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20장 8-48절
8.『모든 백성이 일제히 일어나 이르되 우리가 한 사람도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지 말며 한 사람도 자기 집으로 들어가지 말고』
모든 백성이 일제히 일어나며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장 일치로 베냐민 지파를 징벌할 것을 가결했다. 한편 여기서 '일어나다'에 해당하는 '쿰'은 성전의 출전이나 어떤 직무나 의무 수행에 있어서의 예비적 동작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결연한 행위는 한 지파의 범죄를 징벌하기 위한 심판적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심판적 직무 수행을 마칠 때까지 결단코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겠다고 결의했다.
9.『우리가 이제 기브아 사람에게 이렇게 행하리니 곧 제비를 뽑아서 그들을 치되』
기브아를 치는 대는 전체 보병 40만이 다 동원 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이 가운데 1/10 을 제비 뽑아 기브아를 치게 하고 나머지는 그들을 위해 군량미를 준비케 하거나 사상자가 생길 때 병력을 보충케 하였다.
10.『우리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백 명에 열 명, 천 명에 백 명, 만 명에 천 명을 뽑아 그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준비하고 그들에게 베냐민의 기브아에 가서 그 무리가 이스라엘 중에서 망령된 일을 행한 대로 징계하게 하리라 하니라』
앞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미정복지를 정복하러 올라갈 때에는 자기에게 분배된 기업을 차지하기 위하여 각 지파별 올라갔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기브아 비류들을 응징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전 지파가 공동으로 각 지파 중에서 사분의 일씩 선발하여 출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 당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브아 사람들의 문제를 대처함에 있어 혼연일치 하였음을 보여 준다. 이처럼 이스라엘 내에서 죄악을 제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하고자 한 열 한 지파의 궐기는 높이 평가되어 마땅하다. 그러나 그들은 형제 지파를 매몰차게 정죄하기에 앞서 자신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통절히 느껴야 했고, 그러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민족 현실을 두고서 회개해야 했다.
'망령된 일'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네발라'는 '무분별하다', '어리석다'란 뜻을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브아 비류들이 저지른 윤간 행위를 하나님의 법을 어긴 심각한 범죄 행위로 보고, 기브아 비류들을 징계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각종 성 범죄는 인간의 영혼과 기본 인격을 파괴하시는 죄악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깨뜨리는 중차대한 범죄 행위가 아닐 수 없다.
11.『이와 같이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하나 같이 합심하여 그 성읍을 치려고 모였더라』
이전의 사사기 시대 동안에는 볼 수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체감과 협동심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이래로 이와 같은 일체감을 보여준 적은 한번도 없었다. 오히려 지파간에 반목이나 비협동적인 모습이 자주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12.『이스라엘 지파들이 베냐민 온 지파에 사람들을 보내어 두루 다니며 이르기를 너희 중에서 생긴 이 악행이 어찌 됨이냐』
'온 지파'라고 한 것은 아마 베냐민 지파에 속한 온 가족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처럼 가족을 지파라고 기록한 것은 베냐민 지파 내에서도 여러 가족들이 개별로 가문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들이 베냐민의 온 가족들에게 이같이 공식적인 전갈을 보낸 것은 베냐민지파 중에서 한 가족이라도 회개하고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로 볼때 이스라엘의 열 한 지파는 처음부터 베냐민 모든 지파를 완전히 진멸할 작정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13.『그런즉 이제 기브아 사람들 곧 그 불량배들을 우리에게 넘겨 주어서 우리가 그들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거하여 버리게 하라 하나 베냐민 자손이 그들의 형제 이스라엘 자손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본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베냐민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기브아의 불량배(베냐민 지도자들)들을 징벌하여 이스라엘이 도덕적 순결을 유지할 수 있도록 그들을 인도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러한 요청은 신명기13장 12-16절에 기록된 율법에 근거한 것으로, 그 율법에는 가증한 일을 행한 성읍만을 징벌하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베냐민 지파는 자기 지파 내에 가증한 일을 행한 성읍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인정치 않았다. 아마도 이는 그들이 미스바에 모인 40만 대군을 보고서 분개하였거나, 아니면 지파적 자존심과 배타심에 깊이 젖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하여 버리게 하라” '제하다'에 해당하는 '바아르'는 '불로 소멸시키다','없애다'는 뜻이다. 이는 곧 불로 태워 없애듯 이스라엘 가운데서 죄악을 철저히 근절시켜 버리는 것을 가리킨다. 사실 기브아 불량배들의 범죄는 십계명 중 6,7,10 계명을 범한 것으로, 사형의 처벌을 받아야 마땅하였다. 만일 그 죄인들의 행위가 묵과되면 율법의 권위가 실추되어 백성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공동체가 내부의 죄악을 스스로 제거하지 않을 시에는 공동체 전체에 대해 하나님의 질책이 불가피하게 임하게 되는 것이다.“베냐민 자손이... 듣지 아니하고” 완악해진 인간의 마음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악들을 용납할 뿐만 아니라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고 부추기기까지 한다.
