후성은 전위의 상대가 아니었다.
몇 합 어우르지도 못하고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전위가 그를 쫓아 적교 부근까지 이르니
후군을 맡고 있던 고순도 당해 내지 못하고 성안으로 쫓겨 들어갔다.
성을 나왔던 여포의 군사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자
성문 앞에는 크게 반란이 일었다.
그때 성안에서 군사 차림을 한 몇 사람이
그 혼란을 틈타 조조의 진중으로 뛰어들어 조조 보기를 청했다.
조조가 만나 보니 전씨가 다시 보낸 사람이었다.
그가 밀서를 내놓는데 내용은 이러했다.
<오늘 밤 초경에 성 위에서 징소리가 나는 걸 신호로 군사를 진발 시키십시오.
저는 마땅히 성문을 열어 장군의 군사를 맞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조조는 됐다 싶었다.
하후돈으로 하여금 한 무리의 군사와 함께 왼편을 맡게 하고
조조는 오른쪽을 맡아 스스로 하후연, 악진, 이전, 전위 네 장수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성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이전이 다시 한번 걱정스런 얼굴로 조조에게 권했다.
"주공께서는 성밖에 계시도록 하십시오.
저희들이 먼저 성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러나 조조는 꾸짖듯 대답했다.
"내가 가지 않는다면 누가 앞으로 나가려 들겠느냐!"
실로 나아갈 때는 앞장을 서고 물러날 때는 뒤에 처지는
맹장의 기백인 동시에 조조의 그토록 잦은 군사적 성공의 요체가 되는 특징이기도 했다.
그날 밤도 마찬가지였다.
전씨가 약속한 초경이 되었을 무렵
조조는 앞장서서 군사를 이끌고 성 아래로 갔다.
아직 달이 뜨지 않아 어두운 성 아래서 기다리는데,
홀연 성문 위에서 징소리와 소라소리가 시끄럽게 울리며 수많은 횃불이 피어올랐다.
이어 성문이 크게 열리고 적교도 조조의 군사를 손짓하듯 내려졌다.
모든 것이 전씨가 밀서에 써보낸 대로였다.
조조는 더 망설일 것 없이 군사를 몰아 성안으로 들어갔다.
전씨의 사람들이 내응한다고는 하지만 어찌 된 셈인지
주아(주를 다스리는 관부)에 이르도록 가로막는 군사 하나 없었다.
그제야 조조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급히 말머리를 돌리며 소리쳤다.
"적의 계략이다. 어서 군사를 물려라!"
그러나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조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안에서 방포 소리가 크게 울리더니
홀연히 네 성문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이어 북과 징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군사들의 함성이 강물을 뒤집고 바닷물을 끓게 하듯 터져 나왔다.
조조가 아뜩한 정신으로 사방을 둘러보니
동쪽 거리에서는 장료가 군사를 이끌고 달려나오고
서쪽에서는 장패가 달려나왔다.
겁먹고 혼란된 조조의 군사들이라 제대로 싸움이 될 리 없었다.
조조 역시 싸워 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북문 쪽으로 달아나기 바빴다.
그러나 미처 북문에 이르기도 전에
이번에는 학맹과 조성이 나타나 한차례 조조의 얼을 빼놓았다.
변변히 싸워 보지도 못하고
많은 군사 만 꺾인 채 조조는 황망히 남문을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그새 뒤를 따라붙은 고순과 후성이 다시 조조의 군사를 덮쳤다.
크게 성난 전위가 두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갈며 그 둘을 맞았다.
쌍철극을 휘두르며 부딪쳐 가는 그 기세가 얼마나 위맹한지
고순과 후성은 겁부터 먼저 났다.
두어 번 창칼을 맞댄 뒤 거꾸로 달아나 성밖으로 사라졌다.
그들을 쫓아 적교에까지 이른 전위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다 조금 전까지 모시고 있던 조조가 보이지 아니했다.
이에 전위는 몸을 돌려 성안으로 뛰어들었다.
문께에 들어서자마자 이전과 부딪치듯 만났다.
"주공께서는 어디 계시오?"
전위가 다급하게 물었다.
이전 역시 황당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도 또한 찾고 있으나 뵈지 않는구려."
"당신은 성밖으로 나가 구원을 재촉하시오.
나는 성안으로 들어가 주공을 찾아보겠소."
전위는 그렇게 말하고 성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성안 뒤져도 조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답답한 전위는 다시 여포의 군사들을 뚫고 성밖으로 나왔다.
성밖 물가에서 이번에는 역시 조조를 찾고 있는 악진을 만났다.
"주공은 어디 계시오?"
악진이 물었다.
전위가 무겁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나 역시 성안을 오가며 찾았으나 아직 찾지 못했소."
"그럼 함께 치고 들어가 주공을 구합시다."
악진이 창을 꼬나 쥐며 말했다.
이에 두 사람은 다시 말머리를 나란히 성안으로 뛰어들었다.
두 사람이 성문에 이르니 성 위에서 화포가 거세게 퍼부어 악진은 말을 달릴 수가 없었다.
전위 혼자 연기와 불 사이를 뚫고
성문 안으로 뛰어들어 이곳저곳을 뒤지듯 조조를 찾았다.
☆☆☆
한편 조조는 전위가 고순과 후성을 쫓아 남문 밖으로 나가 버리자
벌떼처럼 몰려 길을 막는 여포의 군사들 때문에 남문으로는 나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말머리를 돌려 북문을 가는데
방천화극을 끼고 말을 달려오는 여포와 똑바로 마주치고 말았다.
☞ 조조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말에 채찍을 가해 급하게 여포를 스쳐갔다.
