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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음방 스크랩 잉카(Inca)문명의 신비: Machu Picchu(마추 피추) 산상도시
행복나무 추천 0 조회 109 12.07.02 16:1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아래 사진들은 페루 원주민들에 의해 "오래된 봉우리"를 의미하는 마추 피추(Machu Picchu) 봉우리에 건설된 잉카문명(Inca Civilization) 유적이다. 해발 2,057 미터나 되는 높은 산에 위치한 이 도시는 "공중 도시", 또는 "공중 누각", "잉카의 잃어버린 도시"등으로 불리워 ?었다. 이 잉카유적은  3 미터씩 올린 계단식 밭 40개가 3,000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는 데, 유적의 면적은 약 13평방 킬로로 돌로 쌓은 건물의 총수는 약 200호에 이르렀다.

 

이 유적은 지금부터 100년전 1911년 7월 24일 미국 예일대학 역사학자이던 하이람 빙감(Hiram Bingham)에 의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빙감은 1915년까지 3회에 걸처 현지 탐사를 했었다.  그는 현지 탐사및 발굴을 근거로 마추 피추 산상도시에 대하여 일련의 서적과 논문을 발표하였는 바, 그 증 가장 유명한 해설인 "잃어버린 잉카도시"가 베스트 셀러를 기록했었다.

 

빙감의 "잃어버린 잉카도시"는 미국 National Geographic지가 1913년 4월호 전체를 마추 피추 특집으로 출간함으로써 더욱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또한 빙감이 1930년 저술한 저서 "마추 피추: 잉카의 요세"는 폐허의 사진과 지도가 기재되어 더욱 설득력있는 결정적 논문이 되었었다. 그 이후 태양을 숭배하는 신관들이 통치하는 도시였다거나, 또는 태양의 처녀들이 살았던 도시라는 설등이 나오게 되었다.

 

한편 이 잉카문명 유적지에 마추 피추(Machu Picchu)라는 이름이 붙게된 것은 그 곳을 탐사하러 온 하이람 빙감이 현지 주민에게 유적의 이름을 묻자, 현지 주민은 산의 이름을 물은 것으로 생각하고, 마추 피추(Machu Picchu)라고 대답한 것이 유적 자체의 이름인양 잘못 전하여 지고 있다고 하는 설도 있다.

 

빙감은 예일대학 교수를 그만 두고, 코?티컷트(Connecticut)주 부지사, 지사를 거처 상원의원이 되었으나, 그의 잉카문명 조사에의 영향력은 그 가 죽은 지 40년 가까이 남아있을 정도로 영향력 컸었다.

 

(마추 피추 잉카 유적을 발견한 하이람 빙감의 가문은 대대로 진취적인 탐험심과 인류를 위한 봉사정신이 투철한 혈통이었다. 빙감의 할아버지는 하와이 원주민들에 기독교를 전파한 1세대 선교사로 유명하였다. 또한 빙감의 아들 하이람 빙감 4세(Hiram Bingham 1V)는 미국 외교관으로 중국 북경, 일본 코베주재 미국 영사를 담당하며, 동양문화에 심취한다. 그의 이런 배경은 그로 하여금 동.서 문화의 개념을 문명간의 충동개념으로 보지 않고, 서로 이해하고 화합할 수 있는 가치로 이해하게 한다.

 

아시아에서의 그의 이러한 경험은 훗날 그가 프랑스 마르세유(Marseille) 주재 미국영사관 영사로 근무할 당시 프랑스를 점령한 나치독일을 피해 국외로 망명하려는 많은 유태인 출신 엘리트 지성인들에게 미국 입국 비자를 발급해 주어 그들을 구출해 준 "신들러" 역할을 하게 하는데 기여하기도 했었다.

 

1940년 6월 10. 히틀러는 프랑스를 침공 점령했었다. 이 때 하이람 빙감 4세는 마르세유 주재 미국 영사관 영사로 근무중이었다. Gestapo(나치군대 친위대)는 프랑스내 유태인들 색출에 혈안이 되었었다. 이 때 빙감 4세가 비자를 발급하여 미국으로의 탈출을 도와줌으로서 훗날 20세기 인류문화사에 위대한 공헌을 한 예술가. 작가, 사상가,  의학자들이 많았었다. 아래와 같이 20세기 세계 지성계를 빛낸 엘리트들이 빙감4세의 도움을 받아 나치가 점령한 독일과 프랑스를 탈출, 미국으로 망명한다:

 

          Max Ernst(독일작가: Dadaism 미술운동 창시자), Andre Breton(프랑스 시인. 초현실주의 창시멤버). Hannah Arendt(독일태생 유태인 정치사상가) Marc Chagall(저명한 유태계 화가), Otto Meyerhof(독일태생 유태계 의학자(Nobel 의학상 수상)....등등 ...) 

