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Ⅲ. 명적소리의 원인과 최적화 Ⅴ. 명적의 기능 |
Ⅱ. 화살의 종류 Ⅳ. 명적의 역사 Ⅵ. 맺음말 |
우리민족의 활 그림 대표명작!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바로 무용총 수렵도인데, 고구려의 고분벽화인 이 그림은 산과 들은 단순화시킨 반면 인물과 사냥감은 아주 사실적으로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질주하는 말위에서 필사적으로 달아나고 있는 한 쌍의 사슴을 향해 지금 바로 화살을 날릴 것만 같은 사수의 역동적인 모습은 과연 이 그림을 활 관련 그림의 백미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그림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살의 모양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화살촉의 모양과는 상당히 달라 보인다. 끝이 뾰족한 창 모양이 아니라 세 갈래로 갈라져 있는데다가 뭉툭한 깍지까지 달려있다. 저런 뭉툭한 촉이 과연 짐승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런지가 의문이다.
웬만큼 활에 대한 관심이 있는 이라면 이 특이한 모양의 화살이 바로 목표를 향해 날아갈 때 소리내어 운다는 명적(鳴鏑)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금년 여름 필자가 몸담고 있는 화랑정에서 양평으로 풍류 활쏘기(?)를 하러 가게 되었다. 평상시 명적을 보기만 했었지 한 번도 실지로 쏘아 본 적이 없었는데 양평정에서 처음으로 명적 소리를 듣게 되었다.
당시 사용한 명적은 탁구공 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목재 소리통이 달린 명적으로 외공이 뚫린 형태였다. 드디어 145m 과녁을 향해서 첫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화살은 채 40m를 날지 못하고 땅으로 곤두박질 쳤고, 화살의 소리 또한 근처의 사람들이 그저 들을 수 있는 정도였다. 일반적인 화살에 익숙한 사람들이 쏘기엔 너무 무거웠던 것이다. 다시 시관을 아주 높여 발시하였는데 거리는 먼저 번 보다는 멀리 나아갔으나 소리의 크기는 별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필자가 기존에 알고 있던 명적은 전쟁의 시작을 알리거나 전투 중 신호용으로 사용하는 것이라서 상당한 거리를 비행하며 날카로운 소리를 발생시키는 것이었는데, 이날의 명적 시연은 기대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이후 필자는 명적이 언제부터 만들어져 사용되어 졌는지, 또 명적의 종류와 용도는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하였고, 국궁문화연구회의 세미나 자리를 빌어 명적에 대해 조사해 보게 되었다.
연구 소재의 선택에 있어 다양한 화살류 중 하나인 명적에 국한시켜 진행하다보니 실물자료가 너무 부족하여 유물의 분류가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사회 문화적인 기능의 분석 또한 화살류 전체의 기존 분석에서 별로 나아간 바가 없다. 또한 필자의 능력과 시간부족을 핑계로 명적 소리의 원인 및 최적화에 대한 부분은 선행 연구자의 자료로 대신하고 본고에서는 명적의 기원과 쓰임에 논의의 촛점을 두고자 한다.
