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중국국제여행사
MICE회사 총경리 리주원
트럼본 연주자의 변신
이주원 대표의 이력은 단순했다.
1960년에 태어나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따라 음악을 공부했고 중앙민족대학에서 트럼본 연주를 전공했으며
졸업한 뒤에는 중앙민족가무단(국가급 예술단)에서 트럼본 연주자로 활동하였다.
그 뒤 가무단에서 국제여행사로 직장을 옮겼고 중한간의 여행업에 맹활약을 이어갔으며
굵직한 상들을 수두룩이 받아 안고 중한 여행업에 중요한 한 획을 그은 베테랑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배워왔던 사람이, 중앙민족가무단에서 우아하게 트럼본을 연주하던 사람이
어떻게 되어 여행업에 발을 담그게 되었고 거기에서 이렇게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을까?
직업에 귀천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세속의 어지러움과 담을 쌓고 손에 물 한 방울도 안 묻혔을 것 같은
아름답고 우아한 손으로 연주만 하던 사람이 세속의 한 복판에서 오고가는
국내외 여행객들을 상대하는 일을 선뜻 선택할 수 있었던 담대함이 궁금했다.
트럼본 연주자의 변신은 우연한 기회에 이루어졌다.
1990년 베이징에서 제11회 아시안게임이 열리게 되었다.
그때 한국 응원단의 통역안내를 맡을 사람이 필요하지만 베이징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제한되어 있었다.
이주원은 조선족이라는 이유로 중국국제여행사 총사의 요청을 받고 난생 처음으로 통역으로 나서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젊은 리주원은 통역 업무 자체보다는 아시안게임을 공짜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더 가슴이 부풀었다.
아시안게임 입장권 가격은 사회초년생인 이주원의 월급에 거의 맞먹는 액수였기 때문이다.
그 한 번의 통역 안내가 리주원의 인생행로를 바꾸어놓을 줄은 자신도 몰랐던 것이다. 그때 중국에 여행 왔던 한국 사람들이 리주원에게서 좋은 인상을 받았던지라 그 후 중국에 들어오는 때마다 국제여행사를 통해 그를 찾았다. 그런 일이 잦아지자 국제여행사에서는 리주원에게 스카웃제의를 하게 되었다.
젊은 그는 행복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음악이란 외길만을 걸어온 그에게 여행사 업무는 도전이었고 한편 기회이기도 했을 터였다.
그러나 중앙민족가무단이라는 많은 예술인의 전당인 소중한 직장을 포기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은사님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진심으로 제자의 진로에 대해 같이 고민을 해주셨던 은사님은
세계 글로벌화가 진행 중에 있고 중국도 점차 대외개방을 확대해 갈 것이니 여행업은
미래가 밝은 직종이 될 것이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1991년 서른한 살의 리주원은 용단을 내리고 중앙민족가무단에서 나와 중국국제여행사로 이직을 하였다.
국제여행사 한국부를 맡게 된 리주원은 당시 한국의 롯데여행사, 한진관광, 대한여행사, 세방관광 등
유명한 여행사들과 업무를 추진했는데 업무량이 급증하면서 중국 국제여행사에서의 입지를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능력을 인정받아 중국 국제여행사에서 중국관광객들을 한국에 보내는 이른바 한국인바우드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중한 간에는 아직 수교가 되지 않았지만 국가 간 교류형식을 통해
양국 간 주요 인사들의 상호 방문에 기여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문화 유적, 관광 명소,도시 참관, 비즈니스 탐방, 문화 체육, 교육 등 수많은 분야에서
리주원은 양국 간 인사들의 교류를 지원하여 민간차원에서 중한 간 상호 이해를 증진시키고
우의를 도모하는데 조선족으로서의 우세를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1992년 중한 간 국교정상화가 정식으로 수립되자 그녀의 역할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되었고 무대는 점차 넓어져 갔다.
관광업에서의 '처녀지' 개발
리 대표의 한국인바우드 업무에서는 늘 '처음'이 수식어처럼 따라다니
지만 그중에서 대표적인 몇 개만 소개한다.