14.『도리어 성읍들로부터 기브아에 모이고 나가서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고자 하니라』
베냐민 지파의 성읍은 모두26개였다. 그리고 각 성읍들은 한 가족이 하나씩 차지하고 있었다. 기브아는 예루살렘 북쪽 약 6.4km 지점에 위치한 베냐민 지파의 성읍이다.
15-16.『그 때에 그 성읍들로부터 나온 베냐민 자손의 수는 칼을 빼는 자가 모두 이만 육천 명이요 그 외에 기브아 주민 중 택한 자가 칠백 명인데 이 모든 백성 중에서 택한 칠백 명은 다 왼손잡이라 물매로 돌을 던지면 조금도 틀림이 없는 자들이더라』
기므아 성읍에 모인 베냐민 지파의 군사들의 수효를 기록하고 있다. 기브아 외의 다른 성읍에서 모인 병력은 26,000명이고 기브아 성읍의 병력은 700명이다. 이 수효는 26,700명이다. 이 수효는 광야에서의 1차 계수 때 35,400명, 2차 계수 때 45,600명이었던 것과 비교해 볼 때 상당히 줄어든 수이다.
“택한 칠백명은 다 왼손잡이라” 여기서 따로 700명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기브아 성읍의 군대가 가장 막강함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한편 이들700명은 모두 왼손잡이로서 물매를 사용하는데 명수였다. 이들은 왼손 뿐만 아니라 오른 손도 잘 쓰는 양손잡이들이었으며 싸움에 있어서 매우 용맹했다. 사실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약 15배에 가까운 이스라엘 연맹군에 대항하여 과감히 전쟁을 일으킨 것은 타고난 그들의 용맹성에 기인한 것으로, 이미 야곱의 예언에도 나타나 있다(창49:27). 물매는 조그만 가죽이나 천 따위로 만들어 그 속에 돌이나 자갈을 끼운 후에 휘들러 던질 수 있도록 고안된 무기의 일종이다. 일개 목동에 불과하였던 다윗이 이 물매로써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쳐죽인 일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17.『베냐민 자손 외에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칼을 빼는 자의 수는 사십만 명이니 다 전사라』
베냐민 지파 이스라엘 사람 중 칼을 빼는 자의 수효가 40만명이라고 했는데 21:9에 따르면 여기에는 길르앗 야베스의 군대가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나와 있다. 광야에서 전체 이스라엘 백성들을 계수할 때 1차는 601,730명이었던 것과 비교해 볼 때 길르앗야베스 사람들 이외의 거의 모든 이스라엘 배경이 베냐민과의 전쟁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내전의 심각도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여실히 증거해 준다.
18.『이스라엘 자손이 일어나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가 먼저 갈지니라 하시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은 베냐민 지파와 전쟁을 하기 전에 누가 먼저 베냐민 지파와 싸울 것인지를 하나님께 묻기 위해 벧엘로 올라갔다. 이는 비록 형식적이나마 아직도 백성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던 여호와 신앙을 보여 준다.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의 압제하에 시달릴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을 찾을 수 있었던 것도 그나마 이처럼 여호와 신앙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벧엘의 문자적인 뜻은 하나님의 집이다.
벧엘은 실로와 기브아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고 벧엘에서 기브아까지는 약 15km 정도이다. 이스라엘 역사상 벧엘이 종교적 구심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 것도 이때부터일 것이다. 물론 과거에 아브라함이 이곳에서 처음 제단을 쌓았고, 야곱이 사닥다리를 오르락 내리락하는 천사를 보기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의의를 지닌 사건이었을 뿐이다.
