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 2023. 9. 24(주일) - 성령강림절후 열일곱 번째 주일 - (2023년 39주)
제목; “일어나서 함께 가자!”
성경; 아 2:10-14 (p. 961) (롬 8:28, 304<404>, 440<497>, 4)
<예배의 부름>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I.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결실과 성숙의 달 9월마지막 주일을 맞이하며, 우리 주님의 사랑과 은혜, 평화가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어제 23일 추분(秋分)이 지나면서 낮의 길이보다 밤의 길이가 길어지는, 어둠이 지배하는 계절로 접어들었습니다. 이 어둠이 짙어가는 계절에 ‘빛의 자녀’로 세상을 밝히며, 생명의 빛을 발하는 성도님들 다 되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이번 주말에 민족 고유의 명절 추석(秋夕)이 있는데, 고향과 가족을 찾는 분들이 많이 계실텐데, 무엇보다 안전 운행하시고, 건강하고 평안하며 행복한 만남, 은혜가 충만한 대화가 많은 추석 명절 되시길 소망합니다.
9월의 마지막 주일을 보내면서 오늘도 시 한 편 나누면서 말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9월의 기도 / 이응윤
주님!
내게는 변덕스럽고 뜨겁던 계절을
욕심 모르는 하얀 구름, 청잣빛 하늘로
어김없이 그날을 몰아내는 가을처럼
내가 힘쓰고 애쓰며 눈물 흘리는 날
이 못난 내게도 어둠을 몰아내어 주소서
주님!
온 하루 따스한 사랑의 빛살에
어느 듯 황금빛 들녘이며
소슬바람, 쏟아지는 별빛 아래
귀뚜라미, 풀벌레 노래가
행복한 예감을 주는 밤
두 손 들어 주님을 부르는 내게
어김없는 복된 날이 오게 하소서
주님!
산전수전 한날들을 이겨낸 열매가 탐스럽듯
나이 들 때마다 주신 말씀 더 큰 믿음으로
세상 풍조와 악을 이기며
선한 양심, 편한 친구 좋은 이웃 되고
벌레가 사람 모르는 무지함 아닌
믿음의 눈, 천국의 소망으로
탐스러운 하늘나라 알곡이게 하소서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평범한 시어지만 9월의 정취를 잘 보여주는 시(詩)이지요! 특별히 “주님! 산전수전 한날들을 이겨낸 열매가 탐스럽듯...”하는 마지막 싯귀가 참 좋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말씀으로 더 큰 믿음이 되고, 세상 풍조와 악을 이기며, 선한 양심, 편한 친구 좋은 이웃 되고, 믿음의 눈, 천국의 소망으로, 탐스러운 알곡 되어 처ᅟᅩᆫ국 창고에 들여지는 우리 하존 가족들 다 되시길 소망합니다.
II.
오늘 본문 말씀(아 2:10-14)이 속한 아가서는 솔로몬이 청년 시절에 술람미 여인으로 표현되는 한 여인과의 사랑의 이야기를 노래로 표현한 말씀입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의 생애를 초기 중기 말기 3기로 나눕니다. 아가서는 초기 기록, 잠언은 중기 기록, 전도서는 말기 기록으로 봅니다.
◉ 아가서의 정경화 과정 :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 이야기인 아가서는 한마디로 매우 특이한 책입니다. 구약 정경 가운데 포함되어 있으면서 가장 정경적이지 않은 책으로 유명합니다. 헬라어로 된 신구약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벌게이트’(Vulgate)역을 쓴 초대 교회 교부 제롬(Jerome)은 유대의 전통을 따라 30세를 넘어설 때까지는 아가서를 읽지 않도록 제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성적 묘사가 너무나 적나라한 내용과, 무엇보다 에스더서를 제외한 다른 모든 구약의 책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도 유대인들 사이에는 남녀 간의 사랑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기에, 자녀들이 13세가 되어 성인식을 행하기 전까지는 금서로 지정할 정도입니다.
이렇게 아가서가 정경으로 인정받기까지는 오랜 기간 신학적 논의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이유는 아가서는 솔로몬과 술람미의 단순한 사랑 이야기(Love story)라고 보는 입장 때문이었고, 단 한 번만 여호와의 이름을 은유적으로 거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8:6). 그러다가 주후 90년 얌니아 회의(Synod of Jamnia)에서 정경으로 편입됐습니다.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과의 관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의미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 후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해석하면서 아가서의 의미가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정경화 과정에서의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아가서는 1:1에 나오는 대로 “아가” = ‘노래 중의 노래’(The song of songs)라고 하듯이 남녀 간의 사랑 노래를 통해서 하나님과 성도 간의 사랑을 노래한 귀한 사랑의 책입니다..
