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목릉(穆陵, 선조를 말함)의 말년에 혼우(昏愚)한 임금(광해를 말함)이 왕위를 이어 모후(母后)를 유폐(幽廢)하고 왕자(王子)를 도륙(屠戮)하니, 이륜(彛倫)이 땅에 떨어지고 국가의 명맥이 끊어지려고 하였다. 그 당시 우리 인조 대왕(仁祖大王)이 사방의 충의(忠義)로운 선비들을 창솔(倡率)하여 일어나 크게 바로잡으니, 손가락을 한 번 움직이고 눈으로 잠깐 보는 사이에 천지가 환하게 밝아지고 협화(協和)하는 기운이 가득하였다. 이는 비록 성인(聖人)이 일어난 까닭으로 말미암은 것이나 진실로 현인과 준걸들이 그 시운(時運)에 호응하여 일제히 그 능력을 바치지 않았더라면 어찌 대업(大業)을 이와 같이 빨리 성취할 수 있었겠는가? 이에 공신들을 기상(旂常)에 기록하여 세 등급으로 작위(爵位)를 나누었는데, 그 하나가 분충 찬모 정사 공신(奮忠贊謨靖社功臣)이다. 숭록 대부 판중추부사 겸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남양군(南陽君) 증 대광 보국 숭록 대부 의정부영의정 겸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남양 부원군(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南陽府院君) 홍공(洪公)의 휘(諱)는 진도(振道)이고, 자(字)는 자유(子由)이며, 선계(先系)는 경기(京畿)의 남양부(南陽府)에서 나왔다.
홍선행(洪先幸)이 처음 고려에 벼슬하여 금오위위(金吾衛尉)를 지냈으며, 그로부터 9대(代)를 전하여 홍자경(洪子儆)에 이르는데 벼슬은 참판(參判)을 지냈다. 이어 부제학(副提學)을 지낸 홍형(洪泂)과 경력(經歷)을 지낸 홍언광(洪彦光)과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정효공(貞孝公) 홍담(洪曇)과 판서(判書)에 추증된 홍종복(洪宗福)과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를 지낸 홍희(洪憙)를 비롯하여 대대로 뛰어난 사람을 배출하였다. 돈녕(敦寧, 홍희를 말함)은 곧 문의공(文懿公) 구사맹(具思孟)의 사위이고, 공은 인묘(仁廟)에게 종모 형제(從母兄弟)가 된다.
공은 어려서부터 이미 기도(氣度)가 있어서 사람들이 길에서 공을 만나면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꿈속에 아이가 용(龍)을 타고서 해를 떠받드는 것을 보았는데, 이 아이가 정말 그 아이구나.”라고 하였으니, 공이 크게 귀해진 것은 이 일이 징조였던 것일까?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의 왜란 때에는 문의공(文懿公, 구사맹을 말함)을 따라 용만(龍灣)에 가서 머물렀는데, 당시 공의 나이가 9세였는데도 행동거지가 어른과 똑같았다. 계축년(癸丑年, 1613년 광해군 5년)에 처음 벼슬에 나서 별제(別提)로 있다가 금오(金吾, 의금부의 별칭)로 옮겼는데, 백사(白沙) 이공(李公, 이항복(李恒福)을 말함)에게 칭상(稱賞)을 받았다. 이어 4, 5개 관직을 역임한 뒤, 외직으로 나가 목천 현감(木川縣監)이 되었는데, 고을을 다스림에 호우(豪右, 호족을 말함)에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 당시에 흉도(兇徒)들이 기세를 부리어 공에게 과거 시험에 합격시켜 준다고 달콤하게 유혹하는 자가 있었으나 공은 즉시 거절하여 물리쳤다. 인묘(仁廟)께서 장난삼아 말하기를, “어째서 조금 굽히지 않았는가?” 하자, 공이 대답하기를, “이런 과거를 얻어서 어디에 쓰겠습니까?” 하니, 인묘께서 웃었다.
