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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창세기의 말씀 1,1―2,2
1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2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3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4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가르시어,
5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
6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물 한가운데에 궁창이 생겨, 물과 물 사이를 갈라놓아라.”
7 하느님께서 이렇게 궁창을 만들어 궁창 아래에 있는 물과 궁창 위에 있는 물을 가르시자, 그대로 되었다.
8 하느님께서는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튿날이 지났다.
9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은 한곳으로 모여, 뭍이 드러나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0 하느님께서는 뭍을 땅이라,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 부르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11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은 푸른 싹을 돋게 하여라.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땅 위에 돋게 하여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2 땅은 푸른 싹을 돋아나게 하였다.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돋아나게 하였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1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사흗날이 지났다.
14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의 궁창에 빛물체들이 생겨, 낮과 밤을 가르고, 표징과 절기, 날과 해를 나타내어라.
15 그리고 하늘의 궁창에서 땅을 비추는 빛물체들이 되어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6 하느님께서는 큰 빛물체 두 개를 만드시어, 그 가운데에서 큰 빛물체는 낮을 다스리고 작은 빛물체는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
그리고 별들도 만드셨다.
17 하느님께서 이것들을 하늘 궁창에 두시어 땅을 비추게 하시고,
18 낮과 밤을 다스리며 빛과 어둠을 가르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19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나흗날이 지났다.
20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물에는 생물이 우글거리고, 새들은 땅 위 하늘 궁창 아래를 날아다녀라.”
21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큰 용들과 물에서 우글거리며 움직이는 온갖 생물들을 제 종류대로, 또 날아다니는 온갖 새들을 제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22 하느님께서 이들에게 복을 내리며 말씀하셨다.
“번식하고 번성하여 바닷물을 가득 채워라. 새들도 땅 위에서 번성하여라.”
2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닷샛날이 지났다.
24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은 생물을 제 종류대로, 곧 집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과 들짐승을 제 종류대로 내어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25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들짐승을 제 종류대로, 집짐승을 제 종류대로,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제 종류대로 만드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26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
27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
28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
29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내가 온 땅 위에서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 있는 모든 과일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
30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모든 생물에게는 온갖 푸른 풀을 양식으로 준다.”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31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엿샛날이 지났다.
2,1 이렇게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2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제2독서
▥ 창세기의 말씀 22,1-18
그 무렵
1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자,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3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두 하인과 아들 이사악을 데리고서는,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팬 뒤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곳으로 길을 떠났다.
4 사흘째 되는 날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자, 멀리 있는 그곳을 볼 수 있었다.
5 아브라함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 머물러 있어라.
나와 이 아이는 저리로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 돌아오겠다.”
6 그러고 나서 아브라함은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가져다 아들 이사악에게 지우고, 자기는 손에 불과 칼을 들었다.
그렇게 둘은 함께 걸어갔다.
7 이사악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아버지!” 하고 부르자, 그가 “얘야, 왜 그러느냐?” 하고 대답하였다.
이사악이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묻자,
8 아브라함이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 하고 대답하였다.
둘은 계속 함께 걸어갔다.
9 그들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곳에 다다르자, 아브라함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 놓았다.
그러고 나서 아들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10 아브라함이 손을 뻗쳐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을 죽이려 하였다.
11 그때,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불렀다.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12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나를 위하여 아끼지 않았으니,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니,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 한 마리가 있었다.
아브라함은 가서 그 숫양을 끌어와 아들 대신 번제물로 바쳤다.
14 아브라함은 그곳의 이름을 ‘야훼 이레’라 하였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주님의 산에서 마련된다.’고들 한다.
15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두 번째로 아브라함을 불러
16 말하였다.
“나는 나 자신을 걸고 맹세한다.
주님의 말씀이다.
네가 이 일을 하였으니, 곧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17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너의 후손은 원수들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다.
18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서간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 6,3-11
형제 여러분,
3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4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5 사실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 그분과 결합되었다면, 부활 때에도 분명히 그리될 것입니다.
