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인과 요인(緣起支)들의 상호 작용
현 존재의 조건이 되는 요인(緣起支)들은 연속적인 형태를 보인다.; 사실 언어 자체는 우리로 하여금 사물들이 잇따라 일어나는 것으로 표현하도록 강요한다. 비록 몇몇 학자들은 이들 요인들을 선형적 인과의 고리로 해석했지만, 그들의 관계가 상호의존의 관계라는 경전상의 증거는 풍부하다. 이 상호의존은 실재를 상관적으로 보는 관점과, 제일 원인이 없다는 사실 속에 함축되어 있다.; 여기 인연(nida?a)들 또는 의(依, upadhi)들의 상호 작용 속에서 그들의 상호 관계는 더욱 분명해진다.
《이종수관경(二種隨觀經, Dvayata?upassana?sutta)》이라고 하는 연기설을 이야기하는 초기 경전은 각각의 의(依, upadhi)를 다른 의(upadhi)들의 원인으로 표현하고 있다.
어떤 괴로움이든 나타나는 괴로움은 모두 무명(avijja? 無明)의 결과로서 나타난다. …… 무명이 완전히 소멸하면 괴로움의 어떤 근원도 없다. ……
어떤 괴로움이든 나타나는 괴로움은 모두 행(san.kha?a?, 行)의 결과로서 나타난다. …… 행이 완전히 소멸하면 괴로움의 어떤 근원도 없다. ……
어떤 괴로움이든 나타나는 괴로움은 모두 식(vin???a? 識)의 결과로서 나타난다 (등등).32)
이 구절들은 나머지 연기지(緣起支)에도 모두 반복된다. 여기에서 12연기는 선형적 고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명백해진다.: 모든 괴로움을 일으키고있는 각각의 의(依, upadhi)는 다른 의(upadhi)들을 일으킨다. 다른 것들을 야기하면서 다른 것에 의해 야기되는 그들의 인과관계는 상호적이다. 카드로 만든 집과 같이, 우리들 현 존재의 조건이 되는 요인들의 무더기는 어느 지점에서든 분열되고 무너질 수 있다.
다른 것에 의지하여 서로를 떠받치고 있는 갈대 단의 비유가 경전들 속에서 사용된다.
그 비유는 식(vin???a? 識)와 명색(na?aru?a, 名色)의 관계에 대한 비유이다. 인과의 계열(12연기)을 순서대로 열거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은 이들 두 요인인데, 명색(na?aru?a, 名色)은 식(vin???a? 識)을 조건으로 하여 발생한다고 말한 후에, 거꾸로 선회하여 이번에는 식이 명색을 조건으로 하여 발생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인과의 상호관계는 명백해지며, 그래서 몇몇 학자들은 그것을 고민했고, 케이트(Keith)와 토마스(Thomas) 같은 사람들은 그것을 연기설의 난점(難點)이라고 보았다. 꼬티따(Kot.t.hita)는, 그 문제를 가지고 붓다의 제자 가운데 가장 박식한 사리뿌뜨라(S?ariputra)와 토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십시오, 우리는 존자 사리뿌뜨라의 말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즉 …… 명색(名色)은 식(識)을 조건으로 하며, 식은 명색을 조건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사리뿌뜨라여, 당신이 한 말의 의미는 어떤 것입니까?
그렇다면, 법우여, 내가 하나의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왜냐하면 비유를 통하여 지혜 있는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의 의미를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법우여, 이것은 마치 두 개의 갈대 단이 한 갈대 단이 다른 갈대 단을 지탱하면서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이, 법우여, 명색은 식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고, 식은 명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며, 육입(六入)은 명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고, 등등. ……
법우여, 만약 내가 저 갈대 단 가운데 하나를 끌어당기면, 다른 하나는 쓰러질 것이고; 내가 다른 하나를 끌어당기면, 전에 당겼던 갈대 단이 쓰러질 것입니다.33)
비슷한 이미지, 즉 세 개의 막대기가 의지하여 서 있는 삼각대의 비유가 khan.d.as, 즉 자아 의식을 구성하고 있는 의식 덩어리34)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사용된다.
