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한 기사를 인용하겠습니다.
남송의 영웅이지만,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한 중국인의 영웅 악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마이뉴스 김종성 기자] 한국인들이 이순신을 구국의 성웅으로 칭송하듯이, 현대 중국인들은 악비(岳飛, 1103~1141)라는 인물을 구국의 영웅으로 떠받들었다. 그리고 한국인들이 원균을 이순신의 정적이라면서 혐오했듯이, 현대 중국인들은 진회(秦檜)라는 인물을 동일한 이유에서 혐오했다.
그런데 여기서 '떠받들었다'나 '혐오했다'와 같은 과거형을 쓴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최근 중국에서 악비와 진회에 대한 평가가 급격히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악비라는 인물은 어떤 이유에서 중국의 민족영웅이 되었으며, 최근 그가 갑작스레 홀대를 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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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비 좌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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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노시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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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허난성 탕인 지역 출신인 악비는 동아시아 정세가 고려-북송-요나라 3국 정립시기에서 고려-남송-
금나라 3국 정립시기로 교체되던 때에 활약했던 인물이다. 이 두 시기에 고려는 그대로 국가를 유지했지만, 만주의 주인이 요나라에서 금나라로 바뀌자 그 여파로 한족정권도 북송(北宋)에서 남송(南宋)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악비는 북송이 남송으로 교체되던 때의 인물이 두 시기는 동아시아 역사에서 보기 드문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중원-만주-한반도가 제각기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세력균형이 존재했던 것이다. <
삼국지>에 등장하는 표현인 3자 정립(鼎立) 시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 전기에 한반도가 강한 독자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국제적 세력균형에 기인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동아시아의 세력균형은
칭기즈칸의 출현 이전까지는 계속 존속했다.
고려-북송-요나라가 동아시아를 3분(分)하던 시기에, 만주에서는 여진족(흑수말갈족)이 서서히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본래 여진족은 고려의 직접 지배 혹은 책봉을 받던 종족이었지만, 이 시기에 종족 통일을 성취하면서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1115년에 여진족은 금나라를 건국했다. 그 이전에는 여진족이 고려의 책봉을 받았지만, 금나라 건국 이후에는 거꾸로 고려가 여진족의 책봉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고려를 우방으로 만든 금나라는 1125년에 북송과 연합하여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다음해부터는 북송까지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금나라의 북송 압박 시작이처럼 금나라의 압박이 가중되는 상황 속에서 북송 제9대 군주인 휘종은 아들인 흠종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휘종과 흠종이 금나라의 포로가 됨으로써 북송은 곧 멸망하고 말았다(1127년).
한편, 휘종의 또 다른 아들인 고종이 1127년에 중국 남부지역에 남송을 세웠는데, 이때부터 악비라는 인물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절도사가 된 악비는 구릉지라는 강남지역의 지리적 특성을 활용하여 금나라의 기마군대를 막아냈으며, 1137년 선무사에 임명된 후로는 중원 지역의 상당 부분을 회복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런데 이때부터 중국판 원균이 등장한다. 금나라와의 확전을 반대하는 재상 진회는 "더 이상의 전쟁 수행은 엄청난 대가만 치를 뿐"이라면서 악비에 대한 정치적 압박에 나섰다. 결국 악비는 진회의 '모함'으로 1141년에 투옥되었으며 나중에는 처형까지 당하게 되었다.
진회의 '모함'으로 영웅 악비 처형당시의 국제정세를 고려하면, 더 이상의 확전을 반대하는 진회의 논리가 상대적으로 더 타당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몽골제국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동아시아의 기본 판도가 3자 정립의 세력균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송이 3자의 한 축인 금나라를 멸망시키는 것도 힘들었거니와, 정말로 그렇게 되었더라면 당시의 동아시아 질서는 예측불허의 혼란으로 빠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억울하게' 죽은 악비는 20세기에 들어와서 '부활'하게 되었다. 악비가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되며 대대적인 '숭배의 대상'이 된 것이다. 한국에서
이순신 장군이 추앙을 받는 것처럼 그는 죽은 지 수백 년 만에 중국에서 그 이상의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이민족인 여진족으로부터 중국의 한족을 지켰다는 그의 충성심이 현대 중국인들의 존경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그리고 악비가 영웅시되는 것과 함께, 악비를 '모함'했던 진회는 '간신배' 혹은 '반역자'의 전형으로 비판받게 되었다. 악비가 영웅시되는 상황에서 진회의 위상이 추락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순신과 원균의 관계처럼 말이다.
현대 중국에서 악비는 영웅, 진회는 반역자그런데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국 내에서 최근 들어 악비의 위상이 '원위치'되고 있다. 악비를 영웅시하던 사회 분위기에 중대한 변화가 생기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예전 같으면 이민족에 맞서 한족을 지켜 낸 인물이 중국의 영웅이 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한족=중국이라는 등식이 어느 정도는 성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중국은 한족과 소수민족을 통합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 하고 있다. 중국이 고구려 역사를 자국 역사에 편입하려는 것도 동일한 이유에서 설명되는 것이다.