6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7 죽은 사람은 죄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8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9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시어 다시는 돌아가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죽음은 더 이상 그분 위에 군림하지 못합니다.
10 그분께서 돌아가신 것은 죄와 관련하여 단 한 번 돌아가신 것이고, 그분께서 사시는 것은 하느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11 이와 같이 여러분 자신도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16,1-7
1 안식일이 지나자,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2 그리고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으로 갔다.
3 그들은 “누가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려 내 줄까요?” 하고 서로 말하였다.
4 그러고는 눈을 들어 바라보니 그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것은 매우 큰 돌이었다.
5 그들이 무덤에 들어가 보니, 웬 젊은이가 하얗고 긴 겉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깜짝 놀랐다.
6 젊은이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
7 그러니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렇게 일러라.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밤은 왜 다른 밤들과 다른가?”>
“오늘 밤은 왜 다른 밤들과 다른가?”
이는 유대인들의 '세다 예식' 중에 있는 질문입니다.
'세다 예식'이란 파스카 축제 첫날 밤,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하는 가족 식사를 말합니다.
이 식사에서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출애굽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이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 밤은 왜 다른 밤들과 다른가?”
오늘 우리도 이 질문을 던져 봅니다.
“오늘 밤은 왜 다른 밤들과 다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죄에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남을 체험한 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살아났다는 이 사실, 곧 부활했다는 이 사실은 단지 죽었던 생명이 다시 살아나 생명을 연장해 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변화된 생명, 곧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단지 우리를 새로운 삶에로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바꾸어 놓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생명으로 바꾸셨습니다.
이를 두고 사도 바오로는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콜로 3,1-3)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던 우리의 생명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숨겨져 있어 볼 수 없다고 해서 결코 없는 것이 아닙니다.
곧 ‘빈 무덤’으로 비어 있다고 해서 결코 없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비어 있고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체험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체험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던 사람, 사도 바오로는 고백합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입니다.”
(갈라 2,20)
이토록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던 우리의 생명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알렐루야!
오늘 진정 우리는 그렇게 새로이 탄생되었고, 변화되었습니다.
그렇게 변화와 탄생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의미의 '생일'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변화된 생명은 변화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곧 부활을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 그대로, 우리도 기꺼이 '모든 이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자 내가 여러분에게 신비 하나를 말해주겠습니다.
우리 모두 죽지 않고 다 변화할 것입니다.”
(1코린 15,51)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빈 무덤’을 봅니다.
‘빈 무덤’, 그것은 적어도 예수님의 죽음을 둘러싸고, 그 어떤 일인가가 벌어졌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무언가 새로운 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무덤’이 죽은 이를 묻는 곳이라면, ‘빈 무덤’, 그것은 죽음 그 자체를 묻어버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빈 무덤’은 부활의 근거는 될지언정, 부활이 사건으로 체험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빈 무덤’은 제자들이 눈으로 직접 본 역사적 사실이긴 하지만, 그것은 부활의 참 뜻을 ‘눈으로는 볼 수 없다’는 상징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자유’일 것입니다.
예수님마저 죽어버린 예수님의 빈자리인 자유입니다.
곧 예수님을 예수님 되게 하는 ‘빈자리’ 입니다.
주님을 주님 되게 하는 ‘빈자리’ 입니다.
곧 우리의 제한된 시선에 갇혀지지 않는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부활의 삶은 또한 예수님의 자유를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것일 것입니다.
주님의 자유로움에 신뢰와 의탁을 두고 내맡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일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자유로워지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마르 16,7)
주님!
곁에 계시는 당신을 두고도 모르는 척 무시하고 비껴가도
당신께서는 저를 형제라 아우라 부르시며 다정히 손을 잡으십니다.
당신께 붙들려 있게 하소서.
꼭 붙들려 있게 하소서.
꼭 붙들고 늘 함께 동행 하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을 보게 하소서.
저희들 안에 들어와 꽃을 피우는 당신의 사랑을 보게 하소서.