아가서가 강조하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랑”입니다. 절마다 사랑이 등장합니다. 솔로몬도 술람미도 사랑을 고백하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둘은 “함께”입니다. 2:10,13 6:1, 7:11, 8:6 등에 “함께”가 등장합니다. “함께”란 ‘한데 섞여 어우러지는’것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개체, 개별, 개인, 개교회는 탄력을 받고 있지만 “함께”는 쇠락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교회의 경우 코로나19의 긴 터널을 지나면서 교인 간의 소통이나 세대 간의 교통이 막혀가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세대 통합이 회자 되고 있습니다.
교회와 목회도 계층과 개체를 뛰어넘어 세대 통합 목회로의 장을 마련해야 되는 절박한 상황을 맞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함께”를 재조명하고 재해석하고 재점검하고 재설정해야 하는 자리에 이르게 됐습니다.
1. “나와 너, 우리의 함께” 입니다.
오늘 본문 10절과 13절에서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청춘 남녀가 겨울과 비를 피하여 함께 사랑의 길로 가자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외톨이 아담을 위해 하와를 지으시고 “둘이 하나, 둘이 함께 하라”고 하셨습니다. “함께”를 시샘한 사탄이 뱀을 동원해 둘을 갈라놓았습니다. 최초의 분열, 균열이었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고 극찬했던 여인에게,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자신의 잘못을 전가시키는 핑계거리로 전락시켜버립니다. 인간의 죄악은 하나님과의 균열만이 아니라 가장 사랑하는 아내, 이웃과의 균열을 가져옵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그 이후 대를 이어 가족 간의 불화와 단절을 가져오고, 민족을 나누고 집단을 나누고 국가를 나눴습니다. 이스라엘 남북 왕조도 그래서 분열됐습니다. 수많은 예언자들을 통해 ‘둘이 하나 되라’고 목소리 높여 외쳤지만 성사되지 못한 채 멸망했습니다(겔 37:17, “그 막대기들을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둘이 하나’ 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우리와 다른 우리가 함께 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특히 한국인은 하나 되고 함께하는데 약합니다. 누군가 ‘개인은 강하고, 둘은 약하고, 셋은 갈라지고, 넷은 싸운다’고 했듯이, 교단, 교파가 수십 개로 갈라지고, 연합 단체가 갈라지고, 교회가 시끄럽고, 정치가 표류하고, 세계 유일의 분단 국가로 남아 있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저는 결혼식을 주례할 때마다 결혼식 전에 부부와 가능하면 부모님 함께 오라고 해서 식전 오리엔테이션을 합니다. 그때마다 “결혼식 준비보다 결혼을 준비하라”고 당부합니다. 그리고 “부부 되는 훈련, 부모 되는 훈련을 먼저 하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더하여 요즘은 단단한 검정색 크리스탈로 패를 만들어 주지만, 이전에는 체리 원목으로 만든 틀에 파릇한 옥돌에 글자를 새겨서 결혼기념패를 만들어주면서(☞ 사진 보며),‘돌에 새긴 것은 깨어지지 않는 한 영원하므로 천국 입구까지 함께 하며 살아가라’고 권면합니다. “둘이 하나, 둘이 함께”의 출발점은 부부입니다. 그리고 그 훈련소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 교회 상황은 “둘이 하나, 둘이 함께”를 만드는 공방이 아닙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다는 아니지만 ‘갈등을 만들고, 대립각을 세우고, 걸핏하면 갈라서는 현장’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최초의 기관인 가정을 창조해 주시고, 이 가정이 본문에서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의 결실이 “일어나서 함께 가자”로 완성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고, 갈등과 분열이 아니라, 둘이 하나 되어 함께 걸어가는 통합의 부부, 가정, 교회, 교단, 대한민국을 만들어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1-1 둘이 하나가 된 우리가 함께 가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분열된 가정과 교회의 통합, 세대 통합 목회의 가장 큰 과제는 어떻게 이런 갈등과 분열의 문제들을 풀 것인가, 어떤 해법을 제시해야 하는가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 11-13절을 보면 세(3) 시제가 등장합니다.
* 과거(11) - 겨울도 지났다. 비도 그쳤다.
* 현재(12-13) - 꽃이 피었다. 새가 노래한다. 비둘기 소리가 들린다.
무화과나무에 푸른 열매가 맺혔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한다.
* 미래(13) - 나의 사랑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1) 우리가 함께 갈 곳은 “겨울이 지나가고 비가 그친 곳”입니다(11).
