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맞이꽃의 마음
김영심
아직 어둠의 자락이 걷히지 않은 이른 새벽, 온몸을 스치는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새벽 안개 속으로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으며 논길을 달렸다. 짧은 여
름밤의 밀어가 새벽 안개 속에 머물러 있다가 흩어져 간다. 미처 작별의 인사
도 못한 채 서러움에 젖어있던 달맞이꽃이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길가
에 지천으로 피여 있는 흔하디 흔한 달맞이 꽃. 난 그 달맞이꽃에 특별한 관
심을 갖게 되었다. 달맞이꽃이라는 이름과 그 꽃말 때문이다. 어쩜 나의 마음
같다고나 할까. 비록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꽃이지만 '자유로운 마음'을 간직
한 꽃말.
어릴 적 고향 시냇가 둔덕에 피여 있던 꽃. 달빛을 온몸에 받으며 춤을 추던
그 모습. 난 지금도 그 밤에 출렁이던 시냇물과 어울려지던 그 광경을 생각하
면 온몸이 뜨거워진다. 가슴속에 간직한 열정을 한바탕 춤이라도 추어야만 풀
릴 것 같은 그런 심정으로......
언제였던가, 산사에 계신 여스님께서 그의 절친한 신도에게
"보살님 오늘 저녁 꽃피는 구경 오시지 않겠어요?" 하시면서 초대를 하였단
다.
그 분은 밤에 무슨 꽃구경인가 하면서 갔더니 달맞이꽃이 피는 것을 보여 드
리고 싶어서라고 했단다. 그날 밤 꽃 봉오리가 터지는 그 신비로운 모습을
보면서 달빛아래 차를 마시며,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나도 꼭 그 모습을 보리라 마음먹었지만 잊고 살았는데 올
봄 문득 그 생각이 났다.
나는 달맞이꽃 몇 포기를 내 조그마한 정원으로 옮겨 심었다. 여름이 되면서
키가 껑충 큰 달맞이꽃은 별 볼품이 없었지만, 꽃이 피는 것을 보리란 기대로
기다려왔다. 어느 날 아침 뜰에 나서니 간밤에 몰래 피였다 막 지려는 노오란
꽃송이가 하늘거리고 있지 않는가! 잡히지 않는 그 무엇을 향해 쫓기듯 살아
온 날들. 바쁘다는 핑계로 잊었던 날들. 자꾸만 내가 한심해진다.
"그래! 오늘밤은 꽃피는 구경을 하면서 나를 돌아보아야지".
그러나 한 계절을 기다려 왔건만 그 몇 시간을 기다리지 못해 지쳐 방에 들어
왔다 잊어버리기를 여러 날. 큰 맘 먹고 그 곁에 자리를 잡고 기다렸다. 7월
의 달빛이 내려 비치는 밤 난 달맞이꽃이 되어 사랑하는 님을 기다리듯 가슴
이 마냥 설레었다. 꼭 다문 입술, 수줍은 듯 한 새색시 같은 꽃잎....
밤의 정령들이 시간을 몰고 오고 있었다. 여름밤 미풍이 꽃가지를 흔들며 지
나간다 님이 오시는 시간이라고 알려주는 듯. 님의 발자국 소리라도 들리는가
작게 꽃가지가 떨린다.
눈을 꽃봉오리에다 고정시키고 꼼짝할 수가 없었다. 행여나 한 순간이라도
놓쳐버릴세라 눈앞이 흐릿하여 안개 속을 헤매는 듯 하여도 난 돌아설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님이 내 곁을 스쳐지나가 버릴 것 같은 조바심으로 미풍이 지나
가고 난 뒤, 노란 커튼자락처럼 살포시 고개를 내미는 순간 자꾸만 뛰는 내
가슴. 일각이 여삼추라고 했던가.
기다림에 지친 듯한 순간 4개의 꽃잎을 동시에 활짝 터뜨렸다. 달빛아래 탄
성처럼 터뜨리는 그 모습 그 환희의 순간, 그대 내 영혼의 주인이시여! 이 밤
이 순간을 위해 참아 왔던 날들. 그리운 그대 진정 내게로 오셨는가! 바람처
럼 달빛 타고 내게로 오신 님이여 길고 긴 여름날 그대 오기만을 기다리던 날.
하루가 천년과 같았던 시간들. 삶의 아픔을 모두 잊은 채 온전히 드리려는 자
세로 피어난 꽃. 그 달맞이꽃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위대해 보였는지......
열려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가슴속은 환희에 뛰며 내 귀에는 폭죽처럼
꽃송이가 터지는 소리로 현기증을 일으켰다. 짧은 여름밤이 지나고 나면 지고
말 것을... 자꾸만 안타까움과 서러움이 물결처럼 가슴속으로 스며든다.
꽃이 피는 모습을 무심히 지나쳐 버리고 말았던 우리의 생활에서 이렇게 실
제로 피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 그것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환상의 세계 같았다. 자연의 조화가 이렇게 신비하고 아름다울 수가! 이 한밤
나와 더불어 사랑을 얘기할 수 있는 벗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한 평생 살면서 가슴속 묻어 둔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진정한 벗 한 사
람만 있어도 인생을 잘 살았다고 할 수 있다고 했던가. 내겐 그런 친구가 있
는가? 선뜻 대답할 수가없다. 헛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쓸쓸한 감정
이 스치고 지나간다. 방안에 들어와 누워도 잠이 오지 않는다. 달빛 때문일
까? 아니 나이 탓일까? 달맞이꽃이 툭툭 꽃봉오리 터뜨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조금 전 피어나던 꽃송이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일어나 매실주를 꺼내 불 꺼
진 창문 앞에 앉아 어둠이 내려앉은 정원을 바라보며 한잔을 마셨다. 사랑과
인생을 생각하며...
아직도 소녀시절 꿈을 버리지 못하는 난 늘 가슴앓이를 한다. 나 또한 달맞
이 꽃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욱 아름답게 꽃피울 수 있도록 열심히 나를
가꾸어야겠다. 언젠가 떠나갈 이 세상을 아름답게 간직하기 위하여......
달맞이 꽃 말처럼 나 또한 자유로운 마음으로 이 밤 꿈의 여정을 떠나야겠
다.
2000. 8집
첫댓글 아직도 소녀시절 꿈을 버리지 못하는 난 늘 가슴앓이를 한다. 나 또한 달맞
이 꽃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욱 아름답게 꽃피울 수 있도록 열심히 나를
가꾸어야겠다. 언젠가 떠나갈 이 세상을 아름답게 간직하기 위하여......
아직도 소녀시절 꿈을 버리지 못하는 난 늘 가슴앓이를 한다. 나 또한 달맞이 꽃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욱 아름답게 꽃피울 수 있도록 열심히 나를
가꾸어야겠다. 언젠가 떠나갈 이 세상을 아름답게 간직하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