Ⅱ. 화살의 종류
현재 우리나라에 전하는 화살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 목전(木箭) : 나무로 만든 무게 8전의 화살로 무과 시험에 사용
○ 철전(鐵箭) : 화살촉이 박두처럼 둥글고 깃이 좁은 화살로 무과시험에 사용, 무게에 따라 육량전(六兩箭)․아량전(亞兩箭)․장전(長箭)으로 구분
○ 예전(禮箭) : 깃과 오늬가 큰 의식용 화살
○ 편전(片箭) : 통아에 넣어 발사하는 작은 화살
○ 유엽전(柳葉箭) : 화살촉의 모양이 버들잎과 비슷한 화살로 가볍고 화살깃이 작은 전투용 화살
○ 대우전(大羽箭) : 화살깃과 촉이 큰 화살로 주로 사냥과 의례용으로 사용
○ 착전(錯箭) : 화살촉이 끌 모양으로 생긴 전투용 화살
○ 세전(細箭) : 살대가 가늘고 촉이 작은 연락용 화살
○ 명적(鳴鏑) : 화살에 소리통이 달려 발사 시 소리가 나는 신호․수렵용 화살
○ 화전(火箭) : 화살촉대에 화약과 유황을 천으로 감고 심지에 불을 붙여 쏘는 전투용 화살
○ 독시(毒矢) : 화살촉에 독을 바른 화살
○호시(楛矢) : 광대싸리나무로 대를 만든 전투용 화살
○ 주살 : 오늬에 줄을 묶은 사냥 및 연습용 화살
○ 골각전(骨角箭) : 짐승의 뿔이나 뼈로 촉과 오늬를 제작한 화살
○ 영전(令箭) : 국왕이나 장수가 명령을 전할 때 신표로 사용하는 화살
○ 관이(貫耳) : 국왕이나 장수가 가진 생사여탈권의 상징으로 사형수의 귀를 꿰는 화살
○ 애엽전(艾葉箭명) : 유엽전의 뿌리 부분에 쑥 잎 모양의 가시가 있는 화살
Ⅲ. 명적 소리의 원인과 최적화(선행연구를 통하여)
화살에 관한 연구는 어느 정도 다양하게 이루어졌지만 구체적으로 명적에 논의를 한정하여 이루어진 연구는 별로 찾아볼 수 없다. 명적에 관한 가장 최초의 접근은 이자윤의 「소리화살과 그 원리*1)」로 명적의 명칭과 관련하여서는 화살 전체는 ‘소리화살’이라 하고 소리를 내는 명향(鳴響)부분은 ‘소리통’으로 나누어 부르는 것을 제안하였다. 이 논문의 가장 큰 특징은 명적을 관악기 원리로 이해하고 matlab*1)을 통하여 소프트웨어적으로 구멍의 수에 따른 소리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 것이 특징이다.
논문에 따르면 소리의 크기는 속도에 비례하고 흡입구의 크기에 반비례한다고 하였다. 즉 소리통의 크기가 커질 경우 속도가 느려지고, 흡입구가 다수인 경우 소리가 커지는 효과와 함께 다양한 변수가 작용될 것이므로 주파수와 속도가 변할 것으로 예상되며, 흡입구의 위치에 따라서도 조건이 달라진다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실험 결과 명적의 구멍이 3~4개 일 때 가장 높은 주파수의 소리가 난다고 하였다.
다른 연구로 2004년 과학전람회에 출품된 논문이 1편 있다. 경기과학고에 재학중인 김준호, 김준기의 「우는화살(명적)소리의 원인과 최적조건에 관한 연구」**2)이다. 이 논문은 무향풍동 실험을 토대로 소리의 최적조건을 제시하였는데, 소리의 발생 원리는 헬름홀츠 공명기***3)의 모습이며, 실험 결과 구멍지름이 7mm이고 개수가 5개 일 때 가장 소리가 크고 지속성을 띤다고 하였다.
상기 두 편의 연구는 역사성이나 기능 보다는 소리의 발생 원인과 최적조건에 논의의 중점을 두었다. 이외의 연구들은 거의가 명적에 관해 단편적으로 소개하는 정도이다.
Ⅳ. 명적의 역사
1. 명적의 다양한 명칭
<명적(鳴鏑)>
가장 널리 쓰이고 있는 명칭이다. 화살 전체를 뜻하지만 일부에서는 울림통 만을 의미한다고 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문헌 중 명적이라는 용어가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사기(史記)』「한서(漢書)」흉노열전 부분이다. 여기에는 명칭뿐만 아니라 명적의 기원과 기능을 알아차리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명칭이 기록된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冒頓乃作爲鳴鏑,習勒其騎射”
흉노 선우(單于) 두만(頭曼)의 태자 묵특(冒頓)이 두만을 시해 시에 명적을 만들어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기록으로는 『용비어천가』와 『성호사설(星湖僿說)』에 “태조는 초명적(哨鳴鏑) 이라는 큰 화살을 잘 이용했다. 이는 싸리나무로 화살대를 만들고 학의 날개로 넓고 길게 깃을 달았으며, 사슴뿔로 화살촉을 만들었는데 크기가 배(梨)와 같다....” 라 하여 명적이라는 명칭이 나온다. 『조선왕조실록』에도 “태조는 큰 깍지(大哨)와 우는 살(鳴鏑)을 쏘기를 좋아하였다. 싸리나무로써 살대를 만들고, 학의 깃으로써 깃을 달아서, 폭이 넓고 길이가 길었으며, 순록의 뿔로써 각지(哨)를 만드니, 크기가 배만 하였다. 살촉은 무겁고 살대는 길어서, 보통의 화살과 같지 않았으며, 활의 힘도 또한 보통 것보다 배나 세었다.”라는 기록이 전한다.
