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본문 : 골로새서 2장 1-7절
『오늘은 둘째 처형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들 부부가 며칠 전, 미국에 있는 큰 아들이 초청하여 미국으로 여행을 갔습니다. 남들은 ‘미국여행을 가니, 얼마나 좋을까?’ 부러워하는데, 실은 이들 부부에게 남들이 알지 못하는 고민이 있습니다. 사실 사업에 망한 둘째 아들부부를 데리고 삽니다. 사업에 망해 잔뜩 빚을 진 아들을 위해, 있던 집을 팔아 아들의 빚을 갚아주고, 아들을 집으로 들어오라 한 것입니다. 아들만 들어옵니까? 며느리에, 손자 손녀까지 들어왔습니다. 솔직히 아들내외와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생활비가 많이 듭니다. 그런데 아들의 빚을 갚아주었는데도-, 또 아들내외를 데리고 사는데도-, 늘 아들. 며느리를 눈치를 봅니다. 자기 집인데도 마음 놓고 살지를 못합니다. 또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불편합니다. 그런 둘째에게 쉼을 주기 위해 큰 아들네로 갔던 것입니다. 문제는 미국에 도착하자, 처형의 온 몸에 심한 피부병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사진을 보내 왔는데, 얼굴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부풀고, 열꽃이 피었습니다. 이렇게 온 몸에 피부병이 번지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손을 대니, 더 심해졌습니다. 미국의 병원비는 비싸기로 유명합니다. 더구나 한국사람이라 의료보험도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아들내외가 알까 숨기다가, 더 화근이 되었습니다. 견딜 수 없어 병원에 갔더니, ‘강아지털 알레르기’였습니다. 손녀가 강아지를 키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안다면, 빨리 강아지를 격리시켜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도, 환경이 바꾸지 않으니까, 여전히 피부병이 낫질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강아지를 치우라”고 말을 못합니다. 이들 부부가 갈등을 합니다. 당장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어도, 시부모가 없어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둘째 며느리가 걸리고, 그냥 있자니 큰 아들 손녀들이 걸리니,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해 끌탕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왜 자식들에게 할 말을 못하느냐?”고 하면, 이래 말을 합니다. “그게 부모의 마음인 걸 어떻게 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평생 벌은 재산도 아낌없이 아들에게 내어주는 마음입니다. 자신이 불편해도 자식만 좋다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는 것이 부모입니다.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와도, 참고 또 참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녀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사랑을 가진 목회자가 오늘 본문에도 나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쓴 편지의 일부입니다. 당시 골로새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는 ‘에바브라’라는 성도가 은혜를 받고 세운 교회였습니다. 교회 하나 세우기도 힘든데, 평신도가 두 개를 세웠으니 얼마나 대단합니까? 놀라운 것은 이 두 교회가 목회자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정말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전도하여 교회가 날로 부흥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사랑스럽겠습니까? 그런 성도들에게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방법’을 편지로 써 보내었고, 저들은 그 편지대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교회에 이단이 들어오는 바람에 혼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사도 바울이 1절에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하면서 성도들이 믿음으로 승리하기를 바라는 목회자의 마음으로,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마음으로 쓴 편지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알기를 원하실까요? 오늘 말씀을 잘 들으셔서 목회자의 마음을,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당시 신앙생활을 잘하던 성도들이 믿음이 흔들리거나 교회를 떠나는 것을 보는 바울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이는 바울뿐만 아니라, 모든 목회자의 공통된 마음일 것입니다. 떠나는 영혼을 생각한다면, 정말 심장이 터질 것 같고, 손발이 떨어져나가는 아픔을 느낄 것입니다. 그래서 1절로 말을 합니다.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얼마나 힘쓰는지를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여기서 바울이 ‘너희가 알기를 원한다’고 했는데, 무엇을 알기를 원했을까요? 물론 바울이 성도들을 위해 애쓰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저들이 알기를 원했던 것은 2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이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비밀’이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이유’를 말합니다. 그 하나님의 비밀을 요한복음 3장 16절과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자 여러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이유가 무엇이라고요? 그래요. 우리를 구원하려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 사실을 정확하게 알아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내가 너희들에게 어떤 말을 하였는지?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어떻게 가르쳤는지?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왜냐? 