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철의 시 세계 ‘나’와 ‘너’, 공존의 방정식 그 해법 김 송 배 (시인.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1. 들머리에 김봉철 시인이 첫 시집 『어느 셀러리맨의 시계』를 상재한다. 첫 시집의 중요한 소재나 주제는 대체로 습작기에 창작한 우리 인간들의 문제와 자연 서정에 대한 순정적인 표현이 많은데 비하면 김봉철 시인이 현현하는 시법은 상당한 이변(異變)을 예상하게 된다. 그는 우선 소재의 선택과 표현방식에서 요즘 흔하게 대할 수 있는 인본주의(人本主義-humanism)나 자연친화의 동화(同化) 등의 평범성을 탈피하고 새로운 시법의 창출을 위한 시적구도(planning)와 시적상황(situation)을 실험적으로 분사(噴射)하고 있다. 이러한 시적 개념은 우리 시문학사에서 이해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김추수 시인이 주창한 무의미시(無意味詩-nonsense poetry)에서 해체시(解體詩), 포스트모더니즘시를 거쳐서 요즘 실험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디지털시와 하이퍼시(hyper poetry)의 경지까지 살펴보게 된다. 김봉철 시인이 이처럼 시도하는 내면에는 지금까지 통념적으로 분류해온 서정시의 개념을 초월해서 우선 언어의 배치나 전개를 특이하게 구사한다는 점을 간과(看過)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그가 이 시집의 표제시(表題詩)가 되는 작품「어느 셀러리맨의 시계」에서 첫 부분 ‘1. -관념의 발상-’이라는 대목은 마치 하이퍼시에 근접하는 문장으로 시적 상황을 도입하여 그 내용이나 어조(語調-tone)가 심상치 않게 전개되고 있다. 그는 가끔 시간을 타임머신에 들여보낸다. 시침을 거슬러 돌리다 보면 돌아가신 어머니가 아직 암 병동을 배회하고 있고, 시침을 시계 방향으로 돌리다 보면 머리가 온통 흰 당뇨병 노인이 거울 앞에 서 있다. 잠시 눈시울이 붉어져서 울컥거리다가 하루해에 밀려 보는 것을 덮어버렸다. 하루는 24개의 눈금을 천천히 지나가야 해와 달의 윤회가 반듯하고 딸애의 월경도 순조롭게 지나갈 것이다. 하루가 자전하는 동안 연잎에 구르는 이슬 몇 방울보다도 더 순결한 이치를 터득하는 것이다. 서로가 얽혀서 질서의 가장자리에 무명의 하늘이 흘러왔다 흘러가는 그 순간에도 출근시간은 항상 초침이 분침보다 빨리 눈금을 읽어갔고 분침이 시침보다 더 빨리 지나갔다. 일상은 시계바늘이 가르키는 쪽으로 기울어간다 김봉철 시인의 시적 언어(詩語-poetic diction)는 시 창작의 통설적(通說的)인 기승전결(起承轉結)로 이어지는 전체의 문장구도를 배제한 채 ‘낯설게 하기’의 생소한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요즘 유행하는 시법의 몇 가지 ‘낯선’ 형태의 유형을 이해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첫째, 무의미시는 이미지를 서술적으로 사용하여 대상을 잃음으로써 대상을 무화(無化)시킨 결과 자유를 얻게 되는 시를 말한다. 그러므로 대상이나 사물을 제거시키고 난 어떤 방심 상태, 그 자유스런 유희의 상태가 곧 무의미시라는 것이다. 무의미시란 결국 허무의 극복에서 비롯되는 시를 말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다음은 해체시이다. 해체시는 시인의 세계관이 유보된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묘사가 아니라 표절하고 습득하고 인용하는 형태를 취한다. 언어가 더 이상 현실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없다는 언어에 대한 불신에서 전통 시형식의 파괴라는 해체의 충격이 가시화된 시가 바로 해체시이다. 또한 디지털시가 있다. 오남구 시인의 논지에 따르면 시도 영상의 보여주는 시가 필요하게 되었다. 