<효시(嚆矢)>
효시라는 말은 사물이 비롯된 맨 처음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옛날 전쟁 때 싸움을 시작한다는 신호로 적진에 우는 화살을 먼저 쏘아 보낸 데서 유래한 말이기도 하다.
『성호사설(星湖僿說)』<인사문(人事門)>에는 “或嚆矢內向巡校受鋒” 라는 기록이 전한다.
<울고두리(고도리)>
『우리말 큰 사전』에 보면 고두리란 물건 끝이 뭉뚝한 자리, 고두리살의 준말 이라고 해설이 되어있다. 고두리살은 작은 새를 잡는 데 쓰는 화살로써 철사나 대 따위로 고리처럼 테를 만들어 살촉 대신으로 살 끝에 끼운 것으로 울고도리는 소리 내어 우는 고두리를 말한다.
『역어유해보(譯語類解補)』에는 오도리(響樸頭)와 뿔고도리(骨鈚箭)라는 화살 명칭이 등장하는데, 오도리가 향전이고, 뿔고도리는 명적을 말한다(민승기).
<우는살(소리화살)>
이해하기 쉽도록 근래에 새롭게 쓰이는 명칭으로, 명적은 화살의 끝부분에 다는 음향발생 장치로만 간주한다. 이외에도 명적을 청나라에서는 초전(哨箭) 이라고 하였으며, 일본에서는 적시(適矢)라고 하였다.
이상과 같이 명적은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우는데 우리민족의 직접적인 기록은 아니지만 『사기(史記)』에 ‘명적(鳴鏑)’이라는 명칭이 정확히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문헌인 조선왕조실록과 용비어천가 등에도 그 명칭이 정확히 기록되어 있는 ‘명적(鳴鏑)’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2. 명적(鳴鏑)의 기원과 종류
명적의 등장
그림 **) 평양 영화9년명 전축분 화살촉
청동기시대에는 일부 청동제 화살촉이 등장 했지만 기존의 석촉 및 골촉과 형태상의 차이는 별반 보이지 않았고 여전히 석촉과 골촉이 주로 사용되어졌다.
철기시대 들어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형태의 금속제 화살촉이 제작되어졌다. 활의 성능이 발달하고 용도가 증대됨에 따라 자연히 화살촉 또한 각각의 사용용도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게 되었다.
앞서 소개한 『사기(史記)』「한서(漢書)」흉노열전 에는 명적에 관한 유명한 고사가 실려 있다.