당신 사랑에 늘 붙들리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부활은 사랑의 승리입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서로 축하의 인사를 나누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가정에, 온 세상에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큰 기쁨을 줍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를 위한 사랑의 승리요, 우리에게도 부활의 희망을 안겨주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4)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을 통해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감수한 수난과 십자가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이 명백하게 밝혀졌습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선포하고 행동하신 모든 것이 옳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였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믿음을 지탱하는 기둥이며, 모든 희망을 받치고 있는 머릿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스승을 잃고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의 슬픔을 거두어 주었습니다.
온갖 조롱과 모욕을 받으면서도 한마디 변명도 없이 침묵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의로운 행위였다는 것을 드러내 줍니다.
또한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 고하신 말씀의 참된 의미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부활로 동안에 보여주었던 여러 표징들이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당신을 몸소 생명의 빵으로 소개하며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1)하고 영적인 양식으로 내어주셨는데 그것이 살아있는 믿음이 되게 하셨습니다.
죽음에 직면하여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하고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하신 간절함이 아버지 마음에 들었다는 것을 확인해 줍니다.
그리고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하고 의탁한 기도가 열매 맺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를 위한 십자가의 죽음이 파멸이 아니라 사랑의 승리였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또한 우리의 부활을 보증합니다.
당신 친히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9-40) 하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에게 부활의 새 삶이 선물로 주어졌다는 것은 더없이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여자들이 예수님께 발라 드리려고 향유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는데 무덤의 돌이 이미 굴러져 있었습니다.
무덤에 들어가 보니 웬 젊은이가 하얗고 긴 겉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었습니다.
깜짝 놀라 어쩔 줄을 모르는데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마르 16,6) 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시체를 만지는 것을 부정한 것으로 여겨 금하였는데도 여인들은 상관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존경이 없이는 불가능한 행위입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끝까지 충성스럽게 지켜봤던 사람, 그 죽음에 대해 가장 큰 슬픔과 미련을 품고 있던 사람, 계산 없이 아낌없이 값비싼 향료를 마련하여 동트기만을 기다렸던 사람,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으로 달려간 여인에게 부활의 첫 소식이 전해진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무덤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무덤이 비었기 때문에 부활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셨기 때문에 무덤이 비었습니다.
죄와 죽음의 힘도 무덤을 막았던 육중한 돌도,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도 주님의 부활을 막진 못하였습니다.
우리도 무덤의 삶에서 나와야 합니다.
어둡고 침침한 부정적인 생각에서, 맑고 밝은 긍정적인 생각과 삶으로 나와야 합니다.
과거의 어두운 기억에서 나와서 예수님께서 약속해 주신 영원한 천상 행복의 미래를 보고 오늘을 헌신적인 희생과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수난은 현세 생활의 수고와 고통과 죽음의 운명을 가리킵니다만, 예수님의 부활과 그 영광은 우리가 받을 영원한 생명” (성 아우구스티노)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여기서부터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활의 기쁨을 누리려면 먼저 ‘해묵은 내가 죽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야 합니다.
인간적인 욕심과 교만, 시기, 질투, 이기심에 죽고 절제와 겸손, 온유와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실천한 ‘나쁜 습관 빼기, 은총을 쌓기’의 삶이 부활의 삶입니다.
지금 여기서 부활을 살지 못하는데 어찌 훗날의 부활을 희망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님의 닮은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오늘이길 기도합니다.
또 하나 생각할 것은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서 뵙게될 것입니다”(마르 16,7) 하신 말씀입니다.
왜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셨을까요?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공적활동을 시작하신 곳이고, 제자들을 부르고 양성하신 곳입니다.
바로 여기서 복음 선포의 사명을 부여하시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하신 말씀과 행적을 기억하고 이어가는 가운데 그분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온몸과 마음을 바쳐 활동하시던 예수님의 그 모습 그대로 삶으로써 지금 여기에서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손희송).
예수님처럼 하느님 아버지를 오롯한 마음으로 섬기면서 세상에 전하고, 그분처럼 사랑으로 이웃을 아끼고 돌보면서 살아간다면 우리도 살아계신 그분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갈릴래아는 지금 삶의 자리입니다.