보는 시- 시는 언어로 표현되므로 묘사하여 사물의 표상이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 즉 ‘보여주기’가 된다. 독자는 보여주는 대로의 상을 마임을 보듯, 마음 속 화면에 떠 올리고 그 의미를 상상하여 읽고 감상할 수 있다. 시인은 연출자와 같은 입장에서 사물의 표상과 이미지를 보여주는 형식에 그치고 시를 완성하는 주체는 시인이 아니라 독자가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이퍼시이다. 최진연 시인의 설명에 의하면 상상력에 의한 시적 공간 확장을 말한다. 우리가 애니메이션이나 동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컴퓨터에 의한 사이버공간에서 3차원의 입체적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란 또 다른 현실이 현실세계와 조금도 다름없이 존재하게 되었다. 하이퍼시는 클릭에 의해 즉시 열리는‘준비된 현실’이라는 이 가상현실의 세계로 문학적 공간을 상상에 의해 무한하게 확대하자는 것이다. 과거 시적 이미지는 현실세계를 따오는(Sampling) 데 그쳤으나, 하이퍼시에서는 그 이미지들이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넘나드는 자유의 자성(自性)을 갖게 되었다. 단순한 상상을 넘어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공상에 의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경계가 무너지고, 공간도 자기로부터 세계와 우주에까지 제한 없이 넘나드는 이미지창출을 보여주는 것을 중시한는 것이다. 이처럼 시론가나 문학평론가도 이해하기 쉽지않은 시의 이론을 주창하는 세대에서 김봉철 시인의 작품과 연결시키는 연유는 그가 응시(凝視)하는 사물이나 내재된 관념의 범주(範疇)가 범상(凡常)치 않다는 해석에서이다. 2. 셀러리맨과 시간성에 의한 시법 김봉철 시인은 역시 작품「어느 셀러리맨의 시계」‘2. -소유를 버리다-’에서는 다음과 같이 탈관념(脫觀念)과 관념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완전한 디지털시나 하이퍼시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2. -소유를 버리다- 날이 흐리면 그림자는 어디로 스며드는지 간 곳이 없다. 분신을 찾기 위해 초침 위에서 헐떡거리며 그가 빨리 달리는 이유를 눈금마다 쥐어주며 시계탑 광장에 나간다. 해가 구름에 가려진 날은 그 때 마다 숨어버린 그림자는 여기저기에서 눈만 빠금거리고 있었다. 찾자, 찾아서 그림자들를 모아 병정을 만들어 유사시를 대비하는 게 좋을 듯하다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자극했다. 예상과 달리 뇌수에 차 있던 그의 포부는 삽시간에 곤두박질치고 만다. 이웃한 대륙 중국이 항공모함을 서해로 진수한 큰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그 날 시계는 벽에서 떨어져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이제 타임머신으로 들어 간 시간을 꺼내 올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 그는 스토리 텔링(story telling)의 기법으로 작품을 형상화하지만, 역시 주제의 완전한 이해에는 낯이 설다. 과도, 초과, 초월, 건너뜀 그리고 최고도를 의미하는 하이퍼. 이러한 시법들이 종래의 순수 서정시를 고집하는 기성 시인들의 안목에서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과제로 남는다. 김봉철 시인이 구가(謳歌)하는 관념에는 ‘3. -자아 성찰-좌절, 그건 사치다. 시계가 부서지고 난 후 튀어 나온 시간이 반대로 그를 조절하기 시작했다. 정해진 시간에 맞춰 출근해야 했고, 아침마다 거르는 일 없이 되풀이 해온 습관들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예전에 시간을 조절하여 써 왔던 하루의 계획도 헛수고에 불과했다. 