공은 임금에게 친속(親屬)이 되고 정의가 친밀하여 처음부터 은밀히 알아줌을 받은 것이 매우 깊었다. 광해(光海)가 갈수록 패악(悖惡)해짐에 이르러 공은 왕실(王室)을 염려하여 개연(慨然)히 광복(匡復)할 뜻을 가졌고 중표(中表) 형제들인 구굉(具宏)ㆍ신경진(申景禛) 등 제공(諸公)과 더불어 남몰래 도모하였는데, 공의 아우인 홍진문(洪振文)도 또한 그 모의에 참여하여 위호(衛護)를 주밀하게 방어하고 계산함에 빠뜨린 계책이 없었으므로 노고와 공훈이 가장 두드러졌다. 광해가 의심스러운 일로 능창군(綾昌君) 이전(李佺)을 죽이니, 인묘께서도 그와 동기(同氣)로서 조석(朝夕)으로 그 화가 미칠 것을 우려하였으며, 또 제택에 왕기(王氣)가 서려 있다고 의심을 받게 되자 즉시 그 집을 광해에게 헌납하였으므로 갈 곳이 없어지매, 공이 곧 자기의 집을 비워서 인묘에게 바쳤다. 그때 마침 원종(元宗)이 사저(私邸)에서 훙서(薨逝)하니, 광해가 또 조객(弔客)들을 사찰(伺察)하였는데, 공은 밤낮으로 상가(喪家)를 지키면서 염습(殮襲)을 반드시 자신이 몸소 하였다. 이에 인묘께서 울면서 공에게 이르기를, “어버이가 살아있거늘 어찌 조금도 회피하지 않는가?” 하자, 공이 말하기를, “화(禍)와 복(福)은 애당초 정해진 것인데 어찌 이 일을 회피하겠습니까?” 하였다.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원년) 3월 13일에 제공과 더불어 서교(西郊)에 모였는데, 대훈(大勳)들이 이미 모이자 인묘가 몸소 서궁(西宮)으로 나아가 마당에 선 채로 자전(慈殿)의 분부를 기다렸다. 그 당시 문이 닫히고 밤이 깊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이렇게 위태로운 때에 어찌 따라 들어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으며, 공이 들어가고 나자 승지(承旨)와 사관(史官)들도 뒤를 따라 들어갔다. 그때 인묘께서 공이 들어온 것을 보더니 안색이 곧 편안해졌으며, 마침내 인목 대비(仁穆大妃)를 모시어 복위(復位)시키고 자전의 명으로 광해를 폐위하였으며, 인조(仁祖)를 추대하여 보위(寶位)에 오르게 하였다.
맨 처음에 공을 공조 좌랑(工曹佐郞)에 제수하였는데, 공훈의 등급을 매길 때에 이르러 임금께서 공의 이름이 3등에 들어간 것을 보더니 의아하게 생각하여 하교하기를, “홍모(洪某, 홍진도를 말함)의 등급이 어째서 이렇게 낮은가?” 하고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승진시켰다. 이어 면천 군수(沔川郡守)로 나갔는데, 역적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어 임금이 공산(公山, 공주(公州)를 말함)으로 피난하면서 한 신하에게 명하여 광해를 압송(押送)하여 제주(濟州)로 이배(移配)하라고 하였는바, 그 사람이 병을 핑계대자 공이 그 대신 명을 받고 길을 출발하여 태안(泰安)에 이르렀을 때 역적이 평정되니, 이어 공으로 하여금 광해를 예전의 배소에 도로 안치하게 하였다. 그 무렵에 소문이 분분하게 뒤섞이어 일을 처리함에 매우 어려움이 많았는데도 공은 담소(談笑)하면서 느긋하게 처리하고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대처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 기지(機智)에 감복하였다. 이윽고 가선(嘉善) 품계에 승진하여 남양군(南陽君)에 봉해졌으며, 하찮은 과실에 연좌되어 파직되자 고을 백성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공의 선정(善政)을 추사(追思)하였다. 그 이듬해에 부평 부사(富平府使)가 되었다가 임기가 만료되자 또 차구원1)(借寇願)에 따라 연임한 뒤에 들어와서 부총관(副摠管)이 되었고 또 공주 목사(公州牧使)에 임명되었다. 도적들을 제거한 공로로 가선(嘉善) 품계에 올라 우윤(右尹)을 거쳐 남양 부사(南陽府使)에 제배되었고 크게 치예(治譽)가 있었으며 1년을 넘긴 뒤에 체직되었다.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년)에 변보(邊報)가 갑자기 이르자 바야흐로 임금이 피난을 가야 된다고 논의하였다. 또 장차 광해를 교동(喬桐)으로 이배(移配)하려고 하니, 조정 신하들의 논의가 공을 보내려고 하였으나, 인조께서 공만 혼자 고생이 많다고 하여 난색을 표명하자 여러 대신들이 모두 “지금과 같은 때에 이러한 사람을 밖에 내보내서는 안 됩니다.”