삶의 터를 더 큰 사랑으로 빛내야 하겠습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거듭 태어나는 부활의 기쁨이 넘쳐나길 기도합니다.
다시 한번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부활한 예수님 만나는 유일한 법: 갈릴래아로 가라>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면 부활을 믿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먼저 부활이 내 안에 없으면 부활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개가 꽃이 예쁘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개에게는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을 찾을 리도 없고 꽃을 보아도 아름답다는 것을 알아볼 수도 없습니다.
제가 대학생 때 어머니를 알아보지 못했던 일은 저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머리숱이 적은 어머니가 처음 가발을 쓰신 것을 본 날이었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진짜 아줌마로 불렀습니다.
예상하지 못하면 알아볼 수 없습니다.
한 국제 육상 경기에서 선두에 한참 뒤진 채 꼴찌로 달리던 선수가 갑자기 쏟아진 폭우를 뚫고 끝까지 완주해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국제올림픽위원회에 따르면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2023 동남아시안게임 여자 5천m 경기에 출전한 캄보디아 대표 보우 삼낭(20) 선수는 꼴찌로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기록은 1위에 6분 가까이 뒤진 22분 54초였습니다.
대부분 선수가 이미 결승선을 통과한 상태에서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달렸습니다.
가난 때문인지,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스트레스 때문인지, 평소 빈혈에 시달려 온 이 선수는 경기 당일에도 코치가 출전을 만류할 정도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결승선을 통과한 뒤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악천후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역주하는 모습이 담긴 영상이 알려지면서 하루아침에 유명 스타가 됐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물론 경기를 포기할 권리가 있었지만, 국가를 대표하는 의무가 더 중요했고, 포기하지 않으면 목표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끝까지 달렸습니다.”
삼낭 선수는 자기를 위해 달렸다기보다는 나라와 희망이 필요한 이를 위해 달렸습니다.
그런데 그 달리기는 목숨을 내어 놓아야 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달렸습니다.
분명 피의 열매가 있을 것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부활을 믿는 이에게 부활한 분이 보입니다.
그녀에게 감동한 많은 이들이 그녀를 돕겠다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미 부활한 이들입니다.
중학교 때 개신교 전도사 한 분이 우리에게 종교 교육을 해주었습니다.
그분은 한국에서 전교하는 것도 좋지만 아무도 가지 않는 오지 나라로 가서 선교사로 죽는 것이 꿈이라고 했습니다.
가족이 함께 가야 해서 그 목적을 위해 몇 년 간 계속 돈을 모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젠 돈이 얼추 모여서 떠날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은행으로 돈을 찾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돈을 찾고 나올 때 소매치기들에게 몇 년 동안 모은 돈을 모두 털리고 만 것입니다.
사실 그들이 위협할 때 그동안의 모든 꿈을 접어야 함에도 돈을 순순히 내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자신이 속한 교단에서 오지로 선교를 떠나겠다면 돈을 전액 지원하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이웃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을 때만 부활한 누군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차인표 씨도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목소리라도 한번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성경 공부하고 예수님 역할의 연극도 4년을 했지만,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난 순간은 갈릴래아로 가서였습니다.
신애라 씨 대신 인도 콜카타에 가난한 이를 위해 봉사해야 했을 때입니다.
그는 가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가게 되었고 비행기도 혼자 1등석을 타고 갔습니다.
도착 후 가난한 한 아이가 손을 내밀 때 그는 목사님이 부탁한대로 “하느님께서 너를 사랑하신다. 너는 소중한 존재다.”라는 말을 해주려고 했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께서 그 아이를 통해 차인표 씨에게 그 말을 들려 주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죽을 줄 아는 이는 이미 부활을 믿는 사람입니다.
아름다움을 믿는 사람이 꽃을 발견하듯, 이미 부활의 삶을 사는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안나의 집 김하종 신부도 우리나라에 와서 가장 가난하고 냄새나는 사람에게 봉사하고 안아주려고 할 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것과 같습니다.
