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민란 가요
비슷한 시기 전라도 정읍에서 민란이 일어났을 때 유포된 노래도 있다. <정읍군민란시여항청요>(井邑郡民亂時閭巷聽謠)라는 표제로 필사되어 있는 것인데, 항거의 목소리가 더욱 높다. 학정에 항거하다가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들어 이렇게 외쳤다.
학정도 하거니와 남살인명(濫殺人命) 어인 일고?
한일택 정치익과 김부담 강일선아,
너희 등 무슨 죄로 장하(杖下)에 죽단말가?
한 달만에 죽은 사람, 보름만에 죽은 백성.
오륙인이 되었으니 그 적원(積寃)이 어떠한고?
불쌍하다 저 귀신아, 가련하다 저 귀신아.
=> 이 작품은 학정에 대한 민중의 항변을 나타낸 작품의 소중한 본보기이다. 지어낸 말이 아니고 실제 상황이다. 민중을 내세우고 항거의 문학을 예찬하는 논객들이 이런 것을 모르고 공허한 소리나 늘어놓는 것이 안타깝다.
6. 동학혁명
1894년(고종 31)에 전봉준(全琫準, 1854-1895)이 주동이 되어 전라도 고부에서 일으켜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한 사상 초유의 대규모 민란을 오랫동안 동학란이라고 일컫다가, 오늘날은 동학혁명 또는 갑오농민전쟁이라고 한다. 이름이 여럿이듯이 성격이 복잡해서 동학과 얼마나 깊은 관계를 가지는가 하는 점부터 논란거리이다.
동학혁명의 문학은 동학의 문학이라기보다 혁명의 문학이다. 경전 대신 격문(檄文)이 필요했다. 격문으로 거사의 이유를 밝히고, 투쟁 목표를 제시해 민심을 모은 것이 최제우는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과업이었다. 격문에는 한문인 것도 있고 국문인 것도 있다. 격문처럼 엄숙한 글을 국문으로 쓴 것은 전에 없던 일이며, 어문생활사에서 새로운 시기가 시작되었음을 입증해준다.
지난 시기에 홍경래가 난을 일으킬 때에는 격문은 한문으로 지어 격조를 높였는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수신자가 어느 쪽인가에 따라서 한문을 택하기도 하고 국문을 택하기도 해서 설득력 확보에 중점을 두었다. 한문에 익숙하지 않은 하층민을 모아들여 동지를 널리 얻기 위해서는 국문이 긴요하다고 판단했으며, 동학군 지휘자들 자신도 대체로 같은 처지라 국문 사용이 더욱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격문이면 으레 갖추는 격식은 멀리하고, 주장하는 바를 설득력 있게 나타내는 길을 열어, 표현과 사상의 혁신을 함께 이룩했다.
우리가 의(義)를 들어 차(此)에 지(至)함은 그 본의가 단단(斷斷) 타(他)에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 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의 위에다 두자 함이라. 안으로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구축하고자 함 이다. 양반과 부호 앞에 고통을 받는 민중들과, 방백과 수령 밑에 굴욕을 받는 소 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라,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동학군이 고부를 함락하고 백산(白山)에 둔치고 있을 때 낸 두 번째 격문의 한 대목을 들면 이와 같다. 불행히도 원문이 그대로 전하지 않고, 1940년에 나온 오지영(吳知泳)의 <동학사>(東學史)에서 처음으로 소개했기에 원래의 표기법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쉬우면서도 위엄 있는 문체로 주장하는 바를 아주 적실하게 나타냈던 점을 확인하는 데 지장이 없다.
"투쟁의 목표는 안으로 도탄에 빠진 민중의 원한을 풀고 평등한 사회를 이룩하며, 밖으로 외세 침략자인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몰아내고 민족을 수호하는 데 있다고 했다. 그 점을 명확하게 밝히고,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주저하지 말고 전열에 가담하라고 촉구했다. 민중종교운동에서는 막연한 이상으로 표명되는 목표를 투쟁을 통해서 달성하는 방법을 제시했다고 하겠으며, 중세사회를 청산하면서 민중해방을 달성하는 것이 역사 발전의 기본방향임을 처음으로 확고하게 밝힌 의의가 있다."