인과의 계열 속에서는 명색과 식의 상호관계가 가장 강조되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의식을 물질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보다 존재론적으로나 가치론적으로 우위에 두는 바라문교의 견해와 의식에 대한 불교의 견해를 대조하기 위해서인 듯 하다. 아무튼 사리뿌뜨라가 갈대의 비유에서 (식과 명색 이외에) ‘수(受)와 그 밖의 것들’을 포함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식과 명색 이외의) 다른 연기지(緣起支)들 사이의 인과 관계도 역시 상호적인 것으로 보인다.
식(識)과 그 앞에 있는, 즉 식의 조건이 되는 연(緣, nida?a), 다시 말해서 의지에 의한 형성작용인 행(行, san.kha?a)과의 관계를 살펴보자. 이들 형성작용들은 이 계열에서 식을 형성하는 것으로 표현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식이 그들의 조건이 된다. 이 관념은 ‘합성된’ 또는 ‘짜 맞추어진’의 堧?가진 유위(有爲, san.khata)에서 유래하는 그 개념의 의미 속에 나타나있다. 의지를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의 의식 활동과 의도이며, 한편 의지는 우리의 의식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법우들이여, 우리가 의도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 그리고 우리를 전념하게 하는 것: 이것이 의식을 지속하게 하는 대상이 된다.
동일한 인과적 상호관계는 행(san.kha?a)과 연기계열(12연기)에서 그 앞에 위치하는 요인인 무명(avijja?과의 관계 속에서도 볼 수 있다. 우리들의 무지가 우리들의 의지를 형성하는가 하면, 뷔르누프(Burnouf), 쿠마라스와미(Coomaraswamy), 그리고 그 밖의 여러분들이 설명했듯이, 의지는 앞에 존재한 무명의 상태에서 단일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의지가 우리의 무지를 기르고 유지시킨다. 아비달마의 《논사(論事, Katha?atthu)》에는 이 점이 강조되어 있다.
“무명은 행의 조건이 되지만, 우리는 행이 무명의 조건이 된다고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대중부(Maha?an.ghika)의 견해에 반대하면서, 상좌부(Theravadin)는 무명(avijja?은 행(san.kha?a)과 함께 존재했으며, 식(vin???a?과 명색(na?aru?a)이 상호적으로 원인이 되는 것과 똑같이, 무명과 행, 또는 취(取)와 애(愛)도 그럴 수 있다고 반박했다. 그 책(《論事》)에서는 “따라서 조건이 되는 관계는 상호적이라고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35)
팔리어 an??man??는, 문자 그대로의 뜻은 ‘서로서로(one another)’인데, 번역할 때에는 ‘서로의(reciprocal)’와 ‘상호간의(mutual)’로 번역한다. 한편 이 말은 아비달마 학자들에 의하여 특수한 형태의 인과관계를 나타내는 전문용어로 쓰이게 되는데, 붓다고사는 연기설의 취지를 총괄하여 의미 규정하는데 그 말을 사용했다.36) 그는 인과율의 형식으로서 그 인과율에 따라 ‘현상들이 서로 의존하는 가운데(an??man?? pat.icca) 함께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연기(pat.icca-samuppa?a)를 정의한다.
초기 경전 속에서 식(vin???a?과 명색(na?aru?a), 그리고 식(vin???a?과 행(san.kha?a)과 무명(avijja?의 상호작용의 특성을 나타내는 이 상호관계는 애(tan.ha?의 발생에도 작용한다. 12연기에서 여덟 번째이며, 수(受)를 조건으로 하여 발생하는 애(tan.ha?는 집성제(集聖諦)와 멸성제(滅聖諦)가 단언하듯이 우리들의 괴로움의 핵심 요인이다. 이것이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지(無明)와 갈망(愛) 가운데 어떤 것이 인류를 타락한 상태로 만든 보다 중요한 원인인가에 대해 의아해 하게 했다.