만약 저도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읽지 않았다면 아직 사해 쪽에서 헤매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책을 통해 내가 추구하던 것을 버리고 이웃을 행복하게 하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신학교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이 갈릴래아였고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너 내게 많이 주었니? 근데 나는 네게 다 주었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웃 사랑의 실천 안에 계셨습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는 오늘 무엇에 죽고 어떻게 부활할 것입니까?>
참으로 감사하고 은혜로운 부활 성야입니다.
영광스러운 주님 부활, 그러나 한 마리 나비처럼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예수님 부활 사건입니다.
저는 이번 부활 시기, 구체적인 제 삶 속에서, 공동체 생활 안에서 주님 부활의 흔적을 찾고, 느껴보기 위해 나름 노력을 해봤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넉넉한 고장 태안에 내려와 산 지 벌써 만 4년이 지나갑니다.
막 도착했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도착하자마자 팬데믹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약되어 있던 피정 센터 모든 스케줄이 백 퍼센트 취소되었습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집합 금지 명령까지 내려져 피정객들은 단 한 명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건물 싸이즈가 큰 관계로 한 달 전기세가 나왔는데, 입이 딱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심각한 상황이 계속되니, 한때 관구에서는 폐업뿐만 아니라 매각까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희는 그게 무슨 소리냐? 수많은 청소년들이 다녀간 오라토리오요, 많은 살레시안들의 땀과 눈물이 흩뿌려진 성지 같은 내리를 어떻게 포기하냐? 절대 그럴 수는 없다며,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는데, 드디어 길을 찾았습니다.
집합 금지 명령이 내려졌지만, 용기를 내서 피정객들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딱 한 분이 피정을 오셨습니다.
그러다가 두 분, 세 분, 그리고 어느 순간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네 명 미만은 가능하니, 여기 네 명 저기 네 명, 저 건너편에 네 명, 또 다른 쪽에 네 명...
그런 노력의 결과 팬데믹이 한창이던 시절에도 아무런 경제적 타격을 입지 않고, 피정 센터는 잘 돌아갔습니다.
오히려 흑자를 내서 선교 기금이나 양성 기금으로 기여를 했습니다.
오늘 같은 경우도 정말이지 하느님께, 또 멀리서 찾아오신 교우들께 깊이 고개 숙여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는 태안읍에서도 50분이나 더 들어와야 하는, 오지입니다만, 이 외딴 곳의 시골 성당을 꽉 채워서 부활 성야 미사를 봉헌할 수 있다는 것, 너무나 큰 감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바로 이런 우리 공동체의 모습에서 주님 부활의 확실한 표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한때 메말라가고 죽어가던 저희 공동체였지만, 형제들의 헌신과 희생, 많은 교우들의 기도와 협조 덕분에 다시 맥박이 뛰기 시작했고, 생기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주님 부활의 흔적은 바로 우리가 매일 몸담고 살아가는 공동체, 특별히 내 안에서 발견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제 지난 수도 여정을 되돌아볼 때마다 저는 언제나 깊은 감사의 정을 느낍니다.
한때 저는 살아있었지만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가 없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몸과 마음에 에너지가 모두 다 빠져나가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습니다.
공동체에 그 어떤 기여도 할수 없었고, 제 존재 자체가 형제들에게 짐이 된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속상하고, 그야말로 매일 매일이 숨만 쉬고 있지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세상 나 혼자뿐이로구나, 이제 내 인생 끝이로구나, 하고 좌절하고 살아가던 그때 한 존재가 제게 다가왔습니다.
따뜻한 손을 내밀어주셨고, 무한한 인내심과 배려로 저를 일으켜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분은 저를 죽음에서 부활시키기 위해 주님께서 보내주신 천사였습니다.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전기를 읽으면서, 그분께서도 한때 저와 비슷한 체험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을 보고 큰 위안이 되기도 했습니다.
한 대담 프로그램 중에 누군가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교황님 생애 중에 가장 힘들고 어두웠던 순간, 하느님이 대체 계시긴 한건가 하는 생각이 든 때는 언제였습니까?