“하나님께 여쭈어 이르되” 전쟁 전에 하나님께 묻는 행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관례적인 것이다. 즉 그들은 대적과 싸움에 있어서 항상 하나님께서 지시해 주시는 방법대로 수행하기 위해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물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베냐민 지파를 가나안 족속과 동일한 대적으로 취급하였을 뿐 한 형제로 여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그들은 한 형제의 범죄에 대해 진정한 회개를 기대하기 보다는 마치 이방인과 싸우는 것처럼 승리만을 기원하였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베냐민과의 첫번째 전쟁에서 크게 패하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유다가 먼저 갈지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질문에 대하여 이같이 답변하신 것은 분명 이스라엘 내에서 차지하고 있던 유다 지파의 지도자적 위치 때문이었을 것이다.
19-20.『이스라엘 자손이 아침에 일어나 기브아를 대하여 진을 치니라 이스라엘 사람이 나가 베냐민과 싸우려고 전열을 갖추고 기브아에서 그들과 싸우고자 하매』
“전열을 갖추고”에 해당되는 원어 '와야아르쿠'는 '병력을 배치하다'라는 뜻의 '아라크'에서 유래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가장자리를 향하여 선 전투 대형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와 같이 적을 포위하여 섬멸하는 전투 대형을 취할 때에는 반드시 병력의 수효나 전투력에 있어서 상대편보다 막강히 우세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연맹군은 베냐민 지파의 병력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나 분명한 작전도 없이 무턱대고 베냐민 군을 포위하여 공격하려 하였다. 그것은 아마 전체 지파를 통솔할 뚜렷한 지도자가 없었던 탓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이 교만에 가득차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21.『베냐민 자손이 기브아에서 나와서 당일에 이스라엘 사람 이만 이천 명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나』
부주의하고 오만했던 이스라엘 연맹군은 기브아 용사들이 매복해 있는 줄도 모르고 무작정 기브아 성읍을 포위하려다가 이처럼 베냐민 군대의 갑작스런 공격에 큰 참패를 당하고 병력 22,000명을 잃고 말았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연맹군이 패하게 된 원인에는 이스라엘의 연맹 세력은 하나님의 심판 도구로 사용되었기는 하지만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될 죄악을 자체 내에 지니고 있었다. 즉 그들은 동족 상잔의 엄청난 비극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통감하고 회개했어야 옳았음에도 불구하고 베냐민 지파에 대해 일방적으로 심판관으로서의 자세만을 취하는 교만과 우를 범했으며, 그로 인해 하나님의 경고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베냐민 군사들은 그 전쟁에 패하는 것이 곧 멸망일 수 밖에 없다고 하는 강한 위기 의식 속에서 결사적으로 전투에 임했을 것이다. 반면에 연맹군은 수효만 믿고 방심하였거나, 막상 싸움에 임하여서는 서로 타 지파의 눈치를 보며 꽁무니를 빼는 소극적 자세를 취했을 것이다.
22-23.『이스라엘 사람들이 스스로 용기를 내어 첫날 전열을 갖추었던 곳에서 다시 전열을 갖추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올라가 여호와 앞에서 저물도록 울며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다시 나아가서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올라가서 치라 하시니라』
“다시 전열을 갖추었다”는 기록은 이스라엘이 재차 전쟁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전투 형태만 다시 갖춘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서 이스라엘은 실제적인 싸움을 하기 전에 여호와 앞에서 울며 다시 베냐민과 싸워야 하는지를 물었던 것이다. “스스로 용기를 내어” 어떻게 해서든 첫날의 패배를 만회해 보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을 굳게 다져 먹은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저들은 아직까지 근본적인 패배의 원인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이후 전투에서도 패배할 수 밖에 없었다.
24-25.『그 이튿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베냐민 자손을 치러 나아가매 베냐민도 그 이튿날에 기브아에서 그들을 치러 나와서 다시 이스라엘 자손 만 팔천 명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니 다 칼을 빼는 자였더라』
두번째 전투에서도 이스라엘이 패배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볼 때 23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앞에서 날이 저물도록 흘린 눈물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회개의 눈물이 아니라 자신들의 패배로 인하여 여호와를 원망하는 눈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들은 한번의 패배를 통해서도 바른 자각을 얻지 못하고 동일한 실수와 범죄를 반복한 것이다.
