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호 靜庵·정암, 시호 文正·문정)만큼 평가가 엇갈리는 역사적인 인물이 또 있을까. 그는
일생은 짧고 격절(激切)했다. 증송재(贈松齋)의 시 처럼
우뚝한
소나무는 구름을 업신여겨 푸르고 / 외로운 달은 얼음을 비춰 차갑도다. 特松凌雲碧 孤月照氷寒
이유야
어찌되었든 역대 '실패한 개혁주의자' 중 한 사람인 조광조, 이상국가를 실현하려던 개혁정치가로 추앙받기도 하는 조광조. 그가 연산군의 폐정을
개혁하려다가 기묘사화에 휘말려 유배됐다가 사약을 받고 서른여덟의 나이에 비운을 맞는다.
이 젊은 선비가 남긴 일화들은 금세 신화가
되었고, 후세는 그를 성리학의 순교자라 칭한다. 연산군을 폐위하고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개혁정치를
펴기 시작했는데, 그 시기 개혁의 주역으로 등장한 사람이 바로 신진 사류의 대표적 인물인 조광조 선생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대를 이어 사림(士林)의 영수가 된다.
그는 스승 김굉필로부터 물려받은 성리학의 학통을 이어 왕도정치를 실현하려고
했다. 그의 목표는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 이러한 왕도정치를 위해서는 부패와 비리를 청산하는 개혁이 필수적이었고, 따라서 그는 소격서(昭格署)를 철폐하고
현량과(賢良科)과와 농촌에 향약(鄕約)을 실시하는 등 혁신적인 정책을 펼쳐나갔다.
이때 자신이 개혁을 위해 뽑힌 인물이 김식(金湜), 안처겸(安處謙), 박훈(朴薰) 등 28명에 이어 김정(金淨), 박상(朴尙), 이자(李耔), 김구(金絿),
기준(奇遵), 한충(韓忠) 등 소장학자들 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정치는 기존의 훈구세력에게 커다란 반발을 살
수밖에 없었다. 훈구세력들은 음모를 꾸미며 살길을 찾는다. 현대 정치사에서도 자주 있어 왔다.
남곤과 심정이, 홍경주(洪景舟)가 일찍이 찬성이 되었다가 논박을 받아 파면되어 항상 분함을 품고 있는 것을 알고 드디어
서로 통하여, 홍경주로 하여금 그의 딸 희빈(熙嬪)을 시켜서, “온 나라 인심이 모두 조씨(趙氏)에게로 돌아갔다.” 하고, 밤낮으로 임금께
말하여 임금의 뜻을 흔들었다.
그것이 효과가 없자 대궐 안 산 벌레가 나무 열매의
감즙(甘汁)을 먹기 좋아하니 나뭇잎에 발라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씨를 써서, 이를 벌레가 파먹게 하였다. 즉 ‘주(走)’와
‘초(肖)’를 합하면 ‘조(趙)’가 되는데, 그 뜻은 ‘조씨가 왕이 되려한다’는 역변의 음모를 하려한다는 소문을 궁중에 퍼트려다.
중국속담에 "좋은 소문은 문 밖으로 나가지 않고, 나쁜 소문은 천리 밖도
나다닌다.好事不出門 壞事行千里"라 했던가!
이것은 반정에 의하여 권력을 차지한 중종에게는 사림파의 급진적인 개혁 정책에 더할 수 없는 심리적 압박이었고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가 공훈을 박탈당한 훈구파들은 중종의 마음을 움직여
궁중 쿠데타를 일으킨 기묘사화의 피바람과 함께 조광조 선생의 목숨뿐 아니라 70여명의 인재들과 개혁정치 또한 차가운 땅 속 깊이
묻혀 버린다. 후세 사람들은 기묘사화로 죽임을 당한 조광조, 김정, 기준, 한충, 김식, 김구, 박세희,
박순, 윤자임 등을 기묘명현이라 불렀다.