교황님께서는 즉시 이런 대답을 하셨습니다.
“예수회 부에노스 아이레스 관구장 직무를 끝내고 나서였습니다.
1983년부터 1992년까지 만 9년 동안 황폐한 시기가 계속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어두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독일로, 독일에서 코르도바로 유배되었던 그 순간, 정말 힘들었습니다.
아주 어두운 시기였습니다.
저는 그때 깊은 패배감에 젖어 이미 제가 죽었다고 믿었습니다.
마음이 너무 힘들다보니 기도도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계속 기도했습니다.
부단히 하느님께 나를 맡겼고, 용서를 구했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특별히 감실 앞에 드리던 기도가 제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주님 부활을 경축하고 계시는 교우분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은 다른 먼 곳이 아니라 우리 삶 안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노력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죽음을 딛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나를 막고 있는 죽음의 큰 돌을 굴려내는 일입니다.
매일 우리가 접하는 인간 관계 안에서 누군가와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다면, 그것은 또 다른 측면의 죽음입니다.
내가 아직도 누군가를 진심으로 용서하지 못하고, 그로 인해서 수시로 분노하고 마음의 평정심을 잃는다면, 그것은 아직도 내가 죽음에 머물러 있다는 표시입니다.
오늘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향해서도 부단히 죽고 부활하고, 죽고 부활할 것을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나는 오늘 무엇에 죽고, 어떻게 부활할 것인지 성찰해보는 부활성야가 되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희망>
1)
예수님 수난 당시에, 사도들과 신자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은 끔찍하고 생생한 현실이었고, 예수님의 부활은 비현실적인 일, 믿고 싶지만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분명히 예수님 혼자서 고독하게 겪으신 일이지만, 사도들과 신자들도 ‘죽음과도 같은’ 고통과 슬픔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죽음과 따로 떼어서 생각하면, 사도들과 신자들이 겪은 고통은, 수난의 고통을 직접 겪으신 예수님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사도들과 신자들이 겪은 고통과 슬픔은 예수님보다 더 큰 고통과 슬픔이었을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장례를 치를 때마다 드는 생각인데, 고인보다 유가족의 고통과 슬픔이 더 클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는 죽은 당사자가 어떤 고통과 슬픔을 겪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어떻든 남아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너무나도 큰 슬픔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사도들과 신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금방 그 슬픔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부활이 죽음보다 더 생생한 현실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다음에는 그들을 짓누르던 ‘큰 슬픔’에서 벗어나서 ‘큰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크게 슬퍼했던 그만큼 크게 기뻐하게 된 것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 그다지 슬퍼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부활 소식을 들었을 때 기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죽인 살인자들과 박해자들에게는 예수님의 부활 소식은 두려운(무서운) 소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살인자들의 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이고, 그자들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 자체를 부정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사순시기를 제대로 지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부활절이 그렇게 크게 기쁜 날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는 것이 별로 힘들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그래서 특별히 간절하게 주님께 의지하거나 간청할 일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부활절이 그렇게 크게 기쁜 날로 다가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2)
어떤 중병에 걸려서,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실에 들어가야 하는 환자 입장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만일에 그 수술이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는 수술이라면, 또 수술 도중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예고되어 있는 상황이라면, 수술실에 들어가는 환자는 죽음을 각오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곧 어느 정도 죽음을 체험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사실 마취에 빠져 있는 시간은 죽어 있는 시간과 별로 다르지도 않습니다.
(그것을 직접 겪어 본 사람들은 모두 공감할 것입니다.)
하여간에 환자가 죽을 각오를 하고서 수술실에 들어가는 것은 ‘희망’ 때문입니다.
잘 되기를 바라는 희망, 이대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희망...
(희망은 없고 절망 상태라면 수술 받기를 포기할 것입니다.)