리주원은 중국관광객들의 한국방문상품을 가장 먼저 개발한 사람이 되었다.
1998년 그는 중국단체관광객의 첫 한국 방문단체를 조직하여 중국관광객들의 한국관광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여러 차례 한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중국 관광객의 소비습관에 맞는 관광코스를 관찰하고
서울, 경주, 부산, 제주도를 방문하는 관광상품을 개발하였다.
이것은 그가 조선족집거지를 떠나 대도시에서 오랫동안 한족들과 어울려 생활해 온 조선족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한국의 어떤 요소들이 중국인들의 시선을 잡아당길 수 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또 한국에서 내세울만한 민족적 특색이 무엇인지도 직감적으로,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 다음에도 서울과 판문점, 서울과 섬, 그리고 강원도 스키관광, 전라도 미식관광, 경주 세계문화유산 박람회 참관,
제주도 세계도서 문화축제 등 관광상품을 다수 개발하였다.
이런 관광 코스를 개발함으로써 대량의 중국관광객들을 한국에 송객하였고
한국문화체육관광부, 한국관광공사, 각 지자체로부터 수십 차례 표창과 감사패를 받아 안았다
. 또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 부산시와 강원도 지자체의 관광고문으로 위촉되기도 하였다.
▲ 베이징동계올림픽 페럴림픽 조직위원회 책임자로 참석
리 대표는 근년래 우후죽순처럼 일어선 중국 국내 작은 여행사들의 한국여행상품에 깊은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그들에게 한국의 인문적, 자연적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우려스러웠던 것이다.
코로나 직전까지만 해도 한국으로 가는 중국 국내 여행객은 부지기수였는데
그들이 선택한 여행상품의 가격도 천차만별이었다. 싼 가격에 혹해 훌쩍 여행팀에 섞여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가지만 그들이 한국에서 누린 것은 질 높은 여행이 아니었다.
저렴한 서비스와 호객행위가 만연해 있었던 것이다.
2001년, 인천 신공항 개항 기념 앙드레김 패션쇼장에서 그는 당시 한국관광 홍보대사로 임명된 안재욱을 만나게 되었다.
1997년 한국 국내에서 방송된 <별은 내 가슴에>라는 드라마가 대박을 터뜨리고 안재욱은 일약 스타덤에 올라섰다.
그리고 그 이듬해 중국에 그 드라마가 알려지면서 중국에서도 안재욱의 인기가 치솟고 있던 터였다.
리 대표는 먼저 안재욱의 매니저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 안재욱의 매니저가 그렇게 쉽게 만남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는 갖은 방법을 다해 매니저에게 다가가 <안재욱 팬클럽과 함께 하는 여름캠프> 사업 구상을 터놓았다.
중국에서 안재욱의 팬클럽을 모아 한국으로 송객하는 프로젝트였다.
안재욱의 중국내 인지도를 더 높이고 이제 막 뜨기 시작한 안재욱의 입지를 다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 리주원은 중국의 라디오 음악프로그램, 매체 등에 광고를 내고 500여 명의 안재욱 팬들을 모객하였으며
한국에 가서 ‘우상’과 만나는 프로젝트를 처음으로 개발했다.
이후 수년 동안 이러한 사업을 지속하였는데 이는 한류스타 팬미팅,
한국 드라마 촬영지 관광상품 개발 붐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또 리 대표는 1999년 9월에 진행된 제1회 ‘중한가요제’를 시작으로 연속 10년간 참여하였으며
수천 명의 한류 팬들을 대상으로 공연관람 관광상품을 개발하여 중국내에서 한류열풍을 일으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그는 중국팀 응원단을 구성하여
한국으로 데리고 나가 양국 간의 스포츠 교류에도 기여를 하였다.
그 번 월드컵에서 중국팀이 처음으로 본선에 진출하였기에 중국팀 응원 열풍이 여느 때보다 높았다
. 당시 입장권이 턱없이 부족하여 응원단구성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 대표는 전국 20개 도시 50여 명의 팬클럽 회장단을 모아 중국 중앙방송국(CCTV)의 간판 프로그램
<축구의 밤> 제작팀과 함께 한국에 갔다.