"대도가
오래도록 적막하니 / 이단들이 이제 우뚝하도다 혼혼한 천길의 물결에 / 황류가 청류를 덮고저 하네. 大道久寂寞 異議今崢嶸
渾渾千丈波 黃流欲습淸
王의 은택이 막혀서 내려가지 아니하니 / 쇠잔한 백성이 스스로 살 수가
없구나. 王澤滯莫下 殘氓無自生(送順之南行五首中의 2번째)-정암-
전남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는 조광조가 유배된지 한 달만에 사약을 받고 죽은 자리에 절명시의 '愛君如愛父 憂國若憂家'에서 따온 이름의
애우당(愛憂堂)이 있다.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처럼 하였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애우당 안 벽 천장에는 여러개의 현판이
붙어있다. 능성적중시(綾城謫中詩), 절명시(絶命詩), 애우당기(愛憂堂記), 역모무고공술(逆謨誣告供述)등) 그 중 역모무고공술(逆謨誣告供述)
이라고 써진 현판은 조광조 최후의 진술이 적혀 있다.
그중에 능성적중시(綾城謫中詩)에서는 이미 자신을 제거하려는 덧에 걸렸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누가 활맞은 새같다고 가련히 여기는가.내 마음은 말잃은 마부같다고 쓴웃음을
짓네. 벗이 된 원숭이와 학이 돌아가라 재잘거려도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 /독 안에 들어 있어 빠져 나오기 어려운 줄을 어찌 누가
알리오 誰燐身似傷弓鳥 自笑心同失馬翁 猿鶴定嗔吾不返 豈知難出覆盆中
이글은 정암 선생이 능주로 유배당하여 온후로 정암선생의 일파로 몰려
귀향하였던 학포 양팽손선생에게 전하여 주었던 것으로 알려진 칠언절구의 시로서 정암 선생은 자신이 활 맞아 비적거리는 한 마리의 새로 비유하고
사림의 영수였던 그가 훈구새력의 모함을 받아 중종의 미움으로 벼슬을 잃었고 사림의 동지를 만날수 없게 되었으니 그 자신이 중원을 달리다가 잠시
쉬는 동안 말을 잃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여 낡은 정치에 대항하여 단행한 개혁의 정당성을 생각하면서 축생과 같은 그들의 야만성에 대하여 은유적으로
비웃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세간에는 말[馬]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화초를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거위와 오리 기르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나, 만일 마음이 외물로 내달리게 되면, 반드시 집착하기에 이르러 끝내 도(道)의 지경에 들어갈 수 없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소위, ‘물건을 완성하다가 뜻까지 상실하고 만다.’는 것이다.” 하였다.
또 언중유골이라 했다. 그의 시에는 누구에게나 심금을 울려주기 충분한 비장함이 묻어있다.
역모무고공술(逆謨誣告供述)에서는
이 세상에 선비로 태어나 믿을 사람은 임금님뿐, 올바른 정치를 하고 기강에
병통이 되는 근원을 제거하기 위하여 새롭게 무궁한 맥을 찾고자 하는 일 입니다. 여타에 다른 생각이 없음을
머리숙여 말씀 올립니다. 士生斯世
所恃者君心而己 妄料國家病痛在於利源 故慾新國脈於無窮而己 頓無他意
사화를 일으킨 남곤과
심정 등은 자신들의 계략이 탄로나면 역풍을 우려 속전속결로 끝내야 했다. 조광조는 유배생활 한 달 만에 중종14년 12월 20일 선생에게 사약이
내려와 사사하라는 명이 내리자 조광조가 말하기를, “임금이 신에게 죽음을 내리니 마땅히 죄명이 있을 것이다. 공손히 듣고서 죽겠다.” 하고, 뜰
아래 내려가 북쪽을 향해 두 번 절하고 꿇어앉아 전지를 들었다.
전례에는 무릇 정승을 사사할 적에는 어보(御寶)와 문자 없이 다만
왕의 말씀만 받들어 시행하는데, 조광조가 묻기를, “사사하라는 명만 있고 사사하는 문자는 없는가?” 하니, 도사 유엄(柳渰)이 조그만 종이에 쓴
것을 보였다. 조광조가 말하기를, “내 일찍이 대부의 반열에 있었는데, 이제 사사하면서 어찌 다만 종이쪽지를 도사에게 주어 죽이게 하는가. 만일
도사의 말이 아니었다면 믿지 않을 뻔했다. 국가에서 대신을 대접하는 것이 이같이 초라해서는 안 되니, 그 폐단이 장차 간사한 자로 하여금
미워하는 이를 함부로 죽이게 할 것이다. 내가 상소하여 한 말씀 드리고 싶지만 하지 않겠다.” 하고, 이어서 묻기를, “임금의 기체 후는
어떤가?” 하고, 다음으로 묻기를, “누가 정승이 되었으며, 심정은 지금 무슨 벼슬에 있는가?” 하니, 유엄이 사실대로 고하자, 조광조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내가 죽는 것이 의심없다.”했다. 또 묻기를, “조정에서 우리들이 어떻다고 하는가.” 하니, 유엄이
말하기를, “왕망(王莽)의 일과 같다고 말하는 이가 있는 듯하다.” 하자, 조광조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왕망은 사사로운 짓을 한 자이다.”