그랬다가 수술이 끝나고 마취에서 깨어난 다음에, 수술도 성공적으로 끝났고, 병의 치료도 잘 될 것이고, 곧 건강을 되찾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면, 그것은 곧 부활을 체험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죽는 줄만 알았는데, 살아 있구나!” 라는 느낌은 다시 태어난 것 같은 느낌이기도 하고, 새로운 인생을 선물로 받은 것 같은 느낌이기도 하고, 한 번 더 제대로 살아볼 기회를 얻은 것 같은 느낌이기도 합니다.
부활 체험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3)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꼭 필요한 힘은 바로 ‘희망의 힘’입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를 바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그 힘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만일에 희망이 없다면 살아갈 이유도 힘도 없게 됩니다.
죽지 못해서 사는 경우는, 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죽어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죽음 너머에 영원한 생명이 있기를 바라는 희망” 때문에 하는 생활입니다.
그 희망의 근거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입니다.
‘부활 신앙’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는 신앙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우리 자신에게 필요한 ‘부활 신앙’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하기를 바라는 ‘희망의 신앙’입니다.
믿음에서 희망이 생기고, 우리는 그 희망이 주는 힘으로 살아갑니다.
순서를 바꿔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되기를 희망하니까, 즉 부활을 믿고 싶으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 우리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보라, 십자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모두 와서 경배하세”
“십자나무를 통하여 온 세상에 기쁨이 왔나이다.”
어제 수난예식 시 감격이 새롭게 떠오릅니다.
예수님 부활로 우리의 고백이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어제 성금요일 십자가의 길과 수난예식에는 영광스럽게도 민주화운동의 대부인 함세웅 신부님도 함께 해주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주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원의 꽃이, 기쁨의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다시 한번 외쳐보는 만세육창입니다.
“하느님 만세!”
“부활하신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성 요셉 수도원 만세!”
동시에 만개(滿開)하기 시작한 파스카의 청초한 봄꽃들이 파스카의 신비를, 파스카의 기쁨을, 파스카의 축제를 한껏 경축하고 있습니다.
4월 10일 나라의 명운이 달린 총선을 앞둔 길조(吉兆)입니다.
참 좋으신 하느님은 우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한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
무덤문 박차고, 죽음의 쇠사슬 끊어버리고, 장엄하게 부활시키셨습니다.
우리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마침내 하느님은 우리를 죄살이에서 자유인으로 해방시키셨습니다.
아, 이제 예수님 부활하셨으니 살맛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빛의 예식 시 “그리스도 우리의 빛!” 외침은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요!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는 참빛은 파스카의 예수님뿐입니다.
이어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활찬송 엑술뗏(Exsultet)은 또 얼마나 웅장한지요!
앞부분 일부만 인용합니다.
“용약하라 하늘나라 천사들의 무리
환호하라 하늘나라 신비
구원의 우렁찬 나팔소리
찬미하라 임금의 승리
땅도 기뻐하라
찬란한 광채 너를 비춘다
비춰진 땅아 깨달으러 세상 어둠 사라졌다
기뻐하라 자모신 성교회
위대한 광명으로 꾸며진 성교회
백성의 우렁찬 찬미소리 여기 들려온다.”
찬미와 기쁨의 빛으로 충만한 이 거룩한 밤입니다.
이 밤은 주님께서 세상을 창조한 밤이고,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땅에서 불러내신 밤이고,
광야에서 불기둥이 이스라엘을 비추던 밤이고,
이삭이 살아난 밤이고,
죽으셨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밤이며,
세례를 통해 많은 이가 거룩하게 되는 밤이며,
이밤의 말씀전례 중에 읽혀지는 구약의 일곱 말씀의 빛이 밤의 어둠을 환히 밝히는 밤입니다.
이처럼 믿는 이들의 밤은 얼마나 은혜로운지요!
저절로 터져 나오는 하느님 찬미, 하느님 감사입니다.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말씀의 빛이 우리에게는 참된 구원이 됩니다.
새삼 인간의 본질은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말씀은 생명이요 빛이요 영입니다.
부활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일치될수록 충만한 삶에 하느님의 자녀로서 참사람의 실현입니다.
말씀전례중 일곱 개 독서때 마다 이를 요약하는 후렴은 또 얼마나 은혜로운지요!