그것은 플라톤의 견해처럼 무지일까, 아니면 사도 바울의 견해처럼 갈망의 자아 중심성을 (타락의) 근원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옳은 것일까? 니까아야(Nika?a, 남방불교 성전)의 관점에서 보면 둘 다 정답이다. 무명(Avijja?은 가장 자주 맨 앞에 위치함으로써 연기설에서 강조된다.; 한편 애(tan.ha?는 사성제 속에서 강조되며, 때로는 고(dukkhasamudaya, 苦)의 집(集)의 첫번째 요인으로 강조된다.37) 붓다고사는 양자가 그 교설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38) 어떤 것도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은 생사유전(sam.sa?a)을 기술한 위의 인용 구절이 시사한다.: 즉 중생들은 ‘무명에 뒤덮이고, 갈망에 묶여’ 윤전(輪轉)하고 있다.39) 어떤 요인도 다른 요인으로 환원될 수 없는 까닭은 그들이 상호의존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무지가 우리의 갈망을 부채질하듯이, 갈망은 우리를 무지 속에 빠뜨리는 것이다.
비슷한 형태로 애(tan.ha?와 자아(atta?라는 관념은 상호 인과관계의 한 과정을 반영하고 있다. 《대애명경(大愛名經, Maha?an.ha?an.khaya sutta)》에 물질적 음식(食), 감각에 의한 지각(更樂, 觸食), 의지(意念, 意思食), 그리고 생각(識, 識食)으로 분류된, 개별적 자아의식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는 “갈망이 출처이며, 갈망이 원천이며, 갈망이 낳은 것이며, 갈망이 근원이다”.40) 세계의 발생을 신화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세기경(世起經, Aggan??sutta)》에서는 갈망이 어떻게 자아의 환상을 갖게 하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땅에서 나온 음식(地味)을 게걸스럽게 먹으면서, 중생들은 점점 그들의 개성에 대한 의식과 자만심을 키워간다.41) 지속하는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네 가지 형태의 집착(四取, upa?a?a) 가운데 하나(我語取)인데, 그것은 12연기 속에서 갈망(愛)를 조건으로 하여 발생한다.42) 그러나 갈망(愛)이 그것(我語取)을 기르듯이, 한편으로는 자아에 대한 환상이 갈망을 기른다.
라훌라여, 어떤 비구가 완전한 지혜로 (인간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五蘊)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며,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atta?가 아니다’라고 깨달으면, 그러면 그는 갈망으로부터 그 자신을 끊어내고, 결박을 풀고, (자아에 대한) 헛된 자만심을 극복함으로써 괴로움을 멸진하게 된다.43)
이와 같이 애(tan.ha?와 자아(atta?는 상호의존적으로 나타나며, 그들의 인과관계는 상호적이다. 갈대 단처럼 하나를 제거하면 다른 것은 무너진다.