26.『이에 온 이스라엘 자손 모든 백성이 올라가 벧엘에 이르러 울며 거기서 여호와 앞에 앉아서 그 날이 저물도록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고』
거듭 패배를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스라엘 자손들은 보다 근원적으로 패인을 생각하게 되었으며, 스스로를 돌아보아 교만하고 완악했던 모습들을 회개하기에 이르렀다. 이전까지는 병력의 수효만을 믿고 하나의 요식 행위로 하나님을 찾았지만, 이번에는 모든 해결책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 그들은 고난을 통하여 자신의 죄악된 실상들을 직시하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도우심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자세를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저물도록 금식하고” 첫번째 전투에서 패했을 때에 그들은 여호와 앞에 나아가기에 앞서 스스로 용기를 내어 첫날 전열을 갖추었다. 반면에 이번에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겠다는 자세를 취하였다. 즉 그들이 또 다시 힘으로 베냐민 지파와 전쟁하려고 했다면 힘을 쇠잔케 하는 금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번제는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 유지를 기원하며 드리는 제사이다. 그리고 화목제는 하나님과 예배자 사이의 화목과 친교를 도모하기 위해 드리는 제사이다. 한편 이 두 제사는 모두 예배자가 자원하여 드리는 자원제이다.
27.『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물으니라 그 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거기 있고』
하나님의 언약궤는 엘리 제사장 당시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길 때까지 실로에 있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법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베냐민과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실로에서 벧엘로 옮긴 것이다.
28.『아론의 손자인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그 앞에 모시고 섰더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쭈기를 우리가 다시 나아가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시는지라』
비느하스는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이 부디엘의 딸을 통하여 얻은 아들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시 모세와 함께 광야에서 이미 활동하기 시작했다. 때문에 그가 제사장으로 지낼 때는 사사 시대 초기임이 분명하다. 이로 볼 때 본 장에서 다루고 있는 사건의 발생 연대 역시 사사 시대 초기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세번째 전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승리를 보증하는 이 같은 약속을 주신 것은 26절에 언급된 이스라엘의 화목제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화평을 누리기 위한 목적으로 회개하고 서원함으로 드려진다. 그러므로 본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승리의 관계가 다시금 회복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29.『이스라엘이 기브아 주위에 군사를 매복하니라』
이스라엘 연맹군들은 두 번의 패배를 교훈삼아 이번에는 현명하게 기브아 사면에 군사를 매복시키는 등 사전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이는 저들이더 이상 베냐민 지파를 앝보는 것과 같은 교만한 마음을 품지 않았다는 한 증거이다. 이는 마치 과거 여호수아가 아이 성을 공략할 때 사전 준비를 갖춘 것과 흡사하다.
30.『이스라엘 자손이 셋째 날에 베냐민 자손을 치러 올라가서 전과 같이 기브아에 맞서 전열을 갖추매』
이스라엘 연맹군은 군사를 매복한 것을 베냐민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전날과 같이 전열을 갖추었다. 즉 그들은 베냐민 군을 기만하기 위하여 지난 번과 다름없는 전투 대형을 갖추었던 것이다.
31-32.『베냐민 자손이 나와서 백성을 맞더니 꾀임에 빠져 성읍을 떠났더라 그들이 큰 길 곧 한쪽은 벧엘로 올라가는 길이요 한쪽은 기브아의 들로 가는 길에서 백성을 쳐서 전과 같이 이스라엘 사람 삼십 명 가량을 죽이기 시작하며 베냐민 자손이 스스로 이르기를 이들이 처음과 같이 우리 앞에서 패한다 하나 이스라엘 자손은 이르기를 우리가 도망하여 그들을 성읍에서 큰 길로 꾀어내자 하고』
전투의 양상은 여호수아 8장 3-28절에 기록된 여호수아의 아이 성 전투의 양상과 매우 유사하다. 즉 베냐민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의해 유인되는 것인 줄도 모르고 기세 등등하게 기브아 성읍을 떠난 이스라엘 연맹군을 추격했던 것이다.