개역한글 번역본은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11)고 번역하지만, 히브리어 원문에는 ‘키 힌네’(כי־הנה)라는 접속사와 감탄사로 시작합니다. ‘키’는 ‘왜냐하면’으로 번역되는 접속사로, 이유의 접속사인 동시에 강조의 뜻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힌네’는 ‘보라’(See!, NIV)로 번역되는 감탄의 뜻을 지닌 불변사로, “반드시(정녕)”(출 3:12), “진실로”(수 2:24)란 강조의 뜻을 지닌 단어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즉 솔로몬은 이제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친 좋은 계절이 왔음을 강조하기 위해 ‘키 힌네’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겨울이 지나면 봄비가 내립니다. 얼어붙은 땅을 녹이는 비입니다. 더럽혀진 땅을 씻어 내는 비입니다. 말라붙은 땅을 적시는 비입니다. 이 비를 맞으면 말랐던 초목에 생기가 돋습니다. 비를 한번 맞을 때마다 싹이 나고 잎이 자랍니다. 더구나 비가 그친 뒤의 산천초목(山川草木)을 바라보면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생기를 머금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메마른 심령에도 성령의 단비가 내려야 합니다(겔 34:26-27).
“내가 그들에게 내 산 사방에 복을 내리며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 그리한즉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내리니 그들이 그 땅에서 평안할지라”(겔 34:26-2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솔로몬은이제 추운 겨울도 지났고, 봄비도 그쳐서 만물이 생명을 노래하는 좋은 계절이 왔으니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요청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의의 태양이신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면 영혼의 겨울이 찾아옵니다. 그러면 모두가 얼어붙어 있습니다. 생명이 없습니다. 사랑도 없고, 소망도 없습니다. 기쁨도 없습니다. 감사도 없습니다. 찬송도 없습니다. 있다면 불평, 불만, 원망, 시비, 비관, 절망, 시기, 좌절, 이런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쓸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적막하기 짝이 없습니다.
지금 이 시간 의의 태양이신 주님을 내 마음 속에 모시고, 우리 각 사람의 심령 위에 봄비 같은 성령이 임하므로 얼어붙은 우리의 심령이 녹아져서 주 안에서 새 생명이 약동하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결실의 계절 가을을 맞이하면서 성령의 충만을 받아 풍성한 열매를 맺고 거두어 드리는 귀한 성도님들 다 되시길 기원합니다.
(2) 우리가 함께 갈 곳은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하고, 푸른 열매가 맺고, 꽃 향기가 진동하는 곳”입니다(12-13a).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겨울이 지났습니다. 땅을 적시는 봄비도 그쳤습니다. 그리고 난 후의 대지를 상상해 보십시오. 얼어붙어 죽음의 땅과 나무에서 꽃이 피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꽃이 없는 세상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죄와 허물로 인하여 죽었던 우리의 심령에 은혜의 꽃이 피어야 합니다. 이 마음의 동산에 사랑의 꽃, 기쁨의 꽃, 화평의 꽃, 소망의 꽃, 하존(비전)의 꽃, 믿음의 꽃, 겸손의 꽃, 감사의 꽃, 찬송의 꽃, 봉사의 꽃이 만발해야 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겨울에는 꽃이 피지 못합니다. 추운 데서는, 햇빛이 없는 데서는 꽃이 필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도 햇빛 같은 주님을 가까이해야 꽃이 필 수 있습니다.
비도 오고 아름다운 꽃도 피었으나 새의 노랫소리가 없으면 봄 동산은 오히려 쓸쓸합니다. 비가 그친 맑고 깨끗한 동산, 꽃피는 아름다운 언덕, 새가 노래하는 나뭇가지들, 이는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우리 마음의 동산에도 이와 같은 아름다운 노래가 있어야 합니다. 찬송은 내 신앙이며, 내 기도이며, 내 전도이며, 내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엡 5:18-19).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하는 봄날은 모든 식물과 유실수들에게 푸른 열매를 맺게 하고 꽃을 피워 향기를 발하게 만듭니다.
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꽃을 좋아하십니까? 그 아름다운 모양 때문입니까? 찬란한 색 때문입니까? 그러나 무엇보다도 꽃은 향기입니다.