하고 말했다. 여기서 왕망(王莽)은 중국 전한(前漢) 말의 정치가이며 ‘신(新)’
왕조(8∼24)의 건국자. 갖가지 권모술수를 써서 최초로 선양혁명(禪讓革命)에 의하여 전한의 황제권력을 찬탈하였다. 개혁정책은 결과적으로 한말의 여러 모순과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모두 실패하였다.
조광조가 조용히 죽음에 나가면서 집에 편지를 쓰고, 시자에게 부탁하기를, “내가 죽거든 관(棺)
은 모두 마땅히 얇게 하고 두텁고 무겁게 하지 말라. 먼길을 돌아가기 어려울까 염려된다. 불편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유엄(柳渰)이 죽음을
재촉하는 기색이 있자 조광조가 탄식하기를, “옛날 사람이 임금의 조서(詔書)를 안고 전사(傳舍)에 엎드려서 운
이도 있는데, 도사는 어찌 그리 사람과 다른가.” 하고, 5언 절명시(絶命詩)를 남긴다.
임금을 어버이 같이 사랑하고 / 나라를 걱정 하기를 내집 걱정하듯
했도다. 밝고 밝은 해빛이 세상을 굽어보니 /거짓없는 내 마음을 훤하게 비춰주리. 愛君如愛父 憂國如憂家 白日臨下土 昭昭照丹衷
약을 마셨는데, 그래도 숨이 끊어지지 않자 금부의 나졸들이 나가 목을 매려
하였다. 그는 아직도 정신이 있었다. 조광조가 말하기를, "상감께서 나의 목을 보전하고자 약사발을 내렸는데 너희들이 어찌 목을 매려 하느냐"
하시고 약을 다시 달래서 더 독하게 마시고 마침내 쓰러져 일곱 구멍으로 피를 쏟으며 최후를 마치었다. 12월 20일이었고 나이는
38세였다.
이때 그의 제자였던 임 회(林檜)는 이렇게 회포했다.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한 것 같이 하였고/하늘의
해가 붉은 속마음을 비칠 것이다 愛君如愛父 天日照丹衷
군자는 오직 마음으로 멀리 보나니/뜻이 더할 바가 아님이 없다.君子惟心遠
無非意所加-정암-
그는 춘부(春賦 봄을 읊은 글)에 스스로 서문(序文)을 지어
이르기를, “봄이란 것은, 천리의 으뜸이다. 사시(四時)는 봄으로부터 시작되며, 사단(四端)은 인(仁)으로부터 발현되나니, 봄이 없으면 시절의
차례가 성립되지 못하고, 인(仁)이 없으면, 선심(善心)의 실마리가 이루어지지 못한다. 하늘은 욕심이 없어 봄이 행하여 사시가 이루어지고,
사람은 욕심이 있어 인(仁)을 상실하여 선심의 실마리를 확충시키지 못한다.” 하였다.유선록(儒先錄)
그가 펼친 이상(理想)
정치운동의 핵심은 사림(士林)정신의 입각한 구습의 폐단을 없애고 참신성을 구현하려는 혁신 의지가 충만된 지치주의였다. 사림들이 양심적 사류로
유학 본래의 덕치, 예치에 의한 이상적 지치에 궁극적 목적을 두고 있다. '신하는 마땅히 충성을 다하여 임금을 섬기되 일신지화환(一身之禍患)을
계산치 아니해야 할 것이라고 강론한다.
아버지가 아들을 알아주지 못한다면 아들이 근심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임금이 신하를 잘
알지 못한다면, 신하가 충성을 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인금과 신하는 대개 아버지와 아들과 한가지인 것이다. 뜻이 큰 사람은 비록 경륜의
대업(大業)을 못할지라도 큰일에 임하여 능히 그 지조를 잃지 않나니, 산을 오름에 비유한다면, 정상에 가기를 목표한 자는 비록 정상에까지
이르지는 못하여도 산 중턱까지는 오르게 되나, 산 중턱까지만 오르려 한 자는 산 밑을 떠나지 못해서 반드시 멈추게 되는
것이다.