33.『이스라엘 사람이 모두 그들의 처소에서 일어나서 바알다말에서 전열을 갖추었고 이스라엘의 복병은 그 장소 곧 기브아 초장에서 쏟아져 나왔더라』
바알다말의 뜻은 종려나무의 주인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이곳은 유명한 종려 나무의 산지였던 것 같다. 예루살렘 북쪽 약 6.4km 지점. 기브아 부근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라마와 벧엘 사이에 있는 '드보라의 종려나무 숲'과 동일한 장소인 것으로도 추정된다.
“기브아 초장” 여기서 '초장'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아레'는 나무나 풀이 없는 황량한 벌판을 가리킨다. 이러한 곳에는 웅덩이가 많기 때문에 복병들이 숨기에 적합했다.
34.『온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 택한 사람 만 명이 기브아에 이르러 치매 싸움이 치열하나 베냐민 사람은 화가 자기에게 미친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기브아에 이르러” 이 말은 '기브아(베냐민)의 군대에 대항하여'라는 의미다. 베냐민 앞에서 거짓 패주하며 그들을 기브아 성읍으로부터 유인했던 이스라엘 군사들이 이제 급히 돌이켜 복병과 더불어 베냐민 군에게 협공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화가 자기에게 미친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바알 다말에서 싸우느라 정신이 없던 베냐민 사람들은 기브아에 매복해 있던 복병들이 자기들의 후미를 공격하는 줄을 알지 못한 것이다.
35.『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베냐민을 치시매 당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베냐민 사람 이만 오천백 명을 죽였으니 다 칼을 빼는 자였더라』
여기서 전쟁의 주체는 여호와이셨다. 베냐민 지파의 전체 군대 수효는 26,700명이었다. 그런데 본절에서 죽은 베냐민 사람이 25,100명이며, 47절에서 죽지않고 도망한 사람이 600명이었다. 그렇다면 그 수는 전체 25,700명으로 15절의 수치와 차이가 난다. 여기에서 차이가 나는 1000명을 첫번째 전투나 두번째 전투에서 이미 죽은 자들의 수효일 것이다.
36.『이에 베냐민 자손이 자기가 패한 것을 깨달았으니 이는 이스라엘 사람이 기브아에 매복한 군사를 믿고 잠깐 베냐민 사람 앞을 피하매』
여기서 깨닫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아'는 보다는 뜻으로,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거나 몸소 체험한 후 비로소 사태를 직시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37.『복병이 급히 나와 기브아로 돌격하고 나아가며 칼날로 온 성읍을 쳤음이더라』
매복한 곳으로부터 급하게 쏟아져 나온 복병들은 작전상 후퇴하는 아군들의 피해를 최소로 줄이기 위하여 신속하게 기브아 성읍을 공격한 것이다.
38.『처음에 이스라엘 사람과 복병 사이에 약속하기를 성읍에서 큰 연기가 치솟는 것으로 군호를 삼자 하고』
여기서 '군호를 삼자'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크게 하다, 많게 하다'라는 뜻의 동사 '라바'의 명령형(헤레브)으로서 연기가 올라올 때에 베냐민 자손을 치는 것을 '크게 하라'는 뜻이다. 이는 '칼을 가지고 올라가라'는 뜻이다.
39.『이스라엘 사람은 싸우다가 물러가고 베냐민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 삼십 명 가량을 쳐죽이기를 시작하며 이르기를 이들이 틀림없이 처음 싸움 같이 우리에게 패한다 하다가』
본절은 31, 32절과 동일한 상황을 다루고 있지만 앞뒤 문맥과 연관시켜 볼 때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즉 31, 32절은 사건의 발생 순서와 전체적인 상황의 진척을 따라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본절은 베냐민 자손이 어떻게 패망하게 되었는가 하는 일관된 관점 속에서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싸우다가 물러가고” 이스라엘 연맹군이 베냐민 자손을 유인하기 위하여 패배한 척하며 후퇴한 것을 가리킨다.
40.『연기 구름이 기둥 같이 성읍 가운데에서 치솟을 때에 베냐민 사람이 뒤를 돌아보매 온 성읍에 연기가 하늘에 닿았고』
여기서 '돌아보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힌네'는 슬픔과 탄식어린 눈으로 보는 것을 가리키는 감탄사이다. 이 단어는 36절의 '깨달았으니'에 해당되는 동사 '라아'와 마찬가지로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거나 체험한 후 비로소 사태를 직시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즉 베냐민 자손이 자기의 패한 것을 깨달은 시기는 기브아 성읍 전체에서 피어오르는 구름 기둥 같은 연기를 보았을 때이다.
