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 노희경
나는 한때
나 자신에 대한 지독한 보호본능에 시달렸다.
사랑을 할 땐 더 더욱이 그랬다.
사랑을 하면서도
나 자신이 빠져나갈 틈을
여지없이 만들었던 것이다.
가령, 죽도록 사랑한다거나,
영원히 사랑한다거나
미치도록 그립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내게 사랑은
쉽게 변질되는 방부제를 넣지 않은 빵과 같고,
계절처럼 반드시 퇴색하며,
늙은 노인의 하루처럼 지루했다.
책임질 수 없는 말은 하지 말자.
내가 한 말에 대한 책임 때문에
올가미를 쓸 수도 있다.
가볍게 하자, 가볍게.
보고는 싶지 라고 말하고,
지금은 사랑해 라고 말하고,
변할 수도 있다고
끊임없이 상대와 내게 주입시키자.
그래서 헤어질 땐 울고불고 말고
깔끔하게, 안녕.
나는 그게 옳은 줄 알았다.
그것이 상처받지 않고 상처주지 않는 일이라고 진정 믿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드는 생각.
너, 그리 살아 정말 행복 하느냐?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죽도록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만큼만 사랑했고,
영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당장 끝이 났다.
내가 미치도록 그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미치게 보고 싶어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사랑은
내가 먼저 다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버리지 않으면 채워지지 않는 물 잔과 같았다.
내가 아는 한 여자,
그 여잔 매번 사랑할 때마다 목숨을 걸었다.
처음엔 자신의 시간을 온통 그에게 내어주고,
그 다음엔 웃음을, 미래를, 몸을, 정신을 주었다.
나는 무모하다 생각했다.
그녀가 그렇게 모든 걸 내어주고 어찌 버틸까,
염려스러웠다.
그런데......
그렇게 저를 다 주고도 그녀는 쓰러지지 않고,
오늘도 해맑게 웃으며 연애를 한다.
나보다 충만하게.
그리고 내게 하는 말,
나를 버리니, 그가 오더라.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사랑을 얻었는데,
나는 나를 지키느라 나이만 먹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다.
20.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ⅰ)
진이는 피곤한 얼굴로 아파트 건물에서 나와 연신 하품을 하며 눈을 감은채로 차가 있는 곳 까지 위태롭게 걸었다. 혹여나 휘청거리다가 넘어질까 염려스러워, 나는 언제라도 녀석을 부축할 수 있는 거리에서 안절부절 못하며 그 뒤를 따랐다. 차 앞에 다다른 진이를 멈춰세우고, 차 문을 열어주자 녀석은 자리에 앉았다가, 무언가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 다시 엉덩이를 들어 의자를 손으로 더듬었다. 진이의 손에는 A4용지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나는 모르는 척 운전석에 앉아 핸들을 잡았다. 차가 출발하고, 얼마를 달리는 동안 녀석은 그것을 눈으로 읽더니 다짜고짜 운전중인 내 눈앞에 그것을 내밀었다. 종이에 시야가 가려져 앞이 보이지 않아, 녀석의 손을 조심스럽게 밀어내니 녀석이 대뜸 묻는다.
"이거, 뭐야."
종이, 라는 대답을 바라는 것 같지는 않고. 혹여 수필이나 소설로 오해했나.
"시."
"그건 나도 알아. 이걸 친히 프린트해서 내게 보여주는 이유가 뭐냔 말이야."
진이는 다시 종이를 내 앞에 내밀며 물었다. 또 시야가 가려진다. 위험한 행동이었다, 이러다가 정말 사고나지 싶을 정도로. 시계를 보니 약속된 시간까지는 제법 여유가 있었다. 갓길에 차를 멈춰 세우고, 고개를 돌려 녀석을 보았다. 녀석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이유는 나도 몰라."
애매한 내 대답에 녀석의 표정은 더욱 일그러졌다. 눈싸움이라도 하듯이 나를 뚫어지게 보던 진이는, 더이상 상대해 봤자 본인만 귀찮아 질거라 생각했는지 이내 고개를 창 쪽으로 휙 돌려버렸다. 턱을 괴고, 창 너머를 바라보는 녀석의 한쪽 손에는 여전히 종이가 들려 있었다. 나는 그 종이에 프린트된 글을 빤히 쳐다보다가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그냥. 그냥, 그 시를 읽는데 니 생각이 났어. 그것 뿐이야."
'노희경'이란 시인의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라는 시. 이 시를 읽자 마자, 나는 진이의 얼굴이 떠오름과 동시에 가슴이 짓무르듯이 아려서 밤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날이 밝을 때 까지 흐릿해진 눈으로 모니터를 보며 시를 읽고 또 읽었다. 시 구절을 다 욀 때 까지 되뇌이면서.
사실 나는 시를 공부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냥 인터넷 검색을 이용해서 사람들이 좋다 하는 시를 읽는게 고작인지라 노희경이란 시인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알 것 같았다. 사랑에 상처 받은 사람이란 거. 언젠가, 그것이 혹 그 사람의 첫 사랑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언젠가 한번쯤은 사랑에 크게 다친 적 있을 거라고. 그래서 사랑을 경계하고, 사랑과 그 사랑이 자신에게 가져올 상처로부터 자신을 지키려 애썼던 거라고.
지금의 진이처럼.
차가 출발함과 동시에 나는 혼잣말처럼, 아주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진이는 듣지 못한걸까, 아무런 말이 없었다. 녀석은 피곤한지 시트를 뒤로 젖혀 누웠다. 눈을 감은 채, 녀석은 특유의 그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 할 일 없냐?"
"많아."
"그럼 이딴 거 읽을 시간에 일을 하든가, 하다못해 잠이라도 한 숨 더 자."