 

최근에 이르러 마추 피추 유적 전체는 페루 인에 의해 빙감보다 9년 앞서 1902년에 발견되었다는 설이 등장하고 있을 정도로 현재도 마추 피추 유적에 대하여는 세계 학계에 의하여 부단한 답사와 연구가 행하여 지고 있는 가운데, 마추피추가 생겨난 배경에 대하여는 5개의 학설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볼수있다.

 

우선 아래 사진들을 감상하면서 마추 피추(Machu Picchu)유적의 신비를 벗겨보고자 한다.

 

 

 

File:80 - Machu Picchu - Juin 2009 - edit.2.jpg

 

 

File:95 - Machu Picchu - Juin 2009.jpg

 

ファイル:Machu Picchu05.jpg

                   경사면에 건설한지 500년이 지난 돌계단및 돌 축대등이 현재까지 건재하고 있는 모습도 불가사의의 한 단면이다.

 

위의 사진들은 해발 2430미터나 되는 높은 산중턱에 15세기에 번창했던 남미 페루의 잉카문명 도시 마추 피추(Machu Picchu)의 모습들이다.

이중 세번째 흑백사진은 1911년 7월 24일 미국 예일대학 고고학자 하이람 빙감(Hiram Bingham)이 발견했을 당시의 원형사진들이고, 남어지는 복원한 모습들이다.

 

영어로 " Old Peak" (오래된 산봉우리)라는 의미를 지닌 마추 피추(Machu Picchu)는 100년전까지만 해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잉카제국 황제 파카쿠티(Pachacuti)(1431-1472) 시대에 의해 건설된 이 산상 도시는 페루의 쿠스코(Cusco)시에서 80킬로 떨어진 우루밤바 계곡 (Urubamba Valley)에 위치한 안데스 산맥(Andes Mountains)의 한 정상부근 고원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이 신비의 산상 도시인 마추 피추(Machu Picchu)가 어떻게 하여 존재하게 되었는 지에 대하여는 5가지 설이 존재하고 있다.

 

( 1) 잉카 문명 최후의 도시라는 설

 

세상에 마추 피추 산상도시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린  하이람 빙감(Hiram BIngahm)은  두 종류의 학설을 제공했었다.

하나는 그 곳이 바로 잉카문명 발상지라는 설이었다. 이 설은 빙감이 1911년 현지 농부의 안내로 마추 피추 유적지를 방문하였을 당시 제시했던 설이나 후에  자신의 설을 수정하여 전설의 잉카제국 최후의 도시 "빌카밤바"(Vilcabamba)일 것이라는 설을 내놓았었다.

 

"빌카밤바"(Vilcabamba)는 16세기 페루를 정복하러온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잉카제국 최후의 황제가 항복하던 장소를 의미하였으나, 추후 어느 설도 정확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다. 실제로 스페인 정복자들에 맞서 항거하다 죽은 잉카제국 최후의 요쇄는 잉카의 수도 쿠스코(Cusco)로 부터 서쪽으로 약 130킬로 떨어진 밀림 지대로  확인되었다

 

아이로니칼 하게도 하이람 빙감(Hiram Bingham)은 1911년 Esprito Bamba를 답사하긴 하였으나, 그 도시의 규모나 위용으로 보아 전설의 도시 에스피리토 밤바는 아닐것으로 판단하였던 것이다. 후에 밝여진 것이지만 에스피리토 밤바는 빙감이 상상했던 것 보다는 훨씬 규모가 큰 도시였음이 판명되었었다.

 

2.  신성한 여자 수도원이라는 설

 

빙감은 마추 피추를 신성한 여자 수도원일수도 있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했었다. 신성한 여자 수도원 아니면 "태양의 처녀 " 사원일 것이라는 설을 말히기도 했었다

잉카의 태양신 인디를 섬기는 선택된 신성한 여성으로서의 태양의 처녀가 살던 수도원이라는 설이었던 바, 그 이유로 그 곳 유골 매장지에서 발견된 다수의 유골이 거의 대부분 여자였던데서 그러한 가설이 나오기도 하였으나,이 설 역시 2000년에 파기되었다. 왜냐하면 당시 예일대학에 제직중이던 인류학자 존 베라노씨가 새로이 유골들을 조사해 본 결과 남녀 유골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고고학계가 과학적 근거로 판단한 바에 의하면 마추 피추에서 발견된 유골은 인카의 여성 성직자의 유골이 아니라, 잉카제국 전 지역에서 온 관리들과 양반들로 판명되고 있다. 황제와 ViP들이 이용하던 왕가의 별장들이었다면, 요리나 농작물 재배, 청소들을 담당하던 자들의 유골일 것으로 보고있다  

 

