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선씨(寶城宣氏)-34,842
호남매일 전남지역 본관성씨
2012.10.19.금
시조 선윤지(宣允祉)는 1382년(고려 우왕 8년) 명나라 때 사신으로 고려에 왔다가 귀화했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와 안렴사가 되어 해안지방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한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벼슬을 버리고 보성에 정착한다. 그래서 후손들이 보성을 본관으로 삼았다.
같은 보성선씨이면서도 전라남도 보성군 오성면 도촌에 사는 도촌파(道村派)는 그들의 시조가 선윤지(宣允祉)보다 앞선 공민왕 때의 선천주(宣天柱)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지난 1978년 합보(合譜)하면서 선윤지(宣允祉)를 시조로 하고 선천주(宣天柱)를 시조와 동행(同行)으로 정리해서 같은 혈족으로 통합했다. 그러나 지금도 일부 종친들은 다른 주장을 제기한다. 우리나라 선씨(宣氏)는 패주군(貝州君) 선용신(宣用臣)을 시조로 하는 도촌파(道村派)와 선윤지(宣允祉)를 시조로 하는 갈몰파로 양분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조선조 1749년까지는 선용신(宣用臣)을 동일 시조로 한 족보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 뒤 선용신의 차손 선윤지(宣允祉)가 시조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여전히 논란거리가 되는 대목이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보성선씨 문중은 대대로 벼슬길에 올랐다. 조선 초 우찬성을 지낸 선 화(宣和.1415-1456)는 현감 재임 시 정사를 잘 처리하여 두 번씩이나 고을 수령을 지냈다. 그의 아들 선 형(宣炯)과 그의 후손 선거이(宣居怡), 선약해(宣若海), 선세강(宣世綱) 등이 모두 무과에 올라 충절을 보였다. 세상에서는 이들과 시조 선윤지를 아울러‘선씨오충신(宣氏五忠臣)’이라 부른다. 이들 오충신은 1799년 전남 보성군 보성읍 보성리에 세워진 오충사(五忠祠)에 배향되어 후세의 추앙을 받고 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인물은 유성군 선 형(1434-1479)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의주목사, 황해도관찰사 등을 거쳤다. 세조 13년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군사 1천명을 이끌고 나가 큰 공을 세워 적개공신에 오르고 병조판서가 되었다. 성종 때 좌리공신에 책봉되고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평안북도 수군절도사로 나가 북변의 야인을 토벌했다.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러 보성선씨 문중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그의 증손자가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선거이(1550-1598)이다.
9세조인 선약해는 선조 38년에 무과에 급제하고 인조 때는 문과에 오른 문무겸전의 인물이다. 선세강도 선조 36년에 무과에 올라 병자호란이 일어나 자 안동영장으로 격전 중 전사했다. 선세강의 아우 선세휘는 조선 중기 춘추관기사관, 지평, 장령 등 벼슬을 지내며 대북파(大北派)에 가담했다. 영창대군과 그의 어머니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는 데 앞장섰다가 인조반정으로 대북파가 실각하는 데 휩쓸렸다. 이때부터 선씨 집안은 한동안 기운이 쇠퇴했다.