녀석은 손을 뻗어 콘솔박스에 종이를 구기듯 쳐 넣었다. 기분이 언짢은 것인가싶어 힐끗 눈치를 보았는데, 다행히도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신호등에 빨간 불이 켜졌다. 차를 멈춰 세우고 옆자리에 누운 진이를 쳐다보았다. 속눈썹이 조금씩 떨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잠을 자는 것 같진 않았다. 몸을 돌려 뒷좌석으로 손을 뻗어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는 갈색 담요를 집어다가 웅크리고 있는 진이 위에 덮어주며 앞을 살폈다. 자동차로 빽빽하게 차 있는 도로는 뚫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신호를 확인하고서 다시 진이에게로 눈을 돌렸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한번 쓸어주고 싶단 생각도 들었으나, 불쾌해 할 것 같아 그만두었다.
"사랑이 두려워?"
가타부타 이렇다할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서도, 궁금한 것은 사실이었다. 왜 자꾸 나를 밀어내는지. 사랑이 두렵고 무서운건지, 아니면 사랑이란 거 자체에 흥미가 없어진건지, 그것도 아니면.....
"아님, 이젠 사랑이란거 자체가 싫어졌어?"
"......................"
"그것도 아니면... 아직도 민우 사랑하니?"
아직 가슴에 이민우가 남아 있는건지.
"전진! 미쳤어?"
녀석은 나를 쏘아보았다. 이민우의 이름이 나오기가 무섭게 몸을 일으킨 녀석은 순식간에 핸들을 쥐더니, 무지막지하게 그것을 돌려대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에 나는 당황했고, 북적이는 도로 동서남북에서는 클락션 소리가 쉬잖고 들려왔다. 힘을 주어 녀석의 손을 핸들에서 떼어내고, 깜빡이를 켜 주위 차들에게 미안하다는 뜻을 전했다. 내 힘에 밀려난 진이는 여전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녀석은 시트를 다시 원위치로 올리고, 등을 기대어 앉더니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갑을 꺼내었다.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 녀석은 차의 창문을 죄다 활짝 열었다. 싸늘한 바람에 담배연기가 흩어졌다. 후욱, 하고 연기를 길게 뿜어낸 녀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니가 날 좋아하든, 사랑하든, 싫어하든, 증오하든 이젠 상관 안 해."
".................."
"니 마음이니까, 니가 하고싶은 대로 해. 근데,"
그러니까, 사람이란게 참 간사한 것이다. 나만 봐도 그렇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전진'을 사랑하는 '에릭'만 봐도 그렇다. 처음에는 그저 뒤에서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슬슬 녀석의 옆자리가 탐이 났었다. 그래서 한발짝 한발짝 녀석의 옆자리로 다가갔었다. 그러다가, 내가 자꾸만 자신의 옆자리로 다가오는 것을 알고 녀석이 나를 밀어내기 시작했을 때엔, 그저, 내가 알아서 일정 거리를 유지할테니 녀석이 더이상 나를 밀어내지만 않았으면 했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밀어내지 않을테니 ㅡ그러니까, 속뜻은 아마, 아예 나를 신경쓰지도 건드리지도 않을테니, 하는 얘기일 것이다.ㅡ 알아서 해라, 하는 말을 들으니 또 알 수 없는 서운함이 몰려 오는 것이다. 내가 바라는 대로 밀어내지 않겠다는데 또 뭐가 부족해 나는 이리도 서운함을 느낀단 말인가. 일말의 관심이라도 보여주길 바랐나. 일말의 호감이라도 느껴주길 바랐던 것이냐는 말이다.
"................ 주제 넘게 나서는 건 용납 못해."
이런 말 들으면, 금새, '이렇게 상처 주면서 날 밀어내지만 말지...' 하고 다시 소박한 바람을 가질 소심한 인간이면서.
왜 자꾸 녀석이 나를 밀어내는지, 이제야 제대로 알 것 같았다. 녀석은 아직 민우를 사랑하는 거다. 아직도 그 사랑에 상처를 받고 있는 거다. 그래서 사랑이 두려운 거다. 그리고 자신에게 상처와 두려움만을 안겨주는 사랑이란거 자체가 싫어진거다. 사랑이란 것 자체가 다 그렇게 아픈 것은 아닌데, 녀석은 지레 겁부터 먹고 피하는 거다. 아직 심장에 박혀있는 이민우 때문에.
그 이민우를 나는 어떻게 꺼내야 하나. 그 이민우의 자리를 나는 어떻게 메워줘야 하나.
"음정 너무 불안했어."
"............"
"춤도 세 군데나 틀렸고."
"..........."
"요즘 인터넷에 말들이 많아. 니 실력 가지고."
무대에서 내려온 진이는 말이 없었다. 얼굴에는 지친 표정이 역력했다. 리허설때도 이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외려 본방 무대에선 실수 투성이었다. 음정이 유독 불안했고, 춤을 격렬하게 춘 것도 아니었는데 호흡이 가빠 헉헉거렸으며, 가장 큰 무기인 '춤'은 실수 투성이였다. 생방송 무대였으니 이미 무를 수도 없다지만,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또 인터넷에 비방글이 넘쳐나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진이는 인터넷을 잘 하지 않는 편이기에 그러한 비방글들을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듯 했으나, 나로서는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네티즌의 평가에 따라 연예인들의 가치가 오르내리는 것이 현실이고, 무엇보다도, 혹시나 진이가 우연히라도 비방글을 보게 된다면 상처받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닌척, 강한척 혼자 다 하면서도 실은 누구보다 마음이 여린 아이니까.