3. 세번째 학설은 마추 피추는 15세기 Pachacuti(파챠쿠티)황제의 황족및 귀족들의 별궁이었을 것이라는 설

 

마추 피추는 Pachacuti 황제의 황족및 귀족의 피서지 및 휴양, 사냥, 빈객 접대용으로 이용되던 별궁, 또는 이궁(離宮)의 개념으로 인구는 한때 750명에 이르기도 했을 것으로 보고있다.  페루의 고고학자 Alfredo ValenciaZegarra씨에 의하면, 이 유적은 1440년 Pachacuti 황제에 의하여 건설이 착수되었다가 1532년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잉카제국이 정복될 때 까지 약 80년간 잉카인들이 살았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1980년대 발표된 "황제 관저설"은 16세기의 스페인 고문서에 등장하는 피추(Picchu)라는 이름의 왕의 직속영지와도 일치하여, 피추는 마추 피추와 동일한 지역이라는 설

 

4.  잉카의 창조신화를 재현한 것이라는 설

 

마추 피추 건설은 무엇보다도 종교적 성격이 강했다고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태리 밀나노 공과대학 천체물리학자인 줄리오 마그리씨는 2009년 행한 조사를 통해

마추 피추는 잉카의 신화를 재현하는 장소라는 설을 발표했다. 그에 의하면, 마추피추는 선조들을 숭배하기 위해 선조들이 걸어온 고난의 여정을 상징적으로 체험하기 위해 만든 순례지로 보았다. 선조들은 잉카의 원발상지에 해당하는 볼리비아의 Lake Titicaca 에서 지하를 통해서 여행을 계속, 페루의 쿠스코 근처에서 지상으로 나왔다고 하는 신앙설이 존재하는 바, 이러한 종교적 고난의 여정의 종착점으로 잉카인들이 마추 피추도시를 건설했다는 것이다.

 

ファイル:Lake Titicaca map.png

 

5.  고대 인카제국의 신전이 건축된 성지라는 설

 

저명한 고고인류학자인 요한 라인하르트(Johan Reinhard)씨는 1991년 "Machu Picchu: Exploring an Ancient Sacred Center"(고대 성지 마추 피추 탐사)라는 저서를 통하여, 마추피추는 잉카문명에 있어서 성지중에서도 특별한 장소였다고 주장하였다.

 

예를 들면 마추피추가 있는 산은 신성한 강인 우루밤바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하지나 동지, 춘분 과 추분에 해당하는 날에 마추피추의 툭정지점에서 관측하면 해가 뜨고 지는 것이 종교적으로 중요한 산들과 정확히 일직선상에 놓여있고, 당시 태양은 잉카의 조상으로 간주되었다. 라인하르트씨에 의하면, 마추 피추는 "우주론과 성지 안데스(Andes)와 연결되는 독특한 예"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경사면에 위치한 마추 피추의 정상에는 태양의 신전이 있고, 정상에는 Intihuatana, 즉, 태양을 멈추게 하는 돌이  설치되어있는 가 하면, 하지와 동지를 정확히 구분할 수 있는 창문이 있는 점, 태양력을 사용하였을 것이라는 설 등도 존재하고 있다.

 

잉카의 신은 태양신과 같은 존재로서 가급적 태양에 가까운 산의 정상에 신전을 짓고, 신전의 밭등을 경작지로 사용하여 농사를 재배하여 그곳에서 난 곡식을 신에게 공물로 바치는 습관이 있었다는 가, 잉카인들에게는 태양신과 함께 달(月)도 숭배하여, 마추 피추의 배후에 솟은 산의 뒷편에는 달을 섬기는 신전이 동굴속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

 

 

소회:

 

학자들 간에는 마추 피추를 잉카 황제의 별궁으로 보는 설과 페루의 고고학자 기에르모 코크씨와 같이 현대문명과 달리 잉카문명 사회에 있어서는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중의 목적을 지닌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는 시각으로 나누어 지고 있다. 즉 황제는 신성한 존재로서 그가 정치를 행하는 장소는 어디든지 신성한 의미를 지닌 곳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잉카문명의 인류사적 유적지 Machu Picchu를 보면서 엉뚱하게도 시계바늘을 15-6세기로 돌려놓고서 오늘의 북한현실과 마추피추가 건설되었던 당시를 비교검토해 본다. 북한은 김일성. 김정일이 관련된 장소나 물건등은 신성시 하고 있다. 북한이 묘향산이나 백두산에 잉카제국의 마추피추같은 산상 도시만 건설하지 않았을 뿐이지, 사고방식은 15-6세기 잉카제국 황제시대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전자는 인류의 사랑과 아낌을 받고 있고 낭만과 신비감이 넘치는 반면, 후자는 인류의 저주와 증오의 표적이자 경멸과 전율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Lyceum: 연세플러스 피부과 명예 이사장( http://www.ysplusclini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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