말씀의 빛만이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주님 보내시는 얼에 누리의 모습이 새롭게 되나이다!”
“주님, 저를 지켜 주소서. 주께 피신하는 이 몸이오이다!”
“주께 내 노래 하리니, 주는 영광스러이 승리하셨나이다!”
“주님, 저를 구하셨으니, 내 주님을 높이 기리려 하나이다!”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주님, 생명의 말씀이 주님께 있나이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내 영혼이 하느님을 그리워하나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늘 복음의 환호송입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
주님의 말씀의 우리 발의 등불, 우리 길을 비추는 빛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빛이, 말씀의 빛이 온누리의 어둠을, 우리 무지의 내면을 환히 밝힙니다.
세례받아 주님의 자녀로, 빛의 자녀로 탄생된 우리는 계속되는 파스카 미사은총으로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영원한 삶을 살게 된, 이미 지상에서 천국을 살게 된 우리의 복된 운명입니다.
떠오르는 태양과 동시에 우리 영혼의 태양으로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의 열린 무덤이 상징하는 바,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 세 여인과 더불어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 천사의 전갈입니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 나셨다.
그래서 여기 계시지 않는다.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너희는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이다.”
왜 부활하신 예수님을 어리석게도 무덤에서 찾는지요!
바로 오늘 지금 여기 갈릴래아 우리 삶의 현장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모신 곳은 어디나 빛으로 충만한 하늘나라이지만, 부활하신 주님 계시지 않는 곳은 어디나 무덤같은 어둔 세상입니다.
파스카의 예수님 계시기에 비로소 살맛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인생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처방도 파스카의 예수님뿐입니다.
이 거룩한 부활성야미사를 통한 부활하신 주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히 내리시기를 빕니다.
“주님, 저희가 파스카 성사로 힘을 얻고 비오니,
사랑의 성령을 부어 주시어,
우리 모두 그 사랑으로 한마음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십자가 없는 부활은 환상>
먼저 오늘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시는 세례자분들에게 축하를 드립니다.
세례는 두 가지 은총을 우리에게 줍니다.
하나는 지난날 내가 범했던 모든 잘못을 용서받는 은총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입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모두 형제와 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원래 세례는 정화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세례는 회개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교회는 세례를 하느님의 은총이 드러나는 성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정화와 회개의 상징이었던 세례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품격이 올라갔습니다.
교황님께서 우리 성당을 방문해 주면 우리 성당의 기쁨이 더 크듯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세례는 죄를 용서받는 성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세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성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부활 성야 미사의 독서와 복음은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셨고,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자식을 바치려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셨고,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만을 믿고 광야를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 바다를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를 거센 폭풍우에서 구해 주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십니다.
그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와 잘못으로 고난과 고통이 다가왔지만,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니 우리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유배지에서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향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이 되십니다.
부활 성야 독서와 복음은 ‘빈 무덤’에서 끝이 납니다.
그리고 천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덤에서는 만날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삶의 현장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선포하셨던 곳, 표징을 보여 주셨던 곳 갈릴래아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부활은 새로운 탄생이 아닙니다.
부활은 머나먼 곳으로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서는 것입니다.
부활은 슬픔에서 기쁨으로 일어서는 것입니다.
다시금 허리띠를 동여매고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이제 십자가는 더 이상 치욕과 굴욕의 상징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 구원의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12명의 제자가 시작한 하느님 나라 운동이 2000년 역사를 이어온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하나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초대교회의 많은 신자는 십자가를 받아들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부활’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던 예수님께서는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부활하였습니다.
아픈 사람을 고쳐주고, 마귀 들린 사람을 치유하고,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환상입니다.
씨를 뿌리지 않고 열매 맺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의 위기는 재물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조직이 잘못되어서가 아닙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하려는 욕심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외면하는 교회는 언제나 위기를 겪었습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고통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서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보내셔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교회는 언제나 가난한 이들의 아픔에 함께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부활의 삶입니다.
오늘 세례를 받으시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신 분들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알렐루야!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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