史記 卷一百十 匈奴列傳 第五十
單 于 有 太 子 名 冒 頓 。 後 有 所 愛 閼 氏 , 生 少 子 , 而 單 于 欲 廢 冒 頓 而 立 少 子 , 乃 使 冒 頓 質 於 月氏 。 冒 頓 旣 質 於 月 氏 , 而 頭 曼 急 擊 月 氏 。 月 氏 欲 殺 冒 頓, 冒 頓 盜 其 善 馬 , 騎 之 亡 歸 。 頭 曼 以 爲 壯 , 令 將 萬 騎 。冒 頓 乃 作 爲 鳴 鏑 ,習 勒 其 騎 射 , 令 曰 : 「 鳴 鏑 所射 而 不 悉 射 者 , 斬 之 。 」 行 獵 鳥 獸 , 有 不 射 鳴 鏑 所 射 者, 輒 斬 之 。 已 而 冒 頓 以 鳴 鏑 自 射 其 善 馬 , 左 右 或 不 敢 射者 , 冒 頓 立 斬 不 射 善 馬 者 。 居 頃 之 , 復 以 鳴 鏑 自 射 其 愛妻 , 左 右 或 頗 恐 , 不 敢 射 , 冒 頓 又 復 斬 之 。 居 頃 之 , 冒頓 出 獵 , 以 鳴 鏑 射 單 于 善 馬 , 左 右 皆 射 之 。 於 是 冒 頓 知其 左 右 皆 可 用 。 從 其 父 單 于 頭 曼 獵 , 以 鳴 鏑 射 頭 曼 , 其左 右 亦 皆 隨 鳴 鏑 而 射 殺 單 于 頭 曼 , 遂 盡 誅 其 後 母 與 弟 及大 臣 不 聽 從 者 。 冒 頓 自 立 爲 單 于 。
사기 흉노열전
"흉노 (두만) 선우의 태자 이름은 묵특이다. 뒤에 (두만 선우가) 새로운 부인을 얻어, 어린 아들을 얻었다. 이에 (두만) 선우는 묵특을 태자에서 폐하고, 어린 아들을 태자로 삼으려 했다. 이에 묵특을 월시국에 인질로 보냈다. 묵특이 월시에 인질로 가있는 상태에서, 갑자기 두만 선우가 월시국을 공격했다. 이에 월시국에서 묵특을 죽이려 하자, 묵특은 좋은 말을 훔쳐타고 달아났다. 두만 선우가 이를 장하게 여겨, (묵특으로 하여금) 만명의 군대를 지휘하게 했다. 묵특이 명적을 만들어, (병사들로 하여금) 마상 사격을 연습하게 했다. (묵특이) "명적을 쏘았는데 사격을 하지 않는 자는 처형하겠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후 사냥을 가서, (묵특이) 명적을 쏘았는데도, 활을 쏘지 않은 자는 모두 처형했다. (묵특이) 다시 자기의 좋은 말을 향해 명적을 쏘았는데, 좌우에서 감히 (묵특의) 말을 쏘지 못한 자가 있었다. (묵특은) 이에 말을 향해 활을 쏘지 않은 자들은 모두 처형했다. (묵특이) 다시 자기의 첩을 향해 쏘았는데, 주변에서 두려워하여 (애첩에게) 활을 쏘지 않은 자는 또한 모두 처형했다. 얼마후 모두 사냥을 나갔는데, 명적으로 (두만) 선우의 말을 쏘았다. 주변에서 모두 선우의 말을 향해 활을 쏘았다. 이에 모둔이 주변 인물들이 쓸만하게 훈련되었음을 알았다. (묵특이) 그 아버지 두만선우를 따라 사냥을 갔다가, (묵특이) 두만선우를 향해 명적을 쏘았다. 좌우에서 모두 활을 쏘아 두만선우를 죽였다. (묵특이) 마침내 의붓어머니와 이복동생, 말을 듣지 않는 대신들을 모두 죽이고, 스스로 선우가 되었다."
진나라 말기에 오르도스 지방을 점령한 흉노의 추장 두만의 아들 묵특이 아버지를 명적으로 살해하고 스스로 선우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선우가 된 묵특은 한나라의 유방에게 대승을 거두는 등 대대적인 정복활동을 벌여 동으로 한반도 북부에서 북으로는 바이칼호와 이르티시 강변, 서로는 아랄해, 남으로는 중국의 위수와 티베트 고원까지 영토를 넓혔으며, 고조선도 이들과 인접하여 많은 교류를 하였다.