그런데 광범위한 민중이 동학군에 가담해서 분투한 것은 격문이나 강령에 공감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민중이 소망하는 바에 따라 세상을 온통 바꾸어놓는 날이 온다는 오랜 예언이 있어 동학군을 지지하는 근거를 제공했다. 고창 선운사(禪雲寺) 석조 미륵의 배꼽에 감추어져 있는 신비스러운 비결이라는 것을 동학교도들이 그곳을 도끼로 부수고 탈취하고, 비결을 탐낸 고창 현감에게 잡혀가 죽게 되었는데, 비결을 믿고 따르는 군중의 힘으로 구출되었다는 사건이 난이 일어나기 이태 전에 있었다. 역사를 예언한다는 비결이 군중을 움직이고, 군중이 역사를 만들었다. 난을 일으킨 주동자들이 그 점을 바로 간파하는 능력을 가져, 잠재해 있는 행동을 촉발하는 방책을 마련했다.
난이 일어나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에는 지도자를 신비화하는 설화가 생겨났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신이한 능력을 지녀 천지조화를 마음대로 하는 전설적 영웅이라고 인정되어 논리적 사고를 넘어서는 힘을 얻었다. 그런 말은 누가 의도적으로 지어내지 않아도 구국의 영웅이 출현해야 한다는 기대가 오래 누적되어 있어서 자연히 생겨나서 널리 퍼졌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소년장수가 동학군의 선두에 서서 군사를 이끈다는 이야기도 만들어냈다. 동학군은 총탄을 맞아도 죽지 않는다고도 했다. 진군을 하면서 부른 노래도 적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런 자료는 당시에 채록되지 않았고, 동학혁명의 경과를 정리한 후대의 문헌에서 이따금씩 산견될 따름이다.
동학혁명이 패배로 돌아가자, 살아남은 사람들은 자취를 숨기고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오랫동안의 도피와 타협의 시기를 지나, 민중운동이 다시 고조되는 1926년에 이르러서야 천도교에서 <신인간>(新人間)이라는 잡지를 창간해, 어느 정도나마 금기를 깨고 동학혁명에 관한 구전과 회고록을 조금씩 내놓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그 잡지 처음 두 호에 실린 차상찬(車相瓚)의 <동란잡화>(東亂雜話)에서 소년장수이야기가 처음으로 활자화되었다. 동학군이 충청도 신례원에서 싸울 때 관군을 크게 무찌르고도 사상자가 생기지 않은 것은 열두 살 정도의 소년이 홍의(紅衣)를 입고 장검을 들고 항상 선두에 서서 비호같이 활약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상스러운 노파가 관군 진지를 스쳐가니 관군 대포마다 물이 들어가 못쓰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함께 실었다. 제12호에 발표된 이종인(李鍾仁)의 <홍의장군>에서는 장수이야기를 소설체로 윤색해놓았다.
그런데 전봉준에 관한 구전은 변죽만 울리고 만 느낌이다. 오지영의 <동학사>에 이르러서야 들은 이야기를 활용해 전봉준의 모습을 실감 나게 그리려고 한 대목이 이따금씩 보이는데, 내용이 풍부하지 못하다. 세상에 유언비어가 백출해 별별 이상스러운 말이 다 퍼졌다 하고서, 전봉준 대장은 참 영웅이고 이인이라 신출귀몰의 재주가 있으며, 바람과 구름을 타는 묘술을 부렸다는 말을 전했다. 그런 이야기는 저자 스스로 믿지 않는 바라 더 길게 늘어놓지 않고, 사실에 가까운 전설을 더욱 중요시했다. 사로잡은 관군을 놓아주어 모두들 감격하게 했고, 토벌하겠다고 나선 유학자나 관군 영장이 전봉준 대장을 만나보고는 기백과 인품에 감탄해서 도리어 동학군에 가담했다는 것 같은 일화를 여럿 들었다.
그밖의 여러 문헌에서도 전봉준은 사로잡혀 처형되기에 이르렀을 때까지 적이라도 존경하는 마음을 품게 했다 한다. 심문받은 기록이 남아 있어 언행을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운명시>(殞命詩)도 전한다.
時來天地偕同力 때가 이르러서는 천지와 함께 힘썼으나,
運去英雄不自謀 운이 가니 영웅도 스스로 꾀할 수 없다.
愛民正義我無失 백성을 사랑한 정의에 내 잘못은 없노라.
愛國丹心誰有知 나라를 사랑한 붉은 마음 누가 알아주겠나.
동학군이 패배하고 전봉준이 죽는 데까지 이른 비극은 구비문학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찼다. 민중적 영웅의 이야기가 그동안 생각했던 규모를 훨씬 넘어서서 사실로 실현되었으니 전승적인 유형을 적용해서 정리하는 것이 부질없는 일이었을 수 있다. 그 대신에 패배의 의미를 되새기는 짧은 노래만 몇 편 은밀하게 유행했다.