내가 건넨 생수병을 받아 들이키며, 녀석은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물을 반쯤 비우고, 작은 수건으로 땀을 닦아낸 녀석이 또 금새 자리에서 일어섰다. 녀석이 내게 손수건과 생수병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들고 녀석의 뒤를 따르는데, 민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진이, 다음 스케줄 없지.-
무척이나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우습게도 나는 민우의 전화를 받으며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이유는 나도 잘 모르지만.
"밤에 라디오 게스트 하나 있어."
-잠깐 회사좀 들러. 진이한테 할 말 있으니까.-
"....... 무슨 할 말?"
-방금 무대 봤어.-
"그래."
내가 전화를 받는 동안, 진이는 자판기에서 콜라를 하나 뽑아 마시고 있었다. 숨도 쉬지 않고 콜라를 벌컥벌컥 들이키던 녀석은, 내가 전화를 끊자 콜라를 마시다 말고 나를 보았다. 트림이 올라오는지 녀석은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도로 쑤셔넣었다.
"배고픈거 아니면, 저녁은 나중에 먹고 회사 먼저 들르자. 민우가 할 말 있다고 라디오 스케줄 가기 전에 보쟀어."
진이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콜라를 마저 들이켰다. 빈 깡통을 쓰레기통에 던지고서, 녀석은 뚜벅뚜벅 저만치 앞서 걸었다. 차에 올라타자 마자 시트를 젖히고 누운 진이의 얼굴은 매우 고단해 보였다. 히터를 적당히 틀고, 담요를 덮어주고, 조용한 음악을 작게 틀어주었다. 진이는 금방 색색거리며 잠들었다. 나는 오디오를 껐다. 그리고 조용한 차 안에서 유독 크게 들리는 녀석의 숨소리를 들었다.
민우가 진이를 얼마나 붙잡고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라디오 가기 전에 밥을 먹이려면 최대한 시간을 아껴야 했다. 진이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속력을 내어 회사로 향했다. 회사 근처에 도착했을 때 진이는 잠에서 깼다. 녀석은 기지개도 켜지 않고서 시트만 원위치로 올린다음 어두운 창밖을 보았다.
"너 방금 무대 선 거 봤대. 혼날 각오 하고 들어가."
"..............."
"배 안 고프지?"
진이가 성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베이터가 멈춰서고 문이 열렸다. 민우의 방을 향해 걷는 녀석의 어깨는 축 쳐져 있었다. 민우의 방 앞에서, 진이는 한참을 그냥 서 있었다. 나는 그런 진이의 뒤에서 말 없이 녀석을 지켜보았다. 후욱, 하고 심호흡을 한번 한 뒤에, 드디어 진이가 방 문을 열었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살펴보던 민우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진이가 사무실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섰다. 나는 여전히 문 밖에 있었다.
"밖에 있을게."
"아냐, 그럴 필요 없어. 너한테도 할 말 있고. 일단 앉자."
문을 닫으려던 나를 보며 민우는 손을 저었다. 민우가 자리에 앉고, 진이가 자리에 앉았다. 멈칫거리며 방으로 들어온 나도 덩달아 소파에 앉았다. 진이는 초점없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 민우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전진, 너 요즘 갈수록 라이브 엉망이던데. 춤은 또 왜 그리 성의없이 춰? 그나마도 무대에서 몇 번씩이나 틀리고."
"............."
"이번 뿐만이 아니야. 최근 일주일 동안 모든 음악 프로그램에서 그랬어. 도대체 왜 그래?"
"......... 몰라서 물어?"
"뭐?"
진이를 질타하던 민우가 녀석의 반문에 놀란듯, 멈칫거리며 되물었다. 진이의 눈빛은 이미 날카로울 대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자리한 주먹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핏줄이 도드라졌고, 무엇보다도, 나는 보았다. 녀석의 속눈썹이 미약하게나마 떨리는 것을.
"몰라서 묻냐고!"
"........ 전진. 공과 사는 구분하자.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너랑 나는 형 동생 사이가 아니라 사장과 가수 사이야."
"형은 잘나서 그게 되는지 몰라도, 난 그거 안 돼."
"전진."
"형은! 형은 날 이렇듯 아무렇지 않게 볼 수 있겠지만 나는 아니야. 알아?!"
진이는 점점 더 크게 소리를 질렀고, 민우는 더 이상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나는 진이를 보고 있었고, 진이는 민우를 보고 있었고, 민우는 허공을 보고 있었다. 셋이서 각기 다 다른 곳을 보는 동안에도 시계의 초침소리는 계속해서 들렸다. 진이는 후우, 하고 호흡을 고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지금 이렇게 스케줄 펑크 안 내고 버티는 것 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 더이상 내게 바라지 마."
"너 정말..."
"그리고 계획보다 일찍 활동 접고 싶어. 그 얘긴 다시 하자. 지금은 기분 엿같아서 못 하겠다. 먼저 갈게. 에릭, 따라 나와."
망설임 없이 녀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쾅, 하고 큰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민우에게서 등을 돌리기 전에, 나는 전부터 벼르던 말을 드디어 꺼냈다.
".......... 당분간은 무리하게 스케줄 잡지 않을 생각이야."
"니가 고생이다."
"이민우. 내가 전에도 한번 말했었지. 진이 아프게 하지 말라고. 진이 아프게 하면 내가 너 용서하지 못할 것 같다고."
"......... 기억 나."
"진이 들쑤시지 마. 지금도 나는 충분히 니가 미우니까."
".........................."
"진이, 아직 너 정리 못했어. 아직도 너 사랑하고 있어. 너에 대한 그 사랑 대문에, 너 때문에... 사랑이라면 겁부터 내. 사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랑이란 것 자체를 싫어하게 되어버린 불쌍한 애야, 진이."