14세기 이슬람 역사가 이븐할둔은 세계의 역사는 유목민과 정착민의 투쟁의 역사라고 하였다. 이는 유목민과 정착민 사이에 전쟁을 통해 다양한 문화교류가 이루어졌음을 말한다. 고조선 역시 위만조선 시대를 전후하여 흉노로 대표되는 기마유목세력과 교류하였으므로, 기원전 3 ~ 2세기를 전후한 이 시기에 북방 유목민족과의 다양한 교류 속에서 명적 또한 유입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북방으로부터 유입이 아닌 자체 생산설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고조선을 구성하는 인적 구성을 보면 요하 동쪽의 ‘예족(濊族)과 중국 북방의 ‘맥족(脈族)’이 주축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맥족(脈族)은 중국 북방에 터전을 둔 사람들로서 활과 기마술이 뛰어난 종족이었다. 좀더 광범위하게 본다면 고구려에는 종족 계통이 다른 사람들도 많이 있었으며, 생활방식이 다른 사람들도 함께 살았다고 하였다. 원래 고구려를 건국한 종족은 예맥족이었지만, 이들 외에도 한족(韓族), 선비족(鮮卑族), 한족(漢族), 거란족 등 여러 계통의 사람들이 어울려 살았던 것이다(김현숙). 선비와 거란은 만주와 내륙아시아의 대표적인 유목민으로서, 부족 단위 국가에서 비로소 고대국가의 기틀을 성립한 고조선은 다양한 부족을 그 세력권으로 아울렀을 것이다. 고조선의 세력권내에 이러한 북방 유목민을 포함시킨다면 자체 생산이 되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명적의 활발한 사용은 4 ~ 5세기 고구려 고분벽화에 잘 나타난다. 벽화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명적의 모습은 명적의 사용이 최고조에 이르렀음을 알려준다. 이후 고구려의 병기체제가 신라와 백제․가야 등 남쪽으로 전해지면서 경주 나 김해 등지의 유적에서도 실물 명적이 발견되게 되었다.
실존 명적
명적은 재질의 특성상 주재료가 나무나 뼈가 대부분이어서 오랜 시간을 경과하는 동안 거의가 썩어서 없어져버리고 돌이나 금속으로 제작된 화살촉만이 전해져 온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명적은 김해 패총에서 발견된 녹각 명적으로 길이는 4cm이며 녹각 재질로 세로로 쪼개어져 절반만 남아 있는 상태다. 소리를 내는 구멍이 한쪽 면에 한 개가 나 있는데 반대편의 형상을 정확히 알 수 는 없지만 외공이 뚫려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 ***) 양산 부부총 명적 복원
그림 ****) 김해 녹각 명적
그림 *****) 경주 황오리 청동명적 그림 *) 이성계 화살
황오리 명적은 촉 을 끼우는 전방으로 구멍이 4~5개 정도가 나 있고 명향의 꼬리에는 소리통과 살을 결합시키는 고정구멍이 뚫려 있다.
이외에도 일제시대 때 찍은 사진 중에는 북한 함흥본궁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전하는 태조 이성계의 화살이 있는데 이중에서도 명적으로 보이는 것이 있다.
대상 유물의 고고학적 자료부족으로 유물의 분류는 큰 의미가 없겠으나 명적은 크게 재질상의 구분과 형태상의 구분으로 나눌 수 있다. 재질상으로는 목재와 골재, 금속재로 나눌 수 있고, 형태상으로는 유두형(有頭形)과 유무형(無頭形)으로 나눌 수 있다.
Ⅴ. 명적의 기능
1. 최고의 수렵 도구
과거 고구려가 중국 대륙을 누비고 다니던 강성한 힘의 원천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전투력의 주요 핵심은 누가 뭐래도 역시 활(弓)이라고 여겨진다. 활을 다루는 기술 중에도 특히 기사(騎射)가 전력의 핵심이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사실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찾을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들과 산에서 사냥을 하는 모습을 담은 수렵도가 특히 많이 그려져 있다. 질풍같이 내달리는 말 위에서 두 손은 고삐를 놓은 채 활을 잡고 파르티아 사법(Parthian Shoot)을 구사한다는 것은 최고의 기예로서 장기간의 훈련과 숙달이 필수적이다.