희생정신에서 정도와 인륜을 이끌어 가는 진리의 주체자로서 사림상을 구현하려는 신앙적 정신. 굵고 짧게 살고 갔지만
후인들에게 어떻게 살것이낙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역사속에 사라진 위인임에는 틀림없다.
정성되게 충성과 믿음 본받으니/ 이것 말고 다시 무엇을 얻을까 款款效忠信
莫此更何得-조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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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우국적 태도가 당시 군주의 독재와 권벌의 전횡에 대항하여 목숨을 바쳤던
사대부로서 이른바 조선 사화기의 양심 세력을 이룬 역사의 주역과 국난때 초개와 같이 조국에 피를 받친 전라도 의병들의 정신적 지주로
작용했다.
그러나 그는 학문이 완숙되기도 전에 정치에 뛰어들어 과격한 개혁을 추진하다 실패하였으니 주변인들은 안타까워 했다.
조광조의 죽음은 정광필이 가장 상심하여 마지 않았으며, 그의 정적이었던 남곤(南袞 1471~1527)까지도 매우 슬퍼하였다 한다.
성세창(成世昌)의 꿈에 조광조가 살아 있을 때 처럼 나타나서 시를 지어 성세창에게 주었는데 그 시는 "해가 져서 하늘은 먹과
같고/ 산이 깊어 골짜기는 구름 같구나, 군신의 의리는 천년토록 변치 않는 것, 섭섭하다 이 외로운 무덤이로다. 日落天如墨 山深谷似雲 君臣千裁義
惆悵一孤墳 "라는 애닯은 사연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다 가엾이 여겼고 남몰래 눈물을 흘리는 사람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에 십청헌(十淸軒) 김세필(金世弼
1473∼1533)이 명 나라에 사신 갔다가 돌아오는데 요동(遼東)에 도착하여, 북문의 화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남곤과 심정이 과연 선비들의 씨를 없애는구나. 효직(孝直 조광조)이 무슨 죄가 있는가.” 하고 개탕하고 경연에서 왕에게 아뢰기를,
“..... 지난날 조광조의 무리가 요순의 정치를 본받으려고 하므로 전하께서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하고 신임하니, 이에 신진(新進) 선비들이
반드시 하루아침에 옛 것을 고쳐서 새롭게 하여 삼대의 정치를 베풀려 했던 것인데, 전하께서 지나치게 그 말을 쓰시어 도리어 오늘날의 근심을 끼친
것입니다.이들은 일대의 이름 있는 사람들로서 비록 과격한 실수가 있지만, 그것은 옛날의 좋은 정치를 끌어다가 한갓 속히 하려는 정성으로
번독스럽게 한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따라서 다만 그 과격함을 책망하시어 온화함으로 인도하여 다시 감화시킨다면 전하의 포용하는 덕이 장차 옛날
제왕과 같을 것인데, 이에 귀양보내고 내쫓아서 당파로 연루시켜 하루아침에 사사하여 지극히 참혹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전하께서 선을 좋아하는
마음이 끝에 가서는 한쪽으로 치우친 데로 귀결됨을 면치 못할 뿐입니다.옛사람이 배 타는 것으로 그 편중되어 뒤집히는 근심을 비유한 자가
있었으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또한 꺼리지 말고 지날날의 허물을 용감히 고치소서.” 하고, 반복해서 말을 하는데 말마다 눈물을 흘렸다고
동각잡기.전언왕행록.십청집(十淸集) 등에 전하고 있다.
'浮名看腐鼠 덧없는 명예 썩은 쥐처럼 본다"고 노래했던 이세필은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이어 대사헌·이조참판을 지내고, 1519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해 겨울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조광조(趙光祖)를 사사(賜死)하자, 임금의 처사가 부당하다고 규탄하다가 유춘역(留春驛)으로 장배(杖配)되었다.
또 율곡(栗谷)
이이(1536~1584) 등은 “사람들은 입 모아 말하기를, 시기가 성숙하지 못한 탓으로 돌렸다.”라고 말한다. 이렇듯 정치가 조광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쉬움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남곤 일파는 생각보다 잔인했다.
송재(松齋) 한충(韓忠 1486~1521)은 기묘사화 때
전한(典翰), 직제학에서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는데 이들의 간악한 정권찬탈을 반발하고 어버이를 봉양한다는 핑계로 외직에 나가 충청 수사(忠淸水使)가
되어 수영(水營)에 있다가 조광조가 능성(綾城)에 유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혼자 말을 타고 달려가서 금강(錦江)에서 맞이하고 시를 화답하며
이별하였다는 죄목으로 거제(巨濟)에 유배되었다.