".................."
"너, 진이 나무랄 자격 없어."
마음 같아서야 더한 말도 마구 내뱉고 싶었지만, 끓어오르는 질투와 화를 겨우 억누르며 민우를 등지고 돌아섰다. 막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댔을 때였다. 민우가 나지막히 내 이름을 불렀고, 나는 그대로 멈춰섰다.
"에릭."
"응."
"전부터 묻고 싶었던 건데."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무척이나 크게 들렸다.
"진이 사랑하냐."
툭. 손잡이에 올려둔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 민우를 보았다. 민우는 나를 보고 있었다. 뭐랄까. 기분이 참 요상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 '나 그를 사랑하노라'고 말하기가 왜 이리 어려운지. 민우의 저 질문이 왜 내 귀에는 자만에 찬 목소리로 들렸던 걸까. 흡사 조롱당하는 기분이었다. '오직 나만 바라보고 있는 아인데, 그 아이를 니가 사랑한다는 거냐?'고 묻는 것 같았다. 물론, 내 내장이 꼬일대로 꼬여있어 그렇게 들렸다는 것은 잘 안다. 그렇지만서도 스스로에게 내가 자꾸만 초라해보이고 비참해보이는건 어쩔 수가 없었다.
"............. 응. 나 진이 사랑해."
어렵사리 입을 떼었다. 민우는 잠시 놀라는 듯도 싶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던 걸까, 혹시.
".... 처음부터?"
"그래. 처음 봤을 때 부터."
"그래서... 가수고 뭐고 때려치고 매니저 하겠다 나선거고?"
"그래."
"하..."
민우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꿈의 실현이라던가 하는 허울 좋은 말은 제껴두고, 현실적으로 민우는 사업가다. 돈을 들였으면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연습생에게 돈을 투자했으면 그 연습생이 좋은 가수로 성장해서 자신이 투자한 것, 그 이상의 이익을 가져오기 바라는 것은 이 세상 모든 연예 기획자들의 공통된 바람인 것이다.
처음, 데뷔 앨범을 구상하는 단계에서 내가 연습생을 그만 두고 매니저 일을 배우겠다 했을 때, 민우는 계속해서 내게 이유를 물었고 나는 그런 그의 물음에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냥. 그냥이라고 했다. 그냥, 그러고 싶다고. 그냥, 매니저 일을 하고 싶다고. 나는 민우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동완이까지 동원해 나를 붙잡고 몇 날 몇 일을 설득하던 민우였다. 그런데 이제와 그 이유가 전진때문이었다니, 기막힐 만도 했다. 나에 대한 민우의 기대는 둘째치더라도, 내게 들인 시간과 돈 때문이라도 말이다.
"에릭. 매니저 일 그만두고, 다시 연습해. 연습해서, 앨범 내."
"이제 관심 없어, 가수 같은거."
"........ 진심이냐?"
민우는 단호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나 역시도 단호한 말투로 응했지만 이어지는 민우의 반문에는 쉽사리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거짓말을 두 번씩이나 하는 것은 어렵다.
"진이 첫 앨범 내고 쇼케이스 가질 때, 니 눈빛 본 적 있어."
"........."
"무언갈 간절히 갈구하는 눈빛. 그 무언가는 말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지."
"그 땐...."
"그 때 뿐만이 아니야. 무대에 선 진이를 보는 니 눈빛은 한결같았어."
"............"
"부러움과 아쉬움이 뒤엉켜 있었지. 너 아직도 음악 하고싶잖냐. 꿈 못 버렸잖냐고."
더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민우가 말한 것 모두가 사실이었으니까.
어려서부터 음악이 참 좋았다. 그 중에서도 유독 힙합을 들으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희열을 느끼곤 했다. 적나라한 가사들도 좋았고, 그 속에 담긴 언어유희도 좋았다. 음울하면서도 결코 질리지 않는 멜로디들도 좋았다. 학창시절엔, 공부를 하면서도 늘 음악이란 것을 동경했었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마친 뒤에는 미련없이 대학을 포기하고서 이리저리 오디션을 보러 다녔었다. 그러나 번번이 퇴짜였다. 동양인이 힙합 음악을 한다는 것에 대한 미국인들의 편견 때문이었다. 셀 수 없는 고배를 마신 끝에 한국행을 결정했다. 그리고 한국에 오자 마자 나는 말로만 듣던 길거리 캐스팅으로 기회를 잡아 내가 그토록 원하던 음악을 하면서 꿈을 키웠다. 그 꿈은 곧 이뤄질 듯 했었다.
진이를 만나면서,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진이를 사랑하면서부터 나는 내 꿈을 포기했다. 삶의 유일무이한 목표는 음악에서 전진으로 바뀌었고,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는 단 한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렇겠지.
물론, 진이가 원망스러웠던 적도 있었다. 사랑이란게 늘상 주고받을 수 있는건 아니라는 것 쯤은 알았지만, 적어도 나를 알아주길 바랬었으니까. 이토록 애닯은 사랑을 위해 내 꿈을 접은 건 아니었으니까.
나도 녀석처럼 열정이 가득한 무대 위에서 관중의 환호를 듣고 싶었고, 반짝거리는 조명을 받으며 그 위를 누비고 싶었다. 녀석을 사랑함에 있어 후회는 없지만, 가슴속 한켠에 자리잡은 그 욕심이 가끔 날 쥐고 흔들 때가 있다, 요즘처럼. 최근 진이의 그 성의없고 의욕없는 무대를 볼 때마다 나는, 접어두었던 가수에 대한 욕심이 되살아 나곤 하는 것이었다.