41.『이스라엘 사람은 돌아서는지라 베냐민 사람들이 화가 자기들에게 미친 것을 보고 심히 놀라』
베냐민 사람들은 도망가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 돌이켜 자신들을 공격하자 목숨을 건지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하였다. 한편 여기서 말하는 '화'(라아)는 사나운 짐승이나 재앙을 가져오는 천사들, 기근, 질병 등의 재난을 통해 인간에게 고통이 찾아드는 악한 상황을 가리킨다. 그리고 '미치다'(나가)는 말은 손으로 만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다다른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는 '타격을 가하다', '압도하다'로도 번역될 수 있다. 아마 이때에서야 비로소 베냐민 자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줄로 깨달았을 것이다.
42.『이스라엘 사람 앞에서 몸을 돌려 광야 길로 향하였으나 군사가 급히 추격하며 각 성읍에서 나온 자를 그 가운데에서 진멸하니라』
여기서 말하는 광야 길이란 여호수아 16장 1절에 나오는 기브아에서 여리고로 향하는 길을 가리킨다. 당시 이스라엘의 주력 부대는 기브아 서편에 있었기 때문에 베냐민 지파는 동쪽 광야 길로 도망하는 것이 살아날 가망성이 컸다. 특히, 그리하여 요단 계곡에 이르기만 하면 숨을 수 있는 굴이 많았기 때문에 더욱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각 성읍에서 나온 자를” 여기서 '각 성읍'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분명히 복수이며, 거기에서 나온 사람들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숨겨 놓은 복병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한글 개역 성경의 '각 성읍에서 나온 자를'은 '각 성읍에서 나온 자가'로, 목적격 조사를 주격 조사로 수정하여야 할 것이다. “그 가운데서 진멸하니라” 이것은 추격하는 이스라엘 군사와 숨어있던 복병들이 포위한 가운데서 베냐민 사람을 진멸하였음을 가리킨다.
43-44.『그들이 베냐민 사람을 에워싸고 기브아 앞 동쪽까지 추격하며 그 쉬는 곳에서 짓밟으매 베냐민 중에서 엎드러진 자가 만 팔천 명이니 다 용사더라』
기브아 앞 동편은 기브아 북동쪽 약 6km 지점에 있는 게바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본래 베냐민 지파의 성읍으로서, 훗날 레위 지파에게 기업으로 양도된 곳이다. 베냐민 사람들은 간신히 추적자들을 따돌리고 기브아 앞 동편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휴식을 취하던 그곳이 바로 그들의 무덤이 되고 말았으니, 이때에 죽은 베냐민 용사는 모두 18,000명이었다.
45.『그들이 몸을 돌려 광야로 도망하였으나 림몬 바위에 이르는 큰 길에서 이스라엘이 또 오천 명을 이삭 줍듯 하고 또 급히 그 뒤를 따라 기돔에 이르러 또 이천 명을 죽였으니』
림몬은 기브아에서 북동쪽으로 약 11km 정도 떨어진, 벧엘과 요단 계곡 사이에 위치해 있는 바위가 많은 산지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곳을 오늘날의 람문과 동일시 하기도 한다. 이곳은 18,000명의 베냐민 용사들이 죽은 곳으로 추정되는 게바에서도 약 2.4k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아니한 곳이다. 한편 림몬 바위에는 6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큰 동굴이 있었는데, 이곳으로 가던 도중에 7천명이 죽고 이 곳에 피한 사람은 겨우 6백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 동굴은 해발 757m의 언덕에 위치한 것으로, 오늘날 고고학적 탐사 결과 그곳에는 식수를 공급할 샘도 있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46.『이 날에 베냐민 사람으로서 칼을 빼는 자가 엎드러진 것이 모두 이만 오천 명이니 다 용사였더라』
35절에는 25,100명으로 본절보다 더욱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약 100명 정도 기록상의 차이가 나는 것은 이미 앞에서 정확한 수를 밝혔기 때문에 다시 정확히 언급한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36-46절의 기록은 정확한 자료 소개 보다는 베냐민 자손의 멸망에 초점을 맞춘 기록이다.