사도 바울은 이미 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해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1장 15-18절입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하심이요,” 말씀하고 있습니다. 설명을 안 해도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씀한 것입니다. 이것만 제대로 안다면-,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에 대해 정확하게 안다면-, 넘어질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실족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사람을 보기 때문입니다. 요즘 신천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넘어갑니까? 하나님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는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어떻게 고백을 합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이신 줄 믿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 줄 믿습니다. 이만희가 하나님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4절로 말합니다.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확실하게 알고 있으면, 어떤 시험, 어떤 유혹이 온다고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은 예수님에 대해 얼마나 아십니까? 『예를 들어, ‘너훈아’라는 이름으로 나훈아 노래를 부르는 김갑순씨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가수로 데뷔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형편이 어려워 막노동도 하고, 노숙도 하며 살다가, 우연한 기회로 나훈아 모창을 한 것이 사람들 눈에 띠게 되어 그때부터 ‘너훈아’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이름으로 자기 노래할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남의 노래를 흉내 내서 부르자, 열광했습니다. 그때부터 노래를 잘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훈아처럼 노래할 것인가?’가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나훈아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말투도 바꾸고, 모습도 바꾸고, 제스처와 취미까지도 따라 하려고 애썼습니다. 정말 나훈아와 똑같았습니다. 그 결과,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이 나훈아의 노래를 모창하듯, 우리도 예수님처럼 닮으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은혜만 받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주님처럼 살려고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도 예수님에 대해 연구해야 합니다. 어떻게 설교 한 번 듣고 알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을 읽는 것이고, 성경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사셨는지? 어떤 말을 하셨는지?’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그 예수님이 나와 어떤 관계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시라고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할렐루야!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믿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믿어야 할 진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그 분을 믿어야만,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하여 예수님에 대해 확실하게 알아서, 결코 흔들리지 않는 신앙생활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불평하지 말고, 성도들끼리 화목하게 신앙생활 잘 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3개월마다 성찬식을 합니다. 이와 같이 미국의 어떤 교회도 3개월마다 성찬식을 하는데, 특이한 것은 세족식도 같이 한다는 것입니다. 성찬식이 끝나면, 목사님이 성도들의 발을 씻어줍니다. 그날도 세족식을 하면서 먼저 장로님의 발을 씻는데, 이 장로님이 보니, 목사님께서 자기의 왼쪽 발을 먼저 씻는 것입니다. 장로님이 조용히 말을 하였습니다. “목사님, 가급적이면 오른발을 먼저 씻어주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목사님이 “성경에 오른 발을 먼저 씻으라는 말씀이 없습니다.”하고는 왼발을 먼저 씻어주셨습니다. 장로님은 기분이 언짢았지만, 다음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세족식 때도 왼발을 먼저 씻어주는 것입니다. 화가 난 장로님이 교인을 선동하여 교회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교회를 개척하였는데, 교회의 이름을 ‘오른발 교회’라고 지었답니다.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왼발을 먼저 씻으면 어떻고, 오른발을 씻으면 어떻습니까? 왜 그런 것 때문에 불평을 하고, 왜 그런 것 때문에 교회가 나눠져야 하느냐? 이것입니다. 당시 골로새 교회가 그랬습니다. 교회에 이단이 들어와 이상한 소리를 하는 바람에 성도들이 흔들렸습니다. 한쪽에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고 하고, 다른 한 쪽에선 ‘우리를 이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육신을 아무렇게 살아도 된다’는 사람으로 나눠지게 되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을 “믿음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다”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무슨 말이냐? 천국에 사려면 선한 일을 많이 해야 하지 않느냐?” 하며 교회가 시끄러워졌습니다. 그런 저들에게 사도 바울이 2절로 말을 합니다.