녀석의 손에 늘상 들려 있던 마이크를 나도 한번쯤은 잡아보고 싶다, 하고.
"이민우. 너 사랑 해 본적 있어?"
"...................."
"니가 사랑이란 걸 해 보면 알게 될꺼야."
"............."
"사랑보다 더 소중한 가치는 없다는 걸."
...... 그렇지만 어쩌겠나, 지금의 나는 음악보다 전진을 더 사랑하는 것을.
민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문을 닫고 방을 나섰다. 조금 혼란스러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흔들리지는 않았다. 진이에 대한 내 사랑이 얼마나 확고하고 소중한 것인가를 다시한번 확인한 셈이었다.
"사랑 자체가 괴로운 건 아니야."
진이는 차 안에서 음악을 듣고 있었다. 내가 차에 타고,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킬 때 까지도 진이는 내게 왜 늦었냐며 화를 낸다거나 늦은 이유에 대해 묻거나 않았다. 민우와의 말이 길어지는 바람에 저녁을 먹일 시간이 없어 별 수 없이 그냥 방송국으로 향했는데, 진이는 이것에 대한 불평 또한 하지 않았다. 녀석은 눈을 감지도 않았고, 창을 내다 보지도 않았다. 녀석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아니, 그것 보다도 녀석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잔뜩 가라앉은 내 목소리는 음악소리에 묻혀 내 귀에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았는데, 내 말소리가 들렸는지 녀석은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를 쳐다보았다. 의외의 반응에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니가 하고 있는 사랑이 괴로운 것 뿐이야. 혹시 알아? 다음 사랑은 지금 아팠던 것을 다 만회하고도 남을 만큼 행복할지."
"............."
"해 보란 말이야, 그러니까. 지금 그 사랑이 괴롭다고 해서 어, 사랑은 원래 이렇게 아픈 건가봐, 하고 지레 겁먹어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지 말고, 이번 사랑은 많이 아프고 힘들었으니까 다음에는 이번에 누리지 못한 행복 만큼 더 행복한 사랑을 해야겠다, 하고 생각하란 말이야."
무슨 용기로 녀석에게 이런 말을 했는지는 모른다. 그냥, 아주 오래 전부터 녀석에게 하고싶었던 말이 나도 모르게 입에서 술술 나왔다. 진이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내가 말을 마치고 녀석을 보았을 때, 녀석은 아랫입술을 잘근거리고 있었다. 나는 앞과 진이를 번갈아 보느라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던 진이가 카 오디오를 껐다. 방송국까지 이제 10분쯤 남았을까.
".......... 에릭. 그래서, 너는 지금 행복해?"
"응."
참으로 회의적인 말투였다. 내가 고개를 끄덕여도 믿지 않을 것 같이. 그러나 나는 망설임 없이 단호히 답했다. 진이는 내 대답을 듣고서 또 아무런 말도 없었다.
이제 방송국 까지는 약 5분.
"행복해. 니 뒤에서 뒷모습만 바라보는 것도, 가끔이라도 니가 뒤돌아봐 주지는 않을까 싶어 마냥 기다리는 것도, 니가 힘들때 제일 가까이에 있어줄 사람이 나라는 사실 만으로도. 행복해. 그래서 계속 하고싶어, 이 사랑."
"......................."
"내가 준 시 안 읽어봤어? 너는 사랑을 하지 않아 유죄잖아. 죄가 있어서 그렇게 마음이 아프고 불행하고 힘이 드는거야. 사랑을 하고있는 나는 죄가 없으니까 아프지도 않고 행복한거고."
마침맞게도 내가 말을 끝내자마자 차가 방송국 정문 앞에 멈춰 섰다. 진이는 먼저 차에서 내렸지만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내가 주차를 마칠 때 까지 기다린 녀석은 내가 차에서 내리자 그제서 건물쪽으로 몸을 틀었다.
"진아."
재빨리 차에서 내려 녀석을 불렀다. 다급한 내 부름에, 녀석이 걸음을 멈추고 섰다. 나는 숨을 한번 고르고서, 그에게 간신히 들릴만큼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사랑 해. 그 상대가 꼭 내가 아니라도 좋아. 그냥, 닫혔던 마음의 문을 열고 다시 사랑 해봐. 나처럼 행복해 질 수 있게."
진이는 긍정도, 부정도,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 내 말이 끝나고 녀석은 잠시 멈춰 서 있었다. 나는 그런 녀석을 뒤에서 그저 가만히 지켜보았다. 녀석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나는 허전한 가슴을 담배연기로 채웠다. 하고 싶은 말을 너무 오래도록 가슴에 담아 두어서일까. 막상 그 말을 전하고 나니 가슴에 큰 구멍이 난 것처럼 허전했다. 그것을 메우려 담배연기를 불어넣고, 불어넣어도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자꾸만, 자꾸만 가슴이 허전했다.
라디오 스케줄을 마치고, 진이는 차에 타자마자 시트를 젖히고 눈을 감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잠을 자지 않는 것 만은 확실했다. 녀석의 집 앞에 도착하고, 차를 멈춰 세운 후에도 녀석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진득하게 녀석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30분쯤 지났을까. 별안간 시트를 세우고 벌떡 일어난 녀석이, 콘솔박스 안에 구기듯 쑤셔박았던 A4용지 ㅡ아침에 내가 녀석 자리에 놓아 둔, 시가 프린트 되어 있는 종이ㅡ 를 꺼내었다.
".......... 이거."
구겨진 부분을 손으로 대충 펴더니, 녀석이 그것을 내 앞으로 쑤욱 내밀었다. 나는 녀석을 쳐다보았다.
"가져간다."