고 하였으므로, 드디어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그 일을 명하였다. 공은 어가를 따라 항상 임금의 곁에 있으면서 국사를 결정할 때 자문해 준 것이 많았다. 인조께서 노적(虜賊)의 진영(陣營)에 가게 되자 함께 가서 요약(要約, 주요 대목을 추려냄)을 정하였다. 이윽고 환도(還都)한 뒤에 공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앞으로 필시 크게 난처한 일이 있게 될 터인데, 명(明)나라가 우리나라를 재조(再造)해 준 은혜를 저들도 알고 있으니, 미리 질정(質定)을 해놓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약 저들이 들어주지 않으면 다시 그들에게 ‘훗날에 강대한 이웃 나라가 의롭지 못한 일로 협박하면 장차 그 요구에 따라야 하겠는가?’라는 말로 타일러서 이와 같이 깨우치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고 우리의 의리도 펴이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좋은 생각이다. 그것을 묘당에 말하도록 하라.”고 하였는데, 그 당시 묘당에서 한창 화의(和議)를 주장하면서 명나라를 거론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응하지 않았다. 이에 공은 탄식하기를, “훗날에 이 일을 후회할 것이다.”고 하였는데, 저들이 우리에게 징병(徵兵)하는 일이 있게 됨에 이르러, 화의를 주장하던 자가 그때서야 공에게 사과하기를, “공의 말을 쓰지 않은 것은 우리들의 잘못이오.”라고 하였다. 아! 갓과 신을 거꾸로 신은 채 허둥거리던 날을 당하여 황조(皇朝)의 옛 은혜를 조정에서 분명히 말한 사람은 오직 공 한 사람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으니, 저들을 어찌 족히 말할 것이 있겠는가?
공은 왕실의 훈척(勳戚)으로서 평소에 신(申, 신경진을 말함)ㆍ구(具, 구굉을 말함)를 비롯한 제공과 더불어 절친하게 지냈고, 또 사론(士論)과 취향(趣向)이 달랐기 때문에 사람들이 간혹 자취에 집착하여 공을 의심하는 자가 있었으나, 묘당(廟堂)에서 한 번 말한 것은 의리를 밝힘이 늠연(凜然)하여 자세히 변리(辨理)하지 않더라도 공의 진심이 저절로 명백해졌으니, 이는 본말(本末)에 유감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정축년(丁丑年, 1637년 인조 15년)에 임금의 피난길을 호종한 공으로 녹훈(錄勳)되어 자헌(資憲) 품계에 승진하였다. 연이어 내외간(內外艱)을 당하여 전후로 예제(禮制)를 유지하면서 예절보다 더욱 애훼(哀毁)하여 기절했다가 다시 소생하였다. 복제(服制)를 마치자 도총관(都摠管)과 전주 부윤(全州府尹),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겸지의금부사(兼知義禁府事)에 제배되었다. 주청 부사(奏請副使)로서 사명(使命)을 받들어 국경을 나가게 되자 임금이 서교(西郊)에서 술을 하사하고 그 옷이 해진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비단을 내려 주었으니, 이는 특별한 은전이었다. 돌아온 뒤에 정헌(正憲) 품계에 승진하였고, 회맹(會盟)에 참국(參鞫)하여 또 두 품계가 승진되고 판윤 겸 판의금부사(判尹兼判義禁府事)에 임명되어 삼척(三尺, 국법(國法)을 말함)을 지키려다가 임금의 뜻에 거스르자,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해냈다고 칭찬하였으며, 곧이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기축년(己丑年, 1649년 인조 27년) 5월에 인묘(仁廟)께서 승하(昇遐)하였는데, 공에게 상사(喪事)를 전임(專任)하도록 유명(遺命)하여, 갖은 고생을 하며 힘들게 일하다가 병이 날로 심해지더니, 납월(臘月) 그믐날에 이르러 집에서 졸(卒)하였는데, 향년은 66세였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몹시 놀라고 애도하였으며 중인(中人, 중사(中使)를 말함)을 보내어 호상(護喪)하게 하는 한편, 특별히 관목(棺木)을 하사하였는데, 남양(南陽) 청명산(淸明山)에 있는 선영(先塋)에 장사지냈다.