47.『베냐민 사람 육백 명이 돌이켜 광야로 도망하여 림몬 바위에 이르러 거기에서 넉 달 동안을 지냈더라』
무사히 림몬 바위로 피한 600명은 21장 13절 이하의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그곳에서 4개월간을 지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육백명을 남겨 두신 것은 진노 중에라도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 대한 하나님께서 언약을 잊지 않으시는 긍휼에 기인한 것이었다.
48.『이스라엘 사람이 베냐민 자손에게로 돌아와서 온 성읍과 가축과 만나는 자를 다 칼날로 치고 닥치는 성읍은 모두 다 불살랐더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림몬 바위 동굴에 숨은 600명을 색출해 내는 대신에 베냐민 성읍으로 돌아왔다. 그리고선 그곳에 있는 백성들 뿐만 아니라 가축들도 모두 죽이고, 성읍들을 모두 불살라 버리고 말았다. 이스라엘인들이 이같이 베냐민 거민들을 잔인하게 죽인 것은 14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베냐민 각 성읍이 기브아 사람들을 옹호하며 동일한 범죄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냐민 지파는 스스로 뿌린 씨앗의 열매를 그에 곱하여 몇 배로 거둔 셈이 되었다.
(종합적으로)
기브아 사건은 한 사람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레위인의 첩, 살해 사건은 온 이스라엘을 들썩이게 했고, 각 지파에서 무려 40만 명의 보병을 포함 많은 이들이 모였다. 분노한 사람들은 전후 사정을 듣기를 원했고, 사건의 당사자 레위인은 입을 연다.
레위인은 기브아 사람들이 목숨을 위협했고, 결국 첩을 능욕하여 살해했다고 증언한다. 그의 말은 표면적 사실에 기반하고 있지만, 자기중심적으로 편집되었다.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첩을 불량배들에게 직접 넘겨주었고, 집단 강간 중에 어떤 조치도 하지 않고, 아침 일찍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달아나던 자신의 이야기는 생략되었다. 이 사건이 자신에게서 비롯하지만, 자기반성과 고백은 찾아볼 수 없고, 오직 타인의 문제로 몰아간다. 영적으로 보면, 각을 떴다는 말에서 레위인은 첩을 열두 조각을 낸 뒤에 인신제사를 하고 그것을 열두 지파에게 보낸 것이다. 기브아 사람들이 음행하고 망령된 일을 행했다고 고발하고 있으나, 정작 레위인 자신이 음행하고 망령된 일을 행했다는 사실은 부정하고 있다.
한 레위인의 그릇된 자기객관화는 온 민족을 전쟁의 구렁텅이에 몰아넣는 기폭제가 되었다. 레위인의 상황설명에 격양된 감정을 주체할 수 없던 이스라엘은 사실여부를 따지지 않았다. 거대 무리가 된 이들은 전쟁의 명분을 만들었다. 이스라엘 각처에서 모인 40만 명의 보병은 망령된 일을 척결한다는 대의명분으로 온전히 하나가 되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심판을 맡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모여든 무리는 심판자를 자처한다.
선동당한 이스라엘 군대 40만 명은 베냐민과 기브온 연합군, 2만 6천 700명과 전투를 준비한다. 전쟁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 뜻을 구하지 않던 이들은 병력으로 압도하는 상황에서, 어떤 지파가 선봉에 서야 할지 하나님께 묻는다.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명분을 찾는 것이다. 유다가 올라가라고 말씀하셨지만, 승리를 약속하지 않으셨다. 압도하는 군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연합군은 전투에서 2만 2천 명을 잃는다. 병력의 5.5%를 잃고, 그들의 행동을 통해 숨겨둔 중심을 볼 수 있다. 전장에 나온 베냐민과 기브아 역시 자신의 소견이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온 이스라엘 국토는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는 전쟁터로 변했다.