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보아야 할 것이 ‘연합하여’라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어로 ‘쉼비바조’라고 하는데, ‘한 동일체로 서로 밀착하여 융합하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서, ‘교회 안에서 성도들끼리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앞에서 말씀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비밀’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이유를 안다면-,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고, 서로 위로하고 위로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 골로새서 3장 13-14절로 이런 말을 전하는 것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람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자 여러분! 누구에게 불만이 있으면, 어떻게 하라고요? 불평하라고요? 오른발 교회 세우라고요? 아닙니다. 서로 용납하라고 하셨습니다. 피차 용서하라 했습니다. 여기서 ‘용납하고, 용서하라’는 것과 오늘 본문에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만 보고 따지거나 불평하지 말고, 주님의 사랑으로 용납하고, 하나의 띠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앞에서 예를 들었던 미국의 교회처럼, ‘왜 왼발을 먼저 씻느냐?’ 이런 것 때문에 불평하지 말고, 싸우지 말고, ‘왜 사람이 저러느냐?’ 남의 허물을 보지 말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연합할 수 있도록 화목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슴 아픈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저희 교회를 다니다가 나간 집사님 한 분이 저에게 이런 소리를 하였습니다. “제자교회는 사랑이 없는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이 왔는지? 누가 안 왔는지? 어떤 성도에게 어려움이 있는지? 관심을 안 갖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는 교회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 집사님이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어떡합니까? 그런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 우리들이 해야 할 일 아닐까요?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왔었습니다. 그들에게 “말씀이 너무 좋다. 교회가 너무 좋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정착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저들이 못 들은 것 같지만, 성도들끼리 불평하는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저들이 안 보는 것 같지만, 성도들끼리 화목하지 못한 것을 본 것입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이제 우리교회도 더 이상 불평하는 자가 없어야 할 줄 믿습니다.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도록 사랑이 많은 교회, 은혜가 풍성한 교회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특별히 2절에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의 뜻은 ‘어떤 일이 생길 때마다 무엇이 진리인지 판단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냐? 저들이 이단의 말을 듣고, 십자가를 가슴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머리로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주의 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사람의 말로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보니, 불평이 나오고, 사람을 판단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 신앙은 머리로 하면 큰 일 납니다. 가슴으로 해야 합니다.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을 체험해야 하고,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붙잡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면 미혹에 빠지고, 실족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여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 받은 은혜와 사랑을 가지고, 서로 사랑해야 할 줄 믿습니다. 연약한 자, 부족한 자들이 와서 위안을 받고,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가족 같은 마음이 들게끔, 해야 할 줄 믿습니다. 옆 사람을 보면서 “잘 오셨습니다. 성도님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제가 더 잘 섬기겠습니다.” 할렐루야!
3. ‘성도들이 믿음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최근 유튜브에 올라온 반려견 동영상이 화제입니다. 태국에서 어떤 사람이 반려견 한 마리를 차에 태우고 친척집을 가다가, 그만 실수로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개의 이름은 ‘본본’이라고 하는데, 주인은 이 개를 찾다가 찾지 못해 죽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개가 살아서 4년 동안을 주인과 헤어진 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동네 아주머니가 개를 데려다가 먹이를 주고, 집에서 키우려고 했지만, 계속 길가로 나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데려와도 그곳으로 갑니다. 그러기를 4년이 지났습니다. 이 사연을 어떤 사람이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개 주인이 그것을 본 것입니다. 자기 개라는 것을 알아보고, 찾아왔다는 동영상입니다. 비록 개 이야기지만, 마음이 찡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주인을 잊지 않고, 4년 동안 길에서 기다릴 수 있느냐?’ 것입니다. 댓글에 ‘사람보다 낫다’는 글이 올라온 것을 보았습니다.』 이 동영상을 보면서, ‘우리들의 믿음도 이렇게 한결 같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그랬습니다. 목사님이 없는 교회입니다. 가끔 바울 목사님이 편지를 보내었지만, 얼굴도 보지 못한 성도들도 많았습니다. 