고구려는 기마 궁술을 실전에서 익히고 발휘할 수 있는 수단으로 수렵대회를 주최했다. 수렵은 기마 궁술을 실전에서 발휘할 수 있는 최대의 기회로 개인에게는 온달의 예와 같이 입신양명(立身揚名) 할 수 있는 등용문(登龍門)이 되며, 국가로서는 평상시 전쟁에 대한 사전준비태세를 갖추는 훈련의 장이 되는 것이다. 또한 왕이 신하들과 함게 수렵을 하고 산천신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위계질서의 확립을 꾀하기도 하는 것이다. 삼국사기 권45 온달전을 보면 ‘고구려에서는 봄철 3월 3일이면 낙랑(樂浪) 언덕에 모여 전렵(田獵)을 하고, 그날 잡은 산돼지․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신에 제사를 지내는데, 그날이 되면 왕이 나가 사냥하고, 여러 신하들과 5부의 병사들이 모두 따라 나섰다.’ 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 한다.
그림 **) 무용총 수렵도 그림***) 무용총 안칸 수렵도
넓은 산야에서 짐승들을 사냥할 때 명적에서 울리는 날카로운 소리는 짐승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광대한 지역 여기저기서 울리는 명적소리는 점차 포위망을 좁혀 들어 짐승들을 모는 역할을 수행했었음을을 짐작할 수 있다.
고두리에 떠는 새라는 말이 있다. 명적은 사냥감들을 모는 역할 뿐만 아니라 자체의 파괴력 또한 보통 화살 보다 뛰어나 사냥에 아주 적합한 도구였다.
2. 죽음을 예고하는 공포의 소리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명적은 시효(矢嚆)라는 또 다른 명칭이 있다. 시효란 어떤 일의 처음이라는 뜻으로, 옛날 전투에서 이 화살을 쏘는 것으로부터 전투 또는 어떠한 작전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는 바로 명적이 어떠한 전투의 신호 수단으로써 사용되어졌다는 것을 말하는데, 앞서 소개한 『사기(史記)』 흉노열전의 명적 사용은 명적이 신호 또는 공격 방향의 지정 용도로 사용된 전형적인 사례이다.
묵특은 명적을 이용하여 부하들의 이성을 단순화 시켰던 것이다. 부하들은 명적의 날아가는 방향이 목표이자 명적에서 나는 쉬~잇! 하는 소리가 공격개시 신호였던 것이다. 명적에서 발생하는 소리는 언어가 대신할 수 없는 상징과 기호인 것이다.
명적이 전투에 직접적으로 사용된 예로 유럽의 경우 몽골군의 침입 당시에 명적의 소리를 ‘악마의 화살(devil rrow)'이라고 말 할 만큼 명적의 소리는 사람의 공포심을 자극하여 공포를 극대화하는 가공할 만한 무기로 사용되어졌다.
그림 *****) 자강도 송암리, 만주 집안 출토 화살촉
명적이 최초로 만들어진 시기에는 동물들을 사냥하는데 문제가 없을 만큼 실재 전투력에도 큰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철기 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활에 대한 방호구의 발달로 인해 실재 전투에서의 명적의 파괴력은 상대적으로 약해졌을것이다.
3. 교육․놀이의 도구
덕흥리고분 마사희도(馬射戱圖)를 보면 말을 탄 4명의 경기자와 평복 차림의 3명이 있는데 그림의 가운데에 ‘사희주기인(射戱主記人)이라는 글이 적혀있어 이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 잘 알려준다.
4명의 무사가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면서 네모진 과녁을 맞추고 있고 구경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이를 기록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광경이 과거와 같은 공식적인 시험인지 사사로운 놀이 인지는 알 수 없으나 등장인물이 적은 것으로 봐서 공식적인 시험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수렵대회를 통한 인재의 선발 보다 이와 같은 방법이 좀 더 개량화 된 평가가 가능하다는 점과 벽화에 등장할 만큼 상용화 되었다는 점 등은 마사희(馬射戱)가
그림 *1) 덕흥리 마사희도
마사희가 인재 선발의 하나의 방법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조선시대 무과 시취제(武科 試取制)에 잘 나타난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기사(騎射)의 시험방식은 높이가 1척 5촌(47cm), 직경이 1척(31cm)인 둥그런 적(的)을 양편으로 세워놓고 적의 가운데로 난 길을 달리면서 양편으로 쏘는 방식이었다.****4)
Ⅵ. 맺음말
본고는 우리나라 화살 중 명적에 관한 종합적인 검토를 그 목적으로 하여 명적의 명칭과 기원 및 기능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앞의 내용을 종합하는 것으로 맺음말을 대신한다.