투명한 시간이 있을까? 물음을 던져도 이미 끌려가서 타인의 생활 안에 그를 얽어 놓았다. // 울분, 북한이 연평도에 포탄을 퍼붓던 날 그는 먼저 회사 일을 그만 두었다. 날마다 온 종일 텔레비젼을 보던 그에게 며칠 후 그의 아내로부터 일급비밀 정보를 들었다. 직장을 그만 둔 남편의 후일에 대하여 매우 민감해 있었으므로 아내는 지혜를 모아 미국의 항공모함을 동아시아로 불러들인다는 것이었다.’는 화자의 단정이 어떤 비장한 언술로 유로(流露)하고 있어서 위기의식을 고조(高彫)시키고 있다. 그는 작품 전체에서 시적 화자 ‘그’(밑줄)라는 제3인칭대명사를 내세워 스토리를 전개하고 있는데 이 ‘그’는 누구이며 ‘그’와 ‘시계’와의 상관성은 무엇인가를 구명(究明)하는 전제가 필요하다. 이는 ‘셀러리맨’이라는 동시대의 작중 인물과 함께 ‘시간’을 동일시함으로써 현실적인 다중(多衆)을 향한 경고성 메시지로 발현되고 있다. 그러나 소제목의 분류로 ‘자아의 성찰’이라는 관념을 적시하여 ‘직장을 그만 둔 남편’과‘아내의 지혜’도 통시적(通時的)인 관념으로는 ‘연평도 포탄’과 ‘미국의 항공모함’ 등과의 교감은 하이퍼적 발상으로써 대단히 낯선 양상으로 시적 구성이 이루어지고 있다. 4. -기회 엇빗내기- 아내가 불러들인 대응 수준은 동아시아를 매우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다. 불안한 만큼 마음 내키는 대로 시간을 굴리던 시절이 그리워 그는 새 벽시계를 사오려고 시계 점포를 찾았다. 시계방 주인은 국제 정세에 대한 나름의 암호화 된 정보를 풀고 중국과 북한이 통합될 것을 염려했다. 그래서 벽걸이 시계 보다는 탁상시계가 안전할 것이라고 권면하여 그는 탁상시계를 선택했다. 새 건전지를 넣고 텔레비전의 현재 시간에 시각을 맞추자 - 한반도 정세는 그 시간 이후 다시 잠잠해 졌다. 시계가 돌자 그만 두었던 회사에서 그가 없으면 회사가 곧 망하게 되므로 월급을 두 배로 줄 테니 출근해 달라고 간청해 왔으나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에게는 이미 딴 영감을 얻어 큰 밑그림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평범한 셀러리맨의 애환이라기에는 너무 광범위한 유추의 이미지가 팽배(彭排)해 있다. ‘그’와 ‘아내’라는 화자를 통해서 분사하는 메시지들은 ‘시간’과 ‘시계’의 상관성에서 해법을 구현하는 문장이 어쩌면 디지털시에서 이해할 수 있는 탈관념을 실험하고 있어 보인다. 김봉철 시인은 이처럼 ‘시간성’과 동시에 구가하는 스토리 텔링의 시법은 작품 「완도 일기」「금요일의 명심보감」「장자의 새」「근대사의 허술한 반시」「시의 알고리즘」등에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시간의 껍질을 벗기고 독일제 회칼로 시간의 살과 뼈를 바르면서 아직 창자 속에서 어디론가 째깍거리며 뛰며 피를 압송하고 있는 시간의 심장을 연다 비린내는 항상 소금처럼 왼쪽 귀에서 들리고 비통한 자의 비명소리는 그물에 갇혀 코끝에서 썩은 냄새만 맴돈다. --「고사(告祀)」 중에서 이러한 시간성 문제는 그가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시간의 껍질’과 ‘시간의 살과 뼈’ 그리고 ‘시간의 심장’ 등에서 추출하는 이미지는 관념이 보이지 않는 사물적 요소로 충만된 작품이다. 이것은 하이퍼시의 개념과 유사하게 표현하는 특성을 알 수 있다. 3. 나와 너의 대칭적인 본능적 해법 김봉철 시인은 다시 ‘나’와 ‘너’라는 화자를 통해서 ‘나’에 대한 인식의 근원을 추적하고 있다. 그가 ‘시인의 말’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나는 왜 여기 서 있는가?’라는 의문으로 자아와 존재문제를 심도(深度) 있게 천착하고 있다. 나는 왜 여기 서 있는가? 우리들 사이로 무심하게 빠져나가는 저 강물에게,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강을 지켜보는 본능과 욕정의 나무에게, 고리대금업이 날벌레들처럼 창궐하는 나무가 서 있는 언덕에게, 밤이면 그 언덕으로 오르다가 사라지는 정치적인 별들에게, 나는 내게 묻는다. 