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승
충주 출신의 첫 순교자
1771-1801. 세례명 바오로, 공주에서 참수
이국승(李國昇,바오로)은 충청도 음성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충주로 이주해 살았다. ‘성겸' 이라고도 불렸으며, 호는 ’미암’(靡庵)이다. 장성한 뒤 천주 신앙에 대해 듣게 된 그는 이 새로운 신앙을 철저히 배우기 위하여 경기도 양근 땅의 유명한 신자 권일신을 찾아갔고, 은총으로 마음이 움직여 즉시 이를 받아들였다.
이국승은 1801년에 체포되어 문초를 받는 과정에서 "1790년 최인길(崔仁吉, 마티아)에게 처음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고 입교하였다’고 거짓 진술 하였다. 그가 이처럼 거짓으로 진술한 이유는. 그때까지 살아 있는 신자들의 이름 대신 1795년에 이미 순교한 최인길의 이름을 댐으로써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쳐서는 안된다’ 는 교리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고자 한 때문 이었다.
동정 생활을 결심하다
복음을 받아들인 이국승이 집으로 돌아오자, 그의 스승은 즉시 그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진리를 설명하면서 스승에게 권유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1795년 을묘박해의 여파로 체포 되었다가 배교 하고 풀려 난 것으로 보아, 그때 그는 순교에까지 이를 만큼 신앙이 굳지는 않았던 듯하다. 집으로 돌아온 이국승은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자신의 죄를 보속하기 위해 전심 전력을 다하였다. 또 부모가 자신을 혼인시키려고 하자, 가족 때문에 본분을 다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오히려 부모를 설득하고 동정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부모의 끊임없는 재촉이 계속되자 이를 피하기 위하여 서울로 이주한 뒤 훈장 노릇을 하며 생활하였다. 1797년 이후 이국승은 황사영의 집에 유숙하 면서 총회장 최창현, 명도회 회장 정약종, 홍재영 등 지도층 신자들과 교류하였으며. 교회 일을돕는 가운데 주문모 신부로부터 ‘바오로'(혹은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가 가르친 신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입교하였고,그의 명성은 널리 퍼졌다. 그래서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포졸들은 그의 이름을 쉽게 알아내 체포할 수 있었다.
이국승이 옥에 들어갔을 때, 마침 황해도 출신의 고광성(高光晟)이 배교를 하고 막 옥문을 나서 려 하고 있었다. 이에 그는 고광성에게 관장 앞에 나가 “배교한 것은 제가 아니고. 마귀가 저를 속여 저의 입을 빌려 말한 것입니다”라고 말하도록 하였고. 이 말에 힘을 얻은 고광성은 마침내 순교에 이를 수 있었다. 그 죄나 그 역시 포도청과 형조에서 형벌과 문초를 받는 동안 여러 차례 고광성과 같은 일을 겪어야만 하였다.
관장이 고문을 중지시키고 석방하려고 할 때마다 이국승은 갑자기 뉘우치는 마음이 생겨 , “풀려 나면 전과 마찬가지로 다시 종교를 신봉 하겠다.”고 외쳤다. 이처럼 그가 배교와 다짐을 여러 차례 번복한 것은 그의 기질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는 경솔하여 성질이 급하고 잘 변하는 단점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열성이 가득한 장점도 갖추고 있었다.
결국 이국승은 1801년 5월 22일(양 7월 2일) 형조에서 사형 판결을 받게 되었다. 동시에 그에게는 “고향의 수부가 있는 공주 감영으로 보내 그곳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갖게 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이에 따라 이국숭은 공주로 이송되어 2〜3일 후인 5월 말에 서른 살의 나이로 참수되었다.
▲ 이국승은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당신들은 나를 동정하는 것 같은데, 참으로 불쌍한 것은 당신들이오.”
순교 후 조카들이 그의 시신을 거두어 공주에 안장하였다고 하나, 아쉽게도 지금은 그의 묘를 찾을 길이 없다. 다만, 그가 형장으로 가면서 남긴 말이 오랫동안 신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온다. “당신들은 나를 동정하는 것 같은데, 참으로 불쌍한 것은 당신들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