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신명풀이의 철학사상
탈춤에서 벌어지는 것과 같은 신명풀이 방식의 싸움은 일찍이 元曉가 문제 삼았다. 원효는 일찍이 ‘有無’ㆍ‘眞俗’ㆍ‘一二’ㆍ‘中邊’이 둘이 아니고 하나이며, 하나가 아니고 둘이라고 하는 이치를 밝힌 것을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 한문으로 글을 쓰면서 중국의 전례에 따라 불교나 유교의 철학을 전개하고, 기존의 용어와 사상을 재정리하는 직업을 하면서 스스로 춤추고 노래하면서 가난하고 미천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돌아다녔다. 탈춤을 추는 것과 같은 일을 직접 하면서 생각하고 깨달은 바를 불교철학의 논설로 나타내서 두 가지 표현 방법이 하나가 되게 했다.
‘有無’ㆍ‘眞俗’ㆍ‘一二’ㆍ‘中邊’라고 한 말은 추상적인 개념이면서 또한 현실적인 대립을 집약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有無’에는 부자와 가난뱅이, ‘眞俗’에는 귀족과 민중, 一二에는 임금과 신하, ‘中邊’에는 서울과 시골을 지칭하는 분별 개념이 다른 많은 것들과 함께 포함되어 있어서, 이해하는 쪽에서 그렇게 받아들인다고 해도 나무랄 수 없다.
그런 것들은 하나가 아니고 둘이여서 서로 대립되어 있었다. 당시 신라 사회에 대립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사회적 대립의 심각한 문제를 외면하고 고매한 사상을 전개하기만 하는 것은 허공에 뜨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런 것들이 둘이 아니고 하나이므로 대립을 넘어설 수 있다. 대립은 대립이 아닌 것으로 만들어 본래의 화합을 되찾아야 해결된다.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본래 주어져 있다고 믿고, 거기 이르는 길을 찾고자 했다.
신명풀이연극에서 대립을 제기하고 해결하는 방식의 원형이 되는 사상이 그렇게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대립이 화합이라는 주장을 함께 펴면서 강조점은 서로 달랐다. 원효는 대립보다는 화합을 더욱 중요시하고, 탈춤에서는 화합보다는 대립을 더욱 중요시했다. 그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하는 고민 때문에 시비가 일어날 수 있다.
양쪽의 거리를 메우기 위해서는 시대를 내려와서 하나가 둘로 나누어진 과정을 중요시하는 徐敬德의 철학을 찾을 필요가 있으며, 사람과 사람 밖의 사물의 부딪침을 특히 중요시한 丁若鏞의 사상에서도 보충자료를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적 대립에서 생기는 싸움을 전개하고 해결하는 방식을 탈춤이 더욱 선명하고 치열하게 보여준다. 탈춤의 이론을 다시 마련하기 위해서 철학을 끌어들이는 것은 개념화해서 논술하는 데 유리한 방법을 찾는 의의가 있을 따름이다.
사상의 배경에서든지 탈춤 자체에서든지 ‘신명풀이연극’에서 대립을 다루는 방식이 뚜렷한 특징을 지녀 다른 두 가지 연극미학과 비교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해졌다. 패배에 이른다는 것은 애초에 생각할 수 없다고 하는 점에서 ‘카타르시스연극’의 근거가 되는 사상과 다르다. 대립의 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한 점에서 ‘라사연극’과는 입각점의 차이가 있다.
카타르시스연극의 신이나 라사연극의 신과 비교해서 논하기 위해서는 그런 관점이 필요하다. 그러나 精神의 神은 사람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쉽사리 납득할 수 있지만, 그 정체가 더욱 모호하다. 좀 더 분명한 논의가 필요하므로 崔漢綺의 도움을 받아 마땅하다. 최한기가 사람이 정신활동을 하는 氣를 ‘神氣’라고 하고, 사물을 인식하고 표현해 나타내는 과정을 神氣의 발현으로 설명한 데 소중한 지침이 있다.