1521년(중종16)에 안처겸(安處謙)의 옥사가 일어나자 황서경(黃瑞卿)의
이름이 편지 기록 중에 있었는데 남곤(南袞)그를 국문할 대상에 포함시켰다. 중종이 친국하다가 무함이라는 것을 알고는 눈물을 흘리며 즉시
방면하라고 명하자 남곤은 몰래 수졸(守卒)을 시켜 옥에 들어가 뼈를 부러트려 죽이는 잔혹함을
보였다.
연약한 자질은 바위 모퉁이에
의탁해 있고 / 외로운 뿌리는 구름 구렁에 의지해 있네 그윽한 방초를 뉘와 같이 감상할꼬 / 높은 절개를 대중이 모두 다
시기하네. 嫩質托巖隈 孤根依雲壑 幽芳誰共賞 高節衆同猜 -조광조-
1986년에 유허비 주위를 정화하면서, 정면 5칸·측면 2칸 규모의
강당(講堂)과 정면 3칸·측면 1칸 규모의 영정각(影幀閣)을 건립하여 영정을 봉안하였으며, 유배 당시의 초가도
복원하였다.
애우당(愛優堂)앞 정암조광조선생적려유허비(靜菴趙光祖先生謫廬遺墟碑) 비석은 조광조를 추모하기 위하여 1667년(현종
8)에 능주목사 민여로(閔汝老1598∼1671)가 건립한 유허비이다. 이 유허비는 총높이 295cm이며,높이 164cm·너비
81cm·두께 29cm의 귀부 위에 비신이 세워져 있는데, 귀부는 자연석에 가까운 암석으로 거북의 형태만 갖추었고, 귀두(龜頭)도 형상만
다듬었다. 비신의 전면에는 종서(縱書) 2행의 해서체로 음각된 추모비는 비명이 있는데, 적려(謫廬)란 귀양 또는 유배를 뜻한다. 이수는 높이
71cm의 반원형인데, 전면에는 쌍룡이 어우러져 있고 배면에는 한 마리의 용이 구름을 타고 오르는 모습으로 되어 있으며, 정면 1칸·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으로 된 비각(碑閣)에 보존되어 있다.
비신의 뒷면 상단은 정암조선생추모비(靜菴趙先生追慕碑)라 전액하고 밑으로는
조광조의 유배 내력을 기록하였다. 비문은 제자 권상하(權尙夏)와 함께 정승에 제수되었으나 응하지 않은 인물중에 한 사람의 이력을 갖고 있는
조광조 만큼의 곡직한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짓고, 전면의 글씨는 둔촌(屯村) 민유중(閔維重;1630∼1687)이
썼으며, 후면의 글씨는 동춘당(洞春堂) 송준길(宋浚吉;1606∼1672)이 썼다.
송시열이 쓴 능주 적려(謫盧) 때의
유허(遺墟)에 세운 추모비기(追慕碑記)에 "아! 이는 정암 조선생께서 귀향살이하던 집이오. 따라서 운명했던 유자(遺趾)이다."라며 "학사(學士)
. 대부(大夫)들은 그분의 학문을 사모하고 백성(黎民), 아전(胥徒)들은 그 분의 덕택을 생각하여 오래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잊지 못하면서,
모두 이렇게 말한다. "우리 궁벽한 동방의 사람으로 하여금 군신 부자의 윤기를 알아서 이적(夷狄) . 금수(禽獸)의 지경을 모면케 한 것은
선생의 주신 덕분이라고"
그의 시는 간결하면서도 알 듯 모를 듯...칼칼하기 까지 한다.
한밤중의 얼음 시냇가에 / 오직 소아만이 있어 알아주더라. 中宵氷磵側
惟有素娥知
이곳이 중요한 유적인 것은 호남에서 사족의 성격 뿐만아니라 전남인의 기질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16세기 김굉필과 조광조의 영향으 흔적이기 때문이다.