전에 인용한 ‘갈애의 소멸에 대한 위대한 설법’에서 신체를 유지시키는 음식, 의지, 그리고 정신적 구조물들과 함께 감각적인 지각도 자아의식을 구성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 가르침은 음식(a?a?a)의 은유에 의해 선명해 진다. “이들 네 가지 음식이 존재하게 된 중생들을 유지시킨다.”44) 음식이라는 이미지는 우리가 다루고 있는 실재가 우리가 가공 저장하고 있는 어떤 것이라는 것을 시사한다.―우리는 우리의 시스템(신체)45)을 통해 음식을 섭취하고 배설한다. 우리는 관찰하는 우리의 의식으로부터 분명하게 그리고 순수하게 분리시킬 수 있는 ‘외부에 있는’ 어떤 것처럼 그것(음식)을 마주하고 서 있을 수가 없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속에 있고, 우리를 이루고 있으며, 우리의 (대상을 지각하는) 바로 그 지각을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연기 계열(nida?a series)은 선형적인 인과의 연속을 나타내기보다는 상호작용을 하면서 상호간에 영향을 주는 조건들의 관계그물망(network)을 나타내고 있다. 독일 태생의 승려이며 라마인 아나가리카 고빈다(Anagarika Govinda)는 연기의 ‘역동적 특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모든 고리는 다른 고리와 연결될 수 있으며, …… 그리고, 실제로,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연속할 것인지를 선택함에 따라 어느 고리와도 연결될 수 있다. …… 이런 식으로 우리는 순전히 시간적인 인과관계나 순수하게 논리적인 인과관계가 아닌, 살아 있는, 유기적인 관계, 즉 동시공존적인 상호관계, 다시 말해서 모든 연결 고리들이 나란히 있으면서 상속하는 관계를 갖는데, 그 관계 속에서 각각의 고리는, 말하자면, 모든 다른 고리들의 단면을 모아 놓은 모습을 나타내며, 그 자신 속에는 그의 모든 과거는 물론 미래의 모든 가능성까지 지니고 있다. 그리고 확실히 이 점 때문에 모든 (고리의) 연쇄는 모든 순간에 그리고 그것(연쇄)의 모든 단계에서 제거할 수 있다.46)
5. 아비달마의 해석들
불교의 인과율에 대한 나의 연구는 팔리 성전의 경장(經藏, suttas pit.aka)과 율장(律藏, vinaya pit.aka)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삼장(三藏) 가운데 이 둘은 현존하는 불교 교리의 기록 가운데 가장 초기에 쓰여진 기록이다.
그것들은 불교학자 미즈노(Mizno)가 ‘원시 불교(primitive Buddhism)’로, 그리고 에드워드 콘즈(Edward Conze)가 ‘고대 불교(archaic Buddhism)’로 명명한 것에 해당한다.
삼장 가운데 불교의 철학적 측면을 학문적으로 정교하게 다듬은 논장(論藏, Abhidharma pit.aka)은 논장의 술어와 내용이 명시하듯이 보다 후기에 발전한 불교사상을 보여준다.47)
아비달마(부파불교)에서 상좌부(Theravadin)와 유부(有部, Sarvasti-vadin) 두 학파는, 인과관계의 성질을 분석적으로 이론화하면서, 고도의 궤변과 복잡한 이론을 만들게 되었다. 무성하고 복잡한 언어와 논리를 지닌 아비달마의 발전은 전체적으로 불교의 인과율에 대한 후대의 많은 학문적 견해들에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그것이 발전하는 가운데 약간의 변화가, 즉 연기(pat.icca-samuppa?a)를 설명하는 방법상에 미묘한 그러나 의미심장한 차이들이 나타났다. 이 차이들은 자주 간과되었다. 오늘날 불교를 가르치는 많은 사람들과 체르바스키와 콘즈 같은 대학자들조차도 아비달마 불교 이전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사변적인 요소들을 초기의 가르침 속에 귀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차이들이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해석을 왜곡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들은 인과율에 대해 오히려 선형적인 견해로 치우치는 움직임을 보여주기 때문에, 여기에서 긴히 그것들을 명기하여 개괄할 필요가 있다. 그것들은 네 부분으로 되어 있다.
① 순간성(刹那)이라는 관념;
② 무위법(無爲法)의 가정;
③ 실체와 속성의 구분;
④ 12연기(the nida?a series)를 삼세(三世)의 인과적 연쇄로 보는 설명(三世兩重因果說).
6. 순간성(찰나)이라는 관념
초기 경전들은 현상들의 무상(無常)과 상호작용을 강조했지만, 그러나 현상들의 존재론적 본질을 분석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아비달마 학자들은 상호작용하고 있는 요소들, 즉 제법(諸法, dharmas)의 고유한 특성을 확정하려고 시도했다. 이들 (아비달마에서 생각하고 있는) 법(dharma)은 경험의 심리적-물리적 구성 단위, 즉 분해될 수 있는 세속적인 실재의, 건물의 벽돌과 같은, 근본 요소를 의미한다.