선행연구를 통하여 명적의 소리에 대한 물리학적인 검토결과 명적의 소리는 구멍이 4-5개일 때 가장 소리가 크고 지속성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명적의 명칭은 흉노의 역사 기록에서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명적은 기원전 3 ~ 2세기 북방 유목민족으로부터 유입된 것으로 보이며, 삼국 중 특히 고구려의 수렵대회에서*****5) 활발하게 사용되어졌다. 삼국시대 이후 여말선초까지 명적은 수렵의 용도로서 사용된 예를 태조 이성계의 일화 등의 문헌 자료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정재민은 활쏘기의 사회문화적 기능을 수렵․제의․전쟁․수련․놀이의 5가지로 정립하면서 여말선초 성리학과 조총의 수입에 따라 수렵․제의․전쟁의 기능은 약화되고 대신 수렵과 놀이의 기능은 강화되었다고 하였다.
명적 역시 활쏘기의 하나의 도구라서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삼국시대 전후한 시기에는 수렵 및 제의적, 전투 신호적 기능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다가 조선 초기 까지는 수렵용 용도로서 많이 사용되었으나 이후 화약무기의 발달로 인해 놀이 및 무과시험에서 변형된 형태로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어느 하나의 무기에 대한 군사 사회사적 기능에 대한 검토라면 동일 무기 계열의 무기 전반에 대한 검토 및 그 무기가 쓰이던 역사적 환경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가 이루어져야 비로소 그 무기가 차지하고 있던 전반적인 위치와 기능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화살 중 극히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명적이라는 특수한 화살에 대해서 논의의 초점을 좁히다 보니 전문적이고 깊이 있는 연구로서의 장점을 살리기 보다는 기존 활에 대한 연구 성과의 확인에 그치고 만 아쉬움이 있다.
우리 선조들의 자랑스러운 활 문화유산 명적!
이제는 박물관 진열장 속에서의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 그 옛날 넓은 대륙에서 일으켰던 우렁찬 울음소리를 다시한번 발산하여야 할 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종 국궁 대회의 시작에 명적을 시사(始射)하는 등의 작은 실천이 필요하겠다.
참 고 문 헌
․ 이중화『조선의 궁술』(조선궁술연구회, 서울, 1929)
․ 정진명『한국의 활쏘기』(학민사, 서울, 1999)
․ 고구려연구재단『고조선․단군․부여』(대한교과서주식회사, 2004)
․ 국방군사연구소편『한국무기발달사』(국방군사연구소, 1994)
․ 육군박물관편『한국의 활과 화살』(육군박물관, 서울, 1994)
․ 강성문「조선시대 활의 군사적 운용」『육군박물관 학예지 제7집』(경희, 서울, 2000)
․ 강신엽「국궁에 반영된 철학사상」『육군박물관 학예지 제7집』(경희, 서울, 2000)
․ 김준호․김준기「우는화살(명적)소리의 원인과 최적조건에 관한 연구」(2004)
․ 김성태「삼국시대 궁(弓)의 연구」『육군박물관 학예지 제7집』(경희, 서울, 2000)
․ 신재호「고구려의 활과 화살」
․ 심승구「조선시대 무과에 나타난 궁술과 그 특성」『육군박물관 학예지 제7집』(경희, 서울, 2000)
․ 이진수 「고구려 벽화에 보이는 기사(騎射)에 관해」
․ 이자윤「소리화살과 그 원리」『국궁논문집 제3집』(온깍지궁사회, 2003)
․ 정재민「한국고전문학에 나타난 국궁」『육군박물관 학예지 제7집』(경희, 서울, 2000)
․ 최진희「국궁의 과학적 분석」『육군박물관 학예지 제7집』(경희, 서울, 2000)
․ 국궁신문, www. archerynews.com
․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www. koreanhistory.or.kr
․ blog.empas.com/sosoh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