뭐라 답하기도 전에 녀석은 종이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 총총걸음으로 아파트 건물을 향하는 녀석의 뒷모습이 유난히 예뻤다.
*****
"자, 받아. 정보 수집좀 해 봤다. 이 중에 쓸만한 애만 골라봐. 모레부터 본격적으로 작업 들어갈 거니까."
"그래. 내일까지 넘겨 줄게."
민우는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내가 건네는 서류를 받았다. 오른손엔 여전히 펜이 쥐어져 있었다. 내게서 서류를 건네받는 녀석의 손이 왜 이렇게 허전한가 싶어 자세히 봤더니,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네번째 손가락에서 반짝이던 반지가 사라지고 없었다. 이상하다 싶어 다른 손가락을 봐도, 녀석의 오른손을 봐도 반지는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빠안 쳐다보는 내 눈빛이 느껴졌던 것인지, 민우는 서류를 보다 말고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왜."
"어쨌냐?"
"뭘?"
"반지."
순간적으로 민우의 눈빛이 흔들렸다. 녀석은 재빨리 아닌척 고개를 숙여 서류를 보았지만 속칭 '불알친구'인 내가 녀석의 그 눈빛을 놓칠 리가 없었다.
"사람 염장 지를 땐 언제고, 그새 어쨌어. 잃어버렸냐?"
".......... 버렸다."
녀석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버리다니? 왜?"
"그만 하기로 했으니까."
"뭐를. 연애를?"
"그래."
나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녀석이 아주 덤덤한 투로 말했다. 사각사각, 하고 만년필 펜촉이 종이에 닿는 소리가 났다. 녀석은 사인을 마치고 다른 서류 파일을 집어들었다. 녀석은 지금 일에 열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질문을 피하기 위해 열심인 척 하는 것이다. 어떻게 확신하냐 묻는다면, 글쎄. 죽마고우의 감, 정도로 해두자.
"나좀 봐."
"바빠. 이거 내일 오전까지 봐야돼."
나는 녀석의 손목을 잡았고, 녀석은 다른 손으로 내게 잡힌 팔을 풀어냈다. 그제야 녀석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
"너, 그거 내일 아침부터 보기 시작해도 충분히 다 보잖아."
".............."
"얘기좀 해."
결국 녀석이 책상 앞에서 일어섰다. 민우가 자리를 권하기도 전에 나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민우는 무테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새빨개진 눈은 비단 과도한 업무 때문만은 아닌듯 했다. 적어도 일할때 저렇게 어두운 얼굴을 하지는 않으니까.
"나, 니가 반지끼고 있는 모습 처음 봤어. 악세사리라면 질색을 하던 놈이 난데없이 반지를 끼고 있길래 놀라서 뭐냐고 물어봤더니 니가 커플링이라고 했지. 그래서 더 놀랐어. 이날 입때껏 연애엔 눈꼽만큼도 관심 없던 놈이었으니까, 너. 근데 너 뭐라고 했어. 너랑 연애하는 사람이 우리 회사 연습생에 그것도 모자라 무려 남자라고 했지. 공과 사 뒤섞이는걸 제일 싫어하는 녀석이, 자기 조카뻘 되는 연습생 애랑 연애한다는 것도 놀라웠는데 게다가 남자라는 말 들었을 때, 내 머릿속이 어땠을 것 같애?"
"......... 이게 미쳤나, 뭐 그런?"
"아니. 이 놈 진짜 사랑하나보다. 이거 진짜구나. 그랬어."
민우는 아무런 말도 않았다. 녀석은 왼손 넷째 손가락을 오른손으로 문질거렸다. 반지를 뺀 지 며칠 된 모양이었다, 반지 자욱이 남아있지 않은 것을 보니.
"무엇보다도 니 표정이 정말 행복해 보였으니까. 나 니가 그런 표정 짓고 있는거 첨 봤거든."
"...... 그랬나."
"그러니까, 말 해."
"뭘."
"뭐가 문젠거야? 왜 헤어진 거냐구."
녀석은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위아래로 두어번 문질렀다. 녀석의 퍼석퍼석한 피부와 메마른 손바닥이 마찰될때마다 버석거리는 소리가 났다. 겨울이라 건조해서 그런걸까. 녀석의 피부는 유난히도 거칠어보였다.
"애초에 결정된 일이었다."
애초에 결정된 일이었다니. 무슨 말인지 선뜻 이해할 수가 없었다. 녀석은 그런 나를 보며 힘없이 웃었다.
"........... 계약연애였으니까."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아니, 잘못 들었을 거라 생각했다. 며칠동안 이래저래 밤잠을 설쳤더니 가는귀가 먹은 줄 알았다. 적어도 내가 아는 이민우의 입에서 나올 단어는 아니었으니까.
"야, 내가 아까 너한테 넘겨준 자료 만드느라 며칠 밤을 샜더니 귀가 침침하다. 뭐라고? 뭐였다고?"
"계약. 계약 연애였다고. 한마디로, 일의 연장이었다고."
"이런 미친놈...."
일에 미친 놈이란 건 안다. 워낙 하고싶어 했던 일이고,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인데다 자존심은 더럽게 세서 지는 건 죽어도 눈뜨고 못 보는 성질이니까. 그놈의 일에 미쳐서 연애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눈에 뵈지 않는 녀석이란 것도 안다. 그리고 목표한 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한다는 것도 안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무리 일이 중요하고 일에 미쳤기로소니 계약연애가 말이 되는가. 나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것의 시비나 호불호를 떠나 감정이란 것을 일에 이용할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일에 미치고 성공을 갈구해도 지킬 건 지키는 녀석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내 입에서 나온 욕을 듣고도 민우의 표정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녀석은 후우, 하고 한숨을 한번 쉬더니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 녀석, 노래는 정말 잘 부르는데 무언가 하나가 부족하다고 생각했어. 그게 감정이더군. 노래에 아무런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어. 물어보니 연애경험 전무라는데, 이거 가짜 연애를 시켜서라도 알려줘야 겠다고 생각했다. 가요의 대부분이 사랑노래니까, 사랑 경험 혹은 연애 경험을 통해서 노래에 감정만 실어준다면 정말 완벽한 가수가 되겠다 생각했었지. 그래서 내가 하자고 했어, 그 연애라는거."