그래서 법들은 구별되고, 그 수가 몇 가지인지 세어지고, 분류되었으며, 법의 성질과 수와 존속 기간에 대한 정교한 이론들이 수립되었다. 이들 이론은 법을 분리된 실체들로, 즉 ‘궁극적으로 실재하는 사실들’로 실체화하는 데 이바지했다.48) 스트렝(Streng)이 언급했듯이, 이것은 “본질주의적 사고로 회귀하는 불행한 풍조”였다.49)
아비달마 학자들이 이 실체론을 (초기불교의) 실재에 대한 역동적인 관점에 적응시키려고 노력한 결과, 이들 법은 번갯불처럼 빨리, 너무 짧아서 상호작용을 하거나, 아니 그보다는 시간 속에서 상호간에 상속할 수 없는 순간에, 상호간에 교체하는 순간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 결과, 무상성(無常性, aniccata?은 순간성(khan.ika? 刹那性)이 되었고, 인과관계는 단순한 연속이 되었다. 법들은 너무 순간적이어서 상속 관계 이상의 어떤 관계를 갖는 것으로 이해되었다.50)
이런 생각은 인과율에 대한 흄(Hume)의 견해에 가까우며, 흄의 견해는 자주 불교와 비교되지만, 흄과의 유사성은 아비달마 불교에 한정될 뿐 그 이전의 불교에는 해당되지 않는다.51)
칼루파하나(Kalupahana)가 주장하듯이, 초기불교 경전에서 현상들은 무상한 것으로 표현될 뿐 결코 순간적인 것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초기불교 경전에서 “경험적인 사물들은 …… 얼마 동안 존재하고 있는 관찰할 수 있는 營풩湧甄 그리고 그것들은 순간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계속적으로나 동시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52)
거기에는 시간이라는 요인 외에도, 존재론적 그리고 인식론적으로 중대한 문제들이 있다. 문제는 어떤 사물이 얼마나 오래 존속하느냐가 아니라, 인과율이 사물들에 의하여 세워지느냐 관계들에 의하여 세워지느냐이다.
초기불교 경전에 순간성이나 찰나성(khan.ika이 나타나지 않는, 그리고 나타날 것 같지 않는 이유는 아비달마 불교 이전의 불교인들은 별개의 실체라는 개념으로 실재를 형이상학적으로 분석하려고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자아는 오온(五蘊)으로 분석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들 구성요소들의 특성을 구별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것들이 무상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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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무위법(無爲法)의 가정
또 하나 아비달마가 변형시킨 것은 열반(nibba)과 허공(akas)이라고 하는 조건이 없이 존재하는 실재, 즉 무위법(無爲法)이 있다는 가정이다. 이것은 무위(asan.khata, 산스크리트는 asam.skr.ta)라고 하는 용어의 사용에 변화가 나타났음을 의미한다.
초기의 경전에서 유위(有爲, san.khata)는 ‘결합되어 하나로 만들어진’ ‘복합된’ ‘조직된’―따라서 ‘소멸될 수밖에 없는’을 의미한다. 그 말은 ‘조건에 의한’이라는 의미가 아니므로, 그 반대말인(nibba?a, 열반반에 적용되는) 무위도 ‘조건에 의하지 않는’을 의미하지 않는다.
실로 초기불교 경전에서 조건에 의하지 않는 것, 즉 인과율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칼루파하나가 단언하듯이, 아비달마 불교 이전의 경전들이 무연생(無緣生, apat.icca samuppanna, 조건 없이 생긴 것)으로 보는 실체나 본질 또는 상태는 결코 없다.53) 해탈도 초기불교 경전에서 인과율에서 벗어난 것으로 이야기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인과율을 사용하여, 즉 조건성의 효력을 이용하여 성취된다.