무엇을 위해 이 밤, 강 끝까지 와서 깊은 잠을 뒤척이며 길게 누워 바다 앞에 서 있는가? 그의 시각에 반추하는 만유(萬有)의 사물들에게 ‘나는 내게’ 스스로 자문(自問)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이 요약되고 있다 그렇게 살아 있는 치열함에서 밝은 대낮의 소식들은 아름다웠는가? 공책 한 페이지를 넘기며 자식들이 역사의 묵은 구절을 읽을 때 그 문맥에서 우리시대에 무덤처럼 묻혀 있던 나는 그 군중들 사이에서 과연 떳떳한 자로 남아 있었는가? 혹은, 그 시대에 대하여 나의 삶이 비굴하지는 않았던가? 비도덕적인 어두운 그늘 속에 숨어 죽어가는 동무들을 완벽하게 죽이기 위해 오래된 바람을 무료하게 기다리던 자는 아니었는가? 이렇게 자아의 인식에 대한 문제는 바로 존재의 문제와 일치한다. 우선 그는 ‘내가 오늘 높지 않은 소박한 정상에서도 보였다’ 그리고 ‘그리고 나는 마침내 보았다’라고 외친다. 이는 그가 자문한 존재문제에 대한 스스로의 해법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오른 높지 않은 소박한 정상에서도 보였다. 강과 바다가 합쳐지는 하구언을 날마다 지나치면서 결코 후회 없는 자만을 빙자한 비겁한 논리가, 강물에 빠진 달이 구름을 끌고 와 오래 전에 떠나간 발길을 모아 다시 그 강줄기에 가두고 있는 나의 유년이, 다도해 섬들 사이로 밤새도록 먼 바다가 보낸 저명한 화물선들의 과적 된 삶의 무게가, 새로운 강줄기를 도화지에 옮겨 넣으며, 어쩔 수 없이 갈대밭을 지우고 대신 물새들 울음소리를 그려 넣어야만 했던 저 쓸쓸한 꿈이, 그렇다. 김봉철 시인은 ‘나의 유년’과 ‘삶의 무게’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갈대밭을 지우고 대신 물새들 울음소리를 그려 넣어야만 했던 저 쓸쓸한 꿈’ 을 지금사 확인하는 혜안(慧眼)과 명민(明敏)한 지각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자신의 발견과 인식은 새로운 인생관이나 가치관의 정립에 기여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고 나아가서는 존재의 긍정을 통해서 사물과 관념이 정관적(靜觀的)으로 사유하는 경지에 이르게 한다. 다시 그는 화자 ‘나’와 ‘너’를 통한 시적 구도와 정황의 설정에서 자각과 질책 등을 실험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나는 알 수가 없네 갯가 거친 파도를 지나 코트를 여미는 바람을 보았을 때도 햇빛과 조잘거리며 향기를 건네는 무리였다는 것을 나는 허름한 물음만 던졌을 뿐 그 뜻을 알지 못 하였네 떠날 배는 어제처럼 아직 선창에 묶여 있는데 그림 속은 눈이 내리네 누군가 가까이 아주 오래된 시간을 데리고 어느 품에 안기는 것이었네 비릿한 바람에 안기는 그 품이 얼마나 달콤한지 눈을 감기 전에는 모르는 거라네 동공에 펼쳐진 그림 속의 말을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네. --「꽃잎 품속은」전문 진심으로 노동의 나무에 열린 해를 따서 예수에게 주고 어두움 깊어지면 나를 돌려받는 것 뿐이다 벌을 청해서 간절한 그 때 거울 속으로 나는 더욱 아름다워 진다. --「거울 속의 해에게」중에서 김봉철 시인의 자아에 대한 인식은 먼저 ‘나는 알 수가 없네’라는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으로 시작한다. 일찍이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뉴의「수상록」에는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자기가 자기 자신을 주인으로 되느냐를 아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견해와 결부해보면 김봉철 시인이 ‘그 뜻을 알지못’했다는 것과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네’라는 미지의 ‘나’는 과연 그의 인식에서 경건한 지표를 창조할 수 있을지를 그는 확인하고 있다. 