氣는 ‘活動運化’를 기본특징으로 한다 하고, 사물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마음에서 터득하면 “말을 하는 것마다 모두 靈氣를 지녀, 용이 꿈틀거리는 형체를 갖추고 萬化를 녹여서 지닌다” 했다. 그래서 이루어진 표현물을 받아들이는 쪽은 神氣가 흔들리어 움직이고, 쉽사리 感通하게 된다”고 했다. 글을 쓰고 읽는 행위에 관해 해명하고,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사이의 공감이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는지 밝히느라고 이렇게 전개한 이론을 연극에다 적용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최한기 이론의 미비점을 보완해 나의 이론을 만들 수 있다.
천지만물과 함께 사람도 수행하는 活動運化를 표출해서 공감을 이룩하는 주체가 되는 氣를 ‘神氣’라고 하면, 그것이 바로 ‘신명’이다. ‘神’은 양쪽에 다 있는 같은 말이고, ‘氣’를 ‘明’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안에 간직한 신기가 밖으로 뻗어나서 어떤 행위나 표현형태를 이루는 것을 두고 ‘신명’을 ‘푼다’고 한다. 그래서 ‘신명풀이’란 바로 ‘神氣發現’이다. 사람은 누구나 신기 또는 신명을 지니고 살아가지만, 천지만물과의 부딪힘을 격렬하게 겪어 심각한 격동을 누적시키면 그대로 덮어두지 못해 신기를 발현하거나 신명을 풀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탈춤은 신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연극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상생활의 차원에서 무력하게 살아나가는 삶을 묘사하는 것은 아니다. 놀이판에 나서서 뛰고 노는 사람뿐만 아니라 관중으로 참여해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까지도 신명이 넘친다. 신명은 사람의 기력이고 생명력이며, 최한기의 용어를 사용해서신기라고 하는 것이 적절한 규정이다. 사람의 신기는 천지만물의 기와 함께 ‘活動運化’하는 변화와 생성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최한기가 분명하게 밝혔다.
사람은 누구나 신명을 지니고 있으며, 신명을 발현하면서 살아가지만, 그것이 어느 정도인가 구분해서 평가할 수 있다. 신명이 대단하다든가, 예사 상태보다 뛰어나다고 하는 사람은 변화하고 생성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춤을 추고 놀이를 하는 데서 대단한 정력을 발휘할 뿐만 아니라, 허위를 물리치고 진실을 찾으며, 고착화되어 있는 관습을 깨고 창조의 비약을 이룩하는 데서 커다란 일을 할 수 있다. 그런 놀라움을 들어 말할 때 신들렸다든가 신통하다든가 할 수 있다. 탈춤 진행에 관중으로 참여하는 사람들도 함께 춤추고 놀면서 그런 경지에 이르고자 한다.
‘신명’ㆍ‘신기’ㆍ‘신통’이라는 말에 공통되게 들어 있는 ‘神’은 사람과 분리되어 있는 별도의 존재가 아니고, 사람이 지닌 속성이다. 사람 자체의 속성은 별도로 내세워 섬기는 대상이 아니니 통상적인 의미의 신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 밖에 신이 따로 없고 사람 자신을 자장 존귀하게 여겨야 하니 신이 내재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성리학에서는 ‘天人合一’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다. 天人合一을 東學의 전례에 따라 ‘神人合一’이라고 고쳐 일러 기본용어로 삼을 수 있다. 神人合一은 만물을 주재하는 인격적인 신이 있다고 하든 그런 신은 없다고 하든 함께 사용할 수 있어, 天人合一을 포함하고 범위가 더 넓다.
神人合一을 天人合一이라고 이해하는 견해에서는 天性이 사람에게 부여되어 있다고 하고, 사람이 天道를 실현한다고 보아 天과 人의 일치가 이루어진다고 했다. 李珥는 氣의 움직임이 잘되고 못되는 것을 판단하는 근거가 理에 있다고 하고, 사람에게 부여된 理의 근거가 天理라고 여겨 天을 숭상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면 조상이 응감하는 것도 조상의 理가 후손과 교감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해서, 神을 섬겨야 하는 최소한의 근거는 인정했다.