과연 이민우 다운 논리였다. 그러니까 이민우에게는 사랑이나 연애도, 일에 쓰이는 '도구'에 불과한 것이었다. 누구는 그 사랑을 위해 가족도 버리고 나라도 버리고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버리는데, 누구는 그 숭고한 사랑을 이토록 쉬이 여기고 있다는 것에, 나는 부아가 치밀었다. 내가 '사랑을 위해 가족이나 나라 혹은 목숨까지도 버리는 사람'은 결코 아니었으나, 적어도 나는 이민우가 생각하고 있는것처럼 사랑을 그리 쉬이 생각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데뷔도 안 했는데 벌써 끝낸 이유는 뭐야. 기왕 시작한거, 효과 보려면 아직 더 해야 하지 않냐?"
"자신 없어서."
"......... 무슨."
"계약 연애로 끝낼 자신이 없어서. 그래서 그만 하자고 했다. 내가 정말로 녀석을 사랑하게 될까봐 두려워서."
잔뜩 비꼬는 내 말투에 민우는 아주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기가 차저 꼭지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계약연애라는, 말도 안되는 짓을 벌인 것으로도 모자라 스스로 벌인 그 바보짓이 가져올 사랑이 두려웠단다. 이런 병신새끼를 봤나, 하고 나는 당장이라도 녀석에게 욕지거리를 퍼부어 주고 싶었으나, 아직 민우의 말이 끝나지 않았기에 좀더 들어보기로 했다.
"필교가 내게 사랑한다고 했다. 포기하지 못 하겠다고까지 했어."
"하...."
"그 말을 듣는데,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나 또한 그 녀석을 놓아주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만 하자고 했어."
"고작 그거냐? 두려워서?"
또다시 욱, 하고 차오르는 성질을 꾹꾹 눌러 참으며 물었더니 정말 황당하게도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가 없어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내 친구 이민우가 맞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정말이지, 내가 알고있는 내 친구 이민우는 이렇게 한심한 말을 할 인간이 아니었다. 이따위 비겁한 행동을 할 작자가 아니란 말이다. 더불어 나 역시도, 피붙이와 다름없는 친구녀석에게 이렇게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성이 나기는 처음이었다.
"당시엔 그것이 현명한 결정이었다 생각했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자기위안 하지 말고."
"파행임을 알면서도 계속 할 수는 없었다."
녀석 스스로도 알고 있을 것이다. 고작 이따위의 되도 않는 변명을 늘어놓는 자신이 지금 얼마나 초라해 보일것인가를.
"하나만 묻자."
"그래."
"사랑하냐? 이미 사랑하게 되어 버린거냐, 아니면 녀석을 사랑할 것만 같은거냐."
"..............."
"지금. 사랑하고 있냐."
민우의 동공이 흔들렸다. 오늘 김동완 힘든 구경 여러번 한다 싶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 녀석의 눈빛이 흔들린 것은 이번이 평생 처음이다. 시공간을 불문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녀석의 눈빛이 흔들리는 일만은 없었다. 언제나 이성적이고 냉철한 태도와 평정심. 그것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눈빛뿐이다. 그것은 내가 인간적으로 녀석을 존경하는 이유중의 하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녀석의 눈빛을 흔든 것이다, 그 정필교란 아이가.
"........... 내가 사랑이란 감정을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니라면..."
"....."
"아마..... 그런 것 같다."
병신, 하고 욕지거리가 턱끝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그 욕을 뱉어내기엔 녀석이 너무 아픈 표정을 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저 나약한 표정. 표정을 보아하니 최소한, 녀석이 자신의 감정을 잘못 알아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구나 싶었다.
"사랑하는데, 그 사랑이 가져올 결과가 두렵다, 라..."
"............."
"나는 지금까지, 니가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남자라고 생각했거든?"
민우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ㅡ사실 그게 언제인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워낙 어릴 적 일인지라.ㅡ 지금까지, 나는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사람이 '이민우'인줄 알았다. 아니, 이민우라 확신하고 살아왔었다. 이것은 성별을 떠나, 친구라는 관계를 떠나 인간이 인간에게 느끼는 일종의 '동경'이었다. 어떤 일정 분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간 이민우 그 자체에 나는 경외심을 가져왔었다.
그런데 그런 이민우가, 오늘 내 앞에서 이렇게 초라한 겁쟁이가 되어 안장있는 것이다. 평생을 가도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이민우에 대한 동경은 산산히 조각나버렸다.
"울 아부지 보다도 니가 더 멋있다고 생각했었는데..."
"..............."
"사람 보는 눈 하난 자신 있었는데, 내가 친구 보는 눈이 이리도 없다는 걸 서른 넷 쳐먹을 때 까지도 몰랐네. 니가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남자라고 생각했던거, 오늘부로 취소다."