또한 그는 ‘바닷가 섬 사이로 / 세찬 바람이 오늘 / 배를 떠나보내려고 하는데 / 나는 떠남을 두려워(「달의 노래」중에서)’하다가 ‘지나가는 여우바람이 마음을 열고 있는 동안 그 중심에 은빛 물고기 한 마리 뛰어오른다. 파문이 인다. 내가 촛불처럼 흔들린다(「도갑사」중에서)’는 어조로 인식의 구조가 차츰 그 형상을 나타내고 있다가 ‘나를 돌려받는 것’이며 ‘더욱 아름다워’ 지는 것이라는 미확인의 결론을 추루하고 있다. 영정 속 그 여자는 늙어가고 있었다. 잠시의 生涯생애 땅에 머물다 가는 時間시간 어쩌다가 우리가 만난 다음 부끄럽게 죽어가고 있는 오늘의 저 빛깔 속에서 너의 눈물을 讚揚찬양하고 싶다 --「이중적 인격의 서정」중에서 7 그러한 약속을 지게에 매고 습승봉 상상봉 바람의 집에 들어 간 후, 너는 마을로 돌아오지 못했다. 평생을 숨 가쁘게 아직도 남의 꿈속을 이 곳 저 곳 옮겨 다니며 너는 살고 있다. 보아라, 사랑하는 사람이 많으면 길도 많고 그 길은 불목리 골짜기에서 갑자기 끊어진다. 8 장날이 되면 돼지를 팔고 너는 죽어서 돌아오길 바란다. 습승봉 아래 시냇물로 흘러가서 너는 어느 날 바다에 닿고, 동백꽃에 감추어둔 꿀을 거두어 동생들이 어렵게 집으로 가져 오는 날, 도시에서 온 한 가시나가 하얀 암닭이 되어 닭장에서 백주야 말없이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완도의 비문」중에서 여기에서는 ‘너’라는 화자가 등장해서 ‘너’에게 강렬하게 전하는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너의 눈물을 찬양하고 싶다’는 ‘너’는 ‘부끄럽게 죽어가고 있는’ ‘영정속의 그 여자’를 향한 메시지인데 그는 ‘깃발 아래 유유히 / 강은 흐르고 있을 뿐 / 너의 눈물이 강 밑으로 길게 / 바다가 되어 있는 줄은 알지 못한다.’라는 미지(未知-혹은 미확인)으로 ‘나’와 동일한 ‘너’의 지향점을 확인하고 있다. 또한 그는 ‘너는 마을로 돌아오지 못했다’거나 ‘너는 죽어서 돌아오길 바란다’ 는 ‘완도의 비문’에서는 남해의 섬 완도에 대한 애환을 비감(悲感)의 언어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리고 ‘평생을 숨 가쁘게 아직도 남의 꿈속을 이 곳 저 곳 옮겨 다니며 너는 살고 있다.’는 ‘너’의 형상은 김봉철 시인의 시적 패턴(poetic pattern)이 존재에 대한 심각한 지각(知覺-perception)의 전환적인 실험이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들길에 숨어 있던 바람이 오면 네 몸은 자꾸 내가 선 쪽으로 흔들린다 무모한 날을 지나서 나는 봄으로 들어갔다 --「5월의 시」중에서 어둠이 열리지 않아도 배를 만들기 위해 나는 오늘도 또 그곳으로 가야만 한다 너는 천국 혹은 지옥의 경계에서 너를 확인 할 것이다 번식할 수 없는 그늘에서 예수와 함께 내가 돌아 올 때 너의 안부는 없었다 --「거울 속의 해에게」중에서 이 작품들은 ‘나’와 ‘너’가 복합적으로 구도를 형성하고 대칭적인 연결로 우리의 존재를 확인하는 언술로 현현되고 있다. ‘네 몸은 자꾸 내가 선 쪽으로 흔들린다’거나 ‘너는 천국 혹은 지옥의 경계에서 / 너를 확인 할 것이다’라는 어조가 현식적인 다양한 구조에서 전개되는 우리들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을 다변적으로 유추할 수 있게 한다. 역시 몽테뉴의 명언에서 모든 사람은 자기의 앞만을 본다. 그러나 나는 자기의 내부를 본다. 나는 오직 자기만이 상대인 것이다. 나는 항상 자기를 고찰하고 검사하고 그리고 음미한다는 자아인식과 존재의식이 ‘나’와 ‘너’라는 공존의 방정식을 배재할 수 없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4. 서정적 자아의 자연관 김봉철 시인은 앞의 작품과는 이질적인 친자연의 서정성을 탐색하고 있다. 