그런 교회에 이단이 들어와 들쑤시기는 바람에, 교회가 시끄러웠고, 이곳저곳에서 흔들이는 성도들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전혀 요동하지 않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볼 때, 얼마나 대견하고 감사할까요? 그래서 5절로 말합니다. “이는 내가 육신으로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가 질서 있게 행함과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이 굳건한 것을 기쁘게 봄이라.” 하였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말입니다. “비록 내가 너희를 떠나 있지만, 너희가 선한 삶을 사는 것을 볼 때에, 그리고 흔들리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생활을 하는 것을 볼 때에 내 마음이 너무 기쁘고 행복하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목회자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마음인 줄 믿습니다. 신앙생활 잘하고 있는 성도를 볼 때-, 어떤 어려움이 있을 지라도 흔들이지 않는 굳센 믿음의 사람들을 볼 때에-,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분명 저들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는데도, 흔들리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질서 있게 행함’ 때문입니다. 이 말은 ‘교회의 질서에 순종했다’는 말입니다. 교회에 질서가 무너질 때, 교회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신천지가 개척교회에 와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도들의 환심을 산 후에 목회자를 불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목회자를 쫓아낸 후에 신천지 목사를 세우고, 결국 그 교회는 신천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려면, 교회 질서가 바로 서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이 굳건한 것’입니다. 이 말은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림 없이 굳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이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교회를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목사를 믿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를 믿고, 목사를 믿고, 성도들을 믿다가 그들에게 실망하니, 실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너희 믿음을 굳건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너희의 모습을 볼 때에 내 마음이 기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어야 하고, 예수 안에서 믿음이 굳건히 세워져야 할 줄 믿습니다. 교회 질서에 순종해야 하고, 여러분의 자리를 지켜야 할 줄 믿습니다. 『예를 들어, 학생들이 학교에 가면 자기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는 누가 앉지 못합니다. 당사자만이 앉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가 비어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의자의 주인이 오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물론 많은 사정이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빈 의자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말로 결석이요, 자기 본분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학생은 학교에 있을 때 자기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군인은 군대에 있을 때 사명을 다하는 것이고, 직장인은 직장에서 일할 때가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학생이 학교에 있지 않다면 문제입니다. 군인이 군대에 있지 않으면 탈영병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생들도 학교를 빠지면 결석인데, 하물며 하나님의 성전에 그것도 주일날 결석을 하면 되겠습니까? 예배의 자리에, 기도의 자리, 봉사의 자리에 여러분이 없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천국에 가려는데, 천국 입국장에 여러분의 명단이 없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믿음으로 굳건히 서야 할 줄 믿습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이 지켜야 할 믿음의 자리를 잘 지키시길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이 앉은 그 자리를 비게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천국 가는 그날까지 믿음 변치 마시고, 날마다 믿음이 자라고,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어쩌면 오늘 말씀이 좀 어려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만 아시면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자녀들이 수시로 잔소리 같은 말을 합니다. 왜일까요? 그렇게 해야만, 잘 살 수가 있고,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마찬가지이고, 저 역시 같은 마음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위로를 받고, 또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려면,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 불평 없이 성도들끼리 화목하게 될 때에,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믿음의 자리를 지키고, 굳건하게 믿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그래야만 이 악한 세상에서 넘어지지 않고,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길만이 이 땅에서 믿음을 지키는 길이요, 천국에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여 오늘 여러분 모두, 목회자가 어떤 것을 알기를 원하는지? 또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원하시는지 잘 알아서, 그렇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