금상(今上, 숙종을 말함) 갑자년(甲子年, 1684년 숙종 10년)에 이르러 나라의 전례를 상고하여 ‘몸을 던져 임금을 받들고 덕을 펴고 의를 견지(堅持)하였다.[危身奉上 布德執義]’라는 두 가지 시법(諡法)을 적용하여 공에게 ‘충목(忠穆)’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공의 배필은 증 정경 부인(贈貞敬夫人)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참판(參判) 윤중삼(尹重三)의 딸이다. 맏아들 홍부(洪溥)는 평시서 영(平市署令)이고, 서자(庶子)는 홍현(洪泫)이다. 홍부의 맏아들은 홍성원(洪聖元)으로 첨지(僉知)이고, 그 다음은 홍달원(洪達元)ㆍ홍학원(洪學元)이며, 딸은 윤이희(尹以熙)에게 시집갔다. 홍부의 서자 홍찬원(洪贊元)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현령(縣令)이다. 홍성원의 아들 홍숙(洪璛)은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參判)을 지내고 남계군(南溪君)에 봉해졌다. 홍달원의 아들은 홍탁(洪琢)ㆍ홍완(洪琬)ㆍ홍연(洪璉)ㆍ홍윤(洪玧)인데, 홍윤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홍학원의 아들은 홍경(洪璟)ㆍ홍우(洪瑀)ㆍ홍식(洪
)이다. 홍숙의 아들 홍인조(洪麟祚)는 진사이고, 홍봉조(洪鳳祚)는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大司諫)이며, 홍귀조(洪龜祚)는 진사이고, 홍용조(洪龍祚)는 문과에 급제하여 관찰사(觀察使)이다. 홍탁의 아들은 홍덕조(洪德祚)이고, 홍완의 아들은 홍영조(洪永祚)ㆍ홍명조(洪命祚)ㆍ홍정조(洪鼎祚)이며, 홍연의 아들은 홍겸조(洪謙祚)ㆍ홍계조(洪啓祚)이다. 홍우의 아들은 홍익조(洪益祚)ㆍ홍이조(洪履祚)이다. 홍인조의 아들은 군수 홍저(洪樗)이다. 홍봉조의 아들은 홍박(洪樸)ㆍ홍익(洪榏)이다. 홍귀조의 아들은 홍재(洪梓)이다. 홍용조의 아들은 홍역(洪櫟)ㆍ홍억(洪檍)이다.
공은 사람됨이 굉위(宏偉)하여 재간과 도량이 있었으며 침해하지 않아 말을 하면 신임이 있었다. 집에서 지낼 때에는 효도와 우애가 돈독하였고, 조정에서 벼슬할 때에는 충성스럽고 순일(純一)하였다. 일을 고려함에 있어서는 주략(籌略)이 넉넉하였고, 가정을 다스리고 무리를 거느림에 있어서는 내외(內外)가 엄격하였다. 임금이 공을 의지하고 믿은 것이 특별히 성(盛)하였으나, 본래 성품이 깐깐하여 허락함이 적었기 때문에 벼슬길이 대부분 차질(蹉跌)을 겪었으니, 아까운 노릇이다. 오직 염결(廉潔)하게 처신하기를 좋아하여 관위(官位)가 높아질수록 절조(節操)를 가다듬는 것이 더욱 견실(堅實)하였으니, 아! 이것이야말로 명(銘)을 새길 만하다. 명은 다음과 같다.
홍씨는 우리나라에 두 개의 종파(宗派)이 있으니, 그 하나는 당성(唐城)에서 나와 누차 훈공(勳功)을 드러냈네. 공의 선조는 곧 금오공(金吾公)이고 학사공(學士公)은 깐깐하여 명예와 절개가 탁월하였네. 정효공(貞孝公)이 태어난 시기는 우리 소경(昭敬, 선조(宣祖)를 말함) 임금 때였는데 행실이 순수하고 지조가 결백하여 후손들의 복록을 넉넉하게 해주었네. 세상에 윤상(倫常)이 무너지자 인내하며 거취(去就)하여, 건곤(乾坤)을 정돈하느라고 한 말의 피를 흘렸네. 사악한 안개가 걷히고 해와 달이 환하게 빛났으니, 이 공훈과 이 지업(志業)을 누가 감히 나란히 겨루겠는가? 더욱 위대한 일이 있으니 임진년의 왜란을 잊지 않은 것이네. 내가 이 글을 새기어 천년 후세에 분명히 보이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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