이러한 친자연적인 시적 구도는 디지털적이거나 하이퍼적인 시법으로는 형상화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이 대두된다. 그것은 탈관념이라는 구조는 하나의 피사체(被寫體)를 두고 아무런 정감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시의 구성이나 주제의 투영(投影)에 문제점이 노출될 수도 있다. 미국의 시인이며 비평가인 랜슴은 현대시를 관념시(platonic poetry)와 사물시(physical poetry) 그리고 형이상시(形而上詩-metaphysical poetry)로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 관념은 사물에 대한 대칭어로서 시에 담긴 감정이나 의미(주제, 사상, 의미) 등을 표출해야 하기 때문에 사물시는 자칫 스케치에 머물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서 형이상적인 발상으로 사물과 관념의 이미지를 조화롭게 융합(融合)해야 좋은 시가 된다는 통념이 현재 우리 시 창작의 본령(本領)을 점유하고 있다. 강은 달빛을 물고 표표히 흩어지며 흘러갔다 아직 노을이 깊어서 마중이 길어진 만큼 달빛이 흘린 음계를 더듬어서 꽃잎이 떠나 잠들지 못한 길로 물결은 푸른 곡조를 낚고 있었다 가슴 밑바닥으로 음표들이 팔딱거리고 비늘을 번득이며 물살을 가르는 저 노래가 너의 무덤 가장자리에 강물이었듯이 그대 눈물 한 방울도 강이었다는 것을 거울 속의 해는 지금, 붉게 곡조를 높이고 있었다. --「동강에서」전문 해가 등을 돌린다 을씨년스러운 바람 돌기가 서성이는 쪽으로 저문 강물에 다 핀 꽃들이 서서 우두커니 서로에게 길을 닫는다 시간은 끝났는가 삼호(三湖) 마른 갈대숲을 지나가는 잡년이 잠든 새들 둥우리를 쫓아내면서 세상을 흔들고 있었다. --「삼호에서」전문 보라. 김봉철 시인은 요즘 유행하는 하이퍼시 보다는 서정시의 위의(威儀)를 보존하고 있다. 그가 실험적인 의식의 발현으로 관념을 탈피하는 의식의 전환도 우리 시문학의 발전을 위해서 바람직한 일이지만, 시는 아름답기만 해도 모라지만 시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필요가 있고 듣는 이의 영혼을 뜻대로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로마의 대시인이었던 호라티우스의「詩論」을 이해할 요소가 많다는 점도 간과하지 못한다. 그는 우리들에게 자연 서정을 전달하면서 ‘강은 달빛을 물고 표표히 흩어지며 흘러갔다 ’거나 ‘꽃잎이 떠나 잠들지 못한 길로 / 물결은 푸른 곡조를 낚고 있었다’는 정감을 신선하게 표출하고 있어서 호라티우스가 적시한 ‘시론’과 같이 무엇인가 우리들의 영혼을 흔들고 있다. 또한 ‘저문 강물’과 ‘마른 갈대숲’ 등의 정경(情景)은 우리들의 의식을 더욱 안온하게 유로(遺老)하고 있다. 이밖에도「오륙도」「겨울밤」「경계석」「달의 노래」「환생」등의 작품에서 그의 서정적 자아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목포역」에서는 ‘썰물처럼 빠져 나가는 추억들이 / 겨울밤을 데리고 / 바다로, 더 깊은 어두움의 바다로 끌려간다 // 비밀을 풀려고 철썩이는 파도 / 그 물결이 밀어 올린 어판장 생선들의 꿈이 / 도시의 가로등 밑 경계를 넘어 / 어딘가로 헤엄쳐간다’라는 ‘목포’에 대한 정감이 넘쳐나고 있다. 또한 「연가」에서도 오랜만에 따스한 피돌기가 시작되는 정적인 언어가 시 읽기를 즐겁게 하고 있다 가로등 밑 거미줄에 걸린 우울한 그림자가 종종 햇볕에 그을린 무지개를 자랑스럽게 걸치고 외출을 기다리는 동안 내 심중은 시방 고요합니다 그대를 생각할수록 그리운 당신, 밤이 곱게 치장한 별들을 하늘에 드리우고 반짝이는 그대 이름은 별 안에 감춰두기로 했습니다 5. 날끝에서 이제 김봉철 시집『어느 셀러리맨의 시계』에 대한 시 세계를 마무리해야겠다. 그는 실험적인 요소가 더욱 시적 묘미를 전달하는 계기가 되겠으나 너무 디지털시와 하이퍼시와 유사성을 갖는 탈관념을 배제하면 난해시(難解詩)로 변질할 우려도 동시에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가 도출한 언어의 표정은 대체로 하이퍼적인 표현이 많다. 