그런데 理는 氣의 원리일 따름이라고 하는, 서경덕ㆍ임성주ㆍ최한기의 氣일원론에서는 神을 理의 근원으로 섬겨야 할 이유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神은 없고 物만 있다고 하는 무신론을 전개한 것은 아니다. 임성주가 “하늘에 있으면 神이고, 땅에 있으면 示이고, 사당에 있으면 鬼이고, 사람과 동물에 있으면 心이라고 한다”고 하고, “있는 곳마다 두루 충만해 양양하게 넘치며, 옛날부터 지금까지 흘러가면서 없어지지 않는 것이 모두 이것이다”고(<鹿廬雜識>, <<鹿門集>> 19) 한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임성주는 그렇게 말해서 하늘의 신, 땅의 신, 조상의 신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도 함께 지니고 있는 마음과 마찬가지이고,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므로, 섬겨야 할 대상일 수는 없다고 했다. 그 모두가 천지만물의 창조적인 약동에 참여하고 있어서, 존중해야 마땅하다고 보았다. 그 가운데 어느 것을 특별히 좋아할 수는 있어도, 그 때문에 다른 것을 배격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했다.
천지만물과 사람의 마음 양쪽에 다 있는 창조적인 약동을 지칭하는 임성주 특유의 용어는 ‘生意’이다. 그 말뜻은 ‘생성의 의지’라고 풀이할 수 있다. 사람이 천지만물과 함께 지니고 있어서, 투쟁하고 생성하는 ‘生意’가 바로 신명이다. 이미 살핀 바와 같이, 최한기는 그것을 ‘活動運化之氣’라고 했으며, 그것이 사람에게 갖추어진 것은 신기라고 일컬었다.
東學을 창도한 崔濟愚는 <劒訣>이라는 이름의 칼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용천검 날랜 칼로 일월을 희롱”하니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 신명 좋을시고”라고 했다. 우주적인 범위에서 투쟁을 전개하는 신명풀이를 한다고 한 말이다. <<東經大典>>에서는 “鬼神者 吾也”라고 해서 “귀신이 바로 나이다”라고 일렀는데, 이 말을 ‘人乃天’이라는 고쳐 일러 “하늘이 곧 사람이다”는 원리로 정립하고, 그렇기 때문에 神人合一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런 사상은 신명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근거를 둔다고 할 수 있다. 그 말은 사람이 곧 신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사람이 곧 신이라는 것은 사람 밖에 따로 섬길 대상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고, 사람이 스스로 대단한 능력을 지녔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 능력은 각자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서 쓸 것이 아니고,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찾고,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데 소용된다.
신명풀이의 행위뿐만 아니라 신명이 무엇인가 밝혀 논하는 사상도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으나, 18세기에서 19세기까지의 기간 동안에 명확하게 가다듬어 높은 수준의 창조물을 이룩할 수 있었다. 탈춤의 신명풀이를 발전시킨 사람들은 하층의 놀이패이고, 임성주와 최한기는 상층의 지식인이어서 서로 직접적인 교류를 하지는 않았으며, 연극과 철학이 다르기 때문에도 같이 일할 수 없었다. 최제우는 하층민의 각성을 위해서 떨쳐나서서 스스로 춤추고 노래하기까지 했으나, 탈춤판에까지 갔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양쪽이 서로 공통되는 과업을 함께 수행했다.
탈춤패와 사상 혁신의 주역들은 같은 시대에 함께 살면서, 조상 전래의 지혜를 새로운 문화 창조의 원동력으로 삼고, 민중의 공동체적 결속을 근거로 사회문제에 함께 대처했다. 사상 논쟁의 가장 심각한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하는 역사적인 과업을 각기 서로 다르면서 같게 이루어, 여럿이 하나가 되게 했다. 양쪽 다 보면서 그 경과를 정리하자 사태의 전모가 비로소 드러나기 시작한다. 세부적인 경과는 아직 제대로 밝히지 못해 계속 탐구해야 한다.
그렇지만 신명의 철학과 신명풀이연극의 상관관계 같은 거대한 연구주제는 실증적인 방법으로 감당할 수 없다. 신명풀이연극의 기본원리에 관한 철학을 새롭게 정립하는 지금 하고 있는 작업에서 문제가 제기되고, 논의가 진척될 수 있을 따름이다. 신명풀이의 이론 창조를 더욱 크게 이룩해야 지난 시기 경과의 세부적인 사항도 새롭게 해명할 수 있다.
* 서풍동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