열반(Nibba?a)은 조건이 되는 연(nida?a)들의 계열(12연기)에서 벗어남으로써가 아니라, 수행을 통해 집(集, samudaya)을 멸(滅, nirodha)로 바꿈으로써 성취될 수 있다고 이야기된다. “나는 해탈이 인과적으로 관련되어 있다고 하지, 인과적으로 관련되어 있지 않다고는 이야기하지 않는다.”라고 붓다는 이야기했던 것이다.54)
아비달마 불교와 함께 무위(無爲, asan.khata)가 ‘조건이 없는’을 의미하는 데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예를 들면, 《법집론(法集論, Dhamma-san.gan.i)》의 제법 분류 속에서 여실히 드러난다.55) 거기에는 열반만이 무위법의 범주 속에 들어있는데, 다른 학파에서는 허공도 포함시킨다.56) 이와 같이 무위(asan.khata)의 의미는 ahetujam, 즉 ‘원인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닌’과 같은 의미로 쓰이게 된다.57)
이러한 움직임은 보다 실체론적인 그리고 선형적인 견해로의 변천의 의미로 이해될 수 있는데, 거기에서는 결과가 그 원인 속에 선재(先在)하며, 결과는 원인에 의해 산출된다.
열반은 이러한 방식으로 산출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열반은 인과의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었다.―그래서 조건이 없는 것으로 단정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열반을 형이상학적 절대자와 동등시하려고 하는 해석을 부추겼다.
그것은 또한 구원을 우리가 살고 있는 위태롭고 곤궁한 세계와는 다른 차원으로 옮겨 놓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변화가 불교학자들의 불교관에 전체적으로 영향을 주었다는 것?“구원은 오직 무위의 세계(The Unconditioned)로의 탈출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이 “붓다의 근본적인 가르침이다”라고 이야기한 콘즈(Conze)에게서 여실하게 드러난다.58)(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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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실체와 속성의 구분
아비달마 불교는 분석하기 위하여 법들(dharmas, 사물들, 또는 심리 물리적 사건들)을 범주적으로 구분했는데, 기록에 남겨진 붓다의 가르침에는 그러한 구분이 나타나지 않는다.
아무튼 세속적인 또는 상대적인 실재와 현상 세계와는 별개의 절대적 진리 또는 절대적 영역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는 궁극적 실재(paramat.t.ha desana? 勝義說) 사이의 구분이 이루어졌다.59) 비슷한 범주적 구분이 정신 영역과 물질 영역 사이에 나타났는데, 아비달마 자체의 표현으로는 명(名)과 색(色)의 구분(na?a-ru?apariccheda), 즉 정신과 물질로 나누기이다
.60) 물질이 비정신적(acetasika) 특성으로 정의된 반면, 마음(心, citta)과 그 정신적 속성들(心所, cetasika)은 비물질적(無色, aru?a) 특성으로 정의되었다.(몇몇 책에서는 열반을 정신 영역에 넣고 있다.)
이러한 이원론적인 추세는 신체와 현상 세계를 대하는 태도들을 조장했는데, 그것은 상좌부 불교의 특성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형태의 불교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또한 아비달마 학자들에게 철학적인 문제들을 야기했는데, 칼루파하나는 그것을 자세히 고찰하여 아비달마 학자들이 만든 세 번째 구분, 즉 사물(dharma)과 사물의 특성(lakkhan.a)의 구분에 결부시켜 설명한다.61) 이러한 구분은 기초가 되는 실체를 생각하도록 하며, 기초가 되는 실체 관념은 순간성이라는 관념이 나타남으로써 사라진 연속성이라는 관념을 마련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가 20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선형적 인과율에 대한 비판에 의해 깨닫게 되었듯이, 실체와 속성의 구분은 결국 인과작용을 단일 방향적으로 보게 하는 것이다(5장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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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2연기를 삼세(三世)의 인과적 연쇄로 보는 설명(三世兩重因果說)
우리가 아비달마 불교에서 주의해야 할, 초기불교의 인과관에서 벗어난 네번째 이탈은 12연기(the nida?a series)를 과거세, 현세, 내세의 연속적인 삶(三世)으로 설명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12연기는 윤회의 수레바퀴를 의미하게 되며, “삼세에 걸친 두 겹의 인과(三世兩重因果)”로 불리게 된다〔兩重(twofold)은 집(samudaya)과 멸(nirodha)을 의미한다〕.