그런 여포는 무슨 생각이 났던지 곧 조조를 뒤쫓아와 화극으로 조조의 투구를 치며 물었다.
"어이. 조조는 어디 있는가?"
아마도 조조를 자기편 졸개로 안 모양이었다.
☞ 조조는 가슴이 철렁하는 가운데도 정신을 가다듬어
자기가 가는 곳과 반대쪽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저 앞에 누런 말을 타고 있는 자가 그놈입니다."
조조의 천연덕스런 말에 속은 여포는 곧 조조가 가리킨 쪽으로 말을 몰아 갔다.
여포가 떠나기 무섭게 조조도 말머리를 돌려 이번에는 동문으로 달렸다.
"주공!"
갑자기 한 장수가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 나타나 조조를 불렀다.
다름 아닌 전위였다.
조조는 지옥에서 부처라도 만난 기분이었다.
전위는 조조를 옹위한 채 닥치는 대로 적을 찌르고 베며 한 가닥 혈로를 뚫었다.
그 기세가 하도 사나워 마침내 길이 열리고 둘은 성문 부근까지 이를 수 있었다.
그러나 성문에는 불길이 맹렬하고,
성벽 위에서 던지는 마른 풀 더미에 불길은 부근까지 번지고 있었다.
도저히 뚫고 나갈 성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대로 성안에 머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전위가 앞장서며 말했다.
"주공 제가 이 불길을 헤쳐 보겠습니다. 바짝 뒤따르십시오."
그리고 쌍철극을 휘둘러 앞을 가로막은 불 더미를 헤치며 앞으로 내달았다.
조조도 정신없이 그런 전위를 뒤따랐다.
그러나 간신히 성문에 이르렀는가 싶을 때였다.
불타던 성문이 우지 끈 내려앉으며
불붙은 대들보 하나가 똑바로 조조와 말 엉덩이를 덮쳤다.
비명과 함께 말이 쓰러지면서 조조는 땅에 떨어졌다.
불붙은 대들보를 손으로 밀어 간신히 타죽는 건 면했지만
그 바람에 조조는 수염과 머리칼을 다 태우고 여기저기 화상을 입었다.
전위가 말머리를 돌려 그런 조조를 구하려 할 때 마침 하후연이 나타났다.
둘은 힘을 합쳐 조조를 일으키고 불구덩이 속에서 빼냈다.
그리고 하후연의 말에 조조를 태운 뒤 넓은 길로 달려나갔다.
그렇게 어지럽게 뒤섞여 싸우는 동안에 날이 훤히 밝았다.
그제야 사방을 분간할 수 있게 된 조조는
두 장수의 목숨을 건 구함에 힘입어 친히 자신의 진채로 돌아갈 수 있었다.
☆☆☆
조조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말을 듣자
여러 장수들이 찾아와 문안을 드렸다.
조조가 앙연히 웃으며 소리쳤다.
"내가 잘못하여 그 하찮은 여포 놈의 술책에 걸렸구나. 반드시 이 빚을 갚으리라!"
그러고는 다시 여포 깨뜨릴 의논을 했다.
곽가가 조조의 의중을 살핀 듯 나직이 말했다.
"계책은 되도록 이면 속히 베푸시는 게 낫습니다."
곽가는 조조가 앙연히 웃는 걸보고
그의 마음속에 이미 계책이 서 있는 걸 꿰뚫어 본 것이었다.
과연 조조는 곽가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마음속의 계책을 털어놓았다.
"이번에는 내가 거꾸로 적의 계책을 좀 이용해야겠다.
간밤에 내가 불에 데어 5경쯤에 죽었다는 거짓말을 퍼뜨리도록 하라.
여포가 그 말을 들으면 반드시 성을 나와 공격할 것이다.
그때 나는 마릉산에 복병을 두었다가 여포의 군사가 반쯤 지나갔을 적에
들이치면 놈을 사로잡을 수 있으리라."
"실로 좋은 계책입니다."
곽가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에 조조는 곧 군사들에게 영을 내려
발상을 하고 자신이 죽었다는 말을 퍼뜨리게 했다.
두 군사가 싸우면 반드시 첩자가 있게 마련이다.
조조가 죽었다는 말은 곧 복양성 안에 있는 여포의 귀에도 들어갔다.
조조가 온몸이 불에 덴 채 본진에 도착하자마자 숨을 거두었다는 내용이었다.
간밤 조조의 처지가 꼭 죽게 된 것을 잘 아는 여포인지라 그 말을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말을 듣기 바쁘게 되는대로 군사를 점고하여 조조의 진채가 있는 마릉산으로 달려갔다.
딴에는 이 기회에 조조의 세력을 뿌리뽑자는 생각이었다.
여포의 군사가 마릉산을 반쯤 지나
저만큼 조조의 진채가 보이는 곳에 이르렀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한차례 북소리가 울리더니 사방에서 함성과 함께 복병이 일어났다.
"속았구나!"
여포는 그렇게 외쳤으나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간밤 조조에게 준 빚을 톡톡히 돌려 받은 뒤 간신히 복양성 안으로 쫓겨 들어갔다.
그리고 조조의 꾀에 질렸는지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다시는 나와 싸우려 들지 않았다.
싸움은 자연 길게 끌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해 따라 메뚜기 떼가 크게 일어 벼를 모두 먹어치우는 바람에
관동 일대에는 쌀 한 섬에 전 50관이나 되도록 값이 치솟고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을 만큼 흉년이 들었다.
그렇게 되니 조조도 군량이 없어 싸울 도리가 없었다.
할 수 없이 포위를 풀고 견성으로 돌아가니 이로써 복양성의 풍운은 잠시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