이후 여러 차례의 교섭 끝에 1만여장의 입장권을 확보하여 월드컵을 참관하는 관광상품을 구성하였다.
베이징은 물론 텐진(天津), 광둥(广东), 우한(武汉) 및 화둥지역 각 도시를 돌면서 상품 판매활동을 진행하여
1만 명이 넘는 중국 축구팬을 모객하는데 성공하였으며 한국방문기간 월드컵도 응원하고
한국의 문화도 체험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1,000여 명의 중국관광객을 모객하여 부산에서 개최된 부산아시안게임을 관람하였고
2014년에는 1,600명을 모아 인천 아시안게임을 관람하였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에는 2022년 베이징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의 요청을 받아 차기 개최지인 베이징 공연에 동참하였다.
당시 베이징 올림픽 조직위원회 실습단, 관광객 참관단 200여 명을 이끌고 한 달 반 동안 강릉에 머물며
양국 간의 스포츠 교류도 진행하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이주원은 베이징 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로부터 표창장을 받았다.
그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처음'
MICE 산업은 이주원이 가장 오랫동안 담당해 왔고 또 한국 경제에 가장 크게 기여한 분야이다.
2004년에 처음으로 기업체 인센티브단체를 한국에 송객하였다.
완메이(完美) 일용품유한공사 직원 500여 명을 인솔하여 제주도 방문을 시작한 것이다.
2006년에 중국인수(中国人寿) 임직원 680명, 2007년 타이캉인수(泰康人寿) 임직원 1,200명,
Novatis 제작회사 인센티브 단체 600명, 2006년과 2007년 베이징 현대자동차 대리점 고객, 시승운전요원 등 1,000명,
2009년 무한극(无限极) 일용품유한공사 임직원 1,800명, 2010년 완메이일용품유한공사 임직원 1,500명을 송객하였다.
특히 이 기간에는 중국의 ‘록의 대부’로 불리는 가수 최건의 제주 콘서트를 열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중국 로큰롤의 산증인 최건은 역시 이 대표와 마찬가지로 조선족이었다.
그들 둘은 중앙민족가무단에 있을 때의 동료이기도 했다.
2011년에는 바오젠(保健) 일용품유한공사 인센티브 단체 11,000명을 한국에 송객하였는바
이는 한국 MICE산업에 있어서 단일 관광객 규모가 가장 컸던 송객이었다. 여기에는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당시 바오젠 일용품유한공사는 2010년에 11,000명의 인센티브 단체를 일본에 송객하기로 결정하고
현장조사를 거쳐 계약까지 체결한 상태였다.
관광단체에 대한 요금을 지불하고 출발하려던 시점에 ‘조어도사건(钓鱼岛事件)’이 발생하였는데
바오젠유한공사는 일본의 행위에 항의하기 위해 베이징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방문계획을 철회했다.
당시 이 사건은 국내외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다시 입찰을 통해 새로운 목적 국가를 선택할 예정이었다. 호주, 말레이시아 등 나라들에서 로비작전을 펼쳤다.
이때 이 대표는 한국관광공사, 강원도청, 제주도청과 직접 소통하면서 적극적인 공세를 벌였다.
당시 한국 국내에서도 정치적인 사안 때문에 도지사의 출국이 여의치않았지만
이 대표는 제주도 우근민 지사에게 전화하여 반드시 빠른 시일안에 베이징으로 와달라고 요청하였다.
리 대표는 11,000명의 관광객을 다른 나라에 양보하기 싫었다.
그의 간곡함이 통하여 우근민 지사는 그 때 70고령의 나이였지만 어렵사리 중국으로 행차하였다.
우근민 지사는 도착하자마자 한숨 돌릴 사이도 없이 중국국제여행사를 찾아와
관계자들과 자리를 갖고 적극 밀어붙이자는데 합의했다.
그날 우 지사는 중국의 관계자들과 일일이 도수 높은 배갈을 건배해가면서 살신성인으로 관광객 유치에 나섰다.