40만 대군은 첫 번째 전투에서 패배한 후, 다시금 전열을 가다듬고 전투에 임하지만, 곧 1만 8천 명의 군사를 잃고, 이스라엘 연합군은 혼란 상태에 빠진다. 압도하는 병력을 믿었지만 패색이 짙자, 이들은 전장에서 보기 드문 행동을 한다. 이스라엘 연합군은 하나님의 집, 벧엘에서 금식하며 제사했고,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 이미 두 번의 전투에서 연합군은 『누가 올라가서 싸우면 되겠습니까?』라고 하나님께 질문을 드렸다. 그런데 연이은 패배 후, 질문이 바뀌었다.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워야 합니까? 아니면 싸움을 그쳐야 합니까?』이들의 질문이, 아니 이들의 기도가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세번째의 기도를 드린 후에 비로소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된다. 세번째의 전쟁은 여호와가 앞에서 싸우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치열한 전쟁 결과, 베냐민과 기브아 주민은 참담하게 패한다. 전세가 기울었고 전의가 완전히 상실되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연합군이 도를 지나친 행동을 했다.
신명기 13장 13-16절에서 『너희 가운데서 어떤 불량배가 일어나서 그 성읍 주민을 유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한다 하거든 너는 자세히 묻고 살펴 보아서 이런 가증한 일이 너희 가운데에 있다는 것이 확실한 사실로 드러나면 너는 마땅히 그 성읍 주민을 칼날로 죽이고 그 성읍과 그 가운데에 거주하는 모든 것과 그 가축을 칼날로 진멸하고 또 그 속에서 빼앗아 차지한 물건을 다 거리에 모아 놓고 그 성읍과 그 탈취물 전부를 불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지니 그 성읍은 영구히 폐허가 되어 다시는 건축되지 아니할 것이라』여기서 불량배들이 레위인을 관계하려고 하는 것은 우상숭배와 관련하는 것이다. 우상숭배하는 자들을 진멸하는 것이다.
2만 6천 명의 베냐민 군사 중 600명만 목숨을 부지하여 광야로 달아났다. 전의가 상실될 뿐 아니라, 지파의 생존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이스라엘 연합군은 베냐민의 성읍을 초토화하고, 동물과 사람들마저 학살했다. 무사히 림몬 바위로 피한 600명은 그곳에서 4개월간을 지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육백명을 남겨 두신 것은 진노 중에라도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 대한 하나님께서 언약을 잊지 않으시는 긍휼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림몬 바위 동굴에 숨은 600명을 색출해 내는 대신에 베냐민 성읍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백성들 뿐만 아니라 가축들도 모두 죽이고, 성읍들을 모두 불살라 버리고 말았다. 이스라엘인들이 이같이 베냐민 거민들을 잔인하게 죽인 것은 베냐민 각 성읍이 기브아 사람들을 옹호하며 동일한 범죄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냐민 지파는 스스로 뿌린 씨앗의 열매를 그에 곱하여 몇 배로 거둔 셈이 되었다.
사사기는 기브아에서 시작하여 베냐민 지파로 종결된다. 그것은 다윗과 연결되어 있다. 다윗은 곧 그리스도를 지향한다. 기브아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의 고향이다. 사울은 하나님이 아니라 백성들이 뽑은 왕이었다. 라마에서 활동한 사무엘이 등장하고 사무엘은 다윗 왕을 세운다. 다윗 왕은 하나님이 세운 왕이었다. 결국 베냐민 지파의 사울은 죽고, 유다 지파의 다윗은 왕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한 레위인으로 시작한 사건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열한 지파가 될뻔한 사건으로 발전했는데, 이것의 중심에는 레위인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지도자들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만다.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자기들이 원하는 성전을 만든 것이다. 오늘날 교회도 심령 속의 교회는 강도의 소굴이 되고, 인간이 만든 건물인 교회를 신성시하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신약에서도 열두 제자가 열한 제자로 되는 사건이 생겼다. 바로 가롯 유다의 죽음이다.
다윗이 유다지파인데, 가롯유다는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자였다. 결국 열두 명으로 만들기 위해 인간들끼리 맛디아라는 사람을 그 속에 넣지만 하나님이 임명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맛디아는 성경에서 사라지고 신약의 사울(바울)이 등장한다. 사울은 베냐민 지파였다. 사울은 기독교인을 학살했지만, 회심 후에는 예수의 제자가 되어 기독교 전파에 가장 핵심에 서게 된다.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는 앞서기니 뒷서거니 하는 모습이다. 가장 찬란한 지파가 가장 부패한 자가 되고, 가장 부패한 지파가 가장 앞서는 지파가 되는 모양이다. 오늘날도 가장 신앙이 깊다고 생각하는 자가 가장 심령 속에 부패한 모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회개하여 부패한 마음을 살리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부패한 마음을 되돌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