김굉필은 무오사화때 순천에 유배되고 조광조는 기묘사화에 조광조가 능주에
유배되면서 이들의 제자와 교유한 인물들을 통해 호남의 도학적 성격의 유학이 발달하게 되면서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1483∼1536),
박상(朴祥 1474-1530), 송순(宋純 1493-1582), 임억령(林億齡 1496-1568), 김인후(金麟厚 1510-1560),
유희춘(柳希春 1513-1577), 기대승(奇大升 1527-1572), 고경명(高敬命 1533-1592), 강항(姜沆 1567-1618) 등
16세기 호남의 사림을 대표할 만한 인물들이 출현과 무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광조의 난죽시에는
그윽한 향기를 뉘
함께 감상할까? /높은 절개를 모두 다 시기하네. 이러므로 숨어사는 군자들이/ 외로운 회포를 이에 기대어 펴 본다네. 幽芳誰共賞
高節衆同猜 所以隱君子 孤懷倚此開
역모자의 시신을 거두는 것 조차 역모죄에 준하는 형벌을 내리는 살벌함을
마다하고 양팽손은 그를 시체를 수습하고 몰래 고향으로 보내는 길에 눌재(訥齋) 박상(朴祥)은 만사를 이렇게 읊는다.
남대(南臺 어사대)에서 벼슬 옷
입던 일일랑 돌이키지 말자. 소 수레(牛車)에 실려 외롭게 고향에 돌아올 갈 줄 알았으랴 .
언젠가 지하에서 다시 만날 때엔, 인간 만사의 그릇됨을 말하지
말자..... 不謂南臺舊紫衣 牛車草草故鄕歸 他年地下相逢處
莫話人間萬事非
또 분수원(分手院) 앞에서 일찍이 손을 잡았더니 괴상하도다, 그대 황각(黃閣)(정승이 사무 보는 곳)에서
주애(朱崖)로 떨어지다니 주애와 황각(黃閣)을 분별하지 말라 / 구천에 이르러 보면 차등이
없다오 分手院前會把手 怪君黃閣落朱崖 朱崖黃閣莫分別 經到九原無等差
중국 용문(龍門)은 황하(黃河)의 상류(上流)에 있는 산 이름이고, 지주는 이 산
사이로 흐르는 여울목에 있는 기둥 모양의 바위인데, 격류(激流) 속에서도 우뚝 솟아 있다는 것을 두고 용문(龍門)의 지주(砥柱)라 한다.
아무리 곤란한 때를 당하여도 절의를 굳게 지키고 굴하지 않은 선비에 비유한 의미로 조광조 같은 사람을 두고 말하고 있다.
이곳을
뒤로하는 길에 망양(亡羊)이란 단어가 뗘오른다. 이는 다기망양(多岐亡羊)의 준말로 대도(大道)는 갈림길이 많아 양을 잃고 학자는 방도(方道)가
많아 생명을 잃는다는 것(列子 說符)
조선 후기 문신 겸 학자. 검상 · 대사헌 등을 거쳐 개성부유수가
되고 부제학에 이어 참판에 이르렀던 나주출신 창계(滄溪) 임영(林泳1649 ~ 1696)은 (1519년(중종14)9 월에 능주(綾州)에
유배되고 12월에 사사(賜死)되어 38세의 젊은 나이에 뜻을 다 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그의 적거지(謫居地)를 돌아보고 이렇게 기리고
있다.
정성 지극하면 절로 감동시킬 수 있는데 / 임금께 어찌 끝까지 지우 입지 못했는지 천추에 밝은 저 하늘의 태양이 /
지금도 남아 붉은 충정 비추어 주네 誠至自能動 得君何不終
千秋一天日 留與照丹衷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 숙종 7∼1763 영조 39)은 정암(靜菴)은
능성(綾城)에 유배되어 바로 담의 북쪽 모퉁이를 헐어 버리고 항상 북쪽을 향해 앉아서 임금을 사모하는 시를 읊은 것을 두고 이렇게
회고했다.
샘물은 백 갈래로 흘러도 바다로 들어가니 / 만번을 돌아도 조종의 형세 막지
못함을 모기의 힘으론 산을 지다 부러지고 /새의 정성으론 바다
메우기 어렵다네 泉流百道走入海 萬折莫遏朝宗勢 蚊力摧負山 鳥誠難塡海
원성은 하늘에 통하고 눈물은 대지를 적셔 /
기울어진 북두성이 밤새도록 빛나네 이때 이 마음을 누가 다시 알리오 / 천리를 불어온 바람이
나를 위해 슬피 우네 有聲徹昊淚濕壤 闌干北斗終夜明 此時此心誰復知 天風千里爲我來悲鳴
참고문헌=중종실록(中宗實錄).
화순누정집/화순문화원. 고전번역서/古典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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