다음과 같이 몇 문장만 열거할 수 있는데 시적 표현의 다양한 그의 경지를 이해하게 된다. - 고독이 어둠을 갉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 머리에 흰 띠를 맨 시름들(이상「연가」중에서) - 액체의 거리를 나누고 있었다.( 「자만」중에서) - 동백꽃 속에 들어가 잠든 틈을 열고( 「해운대」중에서) - 덜 간해진 죄를 팔고 훔친 배로 그림자 몇은 그 섬을 떠났다.( 「완도일기」중에서) - 아내와 이혼하고 중국과 재혼할까?( 「광복절」중에서) - 빈 소리에 표 하나씩 얻고 있었다.( 「오월 어느 선거」중에서) - 잃어버린 별을 찾기 위해 우리를 심문했다.( 「완도의 비문」중에서) - 아내의 불만은 남편의 내장을 검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금요일의 명심보감」중에 서) - 아버지의 지갑 속에는 지는 해를 가두고( 「장자의 새」중에서) - 살아갈 계절을 두 손에 꼭 쥐어본다.( 「5월의 시」중에서) 김봉철 시인은 이와 같은 실험적 언어의 도입은 그가 앞으로 시 창작에 대한 열정이 그만큼 확대되고 사유의 깊이도 지향적으로 확산하는 원류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이 시집의 작품들은 대체로 셀러리맨이라는 특수 공간에서 그가 체험한 모든 상상력의 재생으로 창조한 의식의 세계가 시간성과 결합하면서 야기되는 절대적인 현실의 고뇌와 갈등들이 아주 적절하게 화해하는 주제를 살필 수가 있다. 또한 그는 나와 너라는 존재의식에서 탐색하는 ‘나는 왜 서 있는가?’라는 인생의 대명제(大命題)를 풀어내기 위해서 자아를 성찰하거나 실생활(real life)과의 비판적 언술이 결과적으로 그가 지향하는 서정성과 합일(合一)되면서 자연 서정의 본령을 이탈하지 않는 시법의 구현이 명징(明澄)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는 결국 다음과 같은 인생의 덕목을 발견하게 된다. 섬에 홀로 남은 무덤으로 오늘 나는 너를 만나러 간다. 깊이 잠든 시간을 깨우고 해 하나 깃발처럼 올려서 네 앞에 나를 드려놓고 싶어서 --「섬」중에서 승리를 전재하지 않으면 흥미를 돋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관중이 열광하는 응원의 함성이 축구장을 메울 때 스스로 퇴장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명장의 덕목이다 명심할 것은 벼랑 끝 전술은 A감독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선수들 본능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가슴에 담을 일이다. --「시의 알고리즘」중에서 김봉철 시인은 이와 같은 덕목을 영원히 인생관의 지향점으로 혹은 시적 주제의 정점으로 설정하는 창조적인 의식의 구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네 앞에 나를 드러놓고 싶’다는 여망과 ‘가슴에 담을 일이다’라는 단정은 그가 현실을 직시하고 포용하고 화해하려는 심경의 결단이다. 우리의 현대시는 사물과 관념을 동시에 아우르는 형이상시의 개념을 선호한다. 현대시와 주제의 명징성은 어느 시대의 시 창작에서도 가장 중요한 규범으로 남을테니까. 우리 시인들은 공통적으로 유념해야 할 것이다. 그가 「친구에게」부탁하듯이 ‘돈을 번다는 것은 혼을 파는 노동이다 / 그러나 돈을 빌리는 것은 예술이다 / 누구나 다 예술가를 원하지만 / 작품 아닌 누드는 사기일 뿐, // 친구여, 바람은 사방에서 분다 / 바람이 가는 길이 그대와 틀린들 어떠하랴 / 예술이 아닌들 어떠하랴 / 땀내 베인 알몸에 / 등목 한 번으로 족하지 않겠나’라는 메시지가 우리 인간들이 공통으로 향유하는 외연(外延)과 내포(內包)의 철학적인 수용으로 시의 위의를 더욱 상승시키는 효과를 제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