민우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나는 그런 녀석에게 답답함과 더불어 알 수 없는 배신감까지도 느꼈다. 크게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사실 따지고보면 내가 녀석에게 배신감을 느껴야 할 이유따윈 없었다. 녀석이 내게 자신을 동경해 달라고 한 적도 없었고, 녀석에 대한 경외는 어디까지나 내 자의적인 것이었으니까. 내 머릿속의 이민우와 현실의 이민우가 다르다 해서 녀석이 날 배신했다 말할 수 있는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씁쓸함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너 지금, 세상에서 제일 비겁해 보이고 초라해 보이는거 아냐?"
"...................."
"임마, 그거 죄야. 가슴이 원하는 사랑을 머리로 막는 거."
"..................."
"이런 말도 못 들어봤냐?"
다른 곳으로 시선을 피하던 녀석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언젠가 스치듯 들었던 말을 기억해내어 녀석에게 읊어주었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안녕하세요. 조백입니다.
싱어 19편을 올린 후로 한달이 훨씬 지났네요. 잘 지내셨는지요.
일단 죄송하단 말부터 드리겠습니다. 작가의 의무를 망각한 저는 참 못된 글쟁입니다.
소식이 없는 동안, 제게 메일과 쪽지로 안부를 물어 주시고, 싱어를 독촉해 주신 고마운 분들이 계셨습니다. 이 자릴 빌어 감사하단 말씀 드립니다.
이렇게 늦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해명해드리겠습니다. 변명이 듣기 싫다면 넘기셔도 됩니다.
본업 외에, 가끔씩 따로 일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번에도 아는 분과 같이 일을 하나 맡게 되었는데 저는 아직 경험도 별로 없고 실력도 부족해서, 말하자면, 배우면서 일하는 입장이라 이번 일이 굉장히 버거웠습니다.
싱어 19편을 올리기 며칠 전부터 시작한 일이었는데 지지난주 일요일(16일) 새벽에 마무리가 됐습니다.
생각보다 일이 길어지겠다 싶어 소설이 아니라 공지 형식으로라도 따로 안부를 전할까도 싶었으나 언제까지다, 하고 기한이 있는 일이 아니고 작업을 마무리 해야 끝나는 일이어서 몇 일에 오겠습니다, 하고 확신할 수 없었기에 소식을 전해드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싱어 외에도 제 자신과 연초에 약속했던 단편들이 네 편이나 밀려있었기에 마음이 굉장히 조급했고, 또 싱어의 경우는 연재물인만큼 기다려주시는 분들께 죄송해서 일을 하면서 짬을 내어 글을 써보려고도 했었으나, 잠까지 반납해가며 작업해야 하는 상황인지라 이 조차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싱어 20편은 월요일에 작성을 마쳤는데, 오랜 만에 글을 써서 그런지 퇴고 과정이 길어졌습니다. 수정을 반복하다 보니 글에 대한 확신도 떨어졌구요.
너무 오랜 기간 글을 연재하지 않아 제 글이 잊혀지진 않았을까, 하는 걱정도 사실은 있었습니다.
이래저래 말이 길어졌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연재가 지연된 것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래도 이제는 전보다 시간이 나는 바, 밀린 단편 마무리와 싱어 연재에 보다 노력하겠습니다.
날이 춥습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메리 크리스마스 이브입니다.
* 댓글 감사합니다.
주황색행복님, 선혜지인님, 有珉님, Res님 감사합니다.
* 다음편 예고
21.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ⅱ)
* 단편 홍보
상처 (단편완결방)
Written by. 민셩창조IN백야 (조백)
첫댓글 우와우와ㅠ 드디어 기다리고기다리던 싱어 20편이군요! 정말 잘 봤습니다~ 길이도 길어서 두근두근!! 이번 편은 정혁님과 동완님의 시점이라서 더 좋았어요ㅠ 특히 민우님의 마음을 알게되서 더 좋았구요!< 정말 두근두근두근 거려서 뭐라고 감상을 정리해야할지.. 손이 막 떨릴 정도에요! 아무튼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다음편도 기다릴게요^^
아아..ㅠ드디어 돌아오셨군요ㅠㅠ 정말 싱어 기다리느라 힘들었어요ㅠ 그런데....릭진도 그렇고 민셩도 그렇고....다들 요새 왜이럽니까....진짜 '가슴이 원하는 사랑 머리로 막는거' 딱 읽자마자....민셩이 너무 가여워 지는군요.....서로 사랑하는데..ㅠ 아무튼 수고하셨어요~ 건필하세요^^
조백님ㅠ_ㅠ역시 조백님이세요 정말.....읽는내내 제 가슴이 다 두근두근하네요...ㅠ_ㅠ 정말 늘 감사합니다....허허 다음편도 기다릴게요!! 수고많으셨어요/ㅅ/ 감기조심하시구~~ 기분좋은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어쩌다보니 오늘 처음 싱어 보게됐는데... 20편까지 너무 재밌게 읽었어요. 앞으로도 멋진 글 기대하겠습니다!
아, 드디어 돌아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역시 조백님은 조백님 다운 색을 잘 포현 하시는 듯.... 쿨럭... 이렇게 돌아오신것을 너무나도 감사드립니다. 크리스마스 잘보내시구요~ 다음편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정말 많이 기다렸답니다!!!! 이제야 읽게되네요.... 건필하세요!!
기다렸어요 ㅠㅠ 작가님!! 이번편은 기네요 ㅎㅎ 앞으로도 꼭 건필하시구 언제나 기대하겠습니다!
조백님... 단편하나 읽고 빠져서 단편 다읽고, 홍보방에있는 '싱어'홍보글 읽고, 연재방에서 또 바로 찾아서 처음부터 다 읽었어요^^ 다음편도 기대되네요..^^ 민셩...너무슬퍼요ㅠㅠ 릭진도 빨리 잘됐으면 좋겠구, 완디도 빨리 읽고싶어요^^! 건필하세요~ 다음편기대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