붓다가 가르친 연기설 그 자체와 자주 동일시되는 이 해석에서, 처음의 두 요인, 즉 무명(avijja?과 행(san.kha?a)은 전생에서 초래된 원인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된다.
다음의 일곱 요인은 현생의 현 존재를 나타내는데, 식(vin??n.a)에서 수(vedana?까지는 과거의 원인에 의한 현재의 결과이고, 애(tan.ha?와 취(upa?a?a)는 미래에 대한 현재의 원인이다. 마지막 셋, 즉 유(bhava), 생(ja?i), 노사(jara?aran.a)는 현재의 업이 가져올 미래의 결과, 또는 세 번째 삶(미래의 삶)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견해는 경장과 율장에서는 설해지지 않았다.62) 경장과 율장에서 연기지(緣起支, nida?as)들은 명확하고 특정한 결정소의 역할을 했다기보다는 삶이 연기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실례의 역할을 했다.
미즈노에 의하면, (경과 율에서) 식(vin??n.a)을 환생하는 의식으로 언급한 것은 단지 통속적인 실례를 들어 설명하려는 의도에서였을 뿐, 권위 있는 버전이 한 둘이 아닌 연기설(다양한 형태의 연기설) 그 자체는 삼세라고 하는 고정된 도식으로 나타낼 수 없는 많은 다양성을 보여준다.
초기 경전을 보면 연기지(緣起支)의 수와 순서 그리고 특성은,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다양하다.―어떤 연기설은 10지로 되어 있고, 어떤 것은 12개 또는 그 이상으로 되어 있으며, 어떤 것은 식 앞에 촉과 수를 두고 있고, 어떤 것은 희락(喜樂)과 신념이라는 요인(緣起支)을 포함하고 있다.63) 그 인과적 연쇄의 순서와 명확한 구성이 그 가르침(연기설)의 주요 교의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64)
그러나 아비달마불교에서는, 니까야(Nika?a)에 가장 자주 나타나는, 연기설의 형식 하나(12지연기설)가 인간의 (삼세에 걸친) 연속적인 삶을 관통하는 원인과 결과의 연쇄를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됨으로써, 이들 용어(緣起支)에 특별히 중요한 지위와 특이성이 주어진다.
미즈노가 시사하고 있듯이, 통속적인 은유에 의한 그리고 기억을 돕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 여기에서는 문자 그대로 해석된 것이다.
열반을 조건에 의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견해와 마찬가지로, 이 발전(삼세양중인과설)도 부분적으로는 법(dharma)을 실체화 하려는 경향이 낳은 결과인 것이다.
어느 경우이든, 아비달마 학자들은 개개의 연기지에 경과 율에서는 분명하지 않은 존재론적 의미를 부여했으며, 그들의 삼세양중인과설은 12연기설을 선형적 인과의 고리로 표현하는 데 공헌한다.
이리하여 그것은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연기설의) 상호 역동성을, 즉 어떤 주어진 삶 속에서, 엄밀히 말하면 어떤 주어진 순간에, 우리의 의지와 생각, 갈망과 무지가 서로간에 상호 결정하는 방식을 모호하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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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상호의존의로의 연기
후대에 몇몇 아비달마 불교학자와 학문적인 해석들이 본의에서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초기 경전에서 연기가 실재의 ‘상호의존적 구조’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미즈노의 말을 들어보면,
붓다는 보리수 아래서 세계의 상호의존적 구조를 깨닫고 정각(正覺)을 성취했다. 이런 견지에서, 불교는 근본적으로 상호의존이라는 사고방식 위에 서 있다고 말해도 좋다.65)
붓다는 그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인습적인 관점에서 사물을 보면 자명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연기는 경전에서 거듭 이야기하듯이, 심오하고, 미묘하고, 파악하기 어렵고, 통찰력을 필요로 한다. 깨달음을 설명하면서, 그리고 성도 직후 연기를 가르치면서, 상호 인과율에 수반된 사유의 방식을 언급하는 말이 반복되는데, 그것은 여리 작의(如理作意, yoniso manasika?a)이다.