지혜로운 솔로몬 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는 두 개의 화분을 솔로몬 왕에게 가져와서 어느 것이 생화이고 어느 것이 조화인지를 분별해 보라고 했습니다. 솔로몬 왕은 한참 생각하다가 화분들을 창가에 갖다 놓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얼마 후, 한 화분에 나비와 벌이 날아와 앉는 것을 보고 솔로몬 왕은 생화를 분별해 냈다고 합니다. 생화는 생명이 있기 때문에 향기가 있지만, 조화는 아무리 아름답게 만들었다 할지라도 향기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향기니 …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고후 2:15,16)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마치 향기를 내뿜는 인격자와 마찬가지이고,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몸에서 풍기는 생명의 향기가 있어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향기”는 밖으로부터 뿌려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격에서 나오는 향기를 말합니다. 장미꽃이 아름다운 것은 꽃보다 향기가 더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생명의 향기를 발하는 성도가 교회 안에 많으면 교회가 아름답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바라보는 생활입니다. 여러분은 매일, 매 순간, 예수님을 바라보십니까? 이 험한 세상에 살면서도 예수님을 바라보면 우리 마음은 따뜻한 봄날 같아서 우리 삶 속에 아름다운 꽃이 피게 되는 것입니다. 겨울이 지났습니다. 우리 각 사람의 마음의 동산에 아름다운 꽃이 피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가정에 사랑과 행복의 꽃이 피기를 바랍니다.
(3) 결(結): 일어나 함께 손잡고 미래로 가야 합니다.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치고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하며 푸른 열매가 익고 꽃 향기가 진동한다고 할지라도 그곳으로 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우리가 갈등과 분열을 가져오는 모든 내용과 상황들을 극복하고 함께 가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은 함께 가기 어려운 관계였습니다. ‘왕과 무명 여인, 석학과 시골 여자, 명문 왕가와 무명 농부, 남자와 여자...’ 그런데 솔로몬은 모든 계층과 장애를 무시한 채 “함께 가자”고 합니다. 그래야 함께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력서 검토하고, 경력 검토하고, 가문 조사하고, 건강진단서 제출하고, 추천서 접수하고, 가족 사진 참조하고... 이러면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 왕을 만낮지 못합니다. 가문도 맞지 않고 인물도 맞지 않습니다. 왕의 여인 되기엔 전혀 부적합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만났습니다. 그리고 함께 걸아갔습니다.
이건 ‘내 이야기이고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무슨 재주로 그리스도를 만납니까? 무슨 자격으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됩니까? 무슨 자격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 되고 제자가 됩니까? 그 답은 “내 사랑하는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에서 찾아야 합니다. 절대로 만날 수 없는 조건의 두 남녀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진한 사랑 노래가 메아리칩니다. 사랑의 띠로 묶으면 함께 갈 수 있고 조건의 띠로 묶으면 오래 멀리 못 갑니다.
“우리는 사랑의 띠로”라는 복음성가를 잘 압니다. “우리는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널리 전하세, 모두 찬양-하며 주의 사랑을 전하세, 모두 함께 예수님의 사랑을 세상에 널리 알리세, 우리는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널리 전하세” (☞ 가사 보며),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합니다.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기억하고, 나와 이웃, 우리가 하나님의 가이없는 사랑, 예수님의 목숨을 내어주신 사랑으로 하나 되어, 모든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고, 미래를 향해, 천국을 향해 힘차게 걸어가며, 내가 알곡 되어 천국 창고에 들어가고, 풍성한 열매를 맺고 수확하여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풍성하고 복된 가을 되시길 기원합니다.
2. “주님과 함께”입니다.
교회론적 관점으로 아가서를 보는 사람들은, 솔로몬은 그리스도의 그림자로 술람미는 교회의 그림자로 봅니다.
영상 하나를 보겠습니다. 회전 그네 영상입니다 (☞ 회전 그네 동영상 보며) . 원운동에서 원의 중심이 되는 힘을 구심력이라고 합니다. 거기 반해 흩어지는 힘을 원심력이라고 합니다. 회전 그네의 경우
* 구심력 중심으로 돕니다.
* 그네는 원을 그리고 같은 방향으로 돕니다.
* 수 많은 사람들, 남녀, 노소, 인종, 직업, 가리지 않고 그네에 탑니다.
* 소리 지르고 깔깔대고 즐기며 정한 시간 동안 회전합니다.
* 그네가 멈추면 다 각각 다른 목적지로 갑니다.
회전 그네의 중심은 구심력입니다. 인생의 중심, 교회의 중심, 목회의 중심, 세대 극복의 중심 구심력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심력이 예수 그리스도라면, 원심력은 교회이고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구심력을 제쳐두고 다른 것 강조하면 회전 그네가 탈선하고 사고 뭉치가 되는 것처럼, 교회도 목회도 구심력 잃어버리면 기업체가 되거나 시장이 될 순 있겠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구심력 되는 공동체가 되긴 어렵습니다. 구심력을 떠나면 ‘예수님 없는 성도, 예수님 없는 교회, 예수님 없는 목회, 예수님 없는 신학’이 되고 맙니다.