통합대상에는 조선족뿐만 아니라 여진족의 후예인
만주족도 포함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상황에서는 한족=중국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한족과 만주족(여진족)을 포함한 새로운 통합 국가를 만들려는 판국에 여진족에 대항해 한족을 지킨 악비를 계속 영웅시한다면, 이는 만주족은 물론 다른 소수민족의 '의구심'을 초래할 만한 일일 것이다. 악비가 재평가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만약 악비가 서양국가에 대항하여 중국을 지킨 인물이라면 앞으로도 오랫동안 영웅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중국사회에서 '효용성'이 다 떨어진 인물이 되고 말았다.
국가통합작업으로 악비 숭배 '스톱'
![](http://photo-media.hanmail.net/200605/26/ohmynews/20060526151312.032.1.jp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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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비의 라이벌 진회에 대한 최근 변화를 특집으로 다른 중국 언론. 아래 가운데에 보면, 진회 부부가 꿇어 앉아 있는 기존의 동상이 보이고, 위쪽에 보면 그들 부부가 일어선 최근 동상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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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중국 <국제재선>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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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흥미로운 현상은 악비의 이미지가 추락하는 것과 함께 진회의 이미지가 다시 상승한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간신배' 진회 부부가 땅바닥에 꿇어 앉아 있는 동상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그들 부부가 일어서 있는 동상이 조각되기도 했다. 진회의 위상 변화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최근 중국 내에서 논란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중국 내 분위기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이웃나라 중국이 지금 신속한 국가통합작업을 벌이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날의 영웅이었던 악비가 추락하고 지난날의 간신배였던 진회가 다시 일어서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후략>
서론이 좀 길었습니다
기사 마지막 부분은 기자 주관적 견해가 강하기 떄문에 고의로 삭제했습니다.
'도대체 두 역사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이지?'라고 질문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제목에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악비'라는 인물과 '서해교전'을 연결시켜보고 싶습니다.
두 이야기의 공통점을 먼저 말하자면, '사관의 변화란 무엇인가?'라고 말할수 있겠군요.
서해교전에서 전사한 장병들, 물론 나라를 지키기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민족적 과업인 통일을 완수하면, 이 분들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북한의 선제공격이었다지만, 과연 남한을 100% 피해자 또는 절대선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런지요.
(전사장병을 모욕하기 위함을 아님을 밝힙니다. 해군 지망생으로서, 저도 이분들을 존경합니다.)
이때, 악비의 경우처럼 사관의 충돌이 발생하겠죠.
강정구 교수의 발언도 이런 문제에 해당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제 부족한 의견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사관은 상대적이란 것이 문제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절대적으로 옳은 사관은 없겠죠.
층층이 쌓여져 있는 '하노이의 탑'에서 몇층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얘기가 크게 달라질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해교전을 어떻게 봐야할까요?
'대한민국'의 사관으로 보는 것이 좋을지, '한민족'의 사관으로 보는 것이 좋을지,
여러분의 선택이 현재 중국이 국가통합차원에서 벌이고 있는 악비의 평가 절하에 대해서는 어떤지,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첫댓글 헌규, 수시대박이다.
다른 건 모르겠고.. 인간의 위상이란 게 시대적 효용성에 따라 가라앉고 떠오른다는 게 좀 씁쓸해. 가끔 역사란 무섭다니까;
통일이 되건 되지 않건, 서해교전에 대한 평가는 달라져서도 안되고 달라질수도 없다고 봐요. 한 국가의 군대로써 국가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싸운 행위는 지극히 정당한 것이죠. 그렇지 않으면 군대의 존재 의의는 사라질 뿐이고. 오히려 먼저 시비걸어오고 맨날 시비걸어오는 북한 해군이 문제라면 문제지....
중국의 악비 평가 절하.... 비슷한 예로 명장(明將) 원숭환에 대한 평가 절하도 있죠. 이건 중국의 딜레마예요. 한족의 중국을 지향할 것인지, 다민족국가 중국을 지향할 것인지.... 차라리 중국이 미국같은 이민국가였으면 좀 더 자유로웠을텐데 말이죠. 어쩌면 5천년의 유구한 역사가 오히려 중국이 세계대국이
되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드는군요. -_-;; 뭐, 중국이 어떤 미래를 추구할지는 자신들이 - 정확히는 한족이 - 스스로 선택할 문제니까요. 하지만 한족들의 움직임을 보건대.... 차라리 그냥 악비를 영웅으로 놔두는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_-;;
하지만 저 기사 자체에는 상당히 모순이 많죠. 진회는 원균과 동급이 될 수 없어요. -_-;; 혼자 부산포 칠 수 있다고 떵떵거려놓고는 육군 30만으로 가덕도를 점령해 달라는 양반이 어떻게 더 이상의 전쟁은 국가의 부를 유출시킨다며 주화를 주장한 진회와 동급이 될 수 있는지.... 진회가 불쌍하군요. 쩝.
뭐 O모 언론사 기자가 쓴 글이니 만큼, 의도적으로 이순신 - 그네들이 그렇게 박통에 의해 우상화 되었다며 씹어대는 그 사람 - 을 깎아내리고 원균을 좀 띄워보려는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_-;;
제 생각엔 남북 대립에 의한 희생자라고 봅니다. 애초부터 남북이 대립되지 않았더라면 그런 희생을 없었잖겠습니가?
제 생각은 서해교전은 어디까지나 일방적인 피해라고 봅니다. 북한군이 경고신호를 받고나서도 선제사격을 한 것은 확실한 도발이자 오히려 반민족적 행위로 봐야되지 않을지요?