작의(作意, manasika?a)는 ‘심사숙고하다’ ‘마음에 깊이 새기다’는 의미의 동사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깊은 주의’ 또는 ‘주의 깊은 심사숙고’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이 심사숙고는 yoni의 탈격(奪格)인 여리(如理, yoniso)에 의해 수식되고 있다. Yoni는 문자 그대로의 뜻은 ‘자궁’인데, 의미가 확장되어 ‘근원’, ‘태어나는 길’, ‘모조직(母組織, matrix)’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여리작의(Yoniso manasika?a)는 우리가 의존적 상호발생(연기)에 대하여 사유할 수 있는 길을 찾는 데 도움이 되는 많은 그리고 유익한 함의를 제공한다. 자궁을 가리킴으로써 발생,
즉 현상의 발생을 함축하고, ‘모조직(母組織, matrix)’을 가리킴으로써 현상들이 참여하고 있는 상호의존의 조직(web)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여리작의는 분석하거나 분류하는 이지적인 학습이 아니다.
그것은 분석적이기보다는 종합적인 것으로서, 전체의 자각―즉 폭넓고 집중된 개방성 또는 그 안에 모든 요인들이 포함될 수 있는, 즉 그들의 상호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깊은 주의(靜慮)66)를 뜻한다.
허버트 귄터(Hebert Guenther)는, 이러한 스타일의 사유는 서양적 성질의 사유 스타일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하면서, 그 교의가 선형적 인과관에서 일탈한 것임을 강조한다.67)
불교의 인과율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사유방식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을 깨닫는 일이다.
불교인의 연합·조화적(associative and co-ordinative) 사유의 개념 체계는 전통적인 유럽인의 인과·입법적(causal and nomothetic) 사유와는 다른 어떤 것이었다.
불교인의 사유체계는 상호의존하는, 함께 존재하면서 자유롭게 상호작용하는 힘들의 관계그물망(network)을 (가정하며), 이 관계그물망 속에서는 어떤 요인이건 인과의 분류단계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언제든지 차지할 수 있다.
이것(불교의 인과율)이 의식을 測?존재들68)에게 주는 역할에 대하여 평하면서, 귄터(Guenther)는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작인(作因, causal agent)’으로서 그의 세계를 만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그이고, 한편 세계는 그를 만들고 있는 ‘작인(causal agent)’이다. 그렇게 되는 까닭은, 불교의 ‘인과율’이 전술한 바와 같이 원인과 결과가 서로 얽혀 있는 시스템이며, 인과의 선형적인 연쇄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인과율은 상대적이며 또한 객관적이다.: 객관적으로 사물들의 본성 속에 내재해 있는 이 인과율은 상대적인데,
주관적인 견해라는 의미에서 상대적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들이 상호 의존한다는 의미에서 상대적이다.
이 상호의존이라는 관념은 붓다의 가르침에 고루 퍼져 있어서 붓다가 계율을 제정하는 것 자체도 조건(인연)에 의한 것으로 이야기된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일방적인 계시(啓示)란 결코 있지 않으며, 계율의 출현은 우리 모두가 처해 있는 바로 그 상황에서 생긴 것이다.
그것은 절망과는 거리가 먼,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보다 순결한 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태어나서 늙어 죽어 가는, 생사윤회(sam.sa?a)라고 부르는, 바로 그 혼란에 의지하여 나타난 것이다. 후에 용수(龍樹, Nagarjuna)가 이야기한 생사윤회와 열반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에 대한 언명의 전조가 되는 언급 속에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만약 이들 세 가지가 이 세상에 없었다면, 제자들이여, 여래, 불(佛) 세존은 세상에 출현하지 않았을 것이고, 여래가 현시한 계율과 교의도 세상에서 빛을 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떤 것이 그 셋인가?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이 그것이다.69)
인과율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자아와 자아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즉 인간 실존의 본질인 곤경과 희망을 파악하는 데, 광범위한 함의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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