오늘 본문 14절에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라고 말합니다.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성도는 주님의 소리를 듣고 주님께로 나오면 향기를 발하며 생명을 노래하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전 그네에 탄 사람들이 밖으로 떨어지고 날아가지 않는 이유는 안으로 당기는 구심력이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나’만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갈등과 분열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는 방법을 구심역에서 찾아야 합니다. 분열로 치닫는 부부, 가정, 교회, 교단, 사회, 그리고 세대를 통합하는 구심력을 바로 찾아야 하며. 그 구심력은 인류 유일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특별히 갈등과 분열이 상승하고 있는 교회와 교회 내 청소년들과 MZ세대, 노년 세대의 갈등을 극복하고 통합을 이루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 구심력을 통해 성취할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도 세 시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 - 고난 받은 교회였습니다. 현재 - 풍요를 만끽 하고 있습니다. · 미래 - 도전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세속 문화, 반기독교 정서, 이단, 과학 문명, 신학의 도전, 세대 통합 과제 등 도전이 산더미 같습니다. 해법은 함께 힘을 모으고 합하는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신앙, 삶, 교회, 목회, 신학의 구심점이 돼야 합니다. “함께!” 이것은 미래 완료형입니다.
이사야 11:6-8을 보면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주경학자 델리 취는 “시간과 영원의 경계선에서 성취될 예언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메시아의 왕국에서 모든 피조물의 “함께”가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이 아무리 변하고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절대 변하지 않는 불변의 진리가 있으니, “예수님 만이 인류 유일의 구원자와 생명의 주인”이라는 명제입니다. 예수님만이 원심력에 따라 밖으로 떨어져 나가려고 하는 교회와 교인들을 끌어당기고 함께 하는 공동체를 이뤄가는 확고한 구심력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예수님(하나님)이 주인 되는 성도, 가정, 교회를 이뤄가는데 집중하는 하존 가족들 다 되시길 기원합니다.
III.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영상 하나 보겠습니다. ☞ “삼성애견학교” 동영상
참으로 큰 감동이 밀려오지요.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안내견을 양육하는 삼성애견학교 설립 30주년을 축하합니다.
“삼성이 처음으로 개를 기른다고 알려졌을 때 많은 이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비록 시작은 작고 보잘것없지만 이런 노력이 우리 사회 전체로 퍼져나감으로써 우리 사회의 의식이 높아질 수 있도록 해 보자는 것이다.” “(인식과 관습을 바꾸는) 문화적 업그레이드야말로 사회 복지의 핵심이고, 그것이 기업이 사회에 되돌려줄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재투자이다.” “사회 복지를 완성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며 문화적 마인드이며. 장애인 복지 재단이 많이 설립돼 편의를 도모한다고 해도 정작 장애인이 거리에 나섰을 때 그들을 대하는 일반인의 눈이 차갑다면 그런 사회를 두고 복지 사회라고 부를 수 없다.”라고 강조했던 故 이건희 삼성 회장의 인식과 말이 결실을 거둔 것입니다.
맹인은 항상 누군가 함께 해주어야 어떤 목적지를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을 때 맹인들의 길잡이로 맹도견을 양육했던 삼성 故 이건희 회장님의 혜안과 나눔에 다시 한번 머리가 수그러집니다. 그리고 오늘 설교 주제와 같은 “함께”라는 말이 정말 어울리는 애견학교와 맹도견, 이 회장님의 선견지명이 큰 감동과 교훈을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단어가 ‘갈등과 분열’입니다. 그런데 이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겠다고 하면서 더욱 갈등하고 분열하는 것이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입니다. 일치와 화해의 공동체가 되어야 할 교회 역시 통합이 아니라 분열을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 4:1-6)
갈등과 분열을 시대를 살아가는 교회와 성도들은 오늘 본문에서 신분과 지위 등 모든 면에서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이 “내 사랑하는 자여 일어나서 함께 가자”는 사랑의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모든 것을 극복하고 사랑을 완성해 나가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한 하나님, 한 예수님, 한 성령님’을 구심력으로 하여 밖으로 향하는 원심력을 이
첫댓글
2023년 9월 24일(주일) 주일 2부예배 facebook 실시간 송출한 동영상 url 주소 입니다.
https://www.facebook.com/hongjoon.kang/videos/1509717429767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