그 좋은 예인 <파랑새노래>가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연재된 <천희당시화>(天喜堂詩話) 1909년 11월 18일자에 소개되어 있다. 전봉준이 거사할 때 그 노래가 호남에 유행했다면서, “새야 새야 팔왕(八王)새야, 네가 어이 나왔더냐, 솔잎 댓잎 포릇포릇 행여 봄철인가 나왔더니, 백운이 폴폴 흩날린다”는 노래말을 들었다. “八王”은 “全字 破字”라는 주를 달아 파랑새가 바로 전봉준이라고 했다. 전봉준이 정세를 바로 파악하고 시기를 이용했더라면 목적을 이루었을 터인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을 애석하게 여긴 노래라고 했다.
위에서 든 차상찬의 <동란잡화>에서는 “갑오세 갑오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 되면 못간다”는 노래를 들었다. 동학군이 갑오년에 성공을 해야지, 을미년을 지나 병신년에 이르면 패하고 만다는 뜻이라고 했다. “아래녘 새야 웃녘 새야 저(전)주 고부 녹두새야 두류박 딱딱 우여”는 전주 고부의 전봉준이 두류산 박대장에게 패한다는 것을 알려준 노래라고 했다.
이종인의 <홍의장군> 말미에는 <천희당시화>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거의 같은 <파랑새노래>의 사설을 들고, 전봉준이 세상을 떠나자 전국의 마을마다 거리마다 아이들이 부르면서, 때에 맞지 않게 나왔다가 실패한 전봉준을 조상했다고 한다. 비슷한 사설을 가진 노래는 동학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도 있었는데, 큰 변란이 일어나면 그 조짐이나 내막이 아이들이 무심코 부르는 노래에 나타난다는 사고방식에 따라 참요로 풀이하면서 유동적인 문구를 적절하게 고정시키고자 했다.
그렇더라도 파랑새가 과연 전봉준을 뜻하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설사 그런 등식이 성립된다 하더라도 노래의 내용이 너무 단순해 듣고 부르는 사람들이 불만일 수 있었다. 좀더 구체적이고 자세한 사연을 알고자 하는 것이 당연한 요구이므로, 다음과 같이 늘어난 사설이 나타났다. 오지영의 <동학사>에 실려 있는 자료이다.
새야 새야 녹두새야 웃녘 새야 아랫녘 새야.
전주 고부 녹두새야 함박 쪽박 열나무 후여.
새야 새야 녹두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靑包)장사 울고 간다.
새야 새야 팔왕(八王)새야 너 무엇 하러 나왔느냐 ?
솔잎 댓잎이 푸릇푸릇 하절인가 하였더니.
백설이 펄펄 흩날리니 저 건너 청송녹죽(靑松緣竹)이 날 속인다
녹두새를 전주 고부 녹두새라 해서 전봉준과 바로 연결시켰다. 여기서도 “파랑”을 “全”자의 파자인 “八王”으로 표기했다. 청포를 “靑泡”라 하지 않고 “靑包”라고 해서 무슨 다른 뜻이 있는 듯한 의심이 생기게 했다. 그런데 이 노래가 전봉준과 실제로 얼마나 깊은 관계가 있었던지 검증할 수는 없다. 전봉준이 어떤 생각을 하면서 무슨 거사를 했던지 터놓고 말할 수 없었다.
전봉준을 지지해서 거사에 가담한 사실을 숨겨야 했던 역사의 반전기에는, 뜻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참요를 부르면서 아직 남은 동지들의 은밀한 유대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부른 노래라면 무엇을 말하는지 명확하게 알기 어렵다. 전봉준의 패배를 애석하게 여기면서 거사의 내막을 신비화하고, 패배를 운명으로 돌리는 주변의 민중이 지어 부른 노래라면, 뜻하는 바를 캘 수는 있어도 이치에 맞는다는 보장은 없다.
=> 참요가 아닌 다른 민요, 또는 설화까지 동원해 살펴보아도 동학혁명의 의미나 의의가 제대로 나타나 있지 않다. 서사시나 소설로 그 전모를 다시 밝히려는 시도가 오늘날까지 계속되지만 성과가 언제나 미흡하다. 인생 만사에 대한 총괄적인 시비가 문학의 사명임을 더욱 철저하게 의식하고 시야를 최대한 넓히지 않고서는 동학혁명 같은 거대한 주제를 휘어잡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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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목장터 기념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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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목장터 정읍 이평면 동학유적물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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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혁명 집결지 말목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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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봉준 묘소 노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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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봉준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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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봉준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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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봉준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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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혁명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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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기념관> 내부 전봉준 관련 전시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