진심은 통하는 법, 결과적으로 한국관광공사 베이징 지사장과 함께 바오젠 기업체를 방문해
PT를 포함한 여러 조건을 제시해 11,000명을 한국에 유치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후 바오젠 유한공사는 11,000명을 제주로 송객하였고,
제주 시내에는 이 역사적인 단체의 방문에 맞추어 바오젠거리(保健街)를 새로 조성하기도 하였다.
이 바오젠거리는 중국 관광객들의 한국 방문을 상징하는 길이 되었고 중한 양국 간 우호를 상징하는 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당시 20여 일 동안 전체 관광단체들의 행적은 한국과 중국에서 모두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제주도는 중국 관광객들이 가장 선호하는 한국의 관광지로 떠오르게 되었다.
MICE 관광객은 일반 관광객에 비해 통상적으로 소비 수준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기에
MICE관광단체 유치 시 한국의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바가 훨씬 크다
. 상기의 8개 인센티브 단체 18,280명이 한국을 방문하여 소비한 금액은 393억 원(한국관광공사 발표)으로 통계되었다.
돌이켜보면 예술이든, 여행사 업무든 그가 해온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었다.
트럼본을 연주할 때는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이고 여행사 업무를 시작해서는
관광객들의 마음에 드는 여행상품을 만들기에 주력했다.
▲ 2020년 한국관광공사에서 발급한 감사패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은 입에 발린 말이나 순식간의 열정으로 이뤄낼수 없는 것이다.
이 대표는 일관된 정성과 진심으로 불모지를 개척했고
많은 ‘처음’을 만들어내면서 여행업의 '신화'를 써냈던 것이다.
예술을 전공한 밑천으로 ‘중한가요제’가 나올 수 있었고 한류문화의 전파를 확대시킬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조선족의 우세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기에 한국관광상품 개발에서 남다른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대표는 조선족 출신의 예술인 ‘영업맨’으로 국가 대표기업인 중국국제여행사 본사에서 일을 시작해 합병 후
규모가 커진 중국여행그룹까지 꼬박 31년간 여행업에 종사하고 있다.
리 대표는 중국국제여행사 3개 기업이 합병되어 새롭게 탄생한 중국관광그룹의 하이난 지역본부에 파견되어
여행서비스 분야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또한 현재 중국여행사협회가 주관하는 MICE 위원회 사무총장으로 선임되어 국가차원의 관광산업의 미래를 그리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그러나 3년째 이어지고 있는 코로나19사태로 인해 현재 관광산업은 전례 없는 타격을 받고 있다.
당분간 관광객을 송객하는 업무는 끊겼지만 그는 코로나가 끝나는 시점을 대비해 움츠리고 있는 이 시간에
재도전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에는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었기에 새 정부의 대중국 방침에 대한 분석도 필요하다.
하지만 정치형세가 어떻게 변하든, 언제나 그래왔듯
중한 양국의 관광산업은 계속될 것이라고 리 대표는 확신한다고 했다.
하루 빨리 코로나19의 운무가 걷히고 양국의 여행객들을 태운 여행기가
종전처럼 쉴 새 없이 활주로를 달릴 날을 기대해본다. 글/리은실
리주원
1960년 길림성 장춘시(吉林省 长春市) 출생 / 조선족
중앙민족대학교(음악과 악기 전공) 졸업
중국여행사협회MICE위원회 비서장
중국국제여행사집단 하이난지부 대표 역임
중국국제여행사 총사 유한공사 MICE센터 총경리 역임
중국국제여행사 총사 출경부 부총경리 역임
중국국제여행사 국제회의전람유한공사 당총지부서기 역임
중국 중앙민족가무단에서 트럼펫 연주자 경력
2008중국국제여행사 우수관리자 표창
2009한국관광공사 MICE 전문가 표창
2010한국 제주도특별자치도 감사패 수상
2011대만해협양안관광협회 MICE 보급탁월 공헌상 수상
2011아시아나항공 MICE 최고세일러상 수상
2015한국언론기자협회 <세계평화언론대상> 수상
2020한국관광공사 공로패 수상
2020중국여행사 협회 최고 여행인상 수상
2022북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 표창장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