현대인물은 선남식(변호사), 선병기(고려대교수), 선병택(한양대교수), 선양래(한양대교수), 선덕영(이비인후과원장), 선병순(서울종로구청과장), 선미봉(변호사), 선동언(공군본부행정감실 문관협회장), 선판석(선씨대종회총무), 선준영(제네바공사, 외무부통상국장), 선형기(예술원조사과장), 선규룡(강서제일병원원무과장), 선병선(호남비료부장), 선양규(주택은행지점장), 선희식(가톨릭의대교수), 선영재(축구해설가), 선호윤(서울구의우체국장), 선인원(대한체육회훈련단지도위원), 선금규(시원산업전무), 선병곤(유미공업이사), 선병막(한국문화재서울보급소장), 선상균(우성보일러전무), 선수득(진양에멜존산업대표), 선 용(삼림콘절탄트사장), 선병만(광남운수사장), 선병준(대창정비공업상무), 선영규(전남대교수), 선종현(정당인), 선승원(서울대호출판사사장), 선무구(광주일보편집부장), 선병묵(보은농지개량조합장), 선병인(서창주조장대표), 선현수(구례농지개량조합장), 선태훈(담양군청과장), 선덕재(서울강남성심병원 내과과장), 선명훈(의학박사), 선호영(정형외과원장), 선학균(관동대교수), 선형재(서울구로전화국장), 선군성(효성여대교수), 선경균(중앙화학공업사사장), 선광영(럭키화재해상상무), 선병돈(금성포스타대표), 선덕임(약사), 선종훈(약사), 선아란(약사), 선충근(무궁화농원대표), 선재홍(선진기업대표), 선팔규(선일금속대표), 선태원(한일스포츠사대표), 선호석(태형상사회장), 선 탄(산업기지개발공사이사), 선정규(육군대령), 선채규(한국기업연구원이사), 선성춘(한양대업전무), 선호일(동우산업전무), 선상기(신안선관위사무과장), 선정근(숭전대교수), 선영도(대한요식업중앙회 홍보실장), 선완규(세방그룹 비서실장), 선 왕주(내과원장), 선영제(육군중령), 선병무(재경종친회총무), 선주연(약사), 선관수(약사), 선정규(약사), 선춘임(약사), 선희중(약사), 선정희(약사), 선중기(약사), 선정일(약사), 선병덕(한의사), 선재의(줌디자인대표) 씨등이다. (무순, 전 현직 구분 안 됨)
항렬자는 21世 규(圭) 석(錫) 호(鎬) 영(泳), 22世 종(鍾) 태(泰) 영(永)상(相), 23世 호(浩) 래(來) 주(柱) 병(炳), 24世 동(東) 용(容) 병(炳) 수(壽), 25世 무(戊) 무(茂) 성(成), 26世 기(己) 기(起) 희(熙), 27世 경(庚) 경(慶) 강(康), 28世 행(幸) 재(宰) 신(新), 29世 임(壬) 성(性) 중(重), 30世 계(癸) 천(天) 발(發)이다.
본관 보성(寶城)은 전라남도 남부 중앙에 위치한 보성군(寶城郡) 지역의 옛 지명으로 마한 54국 중 불운국(不雲國)이었다고 한다. 백제 때에는 복홀군(伏忽郡)이라 불리었고,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보성군(寶城郡)으로 개칭되어 현재까지 쓰이고 있다. 고려 태조는 삼양군(三陽郡)이라 하였으며, 996년(성종 15)에 패주(貝州)로 고쳤다가 1018년(현종 9)에 다시 보성군(寶城郡)이 되었다. 1441년(세종 23)에 조양현(兆陽縣)과 복성현(福城縣)을 제외한 대부분의 속현이 흥양현으로 이속되어 면적이 크게 축소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나주부 보성군, 1896년에 전라남도 보성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권역이 다시 확대되었고 1941년에 보성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보성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보성김씨(寶城金氏), 보성박씨(寶城朴氏), 보성선씨(寶城宣氏), 보성손씨(寶城孫氏), 보성안씨(寶城安氏), 보성오씨(寶城吳氏), 보성이씨(寶城李氏), 보성임씨(寶城林氏), 보성전씨(寶城全氏) 등이 있다.
집성촌은 전남 보성군 조성면 봉능리, 전남 보성군 조성면 매현리, 전남 보성군 웅치면 중산리, 전남 보성군 보성읍 봉산리,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 광주광역시 광산구 도산동, 전남 장흥군 안양면 당암리 등이다.
특히 전남 보성군 보성읍 봉산리 노산마을은 4백50여 년 동안 보성선씨의 보금자리다. 강원도에서 현감을 지낸 선국형(宣國衡)이 처음 이곳에 온 뒤 텃밭이 되었다. 효자, 효부, 열녀비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으며 장수마을로도 유명하다. 특히 여순반란 사건과 6.25 동란 때에도 단 한 사람의 희생자가 없었던 곳이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모두 36명이다. 문과 7명, 무과 14명, 사마시 14명, 음양과 1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